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서울 사람들이 이런 자연의 즐거움을 모르고 어떻게 울적한 심사를 달랠까!
-도산서원의 관람-
1) 천운대와 천연대
도산서당은 최고의 전원 주택이며, 퇴계의 일상은 전원 생활의 모범이다. 그 전제는 자연 사랑이다. 퇴계는 자연을 사랑했다. 그것도 지극히 사랑했다. 퇴계는 “나는 본래 산야의 기질”이라 했고, “만약 숲과 강에서 노닐며 새와 물고기를 보는 즐거움이 없었더라면 세월을 보내기 어려웠다”고 했다. 심지어 자연 사랑이 고질이 되어 “천석고황泉石膏肓의 병이 들었다”고까지 했다. 나아가서는 “서울 사람들이 이런 자연의 즐거움을 모르고 어떻게 울적한 심사를 달랠까” 걱정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퇴계는 왜 그렇게 자연을 사랑했을까? 천운대와 천연대. 이 두 대는 퇴계의 자연 사랑의 의미를 알게 하는 도산서원 관람의 핵심이다. 이를 알면 도산서원을 거의 이해한 셈이 된다. 그렇지만 지금 관광객들의 관심에는 멀어져 있다. 찾는 사람도 없다. 도산서당, 도산서원 등 눈에 보이는 것만 관람한다. 그럼에도 도산서원 관람의 진수를 맛보려면 퇴계가 명명한 이 두 대를 찾아 그 뜻을 읽어내야 한다.
차에서 내려 진입로를 조금 걸으면 ‘천광운영대天光雲影臺’라는 표석이 보인다. 줄여서 ‘천운대’라 한다. 이 명칭은 주자의 시 <관서유감觀書有感>의 “천광운영공배회天光雲影共徘徊”에서 따왔다. 풀면 ‘하늘빛과 구름 그림자가 배회한다’이다.
천운대를 지나 동편 산기슭으로 나아가면 아담한 바위 층 벽이 나온다. ‘천연대天淵臺’다. 역시 《중용》의 “연비여천 어약우연鳶飛戾天 魚躍于淵”에서 인용한 것이다. 풀면 “솔개는 하늘에 날고 물고기는 연못에서 뛴다”라는 뜻이다.
《중용》은 참 재미있는 책이다. 여러 고전에서 글을 뽑아 묶은 책이 엄연한 ‘사서삼경’의 한 책이 되었고, 이런 책의 구절들을 두고 후학들이 저마다 의미부여를 했다는 점이다. 가령 《중용》 첫 구절은, “천명지위성 솔성지위도 수도지위교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爲敎”다. 풀이하면 “천명을 성이라 하고, 성에 따르는 것을 도라 하며, 도를 닦는 것을 교라 한다”이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도무지 아리송한 해석이다. “연비여천 어약우연”은 또 어떤가? 원래 이 말은 《시경》에 채록된 고대 민요 한 곡조에 불과한데, 주자朱子가 이 구절을 “천리天理의 묘용妙用을 나타냈다”고 했다. 이에 《주자전서》를 경전처럼 신봉하는 조선의 성리학자들이 모두 이 말뜻에 매달렸고 어느덧 화두가 되었다.
‘솔개가 날고 물고기가 뜀’이 ‘천리의 묘용’이라 한다. 어떻게 보면 웃기고 어떻게 생각하면 선문답같이 의미심장하다. ‘의미심장하다’고 봐야 이야기가 되는 까닭에 다시 전문을 소개한다.
산뜻한 구슬 잔엔 황금빛이 흐르고 瑟彼玉瓚 黃流在中
멋있는 군자 복록이 내리네 豈弟君子 福祿攸降
솔개는 하늘에 날고 물고기는 연못에서 뛴다. 鳶飛戾天 魚躍于淵
솔개와 물고기는 자연의 상징이다. 그런데 자연은 자연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자연은 기질지성氣質之性이 있어 악惡에 흐르기 쉬운 인간 심성을 다스리는 도장이 된다. 자연은 선善을 온존한 본연지성本然之性으로 간직하고 있어, 천리를 궁리窮理하고 거경居敬하는 지혜를 가르쳐 준다. 그래서 퇴계는 주변 사소한 자연 현상으로부터 도와 진리를 깨닫는다. 그래서 이런 시를 쓰기도 했다.
한가한 뜰의 풀들이 閒庭細草
조화롭게 자라나네 造化生生
바라보면 도가 있어 目擊道存
그 의미 이와 같네 意思如馨
사진: ‘연비어약’의 주자 글씨
해설: 글씨는 매우 힘차고 조화롭다. 과거 많은 선인들이 불멸의 경구처럼 소중하게 생각했다. 필자의 집에도 최근 영주에서 어느 친척이 보내와 벽에 붙여 놓았다.
뜰에 나는 풀 한 포기도 천리의 구현 아님이 없다. 마당에 자라나는 풀 한포기도 그냥 풀이 아니다. 완벽한 도를 갖춘 온백설자 같은 도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처럼 풀에도 도가 있다고 사유하니 솔개가 날고 물고기의 뜀은 예사로운 자연 현상이 아니다. 우주 이치의 오묘한 조화, 즉 ‘천리의 묘용’이 바로 거기에 있다고 보았다. 이런 사유체계가 철학이 되었다. 그런데 철학은 자연의 논리가 아니고 인간의 논리이니 이를 어떻게 인간의 논리에 적용해야 하는가? 《퇴계언행록退溪言行錄》에 이런 기록이 있다.
‘솔개는 날고 물고기는 뛴다’는 말과 ‘일을 하되 미리 기대하지도 말고 잊지도 말며 조장助長하지도 말라는 뜻이 같다’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하고 물으니, (퇴계) 선생이 말씀하시기를 “솔개가 날고 물고기가 뛴다는 것은 자연의 유행流行이 위아래 밝게 드러난다는 것을 묘사한 것으로, 이理의 작용 아닌 것이 없다. 하늘은 욕심이 없으므로 이理와 기氣가 유행하여 한순간도 중단되는 법이 없다. 사람도 기대하지 말고 잊지도 말며 조장하지 않은 약점만 없으면 본체가 드러나고 묘용이 유행하여 한순간도 쉬지 않을 것이니 그 형상이 이와 같다” 하셨다.
