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암선생 유적지_분강촌 ::::::::: 농암종택

3. 이 몸이 자식에게 전하고 자식이 손자에게 전하여 저 알 수 없는 아득한 세대에 까지 잊지 말고 이어진다면.

- 부포-

1) 예안주변

군자리를 돌아 나와 다시 국도를 오르니 곧 한국국학진흥원과 예안향교, 선성아문이라는 고건축이 있는 도산면 서부리가 나온다. ‘선성宣城’은 예안의 옛 명칭으로, 이곳에는 향교와 아문衙門이 있었다. 서부리는 과거 예안현 소재지였다. 지금 선성아문은 도산면사무소 서부출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이런 유적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 곳이 또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 대문 위에는 선성아문이라는 단아한 현판이 걸려 있는데, 그 글씨는 ‘선성 3필’의 한 분인 이숙량이 썼다.

사진: 선성아문

사진: 석빙고(보물 305호)와 재현한 장빙제 모습

해설: 낙동강 은어는 예안이 산지였고, 은어진상은 현감의 주요 임무였다. 지금 도산서원주차장 아래 여울에는 어망이 설치되어 있어, 농암과 퇴계가 이를 피해 만나자는 기록이 문집에 보인다. 지금 석빙고는 영조13년(1737년) 예안현감 이매신李梅臣이 축조했다.

사진: 선성객사(경북유형문화재 29호)

해설: 숙종38년(1712년) 지어진 선성객사는 안동댐 민속박물관 주위로 이건한 ‘석빙고’와 더불어는 과거 예안아문에 소속된 건축물들이다. 댐 월영교 뒤편으로 보이는 선성객사의 야경은 매우 아름답다.

한국국학진흥원(이하 국학원)의 건축은 여러 부정적 요인을 안고 출발했다. ‘국학國學’이란 단어처럼 다소 막연한 건물이었다. 예산 관계로 경상북도와 안동시가 서로 그 관할을 떠넘기려 할 정도로 애물단지가 될 가능성이 농후한 건물이었다. 그런데 개관한 지 2년이 지나면서 놀라운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국학원은 세계문화유산지정에 착안, 활로의 일환으로 목판 10만 장을 모으기 시작했다. 해인사 팔만대장경을 의식한 것이었다. 2002년부터 그 사업을 추진했는데 짧은 기간 4만여 점이란 놀라운 양의 목판을 모았다. ‘모았다’고 하기보다는 ‘모였다’고 함이 옳은 표현이다. 각 문중에서 보관에 어려움을 느끼고 있던 시점에 국학원이 손을 내민 셈이었다.

이와 함께 생각하지 못한 일이 부수적으로 일어났다. 안동 일원에 소재한 문중, 종택, 서원에서 보관해 오던 고문서, 한적, 초상화 등의 진귀한 문화재가 그야말로 물밀듯 밀려온 것이었다. 위탁제도가 이를 더욱 촉발시켰다. 목판과 함께 위탁되기 시작하여 3년 여 사이 무려 300여 종택, 문중에서 10만여 점에 이르는 문화재가 들어왔다. 안동이 아니면 생각할 수 없는 실로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이었다.

국학원은 이런 현상에 고무되어 그동안 문중유물특별전, 선비문화특별전, 목판전시회 등의 사업을 의욕적으로 추진해 왔다. 그때마다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으며, 우리 것에 대한 향수를 진하게 느끼게 했다. 이제 유교박물관까지 마련했으니 실로 국학의 산실로 손색이 없다. 목판 10만 장 수집은 국학원 최대 과제다. 아직까지 망설이는 분이 계신다면 주저 없이 기탁하여 우리 문화유산이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국학원을 나와 몇 걸음 지나면 예안향교가 나온다. 《선성지》에 “영남 여론이 모두 여기에서 나온다”고 할 만큼 지난날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한 향교다. 안동향교를 넘어서는 측면이 없지 않았다. 그럼에도 향교란 이미 역사의 뒤안길로 잊혀 가고 있다. 많은 고문서가 남아있고 여전히 의식도 행하지만 과연 언제까지 그런 전통이 이어질까?

마당에는 무궁화 한 그루가 있다. 너무 늙어 꽃을 피울 것 같지 않다. 100년이 넘은 토종 무궁화라고 한다. 언제까지 꽃을 피우게 될지 알 수 없다. 그래서 그런지 무궁화는 퇴락하고 이끼 낀 예안향교를 더욱 상징하는 듯하다.

사진: 예안향교(경상북도 유형문화재 28호)와 무궁화

해설: 예안향교의 고문서는 국학원에 기탁되었고, 지금 마루에 모재 김안국이 “오직 『소학』을 가르쳐, 학생들을 날로 새롭게 하고자 했다”는 시가 새겨진 현판이 있다.

2) 물에 잠긴 부포

향교를 나와 차로 2분 정도 올라가다 보면 길가에 ‘월천서당月川書堂’이라는 안내판이 좀 비스듬히 서 있다. 안내판을 따라 5분 정도 들어가면 문득 넓은 호수가 나온다. 호수 이쪽은 다래[月川]이고 저편은 부포浮浦라는 지역이다. 배가 정박되어 있는 것을 보니 사람이 오가는 모양이다. 그렇지만 지금 주민 이외에 이 길을 가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댐 수몰 지역 대부분이 그러하듯 이곳 역시 호수의 쓸쓸함만 남아 있다. 사실 특별한 일이 아니라면 가 볼 필요도 없다. 나 역시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다. 그렇지만 지금은 가 봐야 한다. 가서 그 옛날 다래와 부포라고 부른 이 동리의 사람들의 이야기에 대해 써야 한다. ‘1,000년의 역사를 가진 동네’이고, 역동 우탁과 월천 조목의 고향만으로도, 혹은 역동서원, 월천서당, 성재종택, 부라원루 등의 유적만으로도 찾아볼 만하지 않은가!

