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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도산기행

 제     목 : 1780년 박종의 도산기행
 글 쓴 이 : 박종  등 록 일 : 2010-06-10 오후 6:41:14 조 회 수 : 1546

청량산유록

경자년(1780년, 정조 4년) 8월 1일 맑음.
내가 평소에 마음이 울적한 병을 앓아 고요하게 지낸 지가 오래되었다. 그러나 병이 더 고통스럽게 느껴졌으므로 한번 자연에 나아가 답답하고 울적한 마음을 풀어내고 싶었다. 그리하여 다만 백낙천(白樂天)이 강주(江州)로 귀양가서 여산(廬山)의 빼어난 경치에 힘 입고, 유종원(柳宗元)이 유주(柳州)로 좌천되어 갔을 때 고무담(錮鉧潭)의 경치에 의지하여 그 굳게 막힌 근심을 쏟아내는 한편 그 문장을 훌륭하게 발전시킨 예를 염두에 두었다. 지금 내가 영남에서 3년을 지내면서 방안에만 우두커니 앉아 영남의 빼어난 경치를 찾아다니지 않으니, 향산 백낙천과 유주 유종원에게 웃음거리가 되지 않겠는가? 하물며 이제 막 장마가 그치고 가을 바람이 선듯부니 바로 유람할 때이다. 드디어 박종명(朴宗溟)과 약속하여, 저물녘에 박군이 찾아오니 자못 위로가 되었다.

2일, 맑다가 저물녘에 우레가 치고 비가 내림.
아침에 길을 나서려는데 이른바 ‘여행의 도구는 내 다리 뿐이다.’라는 말처럼 행장이 단촐하였다. 주머니에 작은 붓과 벼루를 담고 손에 지팡이를 짚고 나섰으니, 또한 속세를 벗어난 듯 얽매인 데가 없음을 느꼈다. 박군이 나를 위하여 옷 몇 벌과 책 몇 권, 동전 몇 문(文)을 담아서 몸소 이고 왔으니 그 의기를 알 수 있다.
옥봉(玉峰)으로 난 길을 취하여 봉우리의 정상에 올랐다. 여기가 야산(野山) 가운데 가장 높은 곳으로 들의 농부가 일색(一色)이고, 누런 구름과 어두운 바다가 만 리 밖에서 하늘과 만나니 또한 마음이 탁 트여 회포를 펼쳐 낼 수 있었다. 아들과 종동(宗童) [즉 박상문(朴尙文)이다.]이 따라왔다가 옥봉에 이르러 인사하고 돌아갔다.
미곡천(美谷川) 가에 이르니 한낮의 태양이 뜨겁게 내리 쬐었으므로 길 오른편 소나무 그늘 아래에 잠시 누워 시원한 낮잠을 즐겼다. 이어 미곡(美谷) 지역을 지나 몇 리를 가니 한 무더기의 검은 구름이 서쪽에서 일어나 잠깐 사이에 비가 내렸는데, 장차 크게 쏟아질 조짐이 있었다.
마침내 길을 돌아가니 옥천재사(玉川齋舍) [권씨의 재사]를 만날 수 있었다. 재사의 처마에 오르자마자 비가 이미 발뒤꿈치까지 바짝 이르렀다. 잠시 뒤에 그쳤는데 날이 또한 저무는 바람에 재사에서 묵었다.
누대는 탁 트였는데 비가 지나가자 시원스레 산이 빛나고 물소리가 들리니, 매우 고즈넉하여 기쁜 마음이 일었다. 저문 뒤에 재사의 지기가 보리밥을 주었기에 동전 4잎을 밥값으로 주었다. 이 날은 20리를 여행하였고, 시 24구를 지었다. [시는 시권(詩卷)에 보인다. 아래도 이와 같다.]

3일 맑음.
새벽에 길을 나섰다. 풀이 우거진데다 이슬까지 젖어 옷과 바지가 모두 축축하였다. 10리를 가서 김생(金生) [여휘(汝輝)이다.]을 방문하였다. 누추한 흙방에서 손님을 맞이하였는데, 이끌어 앉을 자리가 없을만큼 비좁아 울타리 그늘 아래에서 아침을 대접한다.
드디어 방향을 바꿔 서곡(西谷)으로 들어가 10여 리 정도를 가서, 백곡(栢谷)을 지났다. 여기부터 봉우리가 기이하고 빼어났으며, 시냇가의 돌들은 울퉁불퉁하다. 어떤 모퉁이에 들어가니 맑은 못이 나오길래 옷을 벗고 목욕을 하였다. 깨끗하게 때를 씻어내니 몸은 정결하고 마음은 상쾌하였다. 절구가 있었는데 해가 거기서 날아 올라가는 뜻이 있나보다. 땅에서 우뚝 솟은 높은 봉우리는 마치 거꾸로 매단 것처럼 기울어져 있다. 골짜기에 사는 백성들은 쇠 갈고랑이로 땅을 개간했는데도 벼와 곡식이 숲처럼 많은 것을 보면, 또한 산에서 농사짓기가 얼마나 어렸웠을 줄을 짐작할 수 있다. 산기슭 위의 작은 마을에서 잤다. 이날은 25리를 여행하였고, 시 11구를 지었다.

4일 아침에 흐리다가 저물녘에 갬.
나무가 높게 자란 숲에 이슬이 촉촉이 내려 정오가 되어서야 길을 나섰다. 고개가 끊어져 구름 속에 들어가 영(寧)과 영(英) 두 고을의 경계를 지었다. 올라서 아래를 보니 지나온 인동(仁洞)과 상암(商巖)의 사이에 연기와 비가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고개 위에는 태양이 밝게 비추었다. 그제서야 비로소 내가 도착한 곳이 이미 인간 세상에서 멀리 벗어난 곳임을 알겠다.
서쪽으로 내려오니 큰 골짜기에 몇 줄기의 시냇물이 형세를 따라 기이함을 드러낸다. 떨어져서 폭포가 되고 멈춰서 못을 이룬다. 걸음걸음 시내를 따라가며 갓을 씻기도 하고 발을 씻기도 하였다. 북쪽으로 방향을 바꿔 20리를 가다가 천둥과 비바람을 만났다. 잠시 산기슭의 민가에서 쉬었다가 비가 조금 그치자 다시 10리를 더 가니 그새 날이 이미 저물었다. 한천(寒川)의 주막에 묵었다. 이날은 40리를 여행하였고, 시 8구를 지었다.

5일 맑음.
영현(英縣)에 도달하기 5리 전에 작은 연못이 있었는데, 가을 연꽃이 활짝 피어있었다. 그 위에는 외로운 암자가 동쪽가 석벽 사이에 있는데, 바라보니 매우 높고 멀리 있었다. 잠시 연못가에 앉았다가 연꽃 한 꽃송이를 땄다. 세 번 큰 소리로 부르며 말하기를,
“세상에 무극옹(無極翁) 주돈이(周敦頤)가 없으니 누가 네가 군자임을 알겠는가?”
라고 하였다. 이곳부터 길이 궁벽진 골짜기로 들어갔는데 주곡(注谷)에 이르니 조금 시야가 트였다. 좌우가 널찍한 서당이 시내를 임하여 있다. 이곳은 옥천공(玉川公) 조승선(趙承宣)의 옛 마을로 그 자손이 그의 학문을 대대로 이어간다고 한다. 단곡(丹谷)의 신씨 선비를 만나 그 집에서 묵었다. 이날은 50리를 여행하였고, 시 11구를 지었다.

6일 흐림.
처음에는 곧바로 청량산을 향하려 하였으나 어제 간탄(澗灘)에 이르러 이미 청량산으로 곧바로 가는 길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부득이 태백(太白)으로 곧바로 향하여 돌아오는 길에 청량산에 들를 계획을 하였다. 그런데 주막의 노파가 말하기를,
“어제 천둥이 일고 비바람이 몰아쳐 재산(才山)의 큰 시내에 물이 불어 태백으로 갈 수 없다.”
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길을 돌아 청량산으로 향하였다. 15리를 가서 인곡(仁谷)에 당도하여 아침을 먹고 고개 하나를 넘었다. 고개의 위에는 옛 성터가 있었다. 그 지방 사람의 말로는,
“이 성은 두루 동남쪽의 험준한 골짜기를 따라 구불구불 서북쪽 산 정상에까지 이르는데, 청량산도 성벽의 안에 있다. 이곳이 바로 고려 공민왕(恭愍王)이 홍건적의 난리를 피했던 곳이다. 산의 남쪽 비탈에는 옛 궁궐 터가 있으며, 그 아래에는 천 길 절벽이 있다. 고려왕이 난리를 피할 때 죽일만한 죄인을 형벌을 내리지 않고 곧장 이 절벽에서 던졌는데, 절벽 아래에는 지금도 백골이 쌓여 있다. 날이 흐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에는 귀신의 곡소리가 들린다.”
라고 하였다. 고개의 서쪽에서 5리를 내려와 북쪽으로 방향을 바꿔 몇 리를 들어가니, 갑자기 좌우에 푸른 절벽이 깎은 듯이 서 있고 고목과 푸른 등나무가 울창하여 해가 보이지 않으니, 달이 보이지 않을 것임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청량산의 경계에 도착하고 나니, 젊은 승려가 합장하고 맞이하면서 절을 올리고서 산포도 몇 송이를 건넸다. 곧바로 수십 걸음을 들어가니 문득 만 길의 절벽이 머리 위에서 짓누르고 있다. 그 아래에 암자가 있고, 암자의 곁에는 불사(佛舍)가 있다. 암자의 이름은 육화(六和)이고 전의 이름은 명부(冥府)이다.
암자에 앉아서 사방을 둘러보니 층층의 바위와 겹겹의 절벽이 사람의 마음과 눈을 놀라게 한다. 날이 이미 저물었기에 이곳저곳을 살펴보지는 못하였다. 밤에 부들로 만든 자리에서 잤는데, 산의 달빛이 난간에 들어오니 더욱 내 몸이 청량산의 경계에 들어온 것을 깨달았다. 윗방에는 좌선하는 승려가 《금강경》을 읽고 있었는데, 그와 더불어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또한 깊은 맛이 있었다. 이 날은 25리를 여행하였고, 시 16구를 지었다.