하늘의 이치가 ‘천리天理’다. 천리에 사람도 예외는 아니다. 그래서 인도人道 역시 천리처럼 갈등 없는 상태를 소망한다. 이른바 천인합일天人合一의 경지. 그것은 유가의 궁극이다. 그 궁극에 이르는 방법으로 “기대하지도 말고 잊지도 말며 조장하지도 말라”고 했다.그 언저리에 ‘경敬’이란 말이 놓인다.
퇴계에게 ‘경’은 목표이고 궁극이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한 결 같이 “새벽에 일어나 세수하고 의관을 단정히 하고 꿇어앉아 종일토록 책을 보다가 한밤이 되어서야 잠자리에 드는” 생활을 했다. 마치 구도자 같았다. 퇴계는 이런 자세로 끊임없이 글을 썼다. 일상이 온통 시와 편지였다. 2,200여 편의 시와 3,000여 편이 넘는 편지가 이를 증언한다.
글을 짓는 일은 곧 경의 자세이자 경의 실천이며 수행의 핵심이다. 나는 보통 사람이 일상에서 행할 수 있는 최선의 구도는 글을 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종류의 글도 좋다. 기도만이 돈오頓悟에 이르게 하지는 않는다. 보통 사람에게는 글이 더 효과적이라 생각한다. 오대산 어느 골짜기에 아무도 모르게 칩거하는 법정 스님이 《혼자 사는 즐거움》이란 책을 냈는데, 내가 보기에 법정 스님의 ‘혼자 사는 즐거움’은 ‘혼자 글을 쓰는 즐거움’에 있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아니면 ‘글을 쓰는 즐거움’이 ‘기도하는 즐거움’보다 더한 것인지도 모를 일이며, 그렇지 않다면 혹시 글을 쓰는 것이 일상의 기도가 되어 버린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노래’는 혼자 사는 즐거움에 보너스 같은 벗이 된다. 퇴계도 노래를 만들었다. 이는 경 실천을 더욱 공고히 하는 수단이다. <도산 12곡> 가운데 6곡의 가사는
봄바람에 꽃은 산에 가득하고 가을 밤 달빛은 대에 가득하다.
사철 아름다움 정취 사람과 마찬가지라.
하물며 어약연비 운영천광이야.
7곡은
천운대 돌아드니 완락재 소쇄한데,
만 권 생애 낙사가 무궁하여라.
이 중에 왕래 풍류를 새삼 말해 무엇하랴.
이렇게 퇴계는 천운대와 천연대를 다시 노래로 만들었다. <도산 12곡>은 문학이며 음악이다. 글로 쓰면 문학이고 읊으면 노래다. 그래서 <도산 12곡>을 후일 농암의 <어부가>와 더불어 ‘도산가陶山歌’라 했고, 많은 사람들이 “천연대에 나아가 ‘도산가’를 불렀다”고 했다. 지금 관람객들도 천연대에 나아가 노래 한 곡조 읊어 보면 어떨까? 퇴계는 <도산 12곡>을 짓고 “아이들로 하여금 아침저녁으로 익혀 노래하게 하고 책상에 기대어 듣게 하고, 또한 아이들도 스스로 노래하고 기뻐하며 뛰고 춤추게 하여 세속의 더러움과 인색함을 씻어 버리게 하고자 했다”고 하니 더욱 그러하고, 천연대 앞에 흐르는 강을 저 굴원의 <어부가>를 인용해 ‘탁영담’이라 했으니 더더욱 그러하다. 이렇듯 천운대와 천연대는 퇴계에게 문학과 철학과 음악이 어우러진 자연 정원이다.
사진: 천운대
해설: 안동댐 이전에는 ‘천연대’와 더불어 대칭의 모습이었는데, 옆구리로 들어가는 진입로를 내면서 형체가 손상되었다. 그래서 지금은 대가 있는지 조차 불분명하다. 이는 '천운대'와 '천연대' 사이의 원래 진입로였던 ‘곡구암谷口巖’의 계곡과 숲의 터널이 사라짐과 함께한다. 곡구암의 매몰은 도산서원 경관을 가장 손상시킨 부문이다.
사진: 천연대
해설: 월천 조목이 ‘천연대’ 글씨를 새기고 난 뒤 쓴 글(‘刻天淵臺告文’)을 보면, “상국 이산해李山海의 글씨를 새겨 천년 뒤에 이곳을 유람하는 사람들로 하여금....마음의 문을 열어 어두워진 하늘의 이치를 밝히고자 합니다...아! 이 대臺가 무너진다 해도 돌은 그대로 있을 터이며, 세상이 바뀌더라도 이 이름은 지워지지 않을 것입니다” 했다.
2) 도산서당
천운대와 천연대를 좌우에 두고 그 가운데 지은 집이 ‘도산서당’이다. 도산서당을 중심으로 한 퇴계식 여유와 일상을 정리하면 이렇다.
천천히 천운대와 천연대를 돌아 소쇄한 완락재로 들어와 만 권 책이 있는 서재에 앉아 끝없는 진리 탐구의 즐거움에 젖는다. 이런 생활이 퇴계의 산보, 퇴계의 휴식, 퇴계의 수양, 퇴계의 공부, 퇴계의 즐거움이다. 다시 그 방법을 적어보면, 두 대臺는 천천히 걸어야 하고 완락재는 그 소쇄함에 젖을 줄 알아야 하고, 만 권 책은 끝없는 진리탐구의 즐거움을 음미해야 한다. 그러니 도산서원을 제대로 관람하려면 이 두 대를 산보하며 천천히 도산서당으로 들어오는 퇴계식의 진리 체득을 음미해야 한다.
