■농암선생 영정影幀(보물 872호)
1537년 경상감사 집무모습을 대구 동화사 승려 옥준玉峻이 그렸다. 임란 이전 영정으로는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하며, 손을 그린 것이 특징이다. 농암종택에는 이 영정 외에 1872년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가 추천한 소당 이재관(小塘 李在寬)이 그린 별본 영정(경북 유형문화재 63호)이 있고, 그 제작 과정이 적힌 『영정개모일기影幀改摹日記』(보물 1202호)가 있다.
농암의 모습에 대해 연산군은 “검열檢閱은 얼굴이 검붉고 볼에 털이 난 자였다”고 했고, 사관은 “강직하고 공명정대한 공무수행에 모두들 ‘소주도병燒酒陶甁’이라 했으니, 이는 외모는 검으나 심성心性이 냉엄冷嚴하다는 뜻”이라 했다. 1997년, 삼성갤러리의 ‘몽유도원도와 조선전기국보전’에 전시된 바 있다.
■농암선생(聾巖 李賢輔: 1467-1555)
1467년 7월 29일, 경북 안동시 도산면 분천리에서 아버지 이흠李欽 (1440-1537, 인제현감)과 안동권씨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자字는 비중棐仲, 호號는 농암聾巖, 본관은 영천永川이다. 20세 때 홍귀달洪貴達 선생께 수학하고, 1498년 32세에 문과 급제했다. 36세, 새내기 사관史官 시절, 대간臺諫보다 더 가까이서 사초史草를 기록해야 한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인사담당 관리들이 직무를 보는 곳에 사관도 참석해야 한다고 했다. 연산군은 괘씸히 여겼다. 2년 뒤, 사간원정언으로 언관言官이 되어 서연관의 비행을 논하였다가 안동으로 유배되었다. 그리고 곧 압송-장형杖刑-하옥下獄-처형이 이어졌다. 사초가 문제가 되어 발발한 무오사화 4년 뒤의 일이었고, 갑자사화 당년이었다. 연산군의 어처구니없는 실수로 기적적으로 죽음을 모면하니, 친구들은 이런 강직함을 보고 ‘소주도병燒酒陶甁’이라 했다. 사관史官과 언관言官으로서 사지死地를 벗어난 아주 드문 경우이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복직되고, 다음해는 사헌부지평으로 승진 발탁되었다. 다음해 자청하여 영천군수로 나왔다. 선망하는 청요직에 올랐지만 농암의 선택은 지방이었다. 보장된 영달의 길을 포기했다. 그 후 밀양, 충주, 안동, 성주, 대구, 영주, 경주, 경상도관찰사로 이어지는 여덟 고을, 30여년을 근무했다. 전 관료생활을 지방에서 근무한 셈이었다. 가끔 중앙보직을 받았지만 그때마다 나와버렸다. 특이한 관료이력이라 할 수 있다. 30여년 고을살이도 희귀한 일이지만 이런 관리의 청백리 녹선은 더욱 희귀하다. 경직京職을 절대적으로 선호한 당시의 정치풍토로 볼 때, 끊임없는 외직의 자청은 민생에 보다 가깝게 가고자 하는 일관된 신념 때문이었다. 동료들의 신망과 존경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농암의 고을살이는 목민관의 전형이었다. 자신에게 엄격하고 백성에게 관대했으며, 사적인 일이 공적인 일에 절대 개입되지 않도록 했다. 경상도관찰사 시절 친구, 친지의 공관출입금지는 그 대표적인 조치였다. 농민들이 고리대로 인해 토지를 빼았기는 일을 척결하고, 세금에 허덕이는 일이 없도록 했다. 향교를 지어 지방교육을 활성화하고 노인공경에 매우 정성스러웠다. 대구부사 시절 학생교육을 위해 봉급을 털어 도우는가 하면, 안동부사 시절‘안동양로연(花山養老宴)’에는 80세 이상 남여귀천을 함깨 초청했다. 당시 사회가 삼엄한 신분사회였음을 생각할 때 이는 매우 파격적인 일이었다. 여기서 농암은 고을원의 신분으로 색동옷을 입고 춤을 추어 노인들을 즐겁게했다. 농암에게 '경로'는 '박애'와 더불어 지방행정의 중심이며, 전 생애를 관통하는 최고의 가치덕목이었다. 이런 측면은 집안에서도 “자제와 비복들을 편애하지 않았고 혼인도 문벌 집안을 찾지 않았으며, 사람을 대함에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았다”는 퇴계의 행장行狀 기록과도 일치한다. 이런 휴머니즘 가득한 공복윤리가 있었기에 성주에서는 "고을 사람들이 전출의 길을 가로막고", 충주에서는 "떠나는 날 쫓아와 붙잡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길을 메운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 관찰사들의 계속되는 표창상신과 당대에 계층을 초월하고 누렸던 인기는 결코 우연일 수 없다.
