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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도산구곡 일반해설
 글 쓴 이 : 농암종택  등 록 일 : 2016-10-31 오전 10:22:52 조 회 수 : 785

역사문화명소

 

도산구곡

 

2016.09.02.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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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구곡문화 현장 조사를 통한 관광자원으로서 활용성 제고  

구곡문화

우리나라에는 경치가 수려하고 학문을 숭상하는 지역에는 어김없이 구곡九曲이 자리하고 있는데, 구곡이란 글자 그대로 흘러가는 아홉 구비 물줄기를 뜻한다. 도산구곡을 비롯하여 고산구곡, 죽계구곡, 무흘구곡, 포천구곡, 화양구곡 등이 있다. 

 ‘구곡’의 어원에 대해서는 「주역」 건괘乾卦 제5효인 ‘구오九五’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홍양호(洪良浩, 1724~1802)는 「우이동구곡기牛耳洞九曲記」에서, “무릇 구九라는 숫자는 양陽이 왕성하고 숫자가 극에 달한 것이다. 그러니 건괘에서 구를 쓴 것이다.”라고 해서, ‘구’를 양의 수로 극진한 데서 찾았고, 권섭(權燮, 1671~1759)은 「화지구곡기花枝九曲記」에서 “고인들이 그 굽이의 수를 아홉으로 정한 것은 모두 형상을 취하려는 뜻이 있었으니, 후인들이 단지 모방하고 따를 뿐이다.”라고 하여, 주자가 아홉 개의 굽은 형상을 취하여 구곡으로 정했고, 이를 후인들이 그대로 따르면서 ‘구곡’이 용어로 굳어졌다고 보았다. 굽이진 형상을 취하되 힘 있고 큰 수인 구를 취했다고 보면 되겠다.

무이구곡도武夷九曲圖(이성길, 1592, 견본담채, 33.5×398.5㎝,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구곡이란 용어는 남송 때 성리학자 주희(朱熹, 1130~1200)가 만들어 사용하였다. 주자가 54세가 되던 1183년(순희 10) 4월, 주자는 복건성福建省 무이산武夷山에서 구곡을 경영하였다. 그중 가장 경관이 좋은 제5곡에 무이정사武夷精舍를 짓고 무이구곡武夷九曲을 노래함으로써 복건성의 문화 지형을 바꾸어 놓았다. 무이산은 원래 풍부한 전설과 노래, 그리고 이야기가 뒤섞여 하나의 문화를 형성하고 있던 곳이다.

이런 주자의 영향을 받은 구곡문화가 그대로 조선에 도입되었다. 퇴계는 관료생활을 하면서도 항상 외직을 자청했고 또 고향으로 돌아가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래서 퇴계는 대제학에서 물러난 1557년 고향으로 돌아와 도산구곡 중 5곡에 도산서당을 지었다. 이때가 1561년이다. 이런 영향은 제자나 후학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구곡에 대한 해석은 학파나 학자마다 그 견해에 조금씩 차이가 있다. 물론 주자가 무이구곡을 처음 사용한 이후 우리나라로 전래되고 퇴계는 구이구곡가를 차운하는 형식으로 시를 지었다. 그렇다고 해서 퇴계가 도산구곡을 짓고 경영한 것은 아니며 후대에 설정되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 편에서 자세히 설명하기로 한다. 구곡에 대하여 해석은 대체로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먼저, 자연의 대상을 보고 감회를 느껴 산수를 노래하는 것이 인물기흥因物起興이라면, 또 다른 하나는 학문을 하는 순서로 마지막에는 도에 들어간다는 것이 입도차제入道次第다.

경상북도에도 많은 구곡이 있는데 안동의 도산․하회․퇴계구곡, 성주․김천 무흘구곡, 성주 포천구곡, 문경 선유구곡, 영주 죽계․동계구곡, 예천 수락대 구곡, 봉화 춘양구곡 등이 대표적이다.
영남 사림의 구곡시가 중 대표 작품을 보면 박하담(朴河淡) 운문구곡가(雲門九曲歌), 이황(李滉) 도산구곡가(陶山九曲歌), 정구(鄭逑) 무흘구곡가(武屹九曲歌), 이중경(李重慶) 오대구곡가(梧臺九曲歌), 이형상(李衡祥) 성고구곡가(城皐九曲歌), 정만양(鄭萬陽) 횡계구곡가(橫溪九曲歌), 채헌(蔡瀗) 석문구곡가(石門九曲歌), 이한응(李漢膺) 춘양구곡가(春陽九曲歌), 이원조(李源祚) 포천구곡가(布川九曲歌) 등이 있다.  

