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암선생 유적지_분강촌 ::::::::: 농암종택

<도운회보>에 보낸 글

사람의 일-人事

안동대 김희곤 교수가 술회하는데, “지방학술대회 방청석은 100명이 모이기 어려우며 그것도 관련학과 학생들을 반 정도 체우는 것이 보통”이라 하는데, “안동은 행사 때마다 3, 400여명 이상 모여 놀랐다”고 했다. 이는 사실이다.

2001년 여름, 나의조상 관련 학술행사에 날씨 등 여러 나뿐 조건으로 ‘100명도 참석하기 어렵다’고 하며 몹시 걱정을 하는데, 막상 당일 400명이상 오니 교수는 나를 반기며 ‘대성공입니다’ 한다. 이날 200부 정도 만든 유인물은 턱없이 부족했다. 그런데 우리 집 행사는 그 다음날 ‘비석제막’이 있었는데, 이날 전일 오신 여러분이 거의 그대로 모두 오셨다. 그때 내가 김춘대金椿大 안동향교전교께 “어떻게 연일 이렇게 오십니까?”하니, 전교어른 말씀이 “이런 행사라면 매일 있어도 매일 참석해야지”하셨다.

이런 말씀의 저변에는 2가지 정도의 안동인 특유의 집회문화가 작용하고 있다. 하나는 선현들의 추모를 위한 여러 행사 가령, 학술발표, 비석제막, 건축낙성 등의 일은 ‘사문의 대사(斯文之大事)’로 인식하기 때문에, 조상의 연관과 초청의 유무에 관계없이 참석함을 당연하게 생각한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이런 왕래가 일상화 되고 보니 자연스럽게 ‘그 집 행사는 가 봐야지’하는 안동사람들의 인사예법이 저절로 형성되었다는 점이다. 안동말로 ‘오품갚음’인데, ‘오품갚음의 예’를 모르면 안동을 모르고 안동문화를 모르는 셈이 된다. 안동사람들의 모임 즉 ‘집회集會’는 엄연한 ‘집회문화’로서 존재한다.

필자 집에 근년 ‘상사喪事’와 ‘길재吉祭’가 있었다. 길제는 정말 보기 드문 행사였다. 집안 어른 한 분이 이때 “내 나이 90에 이런 행사를 두 번 본다”하셨다. ‘종손, 종부 취임식’이 길제이니 보기 어려운 일은 당연한 것이었다. 이런 도중에도 이미 소개한 학술행사 등, 몇 가지 다른 집안행사가 있어서 적지 않은 손님들이 다녀가셨다. 나 또한 이 기간, 다른 문중의 크고 작은 행사에 참석했다. 이런 일은 안동에서 살아가는 한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모두가 회피할 수 없는, 사람으로서 할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사람의 일’이 ‘인사人事’인데, 인사의 기본은 ‘물어보는 일’이다. ‘찾아가 묻고(訪問)’, ‘편안한가 묻고(問安)’, ‘병세가 어떤가 묻고(問病)’, ‘잘 돌아가셨는가 묻고(弔問)’ 등등. ‘편안 한가 아닌가’, ‘안安과 부否’를 물어보는 일이 인사다. 경중에 따라 정표情表를 하는데 이것이 ‘부조扶助’이다. 이를 포괄하는 용어로는 한자로 ‘修人事’라는 말이 있다. 해석하면 ‘인사를 닦았다’인데, 지난날 ‘인사를 닦는 일’은 우리 선인들에게는 정말 다반사 같은 일상사였다.

‘묻는 인사’는 곧 ‘남에 대한 배려’이고 ‘고통분담’이다. 남이 나를 배려하여 근황을 물어오니 나 역시 찾아가 물어보는 것이다. 그렇지만 아무렇게 물을 수는 없다. 정황과 상대를 배려하여 세련되게 ‘잘 물어보는 방법’이 필요한데, 그것이 곧 ‘예禮’다. ‘예의 없는 사람’은 세련된 물음에 서투른 사람이다.