체득은 심心의 문제다. 심은 경敬의 문제다. 경은 지경持敬 혹은 거경居敬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심은 한 몸의 주제이고, 경은 한 마음의 주제이기 때문心者一身之主宰 而敬又一心之主宰也”이다. 공부삼아 한 번 써보면 어떨까. 결국 모든 것은 경의 문제로 귀착된다. 퇴계는 경을 ‘옷깃을 여미는 것’이라 했지만 이에 대한 설명은 다른 장에서 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그런 어려운 용어보다 좀더 쉽게 퇴계식의 전원 생활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퇴계의 고백이나 들어보자. 이런 고백에서 ‘전원생활의 즐거움이 끝이 없음’, 즉 ‘낙사무궁樂事無窮의 경지’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는 방법을 깨닫게 될 런지도 모를 일이다. 《도산기陶山記》에 이런 기록이 있다.
마당에 나가 연못을 구경하고 ‘절우사’를 찾기도 하며, 텃밭을 돌아 약초를 옮겨 심고 숲에서 꽃을 따기도 한다. 혹 바위에 앉아 물을 튀기고 대에 올라 구름을 바라보기도 하며, 낚시터에서 고기를 바라보고 배 안에서 물새와 친하기도 한다. 이렇게 마음 내키는 대로 거닐다 보면 눈길 닿는 대로 흥이 일고, 흥이 다해 돌아오면 온 집이 고요하고 벽에는 책이 가득하다. 책상 앞에 묵묵히 앉아 공경하고 존양하고 연구하고 사색하여 왕왕 깨달음이 있으면 문득 기뻐서 밥 먹는 것도 잊었다. 이해되지 않는 것이 있으면 친구들에게 도움을 받고, 그래도 터득하지 못하면 억지로 하지 않고 잠시 한쪽에 두었다가 때로 끄집어내어 마음을 비우고 생각하고 풀어 보면서 스스로 이해되기를 기다린다. 그런 생활을 오늘도 하고 내일도 했다.
요즈음 세계적 화두로 ‘느림의 미학’이 주목되는데, 퇴계의 도산서당에서의 일상에도 그런 측면이 스며있다. 단순 비교는 무리가 있다. 그렇지만 퇴계가 “오늘도 그렇게 하고 내일도 그렇게 하는 일상”에는 느림의 미학적 요소가 없지 않다. 다른 점이 있다면, 단순히 일상의 진행을 느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내키는 대로 거닐다 보면 자연에 흥을 느끼고, 흥취에 젖으면 돌아와 연구하고 사색하는 일’이다. 그런 가운데 ‘깨달음이 있으면 기뻐하는’ 그런 상태가 퇴계식의 일상이며 여유였다. 경 실천의 깨달음과 기쁨이 퇴계의 지경이고 거경이며 느림의 미학이다. 퇴계의 자연 사랑은 여기에서 연유한다. 낙사무궁의 경지도 여기에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낙사무궁은 어쩌면 퇴계의 이런 시 속에 내재되어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늦도록 낚싯대 한들거리고 弄晩竿仍횴
자주 오니 돌 또한 따스하여라. 來多石亦溫
버들가지에 고기 뀌니 魚穿靑柳線
푸른 안개 도롱이엔 자욱하다. 蓑帶綠烟痕
낙사무궁의 경지를 생각하며 도산서당 정문인 유정문을 들어서니 우측에 투호가 있고 그 앞에는 문제의 금송이 높이 솟아 있다. 박 대통령이 성역화 사업 낙성에 참여하여 심었다. 사람들은 이 금송을 옮겨야 하지 않느냐고 말한다.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일본 소나무라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담장 안에는 큰 나무를 심지 않는다’는 이른바 ‘장내불식거목牆內不植巨木’의 격언 때문이다. 담장 안의 큰 나무는 그늘의 피해도 피해지만 무엇보다도 주객이 전도된 부조화 를 낳는다. 그런데 금송은 한없이 커서 도산서당을 누르고 있다. 마치 지금 안동댐과 도산서원 역사의 긍정과 부정이 교차하는 상징물처럼 보인다.
댐 후유증은 크다. 사라진 낙락장송의 강변로와 수목의 터널 곡구암 진입로도 그렇지만, 가령 작은 부분, 퇴계가 식수로 사용한 우물인 ‘열정’ 같은 것도 그렇다. 열정은 퇴계에 의하면 “바위 틈에서 나오는 달고 시원한 물[石井甘洌]”로 “천 년 세월 이끼에 덮여 있으니 가리지 말라[千古烟沈 從今勿幕]”고 한 샘이었다. 말하자면 ‘깊은 산 속 옹달샘’이다. 그래서 가리지 말라고 했건만, 지금은 가당찮은 우물로 변모했다. 우물 정 자 형의 돌로 만들어 쪽박이나 손바닥으로 한 움큼 떠 마시면 될 샘물을 지금은 어떻게 마시라는 것인지도 모르게 만들어놨다. 퇴계가 “쪽박으로 이 물을 마시고 깨달은 샘一瓢眞相得”이라 했으니 더욱 그러하다. 지금이라도 제대로 복원해서 여름 목마른 관람객들로 하여금 마셔보게 하면 얼마나 좋으랴. 잘 가꾸어 가령 ‘퇴계 샘물’이라고 해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그렇지만 지금은 마시는 사람도 없고 마실 수도 없다.
금송 앞 계단을 올라 싸리문을 지나니 이윽고 도산서당이다. 싸리문과 토담과 견치석 담장과 ‘정우당’의 장대석도 조화롭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사진: 도산서당 담장과 금송
사진: 열정
도산서당은 참으로 음미할 만한 건물이다. 나는 어릴 때 도산서원으로 소풍을 갈 때마다 퇴계 선생께서 도산서원 강당에 높이 계시면서 제자들을 가르친 것으로 생각했고, 도산서당은 거처하는 집으로만 생각했다. 방과 마루가 너무 작아 학생들을 거기서 가르쳤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곳에서는 도산서원이 전부인 것으로 생각했고, 그런 인식은 오래도록 남아 있었다. 도산서당의 존재를 이해한 것은 참으로 오랜 뒤의 일이다.
