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암선생 유적지_분강촌 ::::::::: 농암종택

6. 어찌 예안의 하늘이 경주의 하늘과 다르단 말인가

-도산서원의 시련-

1) 도산서원 서류사건

눈을 감고 아득한 어린 시절로 돌아가 본다. 그리고 도산서원의 환영을 그려 본다. 신작로를 따라 애일당과 분강의 구비를 지나, 운영대 아래의 낙락장송 솔밭을 지나, 천천히 계곡 물이 흐르는 곡구암 숲의 터널을 오른다. 눈길 미치는 서원 구석구석에 환영이 우정처럼 어른거린다. 그런데 그 환영 뒤에 또 다른 환영들이 떠오른다. 그 모습이 그렇게 낯설어 보이지 않는다. 그 환영을 똑바로 본다.

지금 도산서원은 만인의 문화 유적이다. 입장료 1,000원만 내면 누구나 들어갈 수 있다. 그러나 100년 전 도산서원은 전연 그렇지 않았다. 입장료를 지금의 100배를 낸다 해도 들어갈 수 없는 사람은 들어갈 수 없었다. 매우 배타적인 곳이었다 할 수 있다. 그런 도산서원에 누가 출입했으며, 또 그 장벽은 언제 무너졌으며, 그 과정에 어떤 일이 있었는가?

조선시대는 사士의 시대이고, 서원은 사의 의식화 교육 기관이다. 선비들의 숲, 즉 ‘사림士林’의 사설학원이 서원이었다. 이들은 ‘국國+가家’에 의한 권력 구조를 이성이 지배하는 ‘국國+사士’의 나라로 바꾸고자 했다. 고려시대는 전형적 국+가의 나라였다. 조선 전기도 그러했다. 권귀權貴라 불린 훈구, 외척은 새로운 가家의 등장이었다. 이를 타파하기 위해 사림은 목숨을 걸었다. 그것이 나라를 문명국으로 바꾸는 첩경이라 확신했다. 피를 흘리며 투쟁했고, 16세기 드디어 쟁취했다. 그러나 이상 국가의 형태도 잠시, 조선 후기에 오면 또 다른 강력한 가家가 등장하여 역사를 저 멀리로 후퇴시켜버렸다. 새로운 가는 국정을 전횡했다. 몇몇 가는 드디어 국을 넘어 버렸고 이런 국가 구조는 격변의 한말 나라 패망에 적지 않는 기여를 했다. 아니 결정적 기여를 했다.

사림들은 국가의 운명을 관학 성균관과 향교에 맡겨둘 수 없었다. 서원만이 사림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었다. 따라서 서원은 철저히 사림에 의한 사림을 위한 공간이었다. 도산서원 역시 예외일 수 없었다. 그런 도산서원이 언제 만인의 서원이 되었을까? 소수의 도산서원에서 만인의 도산서원이 되기까지 아무런 일이 없었을까? 있었다면 어떤 일이 있었을까? 중국 공자 유적이 한때 홍위병에 의해 처절하게 파괴된 사실을 상기하면 도산서원이라고 무사하기만 했겠는가? 격변의 시대에 아무런 일이 없었다면 그것은 차라리 큰 의미를 갖지 못하는 유적일 수도 있다.

지금 아무도 말하지 않고 아는 사람도 별로 없지만, 왕조가 몰락하는 격변의 20세기, 도산서원에도 세 가지 정도의 의미 있는 사건이 있었다. 더욱 놀라운 일은 도산서원에서 사건의 내막을 소상하게 기록해 두었다는 점이다. 그 대강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도산서원 출입을 요구한 서자들의 과격한 도전이다. 1884년에 일어났고, 도산서원에서는 이 사실을 기록해 놓았다. ‘도산서원서류사변일기陶山書院庶類事變日記’이다. 서원의 수노首奴는 맞아서 “피가 흘러 땅에 가득했고”, 임원은 “옷이 찢어지고 머리카락이 떨어지며 강물에 던져지기도” 하는 등 갖은 수모를 입었다. “서원이 창건된 이래 다시없는 극변”이라 했다.

극변이 발생한 연유는 한 장의 공문 때문이었다. 당시는 ‘관문關文’이라 했다. 1884년 11월에 내려온 관문에서 “서원에 서류 출입을 허용하라”고 하여 경주 옥산서원은 허락했다. 그렇지만 도산서원은 “이는 옥산서원에 국한되는 일로 도산서원과는 무관하다”고 하고 허용하지 않았다. 이에 분개한 서류들이 드디어 물리적 힘을 행사했다. 그들은 “하늘에는 두 개의 태양이 없고 백성에게는 두 임금이 없는데 어찌 예안의 하늘이 경주의 하늘과 다르단 말인가”라고 했다.