가령 문상을 가면 어떻게 해야 하나? ‘잘 돌아가셨습니까?’ 그렇게 물을 수는 없다. 그래서 “무어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등의 우회적인 말을 한다. 이런 말이 곧 ‘묻는 말’이다. 그러면 상주는, “별로 고통을 느끼지 않고 편안하게 돌아가셨다”는 등의 고인 최후의 안부를 말해야 한다. 궁금해서 물어보는 것이니까 이에 부응해서 성실하게 답변해야 한다. 문병도 마찬가지다. 병의 증세를 대략 말해주는 것이 옳다. 이런 언동이 ‘문상의 상호 예’다.

그렇지만 즐거운 잔치 즉 ‘길사吉事’는 좀 다르다. 흥겨움은 배려가 필요하지 않아 ‘물어보는 일’도 중요하지 않다. 따라서 예도 그렇게 따지지 않는다. 그런 연유로 안동사람들은 흔히 혼인은 ‘보러가고’, 잔치는 ‘먹으러 가고’, 상주는 ‘물으러 간다’고 한다. 혼인은 봐 주면 되는 것이고, 잔치는 먹어주면 되는 것이지만 상주는 ‘꼭 물어봐야 하는 것’이다.

한 인간의 태어나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4번의 이벤트가 있으니 옛 표현으로는 ‘관, 혼, 상, 제’이다. 이 이벤트에 격식을 차리면 ‘관례’, ‘혼례’, ‘상례’, ‘제례’가 되는데, 이 가운데에도 ‘상례’, 즉 ‘죽음의 처리’가 가장 드라마틱하면서도 지난至難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죽음의 처리에 유가의 방식은 아직도 그 효용성을 지니고 있다.

그렇지만 ‘죽음’은 이제 그에게 직접 ‘물어보는 일’을 물리적으로 할 수 없게 한다. 그는 더 이상 어떻게 해 볼 수가 없게 된다. 그래서 이제는 고인과의 인사도 마감해야 된다. 이런 경우 좀 더 큰 배려가 필요했다. ‘좀 더 큰 배려’는 곧 ‘글’을 지어 보내는 일이었다. ‘제문祭文’과 ‘만사輓詞’가 그런 글이다. 제문이 좀더 긴 산문의 글이라면 만사는 그리 길지 않은 노래형식의 글이다. 고인에 대한 존경과 찬양이 주조라면 만사가 적절하고, 슬픔과 추모가 앞선다면 제문이 합당하다.

만사가 일반적인 추모의 글이라면 제문은 좀 더 가까운 친지들의 글이라 할 수 있다. 제문과 만사는 그러니까 고인과 나의 생전에 나누었던 모든 경험과 감정을 정리하고 결산하는 마지막 인사이다. 그 동안 ‘물어보고 물어 본 모두’를 정리한 글이라 할 수 있다. 그 얼마나 아름다운 사람의 일인가, 그 얼마나 아름다운 타인에 대한 배려인가! 그렇지만 유감스럽게도 지금은 이런 인사의 방법이 사라져간다. 그것도 아주 급속히. 나는 그 선악을 판단할 능력은 없지만 무엇인가 알 수 없는 ‘소멸되어 가는 것’에 대한 상실의 비애가 없지 않다. 더구나 선인들의 그런 아름다운 인정人情이 가득한 글들을 접할 때 면 더욱 그러하다.

가령 임진왜란 당시, 안동열읍의병대장 근시재(近始齋金垓)가 몰沒했을 때 많은 제문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월천선생(月川趙穆)의 제문은 ‘슬프다’라는 글자, ‘噫’자 6번을 써서 고인을 추모했다.

근시재는 청춘에 죽었다. 한창 일할 수 있는 나이에 문득 병이 나서 죽었다. 그래서 더 이상 이력을 남길 수가 없게 되었다. 이런 경우, 제문은 더욱 ‘슬픔의 주조’가 서려있기 마련인데, 월천선생의 제문이 더욱 그러한 것이다. 그 전문은 이러하다.

원문: 長途遠志遽至於斯噫, 遭時之變糾旅興師噫, 翶翔翰苑草裏尸歸噫, 幼穉盈前鶴髮在堂噫, 夫兮婦兮一時具亡噫, 兩世交契老我悲傷噫.