부포는 과거 명촌이었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마을이었다. 안동댐 수몰(1974년) 이후 30여 년간 부포는 그야말로 물속 같은 아늑한 망각의 지역이 되었다. 그런 부포가 세상에 다시 알려진 것은 최근이다. 부포가 고향인 이원정 어른께서 <물에 잠긴 부포 역사>라는 글을 《사랑방안동》에 기고하고부터다. 이 글이 나오지 않았다면 부포는 어쩌면 더욱 오랜 세월 물속에 잠겨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른의 고향 유정은 절절하다. 그 한 부분을 옮겨 보면,

부포는 수백 두락의 넓은 들이 기름졌고, 초가와 기와집이 조화를 이룬 100여 대촌 마을로, 예로부터 수를 누리는 사람이 많아 수향壽鄕이라 했다. 고려 중기에 세워졌다는 고색창연한 부라원루가 마을 어귀에 세워져 있었는데, 현판 글씨는 유명한 한석봉이 썼다. 나는 이 부라원루에서 지은 월천의 시 한 수로 부포의 아름다움을 자랑하고자 한다.

물은 산을 감싸 안고 흘러가고

펼쳐진 들판은 하늘 끝에 닿았구나.

풍월의 흥은 어김이 없으니

우리는 곧 신선일레라.

부라원루 앞 강변에는 성재惺齋[금란수의 자]가 심은 소나무가 있는데, 월천은 이 솔밭을 ‘사평송’이라고 이름 지었다. 그때 원院에 올라 강을 바라보는 경치는 어떠했을까! 소나무 숲 사이로 멀리 월천서당이 어렴풋이 보이고, 소나무 가지에는 고매한 학이 앉아 운치를 더했을 것이다.

기름진 들, 수향, 부라원루, 월천서당, 사평송 등 이런 풍광은 곧 부포의 키워드다. 그 가운데 사평송으로 날아드는 수백 마리의 학은 부포의 오랜 그림이었다. 댐 이전까지 학들은 이 숲을 뒤덮었고, 그것은 그대로 부포의 표상이 되었다. 어린 시절 이웃 마을에 살던 내게 부포의 산허리로 오고가는 수많은 학들의 모습은 저 알 수 없는 피안의 세계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나는 그때 중얼거렸다. ‘저 새들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지금도 나는 그 학들이 그립다.

사진 : 물에 잠긴 부포 일대

해설 : 월천서당에서 바라본 부포 호수, 호수 건너 멀리 ‘성재종택’과 ‘부라원루’가 있겠지만 보이지 않는다.

사진: 학들이 다시 모여드는 부포 입구의 예안호수 주변

해설 : 사라졌던 부포의 학들이 최근 예안호수 산자락에 다시 모여들고 있다. 부포 학들의 후손인지 모를 일이다. 아마 그럴 것 같다.

3) 지부상소

그런데 부포에는 좀 더 일찍 들어온 인물이 있었다. 역동 우탁禹倬(1262~1342). 단양에서 태어났지만 만년에 이곳에 들어와 생애를 마쳤다. 문과 급제하여 성균관 좨주 등을 역임했다. 그가 감찰규정으로 있을 때 충선왕이 부왕의 후궁 숙창원비를 간음한 일이 있었다. 이에 역동이 백의白衣에 거적과 도끼를 메고 대궐 뜰에 나아가 소리 높여 간하니 동료들은 떨었으며 임금은 부끄러워했다. 이를 ‘역동의 지부상소持斧上疏’라 한다. 《고려사》의 기록은 이러하다.

경들은 왕을 가까이 모시면서 신하로서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지 못하고 나쁜 행실이 이 지경에 이르도록 했으니 경들의 죄를 아는가! 이런 일은 만고에 변할 수 없는 강상綱常의 윤리인데 어찌 이와 같은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나라의 흥망은 왕의 인仁과 불인不仁에 달려 있는 법입니다. 원컨대 왕께서는 하루빨리 마음을 돌리옵소서!

죽음을 무릅쓰고 ‘아니 되옵니다’고 한 충신열사는 많다. 그렇지만 도끼를 메고 자신의 말이 틀리다면 “이 도끼로 내 머리를 내리치라”고 한 인물은 역동이 처음이다. 그래서 지부상소는 전통이 되었다.

1591년, 풍신수길이 보낸 사신이 “명을 치기 위함이니 길을 빌려 달라”고 요구하자 조헌은 도끼를 들고 상경하여 그 사신의 목을 벨 것을 주장했고, 한말 강화도에서 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되자 최익현 역시 도끼를 들고 광화문에 나타나 지부상소를 올렸다. 최근에는 충청도 사람들이 행정 수도 위헌이라는 결과가 나오자 상경하여 지부상소를 했다고 한다.

우탁은 언제부턴가 이름보다 ‘역동 선생’으로 더 알려졌다. 중국의 역학[易]이 우리나라[東]로 전해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동국유사》의 기록은 이렇다.

우탁이 사신으로 들어가니 원나라 천자가 “그대는 역리易理를 아느냐” 했다. 답변하기를 “우리나라는 역이 없고, 또 아는 학자라도 어찌 통달한다 할 수야 있겠습니까. 역은 이학理學의 정수이니 바라옵건대 한 번만 보여 주시옵소서” 했다. 천자가 역 책을 내려주니 여관으로 돌아와 하룻밤 만에 다 읽고 돌려주었다. 다음날 천자가 “모두 읽었는가” 하니 답변하기를 “거의 보았습니다” 했다. 천자가 즉석에서 암송하도록 하니 거의 막힘이 없자 칭찬하기를 “아름답구나! 작고 궁벽한 나라에 있기는 아까운 인물이다. 주자가 다시 동방에 태어났구나!” 했다.