1885년 2월 10일에는 최대의 폭력 사건이 발생하여 “임원 모두 수모를 당했고, 심지어 종손에게 욕하고 종택을 파괴한다”고 했다. 관망하던 관이 드디어 개입했다. 소환이 시작되자 대원에 분열이 일어나 일부는 빠지고 일부는 구금되고 일부는 문벌門罰을 받았다. 문벌을 받은 세력은 이후 안동권 곳곳의 서류들과 연합하여 대립했다. 이 공방은 2년간 계속되었고, 결국 1888년 12월 서류들의 요구가 관철되었다. 서원 개방에 가장 보수적이던 도산서원에서 벌어진 이 사건은 한 시대가 붕괴되는 가장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사진: 도산서원 출입문

해설: 과거 곡구암으로 올라가는 수목의 계곡이 지금은 평지가 되었다. 그래서 나무들도 허리를 묻고 기이한 모습을 하고 있다.

2) 퇴계위패 도난사건

1901년, 도산서원에서는 실로 이해하기 어려운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사당인 상덕사의 자물쇠가 깨어지고 그 안에 모셔 둔 퇴계의 위패가 없어졌고, 몇 달 동안 그 행방이 묘연했다. 신축년에 일어나 ‘신축년 묘변’이라고도 한다.

예안군수가 감사에게 올린 보고서에, ‘萬古之變一國之驚慟哭閉閤府且待罪向事’이라 했다. 해석하면 “만고에 없을 변란이 일어 한 나라를 놀라게 했습니다. 통곡하며 엎드려 처분을 기다립니다”이다. 감사의 답은 “痛矣痛矣萬古之變出於我陶山夫子之廟巨惡之罪貫穹壤理必天誅鬼戮”라 했다. 해석하면 “통탄스럽고 통탄스럽다. 만고에 있을 수 없는 변고가 우리 도산 부자의 사당에서 일어나다니, 큰 악의 죄는 천지를 뚫었으니 반드시 천벌을 받으리라!”이다. ‘만고에 있을 수 없는 일’이 정말 일어난 것이다. 본부에 보낸 보고문에는 ‘해와 달이 빛을 잃었다(日月失色)’고 까지 했다.

감사는 나라에 전문電文을 보냈고, 장례원은 훈령을 내렸다. 당시「황성신문」은 “退溪先生神版見失事慶北觀察使李裕寅電報于內部.”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실었다. 장례원 관리 장화식張華植은 임금에게 “도산서원은 국학입니다. 이런 서원에 어찌 이런 일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는 사림의 극변일 뿐만 아니라 실로 국가의 원기와 관련되는 일입니다”라고 보고했다.

이 사건은 결국 이유인 경상감사가 수사본부를 도산서원에 설치하고 직접 조사했지만 끝내 미궁에 빠져 버렸다. 그렇다면 위패는 과연 어떻게 되었는가? 그것은 우연한 장소에서 우연히 발견되었다. 발견 경위는 이렇다.

1902년 2월 28일, 이중벽이 삵시골[狸谷]을 나와 월란사 아래를 지나가는데, 홀연히 이상한 마음이 들어 절벽 강변으로 내려가니 포개진 큰 돌 사이 넓은 공간에 퇴계 위패가 있는 것이 보였다. 모여든 후손들이 실성통곡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고, 종손이 모셔 내오니 넉 달이 지났지만 전연 손상되지 않았고 한 점 습기도 없었다.

발견 경위와 현장은 수사의 중요한 단서가 된다. 당연히 주변 탐문을 해야 하지만 범인 색출의 의지는 처음부터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사실 수사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일기에는 이상할 정도로 수사 관련 글이 적고, 그나마 이런 식이다. “감사가 사당에 들어가 담을 넘은 흔적을 두 번 점검했다道伯入廟庭再檢踰墻之跡”, “산야를 두루 정탐했으나 그림자도 없다遍野山偵探無影響”. 그야말로 ‘태산명동 서일필泰山鳴動鼠一匹’이었다.

그렇다면 수사는 왜 그렇게 소극적이었을까? 정녕 누구의 소행이었을까? 고로古老들의 증언과 일기를 통해 그 경위가 대략 유추된다. 그러나 지금 확실한 증거가 남아 있지 않고, 게다가 이미 시효가 만료된 사안을 직접 거론할 수 없다.

