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5년 권우의 도산기행
-유청량산록


풍악(楓岳)은 우리나라의 명산이다. 그러나 세상에서 산을 말하는 사람들은 청량산(淸凉山)을 소금강(小金剛)이라 하고 그에 버금간다고 여긴다. 대개 웅장하고 큰 기세와 변화를 헤아릴 길이 없는 점에 있어서는 본래 미치지 못하는 바가 있다. 그러나 골격이 기이하고 높이 솟아 혹은 닮은 점이 있기도 하다.
그러므로 군자들 가운데 이 산에서 노니는 자들은 모두 아끼는 바가 있어 감히 소홀히 하지 못한다. 나는 이 산 가까이에서 태어났는데 하루도 안 되어 닿을 거리에 있다. 그러나 어렸을 때는 이 산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고 자라서는 질병이 많아 발꿈치를 들고 가까운 거리에서 바라볼 뿐 그저 민령(岷嶺)에 대한 생각 이 간절했던 것이 어느덧 십여 년이 되었다.

을해년(1575년, 선조 8년)
초겨울(음력 10월)에 비로소 결심을 하였는데 촌구석에 오래 눌러앉아 있으니 이미 몸과 마음이 많이 상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어찌 한번 밖으로 나가서 막히고 답답한 마음을 펼치고, 또한 고요한 곳에 들어가 몇 개월을 않아 있으면 병든 몸을 보양하는데 이득이 되지 않겠는가!

22일
부모님께 하직 인사를 드렸다. 이틀 전 월천(月川) 조목(趙穆) 선생께서 찾아오셨는데, 이 날 가시는 길을 모실 수 있게 되었으니 나로서는 다행스러운 일이다. 한낮에 월천(月川)에 도착하였는데 선생께서는 점심을 들고 가도록 하셨다. 사암(思庵) 선생을 모시고 앉았는데 대화를 나누던 중 자호(慈湖) 양경중(楊敬仲)이 정자(程子)와 주자(朱子)를 헐뜯은 것에 대해 말이 나왔다. 정암(整庵) 나흠순(羅欽順)이 이미 이를 비난하였으니 자호의 일생의 학문은 실로 정주의 도(道)를 남몰래 무너뜨리려는 것이었다. 그의 말은 겉으로는 정주를 존경하는 듯하지만 속으로는 그렇지 않으니 이는 어째서인가? 이는 정주를 자신 보다 아랫사람으로 보고자하고, 자신을 정주 보다 위에 두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아아, 공자와 맹자 이후로 의리(義理)의 학문이 정주에 이르러 남김없이 밝혀졌다. 그들 보다 뒤에 태어난 자들은 그저 마땅히 그 말을 삼가 지키고, 이에 힘을 쓴다면 절로 이르는 바가 있게 될 것이다. 어찌 망령되이 다른 견해를 보여 이러한 지경에 까지 이르게 한단 말인가? 또한 무릇 자신의 소견이 정주의 설에 일치하지 않아 간혹 같지 않은 바가 있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지금과 같이 겉으로는 받들면서 속으로는 헐뜯는 것은 어떠한 소견인가? 마음으로 깨닫지 못하여 우매한 자들이 이에 미치지 못한다면 그만이지만, 아는 자들이 이와 같이 잘못을 저지른다면 어찌 개탄할 만한 일이 아니겠는가?

저물녘이 되어 작별하고 물러나와 동행하는 두 벗과 말을 몰아 부포교(浮浦橋)에 이르렀다. 북쪽으로 천연대(天淵臺)를 바라보니 창연히 고산앙지(高山仰止)의 생각이 들었다. 새로 지은 도산서원(陶山書院)은 건립한지 이미 한 해가 지났건만 나는 오랜 병 때문에 와서 볼 수가 없었다. 이번 여행의 계획에서는 두루 살펴보고자 하였으나 동행하는 친구들이 모두 평탄한 길을 따라 멀리 돌아서 산으로 들어가고자 하였기 때문에 계획을 이룰 수 없었다. 돌아올 때에는 곧장 산의 동구(洞口)를 거쳐서 아래로 지나왔다. 동촌(東村)을 지나다가 김운부(金雲夫)를 찾아갔으나 만나지 못하였다. 날이 저물어 뇌전령(磊田嶺) 아래 여관에 투숙하였다. 한밤 중에 첫눈이 어지럽게 날리므로 누워서 내일 아침 산에 들어갈 때 또 한가지 기이한 일이 더해지겠구나하고 생각하고는 절구 한수를 지었다.

