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1번지-안동 도산

예던길을 따라가는 신 도산기행

 

 

 

                                        천년의 선비를 찾아서

 

 

 

 

 

 

 

 

 

 

 

 

 

 

 

 

 

 

 

 

 

**저자 이성원

 

이성원은 안동에서 태어났다. 성균관대학교 사범대학 한문교육과를 졸업하고 그 후 한국한문학을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길원여고교사, 한국국학진흥원연구원, 도산서원선비문화수련원강사, 청량산문화연구회회장 등을 역임하고, 지금은 청량산 자락 가송리 강변에서 고택을 개방하고 유유자적 살아가고 있다. ‘이황, 이이 이기철학의 정치사회적 성격’, ‘퇴계식의 교육과 인생’,‘안동의 종택문화’, ‘안동의 집회문화’,‘도산9곡과 유교문화’,‘이름의 문화’ 등의 글을 썼다.

 

 

 

 

글머리에

안동의 종택문화

 

 

 

차례

#도산 길, 오천, 부포, 분천으로의 여행

 

1. 안동문학의 번성함은 실로 선생으로부터 창도되었다.

   -도산 길-

                   유일재종택, 유일재의 고독, 유일재 종부 김후웅 여사

 

2. 오천 한 마을 군자 아닌 사람이 없다!

   -도산1곡, 오천-

                   군자리, 7군자, 아버지와 아들, 문과 재의 전통명가

 

3. 이 몸이 자식에게 전하고 자식이 손자에게 전하고 그리고 그 알 수 없는 아득한 세대에 까지 잊지 말고 이어진다면.

   -도산2,3곡, 부포-

                  예안주변, 물에 잠긴 부포, 지부상소, 월천서당, 영광과 시련, 부라원루

 

4. 정승벼슬도 이 강산과 바꿀 수 없다.

   -도산4곡, 분천-

                  분강촌, 농암과 어부가, 간재와 귀갑선도, 경로전통, 애일당구경첩, 고향유정

 

 

#도산5곡, 도산서원을 찾아서

 

5. 낙동강은 이곳 도산에 이르러 비로소 강이 되었다.

   -도산서원의 추억-

                  도산9곡, 안동댐과 예안문화

 

6. 어찌 예안의 하늘이 경주의 하늘과 다르단 말인가!

   -도산서원의 시련-

                  도산서원 서류사건, 퇴계위패 도난사건, 도산서원 철패운동, 시련을 넘어

 

7. 서울 사람들이 이런 자연의 즐거움을 모르고 어떻게 울적한 심사를 달랠까!

   -도산서원의 관람-

                  천운대와 천연대, 도산서당, 농운정사, 광명실과 이주부공, 도산서원

 

 

#온혜, 상계, 하계, 원촌으로의 여행

 

8. 용두산 아래에는 옛 날부터 뜨거운 물이 나왔다.

   - 온혜-

                  노송정, 송재 이우, 청음석, 송당과 애련정

 

9. 개울가에 비로소 거처를 정했으니,

   - 상계-

                  양평과 두향, 토계의 개울가, 가거지지, 편지교육, 이선기악, 추월한수정, 매화 밭

 

10. 하계는 있어도 안 되고 없어도 안 된다.

   - 하계-

                  하계문화, 하계의 독립운동, 퇴계묘소, 하계잔영

 

11.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도산6곡, 원촌-

                  말 멘데, 육사 이원록, 육사와 임청각, 원촌대감, 오가세록

 

 

#‘예던 길’을 따라서

 

12. 이제부터 그림 속으로 들어갑니다.

    -도산7곡, 단천-

                  갈선대, 백운지와 두 비석, 예던 길

 

13. 굽어보면 천길 파란 물, 돌아보니 겹겹 푸른 산

   -도산8곡, 가송-

                  올미재, 벽력암과 김태기 노인, 강각과 농암종택, 월명담과 고산정, 공주당

 

14. 선경의 산을 묻는다면 반드시 청량산을 꼽을 것이다.

   -도산9곡, 청량산-

                  유청량산록, 입석코스, 퇴계유산, 청량산산사음악회

 

 

 후기 -신 귀거래사

 

찾아보기

 

 

 

 

 

 

 

글머리에

 

 

1982년 5월, 나는 ‘관례冠禮’를 했다. 혼인이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오랜 기간 수십 차례의 맞선을 본 끝에 어느 눈 먼 여인이 선택해준 덕택이었다. 결혼이 어렵게 이루어진 까닭은 나의 너그럽지 못한 성품이 주요 원인이고, 다른 하나는 환경이 좀 특이한 탓이었다. 총각시절 마음속으로 최소한 두 가지 결혼 원칙―연애결혼과 눈이 작은 여자―을 견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도 이룰 수 없었다. 일이 잘 되었으면 그만이었겠지만 일이 꼬일 때마다 환경을 원망하는 심리적 회피를 거듭하곤 했다.

기대는 상치되기 일쑤였다. 내가 추천한 여자는 거부되었고 주위에서 추천한 여자는 내가 싫었다. 호감을 느끼고 다가온 처녀들 역시 나의 환경을 헤아리곤 곧 떠나 버렸다. 지금의 처가에서도 그런 과정이 있었다. 맞선을 본 이후, 장인어른의 찬성에도 불구하고 가족회의는 반대로 모아졌고 혼사는 결렬되었다. 장모, 처형 등 주로 여자들의 반대가 심했다고 한다. ‘불천위不遷位 종부宗婦의 인생’ 선택에 무척 부정적이었던 것이다. 명백한 거부의 의사가 전해진 지 3개월여 뒤 5월 어느 토요일 오후, 나는 느닷없이 기차를 타고 경주를 가서 처녀의 집을 방문했고 일주일 만에 승낙을 받아냈다. 그리고 한 달여 뒤에 예식을 올렸다. 우리는 그 사이 보문단지에서 단 한 번의 데이트를 했다. 결혼 의사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혼사는 우리 측 주장대로 진행되었다. 그러니까 기간으로는 7년, 맞선의 횟수로는 공식, 비공식 합쳐 30여 차례, 드디어 종지부를 찍었다. 정말 ‘인륜지대사人倫之大事’였다. 혼사 문제를 겪으면서 나는 지쳐 있었다. 그러나 이런 체험 속에서 전통을 지켜온 한 가문의 주손 되는 사람의 인생이 예사롭지 않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막연하게 느껴온 임무, 책임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그렇지만 그 무렵 나의 심사는 이러한 상황을 긍정하고 수용하기보다는 피동적이거나 매우 애매한 태도로 따라가는 정도였다. 이런 태도는 그 후에도 상당 세월 계속되었다. 내가 이러한 전통과 일상에 관심을 갖고 이해하기 시작한 것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관례는 이렇게 이루어졌다. 친지, 어른들이 오셨고 음식들이 분주히 오고갔다. 관혼상제冠婚喪祭의 예에서 ‘관冠의 예’와 ‘혼婚의 예’가 조금의 시차를 두고 동시에 이루어지는 셈이었다. 그런데 관례 의식에는 두 가지 의미 있는 절차가 있었다. 하나는 ‘갓[冠]을 쓰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자字를 받는 일’이었다. 나머지 시간은 혼례를 앞둔 예비 경사인 만큼 온종일 웃음과 음식과 환담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도포道袍라는 옷을 입고 사랑방으로 나가니 방 안에 20여 명의 단아한 노인들이 둘러앉아 계셨다. 노인들 사이에서 몇 마디 대화가 오고 간 뒤, 이윽고 그 가운데 한 분이 일어나서 내게 갓을 씌워주시고 갓끈을 묶어주셨다. 그리고 조금 후, 조그만 쪽지를 내게 보여주셨다. 거기에는 한자 두 자가 정갈하게 쓰여 있었다.