농암은 대시인大詩人이며 대효자大孝子였다. 1512년 부모를 위해 '애일당愛日堂'이라는 정자를 짓고, 9노인을 모신 이른바 '애일당구로회愛日堂九老會’를 개최했다. 여기서도 70세 노구의 몸으로 색동옷을 입고 춤을 추어 중국의 전설적인 효자 노래자의 효행을 그대로 실행했다. 이런 모습에 동료,친구들이 대거 축하 시를 보냈고, 선조임금이 농암가문에 ‘적선積善’이란 어필을 내린 계기가 되었다. 지금 종택마루에 선조어필이 판각되어 있고, 선현들의 친필 시 40여편 역시 종택에 보존되는데, 『애일당구경첩愛日堂具慶帖』이 그 책이다. ‘애일당구로회’는 아들 ,손자로 이어졌고, 이후 500여 년을 이어오는 농암가문의 아름다운 전통이 되었다.
1542년, 농암은 정계를 은퇴했다. 종2품 '영감(참판)' 신분으로 물러났다. 인기와 여망으로 보면 '대감(판서)'도 가능하고 '정승(좌,우 영의정)'도 가능했지만 관심이 없었다. 임금, 동료들의 만류도 뿌리쳤다. 도성 경복궁과 한강 제청정에 마련된 전별연은 조선조 유일의 정계은퇴식이었다. 임금은 친히 금서대金犀帶와 금포錦袍를 하사하고, 편안한 귀향이 되도록 호행관리가 인도하라 명령했다. 전 관료들이 참석했고 전별시를 지었다. 이 날 전별연은 궁궐에서 한강까지 동료, 벗들의 전별행차가 이어졌고, 이를 본 도성사람들이 담장처럼 둘러서서“이런 일은 고금에 없는 성사”라는 말이 나오게 했다. 퇴계 이황은 “지금 사람들은 이러한 은퇴가 있는지도 모릅니다”라고 했다. 김중청金中淸은 “신라,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수천년 그 누구도 구런 사람이 없었는데, 오직 우리 농암선생깨서 쇠퇴한 풍속에서 분연히 일어나 용퇴했다. 회재晦齋(李彦迪), 충재冲齋(權橃)께서 전송대열에 서고, 모재慕齋(金安國), 퇴계退溪(李滉)께서 시를 지어 전별했으니, 중국의 소광疏廣, 소수疏受가 떠날 때의 1백 량의 수레가 줄을 이은 영광에 어찌 비유되겠는가. 이는 우리나라 수천 년 역사 이래 없었던 일로, 우리 농암선생이야말로 천백만 명 가운데 단 한 분뿐이다”라고 했다. 『실록』은 이를 ‘염퇴恬退’라 규정했다.
농암은 돌아오는 한강 뱃머리에서 한 수 시조를 읊었다.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본받았다고 하여‘효빈가效顰歌’라했다.
돌아가리라, 돌아가리라 말뿐이오 간 사람 없어
전원이 황폐해지니 아니 가고 어쩔꼬
초당에 청풍명월이 나며 들며 기다리나니
고향으로 돌아온 농암은 귀먹바위 ‘농암聾巖’에 올라 감격적인 시조 한 수를 다시 읊었다. 그 시조가 유명한‘농암가’이다.
