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오천 한 마을 군자 아닌 사람이 없다!
-오천-
1) 군자리
유일재 종택을 나와 차로 5분 정도 올라오다가 한 모퉁이를 돌면 갑자기 앞 산허리에 엄청난 일군의 고가古家들을 만나게 된다. 도산서원인가? 생각하려는데 곧 표지판이 나타난다. ‘안동군자마을’. 도산에 도산서원만을 생각하고 오는 사람들에게 이 유적은 하나의 경이이며 충격이다.
안동군자마을은 안동 광산김씨의 유적이다. 오천烏川은 광산 김씨 600년 세거지로, 우리말로 ‘외내’라 했다. 그렇지만 지금 그 외내는 안동댐으로 사라졌다. 그런 까닭에 도산 1곡인 운암곡雲巖曲의 풍광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다. 광산김씨는 실향했고 유적은 이곳으로 옮겨왔다. 그렇지만 이들 유적이 옛 모습을 잃었다고 하여 이 집의 전통과 영광이 손상되는 것은 아니다.
사진: 오천군자마을
광산김씨는 전라남도 광산을 근거로 하는 거족이다. 어느 조사를 보니 영남 최대의 거족은 안동권씨이고, 기호 최대는 연안이씨와 광산김씨였다. 광산김씨는 조선시대에 시호를 받은 분이 43명, 문과 급제자가 무려 265명이나 된다. 고려 후기 서울로 진출해 경반이 되었고, 그 가운데 한 파가 14세기 안동으로 내려왔다.
안동에는 이런 성씨들이 흔하다. 흔한 정도가 아니라 주류를 이루었다. 가령 지금 우리가 찾아가는 도산의 명문들, 이른바 ‘도산의 4대 가문’으로 지목되는 진성이씨, 영천이씨, 봉화금씨는 광산김씨와 더불어 여말선초를 전후로 각각 청송, 영천, 봉화에서 들어왔다.
안동 광산김씨는 전체 광산김씨 가운데 비중이 큰 편은 아니다. 기호 지방의 광산김씨들은 조선 후기 정국을 주도한 세력이었지만 안동 광산김씨는 그렇지 못했다. 영남 남인이 그렇듯이 권력에 의해 견제 당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안동에서 오천 광산김씨의 위상은 최고의 명문 가운데 한 집으로 전연 손색없다. 그 배경은 무엇일까.
광산김씨의 오천 입향入鄕은 김효로金孝盧(1454~1534)라는 분이 복거卜居함으로써 비롯되었다. 김효로는 안동의 명문 의성김씨의 입향조 김진金璡을 연상하게 하는, 입향의 기반을 반석 위에 올려놓은 그런 인물이었다. 이 분이 ‘외내’ 터전을 열었다. 《선성지》에 “김효로는 생원 시험에 합격하고도 벼슬에 뜻이 없어 유유자적하며 생애를 마쳤다”고 했다.
‘생원 시험 합격’과 ‘벼슬에 뜻이 없음’과 ‘유유자적한 생애’는 후손들에게 하나의 삶의 모형을 제시해 주었고, 오천 광산김씨 문화의 근간으로 작용했다.
사진: 김효로 묘소(안동시 녹전면 구송리 능골)
해설: 매장 당일 광중壙中에서 ‘고려충신김방경의 묘’라는 지석誌石이 발견되어 묘소를 조금 아래로 옮겼다. 김방경의 후손들은 이때 조상의 묘를 찾게 되어 묘역을 다듬고 고유告由했는데, 이때 난데없이 솔개가 날아와 상석위의 포를 물고 가버렸다. 그날 저녁 종손의 꿈에 어떤 노인이 나타나서 “내 무덤을 찾게 된 것은 김효로의 덕이다, 그러니 앞으로 나에게 제사를 지낼 때는 효로의 무덤에도 같이 제사를 지내어라”하여, 후손들이 해마다 그렇게 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효로의 후손들도 역시 김방경의 무덤에 제사를 지내기 시작하여 양가의 아름다운 전통이 되었다.
김효로는 아들 형제와 딸 자매를 두었다. 아들 이름을 연緣과 유綏라 했고, 딸은 김우, 금재에게 시집갔다. 연은 문과 급제하여 경주부윤, 강원감사를 역임했고, 유는 생원시험에 합격했지만 아버지처럼 고향을 지켰다. 김유는 ‘김수’라고도 읽는데, 이 집에 물어보니 ‘김유가 맞다’고 했다. 연은 부필, 부의, 유는 부인, 부신, 부륜을 낳았다. 사위 금재는 금응협, 금응훈을 낳았다.
