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려시대의 사랑
쌍화점
만두가게에 만두를 사러 가니
색목인(色目人)이 내 손목을 잡는구나
이 소문이 점포 밖에 흘러 나간 것은
조그만 가게 사환 때문이다.
<이 소문을 들은 여인들이>
그 자리에 나도 자러 가리라
그들이 잔 곳 같이 울창한 것이 없다
삼장사(三藏寺)에 불공드리러 같더니
그 절의 주지가 내 손목을 잡는구나
이 소문이 절 밖에 흘러 나간 것은
조그만 아이 중 때문이다
그 자리에 나도 자러 가리라
그들이 잔 곳 같이 울창한 것이 없다
두레박 우물에 물을 길러 갔더니
우물의 龍이 내 손목을 잡는구나
이 소문이 우물 밖에 흘러 나간 것은
조그만 두레박 때문이다.
그 자리에 나도 자러 가리라
그들이 잔 곳 같이 울창한 것이 없다
술파는 집에 술을 사러 갔더니
그 집 주인이 내 손목을 잡는구나
이 소문이 술집 밖에 흘어 나간 것은
시궁에 쓰는 조그만 바가지 때문이다
그 자리에 나도 자러 가리라
그들이 잔 곳 같이 울창한 것이 없다
『고려사』「쌍화점(雙花店)」에서
‘눈이 맞아 정을 통했다’는 사랑의 대한 일반적 표현이다. 신라시대『수이전』이라는 책에 ‘김현감호 김현감호’에 다음과 같은 표현이 보인다.
相感而目送之 : 서로 느낌이 있어 눈빛을 보내고,
引入屛處通焉 : 으슥한 곳으로 가서 정을 통했다
사랑은 ‘느낌이 있는 눈빛’이 있어야 하고, ‘으슥한 곳’이 있어야 가능하다. 곧 마음의 언어가 통해야만 몸의 언어도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쌍화점’에 나타나는 사랑의 장소는 만두가게, 절, 우물가, 술집 등 구별이 없다. ‘으슥한 곳’이 아니다. 그래서 사환, 아이 중에게도 발각될 만큼 노출되어 있다. 또 사랑은 느낌 있는 눈빛 교환이 있어야 하나, 여기서는 그렇지도 않다. 대상은 푸른 눈의 외국인, 스님, 술집아이 그 누구도 가능하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런 소문을 들은 많은 사람들이, ‘그 자리에 나도 자러 가리라‘ 하고 소원한다. 사랑은 눈이 맞아 정을 통하는 것이 아니라, 기회와 대상만 있으면 이루어질 수 있다. 사랑은 원초적 생동감이 있어 삼국시대처럼 고립된 상태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공개적이고 집단적이다.
이런 사정은 「쌍화점」이 충렬왕 때 민간에 유행하던 속요로 향락에 심취되었던 당시의 군신(君臣)들을 위해지어 바쳐진 사실에서도 잘 알 수 있다.
고려사(高麗史)에는 이렇게 남아 있다.
위의 두 노래는 충렬왕때 지어진 것이다.
<원문>
고려시대는 사랑이 만연한 시대처럼 보인다. 그래서 사랑은 삶의 여정에서 제기된 인생의 현안이 아니라 생활의 향연 성격을 가진다. 삼국시대의 사랑이 곳곳에 암초가 도사리며 고립되고 긴장된 상태로 존재하는 것은 그것이 인생의 절박한 현안으로 대두되었기 때문이리라. 고려시대와 삼국시대는 사랑이 대동소이(大同小異)한 가운데도, 소이(小異)의 측면을 보이는 것은 이러한 사회상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다시 말하면 고려시대는 사랑이 개방된 것이 아니라 사랑하고픔이 개방되어 버린 시대이다. 「만전춘」의 한 구절은 이런 현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얼음 위에 대닙자리 보아
임과 나와 얼어죽을망정
정든 오늘 밤, 더디 새어라, 더디 새어라
사랑하고 싶은 마음의 욕구는 얼어 죽을 만한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겠다고 할 맘 큼 강렬하다. 얼음 위의 차가움을 사랑으로 녹여버리겠다고 한다. 사랑은 사랑의 행위 자체의 즐거움에 상당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13편으로 되어있는 「동동」은 제목 자체가 이미 선정적이다. ‘동동’은 ‘둥실둥실’의 의미로, 연인들이 얼싸안고 애무하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동동」의 마지막 구절은 이러하다
12월, 분지나무도 깎은,
아! 소반의 젖가락과 같아라.
님의 앞에 들어가 가지런히 놓으니,
손님이 가져다가 무는군요
아으! 動動다리
‘젖가락과 같은 가지런한 모습’은 임과의 동침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때 연적(戀敵)인 손님이 나타나 방해한다. 그래서 정말로 아아! 님과 둥실둥실 포옹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사랑하고픔이 개방된 시대라고 해서 모두가 만족된 것은 아니다 .사랑이 개방될수록 개방에 동참하지 못한 사람들은 더욱 고독하고 슬프다. 그들의 갈망에는 삼국시대처럼 신분의 장애가 아닌 연적이 개입되어 아픔을 증폭시키고 있다. 「동동」은 집단향연을 노래하며 고려시대의 사랑의 애환을 보여주고 있다. 『고려사』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사랑은 마음의 언어와 몸의 언어로 나누어볼 수 있다. 마음의 언어는 눈빛과 다정한 대화, 그리고 편지 등이 있을 것이고, 몸의 언어에는 손잡음과 키스와 포옹 등이 있을 것이다. 사랑은 이 두 가지의 과정이 감미롭게 이행될 때 성립될 것이다. 아직 마음의 언어가 충분히 교감되지 않았을 때, 성급한 몸의 언어로의 이행은 곧 관계의 부담을 가져올 것이며, 마음의 언어가 성숙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몸의 접촉을 계속해서 도사린다면 그들의 사랑도 곧 한계를 가지며 와해되어 버릴 수도 있다.
고려시대는 대체로 사랑하고픔이 일시에 개방되어 버린 시대이다. 그래서 몸의 언어를 더욱 풍성하게 하고 있다. 연인들은 장소를 불문하고 어디서든, 누구라도 눈만 맞으면 둥실둥실 포옹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고려시대는 한편으로 사랑이 남용된 시대처럼 보이기도 한다.
‘언어’란 곧 접촉을 의미한다. 지금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접촉의 가장 낭만적 부분은 정령 어떤 순간일까? 은은한 눈빛의 황홀함일까, 다정한 대화의 감미로움일까, 달콤한 편지의 속삭임일까, 따뜻한 손목의 감촉일까, 혀끝에 젖어드는 키스의 아늑함일까, 숨막히는 포옹의 절정감일까. 깨끗한 신사도는 뜻 있는 일이다. 그러나 다소의 무리한 요구도 사랑을 손상시키는 요인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들이 저 멀리 영화 속에 있는 연인들에게, 진정한 연인이다. 물론 주고 싶은 경우란,-손목을 잡고 석양을 받으며 자연의 길속을 거니는 모습이며 이 순간 우리는 문득 이루어보고 싶은 사랑에의 충동이 감미롭게 상기될 것이다. 향락과 쾌락은 그 뉘앙스에서 은은함, 감미로움과 다르게 느껴지지만 사랑의 본질에서는 더욱 저만치 떨어져 있는 단어가 아닐까 한다.
고려시대의 사랑이 가슴에 다가오는 감동과 무관함은 이런 연유에 기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고려시대의 사랑이 단지 생활의 향연으로만 흐른 것은 아니다. 사랑은 인새의 현안으로 곳곳에 아련한 과제를 남기기도 하였다. 양주동<梁株東> 박사가 격찬한 「가시리」가 그런 작품이다.
가시리
가시렵니까 가시렵니까
버리고 가시렵니까
나는 어찌 살라하고
버리고 가시렵니까
붙잡아 두고싶지 마는
서운하면 아니 올세라
서러운 임 보내옵노니
가시는 듯 돌아 오소서
-작가미상-
이별하는 사람의 망각<忘却>을 불망(不忘)하도록 하고자 한다. 오직 사랑이 식지 않았고 나누어야 할 사연이 많은데, 님은 떠나고자 한다. 이 절박한 현안을 시인은 무너질 수 없는 자존의 향기를 가지면서 대응하고 있다. 원망과 미련은 주관적 감정의 앙금이지만, 문학적 작품으로 다듬으면서 객관적 사실도 저만치,-자신으로부터 멀리시키고 있다. 그녀는 현안을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가시리는 이미 과거가 된 사연을 아름답게 간직해 보려는 시인의 의지가 담긴 것으로, 슬픈 이별의 숙명을 매우 현명하고 지혜롭게 정리한 작품이다.
참고로 양주동 박사의 평을 소개한다.
“별리를 소재로 한 시와 노래가 고금동서에 얼마나 많으랴만 무릇 가시리 한 편 67자의 소박미와 함축미, 그 절절한 애원, 그 면면한 정한<情限>과 규범, 이를 따른 노래가 정녕 어디에 있겠는가! 후인들이 부질없는 다면과 기교와 찬사와 기어로서, 혹은 수천 어 수백 행의 정서를 펼치지만 어느 하나 이 가시리 한 편의 뜻과 정취에 더할 수 없으며, 오히려 이 두어 마디의 애절한 곡조에 못 미치니, 이 가시리 일편이야말로 동서문학에서 이별시의 압권이 아니랴!
‘정석가’,‘정읍사’의 작품도 함께 소개한다.
정석가는 이별의 현안을 정읍사는 기다림의 현안을 주제로 하고 있다.
정석가에서 이별의 불망(不忘)은
-바삭바삭 하는 모래 벼랑에 심은 구운 밤이
싹이 날 때가지,
손으로만든 연꽃이 세송이의 꽃을 피울때까지,
무쇠로 만든 옷이 다 떨어 질 때까지,
소나무산의 쇠풀을 무쇠로 된소가 다 뜯어 먹을 때까지,-
그리운 님과 이별할 수 없다고 한다. 불가능한 조건을 조건으로 내세워 이별의 현안을 해결하고자 한다.
「가시리」에서는 정이 식어버린 애인의 마음을 돌리려는 여인의 지혜로움이 돋보이나,「정석가」에서는 애교의 슬픈 때를 쓰고 있는 듯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정읍사」의 전편도 매우 아름답다.
달아, 높이 높이 솟아
멀리 멀리 비추어 주오
아직도 저자에 계신가요
아! 진 곳을 밟을까 두렵습니다
아, 나의 가는 곳에 날이 저물까
혹시 불행이 닥쳐올까 두렵습니다
저자에 간 남편을 기다리는 아낙의 순정이 전편에 애잔하다. 기다림은 남편만이 아니다. 자신의 인생행로에 대한 기다림으로 승화되어 있다. 그렇지만 남편의 안위가 자신의 인생현안과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다.
「서경별곡(西京別曲)」은 떠난 연인에 대하여 치정까지 한다.
大洞江 넓은 줄을 몰라서
매를 내어 좋았느냐 사공아
내 아내 음란한 줄 몰라서
가는 배에 얹었느냐 사공아
大洞江 건너편의 꽃을
배를 타기만하면 꺾어 버리리라.
고 한다.
지천에 사랑이 깔려있고, 가벼운 향락이 곳곳에서 출몰하더라도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하고픈 사람의 입장은 다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의 구현은 계속된 수수께끼이며 현안인 것이다.
사랑의 조건
《왕자 호동이 옥저지방에서 놀 때, 낙랑태수가 순행을 나왔다가 보고는 “그대 얼굴을 보니 보통 인물이 아니다. 혹 북쪽 고구려의 대무신왕의 왕자가 아닌가” 라고 했다. 그리고 같이 돌아가서 그의 딸을 아내로 삼게 했다.