이런 역동이었지만 격변의 고려 말 그는 미련 없이 관직을 버리고 이곳 부포로 들어와 유유자적하다가 81세의 나이로 세상을 마쳤다. 일찍이 안향 문하에 있었는데, 안향은 눈을 감으면서 제자들에게 “그대들은 내가 죽거든 역동을 나와 똑같이 스승으로 섬기라”고 유언했다. 그리하여 역동은 안향의 제자이며 당대의 인물들인 권부, 백이정, 이제현, 이곡, 이조년, 안축, 김득배 등의 스승이 되기도 했다. 사후 성균관대사성 이색이 주청하여 ‘문희공文僖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역동은 조선조에 더욱 평가받았다. 태조는 “우탁은 도학을 밝혀 동방 이학의 조가 되었다”고 했고, 명종은 “불교를 배척하고 도학이 없어지지 않은 것은 오로지 이 사람에게 힘입은 것”이라 했다. 1570년, 역동을 다시 평가한 분이 있었으니, 퇴계가 바로 그다. 퇴계의 한마디는 추모 건물 역동서원을 짓는 결정적 동력이 되었다. 그리하여 안동 최초의 서원이 이곳 부포에 창건되었다. 이후 안동은 마흔 한 개의 서원이 세워져서 유교 문화의 중심이 되었다. 퇴계의 <역동서원기문易東書院記文> 한 대목은 이러하다.

선생의 충의대절은 천지를 움직이고 산악도 흔들 만하다. 경학의 밝음과 진퇴의 올바름은 후인의 사표가 되니, 백 세의 제향을 받을 자 선생이 아니면 그 누구이겠는가!

원문: 先生之忠義大節旣足以動天地撼山岳而經學之明進退之正有大過人者則爲後學師範可以廟食百世者非先生而誰哉

“경학의 밝음과 진퇴의 올바름”은 역동의 학문과 귀거래를 말해 준다. ‘물러남과 불러도 올라가지 않음’은 ‘진퇴의 문제’로 도학자들이 중요하게 여긴 필수 덕목이었다. 역동은 그 시대의 가치관으로 볼 때 도학자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리하여 서원을 지어 백 세 뒤에라도 추모해야 할 인물로 여겨졌다.

이후 역동을 추모하기 위한 공간으로 단양의 단암서원, 영해의 단산서원, 안동의 구계서원 등이 속속 건립되었다.

사진: 역동서원

해설: 안동댐으로 현재 안동대학교 구내로 이건 되었다.

4) 월천서당

역동을 생각하며 월천서당 푯말이 지시하는 길을 따라 들어가니 문득 눈앞에 넓고 넓은 호수가 나타난다. 호수뿐이다. 무엇 하나 남아 있는 것 같지가 않다. 그런데 둘러보니 산기슭에 월천서당이 보인다. 퇴계 3대 제자 중 한 분인 월천 조목趙穆(1524~1606)의 정자다. 올라가다 보니 퇴계가 쓴 월천서당 현판 글씨가 멀리서도 선명하다.

퇴계는 많은 현판 글씨를 썼다. 관물당觀物堂, 후조당後彫堂, 겸암정謙庵亭, 임연재臨淵齋, 설월당雪月堂, 선몽대仙夢臺, 성재惺齋, 경류정慶流亭, 송당松堂 등. 많은 사람들이 요청했고 써 주었다. 퇴계는 글씨를 써 주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사양한 것 같지 않다. 그런데 글은 그렇지 않았다. 매우 신중했다. 가령 비문은 잘 써 주지도 않았지만 써 주게 될 때도 사실 하나하나를 점고했고, 글자 하나하나를 따지고 따졌다. 적확성에 조금도 어긋나서는 안 되었다. 이는 조상과 인척이라도 마찬가지였다.

행장行狀에 대해서는 더욱 엄격해서 일생 동안 명종 임금을 제외하면 단 다섯 편밖에 쓰지 않았다. 농암 이현보(1467-1555), 정암 조광조(1482-1519, 충재 권벌(1478-1548), 회재 이언적(1491-1553), 그리고 촉망 받았지만 요절한 제자 금계 황준량(1517-1563)뿐이다. 퇴계는 당시 수많은 친지들로부터 행장을 지어 줄 것을 요청받았겠지만 승낙한 것은 이 다섯 사람이 전부다. 퇴계의 안목에 일대기를 써 줄 인물은 그 정도에 지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 엄격함은 행장의 표현에도 다시 세분하여 적용되어 38세에 죽은 정암과 충재보다 10여세나 적은 회재는 농암과 더불어 ‘선생先生’이라 하고 충재와 금계는 ‘공公’이라 했다.

당대의 인물에게 글과 글씨를 받고자 함은 인지상정이다. 그래서 부탁했고 지금 저렇게 남아 있다. 그런데 퇴계가 월천에게 이 현판 글씨를 써 주는 심정과 월천이 그것을 받아 새겨 거는 심정은 다른 제자들의 경우와는 다르다.

유일재 김언기가 생전에 퇴계에게 가지 않은 인물이라면, 월천은 퇴계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간 인물이다. 김언기가 철저한 독자주의자라면, 월천은 더할 수 없는 추종주의자라 할 수 있다.

충고는 인간관계를 손상시키는 특효약이다. 애정과 우정을 잘 가꾸어 가고자 하는 사람이 가장 유념해야 할 한마디는 ‘충고하지 마라’다. 혹자는 말할 것이다. 가족이라면, 진정한 친구라면 충고를 해주어야 하지 않느냐고. 맞는 말이다. 그러나 틀린 말이다. 충고는 애정과 우정에 금이 가게 하는 비수다. 금방은 모른다. 나를 위한 것이려니 생각한다. 그런데 그게 그렇지 않다. 어느 날부터 나를 위한 그 충고는 은근한 부담으로 남아 그와 내가 정서적으로 함께하기 어려운 사람이라는 것을 서서히 인식하게 만든다. 충고는 충고하는 사람의 처지에서는 꼭 해 주고 싶은 말이지만, 충고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리 도움이 되지 않는다. 힘든 일상에서 충고의 무거움을 즐겁게 안고 살아갈 사람은 흔치 않다. 칭찬이 아니라면 차라리 침묵이 낫다.

퇴계는 충고를 극도로 아낀 분이다. 충고는 곧 인간 관계에 상처가 된다고 굳게 믿었다. 형제들 사이에서도 “정성을 다하지 않는 충고는 상처만 남긴다”고 하며 매우 조심했다. 제자들에게도 그러했다. 제자들의 끊임없는 충고에 대한 열망에도 불구하고 퇴계는 충고하지 않았다. 이런 연유로 퇴계는 사관들로부터 “한 번도 남의 잘잘못을 말한 적이 없다未嘗言人之過”라는 평을 듣기도 했다.