그런데 어느 날, 이들 7인을 두고 문득 ‘오천 7군자’라 하는 분이 있었고, 이로 인해 마을 이름도 ‘군자리君子里’라 했다. 《선성지》 기록은 이러하다.
예안현 남쪽 5리에 외내가 있다. 마을에 일곱 군자가 살았는데, 모두 퇴계의 제자로 도덕과 덕행이 높았다. 한강 정구가 오천에 들렀다가 말하기를 “오천 한 마을 군자 아닌 사람이 없다”라고 하여 군자리란 이름을 얻었다.
군자리! 정말 멋있는 이름이다. 모든 선비가 ‘군자’가 되기를 희망하고, 군자 이상의 존칭이 없던 시절, ‘군자들이 사는 마을’이란 여간 영광스런 찬사가 아니다. 상해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 선생의 안동 임청각의 99칸 집에 ‘군자정’이 있고, 정암 조광조가 자신들은 ‘군자의 당’이며 남곤 일파는 ‘소인의 당’이라 압박하여 일어난 사건이 저 유명한 ‘기묘사화’이니, 사람이 태어나서 군자가 되면 그것으로 족한 시대였다. 그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김효로의 입향 이후 불과 3대 만에 듣게 된 평가였다.
2) 후조당 김부필
7군자 가운데 대표적 인물은 김부필이다. 호가 ‘후조당後彫堂’으로, 이 분에 대한 평가는 그대로 이 집에 대한 평가라 할 수 있다. 일생을 처사로 보냈지만 이조판서에 증직되고 시호가 내려졌으며, 문과 급제에 강원감사를 지낸 아버지 김연과 역시 문과 급제에 경상좌도 의병대장을 지낸 아들 김해를 넘어서서 당당히 이 집의 당호를 획득한 인물이다. 지금 오천 광산김씨 대종택의 공식 명칭은 ‘후조당 종택’이다. 김준식 종손에게 물어보니 ‘후조당 종택이 맞다’고 했다. 종손은 그 이유를 “‘운암(김연)’ 선조가 계시지만 우리 집은 도덕과 학문을 우선하기 때문에 후조당을 대표적 인물로 본다”고 했다.
그렇다면 김부필은 누구인가? 그에 대한 설명은 퇴계가 쓴 한 편의 시로 충분하다.
후조당 주인 본래 절개 굳어 後彫主人堅素節
벼슬 내려와도 즐거워하지 않네 除書到門心不悅
눈 속에 매화 향기 맡는 모습 坐待梅花氷雪香
마치 온백설자 같은 도인일세 目擊道存吟不輟
절개가 굳고, 벼슬이 내려와도 즐거워하지 않으며, 눈속의 매화 향기를 맡으며 좌정하고 앉아 자기 정진을 하는 인물, 그래서 저 중국의 전설적 도인인 ‘온백설자溫伯雪子’와 같은 분이 김부필이다. ‘빙설향氷雪香’과 ‘목격도존目擊道存’이라는 말은 김부필의 인품에 대한 최고의 찬사이며 그대로 평가다.
목격도존은 《장자》에 나오는 말로, 공자가 목격한, 어떤 수사적 설명도 필요 없는, 그냥 바라보기만 해도 도가 가득 찬 인물인 온백설자를 지칭한다. 퇴계가 제자를 이런 말로 평가한 것은 극히 이례적이다. 퇴계에게 이런 평가를 받은 인물은 많지 않다. 이는 김부필이 벼슬이 내려와도 나아가지 않은 고고함에 대한 전폭적인 찬사다. 벼슬 지상주의 시대에 벼슬을 포기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학문중시’와 ‘인격중시’ 사상은 안동 문화의 가장 큰 특징이다. 그런 연유로 안동에서는 지금도 벼슬과 직위만으로 사람됨을 운운함은 그리 환영받지 못한다. ‘작인作人’은 ‘사람 됨됨이’를 말하는데, ‘작인이 됐다, 안 됐다’는 안동 사람 특유의 인격 중시 표현이다. 이런 분위기가 처사 김부필을 가문의 대표적 인물로 존재하게 했고, 후손들의 계속된 자부심의 원천이 되었다. 후손들의 ‘시호’와 증직 요청은 이런 가치관의 연장선에서 이루어진 결과였다.
처사 김부필이 발신發身한 아버지와 아들을 뛰어넘어 당당히 이 집의 당호를 획득한 것은 안동 문화의 인물 중시 가치관을 그대로 반영한다.