그 후 호동이 고구려로 돌아와 몰래 사람을 보내 태수의 딸에게 이르기를 “만약 나라의 무기창고에 들어가 북과 피리를 파괴한다면 나는 그대를 예로 갖추어 (아내로)맞이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그만 두겠노라”》
-《삼국유사》의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사랑의 선택’편에서, 필자는 사랑의 도식을 만남과 연정, 정렬과 선택, 결혼과 사랑이라는 과정을 제시하면서,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연정’과 ‘선택’을 지적한 바 있다. 연정에서는 ‘순수한 동기’를, 선택에서는 ‘결단의 용기’를 사랑의 가장 핵심적 요소라고 보았는데, 가령 ‘삼국시대의 사랑’편에서 이미 언급된 ‘지귀 이야기’는 연정에서의 순수함이, 에서는 선택에의 굳은 용기가 애틋하게 남아있는 순애보라고 할 수 있다. 지존인 왕을 상대로 전개되는 ‘사랑의 몰입’과 ‘사랑의 거부’는 그 대상을 염두에 둘 때, 사랑을 숭고하게 추구할 권리가 누구에게나 있었고, 지귀와 도미 처는 그러한 사랑의 흔적을 역사에 길이 각인 시켜놓은 것이다.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비련도 이와 맥락을 같이 하는 것으로, 대단히 강렬한 빛깔을 띤다. 전문을 정독하고 글과 연관시켜 생각해보기 바란다. 요컨대 이들의 고민은 바로 사랑의 문제였던 것이다. 낙랑공주에게 절박하게 다가온 현안은 ‘나라’와 ‘사랑’가운데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가 과제였다. 그녀는 결국 사랑을 선택하여 아름다운 역사를 우리들에게 남겼다. 호동왕자가 요구한 것은 ‘자명고’와 ‘자명각’을 파괴하는 일이었다. 해석하면 ‘저절로 우는 북’과 ‘저절로 우는 피리’라는 뜻이지만 그럴 수는 없는 것이고, 전쟁이나 천재지변과 같은 변란에 대비하여 무기고에 비치된 비상연락의 도구였던 것이다.
정규군이 상시 대기하지 않던 시절, 이는 국가안보의 주요한 수단이었던 것이다. 그런 구실을 하던 자명고와 자명각은 사랑하는 사람의 요청에 의해 파괴되었고, 아버지와 조국은 멸망하였다. 요컨대 왕자의 요구는 침략이었고, 그 승리의 보증을 사랑의 담보로 도박했다. 삼국사기에 남아있는 이 부분을 재구성해보면 대략 이러한 진행 추리가 가능하다. 왕자호동은 고구려, 3대 임금인 대무신왕의 차비 소생이었다. 호동(好童)은 그 글자가 갖는 의미처럼 ‘좋은 아이’, 혹은 ‘훌륭한 청년’, 이었던 것이다. 왕은 호동을 태자로 삼고자 했고, 원비는 초조한 나머지 계락을 꾸몄다. 부자가 사냥을 떠난 틈을 이용해 차비를 죽음으로 몰아가게 하였다. 원비는 긴장한 몸종을 시켜 차비를 능욕하게 하고 이를 빌미로 차비를 곤경에 몰아 넣었다.
왕의 일행이 환궁하자 차비가 자결하였다고 하는데, 이유인즉 왕이 없는 틈에 부정한 짓을 저지르고 그것이 발각되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외척이 궁중에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을 때, 첩의 소생이란 왕의 총애에도 불구하고 몸을 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왕자는 믿을 수 없었다. 어머니가 그렇게 죽은 것이 의심스럽고, 또 최근에 들리는 이야기는 능욕한 원비의 몸종이 거액의 포상금을 받고 국경을 넘어 옥저지방(지금의 함흥일대)으로 도망을 쳤다는 것이다. 왕자는 어머니에 대한 슬픔과 복수를 위하여, 또 이민족의 마지막 남은 식민통치를 분쇄하기 위해 낙랑지방을 몇몇의 친근한 부하들을 데리고 갔다. 수도 부근의 야산에서 비트를 만들어 밤에 주로 활동하며 성곽의 규모와 출입구의 위치, 병사의 수와 조직, 그리고 전투태세 등의 정보를 수집하던 중 정체가 발각되었다.
도피를 서두르는데 적군이 격렬한 싸움 끝에 왕자는 피투성이의 부상을 입고 체포되었다. 낙랑의 태수는 곧 죽이려 했지만 참모들의 건의에 따라 정략결혼을 시키기로 하고 치료를 해주었다. 호동왕자의 체포와 증상, 그리고 치료는 곧 태수의 외동딸 모란에게도 알려지게 되었다. 모란은 이미 호동왕자의 명성을 익히 듣고 있어서 흠모하고 있었는데 과연 키도 크고 수려한 외모를 갖춘 당당한 왕자였다. 간호를 구실로 자연스럽게 접근하였다. 그러던 몇 달이 지나자 왕자는 공주의 지극한 간호로 인해 부상이 완쾌되어 귀국을 생각하게 되었고 공주의 사랑은 깊어만 갔다.
이때 낙랑태수가 왕자에게 넌지시 의사를 타진하였다.
“그사이 내 딸 모란이 자네에게 꽤나 호감을 가진 듯 한데 자네의 생각은 어떤지고 만일 그대가 뜻이 있다면 즉시 혼인을 추진하도록 하겠네” 왕자는 적지에서 이를 수락할 수밖에 없었고 곧 혼례식이 올려졌다. 그리고 관동의 절경을 유람하는 여행도 다녀왔다. 그러나 왕자는 공주로 진정 사랑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직 적지로부터의 무사 귀국을 위한 어쩔 수 없는 태수가 ‘내 사람이다’하고 생각할 무렵 왕자는 귀국을 희망하였다. 왕자사위의 국왕등극을 고대하며 돌려보내진 호동왕자, 왕자는 귀국후 곧 이성을 가다듬고 그 동안 낙랑에서 얻은 정보를 왕에게 보고하였다.
공격계획이 착착 수립되었다. 왕자도 계략이 채택되어 대 도박이 시작되었다. 이런 사실이 왕자가 그의 이름에 걸맞는 뛰어남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낙랑에 인질로 있던 중에도 왕자는 공주가 결코 자신을 배반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간파했던 것이다. 그래서 밀사를 보내 공주로 하여금 ‘자명고’와 ‘자명각’을 찢고 깨도록 하였다. 그의 추리와 도박은 성공하였다. 자명고와 자명각의 파괴정보를 입수한 고구려의 군인들이 거의 입성하였고 낙랑태수는 당황하여 자명고와 자명각 이 배치되어 있는 무기고로 뛰어갔다.
찢어진 북, 깨어진 피리를 본 태수는 무기고를 지키던 당직자를 색출하여 단칼에 처단하고 피묻은 칼을 들고 후원으로 뛰어가 공주를 찾았다.
공주의 방문을 열어 젖히자 공주는 흐느꼈다. 그런 공주의 뒷모습을 본 태수는 분노에 찬 얼굴로 짧고 차갑게 내뱉었다.“요 괴씸 한 년”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태수의 칼이 허공을 솟아올라 공주의 어깨 부근을 그어갔고 공주는 쓰러졌다. 새하얀 옷에 피가 물감처럼 퍼져갔다. 그 광경을 본 태수는 칼을 던지고 공주를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짐승처럼 미친 듯이 공주의 뺨을 비비면서 “공주! 공주!” 하고외쳣다. 공주는 그제서야 눈을 가늘게 뜨고 안간힘을 다해 한 마디 하였다.
“아빠!... 정말,....정말 어쩔 수 가 없었어요! 용서해 주세요....”
그리고 그녀의 목은 젖혀졌다. 고구려의 군사들이 환호를 지르며 무기와 금은 보화를 노략질하는 사이 무기고를 살핀 왕자는 황급히 후원으로 공주를 찾았다. 그러나 공주는 이미 쓰러져 있었고 그 옆에는 넋을 잃은 듯한 낙랑태수가 허공을 응시하며 체념한 듯이 않아 있었다. 왕자는 순간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리고 곧 공주를 내려다보면서 중얼거렸다.
“이럴 수가! 정말 이럴 수가!....”
전쟁이 끝났다. 고구려는 승리를 안고 개선하였다. 궁궐은 축하 분위기에 싸였고, 주연이 베풀어 졌다. 왕자의 주변에도 미모의 궁녀들이 갖은 교태로 시중을 들었다. 그러나 왕자는 고독했다. 정략결혼을 역으로 이용했던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그리고 지난날 예사롭게 생각했던 공주의 모습이 새삼스럽게 떠올라 그를 괴롭혔다. 또 자신 인기를 시기한 원비의 모함은 더욱 노골적이었다. 갑자기 인간들이 싫어졌고 삶이 저주스러웠다. 그런 번민과 고독을 씹으며 술로 세월을 보내던 그해 가을. 호동왕자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삼국사기』에는 이 부분이 이렇게 기술되어 있다.
《 11월, 왕자 호동이 자살하니 그는 왕의 차비 ,즉 갈문왕 손녀의 소생이었다. 호동이 얼굴이 수려하여 왕이 매우 사랑했던 까닭으로 이름을 ‘호동’이라 하였다. 원비는 왕이 호동으로 하여금 태자로 삼을까 두려워 왕에게 참소하였다. “호동이 저를 예로 대하기는커녕 나를 능욕하려고 까지 했습니다.” 하니 왕이 대답하기를 “배다른 아이라고 그렇게 미워할 수 있겠는가?” 하니 원비는 왕이 자신의 말을 믿지 않음을 알고 자칫하면 자신에게 화가 미칠까 두려워 울면서 고하기로 “청하건대 대왕께서 몰래 살피신 다음 만일 이런 말이 사실이 아니라면 첩이 그 죄를 스스로 받겠습니다.” 하니 왕이 이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어 호동을 추궁하려 하였다. 이때 어떤 사람이 호동에게 몰래 이르기를 “ 그대가 왜 스스로를 변명하지 아니하며 곤경에 빠지느뇨” 하였다. 호동이 대답하기를 “ 내가 만일 구차하게 변명한다면 이는 어머니의 죄악을 밝혀내는 것이기는 하지만 또한 그렇게 까지 하여 부왕의 심려를 끼치고 싶지는 않네” 하고는 칼은 가슴에 꽂고 죽었다.》
낙랑공주는 죽었다. 호동왕자도 죽었다. 공주는 사랑의 진실을 추구하다가 죽음을 당했고, 왕자는 사랑의 아름다움과 순정의 고귀함을 깨닫고 혐오스런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면서 이승과 결별하고 그녀를 따라갔다. 그리고 역사를 남겼다. 사실 잘 모르는 것이 유리의 고전이다.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비련을 다소 장황하게 재구성한 것은 규모와 사건전개의 극적인 요소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서양의 고전 ‘로미오와 줄리엣’과 견주어 보더라도 크게 손색이 없는 것이 아닐까?
로미오와 줄리엣의 비련은 오직 하나의 가문의 이야기일 뿐 이처럼 나라와 자신의 운명을 걸고 사랑의 원형을 추구한 예는 흔하지 않다. 그런 우리의 고전은 왜 몰각되어야 하는 것일까?
이 글의 전반적인 사건의 전개 상황에서 사랑이라는 그 무엇이 커다란 요소로 작용하므로 위의 이야기를 함축하여 사랑의 본질을 요약해본다.
사랑은 조건이 없는 무조건적인 것
사랑은 이성적 판단을 필요치 않는 것
사랑은 어쩔 수 없는 감정에 충실한 것
사랑의 삼각
펄펄 나는 꾀꼬리는,
암수 서로 노니는데.
외로운 이내 몸은,
누구와 함께 할꼬.
-「황조가(黃鳥歌)」-
「황조가」는 한국문학사에서 ‘애정의 삼각관계’의 구도를 보여주는 최초의 작품이다. 이 작품을 시발로 「인현왕후전」, 「사씨남정기」, 「춘향전」, 「무정」, 「자유부인」등의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작품이 이어졌다. 소설사의 주류를 이루었고, 오늘에도 이 구도를 계속해서 작가의 호응을 받고 있다. 그 전통을 대강 적어본다.