그런데 오직 한 사람, 월천 조목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충고를 했다. 그것도 매우 아프게 했다. 월천은 아마 퇴계의 309명 제자 가운데 유일하게 충고를 받은 분이 아닌가 한다. 왜 그랬을까? 월천에게 한 충고를 통해 우리는 퇴계가 왜 위대한 교육자인지, 그리고 충고는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깨닫게 된다.

충고의 수단은 편지였다. 퇴계는 여러 측면에서 빛나는 업적을 남겼지만, 가장 주목되는 부분이 편지 교육이다. 퇴계의 학생 교육이란 사실 편지 교육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월천은 퇴계로부터 가장 많은 편지를 받은 사람 중 한 분으로, 생애 171통의 편지를 받았다. 그 가운데 109통을 정성스럽게 묶어 책으로 남겼는데, 《사문수간師門手簡》이라 했다. 말하자면 ‘스승의 편지’다.

편지에는 세 가지 정도의 직접적인 충고가 들어 있다. 첫째는 성격에 대한 것이다. 가령 월천이 37세 때, 금란수와 함께 퇴계를 모시고 오담烏潭에서 뱃놀이를 할 때의 일이다. 오담 소沼의 이름을 고치는 문제로 퇴계와 금란수와 몹시 다투었다. 발단은 퇴계가 ‘오烏’자가 아무 근거 없이 붙었다는 말을 듣고 새롭게 ‘풍월담風月潭’으로 고치자고 제안하자, 월천이 “어찌 다시 (제가 소유한) 이 소沼마저 가지시려고 하십니까?” 하며 거칠게 항의했다. 퇴계는 말 없이 돌아갔고 곧 편지를 보내왔다.

‘말 없음의 대응’은 ‘충고하지 않음’과 더불어 퇴계 교육의 핵심이다. 충고는 오로지 편지로만 했다. 어디까지나 간접적인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편지 내용은 이러하다.

어제 배 위에서 한 말과 그대의 얼굴을 살피니 나의 제안은 조금도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니 어찌된 일입니까? 사람 기질의 약점은 강함[剛]과 유약함[柔]에 많이 나타납니다. 내가 보니 두 사람 모두 학문을 한다고 하면서도 약점을 바로잡으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쓸데없는 객기로 다투기만 합니다. …… 바로 말하면 금군琴君은 비록 유柔함에 가까우나 유연한 데는 이르지 못하며, 가끔은 바름에 이르려고도 합니다. 그런데 그대는 강剛하다고 자부하나 굳건함에는 이르지 못하며, 도리어 몹시 사납고 조금도 겸손함과 공손함이 없어 다른 사람들의 말을 받아들일 뜻이 없습니다. 그러니 덕을 해치고 일에 방해됨이 금군의 행위보다 여간 심한 것이 아닙니다.

원문: 昨日舟中奉規之言看君意象略不領略何耶人氣質之病多見於剛柔二字...以滉所見兩君皆不事學問以矯其偏只以客氣相爭...未見其一可也又究極言之琴君雖近於柔不盡爲柔軟而或出於正公雖自負於剛而不盡爲剛善反多出於强戾暴悍之病少無謙恭遜順虛以受人之意其害德防物有甚於琴君之爲

다음은 음주에 대한 충고다. 월천은 성격이 직선적이어서 술을 마시면 그대로 표현해 버렸다. 다음 편지는 이를 충고한 것으로, 매우 이례적이다.

전에 여러분들이 고을 원과 함께 술을 마실 때 모두 많은 실수를 했지만, 마침내 그 허물이 그대에게 모두 돌아가는 것은 그대의 말이 다른 사람에 비해 더욱 거만하기 때문입니다. 또 들으니 그대가 일찍이 고을 원을 쌍벽정에서 만났을 때 원이 큰 잔으로 권했다고 하며, 취한 나머지 성주가 큰 그릇으로 멸시하고 모욕하는 것으로 의심하여 성낸 기색과 말을 하고 나와 버려 원이 매우 괴이하게 여겼다고 하니 정말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원이 마시지 않고 그대에게만 권했다면 모욕하는 뜻이 없지 않았겠으나, 이미 자신이 마시고 나서 권했으니 뭐 그리 모욕이라 하겠습니까? 강직한 것은 군자의 덕이나 지나치면 포악해지고 몹시 분을 내는 지경에 빠지는데, 과거의 그대 행동을 가만히 보면 이러한 성품을 가지고 있고, 술을 마실 때마다 그런 성격이 나타나니 결코 작은 근심이 아닙니다.

원문: 年前諸君與城主相從於杯酒間多有失言非獨君也而卒歸疵於君者以君言比他尤近倨傲故也又聞君嘗見城主於雙碧城主引大椀以屬君君時已醉疑城主以大器相慢辱發忤色忤言不肯飮徑起趨出城主甚以爲怪云云未知信否城主不飮而先飮君則果似相嫚旣先飮而相屬何疑於嫚乎剛雖君子之德少過則入於暴悍强忿從來竊瞯君資有此根本而又每發於酒後此尤非小患

그 다음은 자만에 대한 충고다. 월천은 일찍부터 학문에 대해 상당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가령 41세 때 김성일, 우성전 등과 함께 공부하다가 의견이 다르자 다음과 같은 시를 써서 학문에 대한 자부심을 피력했다.

강 북, 산 남 큰 스승 모시고水北山南謁大師

여러 벗과 천고의 의문을 토론했네.群朋一室柝千疑

돌아오는 십 리 강촌 길歸來十里江村路

숲을 찾는 새들만이 아네.宿鳥趨林只自知

이 시에 대해 퇴계는 “‘돌아오는 십 리 강촌 길, 숲을 찾는 새들만이 아네’라는 구절은 바로 그대가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것을 초연히 홀로 터득했다’고 스스로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표현은) 시인의 낭만적 표현이라면 훌륭하나 학문하는 사람의 자세로 본다면 여간 잘못된 구절이 아닐 수 없습니다. 너무 빨리 자부하기 때문입니다” 했다. 이어서 “겸허하게 물러서며 온후한 뜻이 적으니 덕에 나아가는 공부에 방해가 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했다. 이처럼 월천을 지적하는 퇴계의 충고는 모두 아프고 직접적이다.

