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암종택은 마음을 씻기에 더 없이 좋은 곳입니다. 병산의 호방한 풍광과 하회의 고졸한 운치가 오롯이 한데 모여있으니, 탁 트인 사랑채 마루에 앉아 넋 놓고 산수에 취하다 보면 한 나절이 한 식경처럼 흘러가버리기 십상입니다.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에 몸을 맡기고 따뜻한 봄볕과 부드러운 미풍 속에서 부유하다 보면, 언젠가는 마주해야 할 묻어둔 무엇이 마음 속에서 고요히 떠오릅니다. 때 마침 땅거미라도 질라치면 좋은 술 한잔이 생각나지 않을 수 없는 노릇입니다.

종부님께서 이런 범부의 마음을 헤아리셨는지 "일엽편주"라는 종가의 명주를 내셨습니다. 제 운이 하늘에 닿아 일엽편주가 세상 빛을 보기 전에 시음을 할 수 있었는데 그 여운이 아직도 입가에 맴돕니다.

술은 청주, 탁주, 소주 세 가지입니다. 술이 마음 같지 않아 밤새 우셨다는 종부님의 말씀은 전과목 만점을 놓쳤다고 울먹거리는 전교 일등의 자책처럼 설득력이 없었습니다.

청주는 종택의 풍모와 잘 어울리는 술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달고, 시고, 쓰고, 매운 맛이 적절히 균형을 이루어 어디 한 곳 튀거나 치우침이 없는 듯 했습니다. 바디감 또한 지나치거나 모자람 없이 중용을 지키고 있다는 느낌이었습니다. 반가의 예악이 편벽되거나 시류에 흔들리지 않는 것처럼 아주 반듯하고 스탠더드 한 청주가 아닐까 생각해보았습니다.

탁주는 새로운 느낌이었습니다. 통상적인 탁주에 비해 텍스처가 가볍고 경쾌해 가수를 많이 한 탁주이거나 막걸리가 아닐까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원주라 하셨습니다. 그러고 보니 부드럽고 엷은 질감에 비해 맛이 진하고 알코올 분이 높았습니다. 원주의 윗 부분을 떠낸 탁주라 하셨는데 과연 흥미롭고 특징적인 개성일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소주는 일엽편주의 절정이었습니다. 처음 한 입 머금고는 최소 6개월 이상 숙성시킨 40도 전후의 소주라 짐작했습니다. 갓 내린 증류식 소주 특유의 잡내와 독한 맛 대신 시간의 결이 베인 은은한 향취와 부드러운 질감이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시음주는 내린 지 열흘 가량 된 50도 정도의 소주라 하셨습니다. 증류주를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 편인데도 편안하고 기분 좋게 손이 나가는 수작이라 생각했습니다. 여러 소주를 마셔봤지만 맛 있게 입에 감기는 소주는 흔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정성 어린 종부님의 음식과 3종의 술이 아직도 혀끝의 짙은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 덕에 저에게 새로운 계획이 생겼습니다.  첫째, 햇볕 좋은 날 사랑채 마루에 앉아 소박한 나물 밥상과 탁주를 즐기기. 둘째 해질 무렵 강각에 자리잡고 좋아하는 음악과 함께 청주 음미하기. 셋째, 늦은 밤 긍구당 문지방에 기대어 주먹만한 별들을 바라보며 소주 마시기.

잊지 못할 음식주(飮食住)를 선사해주신 종부님께 다시 한번 깊이 감사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