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암선생 유적지_분강촌 ::::::::: 농암종택

청량산과 농암종택을 다녀오다

이번 도산 여행은 자주 있는 일이 아니었다. 청량산, 도산이 다른 지역과는 달리 뛰어난 곳이기도 하거니와 만나기가 쉽지 않은 문학하는 친구가 그 곳에 살고 있고 나이와 살아온 처지가 비슷하며 서로를 알아듣는 친구들과 동행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도산하면 어부가의 효시 농암 선생, 성리학의 별인 퇴계 선생을 떠올린다. 어렵기만 하던 톨스토이 문학이 나이 들어 이해되듯 그 분들의 삶과 말씀이 범상치 않음을 요즈음에서야 느끼게 된다. 부모님이 늙어 하루가 지나감이 아쉬워 애일당을 지었다는 농암선생의 이야기에 슬하에 자식을 두고 부모님을 모시는 사람으로서 그간의 삶에 부끄러움을 느끼게까지 한다. 친구가 “유림”을 보고 최인호 선생을 극찬한다. 어릴 때 책을 많이 읽을 걸 그랳어 하며 공감하였다. 나도 유림의 퇴계 선생편에 있는 “두향“ 이야기로 여행의 즐거움을 나누었다.

서울을 출발하여 중부내륙고속도로에 들어서 충주, 괴산, 문경에 이르니 소백산맥의 산들이 참으로 아름답다. 가을녁 붉고 푸른 나무들의 어우러짐, 하늘과 태양과 산등성이가 만들어 내는 산그늘, 하늘에 붙어 있는 산의 흐름은 우리만 볼 수 있는 특혜였다. 문경 나들목에서 내리려 3번 국도를 지나 문경시를 우회하는 좁은 2차선도로에 들어오니 시속 60Km 이다. 옛날 이 길로 영남선비들이 과거보러 한양천리를 갔으리라. 상쾌한 산공기를 마시고 구경도 할 겸 창문을 활짝 열고 일부러 천천히 달렸다. 그것도 그런 것이 길은 좁고 구불구불하며 나무가 많아 멀리 볼 수도 없었다. 혹여 이런 길에서 애라도 뛰어나오면 소스라칠 일이 기에 속도를 내는 것은 무리였다. 갑자기 바아 앙 하는 웅장한 크라션 소리에 깜짝 놀라 돌아보니 큰 차는 간데없고 티코 한대가 뒤에 바짝 붙어 따라오고 있다. 싱거운 친구가 티코가 못 따라오게 이 쑤시게를 던지라고 한다. 옆에 있는 친구가 젊잖게 웃으며 양쪽 깜박이를 넣으라 하고 손을 흔든다.

34번 국도는 우리나라에게 가장 아름답고 잘 설계된 도로라고 생각한다. 국도인데도 오르막 내리막이 거의 없고 커브 또한 적다. 그리고 태초로부터 안동, 풍산, 예천, 상주 서쪽으로 흐르는 낙동강이 만들어 놓은 평야 주변으로 도로가 나 있어 차를 타고 가면 산과 들의 모습이 그지없이 아름답다. 청명한 날 그 길을 달려보면 아, 그래서 여기에 양반들이 자리를 잡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 것이다. 낙동강 상류부터 진성 이, 영천 이, 광산 김, 고성 이, 3태사(안동권, 권, 장), 의성 김, 풍산 김, 풍산 류, 풍양 조 등 이름 있는 가문이 낙동강을 끼고 자리를 잡고 있다(편의상 씨를 생략). 필자가 몰라서 그런데 더 훌륭한 가문이 많다. 이것은 낙동강이 만들어 놓은 환경이 사람이 태어나 살기에 좋기 때문일 것이다. 안동사람은 고집이 센 면이 있는데, 풍산 사람과 김제 사람이 자기네 평야가 세상에서 제일 크다는 입씨름을 벌였는데 기어코 풍산사람이 김제사람을 이겼다는 말도 있다. 그래서인지 요즈음 이 지역 지역 경찰도 오가는 사람들이 이 좋은 경관을 억지로 라도 감상하도록 80km로 속도를 제한하고 놓고 그것도 모자라 중간 중간에 감시카메라 까지 달아 놓았다.

