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립 잡기노트]오백년 슬립, 때때옷 댄스 노인

 

【서울=뉴시스】신동립의 잡기노트 <318>

500년 전 햇살 따사로운 가을날, 일흔을 바라보는 백발노인이 색동옷을 입고 아흔이 넘은 노인들 앞에서 춤을 췄다. 중국의 전설적인 효자 노래자(老萊子)의 이야기가 아니다. 경북 안동 도산면 분천리 바위 기슭 ‘애일당(愛日堂)’의 풍경이다.

고까옷을 입고 춤을 춘 사람는 강호(江湖) 문학의 창시자인 농암(聾巖) 이현보(1467~1555)다. 1512년 농암은 늙은 부모를 위해 도산면 분강가에 정자를 짓고 ‘애일당’이라 이름 붙였다. ‘하루하루의 날을 아낀다’, 즉 부모가 살아있는 나날들을 아끼련다는 집이다.

부모를 봉양할 ‘날(日)’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절박한 심정을 ‘애일’이라는 단어에 응축했다. 특별한 날이나 명절이면 아우들과 함께 때때옷 춤으로 부모와 마을 노인들을 즐겁게 했다. 가족과 친족에 국한하지 않고 마을공동체, 나아가 모든 이를 대상으로 범인류적 애민사상을 실천했다.

1519년 가을 안동 부사 시절에는 성별과 신분을 불문하고 80세 이상 노인을 모시는 화산(花山) 양로연을 개최했다. 청사 마당과 마루는 노인 수백명으로 가득했다. 당시 농암은 “안동의 옛 풍속이 나이는 숭상하나 관직은 숭상하지 않는다”면서 남녀귀천을 가리지 않고 오로지 연령만을 따져 초대했다. 이곳에서도 때때옷 춤을 췄다. 엄격한 신분사회였던 당대의 고을 원으로서는 파격이었다.

1533년 농암은 애일당에서 아버지를 비롯한 마을 노인 여덟 분을 모시고 또 때때옷 춤을 췄다. 이때 그는 70세에 가까웠고 홍문관 대제학이라는 정2품의 높은 벼슬에 있었다. 아홉 분의 노인이 애일당에 모였다는 뜻에서 ‘애일당 구로회(九老會)’라고 그날의 모임을 명명했다. 농암의 부친 이흠은 94세, 나머지 여덟명을 포함한 전체 연령은 740세였다.


1569년 구로회에는 퇴계(退溪) 이황도 69세의 나이로 참여했다. 그의 다섯째 형 이징(72)도 회원이었다. 1533년 결성된 구로회는 1979년 마지막 모임을 열었다. 농암의 16대 종손 이용구(1908∼1998)가회원이었다. 아버지 이흠 중심의 구로회에는 그가 세상을 뜨자 아들 농암이 회원으로 가입했다. 이후 아들과 손자, 후손들이 회원이 되면서 약 500년 동안 농암 가문의 전통으로 자리 잡아왔다.

18일 오전 10시 한국국학진흥원과 예안향교는 도산면 가송리 농암 종택에 애일당 건립 500주년 기념 학술대회와 기로연(耆老宴)을 마련한다. 농암의 17대 종손 이성원(60)씨가 때때옷을 입고 향연을 펼친다. 안동시군에 거주하는 각계각층 80세 이상 남녀노인 150명을 모신다. 경로효친 문화를 널리 알리고자 아들과 며느리, 손자 등 배행자(輩行者) 150명도 초청했다.

500년 전 농암이 애일당을 세우고 구로회를 만들었을 때 축시를 지어준 이들의 후손도 수소문해 모신다. 농암의 동료와 친구 43명이 시를 보내왔는데, ‘애일당구경첩’(愛日堂具慶帖 보물 1202호)에 친필 시들이 전한다. 십청헌(十淸軒) 김세필, 금계(錦溪) 황준량, 양곡(陽谷) 소세량(蘇世讓), 곤암(困菴) 소세량(蘇世良) 등의 후손들이 전국 각지에서 온다.

500년 전 역사적 현장에서 신구세대가 다시 어우러진다. 33년 전을 마지막으로 중단된 애일당 구로회가 부활한다.

문화부장 reap@news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