寒沙亭 講座
장소: 寒沙亭(안동시 북후면... )
날짜: 2011년 9월 17일(토요일)
강사: 李性源(안동청년유도회회원)
예안월천과 월천선생
1. 안동과 예안
2. 다래, 부포 답사 스케치
3. 월천과 퇴계
4. 예안과 월천학파의 단절
5. 한사정
부록
관련자료 사진
1. 안동과 예안
1) 예안의 산천
안동은 도산권, 임하권, 하회권으로 나누어진다. 그래서 예로부터 안례통, 천수통 등의 이름으로 불렀다. 도산권은 오천에서 청량산까지 이어지는 강변길을 ‘도산9곡’이라 했고, 그 옛 이름이 ‘예안禮安’이어서 안동과는 구분되었다.
20세기 초까지 정확히 1914년까지 도산은 ‘예안’이라 했다. 역사도 안동은 《영가지》에, 예안은 《선성지》에 기록했다. 예안 사림과 안동 사림은 구분되었고, 예안은 예안향교가 있었고, 안동은 안동향교가 있었다. 예안향교는 안동향교를 선도했다. 예안향교는 도산서원과 더불어 영남 사림과 영남 여론의 진원지였다. 안동에서 예안은 항상 ‘예안’으로 존재했다. 그래서 안동문화는 ‘안예문화安禮文化’라고 해야 옳다는 말이 생겨나기도 했다.
사진: 영지산에서 조망한 도산풍광
옛 예안은 지금의 와룡면, 녹전면, 예안면 일부가 도산면과 더불어 예안이었고, 안동은 예천의 감천, 봉화의 내성, 춘양, 재산을 포괄하고 있어서, 행정구역 속에 별도의 섬 같은 특이한 모습의 행정구역으로 존재했다.
예안에 대해서는 16세기 《선성지》를 쓴 권시중은 “조물주가 특별히 만들어 놓은 것 같으며, 고금의 선현, 대인들이 시를 읊조리며 ‘진경’이라고 찬탄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했다. 도산 진경은 진경산수를 그린 정선를 불러들였다. 강세황, 김창석 같은 화가도 도산을 그렸다. 《택리지》를 쓴 이중환은 우리나라 최적의 주거지로 안동의 두 지역을 거론했다. 바로 도산과 하회다. 이중환의 설명은 이렇다.
“그러므로 강촌으로는 영남 예안의 도산과 안동 하회가 제일이다. 도산은 주변 산이 강과 조화되어 있다. 산은 너무 높지 않다. (그래서) 황지에서 발원한 낙동강은 이곳 도산에 이르러 골짜기를 벗어나 비로소 강이 된다. 강변 산은 석벽을 이루고, 또한 그 산의 발치는 물에 잠기어 경치가 뛰어나다. 물은 나룻배가 건너기에 넉넉하고, 마을 안에는 오래된 나무가 많아 정취가 있다. 산 아래 강변은 모두 경작지다.”
강의 일생은 사람과 유사하다. 유년, 청년, 장년, 황혼이 있다. 낙동강도 그러하다. 멀리 황지에서 발원한 낙동강은 거친 강원도의 산과 투쟁하며 드디어 이곳 도산에 이른다. 청량산은 유년기를 마감하는 마지막 관문이다. 청량산을 지나면서 낙동강은 빛나고 빛나는 청년의 강이 되었다. 산은 더는 강을 방해하지 못한다. 강은 이제 산으로부터 벗어나 마음껏 인생을 구가한다.
청춘에 무엇을 못하랴! 강은 구비와 들과 못과 내와 협峽을 만들었다. 그래서 도산 일대의 강은 단천, 낙천, 분천, 월천, 오천을 빚어냈고, 도영담倒影潭, 월명담月明潭, 한속담寒粟潭, 미천장담彌川長潭, 백운지白雲池, 탁영담濯纓潭, 통소 鯒沼, 오담鰲潭을 만들었으며, 드디어 도산 9곡을 빚어냈다. 가송협, 단사협을 만들고 수많은 강돌과 대와 수석도 만들었다.
강이 빚은 이런 풍광은 주변 산과도 그대로 어우러졌다. 이 산에 대해 이중환은 “너무 높지 않다”고 했다. 그것은 곧 가슴에 와 닿는 살기 좋은 곳에 대한 또다른 표현이다. 도산의 그러한 환경은 가거지지의 핵심 조건이다. 또한 발군의 인재 배출과도 연관된다. 아니 결정적 역할을 했다.
문화관광부가 매년 선정하는 ‘올해의 문화 인물’을 보니 안동 출신이 여섯 명인데, 그 가운데 도산 출신이 네 명이나 된다. 불곡 이천, 농암 이현보, 퇴계 이황, 육사 이원록이 그들이다. 최근 영양군의 조지훈 선생이 선정되었고, 다른 인근 시군에는 거의 없다. 면 단위 행정 구역에 불과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놀랍다고 할 수 밖에 없다.
높지 않은 산은 사색의 환경을 제공한다. 사색은 사람을 만든다. 그런 까닭에 같은 강촌이라 하더라도 ‘살 만한 땅(可居之地)’과 ‘볼 만한 땅(可觀之地)’은 구별된다. 퇴계가 청량산을 ‘오가산吾家山’이라 할 만큼 사랑했지만 가서 살기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한 것도 이 때문이다. 퇴계 종택과 도산서원은 살 만한 땅의 전형이다. 적어도 퇴계의 안목으로는 그렇다.
산의 발치가 물에 잠겨 조용하고 정취가 있는 곳이 도산이었다. 또한 산은 푸른 병풍처럼 둘러져 있어서 ‘동취병산東翠屛山’, ‘서취병산西翠屛山’이라 했다. 그래서 고인들은 도산의 풍광을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별천지’라 하고, 그 산색과 물색을 ‘금수 산 빛(錦繡山光)’과 ‘유리 물색(琉璃水色)’이라 했다.
도산의 강산은 진정 아름답다. 아니 절묘하다. 낙동강 1,400리를 흐르는 동안 유일하게 이곳 30~40리에서만 그런 모습을 연출했다. 이중환은 도산에 이르러 낙동강은 비로소 강이 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강은 도산에서 시작되었고 도산에서 끝나 버렸다. 강은 도산에서만 여울과 구비와 소沼와 들과 협곡을 한꺼번에 빚어냈고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도산을 벗어난 상, 하류 어디에도 이런 지형이 없다. 상류에는 협과 구비는 있으나 소와 들이 없고, 하류에는 들은 있으나 소, 내, 곡, 협이 없다. 상류에서는 거친 물이 산을 비집고 조급하게 흐르며, 하류에서는 끝없는 모래 위를 그저 정처 없이 흐를 뿐이다. 하회마을 앞으로 흐르는 낙동강을 보라. 같은 안동이지만 어느덧 사행천이 되어 넓디넓은 백사장을 게으른 뱀처럼 밋밋하게 흐를 뿐이다. 초로의 피로가 역력하다. 하회는 강이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강의 모습이 아름다울 뿐이다.
곡曲은 구비다. 강이 틀어지는 곳이 구비다. 구비에는 여울이 있고, 여울 가에는 마을이 있다. 도산 9곡은 구비이며 여울이며 마을이다.
1곡 운암곡은 김부필을 비롯한 일곱 군자가 있다 하여 군자리라 했다. 2곡은 월천곡, 3곡은 오담곡으로 우탁, 조목, 금란수의 고향이다. 4곡은 분천곡으로 강호 문학의 창도자로 일컬어지는 이현보의 고향이다. 5곡은 탁영곡으로 퇴계 이황이 강학한 도산서당이 있다. 6곡은 천사곡으로 저항 시인 이육사의 고향이다. 7곡은 단사곡, 8곡은 가송곡, 9곡은 청량곡으로 단사협, 가송협, 청량산이 있다.
사진: 표암 강세황의 ‘도산서원도’
해설: ‘택리擇里’는 ‘마을을 가린다’ 뜻이므로,『택리지擇里志』는 곧 살기 좋은 마을에 대한 이론서라 할 수 있다. 이중환은 그 이론의 지침이라 할 수 있는 ‘복거총론卜居總論’이라는 글에 안동의 2지역을 지적했다. 위 사진은 도산서원 일대의 풍광을 그린 표암의 그림이다.
그런 예안이었지만 1974년 건설된 안동댐은 이런 도산 문화에 결정적 타격을 주었다. 예안읍은 완전 수몰되었고, 도산 9곡도 6곡까지 폐허가 되었다. 그 결과 대여섯 개의 하회마을이 간단히 수장되었고, 도산서원 하나만 달랑 남았다. 그래서 어느 학인은 “도산 길은 슬프다”고 했다.
도산서원 역시 상처 받기는 마찬가지다. 댐 건설이 풍광에 치명적인 상처를 주었다면, 보상 차원에서 추진된 성역화 사업은 더욱 치유되기 어려운 내과 수술이 되었다. 사람들은 도산서원이 보존되었음을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다르다. 지금 도산서원은 건물만 달랑 남겨진 형국이다. 도산은 퇴계에게 몽매에도 잊지 못할 터전이었는데, 그것은 바로 산수의 조화 때문이었다. 그러나 호수로 변하고 산천이 망가진 오늘의 도산은 적어도 퇴계가 염원한 도산은 아니다.
도산서원 성역화 사업은 또 어떤가. 그것은 원형은 물론 남아 있는 유적마저 변형했다. 지금 보면 댐 축조 당시의 우물, 못, 담, 계단, 길, 심지어 나무 한 포기까지 어느 하나 원형이 남아 있지 않다. 도둑을 막기 위해 그렇게 높은 견고한 담을 만든 것인가? 못(淨友塘)이 미어질까 두려워 그런 육중한 장대석으로 쌓은 것인가? 우물(冽井)이 없어질까 그렇게 변형한 것인가? 주변 풍광이 망가졌으니 아예 새로운 원형을 창출하고자 한 것일까? 위기지학爲己之學과 경敬 공부의 적지 도산은 사라졌다. 어쩌면 퇴계가 벌써 이곳을 떠나 버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유적을 잘 보호함은 후손 된 도리다. 정말 성역처럼 지켜야 한다. 그러나 유적을 성역처럼 만드는 일은 바람직하지 않다. 성역화는 인물의 신 우상화를 전제한다. 성역과 우상은 대상을 무겁고 무서운 존재로 만든다. 그래서 아무도 가까이 할 수 없는, 또는 가까이 가고 싶지 않은 박제된 인물을 만든다. 있는 그대로의 유적과 인물이어야 한다. 시是도 말하고 비非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퇴계의 제자 월천 조목의 말씀처럼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셨을까’ 하는 물음을 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지금이라도 도산서원을 그 옛날 모습대로 돌려놓기를 희망한다. 가령 담장만이라도, 아니 우물만이라도 내 어릴 때의 모습 그대로 복원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최소한 관광객들에게 퇴계가 종합 캠퍼스의 총장 같은 모습으로 인식되지 않기를 바란다. 도산서원은 퇴계의 숨결과 체취를 느낄 수 있는 그런 분위기로 조성해야 한다. 퇴계는 ‘무거운 퇴계학’과 ‘근엄한 퇴계’에서 벗어나 언제든지 대화를 할 수 있는 따뜻하고 다정다감한 우리의 선조여야 한다. 퇴계는 사실 그런 분이셨기에 더욱 그러하다. 도산서원은 궁극적으로 퇴계의 숨결과 호흡이 매화와 난의 향기같이 은은히 퍼지는 그런 곳이어야 한다.
사진: 강세황의 도산서원도
해설: 『선성지』의 저자 권시중은 청량산 아래 박석으로부터 월명, 백운, 단사, 퇴계, 분천, 월천, 비암, 오천까지 ‘도산9곡’이라 하고, 다시 ‘도산 14곡’으로 세분해서 분류하기도 했다. 본문의 분류는 19세기 이야순의『광뢰집』에 의한 것이나, 이이순의『후계집』에는 운암곡과 월천곡 사이에 비암곡을 제2곡으로 하고 오담곡을 제외시켰다. 14곡이 9곡으로 다시 정리된 연유는 주자의 ‘무이 9곡’ 영향이었다.『후계집』에 “주자의 ‘武夷十二詩’와 퇴계의 ‘陶山十八絶’은 구구절절 부합하는 까닭에 시험 삼아 빼어난 구비를 ‘무이 9곡’의 예에 의해 분류했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퇴계는 1547년 ‘희롱삼아 7대 3곡을 짓는다(戱作七臺三曲)’고 하고, 단사곡, 천사곡, 석담곡石潭曲의 3곡을 언급한바 있다. 퇴계의 ‘도산12곡’은 이런 실체적 구비와 직접적인 관련성은 없다.
2) 예안의 혼맥
예안 혼맥은 선성김씨로 시작된다. 선성김씨는 선성이씨와 더불어 예안(현 도산과 예안, 녹전, 와룡 일부포함)의 토성이다. 지금 도산서원에서 6Km 정도 하류마을인 부포에는 안동권씨, 봉화금씨, 횡성조씨 등이 거주했고, 그 상류 마을에 분천, 토계에는 영천이씨와 진성이씨, 부포 하류인 오천 등의 마을에는 선성김씨, 광산김씨, 영양김씨 등이 위치하고 있었으며, 김담, 권수익, 김유용, 이현보, 김효로, 이황, 금재, 조목은 그 무렵 이들 성씨들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16세기 예안의 혼인관계를 보면, 조목趙穆(1524-1606, 생원, 공조참판)과 금란수琴蘭秀(생원, 현감)는 처남매부인데, 외조부와 처조부가 권수익權受益(문과, 동지중추부사)이다. 권수익의 생질이 이현보李賢輔(1467-1555, 문과, 효절공)고, 외삼촌이 김담金淡(1416-1464, 문과, 문절공)이다. 김담의 외손자가 금재琴榟(훈도)인데, 금재는 김효로金孝盧(생원)의 사위이며, 이황李滉(1501-1570, 문과, 문순공)과 사돈이다.