그런데 7군자는 이런 조건만으로 된 것은 아니다. 비록 서애 류성룡이 금응협을 지목한 말이지만 그들이 ‘《소학》 그대로의 인물’이기에 가능했다. 《소학》 그대로의 인물이란 그 시대 최고의 찬사였다. 《소학》은 당시 불온서적이었다. 그렇지만 ‘동방 5현’으로 지목된 인물 가운데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도 “일생 동안 《소학》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고 했으니 필독의 행동 지침서이기도 했다. 도학자라 일컬어지는 당시 신진 학자들의 등장은 이 《소학》 공부와 그 실천으로 결정되었다. 《소학》은 어린이를 위한 책이었지만 실천을 주장하는 개혁론자들에게는 정녕 《대학》을 넘어서는 책이었다. 정구가 오천에서 목격한 것은 바로 이들이 ‘《소학》 그대로의 인물’이었고, 그 인물이 바로 ‘군자’였다.
그렇다면 《소학》 그대로의 인물이란 어떤 인물인가? 김부필의 일상을 보면 “날마다 새벽에 일어나 의관을 하고 사당에 나가 절하고 물러나 서실에 앉아 책을 보다가 밤이 늦은 후에야 취침하셨는데, 몸이 불편할 때도 그러하셨다”고 했다. 아들 김해의 기록이다.
“의관과 띠를 하고 꼿꼿하게 앉는 자세”는 한자로 ‘관대이좌冠帶而坐’로 표현된다. 이런 자세는 이때까지 보편적으로 취해온 전통적 생활양식이 아니었다. 예를 들면 정암 조광조가 생원합격이 되어 성균관에 입학하니 그 때 대부분의 ‘학생[儒生]’들은 이러한 생활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학생들은 매우 자유로운 생활을 했다. 정암의 술회를 보면, 그들은 여름에 “옷을 벗고 마음 되로 나가고 눕고 했으며赤脫出臥”, “누가 복장을 갖추고 단정한 행동을 하면 모두들 몹시 비웃고 멸시했다”고 했다. 그리고 이런 행동은 “부형들로부터도 노골적으로 제지당했다”고 했다.
수많은 ‘적탈출와赤脫出臥’하는 학생들 속에 홀로 사관생도처럼 행동하고 ‘관대이좌’ 한 인물이 바로 정암이었다. 정암의 입학 초기 입장은 시쳇말로 ‘왕따’ 그것이었다. 피의 투쟁 발발을 예고하는 초기 양상이었다.
1519년, 기묘년 정암과 맞선 최대 정적 남곤南袞은 국왕에게 “근래 선비들이 독서에는 힘쓰지 않고 단지 벽을 향해 잠잠히 앉아 있는 것만 높게 생각합니다” 했다. 그 결과는 정암의 사사처형이었다. 그러나 정암은 곧 부활했다. 국립 서울대학교-성균관-의 학생들이 정암의 외침을 목마른 사슴이 물을 들이키듯 전폭적으로 수용했다. 여기에 참다운 인생의 길, 구국의 길, 즉 도道가 있다고 확신했다. 모두가 《주자전서》를 읽었다. 《주자전서》는 이치(理)에 맞는 생각(念)을 담은 필독의 이념서적이 되었다. 퇴계는 너무 몰두하여 ‘건강을 해치겠다’고 말리는 사람까지 있었지만 “이 책을 읽으면 마음부터 시원해지는데 건강이 무슨 걱정이랴” 했다. 뿐만 아니다. 방대한 《주자전서》를 요점 정리하여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라는 책을 펴내기까지 했다. 학생들을 위한 배려였다. 신진 사대부들은 이런 자세를 새삼스럽게 ‘도학道學’이라 했다. 그래서 16세기는 도학자의 출현에 의한 ‘도학의 시대’가 되었다. 16세기의 진보주의 출현이며, 한편으로 주자학의 한국적 토착화의 새로운 선언이었다.