‘계도繼道’

그리고 천천히 한 말씀 하셨다.

“자네 자를 계도라고 지었네 …… 이을 계, 법도 도 …… 도를 이으라고 …… 지금은 사문斯文의 도道가 쇠퇴하니 자네는 공부도 그러하고 해서 우리들이 그렇게 지었네.”

노인은 그 때 다짐하듯 다시 한 번 말씀하셨다.

“계도라고!”

나는 신음하듯 되뇌었다. ‘계도’라?

 

사진: 관례

해설: 우측은 1982년 필자의 관례사진이며 좌측은 필자의 아들 이병각의 2009년 관례사진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길이 있다. 그 길은 누구도 함께할 수 없다. 나 역시 이런 나의 길이 있어 그 길로 왔고 걸어가고 있으며 지금 충분히 행복하다. 물론 그 길은 남이 가지 않은 길이고 또 갈 수 없는 길이기도 하다. 나는 한문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한문학을 전공했으며 퇴계와 율곡의 이기理氣 이론을 연구하여 박사 학위도 받았다. 간절히 학자가 되고 싶었지만, 그런 길은 주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청춘은 다시 오래도록 아프게 흘러갔다. 마흔세 살까지만 살려고 했으나 그 역시 뜻대로 되지 않았다. 처자식이 막았다.

그렇다면 내가 갈 길은? 은둔隱遁! 나는 숙고 끝에 은둔을 택했다. 그로부터 은둔의 터를 물색했고, 그 결과 지금의 청량산 자락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강변을 산책하고 책이나 읽으며 한세월 살고자 했다. 은둔이 나의 길이었다. 그렇게 귀거래歸去來했다. 그런데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이었다. 터를 발견하고부터 나의 인생이 아름답게 마감될 수 있음을 한눈에 직감했다. 갈망하던 바로 그런 터였다. 고요를 좋아하고 혼자 있기를 좋아하던 내게 그곳은 바로 적지였다.

그렇게 은둔한 세월이 벌써 10여 년, 빈둥빈둥 지냈다. ‘빈둥빈둥’이 초심과 부합했다. 빈둥거리며 살아가니 새삼스럽게 인생을 관조하게 되고, 한편으로는 이렇게 글을 쓰는 여유까지 생겼다. 글은 나를 발견하게 했다. 몸과 마음을 단정하게 해주었으며, 무엇보다도 산촌의 고요와 적막을 잔잔한 기쁨으로 변모시키는 구실을 했다. 읽는 즐거움보다 쓰는 즐거움이 더욱 컸다.

즐거움은 대화에도 있었다. 은둔한 나에게 어느 날부터 사람들이 찾아왔고, 정겨운 밥상머리 대화가 펼쳐지기도 했다. 이런 자리에서 나는 인생을 힘들게 하고 상처받게 하는 가장 큰 요인이 ‘가족家族’이라 했고, 그 원인을 ‘충고忠告’라고 했다. 나는 내가 아는 지식과 내 삶의 한 단면을 말했는데 사람들은 뜻밖에 무척 수긍하고 기뻐했다.

지난해에는 조영식 선관위 사무총장과의 인연으로 선관위 직원을 상대로 강의하는 일까지 있었는데, 그때 제목이 ‘충고하지 말라’였다. 분에 넘치는 외도였다. 그러나 이런 경험을 통해 나의 이런 견해가 단 몇 가족에게라도 밝고 명랑한 삶에 보탬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런 지혜는 나 자신의 독창적인 것이 아니다. 나는 퇴계 선생을 ‘CEO 퇴계’라는 측면에서 가끔 생각해 보는데 그 가르침의 핵심이 ‘편지’와 ‘충고하지 않음’이었다. 이 두 가지가 사람을 감동시키고 분발시키는 결정적인 요소였다.

물론 이 책에 ‘가족’과 ‘충고’만 담겨 있는 것은 아니다. 가족과 충고는 사실 작은 부분이고, 대부분은 강변의 사색으로 엮어져 있다. 이곳 도산 강변의 사색은 사실 나만의 것도 아니다. 이 강변은 지난날 영남 남인의 문인과 지식인들이 생애 한 번씩 거닐었던 꿈의 순례 코스로, 지금 80편 이상의 기행문이 남아 있고 10000편 이상의 시가 남아 있으니, 우리 모두의 사색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이곳 강변에서 태어난 나에게는 익숙한 길이기에 아예 도산 길의 구비 구비를 걸으며 좀 긴 사색의 글을 썼다.

 

돌이켜보면, 도산은 살기 좋은 땅, 즉 ‘가거지지可居之地’로 전국 제일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조물주가 특별히 만들어 놓은 땅이며,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별천지”라 했다. 또한 도산은 옛 지명이 ‘예안禮安’으로 안동과는 구분되어, 역사도 안동은 《영가지永嘉誌》에 도산은 《선성지宣城誌》에 기록했다. 안동에는 안동향교가 있고 예안에는 예안향교가 있었다. 그래서 1914년 행정 구역이 개편되기 전까지 안동에서 예안은 항상 ‘예안’으로 존재하여 “안동 문화는 ‘안예문화安禮文化’라고 해야 옳다”라는 말이 나오기까지 했다.

《택리지》를 쓴 이중환이 ‘예안의 도산’과 ‘안동의 하회’를 “전국 최고의 살기 좋은 마을”이라 했고, 성호 이익은 “영남은 조선의 정심正心이며, 그 중심부에 안동과 예안이 있다”라고 했으니, 지난날 도산은 정녕 한국 문화 1번지였다.

물론 지금 도산은 그 도산이 아니다. 안동댐으로 말미암아 ‘도산 9곡’ 가운데 6곡까지 폐허가 되었다. 그렇지만 7곡 단천곡, 8곡 가송곡, 9곡 청량곡이 고스란히 남아 있고, 6곡까지의 유적도 적지 않게 남아 있다. 1곡의 유적은 ‘안동군자마을’이라 명명하여 35번 국도변으로 이건되었고, 2곡과 3곡에는 월천서당과 성재종택, 부라원루가 남아 있다. 4곡에 있던 농암종택, 애일당, 분강서원 등은 가송곡에 옛 모습 그대로 이건되었다. 5곡에는 도산서원이 있고, 6곡에는 육사생가가 있다. 뿐만 아니라 도산서원 앞 강 건너에는 99칸으로 유명한 번남댁이 아직도 그 화려한 모습을 간직한 채 남아 있다.

이런 유적 사이로 도산 길 초입에는 선성아문, 예안향교의 옛 건물과 새로 지은 한국국학진흥원(유교박물관), 산림과학박물관 등도 있다. 도산서원으로 들어가는 구불구불한 산허리의 새 길을 따라 도산 산천을 조망하면서 도산서원을 보고, 되돌아 나와 뒷산 길을 넘으면 곧 노송정, 퇴계 종택, 수졸당, 육사생가가 있는 온혜, 상계, 하계, 원천의 마을들을 볼 수 있다. 다시 단사협, 가송협, 청량산으로 이어지는 ‘예던 길’의 아름다움을 계속해서 만나게 될 것이다.

이 책의 글들은 나의 구구한 고향유정과 더불어, ‘도산 길’의 이러한 산천에 녹아 있는 옛 선비들의 체취와 숨결을 지금 사람들이 알기 쉽도록 평이하게 쓴 글이다. 강원도의 오지를 다녀보면 문득 이곳이 조국 산천의 심장과 허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나듯이, 이곳 안동의 도산을 다녀보면 우리 한국의 전통과 정신이 어디에 근원하는가를 깨달을 수도 있을 것이다.