작품명 작가명
1
2 인현왕후전
3 사씨남정기 김만중
4 춘향전
5 사랑 이광수
6 배따라기 김동인
7 적도 현진건
8 화분 이효석
9 환희 나도향
10 아랑의 정조 박종화
11 사랑했으므로 행복하였노라 유치환 이영도
12 자유부인 정비석
필자가 생각나는 대로 적어본 것이 이 정도이니, ‘사랑의 삼각관계’는 예나 지금이나 예사로운 문제가 아님이 분명하다. ‘예사롭지 않음’은 그 오랜 기간에도 불구하고, 이 구도가 독자들에게 식상되지 않은 어떤 비밀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시청률을 생명처럼 여기는 T. V드라마에 이 구도가 얼마나 자주 등장하는가를 생각해보기 바란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이 구도가 이처럼 지대한 테마로 군림하지만, 학문적으로는 별반 주목을 끌지 못하고 있다. 이는 학자들의 ‘고상한 것 컴플랙스’가 작용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런 사정은 우리 사회가 아직 동적 상황의 ‘sex'란 단어를 중성적이고 정적인 ’성(性)‘이라는 단어로 애매하게 표현하는 것이라든지, 신체의 중요한 부분을 부끄러운 부분,-치부(恥部)-으로 표현하는 사회통념과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몇 해전 발표된 「여자란 무엇인가」 라는 책에서 저자가 이 문제를 바로 지적한 바 있고, 그 신념을 밝힘으로써 놀라움을 준 바 있다. 그렇다고 해서 필자가 이런 문제에 관심을 갖고 정치하게 연구한 것은 아니다. 단지 이 구도에 흥미를 갖고 여러 작품들을 읽었고, 그리고 그 소감을 적어 보고자 했을 뿐이다. 그러니까, 이 글은 이러한 조건의 바탕 위에서 어줍잖게 엮어가는 ‘ 인’셈이다.
대체로 삼각관계의 작품에서 심각한 이슈로 나타나는 것은 ‘윤리’와 ‘진실’의 대립이 아닌가 한다. 그 대립은 갈등구조를 이루는데, 그 이유는 문학 속의 주인공의 행적은 진실 된 것이며, 사회는 이를 윤리에 저촉되는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학적으로는 무죄인데 사회적으로는 계속해서 유죄로 처리되어 주인공의 고뇌를 증폭시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한 ‘사회적’이란 그 시대의 정신체계 곧, ‘이념(理念)’을 말한다.
이념이란,‘이리(理)가 있다는 생각(念)으로 원리를 따지고 생각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고상한 생각‘들이다. 그러나 이것 또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 자신의 견해일 뿐이고, 생각이 다른 사람의 등장도 얼마든지 상정해 볼 수 있는 일이다.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받을 수 있겠느냐는 의문은 자연스러운 일이겠지만, 이념시대에 접어들면 사태가 그렇게 만은 흐르지 않는다.
가령 조선조 숙종 재임시대, 주자(朱子) 이념에 충실했던 송시열(宋時烈)에 의해 ‘사문난적’이라는 한 말로 처형당한 윤휴의 경우가 그러하다. ‘사문난적’은 이 학문을 어지럽힌 도적이란 뜻으로, 견해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유죄 받은, 이른바 이념,-이치가 있다는 저마다의 생각‘-의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이치가 있다는 저마다의 생각은 자유이고, 그 다양성은 소중하다.
작가란 본질적으로 인간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가장 많은 부류의 사람들이고, 다양한 인생모형의 창출자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이념 문제에 예민하며 심각하게 충돌하고, 그들이 쓰는 작품은 대체로 기성의 파괴를 전제로 하게된다. ‘문학은 인간의 정신적 도덕적 필요의 산물이다’라는 말은 결국 과거에 이치가 있다는 생각이 이제는 정말로 저마다의 생각일 뿐이라는 또 다른 저마다의 생각 때문이다. 과거의 저마다의 생각과 작가의 저마다의 생각에서, 작가의 생각이 독자들에게 공감 받게 된다면, 우리는 과거의 저마다의 생각은 제고하게 될 것이고, 새로운 작가의 생각을 다시 생각하게 될 것이다.
소설이 자아와 세계와의 대결이라는 논리는, 곧 저마다의 생각에 ‘理’가 있다는,-생각들의 -대결인 것이다. 그러나 주인공이 승리하는 경우는 대체로 독자의 추인일 뿐이고, 현장사정은 참혹한 패배로 끝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왜냐하면 작가는 현장보다 항상 앞서 길을 가기 때문이다. 그러면 정녕 문학적 무죄와 사회적 유죄는 화해 할 수 없는 것인가?
여기서 삼각관계의 구도를 갖춘 고전적인 하나의 작품,-‘젊은이의 양지’를 떠올려 본다. 이미 영화화되어 잘 알려진 작품이지만.
고요한 숲 속, 잔잔한 호수,-사랑이 식어버린 여인을 태운 보트가 호수 가운데로 그림처럼 흘러간다. 여인은 행복스러우나 남자는 말이 없다. 고요의 공포,-남자의 침묵과 수면의 잔 물결, 노 젖는 소리의 단조로움과 어깨에 내리쬐는 햇살의 따가움,- 피로한 기색의 남자는 더 이상 여자를 보지 않는다. 시선의 교차가 이미 두려운 것이다. 그 때 바람이 불어 왔다. 물결이 출렁임과 보트의 동요, 두 사람의 불안이 극도에 이르고, 거짓말처럼 보트는 균형을 잃고 뒤집혀졌다. 남녀는 허우적거렸다. 남자는 곧 여자의 외마디 절규를 들었으나 이를 외면하고,-아니 자신의 생존이 더 급했는지도 모른다.- 홀로 헤엄쳐 나왔다. 그러나 여자의 모습은 얼마의 기포를 일으키다가 수면에서 곧 사라졌다. 모두가 순간적이었다. 수면은 다시금 고요가 왔으나 인간들은 그렇지 않았다.
재판이 시작되었다. 남자의 죄목은 살인이었다. 남자는 그때의 정황을 조리있게 진술하였다. 그러나 검사는 남자의 진술을 수용하지 않고 범죄 심리적 차원에서 남자의 죄를 집요하게 추궁하였다. 남자는 결국 그의 죄를 인정하게 되었고, 결과는 교수형이었다.
남자의 연인이 면회를 왔다. 그러나 이들에게 남는 것은 차가운 창살의 안과 밖, 눈가에 젖어 드는 영원한 이별의 눈빛, 그리고 ‘사랑’이라는 단어의 포말(泡沫) 뿐이었다. 착실한 아내를 가진 주인공,-몽고메리 크리프트, 그는 우연한 모임에서 미모의 여인,-리즈 태일러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만다. 연인에 대한 감정이 고조될수록 아내의 존재는 점점 거추장스러운 짐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착실한 아내와의 생활을 정리하고 연인과의 새로운 삶을 설계할 만큼 차가운 남자는 아니었다. 그는 보통사람에 불과했다. 그래서 그는 인간적인 번민을 하게 되었고, 그 번민이 결국 아내를 죽음으로 몰아갔으며, 그의 생애도 짧게 마감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보통사람이며 보통감정의 소유자란 곧 우리들 자신이다. 그래서 우리들은 누구에게나 생의 길목에서 주인공이 겪은 바와 같은, 부지불식간에 나타나는 불청객이 없을 수 없다. 누구에게나 그러한 개연성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삼각의 구도에서,- 젊은이의 양지에서 주인공이 보여준 것처럼,- 번민과 갈등, 특히 남자에게 폭포처럼 찾아온 사랑이라는 바다와 고뇌의 심연은 삶의 불가사의한 정열의 한 순간으로, 개인으로서는 주체할 수 없는 것이 된다. 우리는 이런 상태를 일반적으로 ‘사랑에 빠졌다’고 부르지만.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상황조장이 단순한 성적인 자극을 넘어서는 또 다른 인생의 길을 갈망한 결과이다. 달리 표현하면 ‘생의 자극’인 것이다. 그는 필연적으로 이제까지의 삶의 질서가 혼란으로 뒤섞이는 과정을 괴롭게 겪게될 것이다.
이제 인생의 길을 바꾸려는 사람은 생의 자극을 위해 그 어떠한 미지의 유혹에 가담하려는 적극적인 삶의 모색이지만, 그는 바뀐 길의 갖가지 장애물을 예측하지 못한 수도 있을 것이다. 예측하지 못한 길로의 진입은 결국 질서에의 혼란을 초래하는데, 질서에의 혼란-이것을 우리들은 일반적으로 ‘윤리’라는 개념 속에서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일부일처제가 규범처럼 정착되어온 이래,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 질서의 파괴는 ‘간통’이라는 단어로 요약되어 왔고 이 단어는 사회적으로 차갑고 따가운 냉대를 받아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통은 역사적으로 끊임없이 이어졌고 문제되었다. 그리고 작가들은 이 문제를 계속해서 추구하였다. 그렇다고 작품 속의 주인공들이 간단하게 반사회적 죄인으로 매몰되지도 않았다. 이런 점이 물론 문학의 매력이지만, 한편으로는 이러한 삶을 추구하려는 많은 인간의 반증일 것이다.
‘젊은이의 양지’에서 주인공은 분명 무죄이다. 그에게 그녀의 존재가 비록 미움의 세월이 흐르고 있었다 할지라도 그의 유죄는 근엄한 배심원의 눈초리와 사회라는 조직이 가하는 문제일 뿐, 개인의 진실과는 상치된다. 시대 규범은 또한 ‘교양’이라는 단어로 집약되어 선의적 해석이 가해지고, 개인적 감정은 그 내용의 진실과 관계없이 ‘방종’이라는 악의적 대칭관계에 서게 되는데, 이것은 마치 유가의 ‘禮’가 도가의 ‘道’라는 글자와 대립하는 것과 유사하다.
란 말이 있다. 해석하면 ‘공자가 노자에게 禮에 대해서 물었다는 일이다. 고증의 진부를 떠나 이 말을 확대 해석하면,’공자가 노자에게 인간답게 사는 법이 무엇입니까? 라고 물었다는 뜻이 된다.
주지하듯이, 공자, 노자는 동양적 이념의 창시자로 그 설득력과 더불어 대단한 인기를 누려왔다. 그들의 인기는 가끔 비판을 받은 적도 있지만 대체로 오랜 기간 아직도 베스트셀러고 되어 있다. 『논어論語』는 물론이고 노자와 궤는 같이하는 ‘장자’의 책이 새삼스럽게 번역되어 각광을 받고 있는 요즈음 서점가의 모습이 이를 말해준다. 무려 2천년 전에 쓰여진 책이라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정말로 놀라운 일은, 이들이 고뇌한 ‘인간답게 사는 법’에 대하여 서로가 심각하게 맞서고 있다는 사실이다. 『논어』,『맹자』를 한 번쯤 정독한 독자는 깊은 감동에 젖으리라. ‘아! 인생은 이런 것이구나!’하고. 그는 무척 곤혹하고 복잡한 심정에 사로잡힐 것이다. 인간다음의 주요한 덕목으로 제시한 공자의 주장에 대하여, 노자는 이를 정면으로 부정하면서,‘ 인의예지’야말로 인간을 가장 비인간화하는 멍에와 같다’고 했다. 노자는 심지어 공자를 중국의 전설적인 도둑 ‘도척 보다도 더 나쁘다고 하였다. 어째서 그런가?
그것은 유가적 예의 도덕적 교양적 인생관과 도가적 도의 절대 자유, 개성적, 평등적 사고관의 차이에 기인한다. 즉 전자에서는 ‘인생은 이미 부여한 그 무엇’이며, 후자는 ‘인생의 조건을 자신이 만드는 그 무엇’인 것이다. 집단적 교양 우위론과 개인적 자유 우위론을 각각 주장하는 셈이다. 그래서 저마다 이치가 있다는 삶의 길, 즉 도(道)를 설파한 것이다. 이 경우 교양과 자유는 밀접하면서도 갈등관계에 놓이는데, 그것은 예의 가변적 가치가 도의 불변적 가치를 압도해온 역사의 맥락과 함깨하며, 교양이 심(心) 이성적 측면을 반영하는 것이라면 자유는 감정적 측면을 포괄하는 구조로 연계되는 것 이기도하다.
이런 문제는 앞으로 다루어질 ‘성리학’의 ‘이기론’에서 계속해서 거론되겠지만, 전자에서 느끼는 정(情)의 메마르고 차가운 심성은 떠올릴 때, 후자에게는 품위에 떨어지는 방종의 눈빛을 의식하게된다. 결국 개인은 전 생애를 통해 숙명적으로 이러한 질문을 받게 되고, 또 그것은 어느 누구와도 상의할 수 없는 삶의 본질적 과제가 되어, 우리들 생의 주변에 우정처럼 서성거릴, 미지의 유혹과 맞설 것이다.
