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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1627 년 이익의 도산기행
 글 쓴 이 : 성호 이익  등 록 일 : 2010-04-10 오후 7:51:27 조 회 수 : 1039

제목 : 유청량산기(遊淸凉山記)

저자 : 이익(李翼)





-종조(從祖)인 춘당공(春塘公)이 청량산 유람을 권하는 시는 다음과 같다.

三朝勤雨洗巖崖(삼조근우세암애) 삼일 동안 비가 내려 바위와 벼랑을 씻더니만,
遙望淸凉氣像佳(요망청량기상가) 멀리서 청량산 바라보니 기상이 아름답구나.

내가 청량산에 대해 들은 것은 오래되었다. 몇 해 전에 한 두 명의 뜻 맞는 친구와 더불어 9월 가을에 가볼 것을 약속을 하였는데, 그때가 되어서는 벗들이 모두 일이 생겨 가지 못하였다. 나 역시 길이 험하여 혼자 가지 못하고 온계(溫溪)까지만 갔다.
다음날 도선서원(陶山書院)에 이르러 사당에 배알하고 걸어서 천연대(天淵臺)에 올라 저 멀리 신선이 사는 산을 봉우리를 바라보니 아득하게 구름 속에 나왔으니 안타까운 탄식을 내뱉고는 다시 인간세계로 돌아왔으나 그곳에 대한 생각은 그치지 않았다.

정묘년(1627년, 인조 5년) 초가을에 다시 벗들과 함께 청량산 유람에 대해 의논하였다. 이에 유람을 떠나 온계의 당숙 집에 도착하였다.
다음날 당숙과 함께 청량산의 바깥 골짜기 입구에 도착하였다. 강물은 맑게 흐르고 돌을 쌓아 만든 대는 앉아서 쉴 만하였다. 앉아서 잠깐 이야기를 하였다.
동쪽으로 몇 리를 가자 모두 돌길이었지만 그리 험하지는 않아 느긋하게 걸을 수 있었다. 안쪽 골짜기 입구에 도달하여 말라버린 계곡물을 따라 올라가니 좌우의 절벽이 곁으로 만 길 높이로 서 있다. 올라갈수록 더욱 험하여 일행이 모두 발꿈치를 들고 몸을 굽혀 올라갔다.
이처럼 몇 리를 가서 동쪽으로 보문암(普聞庵)을 지났고 서쪽으로 잇달아 오십 걸음을 가서 환선암(喚仙庵)을 지났다. 또 서쪽으로 수십 걸음을 가니 이것이 청량산의 원찰인 연대사(蓮臺寺)이다.
연대사 뒤에는 산기슭이 있는데, 선학봉(仙鶴峰)에서부터 내려온 줄기이다. 바위가 서려다가 평평하게 깎이어 대가 되었다. 둘러본 지 얼마 되지도 않아 해가 벌써 저물었다. 드디어 환선암으로 돌아와 깊이 잤다.

다음날 노승과 시 한 수를 주고받았다. 승려가 말하기를,
“춘당(春塘) 오수영(吳守盈), 월천(月川) 조목(趙穆), 면진재(勉進齋) 금응훈(琴應薰) 등 여러 선생이 이곳에서 책을 읽었습니다.”
라고 하였다. 밥을 먹은 후에 각각 지팡이를 짚고 나갔다. 사람을 시켜 벼루와 붓을 챙겨서 뒤따르게 하고, 길을 안내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지팡이를 들어 앞에서 인도하게 하였다.
동쪽으로 산허리의 한 길이 절벽을 따라 나무 사이로 뻗어 있는데 길이 구불구불하여 발을 옆으로 딱 붙이고 올라갔다. 아래를 내려 보니 끝이 없어 감히 바로 쳐다보지 못하였다. 다만 등나무 등의 물건만 잡을 수 있었다. 덩굴이 돌길을 둘러싸고서 위 아래를 가리니, 또한 마음을 조금 진정할 수 있었다. 아아, 이 길을 밟는 자는 아는 사람의 설명을 기다리지 않아도 그 위험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그 두려워하는 마음이 발을 옮길 때 조금도 풀어지지 않았다. (원문결락) 넘어지고 땅에 떨어져서 몸과 뼈가 아프고 부서져도 후회가 되는 일이 없게 될 것이다. 만약 사람마다 항상 이런 마음을 갖게 해서 잠시라도 멈춤이 없다면 어찌 날마다 편안한 땅을 밟고 넓고 평평한 길에서 조심스럽게 걷게 되지 않게 되겠는가?
이 길을 따라 동쪽으로 몇 걸음 가니 위에 층층으로 된 봉우리가 있었다. 우뚝한 돌이 반듯하게 하늘 가운데 서 있는데 바로 금탑봉(金塔峰)이다.
봉우리의 허리에 석대가 반공으로 날아오른 것은 어풍대(御風臺)이다.
대의 곁에는 총명수(聰明水)가 있는데, 절벽 굴 가운데에로부터 한줄기 시원한 물이 흘러나온다. 물을 마셔보니 정신이 상쾌하여 문득 더러운 세속을 떠난 것 같았다.
바위를 올라 수십 걸음을 옮겨 치원암(致遠庵)에 이르렀다. 암자는 바로 고운 최치원이 살던 곳이다. 사람이 떠난 붉은 부뚜막에는 풀이 뒤덮고 섬돌은 묻혔으니 신선의 자취가 아득하여 좇을 수가 없다.
북쪽으로 풍혈이 있어 서쪽으로 통하였다. 그러므로 서혈이라고 한다. 넓이가 수십 자이며 높이는 4, 5척이다. 비바람도 미치지 않아, 최치원이 바둑을 두던 곳이라고 전한다.
동쪽으로 금탑봉에 오르려는데 길을 안내하는 이가 길이 없다고 하므로, 원찰에 돌아와 이틀을 묵었다.