 

책이 나오기까지 나의 오늘이 있게 한 훌륭하신 부모와 선조들, 형제 친지들, 그리고 이 땅에서 올곧게 살아가신 여러 선현들과 어른들께 고개 숙여 인사를 올린다. 청량산 자락에서 태어나 취미로 사진을 찍으며 살아가는 권영조 씨와 푸른역사 백승종 사장께도 아울러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구구한 한마디를 더한다면, 보잘것없는 책이지만 널리 읽혀 그동안 마음고생하며 살아온 마누라가 얼굴 한번 활짝 펴게 되면 그런 행복이 없겠다.

 

2008년 1월

가송 올미재에서 이성원

 

 

 

 

 

                                              사문의 도를 이어가라

                                               -안동의 종택 문화

 

 

 

 

 

1) 이로써 나는 종손이 되었다

 

‘계도繼道’가 내 자字다. 관례冠禮 때 지었다고 했다. 그때 어른들은 “사문斯文의 도道를 이어 달라”는 구체적 주문까지 하셨다. 사문은 ‘유가儒家’를 말함이니, “유가의 도를 이어 달라”는 의미다. 자의 성격으로 볼 때, 나에게는 분명한 사회적 책무가 부여되어 있다. 나 또한 이를 감당해야 하는 윤리적 책임감을 느낀다. 물론 이 요청을 외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수용과 외면은 모두 ‘과연 이 도道가 옳은 도인가?’ 하는, 도道에 대한 올바른 인식에서 선택이 가능하다. 이는 숙명의 영역이기보다는 한 개인의 세계관과 연관된다.

도가 무엇인가? 도는 어디에 있는가? ‘만행卍行=득도得道’의 공식은 얼마다 많은 청춘을 방황하게 했는가! 도는 길이다. 길은 곧 인생의 길이다. 청춘의 한때, 아니 청춘이 지나가는 길목 길목에서 나는 얼마나 서성거렸는지 모른다. 길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길을 이어가라’는 주문은 그들의 길이었지 젊은 날 나의 길은 아니었다. 고등학교 시절,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고독한 사람이었다. 남은 모르지만 적어도 나는 나를 그렇게 생각했다. 나는 가출했고 한없이 비틀거렸다. 언젠가 이력서를 제출하기 위해 성적증명서를 떼어보니 석차는 330명 중에 320등, 결석일수는 59일이었다.

모르는 것이 인생행로다. 대학을 생각하지 않은 내가 재수를 하게 되고, 대학에 합격하여 서울로 가게 되었다. 그때 나의 눈에 비친 서울에는 썩은 자본주의와 군사문화, 이 모순을 깨고자 하는 사회주의 계열의 몸부림과 좌절, 그리고 이와는 사뭇 다른 모습으로 온존하던 16세기의 유교적 고향이 젊은 날의 향수처럼 남아 있었다.

나는 이문열의 《젊은 날의 초상》에서 방황하는 젊은 날의 나의 초상을 뚫어지게 보았다. 복사꽃잎 같은 푸른 영혼이 바람에 날았다. 길은 어디에도 없었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 놓았지만 어른들이 주문한 그 길만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세월이 흐르면서, 나이가 들면서,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렵던 그 길이 부지불식간에 내 곁으로 슬며시 와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럴 때마다 신일철 교수의 변증법 해석, 즉 “변증법은 탕아의 귀가다”라고 하신 말씀이 자꾸만 생각나곤 했다. ‘해병대를 가고 외항선을 타겠다’는 꿈은 꿈으로 사라져버렸다. 그럴 즈음 결혼을 했다.

‘때를 묻혀야 한다.’ 작은아버지께서 아내가 시집올 때 공공연히 하신 말씀이다. 아내가 우리 집 시집살이에 무난히 적응하기 위해 적어도 1, 2년은 고향에서 살아야 한다는 지론이셨다. 형제분들은 몇 번이나 이 문제로 머리를 맞대고 의논하셨다. 요컨대 ‘봉제사’, ‘접빈객’ 등의 유가적 전통을 몸에 젖어들게 하기 위해 결혼 초기 몇 년을 고향에서 살도록 하겠다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었다. 작은아버지는 이를 위해 직장도 일찌감치 고향의 어느 사립 여자고등학교에 마련해 주셨다. 이러한 배려(?)로 인해 뜻밖에 낙향을 할 처지가 되었다. 파격이라면 파격이었다.

그 때 나는 군 입대 전이라 당분간만 그러한 뜻을 따라 주리라 했다. 그러나 그것이 영원으로 이어질 줄이야! 훗날 제대하고 보니 다시는 떠날 수 없는 운명이 거기 서성거리고 있었다. 작은아버지는 아내뿐만 아니라 사실은 내가 주손으로서 고향과 사당을 지켜줄 것을 오래 전부터 원려근모遠慮近謀하셨던 것이다. 하긴 작은아버지뿐만 아니라 선친을 비롯한 주변친지 모두의 바람이었다. 그런 염원들은 아마 ‘계도’라고 자를 작명하기 전에 이미 결정되어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렇지 않았다. 좀처럼 때를 묻히지 않으려 했다. 경계심을 갖추고 다짐까지 했다.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농경시대와 산업시대는 분명 다르고 달라져야 한다고! 개혁할 각오가 없다면, 나의 존재는? 끝없는 고뇌가 밀려왔다. 결혼 문제는 길을 여는 첫 번째 도전이자 시금석이었다. 여기서부터 밀리면 안 된다고. 그래서 나는 결혼 문제에 여간 완강하지 않았고, 끝내 나의 선택을 했다. 그런 의도가 작용한 것인지 지난날엔 취미 역시 전통의 행동규범과는 거리가 있는 등산, 영화, 테니스, 태권도, 포커 등이 주였다. 군대도 혹독한 교육으로 유명한 가평의 제3하사관학교에 나왔다. 사랑받을 행동은 골라가며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의 이러한 일련의 저항(?)은 사실 찻잔 속의 파도에 불과했다는 것을 늦어서야 깨닫게 되었다. 나는 어느덧 아내 이상으로 때가 묻어 있었고, 때 묻음을 적이 수용하고 있었다. 이러한 과정은 예고되어 있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어린 시절, 우리 형제들은 아버지로부터 《천자문》, 《소학》, 《자치통감》, 《맹자》, 《논어》 등을 배웠다. 내 아이도 그런 교육을 조금 맛보았다. 한문학과 입학과 교사의 길은 이렇게 보면 아내에게 때를 묻히는 음모(?) 이상의 아주 장기간에 걸친 공작의 일환이었다.

아무튼 고향으로 내려왔고 직장 역시 교단으로 잡았을 때, 그런 분위기는 회피할 수 없게 되었다. 또 전공이 한국한문학이었기에 외형과 내면에 돌이킬 수 없는 유가적 메커니즘이 형성되고 있었다. 단지 거부하는 몸짓으로 주변을 맴도는 시늉만 했을 뿐이다. 이는 보다 중심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탐색과 수순에 불과했다. 아니 오래 전부터 그렇게 길들여 왔던 것이다.

 

1998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어느덧 3년 상이 지나고, ‘길제吉祭’까지 마쳤다. 길제는 ‘길사吉祀’라고도 하는데 제사 가운데 유일하게 ‘즐겁게 지내는 제사’다. 그만큼 보기도 어렵다. 길제는 주제자인 나 자신에게도 적지 않는 문화적 충격이었다. 제사가 아니라 축제였다. 돌아가신 밤에 지내는 ‘기제忌祭’, 철따라 지내는 ‘시제時祭’, 묘소 앞에서 지내는 ‘묘제墓祭’와는 전연 다른 성격의 제사였다.