7일 맑음.
아침을 먹은 뒤에 윗방의 좌선하던 승려가 나를 위하여 길을 인도하였다. 먼저 외청량을 향하였다. 한줄기 돌 길이 만 길 절벽의 허리 부근으로 나 있어 눈을 아래로 내려 쳐다 볼 수 없었고, 다만 등나무와 여러 나무가 아래에 가려 있어 절벽의 형세가 보이지 않은 것에 힘입어서 마음을 놓고 길을 갈 수 있다.
잠시 어풍대(御風臺)에 앉았다가 고개를 둘러 이 일대를 바라보니 봉우리가 높이 솟아 있다. 수십 걸음을 가서 벼랑을 부여잡고 올라가서 풍혈대(風穴臺)를 바라보았다. 구멍은 치원대(致遠臺)라고 부르는데, 대에는 두 개의 목판이 있다고 한다. 여기가 고운(孤雲) 최치원이 바둑을 두던 곳이다. 그 곁에는 맑은 물이 절벽 사이에서 흘러 나와 석굴에서 맴돌아 웅덩이를 이루는데 물빛이 맑고 투명하다. 세상에는 고운 최치원이 이 물을 마시고 더욱 총명해졌다고 전한다. 그러므로 총명수(聰明水)라고 부른다. 두 손으로 움켜 떠서 마시니 그 맛이 매우 시원하였다.
또 방향을 바꿔 몇십 걸음을 가니 암자가 깎아지른 절벽의 중간 정도의 틈에 자리 잡고 있고, 공전(供殿)이 그 곁에 있다. 세 개의 금불상과 16나한을 안치하고 있다. 이곳이 외청량이다. 그 가파른 바위와 기이한 돌이 별세계를 이룬 듯하다. 절벽의 위에는 돌 하나가 우뚝 솟았는데 마치 아래로 떨어지려는 것 같다. 이것을 흔들바위〔動石〕라 부른다. 승려가,
“이 돌은 한 사람이 건드리면 조금 움직이는데, 천 사람이 건드려도 그 이상 더 움직이지 않습니다. 바람이 불어도 움직이므로 그렇게 이름을 지은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암자의 뒤에는 석굴이 있는데 맑은 냇물이 물망울져 떨어진다. 승려는 나무로 절구 모양을 만들어 그것을 받아 마신다. 암자의 난간에 잠시 앉아 있으니 인간 세상이 마치 꿈과 같다. 승려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니 승려 노릇은 비록 고상하지 않으나 그 살고 있는 곳은 부러워할 만했다.
정오가 되자 길을 되돌려 찾아왔다. 오는 길에 경일봉(擎日峰)의 동쪽에 이르니 철벽(鐵壁)이 천 길이었으며 바위 굴이 입을 벌리고 있어 몇 칸의 집을 지을 만했다. 절벽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져 마치 가는 비가 내리는 것 같았다. 옛날에 작은 암자가 있어 김생(金生)이 일찍이 이곳에 은거하면서 금자(金字)로 불경을 베꼈는데, 지금도 절이 남아 있다. 그러므로 김생굴(金生窟)이라 이름지었다고 전한다. 김생은 신라 사람으로, 붓글씨로 천하에 이름을 날린 자이다. 그가 쓴 백월선사비(白月禪師碑)의 탁본이 산중에 남아 있다. 그의 붓의 기운을 배우기 바라는 중국 사람들이 찾아와서, ‘이 사람의 붓 기운은 북두에까지 뻗치니 정말 천하의 기이한 보물이다.’라고 하여 비를 뽑아 운반하다 귀성(龜城)에 이르러 비가 무거워 버리고 갔는데, 지금 귀성의 관사에 있다고 한다.
만월암(滿月菴)을 보니 자소봉(紫宵峰)의 아래에 있는데 승려가 거주하지 않았다. 백운암(白雲菴)의 옛터는 또 그 위에 있는데 그곳에 올라가는 길은 천 길의 깎아지른 절벽에 나 있어 외청량의 길보다 매우 험했다. 그러니 어찌 천금같이 소중한 몸으로 한 때의 구경거리를 보려고 위험을 헤아릴 수 없는 곳을 찾아가겠는가? 하물며 모두 이미 그 형상과 아름다움을 목도하였으니 어찌 반드시 고생을 하여 찾아간 뒤에야 통쾌한 마음이 들겠는가?
마침내 돌아와 육화암에 이르렀다. 암자의 오른쪽의 연대(蓮臺)에 서니, 연대는 그 일대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어 여러 봉우리의 진면목과 정기가 이곳에 다 모여 있었다. 대체로 이 산은 태백에서 뻗어나와 이곳에 기운이 서렸는데, 여러 봉우리가 높음을 다투니 마치 푸른 죽순이 어지러이 솟아 있는 것같다.
그 봉우리 가운데 가장 기이한 것이 12개다. 자소(紫宵), 축융(祝融), 현학(玄鶴), 탁필(卓筆), 연적(硯滴), 경일, 금탑(金塔), 연화(蓮花), 자란(紫鸞), 향로(香爐), 내장인(內丈人), 외장인(外丈人) 등이 그것이다. 대 중에 가장 아름다운 것이 12개다. 만월, 환선(喚仙), 어풍, 풍혈, 사미(沙彌), 자비(慈悲), 반야(般若), 화암(華巖), 채화(彩花), 송풍(松風), 상대승(上大乘), 하대승 등이 그것이다. 굴 중에 가장 아름다운 것은 5개다. 은신(隱身), 감성(甘成), 보현(普賢), 김생, 금강(金剛) 등이 그것이다.
대개 자소봉은 북쪽에 있는데 내산의 종산(宗山)이 되며 그 층이 아홉이다. 만월대와 환선굴, 은신굴이 이에 속한다. 옛날에는 백운, 만월, 원효(元曉), 몽상(夢想) 등 11개의 암자가 줄지어 층층의 산 위에 있었으나, 지금 남아 있는 것은 만월암 하나 뿐이며 승려도 거주하지 않는다. 그 아래는 연대이며 대의 정동쪽은 경일봉이다. 그 층은 세 개인데, 김생굴과 감성굴, 상대승대와 하대승대, 사미대가 이 산에 속한다. 옛날에는 모두 암자가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 대의 정서쪽은 연화봉으로 모양이 연꽃이 처음 피었을 때와 같다. 앞에는 줄기의 높이가 4, 5척이며 잎이 삿갓만한 육연(陸蓮)이 자라고 있다. 그러므로 그렇게 이름을 지은 것이다. 대의 정남쪽은 축융봉으로 계곡 건너편에 우뚝 솟아서 산을 향하여 공손히 읍을 하고 있다. 보현굴이 이 산에 속한다. 자소봉의 조금 서쪽은 탁필봉이며, 그 곁은 연적봉이다. 자소봉의 조금 동쪽은 자란봉이며 그 곁은 현학봉이다. 연화봉의 앞은 향로봉이며 자비대가 그 산에 속해 있다. 향로봉의 서쪽은 외청량산이며 두 석봉(石峰)이 높이 솟아 나란히 마주하고 있다. 여러 봉우리 가운데 가장 높은 것이 내장인봉과 외장인봉이다. 금강굴이 이에 속해 있다. 경일의 남쪽은 금탑봉인데, 만 길의 절벽이 주름져 삼층을 이루고 있다. 어풍대, 채화, 송풍, 풍혈, 화암, 반야가 이에 속해 있다. 옛날에 치원, 안중(安中), 극일(克一), 상하정(上淸淨), 하청정 등 다섯 개의 암자가 가운데 층에 있었는데,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하청정 한 암자뿐이고, 상청정암은 무너져서 승려가 살고 있지 않다. 이것이 그 중 큰 것으로 그 나머지의 봉우리와 대와 굴의 이름이 있고 없는 것과 암자와 절의 옛터에 대해서는 이루다 기록할 수 없다.
산의 둘레는 4, 50리를 넘지 않는데 층층의 봉우리는 모두 깎은 듯한 절벽이 다시 그 위에 절벽을 이고 있고 기이한 돌이 다시 그 위에 기이한 돌을 이고 있다. 귀신이 깎아내고 다듬은 것 같아 그 모양이 여러 가지이니 참으로 조물주가 재주를 베풀어 놓은 것 같다. 여러 암자는 깎아지른 절벽을 이고 있으니 아래에서 바라보면 다만 깎아지른 절벽만 보여 절이 있는 것을 알 수가 없다.
암자 뒤는 모두 절벽이며 암자 앞은 모두 대를 이루고 있다. 연대에서 바라보면 금탑봉은 다만 13층탑일 뿐이고, 치원대에서 바라보면 자소봉은 또한 19층의 탑으로 보일 뿐이다. 그 밖에 봉우리와 대도 걸음을 옮기면서 바라보면 면면이 모두 다르고 기이하여 실로 처음 보는 것같다.
이 산의 여러 명승지는 예전에 이름이 없었는데,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이 처음으로 하나하나 이름을 붙이고 문장을 지어 기록하였으니, 지금 부르는 이름이 그것이다. 송재(松齋) 이우(李堣)와 온계(溫溪) 이해(李瀣)가 서로 이어 이 산에 대한 작품을 작품을 남겼고, 퇴계 이황 선생에 이르러 이 산을 매우 좋아하여 젊었을 때 백운암에서 독서하면서 백운암기를 지었다. 만년에 이르러 덕을 이룬 후에는 매번 봄가을의 한가한 때에 집에 묻지도 않고 벗들에게 고하지도 않으며 초연하게 홀로 가서 몇일 동안 머물며 돌아오지 않았다. 시율(詩律)과 가장(歌章)으로 이 산을 읊은 것이 매우 많아 스스로 자신을 청량산인(淸凉散人)이라고 부르기까지 하였다. 아, 선생은 진실로 이 산의 주인이라고 부를 만하고, 우리 나라에서 이 산의 이름이 알려진 것도 선생 덕분이다. 그렇다면 산은 선생에게 비로소 크게 지우(知遇)를 입은 것이요, 오래 전 앞 시대의 최치원과 김생 때문에 사람의 입에 오르내린 것은 작은 지우일 뿐이다. 이 산 안의 봉우리 하나, 바위 한 개, 시내 하나, 돌 하나에 이르기까지 선생이 유람하며 즐겨 구경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나 지금 산은 옛모습 그대로인데 선생의 풍모는 좇을 수 없다. 가는 곳마다 바라보며 선생을 생각하니 문득 내가 선생보다 백대의 뒤에 태어나 이 산빛과 물소리 사이에서 선생을 모시지 못한 것이 한스러울 따름이다. 그러나 만 길의 높이 솟은 절벽을 바라보면 선생의 굽힐 수 없고 범할 수 없는 지조를 알 수 있으며, 깊은 골짜기에 흐르는 맑은 시냇물을 굽어보면 선생의 더럽힐 수 없고 찌꺼기가 있을 수 없는 흉중을 상상할 수 있다. 외로운 구름이 절벽에 머물러 있고, 밝은 노을이 골짜기에 깃들어 있으니 선생의 시원하고 그윽하고 뛰어난 정취가 그곳에 있다. 초목이 우거지고 이끼와 꽃은 오래된 모양을 풍기니, 선생의 순후하고 고색창연한 모습이 그곳에 남아 있다. 대개 이와 같다면 비록 선생이 살던 세대가 멀다 하여도 선생의 덕은 청량산에서 구할 수 있다. 그러니 또 어찌 반드시 뒤늦은 세상에 태어난 것을 탄식하겠는가? 연대에 앉아 박군에게 명하여 삼가 선생이 지은 청량산가를 부르게 하였다. 노래가 끝나자 외람되이 노래 한 곡을 지어 선생의 노래를 이었다. 노래는 다음과 같다.
“청량산 36개의 봉우리야. 퇴계 선생이 너와 같이 노시더니 청산은 만고에 푸르다마는 선생 어디 가신고 아마도 선생의 덕은 너와 같이 맟추리라.”
노래를 마치고 드디어 골짜기를 나와 고개를 돌리니 묵묵히 옛 사람과 작별한 듯 하였다.
숙동(宿洞) 바깥에는 큰 사찰이 있는데, 모두 네 개의 방과 누각 그리고 불전이 매우 장엄하였다. 김생이 쓴 금자불경 몇 권을 찾아보았다. 또 은자로 쓴 불경 몇 권이 있었는데, 승려가 ‘최치원이 쓴 것이다.’ 하였으나, 내가 보기에는 모두 김생의 글씨였다.
밤에 태백노인(太白老人)을 만나 태백과 소백, 두 산의 승경에 대하여 자세히 물어보았다. 이날은 불과 10여리를 여행하였고, 35구의 시를 지었다.