이른 아침에 각각 율시 한 수를 짓고 아침을 먹은 뒤에 서쪽으로 갔다. 돌길이 가로로 가늘게 이어져 있는데 전날 걸은 것보다 길이 험하였다. 간간히 포도 등의 넝쿨이 늘어져 덮혀 있었다. 길을 안내하는 사람이 따서 바치니 나누어 먹었다. 맛이 상큼하여 신선했으며 충분히 갈증을 해소하였다.
지나온 지름길보다 이곳이 더욱 풀로 덮혀 있었다. 대개 이보다 앞서 아름다움을 찾는 사람들이 거의 위험을 꺼려하여 한결같이 이곳에는 이르지 못하였다.
굴은 경일봉(擎日峰)의 아래, 환선봉(喚仙峰)의 동쪽에 있는데 김생(金生)이 이곳에서 글을 익혔다. 그러므로 김생굴(金生窟)이라고 부른다. 동쪽에는 돌 가운데 샘이 있는데 똑똑 물이 떨어져 내려와 물소리가 바위 사이를 울린다.
서족에는 탁필봉(卓筆峰)이 있어 뾰쪽하게 붓처럼 솟았는데, 비가 와서 갓 목욕을 하고 허공에 서 있는 듯하다. 세상에서는 김생이 그 모습을 보고 서법을 배웠다고 전한다. 인하여 북쪽으로 가서, (원문결락) 어디에 이르렀다. 세상에서 이른바 ‘청량의 아름다운 경치는 모두 이곳에 있다’는 곳이다. 목을 빼고 둘러보니 세속의 더러운 생각이 완전히 녹아 사라졌다.
서쪽으로 수십 걸음을 옮기니 만월대가 있었다. 낭떠러지를 굽어보니 천만 길로 그 위치의 형세가 높고 상쾌하였다. 생각하기에, 달밤에 올라 여러 산을 바라보니 모두 경요굴(瓊瑤窟)과 같았다. 애석하도다, 우리들의 노정이 보름의 좋은 밤에 미쳐서 아름다운 골짜기 환상적인 대 위에서 밝게 읊조리며 후생이 산 중간에서 부르는 음향을 듣지 못함이여. 상당히 오래 읊조린 뒤에 선학을 우러러 보니 세 봉우리가 우뚝 솟았는데, 연화(蓮花)와 금탑(金塔)의 두 봉우리가 좌우에 서로 마주보고 있어 그 끝도 없이 아득한 것을 깨달았다. 이로 인하여 절구 한 수를 지었다.
동쪽과 북쪽 사이를 바라보니 경일봉이 우뚝 서 있다. 세 봉우리가 나란히 북쪽으로 줄지어 서 있는데 모두 돌 벽이 하늘로 솟아 있다. 동쪽은 ‘보살(菩薩)’이고 중간은 ‘필봉(筆峰)’이며 서쪽은 ‘연적(硯滴)’이다. 이것은 세속에서 보고 부른 것을 말미암아 명명한 것이다.
주세붕(周世鵬) 선생이 유람할 때에 이름을 자소(紫巢), 탁필, 자란(紫鸞)으로 고쳤다. 그러나 그렇다고 전하는 고적(古蹟)은 또한 믿을 수가 없다. 탁필봉의 바깥으로는 아득하여 분별할 수 없다. 이곳으로부터 북쪽으로 보살봉의 아래에 이르기까지 시야가 탁 트여 우러러 보면 보이는 것이 없다. 탁필봉은 천 길이나 우뚝 서 상하가 한 몸이다. 두 봉우리가 모두 오를 수 없다. 연적과 탁필은 뼈대가 서로 비슷하나 크고 작음의 차이가 있다. 깎아지른 듯 서 있는데 상하의 돌면에는 앞뒤의 유람하는 많은 사람이 이름을 새겼다.
대개 절의 골짜기로부터 선학, 환선, 만월, 김생굴 등의 여러 산록에 이르기까지는 모두 이 봉우리의 아래에 엎드려 있다. 둘러보니 축융(祝融)은 그 남쪽에 있는데, 이 봉우리의 아래에 크게 서려 높이 솟아 있다. 연화봉(蓮花峰)과 장인봉(丈人峰)은 그 서남쪽에 있다. 장인은 연화봉보다 조금 높다. 연화의 남쪽 옆에는 작은 봉우리가 있는데 보살과 더불어 형제가 될 만하다. 이름을 물으니 사람들은 알지 못하였다.
생각하건대, 주세붕 선생이 이름을 고칠 때 보살은 옛 이름을 그대로 썼지만 이것은 자란과 자소의 사이에서 있어 이름이 없는 듯하다.
멀리 바라보니 풍악(楓嶽)과 문수(文殊)가 북서 방향에 자리 잡고 있고 태백(太白)과 일월(日月)이 북동 방향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학가(鶴駕)와 가야는 남서쪽에 서 있다. 산색의 짙고 엷음은 각각 원근이 다르기 때문이다.
