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암선생 유적지_분강촌 ::::::::: 농암종택

<무송헌 김담 선생 탄신 60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 발표 원고

날짜 : 2016년 11월 29일

장소 : 그랜드컨벤션웨딩

주관 : 고등과학원, 영주시

영주 예안김씨와 문절공은 영남 선비문화의 선구였다.

-文節公金淡先生誕辰 600週年에 즈음하여-

차례

1. 머리말

2. 조선시대 안동의 예안(현 도산)은 유교특별시였다.

1) 예안김씨의 예안시대

2) 예안현의 풍광과 위상

3) 백운지의 두 비석

3. 영주는 예안김씨 새로운 전거지가 되었다.

4. 문절공은 영남 사림의 선구였다.

1) 문절공의 시호

2) 문절공의 환력

3) 문절공종택과 무섬마을

5. 예안김씨는 영남 선비문화 형성의 한 중추가 되었다.

1) 예안김씨 혼맥

2) 예안김시 과환

3) 예안김씨 인물과 집성마을

5. 맺음말

영주 예안김씨와 문절공은 영남 선비문화의 선구였다.

-文節公金淡先生誕辰 600週年에 즈음하여-

1. 머리말

본 글은 ‘문절공 김담 선생 탄신 600주년 기념’이란 제목처럼, 한 위대한 인물에, 영광스러운 한 가문과 지역사회에, 넓게는 국가적 위인의 거룩한 추모잔치를 염두에 두면서, 문절공文節公 김담金淡(1416 태종16-1464 세조10년)선생의 업적과 예안김씨의 영남지역 내에서의 위상에 대해 개괄적으로 서술하였다.

따라서 본 논문은 관습적인 학술논문의 격식, 체제를 그대로 지키면서 쓴 글은 아니다. 사실 학술논문은 많은 글에 주석을 달고, 인용하는 문헌을 제시하여, 그 근거를 명확히 해야 하는 당위성이 있지마는, 필자는 그런 글에 익숙하지 않아 그야말로 필자 나름의 글을 썼다.

‘필자 나름의 글’은 주관적이고 저절로 감성적인 글이 되기 쉽다. 필자의 글은 사실 그렇게 흘러가는 측면도 없지 않다. 그렇지만 필자의 글은 모든 행간이 문헌자료에 의해 고증된 사실만을 기록했다. 그 기록을 조금이나마 읽기 쉽도록 윤문潤文 처리했다고 보아주면 그런 다행이 없겠다. 천하의 아름다운 집도 살지 않은 집은 폐가이며, 천하의 명문도 읽어주는 자 없다면 잡문에 불과하다. 필자는 언제나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고 읽혀지는 그런 글을 쓰고 싶다.

문절공은 가까이 있다. 그리고 그리운 분이다. 그것은 농암 선생(농암 이현보)께서 그때 “어머니가 어려서 부모를 여의시고 외삼촌 댁(삼판서고택)에서 성장하시었다”는 이『농암집』의 기록은 어느덧, ‘삼판서고택’은 아늑한 꿈속의 외가 집이며, 문절공은 정말로 나의 외삼촌처럼 뇌리에 각인되어 있다. 당시의 일을 회상하면, 문절공깨서 나의 이런 거친 글의 어리광이라도 기꺼이 들어주시지 않을까 생각되기도 한다.

뿐만 아니다. 나의 영주 강의는 감회가 깊다. 농암을 가장 존경한 분이 금계錦溪 선생이다. 금계는 농암의 손서孫壻지만, 생일에 지어 올린 장편 시 “용산고에서 구양수의 '여산고‘ 글을 따라 지어 농암 이상공의 생일에 올림니다(龍山高效歐陽永叔廬山高壽聾巖李相公生辰)”는 더 할 수 없는 수사修辭와 절절한 존경의 마음을 담고 있다. 그 마음은 진심이라 생각 된다. 그래서 더욱 잊을 수 없다.

그리고 『농암집』 연보에, 농암께서 왕명을 받아 유일遺逸로 임금께 추천한 단 한분이 소고嘯皐 선생의 아버지 진사 박형朴珩이다. 다른 기록을 찾지 못해 더 이상 상고하기 어렵지만, 예나 지금이나 인사 추천은 내밀한, 친밀하면서도 존경하는 사이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농암의 종손자로 계문고제인 간재艮齋 선조의 아버지 이충량李忠樑이 소고의 종형 박승장朴承張의 사위가 되어 영주로 이거하였으니, 이 또한 적지 않은 인연이다.그래서 반남박씨와도 세의를 항상 생각나게 한다. 진사는 예안김씨와 반남박씨의 인연을 최초로 맺은 분이기에 더욱 당시 상황이 그려지기도 한다. 필자는 이런 인연들을, 옛 선인들이 상용하던‘세의世誼’라는 단어의 의미를 소중하게 생각하며 이 글을 쓰고자 한다.

참고로 ‘예안김씨禮安金氏’는 영남지역에서는 주로 ‘선성김씨宣城金氏’로 알려졌지만, 근년 모든 관공서에 자료 통일의 일관성을 기하기 위해 ‘예안(선성)김씨’로 병기하기로 했다고 한다. 필자 역시 선성김씨가 익숙하지만, 문중 의견을 존중하여 그렇게 이해하기로 했다. 다만 이 글에서는 번거로움을 피하고자 ‘예안김씨’로만 썼다. 그런 연유의 결심은, 왕조실록에 ‘金淡字巨源慶尙之禮安人’이라는 움직일 수 없는 근거자료 때문이다.