그런데 이 사건은 이 무렵 발생한 또 다른 충격적 괴변인 두 번의 퇴계 종택 방화 사건과도 전연 무관하다고는 할 수 없다. 퇴계종택은 분명한 방화로 2번이나 전소되었다. 처음 방화가 일어난 해는 1896년이고 두 번째는 1907년이다. 그러니까 1884년의 서류사건과 1901년의 위패도난사건발생 전후로 일어났다. 방화 사건은 그 누구도 말하지 않고, 그 누구도 아는 사람이 없다. 당시 모두 화적떼의 소행이라 했지만, 그 화적떼라 지목된 사람들은 결국 누구인가? 격심한 신분 갈등이 이런 충격적 사건으로 외연된 것일까? 나는 화적이 어떤 부류의 인물인지 모른다. 그러나 계급적 모순을 타파하고자 저질러진 사건이라면 그 많고 많은 종택 가운데 왜 하필 퇴계 종택이 대상이 되었을까? 많고 많은 불천위 위패 가운데 왜 하필 퇴계의 위패만을 대상으로 했을까?

사진: 퇴계종택(경상북도기념물 제42호)

해설: 퇴계종택은 1896, 1907년 거듭 방화로 소실되었고, 지금의 집은 1927년 후손과 사림들이 모금하여 3년에 걸쳐 지었다. 이 사이 종택은 온혜리 ‘홍주영감댁’으로 옮겨와 있었다. 참고로, 『退溪先生言行錄』의 목판 뒤에는 “大正11년12월30일 초판발행, 편집자 발행자 李忠鎬, 주소 ‘경상북도 안동군 도산면 온혜동 1066번지’로 되어 있다.

1896년 방화사건은 모른다. 그러나 1907년 방화사건에 대해서는 두 가지 정도 단서가 있다. 당시 신문은 ‘일제 앞잡이의 소행’이라고 했다. ‘화적떼’와 ‘일제앞잡이’이라는 두 시각을 정리해보면, 불만세력을 앞세워 저지른 일제만행인 셈이다. 일제가 민족문화의 상징성과 퇴계후예들의 결연한 독립운동에 대한 견제의 충격요법으로 서원과 종택을 선택했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따라서 소극적 수사는 명분을 앞세운 의병과, 여러 측면에서 수세에 몰린 사림의 위상과, 일제 침략의 마수가 암약하는 과도기적 상황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도산서원과 퇴계 종택은 바야흐로 구체제의 상징적 존재로서, 혹은 일제의 민족 문화 말살 정책의 실질적 대상으로서 인식되었다.

다른 하나는 당시 위패보존과 관련된 농암종택의 대응 관련 기록이다. 필사본 『분암집汾菴集』에는 당시 농암종택을 실질적으로 관리하였던 이유헌李裕憲 종손의 동생 이유용李裕容의 ‘가장家狀’과 ‘묘갈명墓碣銘’에 이런 기록이 보인다.

이때 안동의병이 관군에 의해 패하니, 흩어진 병사들이 혼란을 틈타 일본군의 노략질을 염려하여, 그 토벌을 명분으로 수색하니 온 마을들이 시끄러웠다. 부군府君이 종택에서 심사숙고하여 드디어 효절공(농암 이현보)의 위패를 지고 달밤에 걸어서 용두산 아래 ‘도곡재사道谷齋舍’로 가서 한 장소를 만들어 보관했다.

원문: 是花山義陣爲京軍所罷散兵乘亂㥘略日本兵以搜討爲名閭里騷然府君燕居深念遂背負孝節公木主乘月徒步轉至龍山之道谷權奉齋菴仍築室居之

분명한 것은, ‘흩어진 의병들’이 일본군의 토벌을 명분으로 수색하여 온 마을들이 시끄러워졌고, 이때 농암종택에서는 농암의 위패를 달밤에 걸어서 도산에서도 오지에 속하는 용두산 기슭 어느 은밀한 장소에 보관했던 사실이다. 신성불가침의 ‘불천위위패’가 지금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그런 상황이었다.

‘흩어진 의병들’이 ‘일본군 토벌명분의 수색’으로 빚어진 사건 하나가 ‘용수사龍壽寺’ 방화였다. 안동시 도산면 운곡동에 있었던 용수사는 고려시대 왕명에 의해 지어진 천년고찰로 그때까지 고색찬연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농암, 송재, 퇴계, 온계가 공부한 매우 유서 깊은 사찰이기도 했다. 지금 남아 있었다면 한국 최고의 목조건물로 봉정사와 부석사의 건축물과 여러 측면에서 비교되었을 것이지만 불행하게도 지금 남아 있지 않다.