8일 흐리다가 저물녘에 천둥과 비바람이 침.
한가롭게 절의 누각에 누웠는데 날이 이미 정오를 넘었다. 승려가 밥을 두 번 내왔다. 드디어 시내를 따라 서쪽으로 가서 큰 강이 비껴 흐르는 곳에 당도하였다. 바로 태백 황지(黃池)의 하류이며 낙동강의 상류이다. 이곳에서 도산까지의 거리는 30리로 고산(孤山)과 단사(丹砂)도 모두 이 강가에 있다. 그러나 나의 여행은 바야흐로 태백산을 찾아가는 것이므로 이런 곳은 모두 우회하는 길일 뿐이다. 장차 돌아올 때 들러볼 계획을 하였으나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자주 고개를 돌려 바라보게 되었다.
강의 흐름을 거슬러 10리를 올라갔다. 강을 건너 서쪽으로 가서 골짜기에 들어 5리 정도를 가니 초가로 지은 절이 나왔다. 이곳은 봉화(奉化)의 경계이다. 절은 다만 두 칸 방이 있으나 누대는 자못 넓었다. 들어가 한참을 앉아 있으니 뇌우가 크게 일었다. 밤에 향로전에서 묵었다. 이날은 15리를 여행하였고 10구의 시를 지었다.

9일 흐림.
알지 못하는 어떤 손님이 아침에 누대 위에서 앉아 산수가를 부르는데 들으니 흥이 일었다. 오른쪽으로 난 소나무 그늘 아래를 따라가다가 조금 방향을 바꾸어 동쪽으로 가니 어제 건넜던 강이 나왔다. 여기서부터 길이 강과 떨어졌다 합쳤다 하는데 대개 발원지를 찾아 올라가고 있다.
10여리를 가서 인촌(鱗村)에 당도하였다. 작은 시내가 서쪽에서 잔잔하게 강으로 흘러들어간다. 시내를 따라 집이 들어섰는데, 그 땅이 농사짓기에 매우 좋아 자못 넉넉해 보였다. 대추나무가 집을 감싸고 있고 밭 가운데에도 흩어져 자라고 있는데, 많은 열매가 늘어져 가지가 버티지 못할 것 같으니 또한 별세계이다.
몇 리를 가니 석대(石臺)가 강에 맞닿아 있는데, 돌의 표면에는 ‘산은 높고 달은 작으며, 물은 떨어지고 돌돌출해 있네.〔山高月小水落石出〕’라는 여덟 글자가 새겨져 있다. 그것이 누구의 글씨인지는 알지 못하겠다.
한 모퉁이에서 방향을 바꿔 골짜기를 따라 산의 허리를 올랐다. 대개 산은 두 강의 사이에 있는데, [한 줄기는 도심(道心)에서 오고 한 줄기는 황지(黃地)로부터 온다.] 산은 매우 험준하고 물은 매우 깊다. 좌우에서 굽어보면 마음에 두려움이 느껴진다. 수월암(水月菴)이 초가로 지은 절로부터 30리 떨어진 곳에 있다는 말을 듣고 처음에는 달려가 암자에서 유숙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날이 이미 저물고 암자는 상당히 멀어 길가에 있는 어느 촌가에 들어가 묵었다. 이날은 20리를 여행하였고 11구의 시를 지었다.

10일 아침에 비가 내리다가 느즈막에 잠깐 갬.
드디어 앞으로 길을 나섰는데, 여기부터 산세가 평평하다. 좌우에 강을 낀 높은 산의 여러 갈래들이 곳곳에 전원을 이루고 있다. 석양이 산에 비춰 가시나무를 붉게 물들여 마치 그림을 보는 것 같으니 매우 마음이 흡족하였다. 5리를 가니 매우 허기가 져서 산기슭의 민가에서 먹을 것을 구하였는데 왜면(矮麵) 한 그릇을 얻어 허기를 채웠다.
계속해서 1리를 가니 많은 소나무가 울창한데, 암자가 그 가운데 있다. 바로 수월암이다. 한 낮에 절에 들어갔는데, 절은 다만 방 한 칸이고, 승려는 5, 6명에 그쳤다. 이날은 10여리를 여행하였고 12구의 시를 지었다.

11일 맑음.
일찍 길을 나서 5리를 가니 큰 농막이 나왔다. 그것은 산을 등지고 물가에 맞닿아 있는데, 바깥쪽 행랑에 들어가 오랫동안 주인인 홍씨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홍씨 집안은 대대로 현달하지 못하였지만 백 결(結)의 밭과 수백 명의 노비를 소유하여 대대로 자연에서 자손을 키워왔으니, 삼공(三公) 벼슬과도 바꾸지 않을 것이라고 이를 만하다. 강가의 대(臺)는 우뚝 솟아 있고 소나무가 꼭대기에 붙어 자라고 있다. 이리저리 노닐다가 길을 나섰다. 10리를 가서 춘양창(春陽倉)에 도착하였으니 이곳은 안동의 경계이다.
시내와 강이 합하는 곳에 정자가 날아갈 듯이 서 있다. 바로 옛날 지평(持平) 권두기(權斗紀)의 한수정(寒水亭)이다. 본래 이름난 정자로 소문이 나 있었는데, 지금 와서 보니 물길이 계단에 부딪혀 모두 무너졌다. 강가에 작은 저자가 섰는데, 박군이 나를 부평초가 자란 언덕에 앉히고 저자에 들어가 술과 포를 사와 서로 마주하면서 허기를 달랬다.
북쪽으로 7, 8리 정도를 가서 왼쪽으로 도심천(道心川)을 찾았다. 동쪽으로 5리를 들어가니 소나무와 노송나무가 하늘을 덮어 햇빛이 세어 나오지 않을 정도였다. 방향을 바꿔 수백 걸음을 가니 문득 큰 사찰이 골짜기에 있는 것이 보인다. 이곳이 이른바 각화사(脚化寺)이다. 불전은 네 개이고 승방은 여덟 개이며 누대는 30칸이다. 밤에 그중 한 방에서 묵었다. 이날은 30리를 여행하였고 11구의 시를 지었다.