도산은 살 만한 땅, 즉 ‘가거지지可居之地’의 적지다. 퇴계가 도산에 도산서당을 짓기로 결심하고 쓴 기록을 보면 “산이 높지 않으면서 주변이 확 트여 있고, 기세가 빼어나면서도 균형이 잡혀 있고, 봉우리와 계곡이 모두 이 산을 감싸고 숙여 있는 것 같다”고 했다. 또한 “산자락 앞으로 강과 들이 내려다보이고, 그윽하고 아늑하며 멀리 트여있으며, 바위 계곡은 선명하고 돌 사이 샘물이 달고 차가와 몸을 감추고 살기에 아주 적당하다” 했다. 그래서 이곳에 살던 농부에게 돈을 주고 땅을 샀다고 했다. 퇴계는 상계의 집터를 발견하고, “기뻐서 끼니조차 잊었다”고 했으며, 도산에 대해서는 “이런 장수지처藏修之處가 여기에 있을 줄이야!” 하며 감격했다. 집터 찾기에 고심한 퇴계에게는 최고의 가거지지였다.
도산서당은 자연과의 교감과 사랑과 조화가 어떤 모습을 해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하나의 모형이다. 도산서당은 천인합일의 형이상학적 개념을 형이하학적 모습으로 연출한 현장이다. 적어도 퇴계식의 자연과 인생은 그런 모습으로 나타났다. 퇴계는 이를 담보하기 위해 도산서당을 중심으로 주변 여러 곳에 이름을 부여했다.
천연대와 천운대를 비롯해 유정문, 정우당, 절우사, 시습재, 지숙료, 관란헌, 곡구암, 탁영담, 반타석 등이 그것이다. 특히 정우당淨友塘, 절우사節友社는 그 절정의 표현이다. ‘맑음이 벗’이고, ‘절개가 벗’이다. 매화를 ‘매형梅兄’이라고 표현함과 같은, 자연과 인간이 함께하는 특이한 이름을 붙여 주었다. 절우사를 조성하고 쓴 시는 이렇다.
도연명의 동산은 솔, 국화, 대나무 셋이라니 松菊陶園與竹三
매형은 어이하여 그 속에 끼지 못했던고 梅兄胡奈不同參
나 이제 매화를 넣어 풍상계를 맺어서 我今倂作風霜契
맑고 향기로운 절개 길이 간직하리 苦節淸芬儘飽諳
사진: 어느 무명화가가 그린 도산서원도
해설: 과거 안동댐이 조성되기 전의 도산서원 일대의 풍광으로, 강변으로 이어지는 길과 서원 진입로인 ‘곡구암谷口巖’이 선명하다. 낙낙장송의 강변길을 따라 곡구암의 계곡 숲의 터널을 통해 천천히 굽어 들어가는 진입로는 도산서원의 압권이었지만 지금은 망각되고 있다.
이런 연유로 도산서당 감상은 뒤편의 웅장한 도산서원 건물은 없다고 생각하고 도산서당만을 머릿속에 그려 보면 어떨까? 그러기 위해서는 전체 설계도라 할 수 있는 <도산잡영陶山雜詠>을 읽어 보는 것이 좋고,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동편 산 위에 올라가서 조망해 보는 것도 좋다. <도산잡영>은 도산 답사가 아니더라도 전원에 관심이 있는 자는 꼭 일독할 만한 글이다.
도산서당은 퇴계가 설계한 전원주택이고, 그 주택은 자연 사랑이 절절한 한 철학자의 오랜 꿈의 설계에서 맺어진 결정이었다. 도산의 경내는 도산서당으로 완벽한 터전이었다. 더는 건물이 들어서서는 안 되는 그런 곳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도산서원의 거대한 구조물이 도산의 경내를 비집고 들어앉아 소담하던 퇴계의 전원주택을 대규모 캠퍼스로 변모시켰다. 더구나 곡구암의 계곡 진입로를 매립하여 그 맛은 더욱 사라졌다. 그래서 도산서원을 찾는 관람객은 이런 점에 유념하고 관람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건축 정서의 혼돈에 빠져 무엇이 무엇인지 모를 수도 있다.
도산서당은 퇴계에게 하나의 작품이다. 고심하고 고심한 만년의 걸작이다. 퇴계가 도산서당 건축 조영에 얼마나 관심을 기울였는지는 농운정사를 지을 무렵 쓴 편지가 시사한다. 퇴계는 완벽한 작품을 희망했다.
“법련의 편지를 보니 그는 도투마리 집 제도를 좋게 여기고 있습니다만 그 제도는 굽는 곳이 많아 낙숫물이 많이 흐르며, 갈대풀로 지붕을 덮기도 어렵고, 방房, 실室, 청廳, 당堂도 모두 좁아 좋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제가 제시한 이 제도를 바꾸면 안 될 것입니다. 남쪽 부분 세 칸은 들보와 도리의 길이가 여덟 척이고, 북쪽 네 칸 도리는 남쪽과 같으나 들보의 길이는 일곱 칸입니다. 이는 그 뒤에 가첨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가운데 동서 두 칸은 들보가 여덟 척, 도리가 일곱 척입니다. 이와 같이 한다면 그 뜰은 매우 좁아 국자[斗] 모양과 같아질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가령 이미 소개한 조수도가 1592년에 쓴 글도 참고할 만하다. 짧은 글에 쓸 것 다 썼다. 그러니 지금 도산서원 관람은 도산서당의 퇴계 생전 모습 그대로의 생활용품과, 명명한 여러 이름과 건축 조영에 대한 이해에 절대적인 시간을 보내야 하며, 그런 다음 도산서원 건물로 옮겨가야 한다. 조수도의 글은 이러하다.
“이번李蕃이 따라와 함께 사당에 알묘하고 나와 선생이 평일 거처한 곳을 살펴보니 자리, 책상, 청려지팡이, 투호, 연적, 벽 사이에 서책들이 생전 모습 그대로였다. 옷깃을 여미니 늠름하신 모습으로 훈계하시는 듯 했다. 선생은 참으로 죽어도 죽지 않으셨다.