도산구곡의 유래

앞에서 언급한바와 같이 이렇게 많은 구곡 중 안동시 도산면에 자리 잡고 있는 도산구곡에 대하여 살펴보자. 먼저 이야순(李野淳, 1755~1831)이 「도산구곡시(陶山九曲詩)」(「무이도가」를 차운함)를 1800년경 지었고, 조술도(趙述道, 1729∼1803)가 이야순의 시를 차운한 것이 1802년이다. 그렇다면 도산구곡의 설정은 1800년 이전에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도산구곡에 대해서는 퇴계의 후손인 이이순(李頤淳, 1754~1832)의 『후암집後溪集』에서 그 구체적인 기록을 찾을 수 있다. “내가 보건대 청량에서 운암까지 45리 사이에 명승지가 많은데 도산이 그 가운데 자리하여 상하를 관할하며 한 동천을 만든다. 시험 삼아 그 굽이를 이루는 가장 아름다운 곳을 무이구곡(武夷九曲)의 예를 따라 나누면 운암이 제1곡이 되고, 비암이 제2곡이 되고, 월천이 제3곡이 되고, 분천이 제4곡이 되고 탁영담이 제5곡에 있으니 이것은 도산서당이 있는 곳이다. 제6곡은 천사이고, 제7곡은 단사이고, 제8곡은 고산이고, 제9곡은 청량이니 굽이굽이 모두 선생의 제품題品과 음상吟賞이 미친 곳이다”하였다.
 

도산서원도(강세황, 1751년, 지본담채, 보물 제522호, 26.8*138.5cm, 국립중앙박물관)
도산구곡

『퇴계선생문집 외집退溪先生文集 外集 권1에 제1곡은 운암雲巖, 제2곡은 월천月川, 제3곡 오담鰲淡, 제4곡 분천汾川, 제5곡 탁영濯纓, 제6곡 천사川砂, 제7곡 단사丹砂, 제8곡 고산孤山, 제9곡 청량淸凉으로 이름을 짓고 무이구곡에 차운한 시를 읊었다.

옛날 선성현(宣城縣)이었던 도산구곡은 낙동강 상류의 수려한 자연환경을 배경으로 흐르는 물굽이마다 아름다운 마을이 형성되었고 그 시대마다 민속과 유교․불교․도교의 독특한 문를 형성하였다. 이 지역 인심이 순박(淳朴)하고 학문을 숭상(崇尙)하여 조선시대에는 홍유석학(鴻儒碩學)이 면면이 이어졌고 특히 퇴계선생이 태어난 곳으로 세인들은 추로지향(鄒魯之鄕)이라 일컬어 칭송하고 있다. 정조 때의 하계霞溪 이가순(李家淳, 1768~1844)이 도산구곡가를 지어 오늘날에 전하고 있는데 이 시에서 도산구곡의 대체적인 경관을 짐작할 수 있다.


1곡 운암곡雲巖曲
一曲巖雲繞壑船
小庵西出見烏川
當年講易論文地
山菊江楓鎖暝煙

일곡이라 바위 골짜기에 구름이 배를 두르니
작은 암자에서 서쪽으로 나가서 오천을 보네.
그 해 역을 강론하고 문을 논의하던 땅에
산의 국화, 강의 단풍, 어두운 연기에 잠겼네.

운암곡은 지금 안동댐 건설로 수몰되어 정확한 위치를 확인할 수 없다. 다만 물에 잠긴 운암곡의 산수를 대략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사람들은 이곳이 안동시 와룡면 오천리, 즉 일명 ‘외내’라고 하는 군자리君子里라고 하나 위의 시를 보면 아닌 것 같다. 두 번째 단락에서 작은 암자에서 서쪽을 보니 오천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이곳은 군자마을의 반대편으로 보여 진다.

군자마을은 1500년대 초 김효로(金孝盧, 1455~1534)가 정착하며 형성된 마을로 같은 시대 외손인 봉화금씨가 들어와 현재까지 살고 있다. 이곳에는 김부필(金富弼, 1516∼1577), 김부의(金富儀, 1525~1582), 김부인(金富仁, 1512~1584), 김부신(金富信, 1523~1566), 김부륜(金富倫, 1531~1598), 금응협(琴應夾, 1526~1586), 금응훈(琴應壎, 1540~1616) 등 도학군자를 배출하였다. 당시 안동 부사였던 한강寒岡 정구鄭逑는 “오천 한 마을에는 군자 아닌 사람이 없다”라고 하였는데 그래서 마을 이름을 군자리라 하였다.