길제는 쉽게 설명하면 ‘종손, 종부 취임식’이다. 그때까지 나는 종손이 죽으면 장자가 그대로 종손이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새 종손, 종부를 결정해야 했다. 사실 결정되어 있지만 취임식이 있어야 한다. 그 취임식이 길제다. 이는 자손 모두의 관심사다. 자연 이날은 많은 자손들이 참석한다. 연비 관계에 있는 인척들도 참석한다. 경비는 대부분 문중에서 감당한다. 적어도 길제만은 문중 축제이기 때문이다. 정체성과 긍지, 그리고 자부심을 갖게 하는 의미 있는 의식이다. 정체성의 문제는 개인, 단체, 지역, 나라 등 어떤 개체들도 피할 수 없는 인간 욕구의 궁극적 과제다.

종부는 길제의 꽃이다. 족두리에 원삼을 곱게 차려입고 부축을 받아 사당에 나아가 절을 하는데 이 의식이 길사의 대미다. 이런 절차를 밟아―이미 전일 써 둔―‘불천위 선조’를 비롯한 고조, 증조, 조부, 부모의 위패에 ‘奉祀孫**奉祀’라 쓰면 종손, 종부가 된다. 취임식을 마친 셈이다. 이후부터 호칭에 걸맞게 그 고유한 업무에 돌입하게 된다. 이로써 나는 ‘종손’이 되었고, 아내는 ‘종부’가 되었다.

 

 

사진: 농암종택 길제모습

 

사진: 농암종택 길제 당시의 종부 이원정의 모습

 

 

2) 종택, 가문 탄생의 상징

 

그렇다면 이런 종손, 종부가 사는 ‘종택’은 어떻게 탄생했나. 왜, 무엇이 그토록 전통을 지키도록 하는 것일까. 그리고 이를 지켜 온 사람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한마디로 종택 문화는 훌륭한 인물을 기리고 그 인물을 본받고자 하는 염원에서 비롯되었다. 그렇다면 다시 의문이 떠오른다. 도대체 ‘훌륭한 인물은 누구인가?’라고.

우리 역사에서 인물은 ‘시호諡號’와 맞물려있다. 시호 이외에 다른 인물 평가는 없다. 인물에겐 시호가 내려진다. 훌륭한 사람이 죽으면 시호 논의가 일어나고, 시호가 내려지면 국가적 인물로 공식 인정된 다. 주무 부처는 ‘봉상시’라는 기관이다.

우선 인물이 죽으면 일대기를 짓는다. 집안 차원에서 짓는 글이 ‘가장家狀’(혹은 ‘유사遺事’)이다. 가장은 ‘행장行狀’의 기초가 된다. 가장은 초고이고 행장은 완성된 글이다. 가장은 집안 사람이 쓰지만 행장은 그렇지 않다. 당대의 문장가에게 부탁한다. 왜냐하면 행장은 ‘공식 일대기’이며, 시호를 받기 위한 글―시장諡狀―의 기본 자료가 되기 때문이다. 시호를 받기 위한 공적 조서가 시장인데, 시장은 행장을 기초로 한다. 행장도 그렇지만 시장의 글은 절대 허위, 과장되어서는 안 된다.

시호는 압축되고 정밀한 의미가 부여된 문文, 무武, 정貞, 공恭, 양襄, 효孝, 장莊, 경敬, 익翼, 안安 등 120여 가지의 글자를 상호 조합해서 짓는다. 가령 ‘익翼’자는 ‘사려심원思慮深遠(사려가 심원하다)’, ‘정貞’자는 ‘청백수절淸白守節(청백하며 절개를 지켰다)’, ‘문文’은 ‘도덕박문道德博聞(인격과 학문이 높다), ‘양襄’은 ‘인사유공因事有功(특정한 국사에 공이 있다)’, ‘충忠’은 ‘위신봉상危身奉上(위기에 몸을 바쳐 충성했다), ‘효孝’자는 ‘자혜애친慈惠愛親(너그럽고 효성이 있다)’ 등으로 분류되어 있다. 어떤 분의 시호가 ‘문정공文貞公’이라면, 글자 뜻으로 보아 “인격과 학문이 높으며 청백하고 절개를 지킨 분”이라고 생각하면 거의 틀림없다. 글자 의미를 알게 되면 시호만 보고도 그 분 생애의 특징적 일면을 짐작할 수 있다. 물론 다른 의미도 내재되어 있다. 가령 ‘문文’이라는 글자는 ‘도덕박문’ 이외에도 ‘민이호학敏而好學’, ‘충신애인忠信愛人’ 등 10여 가지의 다른 뜻으로도 쓰인다.

이순신은 이름보다 ‘충무공忠武公’이란 시호로 널리 알려진 분이다. 아마 우리나라에서 시호가 이렇게 일반화된 이름으로 불리는 유일한 분이 아닐까 생각된다. 충무忠武는 ‘군인으로 나라에 충성을 다함’이니 아주 적절하다. 이렇듯 시호 내림은 생전의 이력으로 이미 그 가부가 어느 정도 공론화되며, 심사의 제도적 객관성과 투명성으로 인해 매우 엄격하고 공정했다.

사대부 최고 영예는, 생전에는 ‘대제학大提學’ 벼슬이고 사후에는 시호 내림이었다. ‘문文’으로 발신한 선비들에게 국가적 글[文]을 총괄하는 문형文衡-대제학-이야말로 진정 영예로운 관직이 아닐 수 없었다. 정승이 결코 부럽지 않았다. 그래서 대제학만은 그 임명권이 최고통치자의 권한 밖에 있었고, 임기도 정해져 있지 않다. 국왕의 결제를 받지 않는 유일한 관직이었다.

양촌 권근의 외손자로 권남, 한명회 등과 공부한 적인 있는 사가 서거정이 점필재 김종직에게 문형이 넘어갈 것을 염려하여 무려 23년을 지킨 뒤 어세겸魚世謙에게 넘긴 것과, 사암 박순이 ‘퇴계에게 양보했다’는 일화 등은 대제학이 갖는 무게의 한 단면이다. 대제학은 당대 최고 문인이다. 적어도 그렇게 인정받은 사람이다. 그러나 시호 또한 이에 못지않다. 사후 업적평가를 통해 국가적 공로자로 인정한 총체적 보상이기에 더욱 큰 영예로 간주했다.

그런데 이 시호라는 것은 ‘영예로움의 표창’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정확한 말인지 모르지만 지금 대령에서 장군으로 진급하면 30여 가지의 신분 변화가 있다고 한다. 시호의 내림은 이런 경우와 비교 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것인지도 모른다. 우선 시호가 내려진 사람은 국가적 원로나 공훈자로 공식 추대된 자이기에, 존경과 더불어 영원히 추모 받을 권리가 합법적으로 부여된 것으로 봐야 한다. 불천위 자격이 갖추어진 셈이다.

 

 

사진: 대제학 교지

 

 

시호가 내려지면 묘비의 글을 다시 쓰고 고유告由한다. ‘황색교지’를 태워 그 연유를 고하기 때문에 ‘분황고유焚黃告由’라 한다. 이때 자손들은 간혹 ‘이 할아버지에 대해서만은’이라고 전제하면서 은연중 추모논의를 한다. 훌륭한 조상을 추모하고자 함은 인지상정이다. 그래서 불천위 옹립 여론이 일어난다. 여론이 향촌의 동의와 유림들의 공론을 얻게 되면 추모전용 집을 짓고 고유를 한다. 그 집을 ‘사당祀堂’(혹은 ‘가묘家廟’)이라 한다. 그리고 그 안에 ‘감실龕室’이라는 공간을 만들고 ‘위패位牌’(‘신주神主’라고도 함)를 모시게 된다. 이렇게 모셔진 위패는 살아 계신 듯 경건하고 신성하게 보호된다. 이른바 ‘신주 모시듯’ 해야 한다. 이런 절차를 밟아 모신 위패는 이제 개인이 멋대로 옮기거나 훼손하거나 소멸해서는 안 되는 불천의 위패, 이른바 백세불천百世不遷의 불천위가 된다. 물론 시호가 내려졌다고 모두가 불천위가 되는 것은 아니며, 조선 후기 매관매직 시대에 내려진 시호와 인물들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다.