그리고 호칭에 대해서는‘문절공文節公’으로 오랜 세월 알려져 왔으므로 모두 ‘문절공’으로 통일하여 썼음도 아울러 밝혀둔다.

2. 조선시대 안동의 예안(현 도산)은 유교특별시였다.

1) 예안김씨의 예안시대

예안김씨는 그 이름처럼 ‘예안’이 고향이다. 예안은 도산서원이 소재한 안동 도산陶山이다. 옛 지명은 예안禮安이었고, 그 옛 지명이 선성宣城이었다. 조선 500년 지명이 예안이어서 예안김씨가 되었다.

예안은 고려조에 매곡현이었으나 성주 이능선李能宣이 왕건에게 의거 귀순하여 선성현宣城縣이 되었다. 이 명칭의 잔영은 현재 한국국학진흥원 뒷산 이름이 선성산宣城山이고, 1619년에 쓴 예안향토지가 『선성지宣城誌』이며, 현 도산면 서부리 출장소 정문에 ‘선성아문宣城衙門’이라는 현판으로 남아있다. 이 글씨는 ‘선성삼필宣城三筆’의 한 분인 매암梅巖 이숙량李叔樑이 썼다고 오래 구전되어 오고 있다. 예안김씨는 예안에서 8대 200여년을 세거했다.

시조 김상金尙은 고려 지방관직 호장戶長을 지냈고, 5세 때부터 중앙에 진출하여 성세成世가 밀직사상호군, 6세 유鈕가 비순위대호군, 7세 방식方軾이 비순위정용호군을 차례로 역임했다. 8세 로輅는 좌우위보승랑장으로 ‘고려에 절의를 지킨 절신節臣’이라 했다. 이 기록은 모두 『선성김씨족보』에 근거한다.

이때까지 예안김씨는 예안의 지배 세력이었으나 로輅의 아들 사형제 중 김소량(1384-1449)은 영주로, 김숙량은 공주로, 김중량은 송도로 이거하면서 예안김씨의 예안시대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 다음 동생 의량義良이 있었지만 아들이 없어 절손되었다. 여기까지 계보를 보면,

가)

시조 金尙(시조, 高麗戶長)-2세 存誠(高麗戶長 )-3세 敦富(高麗戶長中)-4세 希寶(高麗戶長)-5세 成世(高麗奉翊大夫密直司上護軍)-6세 鈕(高麗中顯大夫備巡衛大護軍)-7세 方軾(高麗奉善大夫備巡衛精勇護軍)-8세 輅(左右衛保勝郞將) -9세 小良-

나)

- 輅 - 小良(永柔縣令)- 영남파

叔良(通津縣監)- 공주파

仲良-송도파

義良(현감, 무후)

그런데 소량이 떠난 이후에도 예안김씨는 예안에 상당한 농장과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소량의 손자이고, 문절공의 아들인 김만균金萬鈞이 오천烏川 광산김씨에 장가들어 침류정沈流亭이란 정자를 짓고 살았으며, 죽음에 이르러 그 재산을 광산김씨 시양자侍養子 탁청정 김유金紐(1491-1555)에게 일체를 상속했는데, 탁청정은 당시 엄청난 부를 지니고 있었다. 이로써 예안김씨의 예안시대는 완전히 마감되었다.

2) 예안현의 풍광과 위상

그렇다면 예안김씨의 고향 예안, 즉 현재 도산은 어떤 곳인가? 도산은 ‘도산구곡陶山九曲’으로 분류한다. 곡曲은 구비다. 강이 틀어지는 곳이 구비다. 구비에 여울이 있고, 여울 가에는 마을이 있다. 도산구곡은 구비이며 여울이며 마을이다. 도산9곡은 전설속의 명칭이었데, 1619년 편찬한『선성지宣城誌』의 저자 권시중權是中은 최초 청량산 아래 박석으로부터 월명, 백운, 단사, 퇴계, 분천, 월천, 비암, 오천까지 ‘9곡’으로 하고, 다시 세분해서 14곡으로 분류했다. 그 후 19세기 이야순李野淳, 이이순李頤淳의 등이 다시 거론했다. 이야순의『광뢰집』에 의한 분류와 그 연고는 이러하다.

제1곡 운암곡雲巖曲은 후조당 김부필金富弼을 비롯한 일곱 군자가 있다 하여 군자리라 했다. 제2곡은 월천곡月川曲, 제3곡은 오담곡鰲潭曲으로 역동 우탁禹倬, 월천 조목趙穆, 성재 금란수琴蘭秀의 고향이다. 제4곡은 분천곡汾川曲으로 강호 문학의 창도자로 일컬어지는 농암 이현보李賢輔의 고향이다. 제5곡은 탁영곡濯影曲으로 퇴계 이황李滉이 강학한 도산서당이 있다. 제6곡은 천사곡川沙曲으로 저항 시인 육사 이원록李源綠의 고향이다. 제7곡은 단사협을 낀 단사곡丹砂曲, 제8곡은 가송협의 고산곡孤山曲, 제9곡은 청량산을 감아 도는 청량곡淸凉曲으로 구분된다.