“유혹에 빠질 것이냐?”
유혹과의 만남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성에 다다른 피아를 모르는 선택의 저편이다. 그는 순간적으로 선택해야 할 것이다. ‘선택의 저편’이 ‘위기’인지 ‘기회’인지를 모른다 하더라도 이미 이것은 절박한 현안인 것이다. 삼각관계의 출발은 ‘유혹에의 출발’이며, 위기와 기회 가운데 기회에 가담한 사람들의 이야기인 셈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예(禮)보다는 도(道)에 선(善)보다는 미(美)에, 교양보다는 자유를 편애하는 사람들의 이력이기도하다. 이제 개인에게는 정말로 길을 선택해야할 결단의 순간이 도래하였다. 그는 과연 어떤 길을 어떤 도(道)로서 선택해야 하며, 또 그 길을 어떻게 가야 하는가?
‘도(道)’라는 글자의 사전적 의미를 적어 보면,
1 길
2 당연한 도리
3 인간의 길
4 진리에 이르는 길
5 진리
등의 말들이 나타나고, 이 말들은 우리들 인생처럼 무거운 주제로 남는다.
여기서 잠시 길을 노래한 잘 알려진 시를 한편을 감상하기로 한다.
가지 않은 길
프르스트
숲 속엔 노란 두 갈래 길이 있습니다.
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뻗어간 곳까지,
바라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이름다운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그 길에는 풀이 더 있고 사람이 걸은 자취가 적어
아마 더 걸어야 될 길이라고 생각했던 게지요
그 길을 걸으므로
그 길도 거의 같아질 것이지만.
그 날 아침,
두 길에 낙엽 밟는 소리는 없었습니다.
아! 나는 다음날을 위하여 한 길을 남겨 두었습니다.
길은 역시 길에 연하여 끝없음으로.
내가 다시 돌아올 것을 의심하면서....
훗날,
나는 어디선가 한숨 쉬면서 이야기 할 것입니다.
숲 속에 노란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선택했다고,
그래서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한편 서두에서 제시하여 문제의 단서로 삼은 황조가의 주인공 치희의 길은 어떤가? 이 작품이 쓰여진 연도는 서기 17년경이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거의 2천년전의 일이다. 그 아득한 시절에도 인간들은 사랑하고 미워하고 질투하고 이별을 하였다. 그래서 사랑에 패배한 여인은 슬픈 뒷모습을 보이며 길을 떠나간 것이다. ‘슬픈 뒷모습’- 이것이 삼각의 사랑에서 패배한 사람에게 공통으로 남아있는 인화지이다.
유리왕을 두고 각축을 벌인 화희와 치희, 왕이 궁궐을 비우고 사냥을 떠난 사이, 이들의 각축은 절정을 이루고,-결국은 화희의 승리로 나타났다. 왕은 환궁하여 이 사실을 알고 치희를 추적했지만, 그녀는 끝내 돌아오기로 거절하고 국경을 넘어 먼길을 갔다. 왕은 그녀가 걸어간 길을 따라갈 수 없었다. 이미 동행할 수 없는 인생의 외로운 길가에서 왕은 한숨지으며 노래하였다. 이것이 황조가이다.
그런데 앞에서 치희를“사랑의 패배자-슬픈 뒷모습의 주인공”으로 표현했으나, 황조가의 경우,-슬픈 뒷모습의 주인공은 사실 사랑의 패배와는 다소 무관할지도 모른다. 치희의 떠남은 사랑의 패배보다는 화희의 물리적 힘에 의한 것이거나, 아니면 왕의 우유 부단 및 방관의 결과일 수도 있다. 그렇지 않으면 치희의 독점욕과 질투가 어우러진 가운데 왕의 그녀에 대한 배려의 결여에 대한 자존심의 환부를 되돌려 주려는 여인의 독기일 수도 있다.
‘여인의 독기’,-이것은 사랑의 독점욕이다. 독점하고자 하는 욕망이 대립을 만들고 갈등을 잉태시켜, 단조로운 일상의 물결을 격류로 변모시키는 요인이 된다. 일상의 잔잔한 흐름이 진행될 때, 풀죽은 생활의 단조로움이 권태를 만들 때, 우리는 문득 생의 또 다른 경험과 자극을 호소하는 내면의 소리를 들을 것이다. 일회성의 숙명을 가진 인간들에게 단조로운 일상의 길은 이미 삶의 소멸적 국면을 의미하는 것으로, 본인으로서는 견딜 수 없는 본질적 고통을 수반하게 된다. 술을 마시고 오락을 즐기고 스포츠에 빠지는 일은 결국 이러한 위기 의식과 깊은 연관을 가진다.
결국 삼각관계의 형성과 과정의 아픔, 그리고 긴 괴로움은, 삶의 단조로움에서 오는 갈등을 극복하기 위한 생의 고통으로 나타난 선택의 결과이다. 참고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이미 고전이 되어버린- 여러 작품 속에서 삼각의 구도를 깔고 있는 외국의 명작 몇 편을 이념과 연관되는 여러 작품들과 비교하고 다양한 인생의 의미를 시사받기 바란다. 그리고 갖가지 조건과 상황에서 삼각의 한 각을 이루고 있는 주인공의 최선의 선택과 참다운 인생의 길을 생각해 보기 바란다.
|
순 번
|
작 품 명
|
작 가 명
|
국 명
|
|
1
|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
마가렛 미첼
|
미국
|
|
2
|
모란꽃
|
펄벅
|
미국
|
|
3
|
젊은이의 양지
|
드리이적
|
미국
|
|
4
|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
괴테
|
독일
|
|
5
|
고원에 심은 사랑
|
루이제 린지
|
독일
|
|
6
|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
사강
|
프랑스
|
|
7
|
보봐리 부인
|
플로베르
|
프랑스
|
|
8
|
때리주 때끼루
|
모리악
|
프랑스
|
|
9
|
채털리 부인의 사랑
|
로랜스
|
영국
|
|
10
|
거짓된 사랑
|
모옴
|
영국
|
|
11
|
폭풍의 언덕
|
에밀레 브론테
|
영국
|
|
12
|
첫사랑
|
푸르게예프
|
러시아
|
|
13
|
크로이체르 소나타
|
톨스토이
|
러시아
|
|
14
|
지바고
|
보리스 파스재르나코
|
러시아
|
|
15
|
모래의 여인
|
안부공방
|
일본
|
|
16
|
빙점
|
삼포능자
|
일본
|
「사랑의 선택」
님이여! 지금 어디에 계시옵니까?
님이여! 지금 어디에 계시옵니까?
이 좋은 시대를 정녕 님과 함께 하고자 하옵니다.
바삭바삭하는 모래의 벼랑에
구운 밤 닷 되를 심으렵니다.
그 밤이 움이 돋고 싹이 나야만
그리운 님을 이별하고 싶습니다.
무쇠로 옷을 말라서
철사로 주름 박으렵니다.
그 옷이 다 떨어져야만
그리운 님을 이별하고 싶습니다.
구슬이 바위에 떨어진들
끈이야 끊어지겠습니까?
천년을 외로이 살아간들
믿음이야 끊어지겠습니까?
『악장가사』의 「정석가(鄭石歌)」에서
1
‘사랑의 삼각’에서 이미 「황조가」, 「젊은이의 양지」 등의 작품을 다소 다루었고 답변을 유보한바 있다. 그리고 「인현왕후전」 등의 작품을 검토하면서 이제까지의 계속적인 주제에 대한 하나의 답안을 찾아보고자 했다.
그런데 「젊은이의 양지」에서 보여주는 각본은 하나의 돌발적인 사건의 성격을 가지며, 이는 곧 우리들에게 ‘사건＝해결’의 등식을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 해결을 위한 자신의 결단이나 타인의 개입을 초래하게 된다. 그러나 같은 삼각관계의 구도라 하더라도 가령 다음과 같은 이야기는 그 성격을 전연 달리한다.
『사랑했으므로 행복하였네라』라는 유명한 책을 남긴 유치환, 이영도의 관계는 우리들의 개입을 전연 필요치 않는다. 부인을 두고 제 3의 여인과 오랜 기간-거의 전 생애에 걸쳐-사귀어 온 이들의 관계를 무엇이라 해야 할까? 연인, 친구, 문학적 동반, -지금 무엇이라 규정하기 어렵다 하더라도 하나의 분명한 사실은 이들의 관계가 단기간의 정열과 사랑과 그 다음에 나타나는 ‘어떤 식의 매듭’의 과정을 거치는 한시적 사건의 범주에서 생각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이런 점은 대단히 중요하다.
책으로 엮어진 그들의 기나긴 사연을 여기서 다 소개할 수 없고, 참고로 유치환의 ‘행복’이라는 시 한편을 감상하는 것으로 그들의 관계를 시사 받기 바란다.
행복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 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가지씩 생기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 더 의지 삼고 피어 헝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방울 연련한 진분홍빛 양귀비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했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또 하나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30대 중반의 시인 엘리어트는 어느 10대 소녀를 보고 첫 눈에 그녀의 빨아들일 듯 한 투명한 눈빛에 매혹되어 잊지 못한다. 그러나 그는 가정이 있는 중년의 남자로서 소녀를 그리워한 나머지 그녀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고, 얼마 후 소녀에게서 답장이 왔다. 그리하여 이들의 관계는 엘리어트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무명의 젊은 시인은 한편으로는 시를 쓰고 한편으로는 시적 인생을 살았다. 소녀는 이후 앨리어트의 순정을 잊지 못해 독신으로 일생을 마쳤고, 인상적인 유언을 남겼다.
“우리 사이에 있었던 지고하고 기나긴 사연을 내가 죽은 먼 훗날, 모두가 잊어버릴 서기 2천년 공개해 달라”고.
그래서 그들의 육필 서간들은 영국의 어느 은행금고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이런 경우 엘리어트에게 부인에 대한 도덕적 모랄의 문제를 가지고 시와 비를 거론하는 일은 무의미한 일일 것이다. 만약에 그래도 누군가가 그 부인의 삶의 무의미와 부당성을 주장한다면, 역으로 소녀를 만나지 못함으로써 인생의 정열을 불사르지 못할 무명 시인의 총체적 생애도 똑같이 보상받을 권리가 있다고 해야하지 않을까? 그리고 소녀의 유언 가운데,‘우리에게 있었던 지고하고 기나긴 사연’ 이라는 구절이 있는데, 여기서 ‘기나긴 사연’이란 앞서 거론한 ‘한시적 사건’과는 다른 ‘또 하나의 인생’으로 존재한다는 의미를 인정하게 될 것이다.
2.
삼각의 구도에서 이처럼 사건과 사연이 그 성격을 달리 하는데, 그 답은 이러한 것 같다. 이미 언급한 전자의 사건이란, 연정과 정열의 한 순간적인 의미를 가지며, 후자는 그야말로 생활의 무게를 지닌 사랑의 긴 여로를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논의를 좀더 숙고해보기 위하여, 여기서 ‘연애’와 ‘사랑’이란 단어를 잠시 검토해보기로 하자. 이 문제에 필자는 다음과 같은 도식을 구상해 보았다.
|
|
a
|
b
|
|
|
과 정
|
만남→연정→정열→
|
→선택→규정→사랑→
|
→ 행복
|
|
명 칭
|
연 애
|
사 랑
|
|
|
추 이
|
감정적 순응
|
이성적 판단
|
|
|
요 소
|
이상, 황홀, 완벽, 고독
|
현실, 인내, 의지, 조화
|
|
|
상 태
|
한시적 사건
|
기나긴 사연
|
|
남녀사이의 친숙해지는 감정을 한자는 ‘戀’과 ‘愛’의 두 글자로 표현하고 있다. 이를 해석하면, 戀은 ‘그리워함’이고, 愛는 ‘사랑함’이다. 그리워함은 연정이고, 사랑함은 애정이다. 그러나 지금 ‘그리워함’과 ‘사랑함’은 혼용되어 ‘연애(戀愛)’라는 신조어가 등장하였고, 어느새 보편화되어 버렸다. 사랑은 그만큼 변모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것이 해부되고 조립되는 문화,-예를 들면 포스트모더니즘의 대두 양상 같은 것,-에서 사랑의 영역만이 신비스럽게 남겨두지는 않을 것 같다.