퇴계는 정성을 다한 감동을 전제했다. 그렇지 않으면 충고는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준다고 했다. 그런 퇴계였기에 제자에게도 정성을 다한 글을 썼다. 월천과 퇴계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충고의 상처’는 ‘정성을 다한 감동’의 윤활유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고, 그 수단이 편지였다. 스승의 충고를 진정한 충고로 받아들일 줄 아는 월천의 또 다른 성정이 있었기에 이런 충고의 왕래가 가능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월천의 폭발적인 성격은 이로써 보석으로 다듬어져 갔다.

월천은 이후 학봉 김성일, 서애 류성룡과 더불어 퇴계의 3대 제자로 성장했다. 뿐만 아니라 퇴계 사후 퇴계학파를 선도하고 장례를 주관했으며, 《퇴계집》 간행을 주도했다. 월천은 퇴계 최초의 제자이자 최후의 제자였다. 그런 인간적 연緣은 사후에까지도 계속 이어져 퇴계의 제자 중 도산서원 사당에 유일하게 배향되는 영광을 얻기까지 했다. 동계 정온(桐溪鄭蘊)이 쓴 ‘묘갈문墓碣文’의 기록이다.

“선생의 아름다움 품성은 퇴계를 만나서 완성되었고, 퇴계의 도학은 선생을 얻고서야 빛을 발하였다. 선생이 아니라면 누가 퇴계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며, 퇴계가 아니라면 누가 선생의 깨달음을 간직할 수 있게 이끌어 주었겠는가!”

퇴계의 편지는 사랑을 가득담은 시선이었고, 그 시선은 월천의 전 생애를 비추어주었다. ‘스승과 제자’, 그리고 ‘교육’은 무엇인가? ‘사랑이 있는 시선’이 그 답이 아닌지 모르겠다. 사랑이 있는 시선이 있다면 그곳에는 이미 스승과 제자가 있는 것이며, 스승과 제자가 있다면 이미 교육은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교육이 별것인가? 온갖 교육이론과 교육행정을 말하는 자, 사랑이 있는 시선을 먼저 가지기를 권유하고 싶다. 이 시대 ‘교육’이란 단어가 부정적 화두가 되어 끊임없이 거론됨은 청소년을 향한 사랑의 시선이 부족한 기성세대들의 자세에 기인하고 있다. 그리고 이 시선 속에 진정한 인생의 약이 될 수 있는 ‘충고’를 어떤 학생에게 어떻게 사용해야하는 가를 곰곰이 생각하고 생각해야 한다.

교육은 사람을 변하게 한다. 변화시키는 것이 또한 교육이다. 퇴계의 편지교육은 월천을 변모시켰다. 어떻게 변모했을까? 월천이 마침 퇴계를 묘사한 글이 있어 읽어보니 문득, 글을 쓴 월천의 인품이 이미 이 경지에 와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되어 소개한다. 안목이 생겼고, 표현할 줄 알면 그도 이미 그 경지에 올라있음이 틀림없다. 월천의 퇴계평가는 이렇다.

“선생은 천품이 영오穎悟하고 신채神彩가 정명正明하였다. 기질은 온화하면서도 굳세고 언어는 완곡하면서도 직선적이었다. 학식은 해박하며 요령 있고, 행동은 온전하며 독실했다. 청정하되 과격하지 않고, 참여하되 굳이 바로잡으려 하지 않았다. 옛 것을 흠모하되 응체되지 아니하였고, 세상에 섞여 살았지만 세속에 흐르지 않았다.”

사진: 월천서당(경상북도 기념물 41호)

해설: ‘월천月川’이란 지명은 권수익權受益이 명명한 이름인데, 외손자인 월천이 자신의 호로 삼았다. 월천의 아버지 조대춘이 권수익의 사위로 이 터전을 물려받았던 것이다. 현판 글씨 ‘月’은 좀 높고 ‘川’은 좀 낮게 쓰였는데, 구전에는 퇴계가 “달은 하늘에 있고 강은 땅에 있어 그렇게 썼다”고도 한다.

사진: 『사문수간』과 퇴계의 편지

해설: 퇴계의 편지는 하나같이 정갈하여 하나의 작품을 보는 듯하다. 지금 남아 있는 편지들은 종이의 활용도와 우측아래의 싸인, 좌측 아래에 이름과 글씨들이 모두 조화 있게 있어 배치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는 퇴계의 단정하고 겸손한 삶의 자세 때문이기도 하지만, 상대에 대한 예의와 더불어 교육적 배려가 담긴 것으로 여겨진다.

『사문수간』은 어떤 경로로 옮겨진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도산서원에 보관되어 있었고, 정조16년(1792) ‘도산별시陶山別試’때 이만수李晩秀가 서울로 가지고가서 임금에게 보이니, 임금이 보고 발문을 지어 다시 반송한 바 있다.

5) 영광과 시련

월천서당을 나와 강변으로 오니 호수 건너 부포로 가는 배가 있다. 배에 오르니 배는 곧 끝없이 넓은 사방의 장판 같은 수면 위를 거침없이 가르며 나아간다. 배가 강 한가운데로 오니 문득 <적벽부>의 한 구절이 생각난다. “한 조각 작은 배로 만경창파의 아득한 곳을 넘어가니, 넓고 넓어 허공에 의지하여 바람을 탄 듯 그 머물 바를 알지 못하네縱一葦之所如凌萬頃之茫然浩浩乎如憑虛御風而不知其所止”. 이상한 일이다. 내가 고상한 사람도 아니고 이 곳이 소동파가 노래한 그 적벽도 아니건만 어찌 그런 구절이 떠올랐을까! 정말 이 물 아래 천년 세월의 아늑한 동네가 있었단 말인가.

돌이켜보면 천 년 세월 부포는 세 번 정도의 좌절을 겪었다. 그 첫 번째가 월천의 좌절이다.