해석: 먼 길, 뜻이 높았으나 갑자기 이런 지경이 되었으니 슬프고, 변란의 시국을 맞아 의병을 모집할 수밖에 없으니 슬프고, 한원翰苑에서 포부를 펼쳤으나 시신을 싸가지고 고향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으니 슬프고, 어린 아이들이 눈앞에 가득하고 부모가 생존해 계시니 슬프고, 부부가 같은 시기에 죽었으니 슬프고, 양대兩代를 사귀어 늙은 내가 비통하니 슬픈 일이다.

그런데 이미 문집에 올라있는 이런 알려진 글보다도 알려지지 않고 묻혀있는 글이 있다면 더욱 눈길이 간다. 소개하지 않는다면 영원히 묻혀버릴 수도 있다. 몇 해 전, 안동 강남의 택지조성 당시 고성이씨 무덤에서 발견된 500년 전 어느 부인의 한글 편지는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고, 죽음이 얼마나 애잔하고 인간의 삶이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증표가 되었다. 이것 역시 제문이라면 제문이라 하겠다.

필자의 집에 몇몇 선현들의 유묵이 있다. 그 가운데, 370여 년 전에 쓰여 진 한편의 아름다운 ‘제문’을 여기 소개한다. 문집에도 보이지 않으니 거의 처음 알려지는 것이 될 런지도 모를 일이다. 제문의 글은 서애선생(西厓柳成龍)의 아들 수암(修巖柳袗)이 학봉선생(鶴峰金誠一)의 아들 세마공洗馬公(金潗)에게 한 것이다. 보게 되는 후손들은 물론이며, 우리 모두에게도 잔잔한 감동이 전해지리라 생각된다.

단 한 가지 아쉬운 것은 남아있는 수암의 제문이 전문이 아니라는 점이다. 제문의 글 말미에 거의 있는 ‘....嗚呼哀哉尙饗’의 글이 보이지 않은 것으로 보아 뒷마무리 부분이 보존되지 못했다. 그러나 마무리 글이 지금 없다 하더라도 옛 선현들의 정서를 이해하는 대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 남아 있는 전문은 이러하다.

번역:

1633년(인조11년)10월 29일, 조산대부행협천현감 류진柳袗은 삼가 고 병절교위세자익위사세마 김공金公의 영령에 술과 음식을 올려 치전致奠하나이다. 생각건대, 고인은 집에서는 효우하고 향리에는 모범이었으며, 덕도 있고 수도 했으며 자손들도 가득하니 그야말로 5복을 다 누리셨습니다.

이제 돌아가셨으나 이런 모습은 고금에도 보기 어려운 것으로 향촌에서도 칭송함이 극진하여 감히 더 이상 부언할 말도 있을 수 없는 일이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돌아보니 진袗은 용열하고 어리석은 사람이나 공에게 대해서는 특별한 사사로운 감회가 없지 않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나의 아버지는 성품이 ‘간중방엄簡重方嚴’하시어 가볍게 사람을 사귀는 분이 아니었지만, ‘평생외복平生畏服’한 분은 오직 학봉선생 단 한 분 뿐이셨습니다. 학봉선생 또한 아버지를 일생의 ‘지기지우知己之友’로 생각하시어, 소리에 응하고 기를 합하고 도를 합하고 마음을 함께했습니다.

지금 후학으로서 존경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영남에서 이 두 분 선생님은 도덕이 함께 높고 업적이 가지런할 뿐만 아니라, 정분과 의리의 두터움이 마치 ‘천륜天倫’이 같은 것 같다”고 말합니다. 그런 두 분 정분이 불초한 이 몸에게도 미처 공의 여러 형제분들과 어울려 놀았으며, 나의 큰형님과 둘째형님은 그야말로 형제처럼 서로 가까워 정의가 더욱 돈독하였습니다.

그런 즉, 진袗은 공에게 있어서는 진실로 ‘通家子弟의 義’가 있습니다. 다만 가난과 병으로 타향에서 생업에 분주하여 공이 세상에 살아 계실 때 그 지팡이를 잡고 모시면서 문하에서 배우지 못했습니다...이하 결락

사진: 수암(柳袗)이 세마공(金潗)에게 보낸 제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