편이시대의 특징이 거추장스러움의 제거에 있다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호감을 느끼고 연정이 싹터서 사랑을 하게 되었다.”는 사랑의 양식을 완전히 고전적인 것으로 묻으려 하더라도 연과 애의 순조로운 이행은 시대를 초월한 ‘인사(人事) 의 예술’로 계속해서 그 의의를 지닐 것이다.
이런 측면은 성리학의 ‘이기철학(理氣哲學)’과도 부합되는 것으로, ‘연’은 감성적인 ‘氣’의 개념에서 이해되는 것이며,‘애’는 이성적인 ‘理’의 범주에서 그 철학적 논리를 갖추며, 개인에게는 이러한 사상의 기반 위에서 상호 보완적 조화의 지혜가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다. ‘연’은 무계획적인 상념과 관련되고, ‘애’는 계획적인 사고와 연계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인 해석이며, 이는 서로 떨어질 수 없는 ‘불상잡(不相雜)’과 서로 섞일 수도 없는 불상리(不相離)의 오묘한 이기이론적인 상관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사랑은 이 조화로움에서 채색되는 무지개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부조화된 사랑이 이러한 ‘연’과 ‘애’가 그 과정을 무시하고, 혹은 인식하지 못하고,-‘그냥 연애해버리는’-사랑을 경박스럽게 하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다시 위의 도표로 돌아가서 보면, 우리는 ‘사랑하고 있다’는 말을 얼마간 남발하는 것은 아닐까. 자신의 심리상태가 도표 a군에 있을 때는 아직 상대에 대한 배려보다는 자신의 심리적 고조 상태에 대한 합리화, 즉 자기만족에 몰입되어 갖가지 상념을 즐기게 된다. 황홀은 물론이고 고독, 괴로움도 고독은 고독대로 괴로움은 괴로움대로 즐기는 기간이 된다. 그래서 사랑의 본질인 타인에 대한 배려를 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랑의 정의를 ‘고통’이라고 하는 경우도 대개 도표a군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라 믿는다. 무엇이 사랑에 빠진 나를 괴롭고 슬프게 하며, 무엇이 잠 못 이루는 쓰라린 밤의 고통을 가져오게 하는가?
이것은 도표 a군의 요소로 나타나는 이상, 황홀 완벽, 고독 등의 단어들이 뿜어내는 높은 갈망에 도달하지 못하는 현실의 아픔일 것이다. 이 기간, 두 사람이 엮어 가는 끈은 대화나 편지 같은 언어의 개입이고, 분위기에 알맞은 가벼운 신체의 접촉이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본격적인 몸의 개입은 그녀에게 숭고한 결단을 요구하게 될 것이다. 이 과정은 개인에게 그 자신의 성격과 교양, 그리고 인생관이 어우러진 가운데 소멸되기도 하고 증폭되기도 하는 숙명적 과제로 남을 것이다.
삼각관계의 문제에서 갈등과 고뇌를 만드는 부류는,-앞서 제시한 두 가지의 예에 미치지 못하고- 대체로 그냥 a군의 상태에서 신음하는 경우에 불과하다. 다시 말하면 유혹에 가담한 사람들이 그 유혹에 지혜롭고 진지하지 못하여 주변과 충돌하며 ‘단순사건’으로 만들어 타인의 개입을 자초하여 어떤 식이든 결말을 빨리 가져오게 하는 환경을 스스로 조성하는 일이다. 이는 a군의 요소로 나타난 이상과 황홀, 결국은 자기도취의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까닭이기도 하다.
물론 이러한 감정의 상태를 선악의 차원에서 거론할 성질은 아니지만, 제3자의 입장에서 볼 때는 인간관계의 특별한 한 순간의 파문에 지나지 안는다. 이들에게 선택의 엄숙한 결단이 내려지기 전에는 그들에게 ‘사랑하고 있다’는 숭고한 말의 면류관을 올려 주기에는 부족하다. 사랑은 아직 저 멀리 있기 때문이다. 행복이 더욱 멀리 있음은 물론이다.
3.
‘결혼’이라는 문제는 하나의 제도적 요소이므로 크게 다룰 문제는 아니나 이미 보편적 가치로 정착되었기에 잠시 언급하기로 한다.
결혼에 이르는 자연스러운 감정은 여자에게 ‘그의 인생의 그늘에 쉬고 싶다’, ‘그의 인생을 위해 절실하게 기여하고 싶다’, 혹은 남자에게 ‘그녀의 처녀적 소망을 이루어 주고 싶다,’등의 내면적 소리에 순응하는 것이고, 그 과정이란 대체로 연정에서 정열로, 정열에서 선택으로 이어지는 과정에 충실하는 것이면 될 것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하였기 때문에 사랑한다는 의미를 되새겨야 할 것이다.
즉 결혼이란 감정적인 연정에서 이성적인 선택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차분히 추인 하며 가는 길이며, 그 선택이 현실적인 삶의 무게를 인고하고 감당하면서 사랑의 긴 여로를 견지하는 일이다. 다시 말하면 결혼이란 감정적인 만남에서 사랑에 이르는 기나긴 과정을 추호도 자기 기만하지 않고 기도하듯이 이어가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와 반대의 선택을 꽤 현명하고 현실적인 선택이라고 판단하는 경우도 있는 듯하다. 그것은 이성적인 판단을 통해 현실적인 조건을 점검하여 결혼에 이르는 것이다. 이러한 선택은 감정적인 연정에서 이성적인 선택으로 이르는 길이 아니라, 이성적인 선택에서 감정적인 황홀의 연정에 이르려는 ‘사고의 배려’에 불과하다. 즉 완벽한 삶의 조건을 그럴듯하게 마련함으로써 행복의 구도를 미리 장만하려는 예감의 착각이다. 이는 매우 현명하고 현실적인 판단인 것 같지만 필자의 견해로는 치명적인 인생의 실수가 아닐까 한다.
마치 연정에 빠진 여인이 짧은 육체적 관계를 굳은 사랑의 맹세나 이정표정도로 생각하고, 그러한 순간을 지을 수 없는 사랑 그 자체로 혼돈 하는 것처럼.
이러한 논리에도 불구하고 이 논리가 적용되지 않은 경우도 있다. 그런 사정은 여성의 입장에서 자신의 능력으로는 인생이 벅차다고 느낄 때, 삶의 편리를 위해 어차피 타인에게 얼마간 위탁할 입장이라면, 우리는 이러한 여인의 선택을 시비할 수 없다. 그녀에겐 삶의 의미보다는 생존이 더욱 절박하기 때문이다.
앞서 우리는 만남에서 사랑에 이르는 하나의 가설적 도식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연애’라고 부르는 과정과 ‘사랑’이라고 부르는 여러 단계를 보았다. 그런데 이런 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a군에서는 ‘연정’의 개념이고, b군에서는 ‘선택’이란 단어가 아닐까 한다. 그 이유는 연정에의 순수함과 순응성, 선택에서의 결단력과 의지가 범칭 ‘사랑’이라는 단어를 구성하는 핵심이 되기 때문이다. ‘정열’과 ‘결혼’의 요소는 충분조건이지 필요조건은 아니다. 정열이 없더라도 우리는 잔잔한 연정의 흐름에서 문득 선택을 결심할 수도 있으며, 또 그 선택은 비록 결혼이 아니더라도 어떠한 방식으로든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동반, 연인, 친구 등과 같은-‘관계의 방식’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앞에서 거론한 이성적 선택에서 감정적인 황홀에 이르려는 행위를 ‘사고의 배려’에 불과하다고 했는데, 이 말에 좀더 부연할 필요를 느낀다. 쉽게 설명하면 선택에의 ‘좋은 조건’과 연정에의 ‘순수한 이끌림’에 맞서서 삼각의 일각을 이루며 방황하는 여인에게 하나의 답안을 위한 단서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조건’과 ‘이끌림’은 대수롭지 않는 명제이지만 생활 현장에서는 뜻밖에도 고뇌스러운 현안으로 나타나곤 한다. 여자에게 있어서 경제적으로 빈약하지만 마음에 이끌리는 남자와, 일반적으로 ‘좋다’는 조건을 갖추고 있는 남자가 동시에 등장할 때, 그리고 이런 사정이 부모와 대립하는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그녀는 여러 각도로 생각할 것이다.-오랜 기간 자신의 일생을 가꾸어 준 부모의 추천을 어찌 쉽게 거절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좋은 조건이란 그것 자체로 자신의 일생을 담보할 수 있는 눈앞의 현실이 아닌가, 가난한 연인과의 마음의 풍족함이 생활의 궁핍을 극복하고 과연 행복의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인가, 인생은 누리기도 부족한데 언제 이루는 과정을 다 밟는단 말인가?
그녀는 ‘조건’을 오래도록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신의 내면에서 ‘안돼’하는 자존의 외침을 들을 것이고, 그 외침은 그녀를 고통스럽게 할 것이다. 그녀는 때로 정처 없이 방황하게 될 것이며, 슬픈 시인이 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기간은 잠시로 끝날 것이다. 그녀는 현안을 단순 문제로 정리하면서 자신의 성격과 능력, 과시욕과 자존심 등 인격 전반에 대해서 거울을 바라보듯 자신과 마주하며 깊은 절망적 선택과 더불어 감쪽같이 감정을 수습하는 기민함을 보여줄 것이다. 그리고 자르듯이 한마디 할 것이다.
“첫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며, 연애와 결혼은 별개의 것이라고.”
사실 이 여자의 판단이 옳은 것인지도 모른다. 사랑의 이상은 문학의 이상이지 삶의 이상이 아닐 수도 있다. 이런 문제에 대하여 개화기시대의 문학은 대체로 예민하게 반응한 일면이 있는데, 가령 다음과 같은 경우를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장한몽」에서 김중배를 선택한 심순애의 파격이 그 하나이다. 이 무렵, 심순애와 이수일과 김중배가 엮어가는 이 신파극은 심순애가 김중배를 선택함으로써 이수일의 충격과 분노가 인상깊게 전개된다. 충격과 분노는 사실 이수일 만의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시대인들에게도 얼마간의 파란을 몰아 왔다. 그 파란이란 당연히 그렇게 되어야 할 일이 그렇게 흘러가지 않은 파격이다.
그래서 심순애의 슬픈 비애와 충격을 여과하기 위해 신파극이라는 장르가 사용되었겠지만,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그 착한 심순애, 우리들의 심순애는 사랑보다는 조건을 찾아간 많은 여인들의 선구가 되었다. 이 땅에서 순수가 무너지는 최초의 무대가 되어 버렸다. 이제 그럴 수도 있게 되어 버렸다. 이후 전개되는 이야기는 심순애가 이수일과 재회하고 후회한 나머지 자살하는 것으로 매듭지어졌지만 ‘순애(順愛)’가 그 이름에 걸맞은 향기와 소박함의 원형을 다시는 회복할 수 없었다. 더 이상 우리들의 순애가 아니었던 것이다.
물론 이 작품이 일본 작품을 각색한 것이라 하더라도 이 무렵 눈뜨기 시작하는 애정 문제에서 ‘사랑하지 않아도 결혼할 수 있다’는 대단히 복잡한 과제를 던진 셈이다. 그러나 당시 분위기는 심순애의 선택보다는 이수일의 분노가 호응을 받았고, 그러한 기류가 결국 그녀를 자살로 유도하였지만, 조건에 흥미를 가진 많은 사람들의 인심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심순애적인 곡절과 애환이 균형 내지 보편화를 이룬 것은 그 이후 오랜 세월이 필요치 않았다.
이러한 ‘조건’을 선택한 심순애적인 파문이 적지 않은 볼거리였지만, 한편으로는 ‘이끌림’의 명제에 충실하였던 이광수의 처 허영숙의 생애는 더욱 인상적이다. 그녀의 생애는 ‘조건과 이끌림’이라는 명제를 두고 생각해 볼 때,‘이끌림’ 이라는 명제에 충실한 것만이 아니라, 거의 악전고투하는 삶을 스스로 선택하였고, 그 결과 지고한 사랑의 의미를 획득한 것이다.
조건을 고루 갖춘 의사인 약혼 남자와, 천애 고아이며 폐병 3기의 애인을 두고, 단호하게 애인을 좇아간 허영숙의 선택,-이런 여인의 언저리를 무시하고 집요하게 접근한 모윤숙의 각축은 그들이 남긴 작품적 성과와 이력만큼 고상하다고 할 수 있다.