낙동강 강변 둑 도로를 거쳐 안동댐으로 갔다. 이 도로는 영양, 청송으로 가는 큰 도로가 되었지만 옛날은 한적한 강변 이였다. 필자는 중고등학교 다닐 때 기차통학을 하였데 수업을 일찍 마치면 강변 둑 근처에 있는 증기기관차 창고 옆에서 놀면서 기차 시간을 기다렸다. 당시 낙동강은 건너편에 까마득한 넓은 백사장이 있었고 기차역 쪽으로는 한적한 넓은 풀밭과 키가 큰 미루나무가 군데군데 있었다. 5월의 신록이 피어날 때면 예쁜 누나들과 형들이 데이트하는 곳 이였다. 어린 눈으로 보아도 누님들은 아주 예뻣다. 키가 크고 얼굴이 희고 머리가 길고 웃음이 가득한 모습 이였다. 그리고 같이 있는 형은 공부를 아주 잘해서 저렇게 선택받은 듯하였다.

이곳 안동시는 작은 시가지에 매우 넓은 낙동강에 접하여 다른 대도시와는 다르게 여유로운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먼 훗날 천재적인 사람이 나타나 호주의 하버브릿지 처럼 세계에서 손꼽히는 강을 만들 것 이라는 상상을 해본다.

안동댐을 거쳐 와룡을 지나니 댐 상류의 호수가 잔잔하다. 댐 주변의 풀들이 외로운 가을의 자태로 여유 가득하다. 사람이 살지 않는 듯한 물 건너에 초원은 마치 한적한 북유럽의 해변 같다. 도로 양 편의 산들이 점점 웅장해 지더니 큰 붓으로 휘감아 찍어 올린 듯 청량산이 하늘을 가린다. 입과 눈이 절로 벌어진다. 옆에 있던 낙동강은 소리 내어 우리를 반긴다.

은구슬 같은 흰 물살과 여울의 소리는 얼음알 같은 소년의 기억을 끄집어낸다. 큰물이 지나고 깨끗한 강물, 강건너 하얀 모래톱, 물살에 흐르다가 가딱이는 낚시찌, 낚시에 걸려 반짝거리는 각시피리(쉬리)피리, 물고기 꿰는 버들가지, 어느 한가지인들 예쁘지 아니한 것이 없다. 해질녁에 소꼴 한 망태기 메고 집에 오면 엄마는 너무 좋게 반기신다. 멀리서 엄마의 그 얼굴, 그 눈빛을 떠올리면 눈물이 난다. 나는 엄마가 계시므로 다른 사람보다 행복한 사람이다.

바쁘신 친구 부인은 우리들의 생각을 미리 아시는 듯 가득한 미소로 소반에 차를 내어 온다. 대낮 방 안인데도 낙동강 여울 소리가 크게 들린다. 언듯 이육사의 청포도가 떠오른다.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 주저리 열리고

.........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방안에는 아주 오래된 매화 그림이 걸려있어 이 선생에게 내력과 설명을 부탁했다. 매화는 조선시대에 성주의 화가 분이 그리시고 친구의 증조부님이 글을 쓰셨다고 한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 한학자이신 아버님께서 글을 더하신 것이라 한다. 그림 한 장이지만 오랜 세월에 걸쳐 담겨진 의미가 참으로 깊음을 알게 된다. 정연히 그려진 한시를 물 흐르듯 해석해 주는 친구가 참으로 부러웠다. 한문도 어렵지만 그것을 해석하며 알기 쉽게 설명하는 것이 신기에 가까웠다. 구슬이 굴러가는 듯한 낭낭한 목소리며 느슨한 듯하면서도 정연한 선비적 기품은 많은 학생들이 이 선생을 존경하며 따르게 했을 것다.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 주저리 열린다는 시처럼 이곳에는 보이지 않는 무한한 이야기와 가치가 숨겨져 있다. 고려 건국, 공민왕의 피란, 퇴계, 농암선생에 대한 이야기 외에도 역사적인 이야기들이 이 지역에는 많다. 외국에 갈 때 그 나라에 대한 안내 책자를 구하여 보듯이 후일 이 지역의 역사적 자료가 보다 깊고 알기 쉽게 정리되고 보편화된다면 오늘 보이는 유적의 가치는 더욱 높아지고 여행자에게 더 많은 도움을 줄 것 같다.