이이순의『후계집』에는 운암곡과 월천곡 사이에 비암곡을 제2곡으로 하고 오담곡을 제외시켰다. 14곡이 9곡으로 정리된 연유는 주자朱子의 ‘무이구곡武夷九曲’ 영향이었다.『후계집』에 “주자의 ‘무이12시武夷十二詩’와 퇴계의 ‘도산18절陶山十八絶’은 구구절절 부합하는 까닭에 시험 삼아 빼어난 구비를 ‘무이구곡’의 예에 의해 분류했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퇴계는 1547년 “희롱삼아 7대 3곡을 짓는다(戱作七臺三曲)”고 하고, 단사곡, 천사곡, 석담곡石潭曲의 3곡을 언급한바 있다. 퇴계의 시가‘도산12곡’은 이런 실체적 구비와 직접적인 관련성은 없다.

1619년 『선성지』를 쓴 권시중은 “조물주가 특별히 만들어 놓은 것 같으며, 고금의 선현, 대인들이 시를 읊조리며 ‘진경’이라고 찬탄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했다. 도산 진경은 진경산수를 그린 정선를 불러들였다. 강세황, 김창석 같은 화가도 도산을 그렸다. 『택리지』를 쓴 이중환은 우리나라 최적의 주거지로 안동의 두 지역을 거론했다. 바로 도산과 하회다. 이중환의 설명은 이렇다.

“그러므로 강촌으로는 영남 예안의 도산과 안동 하회가 제일이다. 도산은 주변 산이 강과 조화되어 있다. 산은 너무 높지 않다. (그래서) 황지에서 발원한 낙동강은 이곳 도산에 이르러 골짜기를 벗어나 비로소 강이 된다. 강변 산은 석벽을 이루고, 또한 그 산의 발치는 물에 잠기어 경치가 뛰어나다. 물은 나룻배가 건너기에 넉넉하고, 마을 안에는 오래된 나무가 많아 정취가 있다. 산 아래 강변은 모두 경작지다.”

강의 일생은 사람과 유사하다. 유년, 청년, 장년, 황혼이 있다. 낙동강도 그러하다. 멀리 황지에서 발원한 낙동강은 거친 강원도의 산과 투쟁하며 드디어 이곳 도산에 이른다. 청량산은 유년기를 마감하는 마지막 관문이다. 청량산을 지나면서 낙동강은 빛나고 빛나는 청년의 강이 되었다. 산은 더는 강을 방해하지 못한다. 강은 이제 산으로부터 벗어나 마음껏 인생을 구가한다.

청춘에 무엇을 못하랴! 강은 구비와 들과 못과 내와 협峽을 만들었다. 그래서 도산 일대의 강은 단천丹川, 낙천洛川, 분천汾川, 월천月川, 오천烏川을 빚어냈고, 도영담倒影潭, 월명담月明潭, 한속담寒粟潭, 미천장담彌川長潭, 백운지白雲池, 탁영담濯纓潭, 통소鯒沼, 오담鰲潭을 만들었으며, 드디어 도산 9곡을 빚어냈다. 가송협佳松峽, 단사협丹砂峽을 만들고 수많은 강돌과 대와 수석도 만들었다.

강이 빚은 이런 풍광은 주변 산과도 그대로 어우러졌다. 이 산에 대해 이중환은 “너무 높지 않다”고 했다. 그것은 곧 가슴에 와 닿는 살기 좋은 곳에 대한 또 다른 표현이다. 도산의 그러한 환경은 가거지지의 핵심 조건이다. 또한 발군의 인재 배출과도 연관된다. 아니 결정적 역할을 했다.

문화관광부가 매년 선정하는 ‘올해의 문화 인물’을 보니 안동 출신이 여섯 명인데, 그 가운데 도산 출신이 네 명이나 된다. 불곡 이천, 농암 이현보, 퇴계 이황, 육사 이원록이 그들이다. 영주시의 안향, 영양군의 조지훈 외에 인근 시군에는 거의 없다. 면 단위 행정 구역에 불과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놀랍다고 할 수 밖에 없다.

높지 않은 산은 사색의 환경을 제공한다. 사색은 사람을 만든다. 그런 까닭에 같은 강촌이라 하더라도 ‘살 만한 땅(可居之地)’과 ‘볼 만한 땅(可觀之地)’과 ‘놀 만한 땅(可遊之地)’은 구별된다. 퇴계가 청량산을 ‘오가산吾家山’이라 할 만큼 사랑했지만 가서 살기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한 것도 이 때문이다. 퇴계 종택과 도산서원은 살 만한 땅의 전형이다. 적어도 퇴계의 안목으로는 그렇다.

산의 발치가 물에 잠겨 조용하고 정취가 있는 곳이 도산이었다. 또한 산은 푸른 병풍처럼 둘러져 있어서 ‘동취병산東翠屛山’, ‘서취병산西翠屛山’이라 했다. 그래서 고인들은 도산의 풍광을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별천지’라 하고, 그 산색과 물색을 ‘금수 산빛(錦繡山光)’과 ‘유리 물색(琉璃水色)’이라 했다.