이광수의 「사랑」,「무정」,「유정」등의 작품과 모윤숙의 「렌의 애가」등은 이들이 그려가는 삼각관계의 괘적과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음은 주지의 일이다.
허영숙은 이런 가난하고 병든 한 남자를 위해 자신의 학업을 미련 없이 포기하였고, 완강한 부모를 끝내 설득시키며, 삼각의 사랑에서 사랑을 차지한 여인의 이력을 남긴 것이다.
‘부끄러움과 말못함’의 정서가 주조를 이루며, ‘약혼’이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엄숙한 묵계가 되었던 시대의 사회상을 염두에 둘 때, 그녀의 의식과 행동은,-지금 거론하는 조건과 이끌림의 명제에 대한 하나의 선구적 단서로 남아 있으며,-연애와 사랑이라는 가설적 도표에서 나타난 ‘진정한 선택’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좋은 예가 된다 하겠다.
4.
‘조건’과 ‘이끌림’의 명제는 결국 행복의 척도를 가늠해보는 문제이다. 어떤 선택이 자신에게 어울리는 궁극적인 인생의 조건을 만드는가? 이 명제는 곧 ‘현실의 수용이냐,’ ‘이상의 추구이냐’의 과제와도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그렇다면 ‘현실’과 ‘이상’은 어떻게 되어 있는가? 이 문제는 정치한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여기서는 하나의 작품 이청준의 「이어도」를 예로 간략하게 설명하기로 한다.
제주도 사람들에게 전설적인 이상향의 섬,-이어도, 그 섬을 찾아가는 주인공은 끝내 이어도를 찾지 못하고 돌아온다. 지친 몸을 이끌고 돌아오는 배 안에서 그는 문득 이런 생각을 한다.“내가 살고 있는 제주도야말로 이상향인 이어도일 것이라고”. 이를 요약해 보면 이상을 추구할 수 있는 현실적 꿈의 공간이야말로 바로 이상향,-paradise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다시 말하면, 이상이 있는 현실이 가장 현실적이고 또한 가장 이상적이라는 점이다. 조건과 현실에 인생을 건 사람에게는 이런 점에 유의해야 한다는 이론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심순애적인 선택의 등식 중, ‘돈=행복’ 이라는 예감은 인생의 향기를 갖지 못하며, ‘사랑했기에= 행복하였다’는 유치환 이영도의 고백에 강한 향수를 느끼는 것이다.
우리들에겐 정녕 사랑에의 아름다운 선택은-모래의 벼랑에 심은 구운밤이 싹이 날 때까지, 바위에 접붙인 옥으로 만든 연이 겨울에 꽃이 필 때까지, 철쇠로 주름 박아 만든 무쇠 옷이 다 떨어질 때까지, 소나무 산에 풀어놓은 무소가 쇠풀을 다 뜯어먹을 때까지 기나긴 인생의 여정을 인고하며 감당하는 그런 것이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선택은 천년을 살아가더라도 끊어지지 않은 믿음의 끈으로 삶을 땀땀이 엮어 논 구슬처럼 이루어 가는데서 가능한 일일 것이다.
필자의 생애에서 두고두고 생각나는 한 여인의 소박한 삶을 소개하는 것으로 이 주제를 끝맺고자 한다.
어느 지방 도시에서 무명 화가의 전시회가 열렸다. 지방주재 기자 한사람이 들러보니 놀랍게도 사지가 없는 불구자였다. 외국의 어느 영화에 발가락으로 그림을 그린 것은 보았으나 ‘입으로 그렸다’는 일은 보지 못했다. 기자가 흥미를 느껴 조사를 해보니 이 기적적인 화가의 뒤에는 헌신적인 한 여인이 있었다. 기자는 이 부부의 기막힌 사연을 소개하게 되었고, 그 결과 여인은 커다란 효부상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잡지에 그녀의 수기가 쓰이게 되었다.
수기 내용은 대략 이러하다. 그녀가 남편을 만난 것은 국군병원에서였다. 그녀는 간호원이었고 남편은 군인이었다. 어느 날 한 남자가 온 몸이 으스러질 정도의 중상을 입고 입원하였다. 그는 그야말로 목숨만 건졌다. 몸은 붕대로 감겨졌고, 사지는 으깨어져 절단할 수밖에 없었다. 긴 수술 끝에 마취가 풀리고 남자의 의식이 돌아왔다. 그는 자신의 몸 상태를 직감하고는 절망하였다. 그는 자해를 위해 침상 모서리에 머리를 박으며 몸부림쳤다. 처절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남자는 끝내 죽지 못했다. 이는 이 환자를 위해 배정된 전담 간호원의 헌신 때문이었다. 그녀는 환자의 대소변을 받아내고 음식을 먹이고 책을 읽어 주었다. 오랜 세월이 흘러 드디어 남자는 몸이 완쾌되어 퇴원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 때 처녀는 환자에게 떨리는 목소리로 충격적인 제안을 했다.
“저는 그 동안 당신과의 관계에서 깊은 사랑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만약 당신이 승낙하여 우리가 맺어진다면 더없이 행복해질 수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이제 당신이 결심하면 부모님을 설득하여 결혼을 하고 싶습니다.”
뜻밖의 제안에 남자는 흥분과 곤혹감으로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러나 곧 남자는 이 제안을 거절하며, 도리어 여자를 달래기 시작했다. “일시적 동정심과 연민의 정 때문에 일생을 그르치지 말라고” 했고, “자신은 결혼을 영위할 수 없는 몸이며, 또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고 했다. 남자도 반대했지만 집안에서도 허락되지 않았다. 그러나 사랑이 무었이길래 여자의 감정은 부모의 반대와 남자의 거부가 심할수록 더욱 깊어갔다고 했다.
그리하여 드디어 여자는 부모에게 승낙 아닌 승낙을 받아내어 그해 가을 조촐하게 예식을 올렸다. 휠체어에 앉아있는 신랑 곁에 그녀는 한 떨기 백합 같은 화사한 모습으로 하객의 축하를 받았다. 그리고 그녀는 직장에 사표를 내고 남편의 고향인 어느 시골로 들어갔다. 그리고 또 5년 남짓 세월이 흘렀고, 이제 그 환자가 화가가 되어 도시에 나온 것이다.
남편에게는 늙은 어머니 한 분이 계셨고, 두어 마지기 터 밭이 있었다. 여자는 자신의 퇴직금과 남편이 국가로부터 받은 위로연금을 합하여 2천여 평의 좋지 못한 산기슭의 땅을 구입하여 농사를 지었다. 그녀는 남편을 뒷바라지하고 시어머니를 봉양하며 땀흘려 농사 지었다. 그 사이 그녀는 아들 형제를 낳아 길렀다. 그리고 사랑하는 남편에게는 취미생활로 그림을 그리도록 격려하였다. 그야말로 1인 5역의 일을 감당하며 삶을 꾸려갔다. 이제 그 사랑이 결실이 맺어 남편은 적지 않은 작품을 가지고 전시회를 열기에 이른 것이다. 그녀는 전시장에서 화사한 한복을 입고 두 아들의 손을 잡고 남편 곁에 서서 한 장의 사진을 남겼다.
그렇고 그런 삶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런데 필자에게 잊을 수 없는 그 여자의 한마디가 오래도록 남아 있다. 그것은 여인의 수기가 끝나는 부분의 고백이다.
“제가 28년을 살아온 동안 남편을 만나 살아온 5년간이 가장 행복했고, 앞으로도 계속 행복할 것입니다.”
그녀의 삶을 유추해 볼 때, 이 말이 갖는 의미를 추호도 의심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래서 우리는 앞장의 도식, 만남-행복에 이르는 전 과정이 완결되는 것이라 믿는다. 따라서 필자는 행복의 또 다른 충만인 ‘사랑’의 진정한 의미를 이 여인의 언어를 통해 되뇌어 본다.
사랑은 자신이 선택한 삶에 충실하는 것,
사랑은 기나긴 사랑의 인내가 따르는 것,
사랑은 커다란 헌신과 존경이 있는 것.
-끝-
1999년 12월
가송 「올미書堂」에서 李 性 源
*정상동 묘소에서 나온 조선시대 여인의 애뜻한 사랑*
교양과 매력
1. [인현왕후전]의 장희빈 최후진술
숙종;
네가 대역부도의 죄를 짖고 어찌 사약을 기다리리오. 빨리 죽임이 옳거늘 요악한 인물이 행여 목숨을 부지할까. 천연스럽게 밝은 햇빛을 보고 살아가니 더욱 죽을죄라, 동궁의 낯을 보아 형체를 온전히 하여 죽는 것이 너에게는 영광이리라. 빨리 죽어 요괴로운 자취를 일시도 머므르게 말라.
장희빈;
내가 무슨 죄가 있어서 사약을 받으리오. 궂이 나를 죽이려거든 내 아들을 먼저 죽여라!
숙종;
내 앞에서 죽일 일이나 너의 얼굴을 보기 더러워 약을 보내니, 너가 염치가 있을 진데 스스로 죽어 자식이 편하고, 남의 손에 죽지 않음이 온당하거늘 자식을 유세하여 누구에게 발악하느뇨. 이 약이 너에게는 상인 줄 알고 죄 위에 죄를 더하여 삼척지율(三戚之律)을 받지 말라.
장희빈;
민씨 단명하여 죽음이 내가 아랑곳 할 일이냐. 너히들이 감히 나를 죽이고 훗날 세자의 손 에 살아날 것 같으냐.
숙종; 네가 중전을 모살하고 대역부도함이 현기에 단영하여 반드시 너의 머리와 수족을 베어 천하에 효수할 것이로되 자식의 낯을 보아 특별히 경벌을 쓰거늘 갈수록 요악하여 죄 위에 죄를 짖느뇨.
장희빈;
민씨 나를 저주하여 형벌로 죽었거늘 내가 무슨 죄가 있으며, 전하께서 정치를 아니 밝히시니 인군人君의 도리가 아닙니다.
숙종;
천고에 저런 요악한 년이 또 어디 있으리요, 빨리 약을 먹여라!
장희빈;
세자와 함께 죽여라. 내 무슨 죄가 있느뇨!
숙종;
몸을 잡고 약을 부어라!
장희빈;
전하! 내 죄만을 보지 마시고 옛날의 정과 자식을 낯을 보아 목숨만은 용서해 주십시오..... 이 약을 먹여 죽이려 하시거든 자식이나 보아 구원의 한을 없게 하여 주소서!
숙종;
빨리 먹여라!
-[인현왕후전]에서-
인격의 논의에 남자와 여자는 다르다. 남자는 ‘지행 일치’의 여부를 말하고, 여자는 ‘재색 겸비’가 거론된다. 지행은 물론 지식과 행동을 말하나, 재색이란 글자는 꽤 흥미롭다. 재(才)는 재주나 교양이라 하면 되겠지만, 색(色)은 다소 애매하다.
‘색(色)’이란 빛. 빛깔. 색채 등을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 색은 ‘섹시하다’, ‘색골’ 등의 육감적인 뉘앙스를 줄 뿐 적절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외모의 아름다움에 대한 총체적 표현임은 분명하지만 외모만을 거론하는 것도 아니다. 굳이 어울리는 단어를 고른다면 ‘매력’이라는 단어가 저만치 있기는 하다.
어떤 여자에게 ‘매력이 있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시선을 끄는 ‘특유의 빛깔’을 지니고 있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어느 철학자의 표현처럼 “종족의 전형적 자손을 생산할 수 있으리라는 예감”의 빛깔일 수도 있다.
‘재색겸비’한 사람을 시비할 수 없다. 그렇지 못할 하다한 경우 우리는 시각과 선택의 문제에 봉착한다.
재. 색의 문제에서 조선시대는 대체로 재의 압도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색이 여간 관심사가 아니었다.