도산의 명문들은 토성인 선성김씨로 부터 출발하고 그 중심에 김담이 존재한다. 선성김씨는 김담의 아버지가 이 무렵 이미 영주로 이사를 간 이후지만, 그때까지 전입해 온 영양김씨-안동권씨-영천이씨-광산김씨-횡성조씨-봉화금씨-진성이씨로 이어지는 성씨들의 가족같이 얽혀진 계보의 선두에 있었다.
여기서 잠시 선성김씨 김담 4남매와 관련한 혼인관계를 대략 표시해보면,
1. 金尙(선성김씨 시조, 高麗 戶長)-存誠-敦富-希寶-成世-紐-方軾-輅-金小良
2. 金小良-金潧(문과, 이조좌랑)
-金淡(문과, 이조판서, 문절공) -金萬鈞(현감)-金綏(시양자, 광산김씨)
-金萬秤(생원)....-金玏(문과, 이조참판, 민절공)
-女 琴致湛-琴榟(훈도)-女 李寯(李滉의 맏아들)
-金洪-女 權受益
-女 權謙-權受益(문과, 이조참판)- 權雲(문과, 정언)
-女 趙大椿-趙穆(생원, 공조참판)
-女 琴蘭秀(생원, 현감)
-權受福(무과, 북병사)-權洙(문과, 학유)
-女 李欽(현감)-李賢輔(문과, 지중추부사, 효절공)-李仲樑(문과, 감사)
-女 李誠孫(이현보 종조부)
2-1. 金淡 -萬鈞(현감)
-萬秤(생원)-佑-士文(문과, 정언)-玏(문과, 이조참판, 민절공)
-女 琴致湛-琴榟(훈도)
*金崇之-金淮-金孝盧(광산김씨입향조)-金緣(문과, 감사)
-金澗-女 金萬鈞 -金綏(생원)
-女 琴榟(봉화금씨입향조)- 琴應夾(현감)
- 琴應壎(현감)
-女 李寯(李滉 맏아들)
-女 李寘(李瀣 넷째아들)
2-2. 金洪-女 權受益
*李軒(영천이씨입향조)-李坡-李孝孫-李欽-李賢輔(문과, 효절공)
-李誠孫
-女 金有庸-女 李繼陽(진성이씨입향조)-李埴-李滉(문과, 문순공)
-女 金洪 -李堣(문과, 감사)
*金遂生(영양김씨입향조)-金智老(문과, 신주지사)-金有庸(현감)
-女 琴滌(현감).....-琴致湛 -琴榟
2-3. 權謙-權受益(문과, 동지중추부사)
-權受福(무과, 북병사)-權洙(문과, 학유)
-女 李欽(현감)-李賢輔(문과, 효절공)-李仲樑(문과, 감사)
-女 李誠孫(이현보 종조부)
*權受益- 權鯤(진사),
- 權雲(문과, 정언)
-女 趙大椿(횡성조씨입향조)-趙穆(공조참판) -趙錫朋(문과,)
-女 琴蘭秀(생원, 현감)
다시 정리해보면, 김담의 생질이 권수익이며 금재는 외손자다. 권수익은 김담이 외삼촌이며 이현보는 생질이고, 조목은 외손자며 금란수는 외손서다. 이현보는 권수익이 외삼촌이고 김담은 어머니의 외삼촌이며 김유가 사돈이다. 조목은 권수익이 외할아버지이고 금란수는 매부이다. 김유용은 김담의 동생 김홍과 이황의 조부 이계양이 사위이고, 장인이 이현보의 증조부다.
김효로는 사위가 금재이고 김담의 아들 김만균이 종매부이다. 금재는 김담이 외할아버지이고 김효로가 장인이며 이황이 사돈이다. 이황은 금재가 사돈이며, 다음 세대인 조목, 금란수, 이숙량, 김부필, 김륵 등이 제자가 되어 학연으로 또 한 번 연결되었다.
흥미로운 점은, 김담의 생질 권수익이 동생 김홍의 사위가 되었으니, 김담의 입장에서 보면 권수익은 생질이며 질서가 되고, 김담의 아버지 입장에서는 외손자가 친손녀와 결혼을 한 경우이다. 권수익의 입장에서 보면 김홍은 장인이며 동시에 외삼촌이다.
한편 권수익의 여동생들은 이현보의 종조모와 어머니가 되었으니, 이는 친정 자매가 시댁 숙질이 된 경우이다. 이현보의 입장에서 보면 종조모가 다시 이모가 되며, 이현보의 아버지 입장에서는 작은아버지가 동서가 된다. 이는 도산향내의 선성김씨, 안동권씨, 영천이씨의 중첩적인 혼인의 한 단면이다.
놀랄 일은 아니다. 이 무렵은 아직 성리학적 가치관이 확립되기 이전이라 중첩적인 혼인은 물론이고 ‘동성동본혼인’, ‘자녀균등상속’, ‘윤회제사’, ‘외손봉사’ 같은 것이 보편화된 시대였다. ‘양자제도’도 없었다. 이런 풍속은 조금 뒤 『주자전서』가 읽혀지고, ‘서원書院’이라는 건물이 지어지면서 급격히 변모했다.
『선성김씨족보』를 보니 김담의 맏아들 김만균이 죽자 그 부인이 “종질 김유를 시양자로 하고 제사를 지내게 했다(夫人從姪金綏以侍養子奉祀)”는 기록이 보인다. 양자를 하지 않아 대가 끊어졌음은 물론이다. 혹시 이런 점에 대해 궁금한 사람은 『안동권씨성화보』한권을 구해보기 바란다. 구할 수 없으면 도서관에서 빌려 복제를 하면 된다. 이 책을 보면 ‘안동권씨와 안동권씨의 혼인’이 얼마나 많은 가를 우선해서 볼 수 있다. 선악을 떠나 ‘동성동본혼인’은 우리 조상들에게 생소한 방식은 아니었다.
3) 선성김씨전의비와 봉화금씨변의비
도산서원을 지나 강변을 따라 8Km 정도 상류로 오르면 백운지白雲池라는 곳이 나온다. 보통 ‘배오지’라 부른다. 지대가 낮아 자주 강이 범람했다고 한다.
백운지에는 두 개의 비석이 있다. ‘봉화금씨비석’과 ‘선성김씨비석’이다. 두 비석은 서로 조응한다. 선성김씨 비석은 동편 밭 기슭에 있다. 비석 좌우에 일곱 개의 상석이 놓여 있고, 비 전면에는 ‘선성김씨7세분형전의비宣城金氏七世墳瑩傳疑碑’라 쓰여 있다. 풀이하면 ‘선성 김씨 7세까지의 분묘라 전해짐을 표하는 비석’이라는 뜻이다. 확실하지 않은 이야기를 근거로 후손들이 세운 것이다. 요컨대 수수께끼의 비석이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안동 선성김씨의 뿌리를 이해하는 소중한 자료가 된다. 비석 글 일부를 풀어 보니 대략 이렇게 쓰여 있다.
“우리 김씨는 고려 때부터 대대로 예안현에 살았다. 시조 호장공으로부터 7세까지의 묘소가 북쪽 백운산白雲山에 있다고 전해졌는데 지금은 타인이 차지했다. 지금 산 위에 퇴락한 묘 두 기와 그 아래 십여 기의 묘가 있으나 모두 비지碑誌 글이 없어 증거 할 수 없다. 아, 슬프다!
낭장공의 아들이 영주로 이사했고, 아들 형제는 교리와 이조판서가 되었다. 판서의 둘째가 현감이 되어 산 아래 십여 리의 거리에 와서 살았다. 자손들이 이처럼 번성했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부터 수호하지 않아 타인에게 점취당해 버렸다.“
안동 도산의 선성김씨는 16세기에 이미 이조판서 김담, 형조참판 김늑을 배출한 명문이었다. 특히 김담의 가문은 ‘3판서댁’이라 했을 정도의 명가였다. 형부상서를 역임한 정도전鄭道傳의 아버지 정운경鄭云敬이 이 집에서 살다가 사위 공조판서 황유정黃有定에게 물려주었고, 황유정의 외손자인 김담이 이 집에서 태어나 이른바 ‘3판서댁’이 되었다. 비문에 쓰인 이조판서는 김담을 말하고, ‘산 아래 십여 리에 산 인물’은 현감을 역임한 김담의 아들 김만균金萬鈞을 말한다.
『농암집』에 보면 농암이 승지가 되어 오니 어머니가 가사를 지어 “승지가 오거든 내가 지은 노래로 노래하라” 했는데, 그 가사가 ‘선반가宣飯歌’였다. 농암은 이때를 술회하며 “이는 대개 어머니가 어려서 부모를 여의시고 외삼촌댁에서 성장하시어 승지 벼슬이 귀한 것을 알고 있었던 까닭”이라 했다. 여기서 외삼촌은 곧 김담을 말한다.
김늑의 『백암집』에 보면 충재 권벌 종손인 권두인權斗寅이 김늑의 외손으로 묘지명을 쓰기도 했다. 이처럼 선성김씨는 도산에 여러 성씨들이 입향할 무렵 최고의 명문이었다. 그러나 김담의 아버지가 황유정의 사위가 되어 장인의 집을 물려받음으로써 영주로 가게 되고, 이후 영주가 새로운 전거지로 자리하면서 고향의 선영은 잊혀져 간 것이다.
그렇다면 선성김씨 묘소는 어떻게 되었단 말인가? 정말 타인이 점취한 것인가? 아니면 실전한 것인가? 그런데 이 비석의 바로 옆에 또 하나의 오래된 비석이 있다. 봉화금씨 비석이다. 여기에는 “봉성금씨백운산변의비鳳城琴氏白雲山辨疑碑”라 새겨져 있다. 풀이하면 ‘봉화금씨의 백운산 관련 의문을 해명하는 비석’이라는 뜻이다. 봉화금씨는 무슨 사연이 있어서 해명의 글을 써야 했는가? 또한 무엇 때문에 그것을 돌에 새겼을까? 궁금하여 우선 빼곡한 비문부터 읽어 보니 대략 이러했다.
“‘변의비’를 세움은 선성김씨 ‘전의비’를 변파辨破하기 위함이다. 전에 김씨들이 그 조상의 묘소를 잃고 이 산에 의문을 제기하고, 나아가서는 우리 선영 아래 단을 쌓고 비석을 세워 전의비라 했다. 그 글에는 “시조 이하 7세까지의 분묘가 세상에 전하기를 백운산에 있었다”고 했다. 그렇지만 백운산은 곧 우리 집 근원의 산이다. 산 중턱에 선조 정략공 이하 4세까지 묘가 연봉으로 있고, 그 위는 성재공 옛 묘 터가 있다. 이 묘 위에는 처음부터 하나의 묘 흔적도 볼 수 없는데 하물며 두 묘란 무엇이란 말인가?“
원문: 辨疑碑者辨破宣城金氏之所傳疑也 夫信以傳信疑以傳疑 若無可信之端而 (遞?) 以爲信無可疑之迹而 (遞?)以爲疑皆非也. 迺者金氏失其祖墓 起疑於此山 就吾先塋下 百餘武地築壇竪碑 題以傳疑 其文曰 自始祖以下七世墳瑩 世傳在白雲山....白雲一山 卽吾家之婺源也 其中榦則先祖*略公以下四世連封之地 而其上有惺齋公舊壙 又其上初無一頹封可見之痕 況二封乎...
(上之二十三年 己未 月 日立)
이로써 비석이 세워진 연유가 밝혀졌다. 요컨대 한때 두 가문은 이 백운산 묘소의 점취 여부를 둘러싸고 물러설 수 없는 한판 승부를 했다. 결과는 무승부. ‘전의傳疑’란 전해오는 의심나는 사항을 조리 있게 추정하는 글이다. ‘변의辨疑’는 의혹을 받고 있는 사안에 대한 조리 있는 해명의 글이다. 조리 있게 추정했지만 조리 있게 반박했다. 전의와 변의는 저마다 의문을 말끔히 씻어 줄 사실적 근거와 자료를 요구한다. 그래서 아직 이 승부는 결론이 나지 않았다. 미래에 분명한 시비를 가릴 날을 대비하여 장기 휴전에 들어갔다.
그러나 선영은 영원한 마음의 고향으로 잊을 수 없고 또 잊어서도 안 되는 곳이었다. 이런 염원을 반영한 듯 변의비의 끝에는 “비석을 묘아래 세우고 훗날 식자의 판단을 기다린다”는 구절이 새겨져 있고, 전의비에는 “이미 우리 산을 잃었지만 우리의 이 비석만은 상하게 하지 마라”라는 구절이 새겨져 있다.
한때 혼인까지 한 가까운 가문들이지만 선영은 양보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선성김씨는 전의비를 세웠고, 봉화금씨는 변의비를 세웠다. 이런 비석은 대한민국 어디에도 있지 않을 것 같아 그 자체로도 흥미롭다.
사진: 선성김씨전의비
해설: 비문 끝에 “後孫通訓大夫前行司諫院獻納 若鍊 撰, 象鍊 書”라 했고, “戊午 四月, 治石都監: 重鉉, 重鍊, 有司: 匡鍊, 永聞, 永天“이라 새겨져 있다. 김약련金若鍊(1730-1802)은 호가 두암斗庵으로 좌부승지를 역임한 학자로 『두암집』을 남겼다. 이 비석은 1798년 4월에 세웠다
사진: 봉화금씨변의비
2. 다래, 부포 답사 스케치
1) 예안주변
안동에서 동북쪽 35번국도를 20분 정도 달려오면 한국국학진흥원과 예안향교, 선성아문이라는 고건축이 있는 도산면 서부리가 나온다. 선성宣城’은 예안의 옛 명칭으로, 이곳에는 향교와 아문衙門이 있었다. 서부리는 과거 예안현 소재지였다. 지금 선성아문은 도산면사무소 서부출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이런 유적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 곳이 또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 대문 위에는 선성아문이라는 단아한 현판이 걸려 있는데, 그 글씨는 ‘선성 3필’의 한 분인 이숙량이 썼다.