孤店亂山間(고점난산간) 어지러운 산 속에 외딴 여관
境深元自別(경심원자별) 지경이 깊으니 절로 별세계
夜半新雪飛(야반신설비) 한밤중 첫눈이 날리니
明朝更奇絶(명조갱기절) 내일 아침이면 더욱 절경이리

23일,
이부자리에서 아침을 먹고 눈을 밟으며 뇌전령을 넘었다. 길이 미끄러워 갈 수가 없었는데 간혹 말에서 내려 걷기도 하였다. 북쪽으로 3, 4리를 가자 서쪽으로 퇴현(退峴)이 바라다 보였는데 이는 산의 오른쪽 줄기이다. 눈 속에 빠져 길을 찾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을 때 문득 한 승려가 재산(才山) 길로부터 오는 것을 보았다. 그는 산속에서 살며 이름은 경희(慶喜)라 하는 자였는데 그로 하여금 앞길을 안내하도록 하였다.

고개를 올라가 잠시 마을에 들어가 민가에서 말에게 꼴을 먹이고 마침내 고개를 넘어갔다. 숲과 계곡을 나왔다 들어갔다 하면서 몇 리에 걸쳐서 산성을 지나갔다. 마을 사람들이 전하기를 옛날사람들이 전란에 대비하기 위해 만든 곳이라 하는데, 지금도 성곽의 터가 완연히 남아있다. 아아, 상고시대에는 나라가 갈라져 간혹 난을 피하여 이와 같이 산속 깊이 들어온 자들이 있었으니 백성들의 고통을 떠올릴 만하다. 지금도 남은 땅이 변해서 거친 풀이 자란 곳이 되었으니 백성들은 아직도 편안한 시대를 만나지 못한 것이다. 그러니 백성을 괴롭히는 것이 어찌 반드시 전쟁뿐이겠는가?

이곳에서 서쪽으로 돌아나가면 남쪽의 산 한 봉우리가 보이는데 우뚝하고 둥글게 솟아있으니 이는 산의 눈으로, 호위를 맡고 있다.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이 이를 축융(祝融)이라 이름 지었으나 어찌 남쪽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러했겠는가? 또한 “석 잔의 탁주를 마시고, 축융봉을 날아 내려오는” 기상 에서 취한 것이리라. 마침내 산기슭을 따라 올라가 서쪽으로 나아가니 걸음걸음마다 점점 높아져 갔다.

청량산의 몇몇 절을 올려다보니 마치 공중에 매달린 듯하였다. 이쪽은 곧 산의 동쪽 방면이다. 금탑봉(金塔峯) 남쪽 줄기로 걸어 올라가니 문득 산 안쪽이 보였다. 서쪽 절벽은 천 길〔丈〕이나 되었는데 마치 옥병풍을 꽂아놓은 듯하였다. 이는 연화봉(蓮花峯)으로 옛 이름이 의상봉(義相峯)이다.

동쪽은 우뚝 솟아 있어 겹겹이 쌓인 벽 위로 또 겹겹이 쌓여 있는데, 웅장하고 무겁게 내리 누르고 있는 것이 곧 금탑봉이다. 그 이름은 아마도 모양이 닮았기 때문일 것이다. 북쪽으로 바라보면 한데 서서 나란히 솟아 있어 마치 구름 사이에 험준하고 뾰족한 것을 꽂아서 끝이 날카롭고 깎아놓은 듯하여 감히 범하지 못할 것이 있다. 이는 곧 자란봉(紫鸞峯), 자소봉(紫霄峯), 연적봉(硯滴峯), 탁필봉(卓筆峯) 등 여러 봉우리로 대개 이 산의 절정인 것들이다. 보문암(寶文庵), 중대암(中臺庵) 등 몇몇 암자를 거쳐 연대사(蓮臺寺)로 들어가 지장전(地藏殿)에 앉아 있노라니 서너 명의 승려들이 시축(詩軸)을 가지고 와서 보여주는데 그 가운데 스승님의 필적도 많이 남아 있었다. 스승님이 일찍이 보문암에 노닐면서 눈 속에서 지은 시를 기록하고 주자의 ‘마상(馬上)’ 시에 차운하여 시를 지었다. 눈 내린 산은 어제와 다름없건만 스승님을 뵈올 수 없으니 나는 이제 누구를 우러르랴! 이 날부터 몹시 추워져 웅크리고 앉아 있을 뿐 밖으로 나지 못한 것이 며칠이나 계속되었다.