사당이 지어지고 위패가 모셔지면 자손들은 정해진 날 추모의식을 가지며 찾아오는 손님을 접대하게 된다. 이를 수행하려면 자연 사당을 떠날 수 없게 된다. 추모 예는 제사고, 손님 접대는 접빈이다. 이를 ‘봉제사’와 ‘접빈객’이라 한다. 이를 전적으로 감당해야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를 ‘종손宗孫’이라 하고 그 아내를 ‘종부宗婦’라 한다. 나머지 자손들은 ‘지손支孫’이라 한다. 적손으로 내려오는 손자가 종손이고, 종손을 지원해주는 자손이 지손이다. 이를 조직화 한 단체가 ‘문중門中’이다. 이로써 하나의 ‘가문家門’이 탄생한다. 그 집은 다른 집과 다르게 ‘솟을대문’의 집을 짓는다. 집성부락에 솟을대문이 있는 집이 대개 그런 집이다. 그런 집을 우리는 ‘종택宗宅’ 혹은 ‘종가宗家’라 한다. 종택은 가문 탄생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며, 한편으로는 그 자손 모두의 의지와 문화의 중심체이기도 하다.

 

사진: 점필재 김종직의 위패

해설:

 

사진: 위패를 모신 사당

 

 

3) 훌륭한 인물 모시기와 되기 그리고 따라하기

 

여기서 다시 종택의 구성 요건을 정리해보면, 누구나 알만한 훌륭한 인물-조상-이 있어야 하고, 다음은 이 분의 위패를 모시는 공간-사당-이 있어야 하며, 그 다음은 사당을 지키는 수호 주체의 공간-종택-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다음은 사당 수호를 전담한, 맏아들로 이어온 직계후손-종손과 종부-이 있어야 하고, 그 다음은 이 종손, 종부를 외곽에서 보호하는 후손들-지손-이 있어야 하며, 이 지손들로 구성된 단체-문중-가 있어야 한다.

즉 불천위 종택이 되기 위해서는 조상, 사당, 종택, 종손종부, 지손, 문중으로 구성된 유기체가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 하나의 요소만 없어도 종택은 성립되지 않는다. 조상, 사당, 종택은 하드웨어고, 종손종부, 지손, 문중은 소프트웨어다. 이런 구성 요건이 충족되고 작동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것도 원활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불천위 종택은 성립되지 않는다. 그 중심에 종손, 종부가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이와 다른 각도에서 불천위로 모셔지는 인물도 있다. 바로 재야학자다. 당시 명칭은 ‘처사處士’다. 처사는 당대 최고의 학자에게만 부여된 극존칭이다. 조선 후기에 오면 이 용어가 남발되어 격이 떨어지는 처사가 양산되지만, 학자에 대한 존경심은 조선 500년 내내 변하지 않았다. 이미 거론한 대제학과 더불어 문文을 숭상한 조선시대의 가치관으로 볼 때 당연한 일이었다.

대구 최고의 명문, 옷골 ‘백불암 종택’은 당대의 처사로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남야南野 박손경朴孫慶과 더불어 ‘영남 3로嶺南三老’로 추앙받은 백불암百弗庵 최흥원崔興遠을 불천위로 모시면서 존경받는 종택이 되었고, 흔히 대산 이상정의 제자로 ‘호문 3로湖門三老’ 혹은 ‘호문 3종湖門三宗’의 1인으로 일컬어지는 후산後山 이종수李宗洙의 불천위 위패에는 ‘처사處士’라는 단 하나의 약력밖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후산 위패에 쓰인 글자는 이러하다.

 

‘현선조고후산처사부군신주顯先祖考後山處士府君神主’

 

이런 측면에서 불천위 인물들의 면모를 보면 시호 이전에 학자라는 전제가 우선되었다. 그래서 그가 공부한 정자, 그가 남긴 문집文集, 혹 그의 학문을 잇고자 지은 서원이 있으면 더욱 완벽하다. 이 가운데서도 문집의 유무가 가장 중요하다. 이런 연유로 고관의 벼슬을 지냈음에도 학자로서의 명성이 없어 불천위가 되지 못한 경우가 허다하다. ‘능문能文’은 필수조건이지만 ‘능리能吏’는 충분조건에 불과하다. 요컨대 명실상부한 불천위 인물이란 학자, 문집, 서원, 정자 등의 요건을 갖추어야 한다. 주변에 이런 인물이 있으면 거의 불천위로 보면 틀림없다.

‘계문고제溪門高弟’인 간재艮齋 이덕홍李德弘은 문집(《간재집》), 서원(오계서원), 정자(군자정)가 있고, 안동의 처사 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도 문집(《경당집》), 서원(경광서원), 정자(광풍정) 등의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다. 종택이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처사는 곧 ‘학자’다. 그렇다면 학자가 왜 이렇게 존경받게 되었을까? 다른 지역은 잘 모르나 안동에서 인물 평가는 ‘조행操行과 글’로 압축된다. 조행은 행行이고 글은 지知의 범주에 든다. 생각해보니 이중에서도 글을 단연 소중하게 여겼다. 글이 곧 사람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글과 더불어 인격의 향상이 수반되는 것으로 인식했다. ‘문文=인人’의 인식은 ‘인사人事’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보았다. 인사는 곧 ‘타인에 대한 배려’인데 글로 인한 타인의 배려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조상들은 글을 소중하게 여겼고, 글을 잘하고 못하고를 매우 따졌다. 이중환의 목격담에 “그때 안동 사람들은 외딴 마을, 가난한 사람 할 것 없이 누구나 글을 읽었다”고 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글은 인간을 정밀하게 하고 상대를 배려할 줄 알게 하고 언행을 세련되게 하여 기품 있는 인간으로 만든다. 이런 관점의 정점에 있는 분이 퇴계였다. 안동에 유달리 ‘문집文集’과 ‘유고遺稿’가 많은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프로와 아마추어 할 것 없이 ‘글을 짓고 발표하고’의 풍토가 만연한 곳이 지난날의 안동이었다. 안동 지역에 무수히 남아 있는 만사, 제문, 내간, 편지 등의 고문서들이 이를 증명한다. 이런 연유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안동에서는 “그 집도 글이 끊어졌다’ 혹은 “글이 끊어지면 그 집은 끝난 집이다”라는 말을 흔히 들을 수 있었다. 정치가를 높이 평가하지 않은 이유, 즉 부지불식간에 발산되는 그 자아도취의 허세와 위세를 적어도 문인들은 잘 보이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백불암, 후산, 간재, 경당 같은 재야학자들 역시 당당한 불천위로 추앙받는 사실에서 조선시대 가치관의 한 단면을 여실하게 보게 된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처사 가운데는 매우 드문 일이지만 빼어난 인품과 학식이 있는 경우 ‘사시私諡’를 받는 일도 있었다. 벼슬이 없어 나라에서 시호를 받지 못한 경우 향촌 사회에서 공론으로 시호를 증정했던 것이다. 이것이 사시다. 지난날 향촌 사회에서 사시를 받은 학자는 분명 있었다. 이를 받은 당사자는 물론이며 후손들의 영예는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세효당실기世孝堂實記》라는 책을 보면, 18세기 대구의 효자이며 학자인 요산樂山 이익룡李翼龍(1732~1784)이 죽으니, 그 제자들이 상중喪中에 ‘사시’를 올릴 것을 거론하여 논의 끝에 결국 백불암 최흥원의 의견을 따라 ‘술효述孝’라고 지었다는 자세한 기록이 보인다. 사시는 정말 영예 중의 영예였고 ‘조선시대다움’의 한 단면이었다. 처사는 관료를 넘어섰다. 따라서 처사가 죽으면 불천위로 모셔지기도 했다. 모셔질 뿐만 아니라 당당하고 매우 영광스럽게 모셔졌다.

