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량산을 끼고 도는 낙동강물

풍기 지나 봉화거쳐 청량산을 끼고 돈다.
시루떡 같은 암벽에 넋을 놓는 사이 금방 안동시 도산면이 나온다.
안동을 말하는 사람들은 웬만하면 이중환의<택리지>를 들고 온다.

땅에는 세가지 정도 구분이 가능한데 볼만한 땅, 놀만한 땅, 살만한 땅이 있다는 것이고
살만한 땅(可居)으로는 영남의 도산과 하회가 최고라는 것이다.
이젠 거의 관광지가 되어버려 사람을 당황케 하는 하회는 말고
우리는 지금 도산을 찾아 가는 길이다.

도산에는 물론 퇴계의 서원이 있다.
그러나 서원과 퇴계가 도산의 전부는 아니다.
도산서원 초입엔 흰 모래가 유난히 아름다운 부내라는
강마을이 펼쳐져 있었다.

푸른산을 배경으로 백로가 날아가고 들엔 벼가 도도한 물결(부내는 문전옥답 70만평을 가진 마을이었다)을 이루던 마을초입엔 큰 바위에 엄청나게 커다랗게
농암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알다시피 농암은 조선시대 한글 어부사 14수를 처음 쓴 전원시인이자 청백리인
이현보의 호이고 부내는그의 향리였다.

안동댐이 담수를 시작한 건74년, 분천과 농암은 75년에 수몰되었다.
아니 물 속에 차마 수장시킬 수가 없어 부내의 농암종택과 서원과 딸린 정자와
별당들은 여기 저기 흩어 옮겼다.

농암이라 새긴 바위돌은 뿌리가 깊어 뽑아낼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글자 부분만 잘라내어 옮겨간 애일당의 뜰 아래로 실어 갔다.

부내의 농암후손들은 그렇게 고향을 잃었다.

지금 새로운 분강촌에 살고 있는 이성원씨는 농암의 17대종손이다.
스물몇에 고향을 수몰하고 틈만 나면 안동 인근의 산야를 헤매고 헤집었다.

그러는 중 절로 산과 바위와 흙과 내와 물굽이와 소와 여울과
거기 흐르는 바람과 고요를 볼 줄 아는 사람이 되어 갔다“.

안동댐 건설이 하회마을 일곱여덟 개를 수몰해 버린거지요. 제대로 옮기지 못했어요.
하도 많으니 일일이 문화재 지정을 할 수도 없었고….”산과 강과 들을 헤매고 다닌지
스무해 쯤 돼서 알 수 없는 이 끌림을 느꼈다.

도산서원 너머 퇴계종택이 있는 도계(퇴계의 호는 여기서 왔다)를 지나
그 옛날 골기와 집이 즐비하던 상계와 하계를 지나
시인 이육사의 마을인 아름다운 원촌을 지나
길이 끊어지는 무인 지경의 협곡안으로, 청량산의 발밑까지 썩 더 들어 갔다.

눈앞에 믿을 수 없는 풍경이 나타 났다.

갑자기 개울가의 지경이 넓어 졌다. 배산임수, 냇가의 자갈과 흰 모래, 푸른솔과
깎아 지른 단애,
물에 발을 담근 넙적한 바위까지. 잃어버린 부내와 똑같은 땅이었다.
뛰는 가슴을 억누른 채 경주 양동 회재 이언적의 후손인 부인 이원정씨를 데리고 다시왔다

“여기다 우리집을 지을거다. 잃어버린 부내를 이리로 옮길거다”
의사봉을 두드리 듯 통고 했다.

도산면 가송리 올미재, 옛 분천으로 부터 불과 7 킬로 떨어진 청량산초입이었다.