유정문, 정우당, 절우사, 시습재, 지숙료, 관란헌을 둘러보니 선현들의 옛 자취가 나의 흉금을 울리는 듯했다. 천연대로 나와 이번이 마련한 술을 마시며 각각 <도산가> 한 곡씩을 불렀다. 서쪽 천광운영대의 빼어난 경치는 하늘 연못과도 바꿀 수 없었다. 송림이 햇빛을 가리고 새들은 날고 고기는 뛰며 좌우 푸른 병풍산은 그 그림자가 물에 잠기어 강산 풍광이 한눈에 들어왔다. 대 아래 탁영담이 있고, 그 가운데 반타석이 있어 여러 사람이 앉을 만했다.”
조수도의 글은 도산서당 관람의 기본 방식이라 할 수 있는데, 이 글에도 역시 “새들은 날고 고기는 뛰며”라는 구절이 있으니 다시 한 번 유념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이 글의 핵심이고 관람의 핵심이다.
사진: 도산서당과 마루의 평살
해설: 집이라고 하기 어려운 작은 집 ‘도산서당’, 그래서 정겹다. 거기 더욱 눈길 가는 곳 - ‘살평상’이라 부르는 마루. 좁은 공간을 보완하기 위해 ‘암서헌’ 마루 끝에 붙여 달아냈는데 건립당시에는 가적형식에 초가지붕이었다. 필자는 이 살평상 정도의 공간과 여유와 건축이 퇴계미학의 상징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도산서당에 들어설 때마다 퇴계의 모습을 떠올려 본다.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 퇴계는 영정影幀이 없다. 최근 새로 제작한 천원 권의 퇴계 영정에 네티즌들은 “너무 늙어 보이고 졸고 있는 것 같다”고 하고, 당국에서는 “표준 영정 사용으로 어쩔 수 없다” 한다.
그런데 최근 진성이씨대종회의 종보(《悅話》 제20호)에 퇴계영정이라고 하는 그림이 소개되었다. 혜산蕙山 유숙劉淑(1827-1873)의 작품이라 했다. 그림을 오래도록 보았는데, 어쩌면 퇴계 진영眞影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넓은 이마가 그랬다. 퇴계는 넓은 이마, 즉 ‘광상廣顙’이 특징인데 이 그림이 그러했다.
천원 권 퇴계 영정은 1974년 이유태 화백이 그린 상상화로 다소 근엄한 모습을 띠고 있다. 철학자의 엄격함보다 문학가의 온화하고 따뜻한 느낌을 주는 분이 퇴계의 모습에 좀더 가깝지 않을까 생각한다. 천원 권 퇴계영정은 재고되었으면 한다.
사진: 진성이씨대종회 종보(『悅話』 제20호)에 소개된 ‘퇴계의 초상화’
해설: ‘혜산蕙山 유숙劉淑’의 작품이라 쓰여 있는데, 종보 글에 “퇴계의 모습에 가장 근접아고 있다”고 했다. ‘퇴계언행록’에 “선생은 이마가 모가 나고 풍성하게 넓어서 송재께서 이를 기이하게 여기고 사랑하여 평소에 부르시기를 ‘광상廣顙’이라 하고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는 기록으로 ‘넓은 이마’는 퇴계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3) 농운정사
도산서당을 나오면 맞은편에 농운정사가 있다. 말하자면 기숙사인 셈이다. 교통이 자유롭지 못한 시절, 학생들이 찾아오면 이곳에서 묵었다. ‘工’자 모양으로 지었고, 기단은 경사를 따라 자연석으로 했다. 지금은 화강암 장대석으로 바뀌었다. 이 역시 건물과는 부자연스럽다. 도산서당의 축은 자연석으로 두고 이곳만 고쳤으니 일관성 측면에도 맞지 않다.
농운정사에는 세 개의 현판이 있다. 시습재時習齋, 지숙료止宿寮, 관란헌觀瀾軒. 모두 공부와 관련 있다. 그 가운데 관란헌에 대한 퇴계의 시는 정녕 음미할 만하다.
넓고 양양한 저 물결의 이치 浩浩洋洋理若何
일찍이 공자께서도 탄식했네. 如斯曾發聖啓嗟
진리가 바로 여기 있으니 幸然道體因玆見
요컨대 공부에 간단이 있어서는 안 된다네. 莫使工夫間斷多
교육에 대한 퇴계의 언동은 참고할 만하다. 이미 부포 편에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공부에 간단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퇴계 공부법의 핵심이라 할 만하다. ‘공부에 간단없음’이란 곧 ‘경敬 실천’이다. 간단없음은 경 실천의 핵심이다. 공부의 긴장을 잠시라도 끊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퇴계는 ‘경’을 ‘옷깃을 여미는 것’이라 했는데, 나는 여기에서 ‘간단없음’을 잔잔한 긴장을 계속해서 유지하는 것으로 본다. 쉽게 설명하면 퇴계가 언급한 “생각하고 풀어 보면서 스스로 이해되기를 기다리는데, 그런 생활을 오늘도 하고 내일도 한다”가 곧 간단없는 공부의 요체다. 안동 사람들 특유의 공부 열풍과 인다안동人多安東의 비밀은 바로 이 간단 없음의 자세에서 비롯되었다. 이중환이 목격한 당시 안동 사람들은 “외딴 마을, 가난한 사람 할 것 없이 누구나 글을 읽었으며, 도덕과 품성을 소중하게 생각했다”. 이는 우연이 아닐지니 바로 이 ‘간단없음’ 때문이었다.
한때 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은 적이 있는데, 그때 공부 잘하는 방법으로 간단없음의 자세를 거듭 생각했다. 이른바 퇴계식의 공부 방법을 실천해보고 싶었다. 퇴계식의 공부 방법은 다름 아닌 경 사상을 실천하는 것이었다. 퇴계의 일상을 목격한 제자들의 기록을 보면 퇴계는 “아침에 일어나 의관을 단정히 하고 종일토록 그런 자세를 잃지 않았다”고 했는데, 이것이 곧 경의 자세였다.