26일,
절 앞의 월대(月臺)에 나와서 걷노라니 여러 절들이 올려다 보였는데 암벽 사이로 보일 듯 말 듯하여 범인(凡人)이 걸어서 올라갈 곳이 아닌 듯하였다. 대개 연대사는 이 산의 거찰(巨刹)로서 바로 산 허리에 자리잡고 있다. 연화와 금탑 두 봉우리가 좌우로 벽처럼 서있고 축융봉이 남쪽에 솟아 눈이 되며, 월대가 남쪽으로 산 입구에 임하여 그 위치가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가장 아래쪽에 자리잡고 있다. 이 산에 와서 노니는 자들은 반드시 이곳에서부터 시작하니, 낮은 곳에서부터 시작한다는 이치가 본시 마땅하리라. 우리들은 이날 여러 절들을 둘러보려 하였으나 절의 승려들이 바람이 멎기를 기다리라고 권하였다.

27일,
일찍 밥을 먹고 같이 온 이들과 함께 짚신과 지팡이를 수선하였다. 승려 성천(性天)이 앞길을 인도하여 먼저 청량산의 바깥쪽으로 향하였다가 다시 중대와 고도(古道) 등 몇몇 암자를 지나왔다. 암자에는 고도선사(古道禪師)의 진영이 있었는데, 절의 승려들이 서로 전하기를 선사가 도를 얻었다고 한다. 그러나 선사가 얻은 것이 어떤 것이며 과연 저 불가의 법에 있어서 깨달음을 얻었다한들 일에 있어서 무슨 도움이 있으랴! 동쪽으로 돌아 돌길을 부여잡고 오르면 금탑봉의 아래쪽이다. 반야대(般若臺)에 오르면 아찔하게 백 장을 굽어보게 된다. 조금 동쪽으로 가서 샘 하나를 발견하였는데 바위 구덩이에 맑은 물이 고여 있어 총명수(聰明水)라 부른다. 이 물을 마시면 눈과 귀가 밝아진다고 한다. 그러나 총명한 성품을 하늘로부터 받지 않고 이 물에서 얻을 수 있단 말인가?

치원암(致遠庵)에 이르니 암자의 벽에 스승님께서 갑자년(1564)에 유산(遊山)할 때 남기신 시가 있었는데 여러 어른들 십여 분의 시도 함께 있었다. 우러러 사모하고 슬퍼한 나머지 내가 늦게 태어나 스승님의 지팡이와 신을 모시고 산중의 훌륭한 유람을 함께 하지 못함을 탄식하였다.

다음으로 극일암(克一庵)에 올랐는데 고요한 암자에는 승려들이 없었다. 한참을 앉아 있다가 작은 사다리를 타고 동굴로 올라갔다. 큰 암자가 가운데는 텅 비어있고 위는 덮혀 있으며, 좌우로 통해 있어 열 사람이 앉을 정도는 되었다. 암자는 바위 아래로 반쯤 들어가 있는데 그 굴 속에는 바람구멍이 있어 그 기이함은 형용할 수 없었다. 이곳이 아마도 산 속의 가장 기이한 곳이리라. 예부터 전해지기로는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이 책을 읽던 곳이라 하는데, 그것의 시비는 자세히 밝힐 수 없었다. 또한 기이한 곳이니 마땅히 기이한 사람이 노닐었을 만도 하다. 아아, 고운의 천년 전 일을 비록 믿을 수는 없지만 지금에 이르러서도 남은 자취가 있는 곳이라 하니 아마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스승님께서 이 산에 노니셨던 것이 십 수년 전의 일이나 바위에 새긴 이름이 완연히 남아 있으니 어찌 이 산으로서는 기쁜 일이지만 훗날 찾아온 자로서는 크게 유감스럽게 여길 일이 아니겠는가?