도학은 당시 지식인의 행동과 이론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그들은 《소학小學》이라 불리는 전래의 아동도서를 새삼 다시 읽었으며, 행동 또한 어느 순간부터 사관생도처럼 했다. 행行뿐만 아니라 지知의 측면에 있어서도 변화를 가져왔다. 이들은 우주와 인간에 대해 전연 새로운 해석을 들고 나왔다. 이들은 ‘이理와 기氣’라는 전래의 두 개념을 새롭게 설명하면서, 이 개념을 통해 모든 현상을 포괄하고자 했다. 그런 연유로 이 이론의 해석과 정립을 두고 논쟁이 일어났고, 이 땅의 문인 지식인들이 순식간에 사색적, 철학적 구도자의 자세를 갖도록 했다. 그런 행동이 바로 ‘소학 그대로의 행동’이며, 7군자의 자세라 할 수 있다. 이런 자세는 저 남명 조식이나 회재 이언적에게도 보인다. 이것이 곧 경敬의 자세이고, 도학자의 자세였다. 오천 7군자라는 이름은 바로 이런 도학자의 자세에서 얻어진 상쾌한 면류관이었다. 이런 인물들이 안동의 선비 문화 혹은 안동 정신문화의 근간이 되고 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3) 아버지와 아들
군자리에서는 관심이 단연 7군자에 집중되지만 김연과 김유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이들 형제가 오늘의 군자리를 있게 만든 장본인들이기 때문이다.
김연은 호가 ‘운암雲巖’으로, 문과 급제하여 강원감사, 경주부윤 등을 역임했다. 종고모부 김만균(이조판서 김담金淡의 아들)이 “이 아이는 워낙 영특하여 반드시 이름을 날릴 것”이라 했는데, 과연 문과에 합격했다. 시관 김안국이 그를 수석으로 뽑지 못함을 못내 아쉬워했다는 기록도 보인다. 노모 봉양을 위해 외직을 자청하여 나오니 많은 친구들이 전별시를 써 주었다. 이때 인물들의 면모를 보면 김연의 교유 폭을 짐작하게 하는데, 이언적, 이황, 이장곤, 성세창, 홍섬, 이자, 송인수, 정응두, 나세찬 등의 이름이 보인다.
김연은 훈구 실력자로 파행 정국을 주도한 김안로를 사간원 정언의 자리에서 보름 동안 투쟁하여 기어코 물러나게 한 기개를 갖춘 인물이었다. 그래서 김연이 죽자 회재 이언적은 “정기가 우뚝하고 기품과 자질이 남달리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뜻은 충효에 두고 행동은 언제나 정도만 지켰다”고 추모했다. 그런 생애를 보낸 김연이 있었기에 광산김씨 예안파가 존재한다.
사진: 김연의 급제교지
해설: 오천광산김씨는 김연 이후 9명의 문과급제자를 배출했다. 『예안향교지』의 기록에는 김연과 더불어 김해, 김령, 김총金璁, 김동준金東俊, 김성응金聲應, 김병연金柄淵, 김징金(金+徵, 김석상金奭相이다. 『안동군자마을』 기록에는 김병연은 없고 김갑교金甲敎가 있다.
그렇다면 김유는 어떤 인물인가? 그는 호가 ‘탁청정濯淸亭’으로, 형님을 대신해서 집을 지키며 가풍확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김만균이 사랑하여 자식처럼 길러 주고 후일 재산을 물려주었다. 김유의 후한 손님 접대와 빼어난 건축물인 탁청정을 지은 것은 김만균의 증여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김유는 무인형의 인물이었는데, 생전에 생각하기 어려운 특이한 책 한 권을 남겼다. 《수운잡방需雲雜方》이라는 것으로, 후손인 전 서울대 김용직 교수에 의해 소개되었다. 16세기 안동 음식을 기록했는데, 안동대 윤숙경 교수의 표현대로 “참으로 신선한 화제를 제공한” 그런 책이다. ‘안동식혜’를 비롯하여 안동 전통 음식에 대한 고유한 비밀이 담겨 있다. 오천 광산 김씨에서 김유의 위상은 《수운잡방》처럼 풍요롭고 저 빼어난 정자인 탁청정처럼 우뚝하다.
사진: 수운잡방
해설: 탁청정 김유가 남긴 한국최고의 요리책
오천 광산 김씨의 전통은 이들 형제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김연은 벼슬길을 열었고, 김유는 집안 가풍을 확립했다. 그리하여 이들 형제는 당시 도산 향내의 최고 인물들인 김담(이조판서, 문절공), 권수익(이조참판), 이현보(숭정대부지중추부사, 효절공), 이황(대제학, 문순공), 금재(훈도), 조목(공조참판) 등과 혼인관계를 맺었는데, 이들을 배출한 선성 김씨, 안동 권씨, 영천 이씨, 진성 이씨, 봉화 금씨, 횡성 조씨 등은 당시 도산 최고의 명문들이었다. 7군자의 출현은 이들 형제의 토대를 바탕으로 했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이 집의 대표적 인물이 이들 세대에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당연히 이들 가운데 어느 분이 대표성을 가지는, 그래서 불천위가 되어 있으려니 하지만 내막은 그렇지 않다. 불천위로 모셔진 분은 김효로와 더불어 4세대의 김해金垓와 김령金坽이라는 분이다. 김해는 김부필의 아들이고 김령은 김부륜의 아들이다.