이런 연유로 불천위도 두 종류로 나누어져 전자를 ‘국불천위國不遷位’라 하고, 후자를 ‘향불천위鄕不遷位’라 한다.

그러나 이런 구분도 어디까지나 편의적 구분이지 개념 설정이 분명한 제도적 구분은 아니다. 향불천위가 있으니 그 대칭으로 국불천위라는 개념이 등장한 것이 아닌가 한다. 불천위와 관련된 유사한 명칭들, 즉 ‘유림불천’, ‘문중불천’ ‘도천道遷’, ‘향천鄕遷’ 등의 명칭들도 마찬가지다. 불천위면 그냥 불천위다. 물론 국가적 공신이나 문묘에 배향된, 그야말로 국가 차원에서 관리하는 불천위가 있고, 나라에서 부조위 문서가 내려와 불천위로 인정된 특이한 경우도 있다.

가령 순조 때 사육신의 한 사람인 단계 하위지의 경우가 그렇다. 멸문한 집안에 후일 그 후손의 존재가 확인되어 향불을 피위 영원히 추모하도록 부조위의 교지가 내려와서 그야말로 국불천위가 되었다. 그런 저런 연유로 부조위 교지를 받은 분이 몇 분 있다. 그렇지만 국가적 차원의 불천위란 인증문서가 일반화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지금 굳이 구분한다면 ‘시호를 받은 2품 이상의 관리’ 가운데 만인이 다 알고 있는, 쉽게 말해 국가적 인물이면 국불천위이고, 지역적 인물이면 향불천위이다. 그것이 가장 정확한 구분이다. ‘인물의 판단’이 전적으로 개인 저마다의 기준과 취향의 문제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위의 두 경우와 조금 다른 각도에서 불천위로 모셔지는 분들도 있다. 시호는 물론 학자로도 그렇게 인정받지 못했지만 조선 후기로 내려오면 문중 차원에서 자기 조상 가운데 한 분을 ‘불천위’로 옹립하기도 한다. 정통성과 정체성의 확립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옹립된 분을 우리는 ‘사불천위私不遷位’라 한다. 이런 현상을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 이미 서두에 거론한 것처럼, 거기에는 훌륭한 인물 모시기, 훌륭한 인물 되기, 훌륭한 인물 따라가기의 염원이 있다. 이는 안동 사람의 소중한 자산이며 문화의 내면적 양상이다. 안동의 수많은 종택과 불천위 사당, 그리고 이를 수호하는 문중의 존재는 그 엄연한 외연적 현상이다.

 

사진: 문집

 

 

4) 왜 유독 안동에 종택이 많은가

 

퇴계 종택은 최근 주목받고 있다. 종택의 일상이 거듭 방송되더니 2004년 1월 4일에는 드디어 100세 가까운 노종손이 방송에 나와 소설가 김주영 씨와 대담했다. 노종손의 단독 대담방송은 아마 처음인 것 같다. 몇 해 전에 아들 되시는 이근필 선생께서 방송에 나오더니 2003년에는 손자 이치억도 김동건 아나운서와 대담했다. ‘퇴계 종손’이라는 말만으로 관심 인물이 되어버렸다. 급변하는 이 시대, 이 나라에서 가장 변하지 않은, 혹은 변하지 않았을 유일한 인물의 표상으로 퇴계 종택과 퇴계 종손을 떠올린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500여 년을 한 결 같이 종택을 지켜온 노종손과 지금 지켜가는 장래종손과, 그리고 장차 지켜갈 어린 그 다음의 장래종손의 생각이 바로 관심사였던 것이다.

그런데 퇴계 종택과 퇴계 종손의 거듭된 방송을 보고 있노라니 한 가닥 의문이 생긴다. 조선시대 퇴계와 쌍벽을 이루는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종택과 종손은 어디에 있는가라고. 결론부터 말하면 남명 종택과 남명 종손은 없다. 도저히 믿어지지 않아 현지를 가보고 또 남명학연구원의 몇 분에게 확인해 봐도 남명 종손과 남명 종택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런 측면은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종손은 어디 살고 있다고 하는데, 종택이 있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다. 혹 율곡 종택은 아파트에 있다는 이야기도 했다. 같은 영남지역이지만 경상북도와 남도는 확연히 다르다. 필자가 과문해서 잘 모르지만 경상남도에도 10집미만이 남아 있다 한다. 그것도 알려진 종택은 단 2집, ‘일두종택[정여창 가鄭汝昌 家]’와 ‘동계종택[정온 가鄭蘊 家]’뿐이라 한다. 전라남도의 종택은 더욱 희귀하여, 잘 알려진 고산 윤선도 종택인 ‘녹우당’을 제외하고 또 어디 종택이 있는지도 모른다고 했다.

얼마 전 집에 전라도의 대표적 문화 단체의 회원 20여 분이 하룻밤 자고 간 일이 있다. 그때 마침 종가 이야기가 나와 궁금하여 “전라도에 알려진 종가는 어느 집이냐”고 하니, 답변이 “전라도에는 종가가 거의 없다”라고 했다. 3년 전 광주무등산문화유산보존회의 초청으로 광주 북구청에서 ‘16세기 영호남사림문화’에 대해 발표한바 있는데 이때에도 어느 분이 그런 말을 했다.

경기도, 충청도도 별로 다르지 않다. 경기도는 경기도청에서 발급한 ‘종택지정서’란 것을 대문에 붙여놓은 종택이 11집이라고 했다. 종택인지 아닌지 도청에서 조사해서 지정한다는 것이다. 경기도는 종택이 거의 없는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있다 하더라도 경북 일원의 종택에서 요구하는 종택의 조건이 갖추어진 집은 거의 없는 것 같다.

충청도는 명재 종택[윤증 가尹拯 家] 같은 이름난 종택이 있기는 하나 그 외 과연 몇 집이 있는지 모르겠다. 어느 해 ‘제례祭禮’를 조사하기 위해 다니는 문화재청 직원이 말이 “충청도의 종택과 경상북도의 종택은 여러 측면에서 다르다”고 했다.

그렇다면 경상북도의 종택은 얼마인가? 대략 그 존재가 확연하고 만인이 다 알고 있는 이름난 종택만 꼽아보아도 30여 집은 확실히 넘는다. 도내 전체에 고루 분포되어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경북 북부 지역이 훨씬 많다.

가령 봉화군에는 ‘여덟 집의 불천위 종택이 있다’고 하는데 《봉화군지奉化郡誌》에는 ‘여섯 분의 불천위’가 기록되어 있다. 안동문화권과 관련 있다. 우스개로 하는 말이겠지만, “안동문화권은 어디까지인가” 물으면 “안동식혜가 만들어지는 곳까지”라고 하기도 한다. 그리 틀린 말도 아니다. 안동 여인들이 시집가서 그곳에서 안동식혜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안동과 통혼 관계가 있는 인근 예천, 봉화, 영주, 영양, 의성, 청송, 심지어 영덕군의 인량리, 괴시리 등의 반촌도 안동문화권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는 한 동네에 ‘8종가가 있다’하여 늘 화제가 되는 명촌 중의 명촌이다. 그곳을 ‘소안동小安東’이라고도 하는데, 그쪽에서는 안동을 우습게 보아 ‘소안동笑安東’이라고 한다. 아무튼 안동의 정서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데, 2002년 삼보컴퓨터 이용태 회장의 부친상이 있어 문상을 가니 안동의 인사들이 대거 참석하여 마치 안동의 모임처럼 보이기도 했다. 안동 인사들이 모임을 주도함 도 역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기도 하다.