도산의 강산은 진정 아름답다. 아니 절묘하다. 낙동강 1,300리를 흐르는 동안 유일하게 이곳 30~40리에서만 그런 모습을 연출했다. 이중환은 도산에 이르러 낙동강은 비로소 강이 되었다고 했지만, 강은 도산에서 시작되었고 도산에서 끝나 버렸다. 강은 도산에서만 여울과 구비와 소沼와 들과 협곡을 한꺼번에 빚어냈고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도산을 벗어난 상, 하류 어디에도 이런 지형이 없다. 상류에는 협과 구비는 있으나 소와 들이 없고, 하류에는 들은 있으나 소, 내, 곡, 협이 없다. 상류에서는 거친 물이 산을 비집고 조급하게 흐르며, 하류에서는 끝없는 모래 위를 그저 정처 없이 흐를 뿐이다. 안동시를 지나 하회 앞을 흐르는 낙동강을 보라. 같은 안동이지만 어느덧 사행천이 되어 넓디넓은 백사장을 게으른 뱀처럼 밋밋하게 흐를 뿐이다. 초로의 피로가 역력하다. 도산의 아름다움은 이런 빛나는 청년의 낙동강이 흐르기 때문이었다.

도산은 사실 조선조 500년 ‘예안禮安’이라 했다. 정확히 1914년 전까지 그러했다. 그래서 이중환의 기록처럼 ‘안동의 하회’이며 ‘예안의 도산’이었다. 역사도 안동은 『영가지永嘉誌』에, 예안은 『선성지』에 기록했다. 예안 사림士林과 안동 사림은 구분되었고, 예안향교는 안동향교를 선도했다. 예안향교는 도산서원과 더불어 영남 여론의 진원지였다. 지역 행정구역도 예안을 둘러싸고 있는 재산, 내성, 춘양 등이 모두 안동이었으므로 마치 섬처럼 존재했다. 정말 기이한 행정구역이었다. 안동이라는 유교특구 속에 별도의 유교직할시가 있는 셈이었다. 그래서 안동문화는 “안예문화安禮文化라고 해야 옳다”는 말이 생겨나기도 했다. 거의‘한국문화1번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 도산은 1974년 축조된 거대한 물막이, 안동댐 건설로 인해 그야말로 상전벽해가 되어 버렸다. 안동댐의 정식 명칭이 ‘안동다목적댐’이었건만 문화유산의 목적은 없었다. 그리하여 도산9곡 가운데 6곡까지 폐허가 되었고, 여섯 정도의 하회마을, 즉 오천, 부포, 분천, 의인, 하계, 원촌 마을이 간단이 수장되었다. 그래서 도산은 그 옛 도산은 아니다. 아마 지금 안동댐을 건설한다면 동강댐 100배 정도의 저항을 받을 것이고, 문화경제적 부가가치가 있다면 하회마을 1000배 정도는 창출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달랑 남은 도산서원 역시 잘못된 성역화사업으로 돌이킬 수 없이 상처받았기는 마찬가지다. 안동댐 높이를 불과 몇 미터만 낮추었어도 도산은 고스란히 보존되었을 터이지만, 40년 전 우리들의 가치는 그것이 한계였다. 따라서 지금 사용하고 있는 '도산면'은 '옛 예안현'의 다른 이름이며, 지금 사용하고 있는 '예안면'은 '옛 월곡면'이 차용해서 쓰고 있다. 전자는 일제시대에 급조된 이름이며, 후자는 안동댐과 더불어 생겨난 기형적 이름이다.

그 도산을 최초 점령한 성씨가 예안김씨였다. 토성土姓으로, 가장 비옥했던 제1곡 운암곡을 완전 소유하고 있었다. 아니 전 도산이 영향권에 있었다. 왜냐하면 이때까지 이른바 ‘도산 4대가문’이라 하는 봉화금씨, 진성이씨, 광산김씨, 영천이씨 등의 다른 성씨들이 정착하기 전이었기 때문이다.

고려시대 이승李昇(문과, 좨주), 이천李蕆(문과, 중추부사)등의 쟁쟁한 인물과 대단한 세력을 지녔던 예안이씨가 있었지만, 이 무렵 이미 도산을 떠나 재경사족이 된 이후였다. 그리고 다른 한 파 역시 언제부터인지 안동의 풍산 우렁골로 이주해버렸고, 지금까지 뚜렷한 안동의 재지사족으로 세거하고 있다.

3) 백운지의 두 비석

그렇다면 예안김씨는 도산에 무슨 유적을 남겼는가? 예안김씨는 도산구곡 가운데 제1곡 운암곡에 살았고, 제7곡 단사곡에 조상들의 묘비와 제단을 남겼다.

도산서원에서 상류로 4km 정도 올라가면 저항시인 육사 이원록의 고향인 도산6곡 천사곡川沙曲 원촌遠村 마을이 나오고, 이어서 도산7곡 단사곡丹砂曲이 소재한 단천마을이 나온다. 단천마을 앞산이 왕모산인데, 그 아래 강을 따라 장장 1킬로미터에 달하는 바위 병풍의 단사벽을 지난다. 누가 억겁의 세월을 생각하랴만, 원시 지구의 용솟음치는 거대한 물길은 소와 못과 내와 구비와 협을 만들었다. 그때 강은 산을 마음껏 제압하고 할퀴고 짓이겼다. 산은 모든 살을 다 깎아 주고 저항했다. 그 후 강은 다시는 산을 이기지 못하고 영원히 복종했다. 강은 이제 조상의 위업마저 잊어버렸고 체념한 지 오래다. 단천의 ‘붉은 내’는 천 년 전에 그러했듯이 천 년 후에도 저렇게 흘러갈 것이리라. 단사벽에 대한 퇴계의 시는 이렇다.