내 엄마는 청량산 산성 마을에서 태어나 11살이 되어 와룡(늪실)으로 나오셨다. 외할아버지께서 산속에 살면 자식들의 혼인이 걱정되어 늪실로 나오신 것이다. 나는 어릴적 엄마로부터 예안, 도산, 청량산 주변 이야기를 많이 들어왔다. 젊으실 때 못하시는 것이 없고 팔십이 가까운 연세에도 세상을 보시는 바가 정확하시다. 외가 마을에는 종가와 사당이 있고 남자들은 글공부를 하였고 여자 애들은 어릴때부터 음식 만들기, 의복 만들기 등 특정 분야에 소속되어 생활에 필요한 일을 배웠다고 한다. 엄마는 옷 만드는 분야에 속하여 베짜기, 옷 만들기에 명수이시다. 그리고 동네에 누구 아지매는 가사를 그렇게 잘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는데 요즈음 생각해 보니 농암선생의 영향인 것 같다.

산성마을은 청량사 건너편 산위에 자리 잡고 있는데 당시(70년전) 공민왕당 주변으로 열세 가구가 살았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감자, 조, 수수, 옥수수 농사를 주로 하였는데 배부르게 먹을 만큼 밭도 충분하고 농사도 잘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높은 산중에 논이 있었지만 벼농사가 되지 않아 쌀은 무척 귀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엄마의 외가는 진성이씨 집안으로 살림이 괜찮아 산 아래 들에 논이 있어 쌀밥을 먹을 수 있었다고 한다. 어느 날 엄마의 외숙모가 출산하여 쌀밥을 해 놓았는데 외숙모가 엄마에게 너 그 밥 먹으라 하시 길 레 부엌에 가서 쌀밥을 실컷 먹었다고 한다. 그런데 외숙모는 너가 다 먹어 버리면 나는 뭘 먹느냐고 하셔서 엄마는 먹으라고 해서 먹었다고 대답하니 외숙모가 그만 말을 못하시더란다. 외숙모가 정말로 먹으라 해서 먹었는지, 허락하지 않았는데도 엄마가 함부로 먹어버렸는지 알 수는 없으나 엄마는 지금도 먹으라는 외숙모의 말씀을 분명히 들었다고 말씀하신다. 쌀밥을 너무 먹고 싶으면 먹으라는 소리가 저절로 들리는 모양이다.

슬픈 이야기이지만 6.25전쟁 때 어머니 외가집안 중 한 가족이 이웃 갔던 부인만 제외하고 모두가 빨치산에게 목숨을 잃은 일이 있었다. 빨치산이 집안에 있던 장독을 가져갔는데 외숙이 그들 은신처에서 다시 가져왔기 때문 이였다. 그 후 사람들은 안동 등으로 이주되고 마을은 없어졌다. 나라의 수준이 높아져 다시는 이런 슬픈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청량산에서 가송마을을 덜 가서 “쏘두들“이라는 마을이 있었다고 하는데 특이한 이름으로 보아 좀 깊은 강 옆에 불룩 솟아 오른 평평한 모양을 한 마을로 생각된다. 70년 전쯤으로 생각되는데 그 마을에 할머니 한분이 벼락을 맞아 돌아가시게 되었다. 자식들이 어머니의 시신을 방에 모셔 놓고 통곡하며 장사 준비를 하였는데 입관을 하려고 하자 돌아가신 할머니가 벌떡 일어나 사람들이 혼비백산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는 할머니는 알아들을 수 없는 무슨 말을 몇 마디 하시더니 방밖으로 나가신다. 잠깐 마당에 서 계시다가 다시 황급히 어디로 가시는데 얼마나 발걸음이 빠른지 힘 좋은 아들들이 뛰어서 겨우 따라 갈 수 있었다고 한다. 할머니는 번개 같이 청량산을 올라 산성마을의 공민왕당 안으로 들어가 오랫동안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시다가 나오셨는데 그때 비로소 보통 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그리고 마을로 돌아와서는 아픈 사람을 고치기 시작하는데 할머니에게 치료를 받은 사람은 언제 그랳는지 모르게 병이 고쳐졌다고 한다. 그때부터 동네 사람들은 그 할머니를 “불덩이 할매” 라고 불렀다 한다.