12일 맑음.
이른 아침에 절 밥을 얻어 먹고 젊은 승려로 하여금 앞에서 인도하게 하여 나라의 사책〔國史〕이 보관되어 있는 곳에 올랐다. 비록 기이한 봉우리와 깎아지른 절벽이 없으나 대체로 산세가 높고 커다란 골짜기가 깊게 파여 있다. 골짜기 가운데를 따라 길을 가니 돌계단이 비늘처럼 이어져 공중에 매달려 있다. 누워 있는 소나무와 거꾸로 자라는 잣나무가 위아래로 얽어 있고 오래된 등나무와 늙은 넝쿨나무가 좌우에서 얽어 있다. 바람이 골짜기로 몰려가고 음산한 기운이 마치 어둑한 하늘과 같고, 물소리는 골짜기에서 마치 우레가 다투는 듯 은은히 들려왔다. 고요하여 귀신이 나올까 의심되고, 빽빽하여 호랑이와 표범이 나올까 두려웠다. 엄숙하여 두렵고 위풍이 당당하여 놀랄 만하였다.
10리를 올라가니 높은 전각의 단청이 구름 낀 하늘과 나무 끝 사이로 보인다. 바라보니 마치 하늘 위의 12누대와 같다. 좌우에는 2층의 누대를 지었는데, 오른쪽의 누각은 선원보각(璿源寶閣)이라 편액을 하여 나라 왕실의 족보를 안치하고 있다.
왼편의 누각은 편액이 없는데, 국사를 안치하고 있다. 곁에는 참봉이 거처하는 8, 9간의 행랑채가 있다. 한림(翰林)이 책을 말릴 때에 거처하는 별당이 몇 칸 있다. 승려가 말하기를,
“나라에
절목(節目)이 있는데 유람 온 사람을 관람을 금합니다.”
라고 하였다. 내가 승려를 시켜 참봉에게 전하기를,
“나라에서 금하는 것은 잡인을 금한다는 것이지, 어찌 보러온 유생을 금하겠는가?”
라고 하니, 참봉이 허락하였다. 드디어 들어가 보니 다른 것은 볼 만한 것이 없고, 다만 한 승려가 신을 짜고 있고 참봉은 자리를 짜고 있었다.
우러러 산의 정상을 바라보니 또한 허공 가운데 있었다. 박군으로 하여금 쇠로된 창을 가지고 앞에서 인도하게 하고 왼쪽 골짜기를 따라 갔는데 작은 길이 매우 험준하였다.
중봉(中峰)에 도달하였을 때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경상도 지방의 길이 모두 시야에 들어왔다. 승려가 말하기를,
“중봉이 이와 같이 험하니, 그 정상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드디어 용기를 내어 부여잡고 뛰어 올라 상봉(上峰)에 도달하였다. 그런데 그 위에 상봉이 또 있으니 이것이 이른바 ‘태산의 정상에 또 태산이 있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마침내 가장 높은 곳에 도달하니 비로소 시야를 가리는 것이 없었다.
올라올 때에는 만약 하늘을 계단 삼아 올라가서 우러러 봉우리의 절정이 하늘과 맞닿은 부분을 바라본다면 ‘장차 북두성도 따올 것이다.’라고 여겼는데 이곳에 이르니 하늘과의 거리가 아직도 멀다. 이에 비로소 하늘이 구만리나 길다는 것을 깨달았다.
동북쪽에는 다만 많은 봉우리와 깊은 골짜기가 땅에서 솟아 하늘에 잇닿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서남쪽은 천여 리의 산하와 70고을의 강역(疆域)이 마치 파도가 솟아오르는 것 같다. 다만 학가산(鶴駕山)의 몇 점 흰 구름이 정상에 가로로 비껴 있고 청량산의 자소봉이 주먹 하나가 불끈 솟아 있는 것 같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 산은 강원도와 경상도의 수백 리 사이에 뻗어 있고, 다만 그 한 갈래의 가장 높은 곳일 뿐이다. 전체 가운데 가장 높은 것은 오히려 백 리 밖 삼척 지역에 있으니 이름이 함박산(含朴山)이라 한다.
도심천의 근원을 눈 아래로 다 볼 수 있었는데, 황지의 근원은 이곳에서 또 백여 리 떨어진 곳에 있다. 남쪽으로 수십 리를 내려오다가 절벽을 뚫고 쏟아져 나오니 그 장엄한 물의 기세는 참으로 우리 동방의 용문(龍門)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길이 험하고 물이 깊어 몸소 탐색하지 못하니 탄식할 일이다.
박군이 따라서 상봉에 이르렀는데, 내가 용기를 내어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봉우리이다. 여기서부터는 더 이상 따라갈 수가 없었다. 드디어 수풀을 헤치고 앉아 주머니에서 엿을 꺼내 허기를 달랬다. 굽어보니 다섯 암자가 산의 좌우의 절벽에 붙어 있는데, 한줄기 저녁 연기가 나무와 칡넝쿨이 뒤섞여 있는 곳에서 희미하게 피어오르니 또한 기이한 일이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자 갔던 길을 돌이켜 천천히 내려와 서운암(捿雲菴)에서 잠시 쉬었다. 왜면 한 그릇을 먹고 큰 절로 돌아오니, 날이 이미 저물었다.
절에서 사고(史庫)까지는 10리이며 사고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까지는 또 거의 10여 리가 된다. 왕복 40리 길을 이 두 다리로 반나절에 오르내릴 수 있었으니, 뜻이 이르면 기운이 따라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으로는 산수에 대한 욕심이 발동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대체로 산은 흙이 바탕이 되는데, 아득히 넓고 우뚝 솟은 채 자리를 잡아 웅거한 것이 매우 고르지 않는데도 석각의 험준한 바위가 없으니, 실로 이것은 후중하고 덕이 있는 산이다.
중원의 대지는 곤륜산이 서쪽에 자리 잡고 있어 모든 산의 조종이 되고 남쪽의 형악(衡岳)과 북쪽의 항산(恒山)과 동쪽의 대산(岱山)과 서쪽의 화산(華山)과 중앙의 숭산(崇山)이 오악이 된다. 우리 동방에 있어서는 백두산이 곤륜산에 해당되며 북쪽의 칠보(七寶), 남쪽의 태백, 서쪽의 묘향(妙香), 동쪽의 설악과 금강, 중원의 삼각(三角)이 응당 오악이 될 것이다. 내가 일찍이 한 번 백두산의 정상을 올라 80리에 걸친 큰 못을 굽어보고 북쪽으로 칠보산을 유람하며, 서쪽으로 묘향산을 오르고, 동쪽으로 금강과 설악산을 구경한 이외에 중앙에 있는 삼각산을 올랐다. 지금 또 이 산을 바라보니 우리 동방의 곤륜과 우리 동방의 오악을 다 밟았다고 이를 만하다. 가만히 생각하니, 백두산의 웅장함은 더 논할 것이 없지만 맑고 빼어남은 금강산만 못하고 높고 우뚝함은 설악산만 못하며 기이하고 가파른 것은 삼각산만 못하며 서려 뻗혀 있는 것은 묘향산만 못하며 고요하고 궤이한 것은 칠보산만 못하며 덕을 갖춘 것은 이 산만 못하다.
청량의 단정하고 엄하며 탁 트이고 곧은 것에 대해서는 중국의 천태(天台)와 사명(四明) 등의 산과 비슷할 것이니 또한 충분히 오악의 밖에 한 명승이 될 만하다. 구구한 나의 이러한 논의는 아마 다섯 산의 신령에게 물어보아도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 아마도 나를 산수에 있어서는 마치 ‘음을 안다〔知音〕’는 경지를 허락할 것이다.
밤에 춘양(春陽)의 한 두 선비와 명승지를 노닌 것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 사람들도 역시 풍치(風致)가 많아 이군에게 노래 몇 곡을 요구하였다. 듣고 나서 크게 기뻐하여 누대 위에서 일어나 춤을 추려하였으나 곁에 상을 당한 사람이 있어 그렇게 하지는 못하였다. 이날은 시 32구를 지었다.

13일 맑음.
일찍 길을 나서 서쪽으로 방향을 바꿔 수백 걸음을 가니 낙서암(落捿菴)이 나왔다. 암자는 경치가 뛰어난 곳에 자리 잡은데다 장실(丈室)이 또 매우 밝고 정결하여 조금의 티끌도 묻지 않았으니 사람으로 하여금 만사를 그만두고 10일 동안 참선하고 싶게 하였으나 그렇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곁에는 벽허 대사(碧虛大師)의 진영이 있는데, 매우 훌륭해 보였다. 박달나무 향이 화로에서 타며 불경은 책상에 있었는데, 한 승려가 자신을 벽허의 동생이라고 소개하였다.
난간을 오랫동안 배회하다가 길을 떠났다. 도심을 거쳐 구불구불 15리를 지나니 가을볕이 쏟아지는 들판에 몇 칸의 빈 집이 있었다. 들어가 누웠는데, 한 두 선비가 찾아왔다. 스스로 말하기를,
“송재(松齋) 이우(李堣) 선생의 후손인데 예안(禮安)으로부터 산에 들어온 지 몇 년이 되었다. 처음에 산에 들어올 때 크게 빈 밭을 일구고 넓게 농토를 개간하려고 하였으나 땅이 매우 거칠어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낭패를 입고 산을 나간 자가 많았다. 지금은 몇 가옥만이 거주하고 있는데, 또한 장차 오래 지나지 않아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다.”
라고 하였다. 대체로 산천이 영기(英氣)가 없으면 땅도 거칠어서, 한 때에 자취를 숨길 수는 있지만 자손 대대로 살 터전으로 만들 계책은 없다. 옛날 임진년에 상서(尙書) 정익하(鄭益廈)의 선조가 이곳으로 난리를 피하여 와서 많은 땅을 일구었다. 난리 후에 산을 나가니 밭은 오히려 그대로 남아 있어, 그 자손이 해마다 세경을 걷었다고 전한다. 송재의 후손이 ‘이 지역의 안에 서쪽 절벽 부근 한 곳이 살 기반을 정할 수 있다.’ 하였다. 이윽고 인도하여 서쪽의 절벽에 이르러 어느 지점을 가리키고 돌아갔다. 그곳은 산수(山水)가 지형을 안고 있어 제법 안온하나 또한 그다지 기이하지는 않았다. 주막에 묵었다. 이 길은 삼척으로 통하는 곳으로 주막이 거기에 있다. 이날은 30리를 여행하였고 시 21구를 지었다.