2곡 월천곡月川曲
二曲芙蓉第幾峯
林中一鳥謝塵容
滿川風月同心賞
浩劫溪山隔萬重

이곡이라 부용봉은 몇 번째 봉우리인가
숲 속에 한 새는 세속의 모습을 사양하네.
시내에 가득한 풍월은 심상을 함께 하나
오랜 세월 시내 산이 만 겹이나 막혔네.

안동시 도산면 동부리는 구한말 예안군 읍내면에 속한 지역인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만촌동, 관저동, 교촌동의 각 일부를 병합하였다. 예안읍의 동쪽이 되므로 동부리라 하여 안동군 예안면에 편입되었다. 그후 1973년에 안동댐이 건설됨에 따라 일부가 수몰되고 나머지 일부는 1974년에 도산면에 편입되었다.

이 마을은 예안 고을인 선성현(宣城縣)에 속했던 유서 깊은 마을이었으나 안동댐 건설로 마을의 대부분이 수몰되었으며, 현재 호수를 사이에 두고 예안면 부포 나루터와 마주보고 있다. 이곳에는 조목(趙穆, 1524∼1606)이 태어난 곳으로 당시 마을 이름이 월천이었으나, 월천의 아호와 중복을 피하기 위해 월애 또는 달애, 다래라고도 부른다. 이곳에는 월천이 1539년(중종 34)에 건립한 월천서당月川書堂이 있으며, 월천의 셋째 동생인 조정(趙禎, 1551∼1633)의 재실 겸 정자인 겸재謙齋가 있다. 겸재는 역경易經의 64괘 가운데 지산겸地山謙 괘에서 그 의미를 취하였다고 한다.

3곡 오담곡鰲潭曲
三曲鰲潭客問船
文僖尸祝自庚年
燭幽一鑑神襟契
講樹氷輪尙入憐

삼곡이라 오담에서 객이 배를 물으니
문희공을 제향함이 경년에 시작했네.
깊은 곳 비추는 한 치 거울 신금과 맞으니
강론하던 나무의 달빛이 오히려 어여쁘네.

「퇴계연보」에 “무오년 4월에 선생이 오담에 노닐며 우 좨주를 위하여 그 위에 서원을 세우고자 그 땅을 살폈다.” 하였다. 鰲潭 在陶山下五里許 年譜 戊午四月 先生 遊鰲潭 爲禹祭酒 欲建書院於其上 相其地
퇴계연보에서 보듯이 퇴계는 1570년 우탁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였다. 오담은 도산 아래 5리쯤에 있다.

「오가산지후지」에 이 산을 노니는 사람은 운암곡의 풍월담에 배를 띄우고 오담과 탁영담 굽이에 노를 저어 올라가서 도산의 상덕사를 배알하고, 곧바로 거슬러 올라서 굽이굽이 기이한 경관을 관람하고, 12봉우리 정상에 올라 임하면 시야가 확 트이고 마음이 시원하다. 무릇 이 경계의 높은 것, 깊은 것, 흐르는 것, 솟은 것, 동물 식물, 하늘을 나는 것, 물에 잠영하는 것이 한 이치가 밝게 드러나지 않는 것이 없으니 곧 어찌 다만 아득한 구름 안개만이 뜻에 맞고 눈을 기쁘게 할 따름이겠는가?

4곡 분천곡汾川曲
四曲淸川繞象巖
漁歌驚起鷺毛毿
蟠桃江寺留淸韻
仙伯風流共一潭

사곡이라 맑은 시내 상암을 두르니
어부가에 해오라기 깃털 세우며 놀라서 일어나네.
반도의 강사는 맑은 시를 남기고
선백의 풍류를 물가에서 함께 하네.

분천리는 구한말 예안군 의동면 지역으로서 부내, 또는 분천汾川, 분강촌汾江村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분천리라 하여 안동군 도산면에 편입되었다. 부내는 원래 영천 이씨永川李氏의 집성촌으로, 입향 시조는 고려말엽에 군기시소윤軍器寺小尹을 지낸 이헌李軒이다. 그는 어지러워 가는 세상일을 염려하여 벼슬을 버리고 고향 영천을 떠나, 천석泉石이 아름다운 분강汾江 굽이에 안주安住의 터전을 마련하였다고 한다. 소윤공少尹公이 동네를 둘러보니 낙동강 물이 밝게 흐르므로 부내라 불렀다고 하며, 한자로는 분천汾川이라 한다.