퇴계 제자에 대제학이 몇 명이고 정승이 몇 명이라는 등의 말을 하지 않더라도 도산서당에서 유난히 뛰어난 학생들이 많이 배출됨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앞서 거론한 천운대와 천연대의 명칭 부여도 사실은 퇴계가 학생들에게 무언중에 던진 화두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도산서당에서 퇴계를 다시 이해하고자 한다면 그의 공부법을 음미하라고 하고 싶다.
이런 생각을 하며 다시 농운정사를 나와 도산서원으로 오르니 길 가에 매화나무가 있다. 근년에 심었는데 이미 상당한 고목이 되었다. 도산서원에서 다른 것은 몰라도 이 매화는 꼭 봐야 한다. 매화는 퇴계의 분신이자 친구이며 동반자였기 때문이다. 퇴계는 죽기 전, 매화 시 91수를 골라 시집을 만들어 남기기도 했다. 그래서 도산서당에서 한참을 보냈듯이 이 매화에 잠시나마 서성거려 봄도 괜찮을 것 같다.
매화는 퇴계에게 최고의 벗이고 최후의 벗이었다. 임종 최후의 인사가 매화와의 별리였다. 설사를 한 적이 있었는데, 퇴계는 그 불결한 냄새를 의식하여 매화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그리고 긴 이별시를 지었다. <도매고종陶梅告終(도산 매화와 영결하다)>이라는 시로, 구절마다 ‘매梅’자가 들어 있어 퇴계가 얼마나 매화를 사랑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워낙 장문이라 일부만 소개한다. 일부러 ‘梅’자를 좀 진하게 해보았다.
그대와 일찍 매화를 구경하기로 했으나 與君賞梅曾有諾
매화 향기 날 때 나는 언약 저버렸네. 及到梅香我負約
도산 매화 마음에 새긴 채 心期獨在山中梅
밤마다 꿈속에서 매화를 찾아보네. 溪夢夜夜深梅萼
어제 그대와 절우사를 찾았건만 昨日梅社共君來
매화나무 삭막하여 나는 못내 슬펐노라. 梅興索莫令人哀
여덟 그루는 죽은 가지만 남았고 八梅風烟但空枝
한 그루는 아직 피지 않았네. 一梅數萼猶未開
지팡이 짚고 둘러보니 杖藜吟梅繞百匝
겨울 귀신 매화를 상하게 했네. 冥頊胡爲我梅厄
그대 집 매화와 비교하지 말게 不比君家梅得暖
도산은 바람 많고 추위 심한 곳이네. 梅社風多寒更虐
내 하늘에 글 올려 매화 원혼 하소연하고 我欲牋天籲梅寃
글 지어 매화 영혼을 부르나니. 我欲作辭招梅魂
한 맺힌 매화 혼 하늘도 가련히 여겨 梅寃悄結天所憐
매화 혼 돌아오면 내 반갑게 맞이하리. 梅魂歸來我所溫
복사꽃 오얏꽃 매화 질투하여 向來桃李妬梅魄
다투어 피어 고결한 매화 시샘하지만 奢華競笑梅孤潔
우리 매화 뿌리만 남았다면 但使吾梅本根在
잠시 못 본다 해도 염려될 것 없으리. 一閟英華梅豈缺
4) 광명실과 이주부공
매화나무를 뒤로하고 도산서원을 오른다. 사실 서원은 그리 매력 있는 건물은 아니다. 공부하고 추모하는 공간이니 매력이 있을 것이 없다. 그렇지만 도산서원은 좀 다르다. 다른 서원들이 대부분 추모 기념 건물로 지은 것인 반면, 도산서원은 퇴계가 직접 학생들을 가르친 장소에, 그것도 제자들에 의해 지어졌으니 그러하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도산서원은 한국의 대표적 서원으로 손색없다. 그래서 둘러볼 만하다.
도산서원을 오르면 정문 좌우에 누각 같은 대칭의 건물이 보인다. 동광명실과 서광명실인데, 통칭 광명실光明室이라 한다. 동광명실은 1819년, 서광명실은 1930년 지었다. 동광명실에는 퇴계 관련 서적이 보관되어 있고, 서광명실에는 일반 문서가 있다. 도산서원 문고인 셈이다.
‘광명’은 주자의 시 “만 권 서적이 은혜롭게 나를 밝혀 준다[萬卷書籍 惠我光明]”에서 인용했다. 도산서원의 온갖 귀중한 서책, 고문서가 여기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최근 국학진흥원으로 옮겼다. 전에 단 한 번 조사하여 《도산서원 고문서》라는 이름으로 두 권의 책을 간행한 적이 있지만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동안 이들 고문서는 “한 번 나가면 잃기 쉽다書出易失”는 이유로, “서원 밖으로는 절대 나갈 수 없다書不得出”라는 원규에 의해 한 번도 밖으로 유출된 적이 없다. 그런 연유로 실체적 조사에 어려움이 있었고 국가 문화재로도 지정할 수 없었다. 나는 이런 측면이 안동다움의 한 면이라 생각한다. 남이 무엇이라 하든 시대가 어떻게 흘러가든 그런 것에 그리 민감하지 않고 묵묵히 주관대로 사는 사람들.
그 옛날에도 그런 분이 있었다. 동광명실 현판에 쓰여 있는 이주부공李主簿公이라는 사람이다. 이 현판은 도산서원 경내의 현판 가운데 가장 특이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한 개인의 공로를 기려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주부공은 누구이고, 무엇 때문에 그를 기린 현판이 광명실 위에 걸려 있을까?
이주부공은 주부 벼슬을 역임한 이운李芸(1568~1638)이라는 분으로, 임진왜란 당시 퇴계 위패를 온몸으로 지켰다. 광명실에 그를 기리는 현판이 걸려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지금 도산서원에 보관되어 있는 서책, 집기, 고문서의 보존 역시 주부공의 공로가 여간 크지 않다. 이휘영의 글에 “공은 자나 깨나 도산에서 생활했고 도산에서 죽었으며 생사가 도산에 있었다”고 했다. 이에 그를 영원히 추모할 것을 결의했다. ‘서원완의書院完議’는 이러하다.