사진: 석빙고(보물 305호)와 재현한 장빙제 모습
해설: 조선시대 나라로 올릴 진상품인 은어는 예안 그 산지여서, 예안현에서 석빙고를 축조하여 보관했다가 때에 맞추어 서울로 올려 보냈다. 영조13년(1737년) 예안현감 이매신李梅臣이 축조했다.
사진: 선성객사(경북유형문화재 29호)
해설: 숙종38년(1712년) 지어진 선성객사는 안동댐 민속박물관 주위로 이건한 ‘석빙고’와 더불어는 과거 예안아문에 소속된 건축물들이다. 댐 월영교 뒤편으로 보이는 선성객사의 야경은 매우 아름답다.
한국국학진흥원(이하 국학원)의 건축은 여러 부정적 요인을 안고 출발했다. ‘국학國學’이란 단어처럼 다소 막연한 건물이었다. 예산 관계로 경상북도와 안동시가 서로 그 관할을 떠넘기려 할 정도로 애물단지가 될 가능성이 농후한 건물이었다. 그런데 개관한 지 2년이 지나면서 놀라운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국학원은 세계문화유산지정에 착안, 활로의 일환으로 목판 10만 장을 모으기 시작했다. 해인사 팔만대장경을 의식한 것이었다. 2002년부터 그 사업을 추진했는데 짧은 기간 4만여 점이란 놀라운 양의 목판을 모았다. ‘모았다’고 하기보다는 ‘모였다’고 함이 옳은 표현이다. 각 문중에서 보관에 어려움을 느끼고 있던 시점에 국학원이 손을 내민 셈이었다.
이와 함께 생각하지 못한 일이 부수적으로 일어났다. 안동 일원에 소재한 문중, 종택, 서원에서 보관해 오던 고문서, 한적, 초상화 등의 진귀한 문화재가 그야말로 물밀듯 밀려온 것이었다. 위탁제도가 이를 더욱 촉발시켰다. 목판과 함께 위탁되기 시작하여 3년 여 사이 무려 300여 종택, 문중에서 10만여 점에 이르는 문화재가 들어왔다. 안동이 아니면 생각할 수 없는 실로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이었다.
국학원은 이런 현상에 고무되어 그동안 문중유물특별전, 선비문화특별전, 목판전시회 등의 사업을 의욕적으로 추진해 왔다. 그때마다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으며, 우리 것에 대한 향수를 진하게 느끼게 했다. 이제 유교박물관까지 마련했으니 실로 국학의 산실로 손색이 없다. 목판 10만 장 수집은 국학원 최대 과제다. 아직까지 망설이는 분이 계신다면 주저 없이 기탁하여 우리 문화유산이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국학원을 나와 몇 걸음 지나면 예안향교가 나온다.『선성지』에 “영남 여론이 모두 여기에서 나온다”고 할 만큼 지난날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한 향교다. 안동향교를 넘어서는 측면이 없지 않았다. 그럼에도 향교란 이미 역사의 뒤안길로 잊혀 가고 있다. 많은 고문서가 남아있고 여전히 의식도 행하지만 과연 언제까지 그런 전통이 이어질까?
마당에는 무궁화 한 그루가 있다. 너무 늙어 꽃을 피울 것 같지 않다. 100년이 넘은 토종 무궁화라고 한다. 언제까지 꽃을 피우게 될지 알 수 없다. 그래서 그런지 무궁화는 퇴락하고 이끼 낀 예안향교를 더욱 상징하는 듯하다.
사진: 예안향교(경상북도 유형문화재 28호)와 무궁화
해설: 예안향교의 고문서는 국학원에 기탁되었고, 지금 마루에 모재 김안국이 “오직 『소학』을 가르쳐, 학생들을 날로 새롭게 하고자 했다”는 시가 새겨진 현판이 있다.
2) 물에 잠긴 다래, 부포
향교를 나와 차로 2분 정도 올라가다 보면 길가에 ‘월천서당月川書堂’이라는 안내판이 좀 비스듬히 서 있다. 안내판을 따라 5분 정도 들어가면 문득 넓은 호수가 나온다. 호수 이쪽은 다래[月川]이고 저편은 부포浮浦라는 지역이다. 배가 정박되어 있는 것을 보니 사람이 오가는 모양이다. 그렇지만 지금 주민 이외에 이 길을 가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댐 수몰 지역 대부분이 그러하듯 이곳 역시 호수의 쓸쓸함만 남아 있다. 사실 특별한 일이 아니라면 가 볼 필요도 없다. 나 역시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다. 그렇지만 지금은 가 봐야 한다. 가서 그 옛날 다래와 부포라고 부른 이 동리의 사람들의 이야기에 대해 써야 한다. ‘1,000년의 역사를 가진 동네’이고, 역동 우탁과 월천 조목의 고향만으로도, 혹은 역동서원, 월천서당, 성재종택, 부라원루 등의 유적만으로도 찾아볼 만하지 않은가!
부포는 과거 명촌이었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마을이었다. 안동댐 수몰(1974년) 이후 30여 년간 부포는 그야말로 물속 같은 아늑한 망각의 지역이 되었다. 그런 부포가 세상에 다시 알려진 것은 최근이다. 부포가 고향인 이원정 어른께서 <물에 잠긴 부포 역사>라는 글을 『사랑방 안동』에 기고하고부터다. 이 글이 나오지 않았다면 부포는 어쩌면 더욱 오랜 세월 물속에 잠겨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른의 고향 유정은 절절하다. 그 한 부분을 옮겨 보면,
“부포는 수백 두락의 넓은 들이 기름졌고, 초가와 기와집이 조화를 이룬 100여 대촌 마을로, 예로부터 수를 누리는 사람이 많아 수향壽鄕이라 했다. 고려 중기에 세워졌다는 고색창연한 부라원루가 마을 어귀에 세워져 있었는데, 현판 글씨는 유명한 한석봉이 썼다. 나는 이 부라원루에서 지은 월천의 시 한 수로 부포의 아름다움을 자랑하고자 한다.
물은 산을 감싸 안고 흘러가고
펼쳐진 들판은 하늘 끝에 닿았구나.
풍월의 흥은 어김이 없으니
우리는 곧 신선일레라.
“부라원루 앞 강변에는 성재惺齋[금란수의 자]가 심은 소나무가 있는데, 월천은 이 솔밭을 ‘사평송’이라고 이름 지었다. 그때 원院에 올라 강을 바라보는 경치는 어떠했을까! 소나무 숲 사이로 멀리 월천서당이 어렴풋이 보이고, 소나무 가지에는 고매한 학이 앉아 운치를 더했을 것이다.”
기름진 들, 수향, 부라원루, 월천서당, 사평송 등 이런 풍광은 곧 부포의 키워드다. 그 가운데 사평송으로 날아드는 수백 마리의 학은 부포의 오랜 그림이었다. 댐 이전까지 학들은 이 숲을 뒤덮었고, 그것은 그대로 부포의 표상이 되었다. 어린 시절 이웃 마을에 살던 내게 부포의 산허리로 오고가는 수많은 학들의 모습은 저 알 수 없는 피안의 세계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나는 그때 중얼거렸다. ‘저 새들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지금도 나는 그 학들이 그립다.
사진: 예안호 주변에 최근 날아 든 학
사진 : 물에 잠긴 다래, 부포 일대
해설 : 월천서당에서 바라본 부포 호수, 호수 건너 멀리 ‘성재종택’과 ‘부라원루’가 있겠지만 잘 보이지 않는다.
3) 지부상소
그런데 부포에는 좀 더 일찍 들어온 인물이 있었다. 역동 우탁禹倬(1262~1342). 단양에서 태어났지만 만년에 이곳에 들어와 생애를 마쳤다. 문과 급제하여 성균관 좨주 등을 역임했다. 그가 감찰규정으로 있을 때 충선왕이 부왕의 후궁 숙창원비를 간음한 일이 있었다. 이에 역동이 백의白衣에 거적과 도끼를 메고 대궐 뜰에 나아가 소리 높여 간하니 동료들은 떨었으며 임금은 부끄러워했다. 이를 ‘역동의 지부상소持斧上疏’라 한다. 『고려사』의 기록은 이러하다.
“경들은 왕을 가까이 모시면서 신하로서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지 못하고 나쁜 행실이 이 지경에 이르도록 했으니 경들의 죄를 아는가! 이런 일은 만고에 변할 수 없는 강상綱常의 윤리인데 어찌 이와 같은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나라의 흥망은 왕의 인仁과 불인不仁에 달려 있는 법입니다. 원컨대 왕께서는 하루빨리 마음을 돌리옵소서! ”
죽음을 무릅쓰고 ‘아니 되옵니다’고 한 충신열사는 많다. 그렇지만 도끼를 메고 자신의 말이 틀리다면 “이 도끼로 내 머리를 내리치라”고 한 인물은 역동이 처음이다. 그래서 지부상소는 전통이 되었다.
1591년, 풍신수길이 보낸 사신이 “명을 치기 위함이니 길을 빌려 달라”고 요구하자 조헌은 도끼를 들고 상경하여 그 사신의 목을 벨 것을 주장했고, 한말 강화도에서 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되자 최익현 역시 도끼를 들고 광화문에 나타나 지부상소를 올렸다. 최근에는 충청도 사람들이 행정 수도 위헌이라는 결과가 나오자 상경하여 지부상소를 했다고 한다.
우탁은 언제부턴가 이름보다 ‘역동 선생’으로 더 알려졌다. 중국의 역학[易]이 우리나라[東]로 전해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동국유사』의 기록은 이렇다.
“우탁이 사신으로 들어가니 원나라 천자가 “그대는 역리易理를 아느냐” 했다. 답변하기를 ‘우리나라는 역이 없고, 또 아는 학자라도 어찌 통달한다 할 수야 있겠습니까. 역은 이학理學의 정수이니 바라옵건대 한 번만 보여 주시옵소서’ 했다. 천자가 역 책을 내려주니 여관으로 돌아와 하룻밤 만에 다 읽고 돌려주었다. 다음날 천자가 ‘모두 읽었는가’ 하니 답변하기를 ‘거의 보았습니다’ 했다. 천자가 즉석에서 암송하도록 하니 거의 막힘이 없자 칭찬하기를 ‘아름답구나! 작고 궁벽한 나라에 있기는 아까운 인물이다. 주자가 다시 동방에 태어났구나!’ 했다.”
이런 역동이었지만 격변의 고려 말 그는 미련 없이 관직을 버리고 이곳 부포로 들어와 유유자적하다가 81세의 나이로 세상을 마쳤다. 일찍이 안향 문하에 있었는데, 안향은 눈을 감으면서 제자들에게 “그대들은 내가 죽거든 역동을 나와 똑같이 스승으로 섬기라”고 유언했다. 그리하여 역동은 안향의 제자이며 당대의 인물들인 권부, 백이정, 이제현, 이곡, 이조년, 안축, 김득배 등의 스승이 되기도 했다. 사후 성균관대사성 이색이 주청하여 ‘문희공文僖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역동은 조선조에 더욱 평가받았다. 태조는 “우탁은 도학을 밝혀 동방 이학의 조가 되었다”고 했고, 명종은 “불교를 배척하고 도학이 없어지지 않은 것은 오로지 이 사람에게 힘입은 것”이라 했다. 1570년, 역동을 다시 평가한 분이 있었으니, 퇴계가 바로 그다. 퇴계의 한마디는 추모 건물 역동서원을 짓는 결정적 동력이 되었다. 그리하여 안동 최초의 서원이 이곳 부포에 창건되었다. 이후 안동은 마흔 한 개의 서원이 세워져서 유교 문화의 중심이 되었다. 퇴계의 <역동서원기문易東書院記文> 한 대목은 이러하다.
“선생의 충의대절은 천지를 움직이고 산악도 흔들 만하다. 경학의 밝음과 진퇴의 올바름은 후인의 사표가 되니, 백 세의 제향을 받을 자 선생이 아니면 그 누구이겠는가!”
“경학의 밝음과 진퇴의 올바름”은 역동의 학문과 귀거래를 말해 준다. ‘물러남과 불러도 올라가지 않음’은 ‘진퇴의 문제’로 도학자들이 중요하게 여긴 필수 덕목이었다. 역동은 그 시대의 가치관으로 볼 때 도학자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리하여 서원을 지어 백 세 뒤에라도 추모해야 할 인물로 여겨졌다.
이후 역동을 추모하기 위한 공간으로 단양의 단암서원, 영해의 단산서원, 안동의 구계서원 등이 속속 건립되었다.
고려 말, 인적 드문 시골 부포로 들어온 역동을 기려 사람들은 그 지명을 ‘지삼의知三宜’라 했는데, 그 뜻은 “역동의 도학, 역동의 예의, 역동의 절조”를 의미한다고 옛 문헌들은 기록했다. 예안을 지나며 역동을 추모하며 쓴 점필재 김종직의 시가 있어 소개한다.
麗運涵儲五百年 고려 오백년 쌓인 운수인가,
不圖衰叔有斯賢 어찌 이와 같은 현인이 태어났는가.
彤庭持斧眞唐介 왕정에 도끼든 왕개같고,
白屋窮經似鄭玄 초옥에 청백한 정현이네.
鄕里幾人懷素節 마을사람 누가 그 지조 생각하는가,
子孫今日稅荒田 자손들은 지금 거친 땅 갈고 있네.
嗟余晩負希顔志 아! 나는 안연의 뜻 저버리고,
獨拂儒紳一悵然 홀로 선비의 길 떨쳐버림을 슬퍼하네.