나의 외가에는 외삼촌 세분이 계셨는데 불덩이 할머니가 느닷없이 맨 아래 외삼촌에게 양 어머니를 정해야 한다고 해서 외할머니께서 지 엄마가 있는데 택도 없이 양 어머니를 정하라고 하느냐고 나무랐더니 불덩이 할머니 자신이 양 어머니가 되어 주겠다고 우겨 대충 그렇게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큰 외삼촌 한분은 6.25전쟁 때 순국하셨고 한분은 그 후에 세상을 떠나셨으나 그때 불덩이 할머니를 양 어머니로 정한 작은 외삼촌은 지금까지 건강하게 문중의 대소사를 맡아 하고 계신다.

농암종택 사이트에 있는 퇴계선생의 어부가 발문은 서투른 나의 눈에도 이보다 더 잘 쓸 수 없는 명문이다. 또한 이성원 선생이 번역한 한글은 퇴계선생이 직접 한글로 쓴 것 같이 간결하고 아름답다.

그 후 서울에서 이 곡을 두루 찾았으나 비록 늙은 창기(娼妓)라도 이 곡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이것으로 이 곡을 알고 좋아하는 자가 없음을 알았다. 그 사이 밀양의 박준(朴浚)이란 자가 이런 음악에 이름이 있어 속아(俗雅)의 구분 없이 모아 책으로 엮었는데, 그 속에 이 ‘어부가’와 ‘쌍화점’ 여러 곡이 함께 실려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저것(쌍화점 여러 곡)을 들으면 수무족답(手舞足踏)하고, 이것(어부가)을 들으면 권태로와 잠이 오는데 이는 왠 일인가? 진실로 그 사람이 아니면 그 음을 알지 못하는 것이니 어찌 그 즐거움을 알 수 있으리오. 우리 농암 선생은 벼슬을 버리고 분수가로 염퇴했다. 부귀를 뜬구름처럼 여기고 회포를 물외(物外)에 붙였다.

항상 조각배를 타고 물안개 낀 강 위에서 즐겁게 읊조리거나 낚시 바위 위를 배회하며, 물새와 고기를 벗하여 망기지락(忘機知樂)했으니, 그 강호지락(江湖之樂)의 진(眞)을 터득한 것이다.... 사람들이 이를 바라보면 그 아름다움은 신선과 같았다. 아! 선생은 이미 그 진락(眞樂)을 얻은 것이다.”
퇴계선생은 농암 선생을 평소 깊이 알고 존경하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본시 뜻이 높고

폭이 넓은 분이지만 이 글을 읽는 후세들을 배려하여 정성을 다하여 쓴 것 같다.

춘원에 대한 피천득 선생의 멋 떨어진 표현이 생각난다. " 춘원은 마음이 착한 사람이다. 그는 남을 미워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남을 중상모략 하지 못하고 남을 나쁘게 말하는 일이 없었다. 언제나 남의 좋은 점을 먼저 보며 그는 남을 칭찬하는 기쁨을 즐기었다.“ 시공이 다르지만 대 선비의 생각은 그렇게 멋지고 비슷한가 보다. 나는 그 분들을 닮아 가고 싶다.

2007년 김 태문
(전 KT 인터넷운영국장, 현 시스게이트 전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