“농암 선생의 증손자인 주부공께서 왜란 당시 서원 위패를 받들어 병화를 피하도록 했으니 그 공로는 잊을 수 없다. 이에 서원당회는 매년 3월 11일 기일, 쌀 한 말, 고기 몇 마리, 꿩 한 마리를 보내 영원토록 존모하도록 결의한다.”
원문: 聾巖先生曾孫主簿公 當壬辰亂 奉出本院位版 以避兵禍 其功勞不可忘 玆以堂會齊議 每年三月十一日忌日 自院中米斗魚尾雉首備送 以爲永久遵行之事
‘완의完議’란 ‘완전한 결정’이고 영원한 결정이다. 도산서원은 원규에 의해 운영되고 그 원규는 완의를 거쳐야 하고, 그 완의는 도산서원당회에서 결의한다. 주부공 추모는 퇴계 후손의 전 문중 차원에서 결정되었다.
이야순의 행장, 이휘영의 묘갈명과 현판 글, 이만도의 갈명후지, 이가순의 통문, 이만각의 입석일기발문, 이만운의 유적후지가 있으며, 퇴계 후손의 대표적 학자들 대부분이 추모 글을 썼다. 그뿐만이 아니다. 주부공의 묘소를 이장하여 비석을 세워 단장하고, 그 기록을 상세히 남겼다.<지산실기 芝山實記>가 그 책이다. 이로써 신화가 만들어졌다.
퇴계에게 주부공은 배점裵漸, 두향杜香에 이어 또 다른 신화를 남긴 인물이다. 배점과 두향의 신화는 퇴계 생전에, 주부공은 사후에 만들어졌다.
배점은 대장장이였다. 퇴계가 백운동서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니 배점이 마루 아래에서 엿듣고 배웠다. 퇴계는 이런 배점을 보고 불러들여 배우게 했다. 퇴계가 떠나자 배점은 철상鐵像을 만들어 모시고 추모했고, 퇴계가 죽자 삼 년 상복을 입고 제사를 지냈다.
그후 풍기군수로 부임한 창석 이준이 배점을 찬양하여 시를 짓고, 후손들이 빗돌을 세웠다. 이 빗돌은 아무도 돌보지 않아 방치되고 도로공사로 매몰되어 가던 것을 고故 청민 권오봉 교수에 의해 극적으로 세상에 알려졌고 지금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마을 이름도 ‘배점리’이고, 교명도 배점초등학교다. 이로써 신화가 완성되었다.
퇴계 신화를 말할 때 흔히 제자 가운데 정승 몇 명, 시호 받은 분이 몇 명 식으로 말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퇴계를 진정 다시 보게 하는 것은 공경대신이 아니라 바로 이런 분들의 존재 때문이 아닐까? 이분들의 이야기는 퇴계가 왜 훌륭한 인물인지를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증거가 된다.
사진: 광명실 문 자물쇠에 쓰인 ‘謹封’
해설: 책의 반출을 막기 위한 유사有司의 도장이 찍혀 있다.
5) 도산서원
서원 문을 오르니 좌우에 동재, 서재가 있고, 강당 정면에는 석봉 한호가 어전에서 썼다는 ‘도산서원陶山書院’ 글씨가 한눈에 들어온다. 강당과 동재와 서재는 도산서당과 농운정사의 확장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도산서원 관람은 서당 영역과 서원 영역으로 구분해서 봐야 한다. 서당은 퇴계의 영역이고 서원은 제자들의 영역이다. 퇴계를 이해하려면 서당을 볼 일이고, 그 영향을 알려 한다면 서원을 보면 된다. 관람의 진수는 물론 도산서당이다. 그러나 도산서원 역시 수다한 사연이 쌓여 역사가 되었다.
지금 서원은 화사하게 채색되어 있다. 박대통령 당시 정부에서 했다. 서원은 화려하지 않다. 가난한 시골 선비들이 모여 공부하고 수양하기 위한 집이다. 학생들이 모이니 규모는 어느 정도 갖추어야 한다. 그러나 채색은 전연 어울리지 않는다. 더구나 도산서당의 절제된 미의식을 생각하면 이건 더욱 말이 안 된다. 도산서원 전체의 부조화에 이 도색도 한 몫 하고 있다.
병산서원은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나 도산서원은 그렇다고 하는 사람이 없다. 왜 그럴까? 역시 터의 문제와 연관된다. 도산서원은 도산서당으로 완벽한 공간이었다. 도산서당 건물을 중심축으로 두고 보면 앞과 뒤는 이미 알맞은 공간 분할이 되어 있다. 앞뜰과 후원의 배치가 그렇고, 퇴계의 세심한 설계 구도가 그렇다. 이런 후원에 거대 구조물이 들어섰으니 조화는 깨질 수밖에 없다. 한정된 공간에 큰 집을 지으려니 어쩔 수 없는 그림이 되었다. 여기에 광명실, 장판각, 고직사, 옥진각 등의 건물이 후일 계속 비집고 들어서서 더욱 답답하게 되었다. 이것이 도산서원 건축의 한계이자 숙명이다.
그러나 이런 논의는 어디까지나 도산서당의 존재에 많은 의미를 부여할 때 그렇다는 것이지 도산서원 전체를 보면 “아늑한 임만林巒 속에 완족完足한 자기 세계를 이루고 있다”는 이우성 선생의 평가가매우 온당하다. 도산의 아름다움이란 사실 그의 중심에 자리한 도산서원의 존재로 인해 더해졌으니까 말이다.
지금 서원에는 연일 많은 관광객이 온다. 강당, 동재, 서재를 우선해서 본다. 동재는 임원 숙소로 박약재博約齋라 하고, 서재는 학생들의 공부방인데 홍의재弘毅齋라 한다. ‘박약’은 《논어》의 “널리 배우고 예로서 몸가짐을 한다博學於文 約之以禮”에서, ‘홍의’는 “선비는 마음가짐을 넓고 굳게 해야 한다. 책임은 무거우나 진리는 멀리 있기 때문이다士不可以不弘毅 任重而道遠”에서 딴 것이다.