농암에 올라보니 노안이 더욱 밝아지는구나
인간사 변한들 산천이야 변할까
바위 앞 저 산, 저 언덕 어제 본 듯 하여라
농암은 은퇴 후 농부로 자임自任하고 일게 서생書生과 다름없는 담백하고 물욕 없는 생활을 하여 유선儒仙으로 추앙받았다. 그리고 천성적인 시인으로, 분강의 강가를 두건을 비스듬히 쓰고 거닐면서 강과 달과 배와 술과 시가 있는 낭만적 풍경을 연출했다. 이 감흥과 미의식이 그대로 문학과 예술이 되었다. 이런 강호생활은 분강, 강각, 애일당을 예방한 동료, 후배들에 의해 영남가단嶺南歌壇이 형성되는 모태가 되었다. 특히 퇴계는 동향의 후배로써 인간적, 문학적으로 남다른 교류를 했으며, '어부가'의 발문에서 “바라보면 그 아름다움은 신선과 같았으니, 아! 선생은 이미 강호의 그 진락眞樂을 얻었다”라고 찬양했다. 관료적문학이 성행할 때, ‘강호지락江湖之樂’과 ‘강호지미江湖之美’라는 새로운 문학세계의 지평을 열며, ‘어부장가’, ‘어부단가’를 비롯한 ‘효빈가’, ‘농암가’, ‘생일가’ 등의 시가작품을 남겨, 한국문학사에 큰 영향을 미쳐 ‘강호문학의 창도자’로 평가받았다. 어부단가 5장 가운데 그 2장은 이러하다.
굽어보면 천심녹수千尋綠水, 돌아보니 만첩청산萬疊靑山,
열 길 티끌세상에 얼마나 가렸는가.
강호江湖에 월백月白하거든 더욱 무심無心하여라.
‘어부가’는 이후 퇴계의 ‘도산12곡’에 영향을 주었고, 이한진李漢鎭의 ‘속어부사’, 이형상 李衡祥의 ‘창보사’ 등에 이어지고, 드디어 윤선도尹善道의 ‘어부사시사’로 이어졌다. 윤선도는 ‘어부사시사’의 서문에서 “어부사를 읊으면 갑자기 강에 바람이 일고 바다에는 비가 와서 사람으로 하여금 표표하여 유세독립의 정서가 일어나게 했다. 이런 까닭으로 농암 선생께서 좋아하셨으며 퇴계 선생께서도 탄상해 마지 않으셨다”고 했다. 안동지역에서는 17세기 김응조金應祖, 18세기 권두경權斗經, 19세기 이휘영李彙寧 등의 문집 기록에 “분강에서 농암의 ‘어부가’를 다 함께 불렀다”고 하여, 학술적 계승이 아닌 현장연출로서 수백 년의 집단적 전승이 있었음을 밝혀놓았다. 그래서 국문학사에 송순宋純-정철鄭澈로 이어지는 ‘호남가단湖南歌壇’과 더불어 쌍벽을 이루었다고 했다.
만년에 기로소耆老所에 입소되는 영예를 얻었으며, 명종으로부터 “경은 진실로 천하대로天下大老요 당세원구當世元龜이다. 염퇴이양恬退頤養이 이미 명철보신明哲保身을 넘었으며 정관선기靜觀先幾 하였노라”라는 최고의 찬사를 받았다. 은퇴 후 거듭되는 상경上京 명령에도 불구하고 올라가지 않으니, 나라에서 1품인 숭정대부崇政大夫의 품계品階를 내려 예우禮遇했다. 그래서 조선전기 보기 드문 ‘재야재상’이 되었고,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이 직책을 띠고 있었다.
1555년 6월 13일, 89세에 몰沒하니 나라에서는 효孝와 절개의 정신을 기려 ‘효절공孝節公'이란 시호를 내렸다. 조선 500년, ‘대로大老’라고 불려 진 인물은 흔하지 않으며, 효절이란 시호 역시 농암이 유일하다. 농암은 전 생애에 걸쳐 명예를 포기하여 더 큰 명예를 얻은 삶을 몸소 보여주어 우리에게 행복한 삶이 어떤 것인지 말해주고 있다. 청백리에 녹선錄選되었고, 분강서원에 재향되었다. 문화관광부의 ‘2001년도 문화인물’로 선정되어 국가적 차원의 추모행사가 있었고, 2007년에는 ‘때때옷의 선비-농암 이현보 특별전’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개최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