다산 정약용은 영남 지방을 돌아본 소감을 “각 가문들마다 한 분의 조상을 모시고, 한 지역을 점령하여 씨족끼리 집성마을을 이루며 대대로 반석 같이 굳은 세력을 형성했다家各戴一祖 占一莊 族居而不散處……盤據世雄”고 했다. 다산이 이 글을 쓴 시기가 18세 전후다. 그때 다산은 경북 예천의 고을원이 된 아버지를 따라왔고, 아버지의 권유로 영남을 여행했다. 다산의 안목에 영남 반촌은 그런 곳이었다.

‘대일조戴一祖’는 곧 각 가문의 불천위이고, ‘점일장占一莊’은 동족의 집성마을이며, ‘반거세웅盤踞世雄’은 결속이 다져진 문중門中이다. 이런 모습과 외형을 갖춘 중심에 종택이 존재하고 있다.

그렇다면 안동의 종택은 얼마인가? 최근 국학진흥원의 김미영 연구원의 조사에 따르면 불천위로 모셔진 분이 50명이다. 그렇게 많은가? 그런데 2003년, 안동향교에서 발간한 《유림비요儒林備要》라는 책을 보니 안동에는 현존하는 서원이 26개소(오계서원 포함), 서당 2개 소, 7개 소의 사우祠宇가 있었다. 이들 자료를 상호 대조해보니 거의 사실과 부합했다. 다만 김미영 연구원의 조사에는 서원과 서당, 묘우에 모셔진 불천위는 포함하지 않았는데, 이를 합하면 96명에 이르렀다.

그러니까 “안동의 불천위 종택이 몇 집이냐?” 묻는다면 48집(두 분의 위패를 모신 집이 2집)이라고 말하면 될 것 같고, “안동의 불천위가 얼마냐” 하면 99명이라고 해야 될 것 같다.

물론 안동의 종택들이 모두 종택으로서의 조건을 다 갖추고 있다고는 할 수 없다. 사당이 없어 벽감壁龕에 위패를 모신 경우, 종택다운 건물이 없는 경우, 문중 형성이 제대로 되어 있지 못한 경우, 위패를 도시의 아파트로 모셔간 특이한 경우도 없지 않다. 그렇지만 그 자손이 자기 조상을 추모하고 전통을 지키고자 하는 정성과 자긍심은 그 외형과 관계없이 크게 변하지 않은 것 같다.

아무튼 84개소의 추모 공간과 99명의 불천위가 존재하는 안동이니, 안동 대부분의 성씨와 문중에 불천위가 있고 종택이 있고 서원과 서당과 묘우가 있다고 보면 틀림없다.

불천위 선정의 덕목은 학자다. 50분 가운데 열 분은 관직에 나아간 적이 없는 순수 학자다. 이 분들은 처사다. 관료 역시 학자적 자세가 우선되었다. 이런 결과를 보면 안동의 문화 지향이 어디에 있었나 하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글이 빼어난 관료면 더욱 합당하다. 이런 분이 사실 불천위가 된다. 안동에서는 농암 이현보, 송재 이우, 퇴계 이황, 학봉 김성일, 서애 류성룡, 대산 이상정, 정재 류치명 등이 그런 분들이다. 이들 역시 관료이기 전에 빼어난 학자였다. 문학적 성과가 보이는 문집이 남아 있어야 함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렇다면 왜, 하필 안동에 그토록 불천위가 많은가. 안동에 불천위종택이 집중해서 존재함은 무슨 연유인가? 이는 지리적 조건과 정치적 여건 등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했다. 오랜 재야세력으로 전락한 남인들에게 정체성 확립의 문제는 각 가문의 존립과 직결되었다. 그 어는 성씨도 여기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이런 환경이 ‘중시조中始祖 제도’를 더욱 부각시켰다. 훌륭한 인물이 배출되면 그 분으로부터 역사가 시작되는 것이 이른바 중시조 제도다. 그러니까 중시조로 모셔지는 분은 훌륭한 인물이며, 훌륭한 인물의 출현이 곧 종택 출현과 맞물려 있다. 훌륭한 인물은 형제 사이, 부자 사이에도 존재하여 같은 씨족 안에서도 각각의 불천위가 모셔진다.

가령 하회의 풍산 류씨의 경우 입암 류중영과 겸암 류운룡과 서애 류성룡의 3부자가 각각 불천위가 되어 ‘양진당’과 ‘충효당’의 문호를 열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전주 류씨 삼산 류정원과 호고와 류휘문은 할아버지와 손자가, 내앞의 의성 김씨는 청계 김진, 학봉 김성일, 운천 김용의 3대에 걸쳐 불천위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사태가 이러하니 형제, 부자간에도 그 자손들로 이루어지는 문중이 형성되고,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대동大同하지만 한편으로는 소이小異의 문화가 형성되기도 하며, 더러는 뚜렷한 각각의 문화를 가지기도 한다. 소이한 그 각각의 문화는 선의의 경쟁에 바탕이 되는 경우도 없지 않다. 아니 정확하게는 선의의 경쟁을 하며, 그 선의의 경쟁이 안동을 존재하게 하는 문화의 역동성으로 작용하고 있다.

가령 오천 광산 김씨의 경우는 후조당 종택과 설월당 종택으로 나누어지는데, 불천위 제사의 양식이 다르다. 후조당 종택은 낮에 지내고 설월당 종택은 밤에 지낸다. 후조당의 김준식 종손께 물으니 “우리 집만 그렇게 한다”고 했다. 이는 사실이었다. “우리 집만 그렇게 한다”는 어디까지나 후조당 종택의 입장이지 설월당 종택의 입장은 아니다. 설월당 종택은 설월당 종택만이 가지는 ‘우리 집만 그렇게 하는’ 부분이 역시 존재한다. 같은 씨족이지만 ‘불천위-종택-지손-문중’으로 이어지는 문중 문화에는 조금 다른 저마다의 판단과 가치관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례는 얼마든지 있고, 오천 광산 김씨의 예는 이런 사례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그렇지만 이미 언급한 것처럼 종택의 존재 양상은 훌륭한 인물 모시기, 따라가기, 되기의 염원에서 출발하고 있기 때문에, 안동 사람들의 행동 양식 역시 궁극적으로는 훌륭한 인물 되기에 귀착되며, 허다한 문화 양상 역시 훌륭한 인물 모시기를 위한 의식에 다름 아니다. 이는 안동 사람들의 소중한 자산이며 문화의 내면적 양상이다.

 

 

5) 훌륭한 인물이란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훌륭한 인물은 어떤 사람인가? 이 물음에 대해 다시 ‘퇴계 종손의 언어’로 돌아가 보자. 이동은李東恩 퇴계 종손은 100세 가까운 노인이시라 좀 긴장해서 지켜보았는데, 노종손께서는 그 연세에도 불구하고 자세는 단정하고 말씀은 조리가 있으셨다. 실로 한 치도 가식 없는 진솔한 말씀이셨다.

드디어 김주영 씨가 “마지막으로 이 시대 귀감이 될 만한 한 말씀만 해 주시죠” 한다. 노종손은 잠시 볼을 만지면서 천천히 말씀하셨다. 이날 노종손의 마지막 말씀은 매우 감동적이었다. 그 말씀 한 마디는 ‘우리 안동 사람들은 누구인가’에 대한 물음에 일정한 답이 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 말씀은,

 

예의, 염치를 가져야 하며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세계화, 세계화하는데 세계화가 무엇입니까. 세계 사람들에게 우리나라 동방예의지국의 예의, 염치와 부끄러움을 가르쳐주어야 합니다. 부끄러움을 알아야 합니다.

 

바로 그것이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일’이 노종손이 진단한 이 시대 최대의 병폐였다. 후안무치厚顔無恥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 세상인가. 지금 이런 사람 너무 많다.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더하다. 대권을 잡았던 아무개란 사람이 ‘주머니에 29만 원밖에 없다’고 하여 민초들을 더욱 슬프게 했다.