아래는 용소, 위에는 범 바위 下有龍淵上虎巖

신선 먹는 단사 옥함에 간직 했으니 藏砂千仞玉爲函

이곳 사람들 응당 천수를 누리리라 故應此境人多壽

병든 이 몸 약초 캐어 무엇 하리 病我何須斸翠巉

단사벽이 끝나는 지점에 이르면 백운지白雲池라는 곳이 나온다. 보통 ‘배오지’라 부른다. 강의 이름이 지역 이름이 되었다. 지대가 낮아 자주 강이 범람했다고 한다. 『선성지』에 “역동서원에 소속된 대장장이 10여 집이 살고 있는데, 만약 이 대장간이 없었다면 역동서원의 향사가 초라했을 것이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백운지에는 두 개의 비석이 있다. ‘봉화금씨 비석’과 ‘예안김씨 비석’이다. 두 비석은 서로 조응한다. 예안김씨 비석은 동편 밭 기슭에 있다. 비석 좌우에 일곱 개의 상석이 놓여 있고, 비 전면에는 ‘선성김씨칠세분영전의비宣城金氏七世墳瑩傳疑碑’라 쓰여 있다. 풀이하면 ‘선성김씨 7세까지의 분묘라 전해짐을 표하는 비석’이라는 뜻이다. 전해 오는 이야기를 근거로 후손들이 세웠다. 요컨대 수수께끼의 비석이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안동 예안김씨 뿌리를 이해하는 소중한 자료가 된다. 비문 앞 부문은 이렇게 쓰여 있다.

"우리 김씨는 고려 때부터 대대로 예안현에 살았다. 시조로부터 3세까지는 호장戶長을 역임했고, 이어 봉익, 중현, 봉선대부에 이르는 7세까지의 묘소가 예안현의 북쪽 백운산白雲山에 있다고 전해졌는데 지금은 타인이 점유했다. 지금 산 위에 위아래로 두 기의 묘가 봉분이 퇴락한 상태로 있는 것으로 보아 우리가 먼저 쓴 것임을 알 수 있다. 그 산 줄기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오면 십여 기의 묘가 나란히 이어져 있으나 모두 비지碑誌 글이 없어 증명 할 수 없다. 아, 슬프다! 봉선공의 아들이 낭장공이 되었고, 낭장공의 아들 현령공이 처음 영주로 이사했고, 그 아들 형제는 교리校理와 이조판서가 되었다. 판서의 둘째 아들이 현감이 되어 산 아래 십여 리의 거리에 와서 살았다. 자손들이 이처럼 번성했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부터 수호하지 않아 타인에게 점취당해 버렸는지 알 수 없다."

원문: 吾金氏在麗朝世居禮安縣自始祖戶長公歷三世戶長至奉翊中顯奉善三大夫凡七世墳塋世傳在縣北白雲山乃爲他人所占葬其上下今有二封頹塋在中榦上處可知其爲最先入葬而自此而降南出數枝纍纍然有十餘墳皆無碑誌可驗嗚呼可勝痛哉奉善公之子官郎將郎將公子縣令公始移家榮州榮之距禮安纔一日程縣令公二男爲校理爲冢宰冢宰公仲子縣監公又來住山下十餘里子姓之在榮土者寔繁有後則不知何時失於守護爲人所占取也

비문 끝에 “後孫通訓大夫前行司諫院獻納若鍊撰, 象鍊書”라 했고, “戊午四月, 治石都監: 重鉉, 重鍊, 有司: 匡鍊, 永聞, 永天“이라 새겨져 있다. 김약련金若鍊(1730-1802)은 좌부승지를 역임한 학자로 『두암집』을 남겼다. 이 비석은 1798년 4월에 세웠다. 영주 이주 400여년 만의 일이었다.

안동 지방 씨족의 정착 과정 연구에 천착하신 고故 소극小極 서주석徐周錫 선생의 글을 보면, 예안김씨는 도산 토성으로, 15세기에 이미 문절공 이조판서 김담金淡(1416-1464), 16세기 민절공 형조참판 김늑金玏을 배출한 명문이었다. 특히 문절공 가문은 ‘삼판서댁’이라 했을 정도의 명가였다.

형부상서를 역임한 정도전의 아버지 정운경이 이 집에서 살다가 사위 공조판서 황유정黃有定(1343-?)에게 물려주었고, 황유정의 외손자인 문절공이 이 집에서 태어나 이른바 ‘삼판서댁’이 되었다. 비문에 쓰인 이조판서는 문절공을 말하고, ‘산 아래 십여 리에 산 인물’은 현감을 역임한 문절공의 아들 김만균金萬鈞을 말한다.

『농암집』에 보면 농암 이현보가 승지가 되어 오니 어머니가 가사를 지어 “승지가 오거든 내가 지은 노래로 노래하라” 했는데, 그 가사가 ‘선반가宣飯歌’였다. 농암은 이때를 술회하며 “이는 대개 어머니가 어려서 부모를 여의시고 외삼촌댁에서 성장하시어 승지 벼슬이 귀한 것을 알고 있었던 까닭”이라 했다. 여기서 외삼촌은 곧 문절공을 말하고, 외삼촌댁은 '삼판서댁'이었다.