[박씨전朴氏傳]에 나오는 박소저(朴小姐)는 추녀(醜女)에 가까웠으므로, 이 점을 민망스럽게 여긴 아버지에 대하여 장차 시아버지가 될 이 참판(李 參判)은 “영녀(令女)의 외모가 선생의 말씀대로 비록 불민한 점이 혹 있다 할지라도 여자는 현숙한 마음씨가 제일이요, 미색이 아름다움은 박명하기 쉬운 법이니 선생께선 조금도 염려하지 마십시오.”한다. 그리고는 그런 박소저를 기피하는 아들에 대하여 “여자의 숙덕(淑德)은 돌아보지 아니하고 젊고 아리따운 미색만 취하고자 하니 어찌 한심한 노릇이 아니냐”하고 꾸짖는다. 그리고 ‘그 추악한 며느리’라고 부르는 부인에 대해서도, “여자가 아무리 천박하기로서니 겉모양만 보고 마음속의 재덕은 생각하지 않소”하며 매우 못 마땅해 한다. 그리고는 ‘우리 집에는 과분한 며느리’라고 말하고 있다.
이렇게 여자의 재색을 놓고 갈등을 보이는 기록은 곳곳에 있으나, 절대적으로 재덕이 앞서는 덕목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유교적 이념에 충실하려는 관념적 기준일 수 있으며, 현장에서는 이 참판의 아들처럼 아예 가까이 가지도 않을 만큼 중대한 문제였던 것 같다. 미색을 부정하는 그 자체가 이미 미색을 좋아하는 인심을 반영하는 것이다.
‘인기(人氣)’란 인간의 감성적 정기를 말하며,‘인기가 있다’함은 타인의 감성적 정기를 흔드는 힘을 지녔음을 뜻한다. 그 힘은 반짝이는 진실일 수 있다. 시청자를 매료시키고 기를 빼앗는 스크린의 인물들은 대체로 이런 점, 즉 색이 아주 빼어난 사람들이란 공통점이 있다. 그래서 마음씨 좋고 현숙하며 교양이 있다 하더라도 미색의 문제는 감각을 지닌 인간들에게 개성과 더불어 여성다움에 적지 않는 비중으로 남는다.
美善의 개념문제삽입
[인현왕후전]을 정독하노라면 문득 이런 생각, 인현왕후와 장희빈의 각축이 재. 색의 개념과 연관되는 것은 아닐런지?
따라서 장희빈의 처참한 최후와 그녀에 대한 매도가 일방적 편견으로 보여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녀의 죄상은 인현왕후, 즉 민비가 죽은지 23일만에 발각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니까 민비의 죽음은 1701년 8월 14일이고, 희빈의 죄상이 밝혀진 것은 9월 7일의 일이다. 왕의 죽음을 전후한 기간처럼, 이 20여 일간은 정객들에게 권력의 부침, 혹은 삶과 죽음이 시시각각으로 변모되는 예민한 기간이다. 민비를 버팀목으로 삼았던 서인들에게는 민비의 죽음은 그대로 일촉즉발의 ‘위기’이고, 그 반대편에 섰던 정치집단에는 그대로 절호의 ‘기회’였던 것이다.
기득권을 지키려는 자와 이를 빼앗으려는 자들의 피의 각축은 장희빈의 부침과 더불어 나타난 역사적 정변과 일치한다.
참고로 장희빈의 이력과 관련된 사건들을 연도별로 대략 적어본다.
연도 장희빈의 경력 주요사건 역사적 정변
1686 궁녀 입궐
1688 왕자 균 생산
1689 희빈으로 승급 균 세자책봉 기사환국으로 남인득세
1690 중전으로 등극
1694 희빈으로 격하 인현왕후 복귀 갑술옥사로 서인득세
1701 사사됨
1701년 그러니까 장희빈의 사사 때 그녀가 저지른 구체적 죄목은 이러하다.
1.민비의 초상화를 그려놓고 무당으로 하여금 활로 무수히 쏘았다.
2.사람의 뼈와 해골을 민비의 옷에 싸서 전각 곳곳에 묻었다.
요컨대 중전으로 복위한 민비를 빨리 죽도록 축원하여 그 결과, 민비가 죽게 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국모를 살해한 죄목이었다. 국모를 대상으로 이러한 행동을 했다면 죽어 마땅하다. 그러나 장희빈과 민비의 경우는 단순하지 않다. 그들에게 숙종은 무엇인가? 숙종은 왕이기 전에 그들에게 이미 애증의 삼각에서 한 각을 이루며 기쁨과 쓰라림을 안겨준 자연인에 불과하다.
서두에 제시한 장희빈의 최후 진술에서 우리는 그녀의 언어구사가 지엄한 국왕을 대하는 인신의 입장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어미가 지아비에 하는 앙탈의 수작에 벗어나지 않음을 주목하고자 한다. 두 사람의 시비공방이야 말로 자연인으로의 언쟁에 불과하다. 죽음을 재판하는 엄격하고 도 엄숙한 제도의 심판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야말로 부부싸움인 것이다.
사랑과 권좌, 좌절과 비애를 동시에 경험했던 장희빈의 입장에서 그녀의 이러한 일련의 행각은 차라리 애교?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또 사랑하는 아들 마저 연적에게 빼앗겨버린 여인에게 인내와 중용의 처신과 감정공간을 유지하라는 요구와 압력은 조리에 어긋난다.
여인에게 ‘의미 있는 남자’란 무엇일까? 사랑의 향기가 아니라면 증오의 앙금이 있을 뿐 중용의 처신이란 존재하기 어려운 것이다.
흔히 장희빈의 독함과 말한다. 그러나 독함의 측면은 인현왕후가 더하면 더했지 못지 않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그녀가 궁궐 밖으로 좇겨 나고 겪은 그 인고의 기간과 돌아온 숙종을 다시 받아들이는 그녀의 행동은 무섭고도 냉기 어린 여인의 단면을 그대로 보여준다. 여기서 잠시, 위의 인용문을 다시 읽어볼 필요가 있겠다. 인용문은 결국 장희빈의 최후 진술인 셈인데, 그 진술이 갖는 의미를 곰곰 되씹어 보면 장희빈은 자신의 죄를 끝내 불복하는 것으로 일관되어 있다.
이를 다시 정리해보면,
1.내가 무슨 죄가 있느냐?
2.민씨 박명이 나와 무슨 상관이냐?
3.민씨 나를 저주하다가 그 형벌로 도리어 먼져 죽었을 뿐이다.
4.죽이려면 세자와 함께 죽여라. 내 무슨 죄가 있느냐!
5.전하께서 정치를 밝게 아니하시니 인군의 도리를 못하고 있습니다.
6.자식의 얼굴이나 한 번 보아 구원의 한 맺힘이 없도록 해달라.
‘자신의 무혐의’,‘민씨의 박명’,‘전하의 어두움’,‘구원의 한 맺힘’등으로 이어지는 진술로 보면 장희빈은 어쩌면 정말로 ‘억울하게’ ‘죄 없이’ 죽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사정은 그녀의 ‘3번의 죄 없다’는 진술보다 ‘전하께서 정치를 밝게 아니하시어’라는 대목이 또 하나의 단서가 된다. 이 진술이 갖는 의미는 예사롭지 않다. 지엄한 지존을 정면에서 비판하는 것으로, 대역부도한 죄인이 반박할 수 있는 그런 진술을 넘어선다. 이런 진술은 살인에 가까운 죄인의 진술로 보기 어려우며, 범죄심리학적 측면에서도 그녀의 일련의 완강한 저항은 자신의 무죄함을 심리적 기저로 하고 있다는 말이다. 또한 위의 진술은 이미 지적했듯이, 장희빈이 자신의 무혐의-민비의 박명-전하의 어두움-구원의 한 맺힘으로 감정이 고조되는 과정에 나타나는 것으로, 심문하는 숙종의 언어와 잘 대비된다. 숙종의 심문을 요약하면, 요괴로운 자취-삼척지율을 받을 것-머리와 수족을 베어 천하에 효시-천고의 요악한 것과 맞물려있다. 이를 다시 분석해보면 ‘요괴로운 자취’는 ‘무혐의’로, ‘삼척지율의 죄’는 ‘민씨의 박명’으로,‘머리와 수족을 베어 천하에 효시’함은 ‘민씨의 나에 대한 저주’로,‘천고의 요악’은 ‘구원의 한 맺힘’으로 대응된다. 이들의 이러한 공방을 되세겨 보면 한 때 금슬 좋았던 부부의 입장에서, 사랑이 식어버린 남편과 그 사랑에 대한 질투심을 다스리는 자연인으로서의 숙종은 정말 인간적인 정서를 가진 사람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숙종은 대체로 선조처럼 잔인한 성격의 소유자로, 왕권확립을 위해 붕당을 교묘히 이용하여 옥사를 주도하고, 신하들을 견제하는 그런 인물이지 명석한 두뇌와 통찰력을 가지고 시대 현안을 풀어나간 현군은 아닌 것 같다.
하나의 예로, 이 사건과 연루되어,-폐위된 민비를 옹호하다가 죽게된-박태보(朴泰輔 )의 옥사가 좋은 단서가 된다.
박태보에 대한 고문과 심문 장면은 숙종이 친국을 한 것으로, 뼈가 부러지고 살이 터지는 가운데도 명분과 논리로 일관하는 박태보의 진술에 밀려버린 숙종이 자신의 열등감과 반감을 증폭시켜 그 잔인성이 유래가 드문 최악의 형국을 연출하였던 것이다. 박태보는 물론 고문 직후 장 파열로 죽었다.
이 무렵의 숙종은 장희빈을 지극히 사랑하였고, 민비를 대궐 밖으로 내쫓았다. 박태보에 가해진 잔인한 고문은 이러한 숙종의 민비에 대한 미움을 고스란히 한 몸에 걸머진 대리집행자로서 받은 고통이 아닐까. 이제 그 변덕이 다시 장희빈에게로 옮겨온 것이다.
지금 장희빈의 사사를 주도하는 숙종의 면모는 중대한 현안이 발생하면 전후를 살피고 사건의 과정을 냉정하게 검토하여 거기에 합당한 판단을 하는게 아니라 애증의 교차와 함께 감정적으로 처리해버리는 것이다.
위의 재판도 장희빈에게 자신의 죽음을 수긍하고 죽도록 하는 현명함이 보이지 않는다. 그야말로 장희빈의 한 맺힘의 절규를 들으면서 살해해버린 것이다. 단지 ‘연적을 저주’했다는 죄목만으로. 또한 [인현왕후전] 전체가 민비의 입장을 옹호하는 사람의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숙종의 인간됨됨이가 행간의 곳곳에 표출되어 있다. 그런 가운데 장희빈의 최후 한마디,“당신은 인군人君의 도리를 못하고 계십니다”라는 진술은, 장희빈에게 비친 숙종의 인격과 자질에 대한 마지막 진단이고 체념인 것이며, 사랑을 잃은 여인의 최후 일격인 것이다.
그러나 이런 진단 역시 하나의 추론에 지나지 않는다.‘억울하다’고 수 없이 호소한 장희빈의 최후 진술 역시 이제 와서 ‘정당하다’고 재고될 수도 없다. 모든 것이 시효가 만료된 하나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에 나타난 기사환국, 갑술옥사는 단순정변이 아니다. 하나의 집단이 상대의 집단을 그야말로 도륙해버린 엄청나고도 생생한 기록이다.
선조 때 정여립 역모사건으로 전라도가 반역향으로 몰리면서 정권에서 멀어졌듯이, 장희빈의 사사와 더불어 경상도 역시 다시는 정권의 주류가 되지 못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한때 풍미하던 정치규제법 같은 ‘禁錮금고’ 처분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이 후 정국은 노론 일색의 독재정권이 되었고, 그것이 공고화되어 세도정치가 탄생하여 나라 패망에 적지 않는 기여를 하였다.
하찮은 궁녀 장옥정의 발신과 희빈, 중전으로의 승급은 문론 숙종의 사랑에 대한 깊이와 비례하는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이러한 희빈의 총애와 민비의 퇴조를 시시각각 점검해온 정객들은 숨막히는 권력투쟁의 기류가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국왕의 심사를 지근 거리에서 빠르게 감지하고, 그 심기를 읽기에 온 신경이 집중되었던 당시의 권력구조로 볼 때, 애증이 확연히 교차되는 여인들의 각축은 이들이 정쟁에 이용하는 좋은 인적도구가 된다.
다시 말하면 두 여인에 대한 숙종의 애증곡선이 그대로 정객들의 권력부침과 맛물려 있었다는 점이다. 이것이 이들 두 여인의 비극을 첨예와 하는 조건이었다.