사진: 역동서원
해설: 퇴계의 발의로 김부필, 조목, 금란수, 금응협 등이 협의하고 예안사림이 협력하여 1570년 완공했다. 월천이 쓴 ‘역동서원사실’에 자세하게 건립과정이 기록되어 있다. 지금은 안동댐으로 안동대학교 구내로 이건 되었다.
3. 월천과 퇴계
1)퇴계식의 충고
역동을 생각하며 월천서당 푯말이 지시하는 길을 따라 들어가니 문득 눈앞에 넓고 넓은 호수가 나타난다. 호수뿐이다. 무엇 하나 남아 있는 것 같지가 않다. 그런데 둘러보니 산기슭에 월천서당이 보인다. 퇴계 3대 제자 중 한 분인 월천 조목趙穆(1524~1606)의 정자다. 올라가다 보니 퇴계가 쓴 월천서당 현판 글씨가 멀리서도 선명하다.
퇴계는 많은 현판 글씨를 썼다. 관물당觀物堂, 후조당後彫堂, 겸암정謙庵亭, 임연재臨淵齋, 설월당雪月堂, 선몽대仙夢臺, 성재惺齋, 경류정慶流亭, 송당松堂 등. 많은 사람들이 요청했고 써 주었다. 퇴계는 글씨를 써 주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사양한 것 같지 않다. 그런데 글은 그렇지 않았다. 매우 신중했다. 가령 비문은 잘 써 주지도 않았지만 써 주게 될 때도 사실 하나하나를 점고했고, 글자 하나하나를 따지고 따졌다. 적확성에 조금도 어긋나서는 안 되었다. 이는 조상과 인척이라도 마찬가지였다.
행장行狀에 대해서는 더욱 엄격해서 일생 동안 명종 임금을 제외하면 단 다섯 편밖에 쓰지 않았다. 정암 조광조, 농암 이현보, 충재 권벌, 회재 이언적, 그리고 촉망 받았지만 요절한 제자 금계 황준량뿐이다. 퇴계는 당시 수많은 친지들로부터 행장을 지어 줄 것을 요청받았겠지만 승낙한 것은 이 다섯 사람이 전부다. 퇴계의 안목에 일대기를 써 줄 인물은 그 정도에 지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 엄격함은 행장의 표현에도 다시 세분하여 적용되어 38세에 죽은 정암과 충재보다 10여세나 적은 회재는 농암과 더불어 ‘선생先生’이라 하고 충재와 금계는 ‘공公’이라 했다.
당대의 인물에게 글과 글씨를 받고자 함은 인지상정이다. 그래서 부탁했고 지금 저렇게 남아 있다. 그런데 퇴계가 월천에게 이 현판 글씨를 써 주는 심정과 월천이 그것을 받아 새겨 거는 심정은 다른 제자들의 경우와는 다르다.
유일재 김언기가 생전에 퇴계에게 가지 않은 인물이라면, 월천은 퇴계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간 인물이다. 김언기가 철저한 독자주의자라면, 월천은 더할 수 없는 추종주의자라 할 수 있다.
충고는 인간관계를 손상시키는 특효약이다. 애정과 우정을 잘 가꾸어 가고자 하는 사람이 가장 유념해야 할 한마디는 ‘충고하지 마라’다. 혹자는 말할 것이다. 가족이라면, 진정한 친구라면 충고를 해주어야 하지 않느냐고. 맞는 말이다. 그러나 틀린 말이다. 충고는 애정과 우정에 금이 가게 하는 비수다. 금방은 모른다. 나를 위한 것이려니 생각한다. 그런데 그게 그렇지 않다. 어느 날부터 나를 위한 그 충고는 은근한 부담으로 남아 그와 내가 정서적으로 함께하기 어려운 사람이라는 것을 서서히 인식하게 만든다. 충고는 충고하는 사람의 처지에서는 꼭 해 주고 싶은 말이지만, 충고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리 도움이 되지 않는다. 힘든 일상에서 충고의 무거움을 즐겁게 안고 살아갈 사람은 흔치 않다. 칭찬이 아니라면 차라리 침묵이 낫다.
퇴계는 충고를 극도로 아낀 분이다. 충고는 곧 인간관계에 상처가 된다고 굳게 믿었다. 형제들 사이에서도 “정성을 다하지 않는 충고는 상처만 남긴다”고 하며 매우 조심했다. 제자들에게도 그러했다. 제자들의 끊임없는 충고에 대한 열망에도 불구하고 퇴계는 충고하지 않았다. 이런 연유로 퇴계는 사관들로부터 “한 번도 남의 잘잘못을 말한 적이 없다(未嘗言人之過)”라는 평을 듣기도 했다.
그런데 오직 한 사람, 월천 조목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충고를 했다. 그것도 매우 아프게 했다. 월천은 아마 퇴계의 309명 제자 가운데 유일하게 충고를 받은 분이 아닌가 한다. 왜 그랬을까? 월천에게 한 충고를 통해 우리는 퇴계가 왜 위대한 교육자인지, 그리고 충고는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깨닫게 된다.
충고의 수단은 편지였다. 퇴계는 여러 측면에서 빛나는 업적을 남겼지만, 가장 주목되는 부분이 편지 교육이다. 퇴계의 학생 교육이란 사실 편지 교육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월천은 퇴계로부터 가장 많은 편지를 받은 사람 중 한 분으로, 생애 171통의 편지를 받았다. 그 가운데 109통을 정성스럽게 묶어 책으로 남겼는데, 『사문수간師門手簡』이라 했다. 말하자면 ‘스승의 편지’다.
편지에는 세 가지 정도의 직접적인 충고가 들어 있다. 첫째는 성격에 대한 것이다. 가령 월천이 37세 때, 금란수와 함께 퇴계를 모시고 오담烏潭에서 뱃놀이를 할 때의 일이다. 오담 소沼의 이름을 고치는 문제로 퇴계와 금란수와 몹시 다투었다. 발단은 퇴계가 ‘오烏’자가 아무 근거 없이 붙었다는 말을 듣고 새롭게 ‘풍월담風月潭’으로 고치자고 제안하자, 월천이 “어찌 다시 (제가 소유한) 이 소沼마저 가지시려고 하십니까?” 하며 거칠게 항의했다. 퇴계는 말없이 돌아갔고 곧 편지를 보내왔다.
‘말 없음의 대응’은 ‘충고하지 않음’과 더불어 퇴계 교육의 핵심이다. 충고는 오로지 편지로만 했다. 어디까지나 간접적인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편지 내용은 이러하다.
“어제 배 위에서 한 말과 그대의 얼굴을 살피니 나의 제안은 조금도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니 어찌된 일입니까? 사람 기질의 약점은 강함[剛]과 유약함[柔]에 많이 나타납니다. 내가 보니 두 사람 모두 학문을 한다고 하면서도 약점을 바로잡으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쓸데없는 객기로 다투기만 합니다. …… 바로 말하면 금군琴君은 비록 유柔함에 가까우나 유연한 데는 이르지 못하며, 가끔은 바름에 이르려고도 합니다. 그런데 그대는 강剛하다고 자부하나 굳건함에는 이르지 못하며, 도리어 몹시 사납고 조금도 겸손함과 공손함이 없어 다른 사람들의 말을 받아들일 뜻이 없습니다. 그러니 덕을 해치고 일에 방해됨이 금군의 행위보다 여간 심한 것이 아닙니다.”
원문: 昨日舟中奉規之言 看君意象 略不領略 何耶 人氣質之病 多見於剛柔二字...以滉所見 兩君皆不事學問 以矯其偏 只以客氣相爭...未見其一可也 又究極言之 琴君雖近於柔 不盡爲柔軟 而或出於正 公雖自負於剛 而不盡爲剛善 反多出於强戾暴悍之病 少無謙恭遜順虛以受人之意 其害德防物 有甚於琴君之爲
다음은 음주에 대한 충고다. 월천은 성격이 직선적이어서 술을 마시면 그대로 표현해 버렸다. 다음 편지는 이를 충고한 것으로, 매우 이례적이다.
“전에 여러분들이 고을 원과 함께 술을 마실 때 모두 많은 실수를 했지만, 마침내 그 허물이 그대에게 모두 돌아가는 것은 그대의 말이 다른 사람에 비해 더욱 거만하기 때문입니다. 또 들으니 그대가 일찍이 고을 원을 쌍벽정에서 만났을 때 원이 큰 잔으로 권했다고 하며, 취한 나머지 성주가 큰 그릇으로 멸시하고 모욕하는 것으로 의심하여 성낸 기색과 말을 하고 나와 버려 원이 매우 괴이하게 여겼다고 하니 정말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원이 마시지 않고 그대에게만 권했다면 모욕하는 뜻이 없지 않았겠으나, 이미 자신이 마시고 나서 권했으니 뭐 그리 모욕이라 하겠습니까? 강직한 것은 군자의 덕이나 지나치면 포악해지고 몹시 분을 내는 지경에 빠지는데, 과거의 그대 행동을 가만히 보면 이러한 성품을 가지고 있고, 술을 마실 때마다 그런 성격이 나타나니 결코 작은 근심이 아닙니다.”
원문: 年前諸君與城主 相從於杯酒間 多有失言 非獨君也而卒歸疵於君者 以君言比他尤近倨傲故也 又聞君嘗見 城主於雙碧 城主引大椀以屬君 君時已醉 疑城主以大器相慢辱 發忤色忤言 不肯飮 徑起趨出 城主甚以爲怪云云 未知信否 城主不飮而先飮君 則果似相嫚 旣先飮而相屬 何疑於嫚乎 剛雖君子之德 少過則入於暴悍强忿 從來竊瞯君資 有此根本 而又每發於酒後 此尤非小患
그 다음은 자만에 대한 충고다. 월천은 일찍부터 학문에 대해 상당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가령 41세 때 김성일, 우성전 등과 함께 공부하다가 의견이 다르자 다음과 같은 시를 써서 학문에 대한 자부심을 피력했다.
강 북, 산 남 큰 스승 모시고水北山南謁大師
여러 벗과 천고의 의문을 토론했네.群朋一室柝千疑
돌아오는 십 리 강촌 길歸來十里江村路
숲을 찾는 새들만이 아내.宿鳥趨林只自知
이 시에 대해 퇴계는 “‘돌아오는 십 리 강촌 길, 숲을 찾는 새들만이 아내’라는 구절은 바로 그대가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것을 초연히 홀로 터득했다’고 스스로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표현은) 시인의 낭만적 표현이라면 훌륭하나 학문하는 사람의 자세로 본다면 여간 잘못된 구절이 아닐 수 없습니다. 너무 빨리 자부하기 때문입니다” 했다. 이어서 “겸허하게 물러서며 온후한 뜻이 적으니 덕에 나아가는 공부에 방해가 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했다. 이처럼 월천을 지적하는 퇴계의 충고는 모두 아프고 직접적이다.
퇴계는 정성을 다한 감동을 전제했다. 그렇지 않으면 충고는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준다고 했다. 그런 퇴계였기에 제자에게도 정성을 다한 글을 썼다. 월천과 퇴계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충고의 상처’는 ‘정성을 다한 감동’의 윤활유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고, 그 수단이 편지였다. 스승의 충고를 진정한 충고로 받아들일 줄 아는 월천의 또 다른 성정이 있었기에 이런 충고의 왕래가 가능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월천의 폭발적인 성격은 이로써 보석으로 다듬어져 갔다.
월천은 이후 학봉 김성일, 서애 류성룡과 더불어 퇴계의 3대 제자로 성장했다. 뿐만 아니라 퇴계 사후 퇴계학파를 선도하고 장례를 주관했으며, 『퇴계집』간행을 주도했다. 월천은 퇴계 최초의 제자이자 최후의 제자였다. 그런 인간적 연緣은 사후에까지도 계속 이어져 퇴계의 제자 중 도산서원 사당에 유일하게 배향되는 영광을 얻기까지 했다.
충고하지 않은 퇴계에게 유일하게 충고 받은 월천은 이후 학봉 김성일, 서애 류성룡과 더불어 ‘퇴계의 3대 제자’의 한 사람으로 성장했다. 뿐만 아니라 퇴계 사후의 퇴계학파를 선도하고, 장례를 주관했으며, 『퇴계집』 간행을 주도했다.
월천은 퇴계최초의 제자였고 퇴계최후의 제자였다. 그런 인간적 연緣이 사후에까지도 영원히 이별할 수 없게 하여, 도산서원 사당에 유일하게 배향되는 영광을 얻기까지 했다. 월천은 사후 이런 평가를 받았다. 동계 정온(桐溪 鄭蘊)이 쓴 ‘묘갈문墓碣文’의 기록이다.
“선생의 아름다움 품성은 퇴계를 만나서 완성되었고, 퇴계의 도학은 선생을 얻고서야 빛을 발하였다. 선생이 아니라면 누가 퇴계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며, 퇴계가 아니라면 누가 선생의 깨달음을 간직할 수 있게 이끌어 주었겠는가!”
퇴계의 편지는 사랑을 가득담은 시선이었고, 그 시선은 월천의 전 생애를 비추어주었다. ‘스승과 제자’, 그리고 ‘교육’은 무엇인가? ‘사랑이 있는 시선’이 그 답이 아닌지 모르겠다. 사랑이 있는 시선이 있다면 그곳에는 이미 스승과 제자가 있는 것이며, 스승과 제자가 있다면 이미 교육은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교육이 별것인가? 온갖 교육이론과 교육행정을 말하는 자, 사랑이 있는 시선을 먼저 가지기를 권유하고 싶다. 이 시대 ‘교육’이란 단어가 부정적 화두가 되어 끊임없이 거론됨은 청소년을 향한 사랑의 시선이 부족한 기성세대들의 자세에 기인하고 있다. 그리고 이 시선 속에 진정한 인생의 약이 될 수 있는 ‘충고’를 어떤 학생에게 어떻게 사용해야하는 가를 곰곰이 생각하고 생각해야 한다.