아래로 안중암(安中庵)을 거쳐 상하청량사(上下淸凉寺)에 이르렀다. 절 뒤의 절벽은 위로 큰 바위를 이고 있는데 승려들이 그 바위를 움직일 수 있다고 하였으나 내가 직접 시험해 보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안쪽으로 돌아 들어가 앞서 지나온 곳을 거쳐 북쪽으로 바위 길을 통해 가면 김생굴(金生窟)에 이른다. 암벽이 내리 누르고 있고 얼음줄기가 공중에 꽂혀 있어 마치 옥빛 무지개가 아래로 드리운 듯하여 가히 기이하다고 이를 만하다. 예부터 전하기로는 김생이 노닐 던 곳이라 하는데 어찌 그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겠는가?
다른 이들은 모두 금탑봉에 올라갔으나 나는 홀로 스님과 더불어 상하대승암(上下大乘庵)을 지나 문수사(文殊寺)를 보러 갔다. 옆에는 석천사(石泉寺)가 있는데 다시 수리하고 있는 중이었으나 아직 단청은 칠하지 않았다. 보현암(普賢庵)에 이르러 잠깐 앉아 있는데 성재(惺齋) 금난수(琴蘭秀)의 ‘산에 들어오는 것은 무익하며, 스스로 탄식하고 경계한다’는 말이 있었다. 그 아래에 스승님께서 갑자년에 노니셨을 때 ‘벽 위에서 그대의 탄식하는 말을 보았으니, 이 마음도 어찌 그대와 다르리오’라는 구절을 남기셨다.

아아, 배우는 자의 일은 다만 자신의 공력이 어떠한가에 달려있을 뿐으로, 본디 그 머무르는 곳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 법이다. 금상사의 뜻은 본래 이와 같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처럼 병들고 무지하여 비교도 안 되는 자가 비록 고요한 산 속으로 들어간다 하여도 실로 조금도 공력을 기울이지 못할 것이다. 훗날 산을 나설 때 이전 상태의 인물됨을 면치 못할 것이니 어찌 근심하지 않겠는가?

다른 사람들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서쪽으로 중대(中臺) 위로 나와서 멀리 남쪽으로 축융봉을 바라보았다. 중대는 위치가 정중앙에 있는데 대개 아래에서부터 위에 이르기까지 이곳이 이 산의 가운데에 있으므로 이 대를 중대라 하는 것이다. 바위 길이 얼고 미끄러워 겨우 몽상암(夢想庵)에 들어갔다. 다시 나와서 원효암(元曉庵)을 향해서 돌계단을 부여잡고 물고기를 꿰어 놓은 듯이 올라갔다. 암자의 굴은 깊이가 한 길〔丈〕 정도되었고 높이는 서서 걸어갈 수 있을 정도였다. 중간에 차가운 샘 한 줄기가 있었는데 맑고 투명하며 매우 깨끗하였다. 우리들은 매우 목이 말라 얼음물을 손으로 떠서 마셨다. 동쪽으로 돌아 한 암자에 이르렀는데 이곳이 곧 원효암이다. 의상과 원효는 모두 신라시대의 고승이다. 연화봉의 옛 이름과 이 암자의 이름을 두 고승의 이름을 따다가 지었으나 어찌 그들이 이곳에서 노닐었겠는가?