『백암집』에 보면 충재 권벌權橃 종손인 권두인權斗寅이 백암 김늑의 외손으로 묘지명을 쓰기도 했다. 이처럼 예안김씨는 도산에 여러 성씨들이 입향할 무렵 최고의 명문이었다. 이런 가문의 배경은 이후 백암의 발신과 더불어 온계 이해李瀣, 퇴계 이황李滉 형제의 직계후손을 비롯한 영남의 명문들과 혼맥이 이어지는 연유로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문절공의 아버지가 황유정의 사위가 되어 장인의 집을 물려받음으로써 영주로 가게 되고, 이후 영주가 새로운 전거지로 자리하면서 고향의 선영은 잊혀졌다.

그렇다면 예안김씨 묘소는 어떻게 되었단 말인가? 정말 타인이 점취한 것인가? 아니면 실전한 것인가? 그런데 이 비석의 바로 옆에 또 하나의 오래된 비석이 있다. 봉화금씨 비석이다. 여기에는 “봉성금씨백운산변의비鳳城琴氏白雲山辨疑碑”라 새겨져 있다. 풀이하면 ‘봉화 금씨의 백운산 관련 의문을 해명하는 비석’이라는 뜻이다. 봉화금씨는 무슨 사연이 있어서 해명의 글을 써야 했는가? 또한 무엇 때문에 그것을 돌에 새겼을까? 궁금하여 우선 빼곡한 비문부터 읽어 보니 대략 이러했다.

"‘변의비’를 세움은 선성김씨 ‘전의비’를 변파辨破하기 위함이다. 전에 김씨들이 그 조상의 묘소를 잃고 이 산에 의문을 제기하고, 나아가서는 우리 선영 아래 단을 쌓고 비석을 세워 전의비라 했다. 그 글에는 ‘시조 이하 7세까지의 분묘가 세상에 전하기를 백운산에 있었다’고 했다. 그렇지만 백운산은 곧 우리 집 근원의 산이다. 산 중턱에 선조 정략공 이하 4세까지 묘가 연봉으로 있고, 그 위는 성재공 옛 묘 터가 있다. 이 묘 위에는 처음부터 하나의 묘 흔적도 볼 수 없는데 하물며 두 묘란 무엇이란 말인가? "

원문: 辨疑碑者辨破宣城金氏之所傳疑也夫信以傳信疑以傳疑若無可信之端而 (遞?) 以爲信無可疑之迹而 (遞?)以爲疑皆非也. 迺者金氏失其祖墓起疑於此山就吾先塋下百餘武地築壇竪碑題以傳疑其文曰自始祖以下七世墳瑩世傳在白雲山....白雲一山卽吾家之婺源也其中榦則先祖*略公以下四世連封之地而其上有惺齋公舊壙又其上初無一頹封可見之痕況二封乎...

(上之二十三年己未月日立)

봉화금씨 비석은 1799년 세웠다. 이로써 비석이 세워진 연유가 밝혀졌다. 요컨대 한때 두 가문은 이 백운산 묘소의 점취 여부를 둘러싸고 물러설 수 없는 한판 승부를 했다. 결과는 무승부. ‘전의傳疑’란 전해오는 의심나는 사항을 조리 있게 추정하는 글이다. ‘변의辨疑’는 의혹을 받고 있는 사안에 대한 조리 있는 해명의 글이다. 조리 있게 추정했지만 조리 있게 반박했다. 전의와 변의는 저마다 의문을 말끔히 씻어 줄 사실적 근거와 자료를 요구한다. 그래서 아직 이 승부는 결론이 나지 않았다. 미래에 분명한 시비를 가릴 날을 대비하여 장기 휴전에 들어갔다.

그러나 선영은 영원한 마음의 고향으로 잊을 수 없고 또 잊어서도 안 되는 곳이었다. 이런 염원을 반영한 듯 변의비의 끝에는 “비석을 묘 아래 세우고 훗날 식자의 판단을 기다린다”는 구절이 새겨져 있고, 전의비에는 “이미 우리 산을 잃었지만 우리의 이 비석만은 상하게 하지 마라”라는 구절이 새겨져 있다.

한때 혼인까지 한 가까운 가문들이지만 선영은 양보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예안김씨는 전의비를 세웠고, 봉화금씨는 변의비를 세웠다. 이런 비석은 대한민국 어디에도 있지 않을 것 같아 그 자체로도 흥미롭다. 민속학적, 문화사적 조사는 필수적이라 생각된다.

3. 영주는 예안김씨의 새로운 전거지가 되었다.

예안김씨의 영주 입향은 8세 김로金輅의 아들 사형제 중 맏아들 김소량金小良이 평해황씨 공조판서 황유정黃有定(1343-?)의 사위가 되어 이거 함으로써 시작되었다. 김소량의 생몰 연대( 1384-1449)로 역산해보면 1400년에서 1410년 사이 이주 한 것으로 추정된다. 문절공이 영주에서 태어난 해가 1416년이니 그 전에 이거한 것은 분명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장가가서 처음부터 처가살이를 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두 곳을 동시에 경영했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사위 안동권씨 권겸權謙을 도산에서 맞이했고, 그 재산을 상속해주었기 때문이다. 권겸은 안동사람이었지만 이로써 도산입향조가 되었기 때문이다.

처가살이는 당시 일반적 현상이었다. 이는 재산균등 상속 때문이었다. 아직 종법 체계가 확립되기 전이었으므로 아들, 딸 균등상속은 당연한 것이었고, 이런 연유로 처가살이가 거의 보편화되어 있었다. 사실 경북북부의 많은 가문들이 처향에서 번성하고, 현재의 집성촌을 형성 하였다고 볼 수도 있다. 처가 평해황씨의 막강한 세력이 동인이 되었을 수도 있다.