14일 종일 많은 비가 내림.
길을 나서지 못하고 자세하게 주막 주인에게 풍토와 풍속에 대해 물어 보았다. 이곳에서 골짜기로 들어가 7, 8리나 혹 10여 리를 지나면 태백과 일월산(日月山)의 사이에 사는 사람이 무려 수백 명이나 된다. 그러나 모두 골짜기에 사는 백성인지라 알만한 이름은 한 사람도 없었다. 오직 이른바 석생(石生)이란 자만이 흙의 성질을 알고 농사의 이치를 알아 도처에 곡식을 쌓아 베풀어 주기를 좋아하고 손님을 접대하여 특별한 사람이라 일컬어졌었다. 그런데 아침 저녁으로 외는 것은 나무아미타불이니 그 사람됨을 알 수 있으나 그도 이미 죽고 말았다.

15일 맑음.
어느새 명절이 되고 보니 더욱 성묘해야 한다는 마음이 간절하다. 주막 사람이 돈을 너무 많이 요구하여 노자가 거의 떨어졌다. 명절날 한 번 배부르게 먹는 것도 마련할 수 없으니 진실로 한 번 웃고 말일이다. 서쪽으로 고개를 넘으니 순흥(順興)의 지역이다. 30리를 가니 애전촌(艾田村)이 나왔다. 88세의 노인이 있는데, 눈동자는 별과 같고 오래된 눈썹은 이마를 덮는다. 나를 맞이하여 들어가 나에게 몇 잔의 탁주를 권한다. 이윽고 이 지역의 땅값이 오르지 않아 한 두락이면 다섯 섬의 조를 수확하여 먹을 수 있는데 값은 15관을 넘지 않는다고 한다.
방향을 바꿔 한 모퉁이를 들어가니 골짜기가 조금 열려 있고 가운데에 초가집이 있다. 8, 9개의 큰 돌이 우뚝 솟아 있는데 작은 소나무가 덮고 있다. 올라가니 한 지역의 전원을 굽어볼 수 있다. 마침내 산기슭의 초당에 들어가니 책이 시렁에 가득한데 김 진사의 집이라고 한다. 그 아버지와 동생이 나와서 맞이하여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책상에는 《사례문답(四禮問答)》 두 권이 있으니 바로 학사(鶴沙) 김응조(金應祖) 공이 편집한 것으로 바로 주인의 방조(傍祖)가 된다. 학사의 여덟 형제 가운데 다섯은 크게 현달하였고 셋은 작은 성취를 보였다. 학사는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문인으로 벼슬이 우윤(右尹)에 이르렀고, 학문도 천박하지 않았다. 그 책의 발문은 바로 소호(蘇湖) 이대산(李大山)이 지은 것이다. 읽어보니 이름에 걸맞지 않는 헛된 선비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내가 주인에게 말하기를,
“선경(仙境)이 그윽하고 고요하여 실로 이웃이 되어 살고픈 소망이 있으나 골짜기가 너무 좁아 아마도 나눌 만한 밭이 없을 것 같으니, 이것이 탄식할 만한 일입니다.”
라고 하니, 주인이 말하기를,
“땅은 비록 좁으나 나의 이웃이 되고 싶다면 어찌 나눌 만한 밭과 토지가 없겠습니까? 이곳의 좋은 논은 한 해에 3, 4섬의 곡식을 거둘 수 있는데 값은 20관에 지나지 않습니다.”
라고 하였다. 노인의 말에 비하면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또한 이 지역의 땅값을 미뤄 헤아릴 수 있다.
서쪽으로 5리를 들어가니 수목이 하늘을 덮고 누각이 구름 속으로 들어가니 이곳이 부석사(浮石寺)이다. 절은 모두 9층의 석대로 높이가 5, 6길이며 너비는 7, 80보 정도이다. 매 층에 전각을 설치하였다. 큰 길을 따라 들어가면 처음에는 일주문(一柱門)이 있고 그 다음에는 조계문(曹溪門)이 있으며, 좌우의 벽화에는 문수보살이 대중을 타고 있는 형상이 있다. 흥복료(興福寮)가 그 곁에 있고 그 다음에는 회전문(回轉門)이 있다. 좌우에는 사천왕상을 안치하고 있는데, 상이 매우 엄하게 보이니 실제로 다른 절에서는 보지 못한 것이다. 다음에는 범종각(梵鐘閣)이 있는데 쇠종을 매달았다. 종의 둘레는 몇 아름이어서 울리는 소리가 매우 장엄하다. 다음에는 안양문(安養門)이 아득히 구름과 하늘 끝에 있다.
임진년에 중국 장수인 이여송(李如松) 제독이 올라와 보고는 말하기를,
“악양루(岳陽樓)에 뒤떨어지지 않는다.”
라고 하였다.
위에는 불전(佛殿)이 있는데 가장 웅장하고 아름답다. 커다란 부처는 동쪽을 향하여 앉아 있다. 이것은 대개 서쪽에서 왔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 곁에는 미타전이 있는데 벽에는 8층의 금부처를 걸어 놓았다. 그 앞에는 취원루(聚遠樓)가 있다. 이것은 높은 층 가운데서도 가장 높은 누각이다. 눈앞이 탁 트여 아득하여 그 끝이 없다. 대개 풍기, 순흥, 영주, 안동, 예천, 용(미상) 등 8, 9개 고을의 산하가 손바닥의 모양처럼 보인다.
앞에 가로로 어긋나 있는 것은 안동의 학가산으로 안산(案山)이 된다. 그 밖의 봉우리들로 구름처럼 노을처럼 학가산의 밖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것은 어느 지역에 속한 것인 줄을 알지 못하겠다. 이곳에 이르러 부석사 부근의 빼어난 경치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네 개의 문 좌우에는 모두 승방(僧房)이 있다. ‘사지(寺誌)’를 살펴보니, 당(唐)나라 의봉(儀鳳) 원년(676년, 신라 문무왕 16년)에 의상조사(義湘祖師)가 왕명으로 이 절을 창건하여 부석사라고 이름을 지었다. 혹자가 말하기를,
“터를 고르는 날에 돌이 떠서 신령함을 나타내는 기이한 현상이 있었다. 그러므로 부석이라 이름을 지었다.”
라고 하고, 다른 이는,
“절의 가까운 지역에 떠서 날아가려는 형상을 가진 돌이 있었다. 그러므로 그렇게 이름을 지었다.”
라고 한다. 가장 위에 있는 불전은 무량수전(無量壽殿)의 네 글자 [금으로 쓴 글자]로 현판을 달고 있으니, 고려 공민왕(恭愍王)의 글씨이다.
전각의 계단 아래에는 땅에 솟아난 돌이 있는데 고기의 꼬리 형상을 하고 있다. 이 기반은 용혈이 되는데 용의 전체는 불좌(佛座)에 들어가 있고 아래의 꼬리는 계단 아래에 보이는 것이다.
앞에는 식사정(食沙井)이 있는데, 깊이는 4, 5길이다. 위에는 작은 모래 언덕이 있는데 절을 지을 때에 신룡의 이적이 있었다. 의상이 비구로 하여금 경주(慶州)의 유사(流沙)를 취하여 와 한 곳에 모아 언덕을 이루어 용의 먹이로 삼았다고 한다.
왼쪽에는 선비정(仙妃井)이 있는데 한 선녀가 물을 길어 의상에게 아침저녁으로 제공하였다. 그러므로 선비로 이름을 지었다. 매번 입춘에 물이 차고 빠지는 것으로 풍흉을 점친다고 한다.
무량수전에서 동쪽으로 백여 걸음을 올라가면 조사전(祖師殿)이 있는데, 의상의 화상(畵像)을 안치하고 있다. 문 밖의 처마 아래에는 네 가지의 푸른 나무가 계단 위에 서 있는데 이름을 선비화(仙飛花)라고 한다. 의상이 입적할 때 평소에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처마 아래에 심으면서,
“내가 세상을 떠난 뒤에 이 지팡이가 다시 살아나면 내가 윤회하여 세상에 태어난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라고 하였는데, 수십 년 뒤에 지팡이에 과연 가지가 났다. 가정(嘉靖) 무술년(1538년, 중종 33년)에 일제히 꽃이 말랐다가 을해년 봄에 이르러 다시 새로운 가지가 나왔다. 광해군 때에 정조(鄭造)가 경상도 관찰사가 되어 그 신령하고 기이함을 탐내어 한 가지를 잘라 갔다. 그 뒤에도 예전처럼 다시 가지가 났다고 한다. 대개 처마 아래에서 천년 동안 비와 이슬의 은혜를 받지 않고 말랐던 것이 다시 살아 푸르고 길게 자란 것은 매우 기이한 일이다. 무량수전의 네 벽에는 고산(孤山) 황기로(黃耆老)가 쓴 시 한 수가 적혀 있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一樹桃花一半空(일수도화일반공) 한 그루 복사꽃이 허공에 피어서는
不堪狼藉梵王宮(불감낭자범왕궁) 절에 가득 꽃잎 나려 내 심사 못견디는데,
山僧閑把靑鸞尾(산중한파청란미) 산승은 한가로이 대빗자루 잡고서
背却東風掃落紅(배각동풍소낙홍) 동풍을 등지고 떨어진 붉은 꽃잎 쓸고 있네.