교육은 사람을 변하게 한다. 변화시키는 것이 또한 교육이다. 퇴계의 편지교육은 월천을 변모시켰다. 어떻게 변모했을까? 월천이 마침 퇴계를 묘사한 글이 있어 읽어보니 문득, 글을 쓴 월천의 인품이 이미 이 경지에 와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되어 소개한다. 안목이 생겼고, 표현할 줄 알면 그도 이미 그 경지에 올라있음이 틀림없다. 월천의 퇴계평가는 이렇다.
“선생은 천품이 영오穎悟하고 신채神彩가 정명正明하였다. 기질은 온화하면서도 굳세고 언어는 완곡하면서도 직선적이었다. 학식은 해박하며 요령 있고, 행동은 온전하며 독실했다. 청정하되 과격하지 않고, 참여하되 굳이 바로잡으려 하지 않았다. 옛 것을 흠모하되 응체되지 아니하였고, 세상에 섞여 살았지만 세속에 흐르지 않았다.”
전 생애를 이끌어 준 스승이 죽었다. 월천은 마지막 글을 썼다. 별리의 글은 ‘제문祭文’이다. 월천은 목이 메어 ‘하늘이여, 하늘이여’하며 통곡했다. 원문은 ‘已矣 已矣 天乎 天乎’라 했는데, 제문에 이런 어휘 사용은 매우 드문 일로, 인간 월천이 스승 퇴계에게 향한 마지막 마음을 그대로 표현했다.
제문 글을 좀 더 보면, “밝은 해는 빛을 잃고 상서로운 구름은 색채가 사라졌습니다. 백년을 의지하고자 했으나 하루아침에 가시니 붙들고 울부짖어도 따라가지 못합니다. 나의 마음은 메어지고 도려내는 듯 아파옵니다. 아아! 이제 그만입니다, 그만입니다, 하늘이여, 하늘이여!” 이다.
원문: 瑞日淪光 祥雲沈彩 百年依賴 一朝長辭 攀號莫追 我心摧割 已矣 已矣 天乎 天乎
사진: 월천서당(경상북도 기념물 41호)
해설: 월천서당은 월천 아버지 조대춘趙大椿(1487-1573)이 1540년, 월천 나이 17세 때 세 칸 집으로 지었는데, 반은 기와 반은 초가의 형태로 지었다. 1590년 월천선생이 중수하고 퇴계에게 글을 받아 ‘월천서당’이라 하고, 묵재 이문건에게 ‘시재是齋’란 글을 받아 걸었다.
‘월천月川’지명은 외조부 권수익權受益이 명명한 이름인데, 월천이 호로 삼았다. 아버지 조대춘이 권수익의 사위로 예천 금당실에서 이곳으로 이사 와서 이 터전을 물려받았다.
현판 글씨 ‘月’은 좀 높고 ‘川’은 좀 낮게 쓰였는데, 구전에는 퇴계가 “달은 하늘에 있고 강은 땅에 있어 그렇게 썼다”고도 한다.
이밖에도 월천유적으로 부용정사芙蓉精舍, 군자지君子池, 미견석彌堅石, 소요단逍遙壇 등이 있었지만 모두 안동댐으로 인해 사라졌다.
사진: 『사문수간』과 퇴계의 편지
해설: 퇴계의 편지는 하나같이 정갈하여 하나의 작품을 보는 듯하다. 지금 남아 있는 편지들은 종이의 활용도와 우측아래의 싸인, 좌측 아래에 이름과 글씨들이 모두 조화 있게 있어 배치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는 퇴계의 단정하고 겸손한 삶의 자세 때문이기도 하지만, 상대에 대한 예의와 더불어 교육적 배려가 담긴 것으로 여겨진다.
『사문수간』은 어떤 경로로 옮겨진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도산서원에 보관되어 있었고, 정조16년(1792) ‘도산별시陶山別試’때 이만수李晩秀가 서울로 가지고가서 임금에게 보이니, 임금이 보고 발문을 지어 다시 반송한 바 있다.
4. 예안과 월천학파의 단절
1) 유일재 김언기의 경우
퇴계제자로 그 학맥이 끊어진 분은 두 분이다. 유일재 김언기와 월천이다. 퇴계 사후 도산 사림과 안동 사림은 경쟁적으로 추모 사업을 벌였다. 그래서 도산 사림은 1574년 도산서원을, 안동 사림은 1575년 여강서원을 짓기 시작하여 1576년 같은 날 퇴계의 위패를 봉안했다. 여강서원 건립은 퇴계학파의 분화를 의미하며 한편으로는 안동 사림의 힘을 상징했다. 그런데 이 서원의 초대 원장이 유일재였다. 안동권의 수많은 쟁쟁한 제자를 넘어서서 지명된 것이었다. 여강서원 초대 원장 추대는 안동 사림의 최고 학자임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나이 54세 때였다. 그렇지만 유일재의 영광과 학통은 사후 명성처럼 이어지지 않았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이것이 유일재의 고독이다.
고독의 이력은 이러하다. 학자는 학문으로 말한다. 학문적 업적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유일재는 학문적 업적이 없다. 없지 않았지만 없어져 버렸다. 임진왜란에 모두 불타 버렸기 때문이다. 학자에게 제대로 된 학문적 업적이 남아 있지 않음은 치명적인 약점이 된다. 유일재의 글은 지금 20여 편에 불과하다. 분명 많은 시문이 있었겠지만 지금은 없다. 이런 와중에 그나마 소중한 한 편의 글인 <상부백권초간서上府伯權草澗書>는 당시부터 그의 글이 아니라는 지적이 제기되어 엄청난 문중 시비에 휘말리기도 했다.
그것은 유일재가 여강서원 초대 원장으로서 안동부사 권문해에게 여강서원의 경제적 기반 확보를 위해 사액서원이 되도록 요청한 글이었다. 여강서원을 궤도에 올려놓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유일재는 원장으로서 원규院規를 마련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아울러 이 글을 썼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의성김씨들이 그들의 조상이 썼다고 했다. 이 글의 진위는 오랜 세월 회자되었고 아직까지 결론이 나지 않았다. 아마 영원히 결론이 날 수 없을 것 같다.
‘글 모음’이 ‘문집文集’이다. 글을 모을 수 없기에 문집을 만들 수 없었고, 문집이 없음은 유일재를 망각하게 했다. 그런데 유일재의 고독은 좀 더 다른 곳에 있다. 유일재는 분명 당대의 학자였다. 서당을 정식으로 열고 30여 년 한 결 같이 학생들을 가르쳤고 198명의 제자를 두었다. 16세기 유일재는 퇴계 이후 안동 최고의 학자였다. 그런데 왜, 안동 문학의 창도자인 유일재의 학맥은 이어지지 못했을까?
빛이 빛을 가렸다. 퇴계와의 관련 때문이었다. 유일재는 퇴계 제자명단에 올랐다. 올랐지만 곡절 끝에 올랐다. 유일재가 퇴계의 정식 제자 입문은 물론, 묻고 배우고 한 이력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퇴계집』 어디에도 유일재를 제자라고 인정할 만한 기록이 없다. 그래서 1차 제자 명단에는 포함되지 못했고, 범위를 넓힌 2차 명단에 들어갔다. 그런 연유로 유일재의 학문적 빛은 사후 퇴계의 광채에 바래져 갔다. 그것도 급속히 바래졌다. 퇴계 직계 제자들과 그 후예들의 견제 때문이었다.
유일재의 제자이자 한편으로는 퇴계의 제자인 남치리南致利를 여강서원에 배향하려는 시도가 좌절된 일도 유일재의 고독을 단적으로 증명하는 사건이었다. 퇴계가 죽었을 때 동문들은 남치리를 장례위원장격인 상례相禮에 추대했다. 그때 남치리의 나이는 28세에 불과했다. 이 기록이 의심스러워 문헌을 찾아보니 사실이었다. 나이 28세 제자를 상례로 추대하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남치리는 여강서원 건립 시 편액을 쓴 구봉령과 상량문을 쓴 조목, 그리고 봉안문을 쓴 류성룡 등과 나란히 원규를 지어 그들과 거의 대등한 위치에 있을 정도로 학행이 뛰어남을 증명했지만 37세에 요절했다. 그리하여 공자의 제자 안자를 빗대어 ‘계문안자溪門顔子’로 일컬어졌다. 이런 연유로 유일재 제자들에 의해 적극적으로 배향이 추진됐지만 퇴계의 주요 제자인 학봉 김성일, 서애 류성룡의 후예들에 의해 좌절되었다. 유일재 사후 아들 김득연이 다시 한 번 남치리를 여강서원에 추향하려고 애썼지만 역시 이들의 반대로 뜻을 이룰 수 없었다. 이로써 유일재의 학맥은 끊어졌다.
여담이지만 퇴계 제자는 1700년대 창설재 권두경이 처음 작성한 100명을 시작으로 이후 160명, 170명, 260명으로 계속 확대되어 드디어 1914년에는 309명이 되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적부 문제가 있었다. 가령 1914년에는 류성룡의 후손들이 그 내용적 오류를 지적하며 폐간까지 주장했고, 퇴계 후손들도 역시 격렬히 대응하여 『병산통문변록屛山通文辨錄』이라는 대응의 책을 발간하기까지 했다.
책 내용에는 율곡 이이가 퇴계의 제자로 등록된 것을 ‘지시식세知時識勢’, 즉 시류에 편승한 파렴치한 행위라는 칼날 같은 지적이 있어 무척 흥미를 끈다. 실상을 떠나 ‘율곡은 과연 퇴계 제자가 되는가’ 하는 의문이 당시에도 이미 존재한 것이었다. 퇴계 제자 309명은 그 실상보다는 퇴계의 생애에서 정식으로 배운 제자를 포함하여 그와 교유하거나 접촉한 인사 대부분을 망라한 숫자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유일재를 제자로 넣은 것 역시 그렇다. 실상보다는 정황에 의한 추입推入이기에 정통 제자들의 후예들과는 상이한 정서가 싹트고 있었다.
2) 월천학맥의 단절
그렇다면 월천학맥은 어떻게 끊어졌나? 지금까지 월천학맥에 대한 학문적 연구나 추적은 많지 않다. 학봉학맥, 서애학맥은 많은 연구 축적이 있었지만 월천학맥은 그렇지 않다. 사실 추적할 문헌도 많지 않다. 그렇지만 월천학맥이 존재함은 사실이다. 다시 말해 월천이 주도한 예안학맥이다. 당시만 해도 예안사림이 퇴계학맥을 선도하는 입장에 있었다. 장례절차, 문집간행, 서원건립 등 모든 추모 사업이 예안사림이 주도했으며 그 중심에 월천이 있었다.
그렇다면 월천학맥은 어떻게 존재했나? 월천학맥의 정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자료로 구전苟全 김중청金中淸(1566-1629)이 기록한 ‘청량산기행문’이 있다. 구전의 기행문은 퇴계가 1564년 청량산산행의 기록과 매우 유사한 분위기를 함축하고 있다. 산행 주인공만 퇴계에서 월천으로 바뀌었다 할 정도의 느낌을 준다.
퇴계는 생애 6, 7번 정도 갔다. 그때마다 단촐 한 산행이었다. 그런데 1564년은 달랐다. 16명을 초청했는데 13명이 참가했다. 혼자 사색하기를 좋아하며, 집단적 모임을 주도한 일이 거의 없는 퇴계에게 이 해 산행은 ‘퇴계식의 일상’으로 볼 때 매우 의례적이다. ‘유산遊山’의 의미를 알게 하고자 한 계획적인 산행으로, 퇴계 전 생애의 기념비적인 행사였다. 또한 마지막 청량산산행이기도 했다. 김중청의 청량산기행문은 전일 퇴계의 청량산 집단산행을 월천의 청량산 집단산행으로 연상하게 한다.
이 글 서문에 김중청은 자신이 월천학맥을 잇는 중심 제자임을 분명히 하고, 퇴계에서 월천으로 이어지는 학맥이 마치 중국의 공자와 70제자, 주자와 정이천, 정명도로 이어지는 학맥과 대비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 월천선생이 퇴계를 그리워하고 사모하는 것은 실로 보통 사람들이 옛사람을 사모하는 것보다 더하다”고 하며,“그 끝없이 사랑하는 데에 이르러서는 어찌 감히 나같이 보잘 것 없는 사람이 살펴볼 수 있겠는가, 아아 선생이 아니었다면 내 누구와 더불어 돌아갈까 ”라고 하고 있다. 이로써 자신이 퇴계-월천-구전으로 이어지는 학맥의 중심임을 공식 선언하고 있다.
김중청의 ‘유청량산기遊淸凉山記’의 서문은 이러하다.