김해는 오천 광산 김씨 두 번째 문과 급제자로, 호가 ‘근시재近始齋’다. 예문관 검열에 있을 때 정여립 역모 사건에 연루되어 있다는모함을 받아 구금되어 문초를 당했다. 간신히 목숨은 구했지만 삭탈 관직되었고 곧 낙향했다. 고향에 와서 주자朱子의 ‘근시일정처近始日靜處’라는 구절을 좇아 근시재라는 집을 짓고 학문에 매진했다. 그런 가운데 임진년 왜가 침입하자 분연히 일어났다. 《향병일기鄕兵日記》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예안 향인들이 의분을 토하면서 서로 말하기를 ‘나라가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우리들이 어찌 깊은 산속에 숨어 임금의 위급함을 앉아 보고만 있을 수 있겠는가’하고 각각 자제들과 천인 300여 명을 내어 빈 땅에서 활쏘기를 익히게 했다. 생원 금응훈을 도총都摠으로 삼고, 전 한림 김해를 대장으로 삼아 거사하고, 진사 이숙량은 글을 지어 열읍에 포고했다. 전 군수 조목과 전 현감 금응협, 김부륜 등은 모두 쌀을 내어 군사를 먹이는 것을 도왔다.
이것이 경상좌도 최초의 조직적 의병인 예안 향병의 모습이다. 예안 사람으로 태백산에 은거하여 의병을 일으킨 류종개의 기록을 보면 “만약 군사를 모으면 적을 불러들일 뿐이다”라고 했으니, 당시는 보복이 두려워 의병을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시기였다.
예안 의병이 일어난 지 얼마 후 안동의 여러 고을에서 창의의 깃발을 든 선비들이 우후죽순처럼 궐기했고, 김해는 마침내 안동 지역을 대표하는 ‘안동열읍향병대장’에 추대되었다. 당시 향병 부대장인 배용길의 기록을 보면,
아! 우리 달원達遠[김해의 자]이 말하기를 ‘숨어 죽을 것 같으면 차라리 적과 싸워야 하며, 무릎 꿇고 모독을 당하려면 차라리 싸우다가 죽는 것이 영광스럽다”고 했습니다. 이를 지켜 본 사람들은 머리끝이 서서 갓이 들먹거렸고, 이 말을 듣게 된 사람은 눈물이 갓끈을 적셨습니다. 그리하여 열읍의 동지들이 안동에 모여 맹세를 하고, 공을 대장으로 추대했습니다.
안동 의병은 1592년 예천전투에서 승리하고, 상주 함창에서도 혁혁한 공을 세웠다. 김해는 1593년 아내의 장례를 치르고 하루 만에 경주 진영으로 돌아갔으나, 진중에 이르러 문득 병이 들어 죽었다. 나이 39세, 절명시 한 수를 남겼다.
나라와 사직을 구하려고 百年存社計
6월 군복을 입었다 六月着戎衣
몸은 나라 위해 먼저 죽지만 爲國身先死
혼은 부모 찾아 돌아가네 思親魂獨歸
김해는 청춘에 죽었다. 한창 일할 수 있는 나이에 죽었기에 제문祭文도 슬픔이 절절하다. 그 가운데 월천 조목의 제문은 ‘슬프다’는 뜻의 ‘희噫’자를 여섯 번이나 써서 고인을 추모했다.
먼 길 뜻이 높았으나 갑자기 이런 지경이 되었으니 슬프고, 변란의 시국을 맞아 의병을 모집할 수밖에 없으니 슬프고, 한원翰苑[한림원과 예문관]에서 포부를 펼쳤으나 시신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오니 슬프고, 어린 아이들이 눈앞에 가득하고 부모가 생존해 계시니 슬프고, 부부가 같은 시기에 죽었으니 슬프고, 양대兩代를 사귀어 늙은 내가 비통하니 슬픈 일이다.원문: 長途遠志遽至於斯 噫, 遭時之變糾旅興師 噫, 翶翔翰苑草裏尸歸 噫, 幼穉盈前鶴髮在堂 噫, 夫兮婦兮一時具亡 噫, 兩世交契老我悲傷 噫.