필획이 완연히 용과 뱀이 꿈틀거리는듯 힘이 넘친다. 다만 몇 글자는 산의 아이들이 깎아내어 읽을 수가 없다. 밤에 동이방(東二房)에서 잤다. 미리 취원루에서 일년 가운데 가장 밝은 달을 감상할 것을 기대하였는데 구름이 짙게 끼어 밤새도록 흩어지지 않아 마침내 멋진 감상의 기회를 잃어버렸으니, 한스럽다. 이날은 40리를 여행하였고 시 46구를 지었다.
16일
아침에 승려가 먹는 밥을 먹었다. 서남쪽으로 10리를 가니 암자 위에 미륵당(彌勒堂)이 있다. 또 20리를 가서 넘어진 다리를 건넜다. 문득 왼쪽에 푸른 산이 희미하게 솟아 있고 푸른 시내가 곁에 흐르고 있다. 소나무와 노송나무가 울창한데 가운데 붉고 푸른 건물이 있다. 물으니 바로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라고 한다.
서원의 바깥에 경렴정(景濂亭)이 있는데, 정자에는 신재 주세붕과 퇴옹 이황의 퇴어시(退漁詩)가 있다. 정자는 계곡 옆에 있으니 물소리가 시원하다. 그 너머 암석에는 백운동 세 글자가 새겨져 있고, 그 아래에는 또 경(敬)자가 새겨져 있으니 퇴옹의 글씨이다.
강당에 들어가 재임(齋任)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밥을 먹은 뒤에 또 경렴정 주위를 거닐면서 판상의 운자를 차운하여 시를 지었다. 정자의 서쪽에 우뚝 솟아 있는 것은 부용대(芙蓉臺)이다. 동쪽의 소나무 그늘 아래에 돌이 울퉁불퉁하게 펼쳐져 있는 것은 취한정(翠寒亭)이다. 모두 퇴옹이 이름을 지은 것이다. 밤이 깊어 달이 밝아 그 맑은 기상을 형용하기 어렵다. 자못 잠을 이루기 힘든데 마침 풍기 사람과 베개를 나란히 하고 소백산 아래의 풍토와 농사, 누에 키우는 절차에 대하여 자세히 물어 보았다. 이날은 30리를 여행하였고 시 27구를 지었다.

17일 맑음.
서원은 문성공(文成公) 안향(安珦)을 주벽으로 삼고 안축(安軸)과 안보(安輔)를 종향한다. 문성공은 안동부의 남쪽 5리 쯤에서 태어났는데, 유허비가 있다. 고려 원종(元宗) 때에 중국에서 임금을 모셨으며 벼슬이 중찬(中贊)에 이르렀다. 동쪽으로 돌아와서 비로소 국학을 창건하여 인재를 받아 들여 학궁에 모았다. 대개 우리 동방이 오랑캐에서 변하여 중화가 된 것은 모두 그의 덕분이다. 명종조에 신재 주세붕이 풍기 군수(豐基郡守)가 되어 이곳에 서원을 세웠다. 이곳은 옛 유허지에서 15리의 거리에 있는데, 이곳에 서원을 세운 것은 자연의 경치가 뛰어나기 때문이다. 퇴계 이황 선생이 이런 뜻을 이어 백록동 고사(白鹿洞故事)를 모방하여 조정에 청하니 특별히 명종이 손수 소수서원(紹修書院) 네 글자를 써서 준 은혜를 입어 편액을 달았다. 또 경적(經籍) 천여 권을 역말에 명하여 운송하게 하였다.
대개 우리 동방 학교의 설립은 문성공에서 시작되었고 우리 동방 서원의 시작은 이 서원에서 시작하였다. 강당에 임금이 내린 편액을 걸어 두었고 곁에는 두 재(齋)가 있는데, 직경(直敬)과 동몽(童蒙)이다. 지락정(至樂亭)은 앞에 위치하여 물가에 맞닿아 있으니 매우 맑고 빼어나다. 강당 밖에 한 칸 집을 지어 공자의 화상(畵像)과 문성공과 신재의 진영을 안치하였다. 내가 두건과 재복을 갖춰 입고 사당에 들어가 공경히 배알하였다. 다시 강당의 벽에 진첩(眞帖)을 설치하고 먼저 사배례(四拜禮)를 행하였다. 당에 올라 공자의 화상을 살피니 한 폭의 가운데 칠십 제자를 안배하여 그렸으니 기술이 정밀하여 입신의 경지에 들었다 할만하다. 그림 위에 글을 쓴 것이 있는데,
“하늘도 아니고 땅도 아니라 도는 중(中)에 갖추어졌고, 요임금도 아니고 순임금도 아니지만, 공덕은 무궁하였네. 사람이 알지 못하는 도리를 깨달아 실지로 시행하여 이루었으니 이것이 우리 도의 처음과 끝이네. 이른바 하늘이 내놓은 큰 성인이시니 오호라 참으로 그럴진져. 진왕(晉王)이 찬하였다.”
라고 하였다. 또 다른 글에는,
“원기가 정밀하게 모여 성인의 지혜를 옥같이 이루었네. 천지의 문명과 일월의 밝음은 제왕의 모범이며 고금의 법이네. 덕은 만대에 높고 도덕은 육경(六經)에 드러나네. 촉왕(蜀王)이 찬한 것이다.”
라고 되어 있다. 문성공은 얼굴이 네모진데 아래가 넓으며, 수염과 머리칼은 듬성듬성 나 있는데 매우 길고 아름답다. 신재는 얼굴이 좁은데 눈은 크며, 수염이 많다. 소홀하나마 예를 마치고 다시 경렴정에 올랐다.
정자 아래에 담(潭)이 있다. 재임의 말로는 ‘서원이 있는 곳은 일찍이 절터였는데 절을 허물고 서원을 지을 때에 불상을 담에 던졌다. 서원에 거하는 여러 학생들은 마귀를 꾸고 병에 걸린 자가 많았다. 그런데 퇴계 선생이 담의 돌에 경(敬)자를 쓴 다음부터는 마귀가 감히 꿈에 나타나지 않았다.’ 한다. 재임은 영남의 이름난 선비인 황우한(黃右漢)의 조카인데, 이름은 잊어버렸다.
금성대군(錦城大君)의 사당이 서원의 서쪽 5리에 있다는 것을 들었다. 서원으로부터 남쪽으로 5리를 내려가면 순흥부(順興府)이며, 시내를 따라 남쪽으로 30리를 가면 영천(榮川)이다. 그 사이의 산천은 거칠지 않고 구불구불하며 곳곳마다 밝고 아름다워 마을이 모두 사람이 거처할 수 있는 곳이다. 부의 남쪽 주막에 투숙하였다. 이날은 35리를 여행하였고 시 19구를 지었다.

18일 맑음.
‘청량지(淸凉誌)’에, ‘백월선사비(白月禪師碑)가 귀성의 객사에 있다.’ 하였는데, 귀성은 곧 영천의 옛 이름이다. 드디어 객사를 방문하니 과연 거기에 있었다. 별도로 작은 전각을 지어 비를 덮었다. 비의 높이는 10척이며 넓이는 6척 정도 되었다. 글자의 획은 마모되지 않았다. 첫 번째 줄에 쓴 글은,
“신라국의 국사로 시호가 낭공대사(朗空大師) 백월 서운(棲雲)의 탑비명이며 병서(竝序)한다. 한림학사(翰林學士) 수 병부 시랑(守兵部侍郞), 지서서원(知瑞書院) 사금자어대(賜金紫魚袋) 신(臣) 최인곤(崔仁滾) 교서를 받아 찬하고 김생이 글씨를 쓰며 승려 단상(端相)이 모았다.”
라고 하였다. 그 필획이 정밀하고 강건하여 보물로 삼을 만 하였으므로 탁본을 하려고 하였으나 상황이 어쩔 수 없었다. 객사의 곁에는 연지(蓮池)가 있는데, 연못에 임하여 쌍청당(雙淸堂)이 서 있다. 매우 맑고 깨끗하다.
오후에 비로소 길을 나서 예안(禮安)으로 향하였으니, 도산을 보고 싶어서였다. 길에서
동도(東都) 불국사의 승려를 만나 동행하였다. 그가 자세하게 계곡의 후미진 암자의 승경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였는데, 듣다보니 돌연 길을 가는 피곤함을 잊어버렸다. 길은 어지러운 산 가운데로 나 있어 여러 번 길을 잃어버렸다. 날이 저물어 민가에 투숙하였다. 이날은 20리를 여행하였으며 시 18구를 지었다.