이 마을은 소윤공이 약 600년 전에 입향한 이후로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 1467∼1555)를 비롯하여 수많은 인물이 대를 이어 배출된 유서 깊은 마을이었으나 1976년 안동댐 건설로 인해 수몰지구가 되어 현재 송티와 넘티 등 2개의 마을만 남아있으며 가구수는 20여호가 살고있다. 분강 기슭과 강 가운데는 ‘농암聾巖’과 ‘점석’이라는 바위가 있는데 지금은 떼어내 애일당 앞으로 옮겨 놓았다.

5곡 탁영담곡濯纓潭曲
五曲盤陀水更深
艮岑南望入雲林
傳觴繫纜芳塵在
誰識通泉百世心

오곡이라 반타는 물이 더욱 깊고
간잠에서 남을 보니 구름이 숲으로 들어가네.
술잔을 전하고 닻줄 맴에 방진이 있으니
그 누가 통천의 백세심을 알겠는가.

시내가 동병에서 서쪽으로 달려 산 발꿈치에 이르면 물이 넓어지고 깊어지니 몇 리 사이를 시내 따라 거슬러 오르면 깊어서 배를 운행할 수 있다. 금빛모래 옥 같은 조약돌이 맑고도 밝으며 푸르고 차가우니 곧 이른 바 탁영담이다. 산문 같은 것이 있는데 곡구암이라 한다. 이곳에서 동으로 몇 걸음 돌아가면 산기슭이 끊어져 바로 탁영담에 들어간다. 위는 큰 돌이 깎아지른 듯 서 있고 층층이 쌓인 것이 10여 장이다. 그 위에 대를 쌓아 만드니 소나무가 해를 가렸다. 좌우의 취병은 그림자 움직이고 푸르름을 머금어 강산의 빼어난 경치를 한번 보고 나서 천연대라 하였다. 서쪽 산기슭에 또 대를 쌓은듯한데 이름이 천광대와 운영대라 하니 그 빼어난 경치는 마땅히 천연대에 못지않다. 반타석이 탁영담 가운데에 있는데 그 형상이 반타의 모양이라 배를 매고 술잔을 돌릴 수 있다. 매번 큰 비로 물이 붇게 되면 더불어 가지런히 함께 들어가고, 물이 줄어들고 물결이 맑아진 후에야 비로소 드러난다. 「도산잡영」

6곡 천사곡川沙曲
六曲長虹抱玉灣
瀾臺遙望白雲關
紫霞西塢幽人屋
萬卷中藏一味閑

육곡이라 긴 무지개 옥만을 안으니
난대에서 멀리 백운관을 바라보네.
자하봉 서쪽 두둑은 유인의 집이니
만권 책에 한 맛의 한가로움 숨겼네.

원천리는 1895년(고종 32)년 지방관제 개편에 의해 예안군 의동면의 지역이었으나 왜정초인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원촌동, 천곡동, 이곡리를 병합하여 원촌과 천곡의 이름을 따서 원천리라 하여 안동군 도산면에 편입되었다. 이곳은 원촌마을과 내살미 마을이 있으며 50여 가구가 살고 있다. 내살미는 원천리에서 가장 큰 마을로 마을 앞을 흐르는 낙동강이 수려하고 넓은 강변에 쌓인 모래가 정결하고 광채가 아름답다 하여 예로부터 천사미라고 하였으며, 내살미 또는 천사, 천곡이라고도 불렀다. 안동댐 축조 전에는 마을 앞 모래강변에 서식하는 은어銀魚가 별미여서 왕에게 진상품으로 올렸다. 예안읍지인 선성지(宣城誌)를 보면 교수敎授 이현우李賢佑가 이곳에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하였으며 외손인 금제순琴悌荀이 이어 살았는데, 이곳의 아름다운 경치로 인하여 예안의 경치 좋은 곳(14曲) 가운데 제8곡에 속하였음을 알 수 있다.

7곡 단사곡丹砂曲
七曲仙臺印孔灘
雲靑水綠畵中看
伯陽眞訣留千古
莫遣金丹鼎火寒

칠곡이라 선대가에는 여울로 구멍을 세기니
푸른 구름이 푸른 물 가운데 그림으로 보이네.
백양의 진결이 천고에 남아 있으니
금단을 만드는 솥의 불을 꺼트리지 말지라.