1901년 11월 1일, 사건이 알려진 지 4, 5일 만에 수백 명의 유림이 달려왔고, 잠깐 사이의 부조가 무려 6, 7천량에 이르렀다. 11월 16일, 도산서원 앞 시사단 강변에는 3천여 명이 모였고, 다음날 위패를 봉안하고 고유告由했다. 고유문에는 “이제 위패를 제작하여 옛 자리에 받들어 모셨습니다. 사시에 위안제를 거행하려고 하여 삼가 고하나이다”라고 되어 있다. 이로써 사건은 종결되었다. 사건 발발 17일 만에 거도적 유림 행사로 매듭되었고 무성한 뒷말을 남겼다. 유림의 압도적 참여와 관심은 체제 붕괴에 대한 공포감과 더불어 일제에 대항하는 집단시위의 의미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여담이지만 당시 유림의 대응방법은 매우 흥미롭다. 우선 지방紙榜을 만들어 모시고 고유했다. 고유문에는 “하늘이 유교를 버리시어 도적이 사당을 범했다. 지방을 써서 모시고 감히 그 연유를 고하나이다”라고 되어 있다.

다음으로 서원 임원들이 관리 소홀의 책임으로 벌을 받았는데, 벌은 한자 8글자였다. ‘불신봉수 죄당삭벌不愼奉守罪當削罰’. 풀면, “삼가 지키지 못했으니 그 죄가 벌을 받아 마땅하다”이다. 그리고 진도문 밖에 꿇어앉아 벌 받기를 요청하는 후손들에게는 전교당 서쪽 기둥에 ‘불심위호 난면삭벌不審衛護難免削罰’이라 했다. 그리고 지역 유림에게는 동쪽 기둥에 ‘불심봉위 오득면벌不審奉衛烏得免罰’이라 붙였다. 전자는 “지키지 못했으니 벌을 면하기 어렵다”고, 후자는 “지키지 못했으니 어찌 벌을 면할까”이다. 전자는 직접적인 책임을 묻고, 후자는 연대책임을 물은 결과이다.

‘벌을 면하기 어렵다’, ‘어찌 벌을 면할까’의 ‘열여섯 글자’가 곧 벌이다. 세상에 이런 벌이 어디 있을까. ‘솜방망이 처벌’도 이보다는 엄하다. 글자 몇 자로 그만이다. 그러나 오해하지 마시라. 조선시대 사대부에게 가장 무거운 벌은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 이보다 더한 벌이 없었다. 임원은 포박을 자청하고, 후손은 석고대죄하고, 유림들도 벌 받기를 자청했다. 타인이 벌을 주기 전에 자신이 먼저 벌을 받고 있다. 이런 시대였다. 그렇지만 이런 벌이 지금 그 ‘학교’라는 곳에서 몇 년을 살고 나오는 사람의 벌보다 그 처벌 강도는 무겁지 않았을까. 이런 기록에서 조선시대의 ‘처벌문화’의 한 단면을 보게 된다.

사진: 도산서원고문서

해설: 11월 21일, 유사들이 회계문서, 일지, 비용처리 등을 자세하게 기록했다. 부조에서 경비를 제하고도 1500량이 남았다. 부조 가운데는 멀리 밀양교동, 충청예산, 경주산대, 옥산서원, 거창한산, 전동, 의령허씨문중, 감천유씨, 선산허씨, 고령도진, 영산신씨, 김해향교에서도 했는데, 일기는 이를 별도로 기록했다.

3) 도산서원 철폐운동

세 번째는 ‘도산서원 철폐 운동’이다. 도산서원을 아예 철폐해 버리자는 것이었다. 1925년 10월, 도산서원 소유 토지의 소작농이 제 때에 소작료를 내지 못하자 서원에서 이들을 매질한 일이 있었는데,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철폐 운동이 일어났다. 주로 사회주의 계열의 인사들에 의해 부각된 사안으로 그들의 사상과 연관된다. 이들은 단체를 조직하여 항거하면서 도산서원은 민중의 방해물이며 죄악의 소굴이라 했다. 마치 중국의 홍위병이 공자를 부정하고 공자 유적을 무차별 파괴한 사건을 연상하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당시 사건을 보도한 신문기사는 다음과 같다.