19일 맑음.
일찍 밥을 먹고 산의 골짜기를 따라 길을 나섰다. 이미 큰 길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을 만나지 못하였다. 갈래길이 어지러이 뒤섞여 향할 곳을 알지 못하겠다. 정오에 오천(烏川)의 주막에 도착하였다. 밥을 사서 먹고 또 20리를 갔다. 길을 잘못 들어 깊은 골짜기 가운데 빠졌는데 날이 이미 저물었다. 이틀에 걸쳐 길을 잃었으므로 노고가 매우 심하였다. 박군이 화를 내면서 말하기를,
“도산을 한 번 보는 것이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수고스러움을 살피지 않아 이런 지경에 이른 것이 아니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모든 일이란 어려운 만큼 통쾌함도 큰 법이네. 이처럼 길을 잃은 괴로움이 없었다면, 장차 어찌 길을 얻는 즐거움이 있겠는가? 그러니 우리들이 도산을 보기 전에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이 당연하네. 좁을 길 구불구불한 길에서 넘어지고 거꾸러지다가 한 번 도산을 보고 이황 선생의 도(道)를 얻으면 탄탄한 길이 앞에 있는 것과 같아 막힘이 없이 탁 트일 것이네. 그 즐거움이 응당 어떠하겠는가?”
라고 하였다. 마침 의관을 갖춰 입은 선비 두세 명을 만나 도산이 있는 곳의 방위를 물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바로 선생의 8대손이었다. 자세하게 길을 가리켜주면서 이어 바야흐로 상(喪)을 만나 장사 지낼 산을 구하여 이곳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날이 이미 저물었는데, 온혜촌(溫惠村)이 나왔다.
이곳에서 도산까지는 아직도 10여 리 거리였다. 해가 저물고 다리의 힘이 다하였는데, 장차 가까워오는가 아니면 아직도 멀었는가 하고 의심할 때에 문득 만난 선생의 자손이 우리 뒤에서 와 말에서 내려 맞이하면서,
“그대가 도산을 방문하려고 하였으니 우리들은 당연히 주인이 된다. 마침 빈 말이 있으니 타십시오.”
라고 하였다. 내가 드디어 말에 올라 동행하여 온계(溫溪)의 입구에 도착하였다. 그 사람이 손가락을 돌려 뒷산의 묘지를 가리키면서,
“이곳은 우리 퇴계 선생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모신 산이며 그 아래에 큰 집은 바로 선조가 태생한 곳입니다. 옛날에 이 지역은 개간되지 않아 수목이 하늘에까지 자랐는데, 한 승려가 지나면서 이 산을 가리키며 ‘어느 곳에 묘를 쓸 수 있고 어느 곳에는 집터를 잡을 수 있다. 그렇게 하면 반드시 대현(大賢)이 태어날 것이다.’라고 하여, 마침내 한결같이 승려의 말을 따라 묘를 쓰고 집을 지었습니다. 그 뒤에 이황 선생이 과연 이 터에서 태어났습니다.”
라고 하였다. 내가 비록 풍수의 술을 알지 못하지만 그 뒷부분 용(龍)에 해당하는 산의 기운이 성하게 모인 것과 무덤의 단정하고 오묘하고 시원한 것은 거의 일찍이 보지 못한 것이다.
시내의 남쪽에는 서원이 있는데, 선생의 아버지 찬성공(贊成公) 이식(李植), 삼촌 송재(松齋) 이우(李堣), 형
대헌(大憲)[이름이 이해(李瀣)이다.] 공을 모시고 있다. 날이 저물어 작은 고개를 넘으니 갑자기 가로로 흐르는 큰 강이 눈앞에 나타난다. 푸른 숲이 울창하니 이곳이 도산인 것을 알 수 있겠다. 골짜기 아래 작은 대 위에는 비를 세워 놓았는데, ‘석간대(石澗臺)’ 세 글자가 새겨져 있다. 선생은 매번 암서헌(巖棲軒)에서 손님을 보내면서 여기까지 이르렀다. 그러므로 뒷사람이 표시한 것이다. 겨우 서원의 골짜기 입구에 이르자 날이 어두워 길가는 사람을 구분할 수 없었다. 그 어른이 서원의 노비를 불러 나를 맞이하여 들어오게 하면서,
“우리들이 마땅히 손님과 함께 자야하는데 바야흐로 집안 형의 상을 당하여 장사를 지내기 전이라 공당(公堂)에 오를 수 없습니다. 그대는 반드시 이 노비를 따라 재(齋)에 들어가 이틀을 주무신 다음에 떠나십시오.”
라고 하였다. 드디어 서로 읍을 하고 뱃사공을 불러 강을 건너 떠나갔다.
집은 저쪽 너머 의인촌(宜仁村)에 있다. 들어가 재임을 보니 또한 선생의 8대손으로 이름은 구현(龜玄)이다. 대접을 공손하게 해주었다. 밤에 함께 잤다. 이날은 60리를 여행하였으니 대개 길을 잃어 20리 가까이를 돌았다. 시 25구를 지었다.

20일 맑음.
일찍 일어나 세수하였다. 강당의 북쪽 벽에 전교당(典敎堂)이라는 편액을 걸었으며 오른쪽에는 경의재(敬義齋)라고 편액을 하였다. 재직(齋直)으로 하여금 앞에서 인도하게 하고 먼저 암서헌으로 갔다. 완락재(玩樂齋)라고 편액을 하였는데, 당(堂)의 방이 모두 8척을 넘지 않았다. 선생이 당시에는 오히려 그 크고 넓은 것을 감탄하였으니 그 검소한 덕을 알 수 있다.
청려장과 벼루 갑이 있었는데 벼루는 잃어버렸다. 시렁 위에는 선기(璿璣)와 옥형(玉衡)의 여러 기구가 흩어져 있고 삼의(三儀)는 모두 파괴되어 있다. 원래 기륜(機輪)의 도구는 설치하지 않았으니 당시에 또한 처음 만들어 모양을 본 뜬 것임을 알 수 있다.
뜰의 아래에 시원한 우물이 있는데 돌로 네 주위를 쌓았다. 이 물은 선생이 마시던 것이다. 또 작은 샘이 있는데 산 위에서 시원한 우물의 왼쪽으로 흘러들어가니, 이른바 몽천(蒙泉)이라는 것이다. 샘의 왼쪽에는 절우사(節友社)가 있고 또 몽천재(蒙泉齋)가 있다. 편액을 시습(時習)이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선생의 문인인 정사성(鄭士誠)의 아버지가 사성을 위하여 지은 것이다.
동쪽으로 방향을 바꿔 수십 걸음을 가면 강가에 맞닿아 대가 있으니 바로 천연대(天淵臺)이다. 천연이란 두 글자가 벽에 새겨져 있다. 강을 건너 남쪽 가에는 돌이 흐르는 강물 사이로 조금 보이니 이른바 반타석(盤陀石)이다. 그 아래는 옛날에 탁영담이었는데 지금은 물길이 전부 변하여 못은 없어졌다. 서쪽 가장자리 열 몇 걸음의 거리에 강가에 맞닿아 대가 있으니, 운영대(雲影臺)이다. 이것은 모두 선생이 이름을 짓고 소요하면서 스스로 즐기던 곳이다. 가는 곳마다 상상을 하니 마치 푸른 산과 푸른 물결 가운데서 선생을 보는 것 같다. 옛날 우리 명종 임금이 끝내 선생을 조정에 모시지 못하자 다만 그림 속의 강산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비록 현인을 좋아하는 성덕(聖德)을 우러러 볼 만하나 또한 천고의 한이 된다.
밥을 먹은 뒤에 재직을 따라 서원의 뒷산을 넘어 북쪽으로 5리를 가니 퇴계촌이 나왔다. 산 아래 물가에 열 두어 칸의 빈 집이 있으니 바로 선생의 손자인 안도(安道)가 지은 것이다. 시내를 올라가 동족으로 오십 걸음을 가니 문이 나왔는데, ‘퇴계선생구택(退溪先生舊宅)’이라는 편액을 하고 있다. 그 안에 들어가니 한 헌(軒)이 있는데, ‘해동고정산남관리(海東考亭山南闕里)’라는 편액을 하고 있다. 또한 ‘도학연원방(道學淵源坊)’이라는 편액도 걸고 있다. 또한 명도안락정시방벽부선생사시음시(明道安樂亭詩房壁付先生四時吟詩) 및 도학연원(道學淵源) 10구를 써 놓고 있다.
또 그 안에는 한서암(寒棲菴)이 있으니 곧 선생이 평생을 거처하신 곳이자 돌아가신 곳이다. 책상과 시렁은 완연히 어제와 같은데 다만 빛의 그림자가 흔들거리는 연못은 빈터가 되어 폐해졌으며 매화와 버들이 자란 길은 잡초가 우거졌다. 잡초는 뜰에 침범하였고 담장은 바깥으로 무너졌다. 고색창연하게 늙지 않은 것은 오직 탄금석(彈琴石)이니 옛날의 등암(藤巖)이다. 이것은 참으로 선생의 고택인데 자손이 가꾸지 않아 문득 황폐해진 마을의 빈집이 되었으니 매우 탄식할 만하다.
걸어서 시냇가 입구로 내려오다가 또 선생의 집과 무덤이 길 옆과 가파른 봉우리의 위에 있는 것을 보니 올라가 절을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다. 그러나 어제 길을 잃고부터 피곤하고 목에 병이 크게 나서 억지로 하기가 어려웠다. 다만 길에 돌아서서 우러러 바라볼 따름이다. 이곳은 월천(月川) 조목(趙穆)이 소유하던 땅으로 산세가 매우 높아 온계 이해의 묘가 밝고 오묘한 지역에 자리잡은 것만 못한 듯하다. 내가 이미 힘을 다해 이곳에 이르러 선생이 탄생하신 집과 거처하던 방과 생을 마쳤던 당을 보았으며, 또 선생의 묘지를 보았으니 선생의 시종(始終)을 다 보았다고 할 만하다. 그러나 아직 보지 못한 것은 선생의 도이다. 아아, 우리 동방은 천년 동안 문명이 없는 적막한 땅이었는데 포은 정몽주가 고려 말에 도학(道學)을 일으켜 길재에게 전해주었다. 길재는 김숙자에게 전해 주었고 김숙자는 그 맏아들인 점필재 김종직에게 전해 주었다. 점필재는 한훤 김굉필, 일두 정여창에게 전해 주었고 한원은 정암 조광조에게 전해 주었다. 이언적은 또한 그 당시에 영남에서 우뚝 솟은 선비이다. 퇴계 선생은 정암과 회재 이언적에게 비록 학문을 전수받지는 못하였지만 또한 사숙하였다고 이를 수 있다. 그러나 포은은 저술을 살펴볼 만한 것이 없으며 야은 길재와 강호 김숙자는 다만 절의와 선행을 서로 전하였다.
점필재가 평생에 힘쓴 요점은 문장에 있었으며 한훤과 일두는 돈독하게 의를 행하였으나 학문에는 아마도 부족한 점이 있다. 정암은 재주와 국량이 참으로 임금을 도울 인재로 성현을 배웠으나 하늘이 우리 동방에 복을 주지 않아 학문이 그 양을 채우지 못하여 화가 이르고 말았다. 회재는 하늘이 낸 재주로 학력도 또한 얕지 않으나 오히려 율곡 이이의 기롱을 면치 못하였다. 화담 서경덕이 자부함이 너무 지나쳐 기(氣)를 이(理)로 여긴 것과 남명 조식이 기이함을 숭상하고 고원한 것을 힘썼으나 기의 분수(分數)를 면치 못하였으니, 성문(聖門)의 바른 길로 판단한다면 마침내 어떨지는 알지 못하겠다. 오직 우리 선생은 지식과 행동이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아 경의(敬義) 두 방면에 조예를 이루어 묵묵히 스스로 수양하였으며 겸손함으로 스스로 처신하여 평생동안 세상을 놀라게 하는 이야기와 남에게 뽐내는 이론을 만들지 않았다. 그러나 그 마음을 다잡는 정밀함은 귀신도 능히 그 경계를 엿볼 수 없으며 그 의리에 처하는 엄정함은 맹분(孟賁)과 하육(夏育)도 그 지조를 뺏을 수 없다. 학문이 깊고 쌓인 덕이 두터워 온 몸에 학문과 수양의 깊이가 드러났다. 아아, 선생은 참으로 학문을 좋아하며 우리 동방의 여러 선비의 덕을 모아 크게 이룬 분이라 할 수 있다. 선생으로 하여금 공자의 칠십 제자의 반열에 노닐게 한다면 아마도 안자와 민자건의 덕행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미천한 나의 이 말이 비록 조상의 나이를 비교하는 일에 가까운 경박한 일이어서 백세(百世) 동안 그것이 죄가 될 것임을 안다. 그러나 아마도 나만큼 공자를 공경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아아, 선생의 문장은 읽을 때에 맛이 있고 읽고 난 뒤에 더욱 맛이 있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리하여 몇 달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아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으로 취하게 하고 정신이 녹아들게 만든다. 마치 봄날의 바람을 맞는 것이나 부드러운 막걸리를 마셔 훈기가 돌게 만드는 것과 같으니, 어찌 선생의 말이 천년의 뒤에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이 한결같이 이와 같지 않겠는가? 아아, 우리 선생이 계시지 않았다면 내가 누구를 귀의처로 삼겠는가?
강을 건너 5리를 가서 도산으로 돌아왔다. 물을 건너면서 도산의 지역을 두루 바라보니 마치 그림 가운데 있는 것 같다. 대개 도산은 자연의 아름다운 경치를 지녔으나 형세가 촉박함을 면치 못하였으며 퇴계(退溪)는 숲과 샘의 승경을 갖추었으나 골짜기가 협착한 것을 면치 못하였다. 그러나 지역은 비로소 사람을 만나 뛰어나게 되니 또한 만나는 행과 불행이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도산의 하류에 농암(李聾巖) 이현보(李賢輔)의 애일당(愛日堂)이 있다. 농암은 퇴계가 살았던 이곳의 자연에서 배를 타고 오르내리며 바람부는 새벽 달뜨는 저녁에 어부사(漁夫詞)를 노래 부르면서 스스로 즐기었다. 앞에는 팔인정(八印亭)이 있는데, 세상에서는 ‘농암이 다섯 아들과 세 딸을 두었는데 자식과 사위가 모두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나아갔다. 하루는 애일당에서 농암의 장수를 기원하는 잔치를 베풀었는데 자식과 사위 여덟 사람이 모두 뜰의 나무에 인장을 걸어놓았다. 그래서 지금 이름을 지어 팔인정이다.’라고 전한다. 곁에는 서원이 있는데 선생을 배향한다. 고을 사람들이 바야흐로 한 달 가운데 제일 나중의 정(丁)이 들어가는 날을 만나 입재(入齋)를 하고 있다. 동쪽으로 20리를 가서 옹곡점(甕谷店)에 도달하였으나 비좁아서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산 기슭의 양반 집에 투숙하였다. 주인이 ‘선생의 9대손이다.’라 하였다. 자세히 조상의 옛이야기를 말하였는데 또한 들을 만하였다. 더불어 함께 잤다. 이날은 30리를 여행하였고 시 84구를 지었다.