김령은 호가 ‘계암溪巖’이다. 사관으로 있을 때 인목대비가 서궁에 유폐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탄식하기를 “간신이 정권을 농단하니 기강이 끊어졌다” 하고 돌아와 두문불출했다. 인조반정 이후 다시 불려 올라가는 도중 “권세가가 거사를 도모해 임금을 바꾸었는데 광해 임금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는 말을 듣고 말머리를 돌려 돌아왔다. 이로부터 병을 핑계로 19년을 고향에서 보냈다. 《계암일록溪巖日錄》에는 “돌아와서는 식음을 전폐하고, 세수도 하지 않고 바지도 입지 않은 채 이불을 뒤집어쓰고 앉았다 누웠다 하기를 2, 3년, 그 뒤 6, 7년은 일체 문밖출입도 하지 않았다”고 했다.
김령의 행동은 언뜻 이해가 안 된다. 인목대비의 서궁 유폐는 부당한 일이라며 두문불출했고, 인조반정은 정당하지 않다며 다시 은둔 칩거했다. 그렇게 보낸 세월이 무려 19년. 인목대비의 서궁 유폐는 광해군이 한 일이다. 김령은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보았다. 그런 광해군을 쫓아내자 그것도 잘못되었다고 보았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곰곰 생각해 보면 그리 특이한 행동도 아니다. 광해군에게 인목대비는 어머니이니 어머니를 유폐한 것은 효를 다치게 한 것이었다. 한편 아무리 폭군일지언정 광해군도 엄연한 임금이었으니 그를 쫓아낸 것은 충을 다치게 한 것이었다. ‘효와 충’은 조선 500년의 국시國是이고 그 어떤 경우에도 손상되어서는 안 되는 지고의 선이었다.
그런데도 의문은 가라앉지 않는다. 효의 문제는 그렇다 하더라도 이미 폭군으로 지목된 광해군에 대한 불사이군不事二君은 명분을 갖는 것일까? 그것도 거짓으로 팔다리에 마비 증상이 있는 것처럼 연기를 하면서 보낸 19년, 이를 어찌 설명해야 할까? 조선 역사에서 단종에 대한 불사이군은 들어도 광해군에 대한 불사이군은 듣지 못했다. 그런데 영남의 여러 문집을 보니 뜻밖에도 김령과 상통하는 유형의 인물이 있었다.
‘숭정처사崇禎處士’라 불리는 일군의 인사가 그런 인물들이다. 그들은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섰음에도 명나라에 대한 절의와 지조를 굽히지 않았다. 그들은 국제 사회의 동향에 어두워도 너무 어두운,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절박한 에고이스트들이다. ‘숭정’은 명나라 연호인데, 그들은 이를 고수하며 청나라의 연호인 ‘순치順治’사용을 거부했다. 오랑캐인 청나라에게 굴복하는 것은 ‘동방예의지국’의 문명인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명나라가 이미 멸망해 없어져도 존주대의尊周大義 정신으로 존봉해야 한다고 그들은 생각했다.
안동 지역 인사로는 석계 이시명, 표은 김시온 등이 그런 분들이다. 이들은 “청나라의 지배를 받는 세상에는 나아갈 수 없다” 하고 초야에서 두문불출하며 생애를 마쳤다. 그리하여 선비 가운데 최고로 존경받는 선비인 처사가 되었으며, 그 처사 가운데도 또 다른 의미를 부여받은 이른바 숭정처사가 되었다. 김시온은 “내가 죽거든 나의 무덤에 ‘숭정처사의 묘’라고 써 달라”고 유언하여 그대로 쓰였다.
그런데 이 무렵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김해의 아들 김광계는 아버지처럼 의병을 일으켜 자신이 선봉이 되었다. 김광계가 이끄는 예안 의병은 죽령까지 진출했으나 도중 남한산성의 항복 소식을 듣고 해산했다. 이후 고향으로 돌아와 숭정처사로 일생을 마쳤다. 김령 역시 이때 서쪽을 향해 통곡하고 평생을 통분해하며 <제숭정력題崇禎曆>이라는 시를 지었는데, 명나라를 흠모하는 절절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었다.
‘명분’은 지키기 어려운 단어이며, ‘순수’도 지키기 어려운 단어이며, ‘지조’도 지키기 어려운 단어다. 그 어려움은 아득한 날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로 생애를 마쳤다’는 백이숙제 형제에까지 소급된다. 백이숙제는 동양 역사의 영원한 지조의 원형이다. 참혹한 형벌을 받은 성삼문이 형장으로 끌려가며 “그 고사리마저 누구의 땅에 난 것이냐”고 하였으니, 어쩌면 지조의 대명사는 성삼문이 아닌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김령의 생애 또한 ‘지조의 원형’으로, 분명 범인이 흉내 내기 어려운 일이었다. 김령은 임금을 위해 불사이군했고, 나라를 위해 숭정처사가 되었다. 최근 <계암정기문>을 쓴 김일대 선생의 글을 읽어 보니 “선생은 마음속으로 인조반정을 부인했으나 감히 공개적으로 드러낼 수 없었기에 오직 병을 핑계로 19년의 세월을 보낸 것이니, 어찌 어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했다.