평해황씨는 고려조의 명문거족인데, 황유정 가문은 거의 국반國班에 이르고 있다. 5대 조부 황유중黃裕中과 아들 황서黃瑞 부자는 양대 문하시중이고, 조부는 영해부사 황원로黃原老(1270-?)이며, 아버지는 직제학 황근黃瑾이고, 본인은 판서이고, 아들은 대사간 황현黃現이었다. 조부 황원로가 영주 푸실(草谷)로 입향했고, 금계 황준량黃俊良의 5대조부이다.

황유정의 처가 외가도 어마어마한 가문이다. 장인이 형부상서 정운경이고 삼봉 정도전이 처남이다. 외조부는 정1품 삼중대광 안축安軸이었다.

그런데 정도전과 안축의 아들 안종원은 사돈 사이이다. 황유정은 단양우씨 우팽의 외증손이므로 우현보의 외재종질外再從姪이고, 현보의 아들 우홍수와는 외삼종형제 사이이다. 황유정을 매개로 정도전은 우현보와 인척姻戚인 셈이다. 그러니까 황유정의 처는 봉화정씨이고 어머니는 순흥안씨이며 할머니 단양우씨로 연결되었다.

정도전의 경우, 처는 경주최씨이고, 아버지 정운경은 어머니가 순흥안씨, 처가 영주우씨와 연안차씨, 사위는 평해황씨이다. 이로써 영주의 재지사족 모두가 통혼 관계였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영주일대의 상황을 살펴보면, 영주는 순흥대도호부, 풍기군, 영천현으로 나누어 있었는데, 순흥에는 안향安珦의 순흥안씨, 풍기는 풍기진씨, 평해황씨, 영주에는 봉화정씨, 단양우씨, 감천문씨, 영천민씨 등이 세거했고, 고려 조정에 득세했다. 당시 영주는 영남 인재의 보고였다. 조선시대가 안동이라면 고려시대는 영주였다. 따라서 소량의 영주 입향은 매우 선진지적인 터전으로의 진출이라 할 수 있다.

김소량은 장인 판서 황유정의 집을 물려받았는데, 황유정 역시 장인 형조판서 정운경에게서 집을 물려받았고, 그 집에서 자신의 아들, 이조판서 문절공이 태어난 기이한 집이 되었다. 판서가 판서 사위에게 물려주니, 그 외손자가 또 판서가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집을 ‘삼판서댁三判書宅’이라 했다. 옛날이야기가 된 지금은 저절로 ‘삼판서고택’이 되었다. 이 집이 문절공의 누대 종택이었다. 대사간을 역임한 간옹艮翁 이헌경李獻慶(1719-1791)이 지은 '집경루기集敬樓記'에 이 사실이 자세히 적혀있다. '집경루'는 동편 누각을 중수하고 그때 자손들의 요청으로 이헌경이 지었다. 글 일부는 이러하다.

"누각은 본래 이름이 없었다. 어느 날 종손의 맏아들 응련이 서울로 와서 헌경의 문을 두드려 누각의 이름을 요청했다. 헌경이 듣고 기뻐서 '어찌 아름답지 않은가! 시에 이르기를, 뽕나무와 가래나무도 공경한다 하였다. 하물며 그대 선조 문절공이 정, 황 두 판서에게서 물려받아 십 여대를 지켜온 집이 아닌가. 조상을 노래하고 추모하며 족친들이 모였음이 아니던가. 자손들의 공경심이 사라지지 않아 기울어지는 것은 붙잡고 퇴락한 것은 다시 고침이다. 족친들이 한 마음으로 조상을 공경하여 이룬 것이니, 이것이 어찌 한사람의 공경심으로 이루어진 일이랴. 자손들의 공경이 집중되어 이루어진 일이니, 어찌 집경이라 이름하지 않으랴' 하였다. 응련이 일어나서 절하며 말하기를 '삼가 가르침을 받들겠습니다' 하였다."

원문: 樓舊無名. 一日宗孫之胤應鍊來京師. 欵獻慶之門而請名其樓. 獻慶聞之喜曰豈不善哉. 詩云桑與梓必恭敬止. 桑梓有敬況乃祖文節公受之於鄭黃兩判書. 傳守十餘代者乎. 況乃祖歌而哭而聚國族於斯者乎. 宜子孫之敬之不衰. 傾者扶之. 壞者修之也. 諸族一心. 敬乃祖先底于成功. 此非一人之敬也. 集中子孫之敬而成之, 則盍以集敬名之. 應鍊起拜曰諾. 謹受敎

정도전이 환로 중년에 이 집에 와서 남긴 시가 있어 소개한다. 가슴 뛰는 거인의 모습은 간데 없고, 봄날 배 꽃을 바라보며 관조하는 한 시인의 모습이 오롯이 남아 있다. 시 제목이 '봄날 산 속 집에서(山居春日卽事)'였다.

한그루 배꽃 눈부시게 밝은데 一樹梨花照眼明

지저귀는 새들 봄날을 희롱한다 數聲啼鳥弄新晴

홀로 앉아 아무런 심사 없이 幽人獨坐心無事

뜰에 돋은 풀만 한가로이 바라보네 閒看庭除草自生

1797년 5월, 판서를 역임한 홍의호洪義浩가 '집경루'의 누각 글씨를 쓰고 남긴 시가 있어 소개한다.