21일 맑음.
밥을 먹은 뒤에 길을 나서 장갈령(長葛嶺)에 도달하였다. 고개는 그렇게 높지 않으니 예안과 영양 두 고을의 경계이다. 어제 길에서 한 선비를 만났는데, 스스로 영양에 거주한다 하였다. 그런데 오늘 또 고개 위에서 만났다. 그 사람의 이름은 김경태(金慶泰)로 내가 피곤한 것을 보고 매우 걱정을 하여 말을 빌려 주었다. 15리를 가니 날이 이미 저물었다. 그 사람이 말하기를,
“우리 집이 이곳에 있으니 하루 묵고 가시는 것도 무방합니다.”
라고 하였다. 이윽고 그가 타던 것을 빌려주고 또 유숙하기를 청하니 진실로 감동하였다. 드디어 그를 따라 서쪽으로 들어가니 푸른 절벽 아래 푸른 못가에 매우 고요한 정자가 있다. 그의 아버지가 의관을 차려 입고 나와 나를 맞이하였다. 책상 위에는 《물암집(勿菴集)》이 놓여 있다. 물암은 바로 퇴계의 고제(高弟)로 삼로당(三路堂)의 후손인데, 주인의 5대조이다. 그 강의록이 지극히 정밀하여 크게 탄복하였다. 이대산(李大山)이 그 책머리에 서문을 지었다.
어두워진 뒤에 암대(巖臺)의 아래를 소요하였다. 주인이 밤에 장황하게 선조의 옛일을 이야기 하였다. 듣고서 그 집안이 효성스럽고 우애하며 문헌의 전통이 있는 것을 알았으며 그가 앉아 있는 모습에서 고요하고 맑은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물암의 휘는 융(隆)이며 삼로당의 휘는 이음(爾音)으로 두 사람 모두 영천의 삼봉서원(三峰書院)에 배향되었다고 한다. 주인의 이름은 현룡(顯龍)이다. 이날은 30리를 여행하였고 시 17구를 지었다.

22일 맑음.
주인이 또 말을 빌려 주어 타고 큰 고개를 넘었다. 고개는 매우 높아 내외가 10리는 되었다. 잠시 고개 위의 나무 아래에서 쉬었다. 김경태는 깊은 숲 안으로 들어가 산열매를 따왔다. 서로 마주하니 흥이 일었다. 드디어 말을 돌려 작별하고 가니 아쉬움이 남는다.
고을을 지나 25리를 갔다. 이곳으로부터는 갈 때의 길을 뒤밟으며 온다. 창포원(菖蒲院)에서 투숙하였는데, 갈 때 지은 시 ‘한 곳에 구름이 나무에 모이고, 고요하고 그윽하여 은자가 사네.〔一處攢雲樹 窈窕幽人居〕’는 바로 이 고을을 가리킨 것이다. 그러나 대개 갈 때에는 다만 외면의 그윽하고 조용한 것을 보았는데, 지금 그 집에 투숙하여 그 주인을 보니 소 키우며 잠방이 입고 물살이 거센 마을의 백성으로 은자라고 이르기 힘들다. 이에 비로소 외면적인 아름다움은 쉽고, 내면적인 아름다움은 어렵다는 것을 알겠다. 남녀가 힘을 써서 가을 농사가 잘 익어 베고 거둬들여 이고 지고 오면서 서로 바라보고 웃는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니 즐거움이 그 안에 있다. 만리 타향에서 떠돌아다녀 집안의 동산의 즐거움이 없는 자에 비교하면 어떠하겠는가? 더욱 부러움이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을 감당하지 못하겠다. 이날은 40리를 여행하였고 시 14구를 지었다.

23일 맑음.
일찍 길을 나서 갈 때의 큰 고개를 넘어 백곡(栢谷)에 도달하였다. 길에서 종장(宗丈)을 만나 초당에 들어가 막걸리를 마시면서 유람한 이야기를 하였다. 골짜기를 나와 15리를 가서 인동(仁洞)의 종가집에 도달하여 유숙하였다. 종가집 사람은 나와 나이가 같은데, 여섯 아들을 두었다. 넷은 이미 관을 올려 장가를 들었으며 둘도 또한 머리가 우뚝하니 모두 빼어난 자질로 글을 읽으니 복 있는 사람이라고 부를 만하다. 이날은 40리를 여행하였고 시 5구를 지었다.

24일 흐리다가 저녁에 비가 내림.
주인이 비가 온다고 만류하였다. 한 달 동안 자식을 떠나 있으니 문득 송아지를 잃어버린 소와 같다는 생각을 금할 수 없었다. 비를 맞으면서 길을 나섰다. 날이 저물어 재사(齋舍) [곧 옥봉재사(玉峰齋舍)이다.]에 도착하였다. 아들이 나와서 맞이하였고 맏손자가 들어와 절을 올렸다. 옛날과 변함없이 고향에 돌아왔는데 비로소 수십일만에 돌아온 것이 객 가운데 객이 된 것을 알겠다. 이날은 30리를 여행하였고 시 13구를 지었다.

이번 유람은 23일이 소요되었고 왕복 680리의 길을 걸었다. 고율과 시는 530여 구를 지었다. 명산과 대천을 보았으며 선현의 밝은 자취에 감읍하였으며 문헌과 전고를 살펴보았다. 여러 고을의 풍토와 풍속을 알았으니 온전히 얻은 것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다만 우암 송시열이 그의 손자인 회석(晦錫)에게 보낸 편지에서, “너는 나에게 낙산의 일출을 본 것에 대하여 자랑을 했다마는, 어찌 내가 앉아서 주자(朱子)의 글을 읽어 바다의 트이고 하늘의 높은 기상을 본 것만 같겠는가?”라고 하였다는데, 지금 내가 한 달 동안을 유람한 것이 아마도 혹 정좌하고 독서하는 군자에게 웃음을 살 지도 모르겠다. 지금부터 다시 문을 닫고 깊이 들어 앉아 남은 시간을 이용하여 공부하는 것을 저버리지 않는다면, 한 번 움직이고 한 번 고요한 것이 서로 그 근본이 되어 거의 태극의 본지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스스로 힘쓰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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