벽 위에 무릉(武陵) 주세붕이 을사년(1545)에 남긴 시가 있었다. 선생은 풍기(豐基)에 서원〔白雲洞書院〕을 건립하여 성현을 받드는 성대한 일을 처음으로 시작하였다. 또한 방외의 유람을 마음껏 즐기고 “증점의 읊조리면서 돌아오는” 흥취를 펼쳤다. 이 산의 뭇 봉우리들의 이름은 모두 선생이 지은 것이라 하니 유풍(遺風)에 자극되어 가히 감동하고 분발할 수 있을 것이다. 지산(芝山) 김팔원(金八元) 도 또한 이때의 유람을 함께 했는데 훗날,
“옛날 스승을 따라 산에 오르던 날을 생각하고, 머리 돌려 지난 일 떠올리니 아득히 날아간 기러기같구나”
라는 구절을 남겼으나 김팔원도 지금은 세상에 있지 않게 되었다. 수십 년 전의 일이 이미 옛사람의 지난 자취가 되었다. 세월의 변화는 잠시라도 멈추지 않으니 어찌하면 이 산처럼 오래도록 남아서 무궁한 세월의 변화를 다 볼 수 있단 말인가?
만월대(滿月臺)에 올라가 먼저 백운암(白雲庵)에 이르렀다. 아래쪽에 있을 때는 서 있는 곳이 낮지 않다고 여겼으나 위쪽으로 올라갈 수록 한 걸음 올라갈 때마다 더욱 높아져서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자를 지금은 모두 아래로 굽어서 바라보고 있다. 이곳에서 위쪽으로는 서 있는 곳이 더욱 높아지고 바라다 보이는 것이 전과는 더욱 다르게 되었다. 내가 병으로 눈이 어지럽고 앞이 깜깜하며, 또한 날개가 없어 열두 봉우리를 날아올라 천만 리 밖을 훤히 내다보아 내 마음 속에 켜켜이 쌓인 번뇌를 시원스럽게 털어내지 못함을 한스럽게 여겼다. 대개 이 산은 좌우로 호위하고 있고 산줄기의 맥락이 어지럽지 않으므로 관람하는 이들이 쉽게 대강의 모습을 파악할 수 있다. 만약 멀리 내다보고자 한다면 반드시 산의 정상에 오른 이후에야 그렇게 할 수 있다.

산 바깥에도 또한 볼 만한 봉우리와 절들이 많이 있으나 나는 이것들 모두 병 때문에 두루 볼 수가 없었다. 어느 때에나 두루 보는 것을 마칠 수 있을런지? 절의 중 극호(克浩)의 책상에 《몽산법어(蒙山法語)》가 놓여 있었다. 내가 가져다 잠시 읽어 보니 참으로 옳은 것 같으면서도 그릇된 것이며 이치에 가까운 것 같으면서도 참됨을 어지럽히는 것이었다. 만월암(滿月庵)을 돌아 내려와 물과 밥을 먹고는 날이 저물어 곧장 내려왔다.

11월 초이튿날
달부(達夫) 숙부께서 건장한 승려 두세 명을 거느리고 와서 홀로 정상에 올라 두루 둘러보고는 내려 오셨다. 스스로 말씀하시기를 이날 본 것이 전날에 비해 훨씬 낫다고 하셨으나 나는 병 때문에 함께 올라가지 못하였다.

초엿새, 여러 친구들과 문수사로 거처를 옮겼다. 함(涵)과 다른 사람들은 보현암에 묵었다. 나는 자주 오가며 그 고요함을 사랑하였는데 두 암자 사이에 얼음이 맺힌 폭포가 있었다. 간혹 옥이 떨어지듯 쨍그랑 소리가 나서 매우 사랑스러웠다. 이날 부모님께서 모두 편안하시다는 소식을 들었다.

11일,
일양(一陽)이 다시 소생하는 때 를 만났다. 선현들의 말씀에 지극히 고요한 가운데에 움직임의 단초가 있다고 하였는데, 이는 곧 천지의 마음을 보는 소이(所以)로서 이른바 천지의 마음이란 곧 사물을 만들어내는 마음이다. 그것이 움직일 때는 고요함의 지극함에 근본을 두고 있으나 그 단초는 매우 미미하다. 미미함으로부터 점점 왕성해져 만물을 낳고 기르기에 이르러서는 극점에 달하는데, 처음 움직일 때의 기미란 미묘하다고 할 수 있다. 인심으로 말하자면 어둡지 않은 지각으로 사물의 무궁한 변화를 접하되, 품물의 차등과 질서가 조금도 어긋나지 않는 것이 곧 리(理)이다. 비록 그러하나 천지는 무심하므로 그 고요했다가 움직이고 움직였다가 고요하게 되는 것은 스스로 서로 갈마들고 그 스스로 그러한 이치에 순응하는 것이다. 인간의 영위(營爲)에는 기욕이 있으므로 발하여 절도에 들어맞기는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그 본체의 밝음은 스스로 일찍이 한 번도 그친 적이 없고 (만물을 생육하는) 선한 단초가 다시 살아날 때는 불처럼 활활 타올라 볼 만한 것이 있다. 이로 인해 힘을 기울인다면 아마도 사람된 도리를 잃지 않게 될 것이다. 아아, 이는 천하의리의 근원이며 성현이 일찍이 받들어서 사람들에게 보인 것으로, 또한 특별히 이에 대하여 상세하게 의론하였다. 나의 벗들도 오래전부터 이 성현의 가르침에 힘썼으니 감히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이날은 음산하고 어두웠는데 저물녘이 되어 싸라기눈이 어지럽게 날리고 골짜기는 어둑어둑하였으며, 밤이 되자 큰 바람이 산을 뒤흔들었다. 나는 몸이 아프고 열이 올라 한밤 내내 누웠으나 편치 않았다.