강당은 ‘전교당典敎堂’이고, 강당마루 서편에 ‘한존재閑存齋’라는 원장의 방이 있고, 방문 옆에 초헌관, 아헌관, 종헌관으로 시작하여 끝에 ‘원原’이라고 쓴 현판이 걸려 있다. ‘원原’은 ‘끝’이라는 의미다. 이 명단이 서원의 제사, 즉 향사享祀의 임원 명단이다. 초헌관은 처음, 아헌관은 다음, 종헌관은 마지막에 술잔을 올리는 사람이다. 음식을 차려놓고 술 석 잔 올리는 의식이 곧 향사이고 제사다. 석 잔 정도가 적당하다고 생각했다. 이것도 좀 많다고 생각하여 종헌관은 ‘제작除酌’이라 하여 조금 덜고 올린다. 과음을 고려한 예법이다. 대표제관 세 분의 석 잔 정도의 술잔 올림과 이에 대한 다른 제관의 도우미 행위가 제사의식의 근간이다. 유가 제사 골간 대부분이 그렇다.
‘향사’는 제사 자체보다 준비절차가 볼 만하다. 도산서원 절차는 더욱 볼만하다. 제수를 점검하는 ‘간품례看品禮’라는 의식이 있는데, 그 가운데 ‘돼지고기 품질검사’는 매우 흥미롭다. 희생할 돼지를 전교당 뜰에 묶어놓고 제관들이 좌우로 도열해 서면, 유건을 쓴 유사가 ‘충充’ 이라 말 한다. 그러면 갓 쓴 헌관이 앞으로 나와 ‘돌腯’ 하고 대답한다. ‘충’은 “돼지가 쓸 만합니까”의 물음이고, ‘돌’은 “살찌고 괜찮다”는 의미의 답변이다.
나는 유교적 제례문화가 매우 합리적이어서 오늘날에도 상당한 경쟁력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인데 이 모습만은 왠지 낯설고 거북하다.
서원은 ‘존현양사尊賢養士’, 즉 추모와 교육이 그 본래의 기능이다. 그런데 지금 교육은 사라졌고 추모만 남아 있다. 교육이 본이고 추모는 말인데 본말이 전도되어 있다. 세월 탓이다. 교육기능을 회복해야 하는데 지금 모든 조건에서 밀리고 있다. 뿐만 아니다. 추모기능도 점점 사라지고 있다. 대부분의 서원은 휑한 무용지물의 건물로 남아있다. 급속히 역사의 뒤안길로 밀려나고 있다. 활용도를 모색하고 개방해야 한다. 사용하면 300년 , 사용하지 않으면 10년도 못가는 집이 우리 한옥이다.
도산서원은 변모하고 있다. 교육기능을 급속히 회복했다. 2003년 발족한 ‘도산서원선비문화수련원’이 개원되어 매년 적지 않은 사람들을 교육시키고 있다. 나도 외람되게 초기부터 참여했는데 점점 프로그램이 알차지면서 신청자가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참으로 고무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도산서원 같은 유서 깊은 건물에서 며칠간의 교육이라면 그 내용이 무엇이든 어떠하랴. 그냥 머물며 빈둥빈둥 보낸다 해도 본전은 뽑을 터! 더구나 훌륭한 강사에 무료교육이니 그야말로 한국최고의 연수교육이다. 참다운 선비교육은 어느 시대에나 필요한 법이다.
서원 주변으로 동편에는 퇴계 문집을 인쇄한 장판각이 있고, 뒤에는 퇴계 위패가 모셔져 있는 사당인 상덕사가 있으며, 서편으로는 고직사가 있고, 그 아래에는 유물 전시관인 옥진각이 있다.
옥진각은 들를 때마다 유감스러운 생각이 난다. 퇴계 관련 유품이 그렇게 많이 남아 있음에도 전시된 모습은 너무 초라하다. 물론 터의 제약 때문이겠지만, 지금 보면 장소, 규모, 전시 모든 부분이 주먹구구식으로 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설계를 다시 하여 좀 더 잘 짓는다고 하니 두고볼 일이다.
옥진각 아래에 ‘역락서재亦樂書齋’라는 건물이 있다. 유일재 김언기의 제자 지헌 정사성의 아버지가 아들의 취학을 기념하여 퇴계에게 지어 준 집으로, 우리에게 ‘기부문화’에 대한 하나의 교훈을 준다. 무엇이든 기부하려는 자, 자신의 기부가 오래도록 잊혀 지지 않을 의미 있는 기부를 해야 한다고. 역락서재는 도산서원이 없어지지 않는 한 남아 있을 건물이고, 도산서원은 아마 지구가 없어지지 않는 한 남아 있는 건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도산은 퇴계 식의 가거지지이고, 도산서당은 퇴계 식의 전원주택이다. ‘경’ 실천의 적소였기 때문이다. ‘경’은 불가의 ‘선禪’과 흡사하다. 유가의 ‘간단’은 불가의 ‘화두’와 매우 유사하다. 선을 하여 ‘불타’가 되고자 했다면, 경을 통해 ‘성인’이 되고자 했음이 다를 뿐이다.
‘경’ 실천은 일상의 유유자적과 잔잔한 긴장을 함께 견지하는 방식이다. ‘글 읽기’와 ‘글쓰기’와 ‘학생교육’이 주요 수단이다. 주변 산천의 조용한 산책도 꼭 필요하다. ‘조용한 산책’은 베스트셀러 《화火》의 저자인 저 베트남의 탁닉한 스님의 수도방법을 연상하게 하는 요소가 있다. 도산서당이 도산 같은 터전에 자리 잡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퇴계 사후 추모학습 공간인 도산서원이 들어와서 외연이 넓어졌고, 안동댐으로 외형의 변형이 이루어졌으며, 지금은 관광지로의 여러 구조물이 들어왔다. 그럴수록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이런 문화유적 속에서도 그 본연의 참모습을 보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