그런 김령의 인생을 기리기 위해 나라에서는 그에게 시호를 내렸고, 집안과 향중에서는 그를 불천위로 존봉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지조가 있어 여러 번 불렀으나 사양하며 종신토록 고개를 넘지 않았으니 영남 제1인”이라 했다.
여기까지의 계보를 대략 적어보면,
1. 金孝盧-緣(문과, 감사)-富弼(생원, 이조판서 추증, 문순공)
富儀(생원)
綏(생원) 富仁(무과, 병마절도사)
富信(생원, 처사)
富倫(생원, 현감)
女 金雨(현감)
女 琴榟(훈도) -應夾(진사, 현감)
應壎(진사, 현감) -女 李寯(李滉의 子)
女 李寘(李瀣의 子)
2. 金緣 -富弼-**垓(문과, 의병대장).......후조당종택
富儀-垓(出)
女 金蘭宗(현령)
女 李容 -女 柳雲龍
女 朴思訥-惺
金綏 -富仁(무과, 병사) -壕-女 裵龍吉
坦(무과)
圻(의병, 원종공신)
富信-堈(생원, 의병)
坪(생원, 처사)
富倫-**坽(문과, 정랑, 문정공).....설월당종택
女 李憑
<** 불천위로 옹립된 분>
4) 문文과 재財의 전통명가
차를 몰고 천천히 오천 유적지로 들어가니 입구에 ‘군자리君子里’라 쓴 표석이 있고, 그 위로 ‘선비 문화의 전통-군자마을’이란 현수막도 보인다. 문화관광부가 선정한 전국 전통 문화 마을 세 곳 가운데 한 곳으로, 종종 다양한 행사도 펼쳐진다. 행사 가운데 ‘풋굿’과 ‘기로연’은 매우 호평받은 바 있다. 이들 일련의 일은 모두 주민들과 더불어 한다는 점에서 더욱 바람직하다.
몇 걸음 옮기니 입구 좌우 기둥에 ‘적선여경積善餘慶’과 ‘유장백세流長百世’라는 글씨가 쓰여 있다. ‘선을 쌓는 집 경사 있고, 그 가풍 백세 간다’라는 뜻이다. 이 말은 곧 이 집의 전통이다. 그냥 지나친다면 그는 적어도 이 집의 소리는 듣지 못하는 셈이 된다.
경내로 들어서니 곧 좌측으로 아담한 현대식 건물이 나타난다. 유물 전시관. 이곳의 유물들은 어마어마하다. 그것은 아이러니하게 안동댐으로 빛을 보게 되었다. 댐이 아니었으면 상당 기간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오천군자리》의 글을 보면,
그러나 (안동댐은) 결과적으로 예안파 광산김씨로서는 그 (유적의) 이전이 전화위복이 되었다. …… 종가를 해체하다가 대청 대들보와 지붕 사이의 감추어진 공간에서 수백 점의 귀하디귀한 보물이 쏟아져 나온 것이었다. 더욱 입이 딱 벌어지도록 놀라게 한 것은 광산 김씨 예안파의 개기조인 농수 김효로의 증조부, 다시 말해서 조선왕조 초 한성에서 안동 지방으로 맨 처음 이주해온 김무金務에서 지금의 그의 21대 후손에 이르기까지 600여 년에 걸친 각종 고문서, 예컨대 교서, 교지, 호구단자, 토지문권, 분재기, 노비문기, 시권, 혼서 등이 한 대의 누락도 없이 가지런히 발견된 사실이다.
유물들은 한국학중앙연구원으로 옮겨져서 《광산김씨오천고문서》라는 이름으로 발간되었다. 그 가운데 고문서 429점은 보물 1018호로, 전적典籍 61점은 보물 1019호로 지정되었다. 연구에 의하면 김연(1215~1292)과 손자 김진(1292~?)의 준호구와 호구단자는 고려 시대의 문서 양식을 보여 주는 매우 귀중한 자료이며, 김무가 1429년 노비 225명을 아들, 사위, 친손, 외손자들에게 나누어 준 분재기[金務許與文記]는 여말선초의 사회상을 이해하는 데 매우 소중한 자료라고 한다. 이들 유물들은 이 집의 보물이지만 한편으로는 대한민국의 보물이다.