월천의 좌절은 곧 예안, 도산의 좌절이기도 했다. 광해군 당시 류성룡을 비롯한 안동 사림은 남인에 속해 있었지만, 예안 사림은 대부분 북인에 가담하고 있었기에 인조반정으로 결정적인 타격을 받았다. 인조반정은 노론의 집권과 북인의 몰락을 가져왔다. 그것은 광해군만 역사의 패자로 만든 것이 아니었다. 예안 사림은 이후 퇴계 직계 후손을 제외하고는 저 경상남도의 남명학파와 더불어 다시는 역사의 전면에 나올 수 없게 되었다. 월천은 북인인 이산해, 정인홍의 지원에 의해 도산서원 사당에 종향되는 더없는 영광을 얻었지만, 인조반정은 결국 월천의 학맥이 영원히 끊어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부포의 다음 좌절은 6.25 전후의 좌우 대립이다. 그 대립은 결국 온 마을을 화마에 휩쓸리게 했다. 당시 ‘산 사람’이라고 하는 정체불명의 무리가 자기들에게 협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온 마을 집을 모조리 불 질렀다. 이때 기와집 십여 채가 전소되었다. 사변이 끝난 후 연명하기도 어려운 시절 봉화 금씨들은 ‘성재 종택’을 복원했다. 이원정 어른은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이때 어느 집 하나 엄두도 내지 못했는데 유독 성재 종택만은 다시 집을 짓기 시작했다. 종택이 재력이 있거나 든든한 주인이 있어서가 아니다.……우리는 속으로 어떻게 될까 의아해 했다. 그런데 이른 봄이 되자 영양, 봉화 등지에 살던 자손들이 서너 명 씩을 짝을 지어 꾸역꾸역 부포로 집결하는 것이 아닌가! 모두 이불과 식량을 짊어지고 모여서 이 집, 저 집 방 한 칸씩을 얻어서 솥을 걸고 밥을 해 먹어 가며 나무도 깎고 기와도 구웠다. 그렇게 날마다 수십 명이 종가를 복원하는 대역사를 일 년이 넘도록 계속했다. 나는 이 광경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성재 종택 복원은 이원정 어른의 눈에도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니 그런 모습이 곧 ‘안동’이고 ‘안동사람’이 아닐까 싶다. 전국 어느 지역에서 이처럼 자손들이 이불, 식량을 짊어지고 와서 솥을 걸고 밥을 해 먹어 가며 종가를 복원하는 곳이 있을까. 나는 이런 연유로 전에 어느 발표에서 감히 ‘안동 문화는 종택 문화다’라고 한 것이었다.

사진: 성재종택(경상북도 문화재자료 264호)

부포에는 역동, 월천이라는 큰 인물이 있었지만, 주인은 어디까지나 놀라운 응집력을 보여 준 봉화금씨와 진성이씨였다. 이원정 어른의 글을 다시 보면,

부포에는 옛날 안동권씨 권간權簡이 살았는데, 봉화금씨 금숙琴淑이 권간의 사위가 되어 살기 시작했다. 그 얼마 후 진성이씨도 이곳에 터를 잡았다. 그때부터 봉화금씨와 진성이씨 두 집안의 자랑스러운 마을이 되었다.

두 집안의 자랑스러운 마을이 되기 전 부포의 주인은 안동권씨였다. 권간과 더불어 들어온 권겸權謙(1413~1505)을 보면 안동권씨는 부포의 가장 강력한 지배 성씨였다. 권겸의 아들 호조참판 권수익權受益의 인척 관계를 보면, 이조판서 김담金淡(1416-1464)은 외삼촌이고, 지중추부사 이현보李賢輔(1467-1555)는 생질이며, 공조참판 조목趙穆은 외손자이고, 현감 금란수琴蘭秀는 외손서였다. 김담의 외손자가 훈도 금재琴榟인데, 금재는 생원 김효로金孝盧의 사위이며, 판중추부사 이황李滉(1501-1570)과 사돈이다. 도산 전 가문이 권겸의 가문이 통혼 관계에 있었다.

권수익의 묘소 제사를 지낼 때 이현보가 다섯 명의 벼슬아치 아들들을 대동하고 참석하여 일시에 인끈 십여 개가 걸릴 정도로 그 모습이 대단하여 “그 경사스러움이 어떠했던가, 어떠했던가!” 하는 기록도 보인다.

그런데 왜 그 후 부포에 안동권씨가 보이지 않는 것일까? 안동권씨대종회 권호순 부회장께 그 연유를 여쭈어보니 잘 모른다고 하셨다. 하긴 발해도 없어졌고 거란도 없어졌는데, 조그만 시골 마을에 하나의 성씨가 명멸해 가는 일이야 그리 놀랄 일도 못 된다.

그렇지만 이런 권씨들의 부침을 뒤로 하고 외손 신분으로 부포에 들어온 봉화금씨들은 매우 성공적으로 뿌리를 내렸다. 관찰사 금숙의 아들 4형제는 놀랍게도 대과 급제했고, 한 분은 생원 합격을 하여 부포를 ‘5자등과기五子登科基’라 하기도 했다.

이 무렵의 봉화금씨의 계보를 대략 정리해보면,

琴以和 -滌(현감)-嵇(생원)-衍(생원)-致湛(생원)-梧(생원)

-女元自敦 -女河紹地椅(문과, 부사)-女權東美(權橃子)

(문과, 정언) (河緯地 동생) 榟(훈도) -應夾(현감)

應壎(현감)

女李寯(李滉의 子)

女李寘(李瀣의 子)

櫟(주부)

淑(문과, 관찰사)-崑(문과, 감찰)

嵩(문과, 대사간)

崙(생원)

嶙(돈용교위사정)-致咸(무과, 군수)

嶺(별시위)-致英(진사)-宇(진사)

嶒(무과, 훈련원참군)-致韶-憲-蘭秀(생원, 현감)-憬(생원)

-업(忄+業,문과, 승지)

-愷(문과, 목사)

-恪

峻(무과, 만호)

女李凞良(진사 李塢의 子)

*琴榟: 오천입향

*琴淑: 부포입향

한편 진성이씨의 부포 입향은 퇴계의 손자 이안도로부터 비롯되었으니, 봉화금씨보다는 100여 년 정도 늦게 들어온 셈이다. 퇴계 몰후 퇴계가 살던 상계上溪 터전은 외손 김씨와 박씨들이 들어와 살았고, 이안도는 상계를 떠나 부포로 이주하여 7세손 이수겸 때까지 80여 년을 살았다. 말하자면 부포는 퇴계 종택의 초기 터전이었다. 그런데 퇴계가 쓴 조부 이계양의 조부사적祖父事蹟을 보면, “공이 처음 부포에 살았으며, 그후 봉화 훈도로 내왕하던 중 어느 날 온혜를 지나다가 그 산수를 사랑하고 이사했다”고 되어 있으니, 진성 이씨에게 부포는 이미 인연이 있는 곳이었다.