15일
보현암으로 옮겨 묵었는데 혼자 지내면서 몸을 조리하기 위해서였다. 이날 밤 달이 대낮처럼 밝고 온 골짜기는 소리 없이 고요하여 시를 지었는데 한 구절에,
“밝은 달빛 온 산에 가득하고 이야기 나눌 사람도 없는데, 꿈속에서 고운을 만난 듯도 하여라.”
라고 하였다.

18일,
다시 김생굴을 보려고 여러 사람들과 함께 가서 매달린 얼음을 마음껏 완상하였다.

19일,
하루 종일 부슬비가 내렸는데 뭇 봉우리들이 구름 속에 반쯤 잠겨 있었다. 백운암의 승려 극호가 찾아와, 이야기가 33천이 층층이 여러 겹으로 되어 있다고 하는데 이르렀다. 하늘이란 하나일 뿐이다. 어찌 서른 세 개나 되는 많은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바른 견식이 없는 사람이 문득 그 사람의 말을 듣고는 그렇지 않다고 여기지 않을 자도 있을 것이니 어찌 두려워 경계하지 않겠는가?

20일,
아침에 싸라기눈이 어지럽게 날렸으며 큰 바람이 하루 종일 그치지 않았다. 집에서 보낸 편지를 받아보고는 동생 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날 밤 문수사로 돌아와 묵었다.

21일,
바람이 그치지 않고 바위계곡을 뒤흔들었는데 마치 일만 개의 벼락이 격렬하게 싸우는 듯하였다. 이날 밤 보현암으로 돌아와 잤다.

22일,
오전에 싸락눈이 내려 숲과 골짜기가 하얗게 색이 변했다. 오후에 눈이 개이고 바람이 또 불기 시작하였다. 나는 어지럼증이 생겨 누워서 조리하였다. 이날 밤 의승(醫僧) 천옥(天玉)이 와서 김후조(金後凋)의 편지를 얻어 보았다.

23일,
바람이 조금 그쳤다. 여러 사람들이 문수사가 높고 추워 오래 머물 수 없다하여 연대암으로 돌아가 머물고자 하니 함께 내려갔다. 여러 사람들은 지장전에 묵었고 나는 홀로 중대에 묵었다. 이날 성천이 고을로부터 와서 숙회(叔晦)와 언회(彦晦) 형의 편지를 얻어 보았다. 절의 승려 성일(性一)은 나이가 거의 팔십 가까이 되었는데 아직도 좌선을 하며 잠을 자지 않고 밤이 새도록 꼿꼿이 앉아 있었다. 또한 불서를 암송하기도 했는데 그 가운데에,
“한가히 노닐면서 좋은 시절 잃지 말라.”
라는 말이 있었다. 아아, 우리 유자들 가운데 우리 학문에 뜻을 둔 자가 저들처럼 능히 괴로움을 참으며 늙어서도 게을리 하지 않는 자가 있는가? 그러나 저들은 만가지 이치가 모두 공(空)하다는 것을 극치로 여기는 자들이면서도 또한 반드시 때로는 헛되이 세월을 보내는 것을 마땅치 않다고 여긴다. 하물며 우리들처럼 조금이라도 실질을 얻어 고인의 문호(門戶)에서 멀어지지 않고 세월을 보내며 사소한 데 힘쓰기를 급급해하지 않는 자들임에랴!