이 후 땅을 조금씩 사들였다. 주변 논밭 1만5천평에 농가 서너 채와 뒷산 5만 평도
기어이 사들였다. 23년간 몸 담았던 직장도 사직했다.
모든걸 다접고 그는 농암종택 재건에 올인한다.
일단 보물로 지정된 긍구당을 옮겨왔다.
사당을 옮기고 안채와 사랑채를 똑같이 복원했다.
분강서원과 강각과 애일당이 따라왔음은 물론이다.
궁전을 짓던 대목이 불려 왔다.
농암유적지 복원의 타당성을 인정 받아 상당한 나랏돈을 얻어내는데도 성공했다.

긍구당은 가로 세칸 세로 두칸의 자그만 몸체에다 서북모서리에 1칸의 온돌방이
덧붙여진 아름다운 집이다.

독특한 니은자 꼴을 하고 있고 지은지 650년쯤됐다.
전면 3칸은 모두 앞내를 바라볼 수 있는 루마루인데 마루끝엔 궁창난간을 달아
단정하고 우아하다.
여러번 옮겨 다니는 운명을 지녔건만 당차고 의연한 기상은 조금도 훼손되지 않았다.
네 귀가 살짝 들린 팔작지붕 위로 수백년 변함 없는 바람과 구름이 흘러간다.

세월은 긍구당 추녀끝에서 문득 흐름을 멈춘다.
도리와 인방과 기둥과 문설주와 서까래와 추녀와 지붕의 골기와 까지가
하나같이 보석이다.
귀퉁이에 들인 온돌방은 눈길 겸허한 선비 같고 환한 문얼굴은
매무새 정결한 안방마님 같다.
아궁이에 불을 때서 손이 오면 여기 묵을 수도 있게 만들어 뒀는데
1467년생 농암이 바로 이 긍구당에서 태어났다 한다.

낙동강은 하회만가도 사행천을 이루며 물구비가 심심해진다.
그런데 가송엔 협곡이 있고 소가 있고 여울이 있고 구비가 있다.
무엇보다 그 옛날 퇴계가 산책하던 산책길이 희미하게 남아있다.

퇴계가 청량산을 향해 걸어 갔던 그 길.
그 길을 종손은 매일 아침 걷는다.
퇴계오솔길에 대한 종손의 사랑을 어디다 비하랴.

퇴계문집을 찾아 학소대, 벽력암, 월명담, 단사협, 갈선대 같은
바위이름, 벼랑이름, 소이름을 모조리 밝혀냈고 원고지 수천장의 글을 썼다.
(그 원고를 모아 최근 <천년의 선비를 찾아서>란 책도 냈다)

퇴계는 진성이씨이고 농암은영천이씨다.
안동 양반들은 타성이라도 남이 아니다. 외가 아니면 고모가 아니면 이모가로
서로 얽힌다.
이 얽힘이 둘 셋 중복되는 일도 흔하다.

농암과 퇴계도그렇게 얽혔다.
서른여섯의 나이차가 있었지만 어울려 시를 짓고
이 곳 가송리와 청량산일대를 유산하며 숱한 시가를 남겼다.

농암이 부내에 내려와 집을 늘리기 시작한 것은 마흔넷,
10여년전 이성원씨가 새 집터를 잡은 것도 그 나이 어름이었다.
농암이 고을수령과 경상도관찰사를 버리고 귀거래해 강호시인이 됐 듯
종손도 한문학을 가르치던 직업을 접은 후 귀거래해 글을 쓴다.

그는 지금 농암종가를 개방중이다.
비단 영천이씨 후손이 아니더라도 전통문화를 체험하고 싶은 이들은
농암종가에서 묵어 갈 수 있다.

겉모양은 옛 분천의 종가를 그대로 따랐지만
부엌과 화장실은 현대식으로 꾸민 것도 그런 열린 생각의 결과이다.
마루방 문설주엔 입춘방 아닌<�>라는 낯선 글자가 붙어 있다“.

농암할배글에 나오잖아요.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할 때 그 어사와 입니다.”


김서령 나라경제 편집장 사진 권태균 중앙일보 시사미디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