“공자가 노나라에만 계셨다면 칠십 제자들은 동쪽의 산을 돌아다녀 보지 못하고 궐리闕里 에서나 노닐었을 것이고, 무숙茂叔 이 송나라에만 계셨다면 이정二程 이 남악南嶽에서 시를 읊조리지 못하고 염계濂溪에서나 시를 읊조리게 되어 세상에서 노닐고 읊조리고 즐길 만한 것이 없게 되었을 것이다. 중니仲尼 의 성스러움, 무숙의 어짊과 같은 것이 있은 연후에야 주회암朱晦庵과 장남헌張南軒 이 있을 수 있었고 이에 형산衡山을 유람하며 주고받은 시가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이 어찌 그 사람을 세상에서 볼 수 없다고 해도 그 사람을 보듯이 산을 보고 깊이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는 것이 아니겠는가? 무릇 청량산 봉우리 가운데는 장인(丈人)이라 부르는 것이 있는데 이는 사람에 빗대어 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향로香爐, 연적硯滴, 탁필卓筆, 금탑金塔이라 한 것들은 장인이 좌우에 늘 두는 물건이고, 자란紫鸞, 선학仙鶴, 연화蓮花라 한 것들은 장인에게 사랑받는 물건이다. 축융祝融은 곧 장인의 손님이요, 자소紫霄는 곧 장인의 하늘이며, 경일擎日은 곧 장인이 가진 뜻을 말한 것이고 혹은 장인이 하는 일을 말한 것이다. 나누어 이름을 붙인 것이 열두 가지 다른 이름이 있다 해도, 통틀어 그 중심이 되는 것은 오로지 하나의 장인일 따름이다. ‘장丈’이라고 하는 것은 크다는 뜻이다. 사람이 크다는 것은 곧 사람이 도달할 수 있는 지극한 경지를 말한다. 사람이 크다는 것을 이 산에 빗대어 말해보면, 이 산의 단정하고 중후하며 맑고 깨끗함이 그 부류들 가운데서 뛰어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이 이름을 지은 사람이 이 산을 사랑하는 것은 산으로서가 아니라 사람으로 빗대어서였다는 것도 짐작할 수 있다.
옛날에 우리의 선현인 퇴도退陶 이 문순공李文純公 은 봄에도 여기 계시고 가을에도 여기 계시고 겨울과 여름에도 여기 계셨으며, 그 해에도 다음 해에도 또 그 다음 해에도 여기에 계셨다. 선생께서 칠십 년을 사시는 동안 산을 사랑하여 즐기시고 산을 유람하며 시를 읊조리신 것이 얼마나 되는지 모른다. 그 생각이 궐리의 단壇과 염계의 풍월風月에 머물지 않은 적이 없었으나 그 해와 달의 빛과 봄바람 부는 자리를 직접 보지 못함을 안타깝게 여기셨다. 내장인內丈人과 외장인外丈人에 사랑을 주시기를 마치 원회元晦와 경부敬夫 사이를 오가신 것같이 한 것이 어찌 우연이겠는가?
그렇다면 문순공의 단정하고 증후하며 맑고 깨끗함은 실로 사람 가운데 청량산이라 할 수 있다. 산이 청량하다는 것이 진실로 사람이 청량한 것에 미치지 못할진대, 세상 사람들이 청량산이 청량함에 있다는 것을 또 어찌 알겠는가? 이런 까닭으로 옛날 유람하던 선비들은 청량산으로 가지 않고 퇴계로 갔고, 청량산을 읊조리지 않고 퇴계를 읊조렸던 것이다. 이는 마치 공자에 대해 칠십 제자가 한 것이나 주 무숙에 대해 이정이 한 것과 같이 뜻을 얻어 흠모하고 돌아가며 존경하고 사랑하며 좋아하는 것도 오히려 부족한 듯이 하였으니 산 자체만을 사랑할 겨를이 있었겠는가!
혹 동천洞天 에서 지팡이를 짚고 걷거나 산방에서 시서를 토론한다 해도, 또한 퇴계에서 노닐고 퇴계를 읊지 않음이 없었으니 이는 다름이 아니라 산을 사랑하는 데 있어서 당시 여러 사람들이 같았기 때문이다. 아아, 사람은 가고 산은 텅 비었으며, 바람은 차나 달은 예전의 달이다.
오늘날 월천선생이 문순공을 그리워하고 사모하는 것은 실로 보통 사람들이 옛사람을 사모하는 것보다 더함이 있다. 그때 이 산에서 노닐며 발자취를 남긴 것은 또 그 모습이나 그 기운이 비슷한 점이 있다는 데서만 그치는 것은 아니다. 선생께서 이 산을 유람하실 때, 암자를 보면 우리 선생께서 계시던 곳이라 여기시고, 절벽을 보면 우리 선생께서 오르시던 곳이라 생각하시고 바위와 골짜기를 보면 선생께서 이리저리 거닐던 것을 생각하시고 구름과 아지랑이를 보면 선생께서 읊조리시던 것을 생각하셨다.
장인봉을 우러르면 더욱 높아 보이고 향로봉을 대하면 향내가 나는 것 같았다. 이들을 보며 즐거워하고 감개해 하며 사연이 있으면 더욱 슬퍼하시는데, 오늘이 어제보다 더하고 올해가 지난해보다 더하다. 그 말과 얼굴에 드러나는 것이 이와 같으니 그 마음속으로 지극한 즐거움에 대해 생각하고 끝이 없이 사랑하는 데에 이르러서는 어찌 감히 나같이 보잘 것 없는 사람이 살펴볼 수 있겠는가? 아아 선생이 아니었다면 내 누구와 더불어 돌아가리.”
‘유청량산기’ 분문 일부는 이러하다.
1601년(선조 34년) 11월 10일
아침을 먹은 뒤 금학고는 돌아가고 간, 명석, 수붕, 석붕 등도 유람하러 나가서 내가 홀로 선생님을 모시고 있게 되었다. 승려 쌍명(雙明)이 시를 청하자 선생님께서 7언 절구 한 수를 먼저 읊으셨고, 내가 차운했다. 오후에 멀리서 피리소리가 들렸는데 구름을 뚫고 올라가는 듯했다. 바로 성주(城主) 금고산이 온 것이었다.
조금 있다가 지장전으로 걸어 내려와 간을 시켜 벽에 이름을 쓰게 하고 이틀을 묵었다. 내가 5언 절구 한 수를 지어 올리자 선생님께서 화답하는 시를 써주셨다. 이날 밤은 더욱 조용해서 문답한 내용이 제법 자세했다.
우리나라의 풍습과 고금인의 어질고 어질지 않음에 대해 논하는데 이르러서는 개탄하기도 하고, 옳으니 그르니 시비를 가리기도 하며 논하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 감히 기록하지 않는 것은 세상의 비방거리가 될까 우려해서이다.
고산 어른이 말씀하시기를, “옛날 보우普雨 가 있을 때 영남의 선비들이 글을 돌리고 모여 임금님의 잘못을 함께 규탄하려 했는데, 이는 우리들이 해도 될 만한 일이라고 생각해서라네, 그런데 선생님께서 이것이 도리어 유자들이 분수를 넘는 일로 그렇게 하는 것이 부당하다 하셔서 그때 우리 고을의 선비들은 모두 나가지 않았네” 라고 하니, 월천 선생이 말씀하시기를,“그 말이 옳네, 그러나 또한 어찌 할 만 한 일이 아니어서 한 가지 의론을 고수하지 못했겠는가, 대개 그때 듣자니 대제학 심희수(沈喜壽, 1548- 1622)가 선현을 문묘에 올려 제사를 지내자고 청하면서 왕양명王陽明, 진백사陳白沙, 설문청薛文淸, 호경재胡敬齋와 함께 올리자고 말하였다는데, 저 왕양명, 진백사는 이단의 학문을 하는 무리라 심희수가 이러한 의견을 내세운 것은 실로 인심과 세도의 오르내림과 망하고 융성하는 일이 달려 있는 큰 갈림길이 되는 것이었네, 우리들로서는 그때 논란하여 맹렬한 기세로 번지던 화를 막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고, 그래서 우리들이 먼저 산원에서 회의를 하고 글을 돌려 동지를 모으려 했던 것이네, 이것이 내가 진작 알고 있던 것으로 할 만한 일이라고 생각했네만 고산의 생각으로는 이것이 급하지 않아서 보우 때의 일로만 보려고 한 것이네” 라고 하셨다.
이는 실로 월천 선생께서 진작 알고 있었던 것이고 할 만한 일이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고산의 생각은 이것이 급하지 않다고 여기고 보우 때의 일로만 보려고 한 것이다. 만약 선생님께서 옳지 않다고 여기셨다면 도가 드러나지 않았을 것이 아닌가!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기를,“맹자가 이르되, ‘서인이 일하러 오라고 하면 일하러 가야 한다’고 했는데 이것이 무슨 말인가?” 라고 하시고 이어서 지난번 경서교정랑으로 임명한 교지를 받고 관에서 말을 보내 불렀지만 늙고 병들어 나아가지 않았으니 이것이 아마도 부르면 가서 일해야 한다는 뜻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말씀하셨다. 모두 말하기를, “적당한 예가 아닌 것 같습니다. 벼슬에 나아가셨다 해도 연세가 많으시고 길도 머니 어떻게 하겠습니까?” 라고 하는데 갑자기 창 밖에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서 물어보니 승려들이 우리를 대접하는 일로 서로 다투는 것이었다. 나와 간 등이 아뢰기를,“승려들이 매우 사납고 자못 귀찮아하는 기색이 있으니 내일 내려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라고 하니 선생님께서,“좋다.”라고 하셨다.
11일 .
밥을 먹은 뒤 간, 명석, 수붕, 석붕 등이 또 유람을 하겠다고 하였다. 대개 어제 가보지 못한 곳을 두루 둘러보겠다는 것이었는데 역시 다 가지 못하고 반야대, 경일봉을 둘러보는 데 그쳤다. 조일이 작은 종이쪽지를 올리며 시를 써주기를 청하니 선생님께서 5언 절구 한 수를 써 주셨다. 그 다음에 고산이 썼고, 또 그 다음에는 내가 썼다. 선생님께서 내게 붓과 먹을 각각 하나씩 주셨는데 내가 이전에 수붕을 통해서 다 썼다고 아뢰었기 때문이었다.
저녁에 비가 시원하게 내리다 곧 그치고 밤새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내가 시 한 수를 올리니 선생님께서도 한 수를 지으셨다. 간이 산중에 읊은 시에 모두 차운해서 올리자 선생님께서 자못 허락하셨다. 이날 밤 온 강에 밝은 달빛이 비치고 빈 집엔 고요가 감도는데 선생님의 깨우치심은 밝고 안온하여 전날 밤보다 훨씬 좋았다. 내가 여쭙기를,“물을 건너실 때 하필 위험한 다리로 건너신 것은 무엇 때문이신지요?” 라고 하니 말씀하시기를,“평지처럼 디디고 서야 하는데 험하고 평탄한 길이라고 걷는 데 어찌 두 가지 방법이 있겠는가?”라고 하셨다.
이야기가 한때의 사귐에 미치자 젊은 시절 믿음으로 맺고 의리로 따른 친구로 순거舜擧만한 사람이 없다고 하셨다. 순거는 바로 지산芝山 김팔원金八元으로 불행히도 명이 짧아 지금은 죽고 없다. 선생님께서 또 말씀하시기를, “학자는 뜻을 크게 세워야 한다. 수붕 등이 요즘 몹시 풀어져서 조금도 애써 노력하는 마음이 없는데 너희들은 모름지기 서로 꾸짖고 격려를 하도록 해라.” 라고 하시기에, “저희들도 그 지경에 있어서 남을 꾸짖을 겨를이 있겠습니까마는 어찌 감히 가르침을 따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라고 답하였다.
내가 선생님께 여쭙기를, “‘생업을 꾀하면 점점 재물을 논하는 마음이 생기고, 명예를 좋아하면 아첨꾼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구절은 언제 지으신 것인지요?” 라고 하니, “젊어서 지은 것인데 어느 해인지는 정확하게 모르겠네.” 라고 하시자 고산이, “제가 압니다. 이는 열여덟 살에 지으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또 여쭙기를,“‘순욱론(荀彧論)’을 쓰시자 퇴계 선생께서 감탄하여 마지않으셨다 하던데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라고 하니, 과연 그런 적이 있었지. 내가 논을 쓴 것이 겨우 예닐곱 편인데 이것이 마지막에 쓴 것이다. 선생님께서 의론한 글이 매우 좋다고 하시고 끝내 고치지 않으셨다.”라고 하셨다. 그러고 나서 어릴 때 공부하던 순서를 여쭈었더니, “무자년 여름에 《대학》을 읽었는데 이때는 다섯 살 때로 집에 있을 때였고, 조금 자라서 선생님께 《통감》을 배웠다. 그때 선생님께서는 온계에 계셨는데 내가 자주 집에 가는 버릇이 있었는데 하루는 선생님께서 어찌 번거로운 것도 모르고 그리 자주 왔다 갔다 하느냐고 하셔서 그 뒤로는 감히 자주 가지 못했다.”라고 하셨다.
또 여쭙기를,“어려서 독서하실 때 몇 번 읽으시면 외우실 수 있었습니까?” 라고 하니,“열서너 살 이전에는 열 번 읽으면 외우지 못하는 게 없었는데, 열다섯 살 이후부터는 숙독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해서 보통 책들도 거의 모두 백번 넘게 읽었다.”라고 하셨다. 선생님께서 자리에 드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고산과 베개를 나란히 하고 잤다. 내가 아직 곤하게 자고 있는데 선생님께서,“코 고는 소리가 누구한테서 나는가?” 라고 물으시니 간이 사실대로 말하였다. 내가 잠결에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라 얼른 일어났다. 이것이 바로 잠결에도 불러 깨우치게 한다는 것으로 이에 듣지 못했던 것을 더욱 많이 들었다.
사진: 『부경별장赴京別章』과 시문
구전은 봉화현 만퇴리 출신으로, 성종 때의 명신인 보백당 김계행의 현손이다. 월천의 제자로 문장이 뛰어나고 역학에 밝았다. 1610년 문과 갑과로 급재하여 예조정랑, 정언 등을 역입했다.
『부경별장』은 1614년 천추사 겸 사은사서장관이 되어 명나라의 수도 북경에 가게 되었을 때, 조정 동료와 향촌 제현諸賢들이 무사귀향하시라는 정으로 써준 시문을 모아서 꾸민 책이다. 여기에는 간재 이덕홍의 아들이며 제자인 이모李慕, 이잠李箴 등 인조반정에 연루된 인물들의 글이 보이는데, 이잠의 경우 이름을 삭제한 것이 완연히 드러난다. 사진의 책은 최근 한국국학진흥원에서 영인한 것이다.