이날 노종손의 평범한 한 마디가 전일 ‘부끄러움을 알고 행동하게 한’ 안동 사람들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임진의병과 한말의병, 그리고 독립운동가와 자결한 사람을 전국에서 가장 많이 배출한 곳이 안동이라는 보고에서, 우리는 ‘부끄러워 할 줄 아는 사람’으로, 안동 사람들이 지향하는 인생관의 한 단면을 보는 것은 아닐까.

고려대학교 김언종 교수의 고향은 안동이다. 부친은 김시박金時璞 어른이다. 최근 작고하신 그 분을 8년 전인가 임하 자택으로 찾아가 뵌 적이 있다. 우리 집과의 인연도 인연이지만, 학자로서 안동선비의 맥을 이어가는 처사의 한 분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만포처사晩圃處士’라 했고 ‘금세고인今世古人’이라 했다. 그렇지만 만년에는 어떤 모임에도 거의 참석하지 않으시고 오로지 책만 읽고 쓰고 하셨다. 당시 이 어른의 생활 모습을 보고 싶었다.

방에 들어가 절을 하고 둘러보니 방안 전체가 책이다. 대부분 한적漢籍이다. 반겨주셨고 여러 말씀을 하셨고 진귀한 책도 보여주셨다. 그러시면서 “이제 죽어도 아무 여한이 없는데 이 책들이 걱정”이라 하셨다. “공부하는 아드님이 있지 않습니까” 하니, “언종이가 책을 좀 본다고는 하지만 서울 아파트에 가보면 저들 내외 책도 감당 못하니 그럴 형편이 안 되고……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다” 하셨다. ‘책의 걱정’이 마지막 걱정이셨다. “요즈음 출타는 좀 안 하십니까” 하니 말씀이, “사람 행세를 못하는 사람이 어찌 낯을 들고 사람을 만나고 모임에 참여할 수 있나……어쩔 수 없는 운명이지……” 하셨다.

나는 그때 사람 행세를 못하는 사람이란 뜻은 대강 짐작이 갔는데, ‘어쩔 수 없는 운명’이란 말씀은 좀 지나친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그런데 잊어버린 오랜 후 언뜻언뜻 이 어른의 모습과 말씀이 떠올랐고, 곰곰 다시 생각해보니 이 어른의 처신은 ‘부끄러움을 알기 때문’이라 여겨졌다. 몸을 갈고 닦음은 ‘수신修身’이고, 집안을 잘 돌보는 일이 ‘제가齊家’인데, 수신과 제가를 못한 사람이 어찌 사회에 낯을 들고 나갈 수 있느냐는 말씀이셨다.

‘부끄럽다[羞惡之心]’는 명예의 기본적인 방어벽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부끄러움이 없는 시대다. 그 벽이 무너졌다. 뿐만 아니다. 동정하고[惻隱之心], 양보하고[辭讓之心], 분별하는[是非之心] 마음들 역시 무뎌졌다. 무뎌져도 너무 무뎌졌다. 하늘로부터 받은 성품을 ‘천성天性’이라 하는데 지금 누가 천성을 올바르게 지키고 사나. 사람이기를 포기한 시대가 아닌지 모르겠다. “부끄러움이 없는 자 사람이 아니다無羞惡之心 非人也”라는 맹자의 말 그대로다.

그 전통이 조선 후기 노론정권시대에 발아되어 일제시대에 만개한 것으로 본다. 나는 일제치하의 인물들을 “부끄러워하는 자와 부끄러움이 없는 자”로 구분하는데, 전자는 독립 운동가고 후자는 친일파들이라고 보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전자의 인물로 안동의 두 분을 생각한다. 향산響山 이만도李晩燾(1842 ~1910)와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1858~1932) 선생이다. 두 분은 부끄러움을 당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후손들에게 행동으로 보여줬다. 향산은 24일간의 단식 끝에 순국했다. 말이 단식이고 순국이지 그 누가 그런 뜨거운 저항을 할 수 있는가!

석주는 안동 고성 이씨 ‘임청각臨淸閣’의 종손이다. 종손으로서, 그것도 종택 가운데 빛나는 이른바 ‘3불차三不借의 집’에서 고향과 종택과 사당을 버리고 이국 만 리 길을 오직 하나 ‘조국 독립’을 위해 떠나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석주가 안동을 떠나면서 한 한 마디는 “나라가 없는데 사당이 무엇이 필요한가”였다. 그 말을 하고 옮겨서는 결코 안 되는 조상의 위패를 땅에 묻었다. 이보다 더 큰 훌륭함이 없고, 이보다 더 큰 나라사랑이 없다.

이광수는 후자의 대표적 인물인데, 그가 후일 “죄 없는 자 나에게 돌을 던져라” 하고 ‘홍제원 목욕’을 비유하여 변명을 하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가만히 있으면 또 그런대로 보아주었겠지만. ‘부끄러움을 무릅쓰고까지’ 왜 그런 말을 하는가. 정말 파렴치하다. 행복이 그런 인생에 깃들기는 정녕 어려운 법이다.

지난해 김언종 교수가 벽사 이우성 선생을 모시고 도산 가송의 우리 집으로 와서 나와 한 이불 덮고 하룻밤 같이 자고 갔는데, 가기 전 두꺼운 책 두 권을 선물로 줬다. 간 뒤 펼쳐보니, “性源 仁兄 一笑, 2003年 夏, 弟 金彦鍾 敬呈”이라 쓰여 있다. 교수가 청춘을 바친, 우리말의 원류를 추적한 《한자의 뿌리》라는 책이었다. 책을 반질하며 겸양으로 ‘혜존惠存(은혜롭게 잘 간직해 달라)’이라 쓴다. 그런데 ‘일소一笑’는 ‘보고 한번 웃고 버려라’는 뜻이니 지나친 겸양이다.

선현들께서 시를 지어 선물하고 가끔 ‘일소부병一笑付丙(한번 보고 불에 던지라)’, ‘이기일소以冀一笑(한번 보고 웃기 바란다)’라 하기도 했지만, 책에 이런 표현을 하는 사람은 없다. 요즈음은 생전에 자서전까지 내는 시대이나, 사실 선현들은 생전에 자기 글을 책으로 묶어내는 일이 없었다. 그 누구도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 지금 남아 있는 문집이란 한결 같이 사후 발간된 책들이다. 그것 역시 겸양이고 부끄러움이다. 나는 김언종 교수의 이 사인을 본 순간 그 어른의 그 아들이라 생각했다. “부끄러움을 알기 때문에.”

훌륭한 인물이 어떤 인물일까? 이에 대해 나는 한 말로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이라 생각한다. ‘부끄러움을 아는 것’이 곧 안동 사람들의 변별성이고, 그 변별성의 중심에 종택이 존재하고 있다. ‘종택’이 바로 안동이다. 종택을 중심으로 한 각 문중들의 일상이 곧 안동 문화의 근간이다. 안동에서 종택을 떠나 존재하는 행사를 생각하기는 쉽지 않다. 물론 ‘민속’이란 이름의 여러 문화가 없지 않다. 그렇지만 민속은 어느 지방에도 존재하는 것이며, 안동만의 것일 수도 없다.

지금 안동에서 이루어지는 여러 종류의 전통의례는 ‘왜 안동이 안동인가’를 보여주는 척도가 된다. 거기에는 ‘훌륭한 사람 되기’와 ‘부끄럽지 않게 살기’가 그 내적 요인으로 자리하고 있다. 이런 사유체계의 현장에 안동 사람들이 있고, 이를 견인하는 중심에 안동의 종택들이 있다. 안동 문화는 결국 종택들을 중심으로 오랜 세월 축적된 각 가문의 흔적에 다름 아니다.

 

 

 

 

 

                                                                농암종택 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