24일,
달부 숙부와 계보(啓甫)가 찾아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연대사의 노승 서너 명이 또한 찾아와 뵈었다.

25일,
내가 한 승려에게,“당신은 빨리 견성하고자 합니까?”라고 물었다. 승려는 말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도리(道理)는 본래 공정(公正)한 것이므로 만약 빨리 이루고자하는 마음이 생기게 되면 이는 다만 사사로운 것이요 끝내 성취할 수 없게 됩니다.”
라고 하였다. 아아, 승려의 말이 옳도다. 하물며 우리 유가(儒家)들의 학문도 빠른 효용을 기대하고서 조장(助長)하는 마음이 생기게 해서야 되겠는가? 버려두고서 김매지 않는 자는 이미 말할 것도 없지만, 싹을 뽑아서 자라게 하는 것은 실로 고금 학자들의 공통된 근심이니 어찌 크게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또한 생각건대, 승려의 무리들 가운데 지식이 있는 자는 대개 드물지만, 불가의 법을 삼가 지키며 그 도를 얻으려는 자는 비교적 많은 편이다.

우리의 도를 배우는 자들은 비록 뛰어난 자질로서 크게 성취할 수 있더라도 본분의 내면을 성찰하여 고인이 행하였던 바를 따라서 실천하는 자들은 드물고, 혹은 우리 유가(儒家)의 제방과 규범을 천시하여 버리고 반드시 무너뜨리고자 하는 자가 많은 것은 어째서인가? 대개 저들은 외물에 쫓기는 바가 없으나 우리들은 명리(名利)에 유혹당하고 빈천(貧賤)에 어지럽혀져서 그 뜻이 외물에 급급한 바가 있기 때문일 따름이다. 우리 유자(儒者)들이 이미 뜻이 없다면 그만이지만, 만약 행하고자 하는 바가 있다면 명리(名利)에 대한 생각을 끊어버리고 반드시 맛이 더 좋은 웅장(熊掌) 을 취하는 것을 가장 힘써서 해야 할 것이다. 상채(上蔡) 가 “말만 잘하고 행동할 줄을 모르면 이는 앵무새이다”라고 한 가르침을 어찌 엄중하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백운(白雲)과 강호(江湖)의 맑고 담박함이 있으니 다시 풀이 봄비를 근심하는 모습을 지어서야 되겠는가?

26일
감기 기운이 있어 편치 않아 종일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백운암의 승려 정안(正安)으로부터 김달원(金達遠)의 편지를 얻어 보았다.

27일
새벽부터 눈이 내려 종일 그치지 않았다. 대승암의 늙은 승려 조민(祖敏)이 찾아 왔으므로 “구름 사이의 옥같은 자취로 한 스님 돌아가네”라는 구절을 지었다.

28일
눈이 그치자 옥빛 봉우리가 구름에 잠기고 옥빛 나무가 골짜기에 가득하였는데 그 사이로 소나무와 전나무가 푸르게 보여 장관을 이루었다. 백운암과 만월암의 승려 서너 명이 찾아와서 마주앉아 이야기하다 한참이 지나자 돌아갔다.

29일
나는 처음에 산중에 오래 머물다 봄을 기다려 날씨가 풀리면 산을 나서려 했으나, 곧 생각해보니 산이 매우 높고 추우며 어지럼증 때문에 오래 머물 수 없어서 하산하고자 하였다. 마침 말부리는 종이 찾아와서 아버지께서 속히 산을 내려오라고 명하셨다고 하니 계보(啓甫)도 또한 나와 함께 산을 내려가고자 하였다. 새벽이 되어 먼저 출발하였는데 나는 산중을 돌아보고 아쉬워하며, 참으로 진경(眞境)이라 본디 속인이 오래 머물 곳이 아니며 조물주도 또한 이 산을 나의 소유로 허락하지 않는 것인가하고 생각하였다. 병든 객이 이 산을 오래도록 보지 못함을 목마른 듯하다가 이미 보고난 후에는 또한 이 산의 진면목을 두루 알지 못하고 문득 바삐 하산하게 되어, 이곳에 오래 있으면서 한편으로는 맑은 기상을 얻고 또 한편으로는 옛 습관의 번거로움을 씻어내지 못하게 되었다. 참으로 이 몸을 뛰어난 인물로 만들지 못하고 옛 습성이 몸에 휘감겨 끝내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단 말인가!