죄악의 소굴인 도산서원은 일반 민중의 방해물이므로 이면에 잠재한 죄악을 일일이 조사 적발하여 사회에 공개하는 동시에 희생적 정신으로 철폐하기로 함. 도산서원을 옹호하여 반동 세력을 조장하는 무리는 명부를 작성하여 사회에 공개하고, 애매한 구실로 도산서원 죄악 성토 강연회를 금지한 경찰 당국의 태도는 악습을 조장하고 민중을 무시하는 것으로 인정하고 책임기관에 탄핵할 것.

(1925년 11월 27일 동아일보)

서원은 구체제의 상징이고, 퇴계는 그 상징적 인물이다. 격변의 시대에 구시대의 상징물을 충격적 방법으로 공격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파괴함으로써 존재 조건을 확보하고자 한다. 마치 레닌 동상이 소련 붕괴와 더불어 무참히 수난을 당한 일처럼 도산서원은 과거 청산을 부르짖는 사회주의 계열의 인물들에게는 상징적 표적이었다.

당시 도산서원 철폐 운동의 대표적 인물의 한 분인 김남수의 경우 퇴계, 도산서원은 도저히 타도할 수 없는 대상이었다. 김남수에게 퇴계는 조상들의 스승이었으며, 도산서원은 조상들이 지은 집이고, 부친은 도산서원 관리 책임자로 있었다.

그러니까 김남수는 광산 김씨 예안파의 작은 종택인 ‘탁청정金綏家’ 종택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는데, 아버지 김영수는 이때 도산서원원장이었다.

4) 시련을 넘어

도산서원이 오늘 같은 역사적 유물이 되는 데는 대체로 이런 과정이 있었다. 안동댐은 이러한 변모의 막바지에 나타난 최후의 사건이었다. 그러나 그 파괴력은 전일에 출몰한 사건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전자가 신분, 이념에 의한 것이라면 후자는 경제 논리에 의한 것이었다. 안동댐의 공식 명칭은 ‘안동다목적댐’이었다. 목적이 많은 댐이었지만 도산 보존은 목적이 되지 못했다. 외내, 부포, 부내, 의인, 하계, 원촌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도산서원은 결국 도산과 도산 9곡의 마을을 수장한 대가로 잡힌 최후의 인질이 아닐까? 박정희 대통령은 도산서원 성역화 사업 낙성식에 참여했고, 지금 논란이 많은 금송金松 한 그루를 도산서당 앞에 심었다. 그것으로 역사는 완료되었다.

강을 따라 형성된 마을과 그 마을을 중심으로 형성된 안동문화는 그렇게 수장되어 갔다. 그리고 사람들이 떠난 절해고도에 오늘 같은 모습의 서원 하나만이 외로이 남아 있다. 물에 갇힌 도산서원이 물속에 잠긴 시사단試士壇과 무엇이 다르랴! 물에 잠긴 시사단은 애처롭고 물이 빠진 시사단은 흉물스럽다. 지금 시사단의 모습은 차라리 슬프다.

안동댐이 들어선 것이 1975년이니, 30여 년 전 문화는 그 정도의 배려를 받았다. 가정이지만 지금 안동댐을 건설하려면 동강댐 100배 이상의 저항을 받았을 것이다. 가정이지만 안동댐의 수위를 불과 몇 미터만 낮추었다면 도산은 고스란히 보존되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도산은 지금의 하회마을 100배 이상의 문화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지 않았을까? 도산 9곡을 따라 형성된 마을과 유적은, 내 생각으로는 안동 문화를 대표함은 물론이고, 가히 한국 문화 1번지라 해도 전연 손색없는 곳이었다.

세월은 흘러 이제 도산서원은 역사의 흔적, 즉 유적이 되었다. 2001년은 퇴계 탄신 500주년으로, 퇴계를 기억하고 추모하는 세계 유교 축제가 다양하고 성대하게 개최되었다. 그 다음해에는 여성들에게 마지막 성역이던 서원의 사당-상덕사-마저 개방했다. 언론은 ‘500년 만의 개방’이라 했다. 이로써 도산서원은 이제 그야말로 만인이 출입할 수 있는 유적이 되었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까지는 이러한 통과의례가 있었던 것이다.

사진: 예안신단지의 ‘핵폐기물유치홍보’ 현수막.

해설: 안동댐으로 인해 집단 이주한 예안신단지(지금의 도산면 서부동) 주민들이 울진, 영덕 주민들의 ‘핵폐기물저장소건립’을 격렬히 반대할 무렵 이들 주민들은 도리어 유치하고자 했다. 생존을 위한 극단적 표현이었다. 집단이주를 했지만 생계가 막연한 이들이 선택할 대안은 어디에도 없었다.

사진: 물에 잠긴 시사단과 도산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