월천학맥의 존재에 대한 움직일 수 없는 근거는 월천의 ‘도산서원종향’이다. 월천의 도산서원종향을 주도한 사람들은 누구인가? 바로 예안사림이었고, 월천 재자들이었다. 그런데 위에 소개한『부경별장』의 이잠의 글에서 보듯이 인조반정이후 대북파의 인물들의 글은 소각되거나 멸실되었다. 따라서 월천과 관련된 자료들 역시 많이 남아 있지 않다. 그런데 최근 국학진흥원에서 번역한 조성당 김택룡이 남긴 『조성당일기』를 보면 뜻밖에 당시의 종향과정의 초기 정황을 잘 보여주고 있어 매우 흥미롭다.
가령 1612년 1월 5일자에 “도산서원에 재천현감 琴應壎과 나(金澤龍), 청송부사 李泳道, 도산서원원장 琴憬, 생원 尹頤甫, 吳奫, 생원 金坪, 봉사 李達道, 진사 孫祐, 李敬迪, 李宗復, 徐競, 禹處仁, 李榮運, 李濂, 朴惟一, 金光繼, 任之大, 禹汝枋, 尹東昌, 琴是文, 黃有章, 尹應湯, 禹處恭, 權存恪, 李岐, 下有司, 李景元, 李憐 등이 모여 월천 조목 선생을 2월 중정일에 종향할 것을 의논하고, 영주와 안동의 두 서원(이산서원,여강서원)에 통문을 보냈다”고 했다. 1월 26일 “금응훈, 윤의찬...등이 모여 월천선생을 종향하겠다는 ‘월천종향통문’을 두 서원에 보냈다”고 하고,
1월 28일자에는 “任屹의 편지가 왔는데 제의는 당대의 예에 밝은 사람에게 문의해 보고 정해야 한다는 것이었고, 금응훈의 편지에는 한강 정구에게 물어보고 거행하기를 바란다는 것”이었다.
2월 9일자에는 “김중청이 한강 정구에게 보낸 서간을 보았는데 대체로 나와 뜻이 같았다”고 했다.
6월 14일 “금경이 편지를 써서 월천선생종향 정문程文을 보냈다. 서울로 보내 예판禮判에게 드릴 것이라 한다. 급급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답장을 했다.”
6월 17일 “향교 사람이 와서 이립의 편지를 주었다. 종향 정문程文에 관한 일이다.”
위의 일기를 보면 종향당시의 과정을 직접 보는 것처럼 생생하다. 조성당은 1616년 2월 역동서원의 초헌관이 되어 종향의 일을 지휘했다. 위에 기록된 인물들은 대부분 당시 예안유림과 문중을 대표하는 인물들이었고, 실무적으로는 한강의 자문을 받은 금응훈琴應壎(생원), 김택룡金澤龍(문과), 김중청金中淸(문과), 이입李笠(문과), 이모李慕(문과), 이잠李箴(문과), 이강李茳(문과), 금경琴憬(문과), 금결琴潔(무과), 금개琴愷(문과), 김평金坪(생원) 등이 실현시켰다. 이입, 금경 등은 감사에게 올리는 정문을 작성하였고, 중앙에서는 김중청, 이강 등이 조정 윤허를 받도록 노력했다. 이들은 이 무렵 소장 정치인으로서 광해군 정부에 의욕적으로 활약하는 기간이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주변 인물들과 의견이 전연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다. 가령 계암 김령은 “월천의 종향은 월천-김중청-이입으로 이어지는 도통을 확립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계암의 이런 시각은 한편으로는 월천학맥이 존재함을 역설적으로 증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비판에도 불구하고 월천의 도산서원종향을 근본적으로 흔드는 일은 아니었다. 더욱이 퇴계의 4대 제자의 한 분으로 일컬어지는 한강의 월천종향 후원은 버팀목이었다.
이리하여 1613년 예안유림에서 감사에게 글을 올렸고, 감사는 이를 나라에 올렸다. 임금의 명에 따라 영의정 이덕형, 판부사 심희수, 완평부원군 이원익이 모두 재가해주기를 요청하였고, 드디어 1615년 11월 9일 조정에서 파견한 예관이 치제하도록 함으로서 종향이 완료되었다. 기라성 같은 퇴계제자들 가운데 유일하게 도산서원 퇴계사당에 종향되었으며, 국가가 이를 공인했음을 만천하에 공표했다.
도산서원 종향을 이끌어낸 문도 제자들은 비슷한 시기에 예천의 정산서원과 봉화의 문암서원에도 퇴계와 월천의 배향이 동시에 이루어지도록 했다.
그런데 왜 월천학맥은 단절되어 버렸나? 인조반정의 결과다. 월천은 광해군 당시 집권세력인 북인의 인물들과 가까웠고 제자를 비롯한 예안사림이 대부분 북인정권에 참여하고 있었으므로 인조반정은 곧 월천의 좌절이기도 했다. 월천의 좌절은 곧 예안의 좌절이기도 했다. 광해군 당시 서애 비롯한 안동 사림은 남인에 속해 있었지만, 예안 사림은 대부분 북인에 가담하고 있었기에 인조반정으로 결정적인 타격을 받았다.
가령 간재 이덕홍의 아들이며 월천과 김중청의 제자였던 이립, 이강李茳 형제는 월천의 도산서원종향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지만 인조반정과 더불어 귀양 가고 처형되기까지 했다. 예안은 이무렵 거의 반역향으로 지목되어 과거시험이 거부되는 정거처분停擧處分을 받기도 했다. 안동일원에서 한 결 같이 학맥을 이어온 학봉 김성일과 서애 류성룡, 성주일원에서 역시 한 결 같이 그 학맥을 이어온 한강 정구의 학맥에 비하면 예안의 월천학맥은 어느 날 정말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렸다. 역동서원과 도산서원이 있는 예안의 학문적 토양을 감안하면 수수께끼 같은 일이 되어 버린 셈이다.
이런 여파는 월천의 직계후손들은 물론이고, 온혜, 토계의 진성이씨, 풍천임씨, 고창오씨, 외내의 광산김씨, 분천, 원천의 영천이씨, 부포의 봉화금씨, 한곡의 의성김씨, 지삼의의 단양우씨 등의 후손들이 다시는 역사의 전면에 나올 수 없었다. 이처럼 인조반정은 노론의 집권과 북인의 몰락을 가져왔다. 그것은 광해군만 역사의 패자로 만든 것이 아니었다. 예안 사림은 이후 퇴계 직계 후손을 제외하고는 저 경상남도의 남명학파와 더불어 다시는 역사의 전면에 나올 수 없게 되었다. 월천은 북인의 영수인 이산해 등의 지원에 의해 도산서원 사당에 종향되는 더없는 영광을 얻었지만, 인조반정은 결국 월천의 학맥이 영원히 끊어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지만, 만약 인조반정이 없었다면 퇴계-월천으로 이어지는 예안학맥은 안동일원의 퇴계학맥 가운데에도 명분과 내용에서 가장 뚜렷한 학맥으로 이어졌으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겠다.
그렇지만 월천의 지위는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퇴계장례식 및 도산서원 건립, 그리고 퇴계문집의 간행을 주도하여 퇴계를 계승한 적통 제자로서의 위치를 확고하게 유지했다. 비록 도산서원 종향이 퇴계 제자들의 의한 전폭적인 지지 속에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그리고 예안의 월천학맥이 소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인조반정 이후에도 종향 자체에는 다시 별다른 시비가 없었음은 월천이 퇴계문도로서의 움직일 수 없는 지위 때문이었다.
사진: 천연대
해설: 월천과 대북파의 영수 아계 이산해와 가까운 사이였음은 도산서원의‘천연대’의 글씨에서도 나타난다. 월천의 ‘각천연대고문刻天淵臺告文’을 보면, “상국 이산해李山海의 글씨를 새겨 천년 뒤에 이곳을 유람하는 사람들로 하여금...마음의 문을 열어 어두워진 하늘의 이치를 밝히고자 합니다...아! 이 대臺가 무너진다 해도 돌은 그대로 있을 터이며, 세상이 바뀌더라도 이 이름은 지워지지 않을 것입니다” 했다.
사진: 월천선생문인록
‘월천선생문인록’에 등재된 인물들의 면모로 보면 권춘란, 김기, 권우, 김중청, 이준 이산해, 류종개, 임흘, 김택룡, 배용길, 조우인, 정경세, 금개, 정온, 이강, 권시중 등이다. 이는 학봉, 서애, 한강의 제자에 전연 부족함이 없으며, 그 인원도 36명이나 된다. 조사에 따라서는 더욱 늘어날 수도 있다.
사진: 『퇴계집』
『퇴계집』편찬에는 핵심 제자들이 모두 참여하였는데, 예안출신은 김부륜(천거) 조목(천거) 금응협(천거), 금란수(천거), 금응훈(천거), 이덕홍(천거), 김택룡(문과) 등이며, 안동 및 기타 출신으로는 김성일(문과), 류성룡(문과), 남치리, 김취려(안산, 문과), 정탁(예천, 문과), 우성전(서울, 문과) 등이다.
『퇴계집』편찬을 둘러싼 극심한 대립은 이미 도산서원과 여강서원을 경쟁적으로 세움으로서 분화되고 있었다.
5. 한사정
1). 한사정의 위치
영주방면 5번국도, 옹천에서 학가산 쪽으로 가다보면 두문령斗門嶺이란 고개를 넘게 되는데, 이 고개에서 멀리 보이는 정자
가 ‘한사정寒沙亭’이다. 고개 아래 지명은 ‘주막거리’인데, 여기에 “횡성조씨 한사공파 세거지지”라는 표석이 있다. 행정구역
은 안동시 북후면 두산리이다.
두산리斗山里는 『영가지』에 “부북府北, 말산末山, 얼전蘖田, 신전薪田, 몽동夢洞, 능대본能臺本, 석탑(石塔), 고지사古之寺
등은 모두가 산골이고 작은 마을이다(皆山谷小村)” 라고 기록이 되어 있다.
‘두산리’의 지명은 ‘말산(末山)’이 오랜 세월을 거치는 동안에 ‘끝말(末)’자 음이 변하여 ‘말(斗)’이 되어 ‘두산’이라고 불리어
진 것이 아닌가 한다. 조선시대에 영남에서 한양으로 가는 세 길 즉 추풍령, 조령, 죽령의 길 가운데 두문령 고갯길이 죽령으
로 연결되고 있었다.
한사정은 1978년(무오년)건립되었다. 후손들이 이곳으로 이거한지 350년만이다. 주인공은 월천선생의 차자 한사寒沙 조석붕
趙錫朋(1585~1667) 선생이고, 후손들이 건립했다.
한사 후손들이 이곳에 정착한 것은 인조반정 이후로 추측된다. 반정 이후 한사 손자 한 분이 소백산 밑 순흥으로 이거했고, 그
손자 한 분이 다시 남행을 하다가 이곳에 정착했다. 정착 연유는 알 수 없고, 막연히 공민왕의 안동 몽진 때 이곳에서 하룻밤
을 묵어 간 곳이기에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이 곳 지명이 ‘왕유旺留’라고도 하는데 그런 연유 때문으로 이해하기
도 한다.
그런 연유보다는 좀 더 풍수적 관점에서 보면, 이곳은 소백산이 서쪽으로 내 달리다 힘이 들어 이곳에다 한 무더기의 흙을 내
려놓으니 곧 학가산이다. 학가산의 정기 서린 국사봉의 한 줄기가 동으로 뻗어와 이곳 금계산에다 한 줌의 흙을 떨어트려 놓
으니 곧 금계포란형의 형국을 갖추었고, 그 위에 한사정을 세웠다.
2). 한사의 생애
한사의 생애를 가늠할 자료는 많지 않다. 『월천집』, 『선성지』, 『약포집』, 『구전집』, 『학사집』, 『조성당일기』, 『횡
성조씨족보』에 산견되며, 최근 출간한 『한사정유계사록』 서문에 한사의 생애가 요약되어 있는데 그 기록은 이러하다.
“공의 휘는 석붕이요 자는 자백子百이요 호는 한사寒沙이시다. 월천 선생의 차자이시며 선생은 천성이 효우 하시고 재주와
지혜는 다른 사람 보다 훌륭하게 뛰어 나며 엄부께 배운 학문은 일찍이 통달 하시고 재주와 명성은 고을 일향을 떠들썩하게
하셨다. 1579년(선조30년) 정유재란 때 선생께서는 월천선생이 의거 하신 화왕산성 전투에 참가 하셨다. 1603년(선조36년)에
사마시에 합격하셨으며, 1604년(선조37년)에는 아버지를 대신 하여 부용정사를 창건 하셨으며, 1615년(광해7년)에는 문과 급
제하여 봉상시주부를 역임하셨다. 만년에 고종사촌 금업 형제와 더불어 예안현감 이석관의 도움으로 월천선생문집을 발간하
셨다.”
다시 정리해보면, 한사는 1585년 4월 예안현 월천에서 월천선생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월천선생은 첫 부인인 안동권씨에
게 아들 한 분을 두셨지만(諱 龜朋)요수하셨고, 후취 부인인 선성김씨에게서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월천의 제자이며『선성
지』를 쓴 늑로 권시중의 『선성지』기록을 보면 “재주와 기예가 있어 못하는 것이 없었고, 총명한과 예지로움이 널리 보지 못함이
없었으며, 깊은 뜻을 긍구함에 대해 대체로 스스로 유래한 바가 있는 것 같았다”라고 했다. 이런 총명함이 문과급재하는 바탕이 되
었고, 『월천집』을 간행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고 보여 진다. 따라서 교우관계 역시 아버지 월천의 사우관계에 있었던 인물들
과 중첩되고 있다. 이미 소개한『조성당일기』에 한사와 관련된 부분이 곳곳에 보인다.