성 동쪽 큰 나무 원림 맑고 그윽한데 城東喬木菀淸幽

세 판서깨서 작은 누각 하나 남기셨네 三判書傳一小樓

일찍이 간옹께서 이 사실 기록했으니 曾爲艮翁題紀實

십년 전 사람 일이 벽 사이 남아 있네 十年人事壁間留

삼판서고택은 원래 영주시 영주동 431번지에 600년 세월, 그야말로 찬연한 고택古宅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사진을 보면 용마루는 기울고 서까래는 처져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961년 홍수에 사라져버렸다. 근년 영주시는 국비와 시, 도비를 책정하여 서천西川이 내려다보이는 제민루濟民樓 옆에 복원했다. 당연히 문절공종손이 살아야할 집이지만, 그렇지 못하고 각종 문화행사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문절공 종택은 근년 무섬마을에 종택과 사당을 마련하고 표준 영정影幀을 모심으로서 새로운 무섬시대를 열어가고 있다.

많은 문중에서 려말선초의 문헌 기록이 없음을 한 결 같이 한탄스러워 한다. 실록과 금석문 외에는 없다. 예안김씨 역시 예외일 수 없다. 족보 자료는 그나마 남아 있는 유일한 자료이다. 이를 근거로 조금 더 추정해보면, 김숙량의 처음 부인은 영주의 호족이던 감천문씨 문재도文載道의 딸이고, 다음 부인은 공주이씨였다. 김중량의 묘소는 영주와 송도의 중간쯤인 경기도 이천에 있으니, 아마도 중간 지점인 이천 지역에 어떤 근거지를 갖고 있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해 볼 수도 있다. 두 아들의 공주와 개성으로 이거 연유는 추정할 수 없고, 다만. 6세조 성세成世부터 중앙관직에 진출했다하니 그때부터 예안 이외의 지역에 근거지가 마련했을 수도 있다. 소량의 고모가 영주 안동권씨 입향조 사복재思復齋 권정權定의 부인이 된 기록 이외에는 8대까지 형제자매가 없는 외아들로 연결되어 있으니, 이 또한 려말선초의 각 성씨들의 상계계보에 보이는 공통적인 현상이다.

김소량은 떠났다. 조상들 묘소가 산재한 수 백 년 고향을 버리고 떠났다. 미련이 없지 않았을 것 같다. 그러나 누가 알았으랴! 이사 발복發福인가! 아들 형제에게 이런 경사가 있을 줄을! 증潧, 담淡 형제는 1435년 같은 날 함께 급제했다. 그것도 약관의 나이로 합격했다. 형제 동시 합격했으니 그 영광은 이루 말로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조선이 개국하면서 지방 호족들의 문과급제 배출은 가문 전체의 존귀, 비천을 가르는 절대적 기준이었다. 많은 가문들이 문과급제를 배출하지 못해 명멸해갔음이 이를 증명한다. “진사 한 장에 양반 한다”한 말은 사실이었다. 따라서 문절공 형제의 문과급제 합격은 그만큼 가문의 이정표를 놓은 의미가 있었다. 이를 계기로 증손자, 고손자 문과급제가 이어져서 가문의 위상이 반석에 놓이게 되었다.

뿐만 아니다. 소량은 자신의 처가로 인한 영주 혼맥이 생겼지만, 자녀 3남 1녀의 내, 외손들이 고향 예안의 인물들과 바로 연결되었다. 전 시대 없었던 놀라운 일이 소량의 부자시대에 한꺼번에 일어났다. 이 무렵 영주로 이사 간 전후 기간이지만, 이 기간 전입해 온 도산의 성씨들, 즉 영양김씨-안동권씨-봉화금씨-영천이씨-진성이씨-광산김씨-횡성조씨로 이어지는 성씨들의 가족 같은 계보의 중심에 문절공의 가문이 있었다.

광산김씨는 오천 일대에 세거했고, 서편 내륙으로 영양김씨, 오천 상류 부포에 안동권씨, 봉화금씨, 단양우씨, 횡성조씨, 그 상류에 영천이씨, 진성이씨 등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들 각 성씨들의 입향조는 금재琴梓, 권겸權謙, 김효로金孝盧, 이헌李軒, 김수생金遂生, 이계양李繼陽, 조대춘趙大椿 등이었는데, 공교롭게도 이들 모두와 통혼관계에 있었다. 그리고 이들 성씨들의 대표적 인물들인 호조참판 권수익權受益, 지중추부사사 이현보李賢輔, 생원 김유金紐, 판중추부사 李滉, 공조참판 조목趙穆, 현감 금란수琴蘭秀 등이 모두 문절공과 당내堂內 촌수였다.

셋째 아들 김홍金洪의 자녀들도 예사롭지 않다. 사위, 외손에 좌찬성 이언적李彦迪, 대사간 박승임朴承任을 배출했다. 거의 당대의 인물들이 통혼 관계에 있었던 셈이다. 이런 혼인은 다음 세대인 민절공 백암 김륵 시대에 가문 전체가 만개滿開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나의 특징이 있다면, 백암 이후 혼인이 대부분 안동권 가문과의 혼인으로 연결되었다는 점이다. 이로써 예안김씨는 새로운 영남 사족들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선구적 위치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