유물 전시관을 지나면 국가 지정 문화재인 후조당과 탁청정을 비롯한 여러 건물이 나온다. 국가가 지정한 문화재이지만 안동에서 고건축은 그렇게 관심을 끌지 못한다. 성인聖人하고 사는 여자가 악처가 되듯이 안동 사람들에게 한옥은 거의 무심한 존재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사는 곳이 한옥이고 가는 곳이 모두 한옥이니 놀라운 일도 못 된다. 병산서원에 대한 온갖 미적 수사의 글도 안동 사람들에게는 ‘그저 그런 모양이구나’ 정도다.
그런데 좀 더 전문적 식견을 가지고 안동의 건축을 보면 안동이 왜 건축의 보고寶庫인지를 새삼 깨닫게 된다. 후조당은 그런 안동 한옥을 대표하는 건축물이다. 마루문을 사방으로 들어 올리는 구조는 단연 돋보인다. 매우 화려하다. 화려함은 당시에도 화제가 되어 1567년 낙성식에 초대받은 퇴계가 끝내 마루에 오르지 않고 현판만 써 놓고 가 버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한다. 퇴계는 후조당의 신축을 축하하면서 “들으니 집을 너무 화려하게 지어 매화 운격에는 맞지 않아 언우彦遇[김부필의 자]가 병이 날 지경이라 하여 이를 위로한다”는 글을 보내기도 했다.
1544년 지어진 탁청정濯淸亭은 더욱 화려하다. 탁청정은 당시부터 화려한 집이란 뜻의 ‘화루華樓’라고 불리기까지 했다. 김시찬이 쓴 중수기에 “선례가 없을 정도로 화려하다先無華構”는 표현이 보인다. 단청까지 있었다고 했다. 아마 정자라는 현판을 단 건물로는 이보다 앞서는 건물이 없을 것 같다. 퇴계가 “(탁청정의) 부엌에는 진미가 가득하고 독에는 술이 항상 가득하다”고 한 바 있는데, 그런 부유富裕가 이런 건물을 낳은 것인지도 모른다.
사진: 탁청정(중요민속자료 226호)
해설: 마루에는 농암 이현보, 퇴계 이황의 시가 걸려있고, 당호글씨는 한석봉이 썼다.
사진: 후조당(중요민속자료 227호)
사람들은 말하리라. 안빈낙도의 선비들이 어떻게 이런 화려한 집을 지을 수 있느냐고! 그렇게 볼 수 있다. 벼슬을 추구한 벌열閥閱 집안에서 이런 집을 지었다고 하면 지탄받을 수도 있다. 벼슬을 부 축적의 수단으로 삼지 않았느냐고. 그렇지만 벼슬에 초연한 재야의 가문은 경우가 다르다. 이런 가문이야말로 제대로 된 집을 지어야 한다. 단정하고 멋진 집은 가문의 상징이다. 오천 광산 김씨의 이런 집은 이 가문이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의 명예이며 규범이다. 결코 사치일 수가 없다.
군자리의 건축은 이후 김부인이 산남정을 짓고, 김부의가 읍청정을 짓고, 김부신이 양정당을 짓고, 김부륜이 설월당을 짓고, 다음세대의 김해가 근시재를 짓고, 그 다음세대의 김광계가 침락정을 구축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최근에는 김령의 후손들이 개암정을 지었다. 그런 집들이 지금 군자리의 언덕에 저마다 자리하고 있다. 마치 지난날 오천 7군자가 아침에 일어나 의관을 단정히 하고 ‘경敬의 자세’를 하고 있는 모습처럼 말이다.
사람들은 오천 광산 김씨를 “600년을 이어온 ‘문文과 재財’의 전통명가”라 한다. ‘문’은 ‘지조’로 나타났고 ‘재’는 ‘너그러움’으로 승화되었다. 이런 특징에 대해 《선성지》는,
오천 광산김씨는 집에서 효도하고 나가서는 공경한다. 형은 우애하고 아우는 공경하며 시비를 분명히 하여 사람들이 경외한다. 악을 미워하고 선을 좋아하며 성품이 엄정하고 열심히 공부하여 모두 글을 잘 지으니 참으로 군자답다. 집집마다 사마司馬요 집집마다 시주詩酒가 있어 손님이 오면 온갖 정성을 다하였다.
물론 이는 오천 광산김씨의 과거에 대한 평가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이 집의 현재이며 미래일 수도 있다. 이런 명예로운 전통을 계속해서 이어가는 것이 전적으로 이 집 후손들의 몫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사진: ...년도 후조당종택의 잔치모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