진성 이씨의 대표적 집은 ‘청동댁’인데, 이 집이 세상에 알려짐은 이이순李頤淳(1754~1814)의 존재 때문이었다. 이이순은 이야순과 더불어 퇴계문중을 대표하는 당대의 학자였다. 이이순의 <계상종문록溪上宗門錄> 같은 글을 보면 퇴계의 모든 후손을 매월 초하루에 모아 교육을 시키는 등 선도적인 역할을 직접 하기도 했다.

이이순의 이런 위상은 그대로 이어져 아들 손자들 역시 예사롭지 않은 구실을 하게 했다. 조카 이휘영과 손자 이만희가 종택에 양자를 들어 퇴계 10대, 11대 종손이 되었고, 아들 이휘병과 손자 이만손은 거듭해서 영남만인소의 소수疎首가 되었다. 이로써 청동댁의 존재는 만 천하에 드러나게 됐다.

부포의 이런 기개는 일제 치하에서도 이어졌다. 이동하, 이경식, 이병희, 이선호, 조수인, 금용문, 이성호, 이회벽 등이 항일 운동에 몸 바쳤다. 특히 이선호는 1926년 6월 10일 삼엄한 왜놈의 총칼아래 치러진 순종의 장례식에 참여하여 서울 거리를 온통 독립만세의 물결로 이끈 장본인이었다. 이선호는 종로3가 단성사 앞에서 제일성으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고, 체포되어 끌려가면서도 ‘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런 부포였지만 안동댐은 부포 최후의 좌절을 안겨 주었다. 전일 두 번의 좌절이 후일을 기약하는 한시적인 사건이라면, 안동댐은 후일의 희망이 보이지 않은 절망을 안겨 주었다. 이제 그 누구도 부포를 다시 일으켜 역사의 현장으로 돌릴 수 없게 되었다. 더구나 지금 부포는 분단되었다. 호수 이쪽은 도산면이고 저쪽은 예안면이다. 35번 국도에서 들어가면 월천서당이 있고, 933번의 지방도를 따라 들어가면 호수 저편에 성재 종택, 부라원루 등이 있다. 역동서원은 안동대학 구내로 옮겨졌다. 부포는 지형적, 행정적으로 두 번이나 갈라지는 운명이 되었다. 댐 실향민들은 가끔 “우리는 북한에 고향을 둔 실향민보다 못하다. 그들은 통일이 되면 찾아갈 희망이라도 있지만 우리는 영원히 그렇지 못하다”고 말한다.

사진: 영남만인소

해설: 최근 국학진흥원에서 이만손의 소수로 등재된 ‘영남만인소’의 가 공개되었는데, 만여 명의 명단이 한 폭의 두루마리에 적혀있었다.

‘영남만인소’는 1855년 영남사람 만 명(정확하게는 10,300명)의 이름을 한 장의 두루마리 종이에 써서 임금에 올린 탄원소로, 내용은 “사도세자의 명예를 회복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인조반정 이후 좌절한 남인이 처음으로 정치적 목소리를 낸 사건중의 사건이었다. 남인은 이 무렵 거의 숨도 한번 재대로 쉬어보지 못하고 지내다가 정조가 이제 겨우 노론과 힘의 균형을 이루게 되니, 이때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가 억울하게 죽었음을 탄원한 것이다. 사도세자를 죽인 노론을 적으로 하는 이 무시무시한 사건의 우두머리에 이휘병이 지목된 것이다.

1881년, 영남 남인은 다시 ‘영남만인소’를 올렸다. 서구 열강의 개방 압력에 대항하는 강력한 ‘척사斥邪’정신을 담은 내용으로 역시 만 여명이 상소했고, 이때 이만손이 소수로 추대되어 이 집의 영광을 이어갔다. 그런 집이 청동댁이었다.

6) 부라원루

이런 생각에 잠겼는데 어느덧 배는 호수를 건너 언덕에 접안한다. 내려서 새로 난 길을 따라 오르니 성재 종택이 바로 보인다. 집의 규모나 부재部材가 큰 가문의 종택으로 전연 손색없다. 그런데 왠지 원래의 자리가 아니어서 그런지 안정감을 주지는 못하는 것 같다. 배산임수가 아닌 만경창파에 그대로 떠밀려 올라온 느낌이다. 그런 종택을 보고 나와 다시 여기저기 기웃거려 보았으나 그 밖에는 별로 볼 것이 없는 것 같고, 마지막으로 전부터 꼭 가 보고 싶은 건물인 부라원루를 찾았다.

쉽게 찾으리라 생각했지만 둘러봐도 도무지 보이지 않는다. 안내 표지판도 없다. 주민에게 물어 찾으니 그 누구도 찾기 어려운 산 속 외진 곳에 있다. 안동댐 건설 당시 이건 건축물 가운데 가장 위치 선정이 잘못된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하긴 댐으로 인해 없어진 그 많은 건물을 생각하면 그나마 다행한 일인지도 모를 일이다.