정오에 달부(達夫) 숙부와 작별하고 눈을 밟으며 산을 내려왔다. 산 입구를 나서서 얼음을 밟으며 강을 건넜는데 승려 성은(性誾)과 보월(寶月)이 따라와 전송하였다. 잠시 강기슭에서 쉬며 강 위의 층층 암벽을 보니 첩첩이 산허리를 감싸고 있었다. 승려들이 양쪽 벽 사이를 가리키며 저곳이 금강굴(金剛窟)이 있는 곳이라 하였다. 대개 산속에 있을 때에는 물이 있는 줄 알지 못하다가 이곳 서쪽에 와서 보니 물을 임한 절경이 있었다.
온 산을 두고 평하자면 높은 절경은 산 안쪽에 있고 물과 바위의 기이함은 오직 금강굴에만 있다고 할 수 있다. 백담(栢潭) 구봉령(具鳳齡)의 시에 이르기를, “청량산 서쪽의 장인봉에, 석굴은 안개에 반쯤가려 보이지 않네. 흥을 타고 봄골짜기를 찾아가려 하니, 온 강의 흐르는 물엔 낙화가 붉구나”라고 하였다.

대개 생각건대, 봄강물에 붉은 꽃이 떠다닐 때가 가장 절경일 것이다. 시골 주막을 지나서 내려갈 때 장인봉 등 여러 봉우리를 바라보고는 아홉 번 머리를 돌려보고 차마 떠나지 못하였다. 당초에는 곧장 강을 따라 내려가며 물과 바위를 두루 보고 새로 지은 도산서원(陶山書院)을 찾아가려 하였으나 눈길이 꽁꽁 얼어붙어 병든 몸으로 험한 길을 가기 어려웠다. 날이 저물자 온계(溫溪) 북쪽 고산사(孤山寺)에 투숙하니 오욕(吳溽)이 찾아와 함께 묵었다.

30일
아침 일찍 밥을 먹고 선성(宣城)을 지나면서 북쪽으로 산을 바라보고는 “바람과 구름엔 다하지 않는 흥취가 있고, 빼어난 기운이 다시금 드날리네”라는 구절을 지었다. 정오에 돌아와 부모님을 뵈었다.
아아, 사람이 학문을 함에 자기 스스로 힘을 쓰면 그만일 뿐이니 진실로 바깥 사물을 기다려서 그 뜻을 펼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옛날의 군자가 산과 물에 있어서 모두 좋아하는 바가 있었던 것은 무슨 까닭인가? 공자(孔子)는 태산(泰山)에서 주자(朱子)는 남악(南嶽)에서 그 온축된 것을 펼쳤던 것에 대해서는 진실로 알기 어려운 것이다. 일찍이 남명(南冥) 조식(曹植)의 ‘유두류록(遊頭流錄)’을 보니,
“명산에 들어온 자가 누군들 그 마음을 씻지 않겠는가마는, 필경에는 군자는 군자이고 소인은 소인이니, 열흘 춥고 하루 볕 쬐는 정도로는 아무런 유익함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라는 말이 있다.

스승님께서는 이 말을 평하여 지론(至論)이라고 여기셨다. 내가 산을 유람하여 진실로 조금의 얻음도 없고 마음 속에서 찾아보아도 혹 전날에 없었던 것이 새로 생겨나지 않은 것은 대개 또한 열흘 춥고 하루 볕 쬐는 정도의 효험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 이후로 전날의 마음을 씻어내는 공효(功效)를 버리고서 하류(下流)를 좇으면서도 부끄러워할 줄 모른다면, 어찌 이 산에 대해서 부끄럽지 않겠으며 또한 여러 스승님들에게는 죄인이 되지 않겠는가? 이것이 크게 두려워할 바이다.
이에 산중에서 두루 찾은 것과 이 유람의 시말(始末)을 기록하고, 상자 속에 보관하여 오늘의 뜻을 드러내 보여 더욱 힘쓰고자 한다. 진실로 소인의 일이니 이와 같이 기록한 것이다.












민령(岷嶺)에 대한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