서쪽으로 바라보니 아득한 철벽에 조금 입을 벌린 듯 열린 것은 죽령(竹嶺)의 길이다. 남쪽으로 바라보면 하얀 비단이 휘돌아 구불거리며 나가는 것은 낙동강(洛東江)의 물줄기다. 여러 산이 빙 둘러 가로막아 멀리까지 볼 수 없다.
이 날은 바람이 솔솔 불고 구름이 약간 끼어 원근의 봉우리들이 혹은 숨고 혹은 드러났다. 혹 말이 뛰고 용이 오르는 듯 혹은 학이 춤추고 봉황이 날아가는 듯 혹은 부용꽃처럼 아름답고 혹은 연기나 구름처럼 떠 있는 듯하다. 화창한 눈썹처럼 푸른 산줄기가 빙 둘러나가고 점점이 서쪽으로 둥글게 벌려 서 있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가 없다. 가까운 것은 그 전체를 드러내고 멀리 있는 것은 그 머리를 드러내고 있다. 멀리 하늘가에 이르러서는 보이는 것이 없다.
다시 한 높은 봉우리를 바라보고 주자(朱子)의 ‘낭낭하게 읊으면서 축융봉을 달려 내려오네’라는 싯귀를 읊었다. 세 번 반복하여 읊으면서,
“쯧쯧, 한 서생으로 먼 후대에 늦게 태어나 이미 공자가 태산에서 노니는 것을 모시지도 못하였으며 오문(吳門)에서 백마를 구별하는 것에 대하여 한마디도 못하였고, 형산(衡山)에서 노닐며 3백편 시를 수창하는 말미에 이름을 끼워넣지도 못하였다. 시가 마음의 공부를 황폐시킨다는 훈계와 도를 강하는 논변에 대해서도 듣지 못하였다. 또한 우리 퇴계(退溪) 선생과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 선생의 두 선현이 이 산에서 유람할 때 반드시 공자의 천하가 적다는 덕량에 대해 사모하였을 것이며, 주자의 회해(淮海)를 삼키는 기상을 추모하였을 것이다. 아름다운 말과 지극한 논의는 산신령을 감동시켰을 것인데 또한 친히 얼굴을 맞대고 가르침을 받지 못하였구나. 지금 쓸쓸한 바람 부는 가을밤에 적막한 빈산에서 아득한 옛날의 자취를 찾으며 그림자와 소리가 없는 것을 찾으니 외람되이 더러운 세속의 마음과 흐릿한 세속의 안목으로 정상에까지 유람을 하였다. 어느 산 어느 물의 이름과 형상을 많은 가운데 하나라도 얻으면 다행이겠다. 그러나 옛날 선현들이 산수를 관상한 기술에 비하면 다만 봉사가 보는 것을 조금 벗어날 뿐이다. 우리들의 이번 유람은 비록 옛날 군자의 참다운 즐거움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스스로 즐기는 것이 그 가운데에 있다. 혹은 이것을 말미암아 양기의 방법을 얻는다면 아마도 한 수준을 올라가 좋은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돌아갈 때가 임박하여 생각만큼 두루 볼 수가 없었다. 지팡이를 짚고 돌아와 이를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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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규 정묘년(1627년, 인조 5년) 초가을에 다시 벗들과 함께 청량산 유람에 대해 의논하였다. 이에 유람을 떠나 온계의 당숙 집에 도착하였다...질문이 있습니다...성호 이익은 이때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혹시 동명이인 아닌가요? 2011-02-24 오후 7:31:54 덧글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