단천리는 구한말 예안군 의동면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면천리, 백운리, 항곡리, 단사리, 원촌동 일부를 병합하여, 단사와 면천의 이름을 따서 단천리라 하여 도산면에 편입되었다. 단사丹砂는 원촌遠村에서 작은 고개를 하나 넘으면 나온다. 단사마을은 단천리에서 가장 큰 마을로 깨끗한 자갈밭 백사장이 5리에 펼쳐있으며, 대안對岸은 강기슭을 따라 길게 드리운 단사협丹砂夾 절벽이 천연의 병풍을 이루는 천혜天惠의 마을이다. 마을 뒤에 붉은 점토질의 산맥이 뻗어있고 강가의 자갈도 연분홍빛인데, 이로 인하여 '붉은 단丹자'와 '모래 사砂자'를 따서 마을 이름이 단사丹砂가 되었다. 단사협丹砂峽은 마을 앞 약 1km에 이르는 절벽으로 퇴계선생이 이름 했다하며, 그 남쪽에 왕모산성, 갈선대葛仙臺, 고세대高世臺가 있다. 단사협은 강물과 병풍처럼 두른 단애斷崖가 어울려 천하의 기경寄景을 연출하는데 예안읍 지인 선성지宣城誌에서는 예안의 빼어난 경치 14곡曲 가운데 제7곡으로 기록하였다.

8곡 고산곡孤山曲
八曲堅頑一斧開
孤山孤絶石潭洄
主人好是惺惺老
見許眞工了會來

팔곡이라 굳고 무딘 곳을 한 도끼로 여니
고산이 빼어나고 석담 물이 돌아가네.
주인은 성성한 늙은이 좋아하니
참된 공인 알고 옮을 허락 받았네.

가송리는 풍수적으로 천옥天獄이라 불릴 만큼 매우 폐쇄적인 지형을 띄고 있는 마을로 청송 주왕산周王山과 더불어 영남의 소금강小金剛으로 일컬어진다. 이곳은 청량산淸凉山 줄기가 마을을 에워싸고, 한복판으로는 낙동강의 원줄기가 흘러간다. 특히 청량산의 대臺 밑에 형성된 가송협佳松峽은 안동 땅의 수많은 경승 가운데서 산수미山水美의 첫째를 곱을 만큼 안동산수의 압권이라 일컬을 만하다. 마을은 강을 중심으로 하여 동쪽에 가사리, 서쪽에 소두들, 그리고 소두들에서 남서쪽으로 고개를 넘어가면 올미재가 있다. 가송리는 구한말 예안군 의동면에 속한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가사리, 송오리, 고리, 광석동 일부, 운천동 일부와 봉화군 하남면의 일부를 병합하여, 가사리와 송오리의 이름을 따서 가송리라 하여 안동군 도산면에 편입되었다. 이곳에는 이건한 농암 이현보의 종택이 이곳에 자리 잡고 있다.

9곡 청량곡淸凉曲
九曲淸凉更屹然
祝融南下俯長川
始知極處梯難上
十二峯巒盡揷天

구곡이라 청량산 더욱 우뚝하니
축융봉이 남쪽 아래로 긴 내를 굽어보네.
비로소 극처는 사다리로 오르기 어려운 줄 아니
스무 봉우리 모두 하늘 높이 솟았기 때문이네.

청량곡(淸凉曲)은 청량산 입구의 강마을인 광석마을 주변이다. 제 8곡인 고산에서 물길을 따라 상류로 3.1km올라간 지점이다. 이곳은 곳곳에 기암괴석이 우뚝서있어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청량산(淸凉山, 870m)은 낙동강 상류에 그려진 한 폭의 수묵화다. 주세붕은〈유청량산록〉에서 청량산의 아름다운 기품을 자세히 적었으며, 퇴계는 자랑스럽게 청량산 주인임을 내세웠다. 특히 퇴계는 어릴 적 숙부에게 학문을 배우기 위해 집에서 청량산으로 이어지는 강변길을 거닐며 청량산과 낙동강이 빚은 자연의 조화를 즐겼다. 퇴계의 후손인 이야순도 이곳에 이르렀다. 도산구곡의 목적으로 삼은 청량산을 품에 안은 것이다. 낙동강 상류의 깊은 산중에 이토록 아름다운 풍광이 있을 줄 세상 사람은 알지 못한다. 광뢰는 혹여나 복사꽃이 떠내려가면 세상사람 눈에 뛸지 모르니, 백로에게 이 동천을 보호하라는 말을 한다. 이는 퇴계가 지극히 사랑했던 산이기 때문이다.


[출처] 도산구곡|작성자 한국국학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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