부라원루는 참으로 아름다운 건물이다. 안동의 사라진 스물일곱 개의 원院 가운데 유일하게 원의 누각 원형이 보존된 건물이다. 고려 중기에 세워졌고, 주민들은 1,000년 건물이라 했다. 월천 당시 이미 옛 건물로 존재했으니 600년은 확실히 넘었다. 정말 1,000년 건물이 아닐까? 그렇지만 부라원루가 언제 어떻게 지어졌다는 연구 보고는 없다. 지금 이렇게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천천히 둘러보니 세월의 무게를 견디고 온갖 풍상을 겪은 아름드리 기둥과 들보 등에 형용하기 어려운 고색창연함이 서려 있다. 내게 고건축에 대한 전문지식이 있다면 다르게 표현했으련만 그렇지 못함이 못내 아쉬울 뿐이다.

부라원루는 참으로 쓸쓸한 건물이다. 이처럼 오랜 역사와 아름다운 자태의 건물이 어쩌면 그렇게도 사람들에게서 소외를 당했을까 싶기 때문이다. 부라원루는 시쳇말로 안동에서 왕따를 당한 건물이다. 그 누구도 찾지 않고 글도 쓰지 않았다. 과거에도 그러했고 지금도 그러하다. 물론 이 마을 출신의 조목, 금란수, 김부인, 성안의, 이이순 등 몇 분의 시가 없지 않다. 그렇지만 건물의 역사와 규모와 멋스런 자태로 볼 때 이 정도의 글은 있다고도 할 수 없다. 흔한 퇴계 시도 한편 없다. 생애 2,200여 편의 시를 남긴 퇴계가 부라원루에 대한 시를 쓰지 않았음은 이상하다기보다 거의 기적에 가깝다. 여러 번 부포에 내왕한 퇴계에게 부라원루에 대한 시가 한 편도 없음은 매우 이례적이다. 그런 연유로 부라원루는 더욱 수수께끼의 건물이 되었다. 지금 확실한 것은 한석봉이 쓴 현판 글씨가 유일하다. 그래서 그 현판만이 이 집을 지키는 주인인 것처럼 보인다.

천 년이 흘러 일제 치하 어느 뜻있는 우국지사 한 분이 부라원루 최초의 글을 썼다. 학산 금용하琴鏞夏다. 학산은 퇴계 종택 추월한수정의 기문을 썼고, 나라가 망하자 비분강개하여 죽을 때까지 패랭이에 흰옷과 흰 띠를 하고 다닌 매우 고매한 선비였다. 학산이 쓴 글이 <부라원기>였는데 그 글에 “그동안 몇 번 서까래를 수리하기는 했지만 기둥과 들보는 한 번도 고친 적이 없다”고 했다. <부라원기>가 지어진 40여년 뒤 1964년, 이상호 안동군수 재임 시절, “지붕은 비가 새고 아래는 무너져 내려 조만간 곧 쓰러질 지경”이 되어 중수했다. 그때 부포의 선비 이만좌가 <중수기>를 썼다. 부라원루 두 번째 글이다. 그 때 옛 상량기문이 발견되었는데, 그 글에는 291년 전인 ‘단기 4006년(서기 1673년) 중창했다’는 기록이 쓰여 있었다.

두 편의 글이 지어졌지만 어떤 비밀도 밝혀지지 않았다. 두 편 모두 부라원루가 수수께끼가 된 사연을 더욱 구체적으로 지적했다. <부라원기>에는 “대체로 정자와 누대는 고서에 반드시 실려 세월 따라 수많은 시가 쓰여지기 마련이다. 이 누각은 우리 고장 선성 14곡의 여러 명승지 가운데 하나인데, 그 어디에도 소개되지 않아서 누각의 역사를 알 수 있는 글이 어디에도 없으니 어찌된 일인가!” 했다. 다만 “산남공[金富仁]께서 손환孫芄(1512~1590)에게 써 준 시에 ‘소년 시절 이 누각 앞에서 활 쏘는 것을 배웠는데, 그때마다 그대 기술 완벽함을 부러워했으니’ 하는 구절이 있으니, 신라시대 이후 현縣을 중심으로 무예와 활을 익히는 곳이어서 그러했는가? 이것 또한 모를 일이다” 했다.

<중수기>에는 “모든 누각이 산수의 경치를 보고 짓는데 이 누각의 위치는 산수를 고려하지 않고 길거리에 위치하니 그것은 또한 무슨 연유인가” 했다. 요컨대 수수께끼의 집이 수수께끼의 터전 위에 천 년 세월을 무심하게 그렇게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부라원루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은 어쩌면 또다시 천 년 세월을 무심하게 버려둘 가능성이 없지 않다. 도무지 어느 누구도 찾기 어려운 곳에 그렇게 외롭게 있으니 말이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부라원루를 내려오다가 문득 돌아보았다. 그리고 잠시 생각했다. “그렇다면 나는 언제 다시 와서 이 건물을 보게 되는 것일까”하고. 그런데 그때, 부라원루가 나에게 손짓했다.

걱정 말게나, 나는 항상 이렇게 잘 있으니……

<중수기>를 쓴 분의 부라원루 보존에 대한 간절한 소망이 담긴 글을 여기 다시 옮겨 쓰는 것으로 부포에 대한 글을 마감하려 한다. 부라원루가 보존되는 한 부포는 그렇게 존재하고 있을 테니까.

다만 누각의 보존에 대해 생각해 보니, 선인들의 자취가 천 년 전에 이미 드러났으니 우리들의 책무는 앞으로 천 년을 이어 주는 일이다. 이 몸이 자식에게 전하고 자식이 손자에게 전하고 그리고 그 알 수 없는 아득한 세대에까지 잊지 말고 이어진다면 중수의 뜻은 누각과 더불어 길이 남을 것이다.

원문: 第念樓之保存先乎千年前人之蹟已箸後乎千年吾輩之責在焉以身傳子以子傳孫以至不知人之世勿替此志則此役之名得與此樓長存矣

사진: 부라원루(경상북도 유형문화재 39호)

해설: 우리나라 최고목조건물은 안동의 봉정사극락전(1363년 건립)이고, 조금 뒤의 건물로는 영주 부석사무량수전(1376년 건립)인데, ‘부라원루’ 역시 상당한 역사를 지닌 건물임에 틀림없다.

지금 ‘부라원루’ 마루에 걸려있는 기문記文에는 “단기 4296년 8월, 李晩佐가 짓고 李瓘鎬가 썼다”고 쓰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