가령 1616년 5월13일의 기록에는, “도산서원 작례를 행하고 강가에서 모였는데, 조수붕, 조석붕, 김택룡, 김중청, 금경, 오윤,
손우, 김주민, 김 주우, 권시중, 정득, 조말득, 조정흔 등이 함께했다”고 했다.
여기서 잠시 한사의 가계를 대략 적어보면, 관향이 횡성, 시조는 횡성군 조익趙翌이다. 고려 광종이 쌍기로 하여금 처음으로
과거를 실시 할 때 최섬과 함께 급제를 하여 문하시중평장사에 횡성군으로 봉해진 인물이다. 6세손에 문하시중을 역임한 조
영인趙永仁과 아들 정당문학판례부사수문전태학사 의 조충趙冲, ‘수태위문하시랑평장사상장군판례부사태자소사’라는 긴 이
름의 관직에 오른 손자 조계순趙季珣 등은 고려사에 빛나는 인물로 3대가 출장입상出將入相 했다. 조충은 명재상이며 장군으
로 거란군과 몽고군을 물리친 공이 고려사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들 위패가 횡성읍에 소재한 세덕사에 모셔져 향사를
치르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이조참판을 역임한 후손 조온보趙溫寶 때 문경으로 낙남한 이후 비로소 영남에 세거 하게 되었다. 그 후손으로
승문원정자를 지낸 조장趙璋으로 삼형제 문과 급제했다. 조형趙珩은 효행으로 명성이 나 정려가 내려와 문경시 마원리에 세
워져 있다. 조장이 예천 금당실로 이거하여 살다가, 증손 조경이 다시 영주 귀내 함창김씨 외가로 이주했다.
한사의 12대손 조완규가 쓴 한사 유사遺事에 보면, 고조 조윤손은 통례원좌통례, 증조 조경은 경연참찬관에 증직되었고, 할
아버지 조대춘이 참봉을 하였으며, 이조참판에 증직되었다. 조대춘이 예안현 월천에 거주한 동지 권수익의 따님에게 혼인을
하여 비로소 다래에 들어와 터를 잡고 살게 되었다. 당시 흔했던 이른바 처향妻鄕살이를 한 셈이다. 농암선생께서 향내 아홉
노인을 초청하여 배 푼 이른바 ‘애일당구로회’의 한 분이셨다. 조대춘의 아들에 월천이 태어나서 예안 횡성조씨의 문호를 열
었다.
여기서 한사의 생애를 대략 정리해보면,
한사 조석붕(寒沙 趙錫朋,1585~1667)
1585년 4월, 예안현 다래 자택에서 의성김씨 부인의 둘째 아들로 출생
1597년 13세, 정유재란 화왕산성 전투 참전.
1601년 아버지 월천, 조수붕, 금란수, 김중청, 채간, 권명석 등과 청량산 산행.
1603년 9월, 18세 생원입격
1606년, 월천 역책, 21세, 3년 시묘살이
1612년, 27세, 월천 도산서원 종향관계로 김택룡과 논의
정월 24일, 월천 부인 안동권씨 별세.
『조성당일기』에는 “총각시절부터 선생님 문하에 출입하며 공부하였으므로 대부인을 부모님처럼 의지하였는데, 지금 갑자
기 세상을 버리시니 어찌 이런 참상을 있는가!”라는 김택룡의 감회와, “이때 장례식은 안동부에서 일꾼 백 명을 지원 한 일과
신주함을 보냈다”는 기록이 보인다.
1615년, 30세, 문과급제
1616년, 31세, 형 조수붕 진사합격, 직장 제수.
1616년 5월13일, 도산서원 작례를 행하고 강가에서 모임. 조수붕, 조석붕, 김택룡, 김중청, 금경, 오윤, 손우, 김주민, 김 주
우, 권시중, 정득, 조말득, 조정흔 등이 함께함.
7월 18일, 형 수붕과 서울행, 수붕은 시험 보기 위함.
12월 24일, 김택룡에게 달력 보냄.
1617년 4월18, 32세, 귀향.
4월 20일, 심안해라는 사람에게 곤양의 훈도의 자리를 주선함.
4월 27일, 김택룡 방문.
5월 2일, ‘월천선생 언행초기’를 김택룡에게 보냄.
5월 15일, 서울로 올라감을 아쉬워하여 부라원루에서 전별연, 김택룡, 금언각. 손우, 성이성 등 참석. 다음날 김확 형제,
김택룡 이계선 형제 등과 다시 모임. 다음날 말이 병이 나서 출발 연기함.
6월 27일, 서울에서 김택룡에게 편지를 보냄. 광해군 폭정으로 벼슬을 버리고 낙향 한 듯.
년도미상, 동계 정온에게 월천 비문을 받아옴. 김택룡이 지은 ‘월천선생언행록’과 금업이 지은 ‘월천선생행장’의 초안 작성 추
정.
1675년, 80세, 월천문집초고본의 서문을 미수 허목에게 받으러 감.
년도미상, 고종사촌 금업, 금개 등과 예안현감 이석관의 도움으로 월천문집 발간.
1677년 9월, 82세 자택에서 운명.
3) 한사의 학문
‘월천선생년보’에 월천이 두 아들에게 가르쳐 말하기를 “먼저 소학, 대학을 배우고, 다음에 논어, 맹자에 이르고 후에 삼경에
이른다, 이는 옛 사람들이 학문하는 차례이니 순서를 밟지 않고 뛰어 넘을 수 없다”라고 했다. 아들들이 묻기를 “어찌 과거공
부를 가르치지 않습니까?”하니, 말하기를 “옛사람은 반드시 경서를 깊이 연구하는 것으로 근본을 삼는다, 이것을 버리고는
학문이라 할 수 없다, 그 길 위에 향료 같은 것은 아침에 가득하나 저녁에는 없어지니 어떤가, 또 내가 두 아이를 가르치는 것
은 요행히 과거에 급제함을 위함이 아니고 그 학문의 대강이라도 엿 보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다, 가업을 보존하고 서적을 삼
가 보호할 따름이다.”하셨다. 또 말하기를 “옛날 육수부陸秀夫는 배 가운데에서도 대학을 숭상하여 강의 하였다”고 했다.
아들들이 갓을 바르게 쓰지 아니하니 성난 목소리로 “옛 날 관영이 풍파를 만남에 하늘을 우러러보며 부르짖어 말하기를 ‘내
평생 죄는 없고 다만 3일 새벽을 갓을 쓰지 않았을 뿐입니다, 갓을 쓰지 않는 것은 몹시 나쁜 일이다, 삼가 이와 같은 일은 하
지 말라” 고 하셨고, 또 말하기를 “몸을 보호함에는 겸손만한 것이 없다, 주역 64괘에서 겸괘에는 흉함이 없다, 항상 남보다
일보 물러나고 남보다 한 번 더 머리 숙임으로써 처신함을 규범으로 삼는 것이 옳다”고 했다. 또 말하기를 “맹자께서 외로운
신하와 서자만이 마음가짐이 위태함을 겁내고 환란을 염려 하는 것이 깊다 너희 들 한 몸은 뭇사람이 가볍고 천 하게 여기는
바이다. 행동이 이미 극히 어렵다. 마땅히 이 말을 마음에 새겨 잊지 않으면 죽을 때 까지 약석이 될 것이다.” 라고 하셨다.
다른 자료로, 월천이 두 아들의 자를 지어주고 지은 글이 ‘명이자자설命二子字說’인데 그 글은 이러하다.
壽朋命其字曰子長 志長才長而欲其令聞之長世也 錫朋命其字曰子百 百男百福而學必百倍其功也 萬曆 丙申(1596) 十二月 十七
日 皐翁 七十三 命其二子而字之
해석: 수붕은 그 자를 자장이라 한다. 뜻이 크고 재주가 있어 장차 세상에 크게 이름을 알리도 록 하고자 지었고, 석붕은 그 자
를 자백이라 했으니, 많은 아들을 낳고 백복을 누릴 것이며 배워서 반드시 그 공을 백배하도록 했다.
다른 기록으로, 1597년 한사 열세 살 때 아버지를 따라 화왕산성 전투에 참전했다. 이 사실은 망우당 곽재우의 『창의록』 에
실려 있으며, 월천의 ‘임진왜변일기’에도 그 사실이 전 한다. ‘임진왜변일기’는 지금 매암 이숙량에 관한 기록만이 남아있다.
아무튼 『창의록』에 한사가 참전했음을 증언하는 시 한 수가 남아 있어 이채롭다.
未得名牌妙少年 명패도 얻지 못한 어린 소년이,
島夷大破火城連 화왕산전투에서 섬 오랑캐 크게 물리쳤네.
輕身重義通三界 몸은 가볍고 나라를 의리를 중히 하니 삼계를 통하니,
報國精忠誓九天 충성으로 나라 지키길 하늘에 맹세 했네.
篤學勤功潛聖理 독실하게 배운 학문으로 공을 이루니 성인의 이치에 잠심하여,
敬修行業古賢緣 공경히 닦은 행업은 옛 현인을 이었네.
千秋如惜童烏績 천추에 이룬 그 공업은 동오가 쌓은 공 같은데
石鼓鳴山細細傳 석고 산이 울리는 소리는 가냘프게 전해 오는 구나.
최근 발간한 『한사정실기』는 이 시詩를 원운元韻으로 하여 강호 제현들의 차운次韻 시를 모아 한 권의 시축詩軸으로 발간했
다. 어린 나이에 참전한 한사를 추념追念하는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형 조수붕의 한사에게 보낸 시에는 형제간의 우애가 드러난다. 재목이 “ 頃於山舍弟吟一律其明示余遂步其韻追記其日之懷切
希莞爾”(산사에 있을 때 동생이 시 한 수를 읊어 보여주기에 드디어 그 운을 따라 시를 짓고, 그 날의 일을 추억하면서 기록해
둔다)이다.
江上何時別 강가에서 이별함이 언제였던가,
山中秋草萋 산 속 가을 풀은 무성하네.
襟期無彼此 서로의 마음속에는 아무것도 없는데,
江水隔東西 강물만이 동서로 막는구나.
幾日還相夢 어느 날 돌아올까 꿈속에 그리는데,
今朝方客棲 오늘 아침 비로소 내가 왔다.
談情歸未得 못 다한 얘기, 돌아갈 줄 모르는데,
碧峀夕陽低 푸른 산마루 석양은 뉘엿뉘엿.
다음의 시는 조수붕이 서울로 과거 보러 갔을 때 월천의 편지를 약포 정탁에게 보이니 이에 약포가 시 한 수를 지어준 것이다.
한사와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으나 아래 기별이 있어 그 내용을 소개한다.
壽朋來自月川湄 수붕이 멀리 월천으로부터 왔는데,
傳語徐詳禮莫違 전하는 말이 조용하고 상세하여 예에 어긋남이 없네.
翼翼小心如不克 마음가짐을 삼가 하여 마치 이기지 못하는 듯 하고,
謙謙遜志若難持 행동은 겸손하여 가지기 못하는 듯 하내.
從知天錫善人後 하늘이 착한사람의 후손을 내려주었음이니,
更信鄕稱仁者兒 마을에 어진사람의 아이임을 믿으리라.
最喜德門餘慶遠 가장 기뿐 일은 덕 있는 가문의 여경이 남아있으니,
澗邊松栢翠遲遲 물가 송백 또한 푸르구나.
月川,吾老兄也 無嫡嗣, 晩得側室子二, 曰壽朋,曰錫朋, 有善行,皆可愛也, 鄕黨鄰里,遠近士友, 憫月川之老無嗣, 各聚米石, 輸官
補軍資, 得令壽朋赴科, 蓋應朝廷納粟許通之事目也, 歲己亥秋 朝家有大慶, 設科取士時壽朋, 亦以鄕解上京, 謁余於終南之寓
舍, 傳月川之語,殊極詳悉, 渠之爲人固超恒流, 而顧其得諸家庭之訓實多, 余嘉壽朋天質之純美, 且喜月川之有嗣, 情不自已, 敢
效近體詩一章, 以寓余爲德門喜慶之意, 以贈行 嗚呼, 渠能立志, 不怠進學, 紹述世業, 終能興起趙氏之門戶, 使余今日之語, 不
徒爲誇張虛美之歸, 則爲幸大矣, 壽朋乎, 勉之哉,
해석: 월천 나의 노형이다. 자식이 없었는데 늦게 측실에서 두 아들을 얻었으니 수붕과 석붕이다. 선행을 한다하니 대견스럽
다. 향당과 이웃의 사우들이 월천의 사손 없음을 민망하게 여겨 쌀 몇 석을 모아 관청의 군자금으로 보태게 했다. 이리하여 수
붕이 과거에 나아가게 된 것은 조정납속의 제도로 허통의 사목이 있었기 때문이다. 기해년 가을 나라에 큰 경사가 있어 과거
를 열고 선비를 선발하는데 수붕이 또한 상경하였다. 나를 남산의 집으로 찾아와서 월천의 말을 전하는데 지극하고 자세하였
다. 그 사람 됨됨이가 진실로 일반인을 뛰어넘었으니 좋은 가정의 교훈이 실로 많았음을 알게 되었다. 내 수붕의 자질이 순미
함을 가상하게 여기고 또 월천의 후사 있음이 기뻐서 감회가 자못 적지 않았다. 이에 근체시 한편을 지어 덕 있는 가문의 경사
가 있음을 적어 가는 길에 주고자 한다. 아아, 너는 뜻을 세워 학업에 게으르지 말며, 세업을 잇고 능히 조씨의 문호를 흥기하
도록 하라. 내 오늘 말을 한갓 과장하여 꾸민 것으로 돌리지 말았으면 그런 다행이 없겠다. 수붕은 노력하라!
부록: 월천문중보관 문헌 사진자료
1. 월천서당수계첩
2. 선조서당수계첩
3. 계의첩
4. 죽오선생문인계안
5.『한사정유계사록』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