궁중의 밀실에서 한 남자에 대한 사랑의 각축이 이들 두 여인의 최대 현안이여야할 일이지만, 이러한 정치적 중압감이 본의 아닌 가운데 권력의 중핵으로 편입되어 일정한 역할이 부여되어 버린 것이다.그리하여 이들에게 찾아온 사랑의 계절과 미움의 계절이 일반의 상상을 뛰어넘는 생사의 문제로 나타난 것이다.
인현왕후전의 줄거리는 정치적 외압과 부담,그리고 예사롭지 않은 두 여인의 개성이 빚어낸 비극적 사건이지만 우리들의 마음속에는 선과 악의 차이처럼 선명하게 각인되어있다. 마치 김만중의 [사씨남전기]의 주인공 사씨와 교씨의 구분처럼.
그러나 민비와 장희빈의 각축을 중세 성리학적 가치관에서 냉정하게 분리할 때, 한번의 실패와 한 번의 승리는 그들의 재색과도 무관하지 않다. 즉 민비가 중세적 교양의 전형이라 할지라도 장희빈이 갖춘 매력을 따르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고 ,역으로 장희빈에게는 민비가 갗춘 덕목을 구비하지 못한 결함이 있을 수 있으며, 이런 요인이 사랑의 각축에서 각각 절반의 실패로 나타난 것이 아닐까?
여인에게 남자에 대한 사랑이란 ‘존경’이라는 요소를 내재하지 않고는 의미 없는 일이며, 남자에게 여인에 대한 사랑이란 ‘매력’을 외면하고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이런 해석은 물론 이념시대에 어울리는 예. 교양을 전제하지 않는 기준에서의 제단이지만 여성다움, 인간다움의 광의적 해석에서 가능한 논리임은 두 말할 여지가 없다.
우리들에게 이재 역사 속에서 이념적 차원에서 함몰되고 일방적으로 매도되었던 여인들의 뜨거운 삶의 흔적을 나름의 애정을 갖고 평가할 수 있는 균형감각과 역사적 시선을 지녀야 할 시점에 이르지 않았을까.
윤리와 사랑
「삼각관계의 사랑」편에서 갈등의 핵심은 결국 ‘윤리’라는 단어에 귀결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윤리가 사랑보다 우위에 있는 개념인지 대해서는 혼란스럽다.
그것은 우리들 삶의 주변에서 아버지처럼 만나게 되는 이 단어의 정체를 정밀하게 이해하고 올바르게 인식하려는 논리와 지혜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사랑의 감정보다 ‘윤리’에 더욱 충실하고자 했던 젊은 학자의 모습에서, 이 단어의 실체를 탐색해보기로 하자. 그 기록은 아래와 같다.
慕齋先生 在高陽村舍 公貌如玉 隣有處女 乘月而來 公責曰 汝士族女 夜投於人 得罪倫紀 折楚 笞而送之 其後 女爲宰相妻
己卯禍作 慕齋將不免 宰相之子 極諫慕齋之賢 盖其母稱其兒 時事曰 慕齋君子人也
해석:
“모재선생(金安國:1478-1543)이 고양 시골에 있을 때의 일이다. 그는 옥 같은 얼굴의 청년이었다. 하루는 이웃집 처녀가 그를
사모한 나머지 달빛을 타고 찾아왔다. 그러나 그는 꾸짖어 말하기를 ‘너는 사대부의 딸로서 밤을 타고 몸을 던졌으니 윤리
의 큰 죄를 지었다‘ 하고는 매를 때려 보냈다. 그 후 처녀는재상의 아내가 되었고, 곧 기묘사화가 일어났다. 모재가 이에
연루되어 죽음을 면할 수 없게 되었는데 처녀의 아들이 극력으로 모재의 훌륭함을 그 아버지에게 간언했으니 이는 그 어머니
가 평소 아들에게 ‘모재야말로 군자중의 군자이니라’고 했기 때문이다.“
위의 이야기는 가볍게 읽으면 하나의 일화일 뿐이다. 그러나 좀더 차분하게 숙고해보면 여기에는 예사롭지 않은 인생의 태마가 떠오르게 된다. ‘예사롭지 않은 인생의 태마’란 이 일화를 ‘인간다움의 문제’로 심각하게 거론할 때, 정연한 답안을 도출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조선시대의 사회상을 염두에 둘 때, 여자가 남자를 유혹하는 적극적인 사고와 실행은 흔하지 않다. 서경덕, 지족스님을 유혹했다는 황진이의 이야기나 어우동이라는 여자의 남성편력이 가끔 화재거리가 되는 정도이다. 위의 처녀의 행동은 그 희귀성에서 일단 희소가치를 가진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처녀의 행위와 김안국의 대응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에 있다. 요컨대 사랑이란 무엇인가? 처녀의 행위를 감정적, 충동적이라고 하고, 김안국의 행동을 이성적, 윤리적이라고 한다면 이 평가는 타당성을 가지는가? 전자는 인간의 자유스러움에 대한 용기 있는 태도라고 하고, 후자는 교양 있는 절제 있는 자세라고 하면 적절한 답안인가? 이렇게 따지고 보면 문제는 생각보다 훨씬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답변, 즉 ‘무엇인 인간다운 일인가’의 물음에 직결된다. 사랑은 무엇이고 윤리는 무엇인가?
앞장에서 이미 삼각관계의 문제가 윤리와 연계되는 유혹에의 만남을 ‘위기’와 ‘기회’의 두가지도 상정하였고, 삼각관계의 주인공들은 대체로 기회에 가담한 사람들이라고 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위에 소개된 일화는 유혹을 두고 지극히 상반된 결정을 한 사람들의 이야기인 셈이다.
처녀의 육탄에 가까운 유혹을 김안국은 최대의 삶의 위기로 인식하였고, 역으로 처녀는 기회로 이용했던 것이다. 그날의 고요한 달밤은 사랑의 감미로움을 고백할 다시 없는 기회였고, 처녀는 결심을 실행으로 옮겼던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처녀의 의도와는 전연 다르게 나타났다. 그녀에게 남은 것은 수치심과 낭패감, 그리고 엄청난 자존심의 손상 뿐이었다. 아니, 그녀는 사회의 무서움만 체험했을런지도 모른다, ㅁ그렇지만 이것은 일시적인 현장사정이 그렇다는 것이지 그녀의 인생 이력에는 또 다른 의미를 가져다 주고 있는 것이다.
처녀는 지신의 파격적이 행동으로 말미암아 김안국과의 인연을 만들었으며 인간을 발견한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매를 맞으면서 사회라는 조직을 인식하였을 것이며, 한편으로는 자신의 내면을 되돌아 보았을 것이다. 또 김안국의 입장으로는 자신의 절제된 자세가 인생의 전환을 가져다 주는계기가 되었고, 자신을 지킨 결과를 가져왔다ㅣ 이러한 사연은 그 누구도 개입할 수 없는 그들의 값진 경험일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아름다웠기 때문에 추억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사태가 이렇게 설명된다.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고, 사랑의 감정과 정열을 이런 극단적 부조화 즉, 매질과 훈계로 귀결된 김안국의 의식세계가 더욱 문제로 떠오르는 것이다. 이는 사실 우리 삶의 본질과 관계되는 것으로, 본질을 추구해가면 문학의 명제에 맞서게 되고 원리를 탐색해 가면 철학의 범주에 들게 된다.
사랑의 지성은 곧 인간다움의 명제를 검색하는 작업이다 그래서 문학과 철학의 문제를 동시에 검토하게 된다.
사랑에의 감정과 물질이 인간의 보편적 인정으로 본다면 다양한 인사(人事) 가운데 ‘연정의 표현=윤리의 죄악’으로 처리한 젊은 김안국의 의식세계는 결국 어떻게 되어 있는가?
김안국의 의식세계란 다름아닌 성리학(性理學)적 세계관을 의미하는 것으로-성리학적 가치준거-즉 ‘이념’이 결정적 구실을 한 셈이다.
이 책속에 적지않게 등장하는 ‘이념’이란 개념은 곧 성리학적 가치준거를 염두에 두고 쓴 말이며, 이글의 전체적 맥락과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다.
그렇다면, 성리학은 어떤 학문이며, 또 어떤 측면이 이러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는가?
다소 진부하고 지루하더라도 흥미를 갖고 읽어보기 바란다. 성리학적 세계관의 올바른 이해야말로 우리 삶의 근저를 이해하는 데 지표가 되기 때문이다.
성리학은 대단히 번다한 학문으로 그 개념 설명이 당시에는 물론이고 오늘에도 명쾌하게 설명되고 있지 않은 실정이다. 그래서 서양철학을 전공하는 사람들로부터 무엇이 성리학적 과제인가를 문명하게 제시해야만 철학적 학문을 논의할게 아니냐고 비판받기 일쑤다.
그러나 필자는 필자 나름의 성리학에 대한 안목을 부족하게나마 갖고 있다. 부족한 데로 갖추고 있는 성리학의 인식에서 이 글의 주제에 부합되는 부분만을 요약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성리학은 모든 우주의 현상을 이기의 개념으로 설명하는 학문이다. 이기개념의 인간에 대한 해석과 시비의 논리를
인성의 참다움이 이에 근거한다 논리를 가지면 주리론에 서게되고, 반대의 입장을 취하면 주기론에 서게된다.
주지의 사실이지만 이언적, 이황 계열에 서면 자에 해당하고, 서경덕, 이이의 계열은 후자의 입장을 취했다.
그래서 애, 혹은 애의 정은 악이라는 포괄적 범주에 포함되고, 서두에 등장하는 처녀와 김안국의 만남은 애의 저이 악이라고 교육받은 김악국과 ,그런 가치의 인생관을 확립하지 못한 한 순진한 처녀가 애의 정을 구현해보려고 했을 때 빚어지는 엄청난 부조화인 것이다.
그런데도 그 부조화의 책임이 어디까지나 여자에게만 부과될 뿐이었다. 성리적 이념에 젖어드는 청년 김안국에게 처년의 그런 행동은 이(理)가 아닌 무리(無理)의 처신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주리론을 세계를 옹호하는 차원에서의 결과이며, 주기론의 적극적인 인생의 해석방법에서는 전연 다르게 거론될 수도 있는 것이다.
대체로 성선설은 이, 사단의 측면을 강조한 것이고, 성악설은 기, 칠정이 본성에 가깝다는 주장은 도다른 사문난적이 된다.
이념의 형성시대에는 이념의 속성이며 중핵인 윤리가 대체로 진실보다 우위에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념이 다수대중적 집단을 하나의 윤리적 명분이라는 고리로 엮어내는 또하나의 굴래일수도 있다. 그레서 처녀의 순진하고 용기있는 시도는 엄청난 곤혹과 절망으로 나타났고 어처구니 없는 인간관계의 현장을 역사에 남겼다. 처녀의 이러한 좌절은 젊은 이이가 이황에게 느꼈던 무섭고도 무거운 중암감과 조응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념과 사랑
조선시대는 엄밀한 의미에서 이념시대이고, 이념시대의 사랑은 남녀칠세부동석으로 특징 된다. 동석해야만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이 사랑이지만 ‘동석할 수 없다’는 요청은 사랑하고픈 사람들에게는 고통이고 절망이다.
‘남녀 7세’,- 이 나이는 성적 징후가 나타나는 연령이기보다는, 사랑을 아예 부정한 것으로 봉쇄하기 위해 제시한 가이드라인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억압이 철학적 기초 위에서 논리적 설득력을 가지면서 무려500여 년을 ‘그리워 할 수 없는 시대’로 묶어 둔 것은 놀라운 일이다. 15세 소녀가 눈물짓고, 16세 소년의 탄식은 당연한 것이다.
이 장에서는 그리워할 수 없었던 시대에 그리워하였고, 동석할 수 없었던 시대에 동석을 감행한 한 젊은이의 치열한 로맨스를 소개하는 것으로, 이념시대의 사랑이 어떠한 빛깔로 채색되었는가를 ‘심생<沈生>’이라는 단편을 통해 보여주고자 한다.
《 심생(沈生)은 서울 양반이다. 그는 약관의 나이에 용모가 준수하고 인정이 넘치는 청년이었다. 어느 날 종로에서 임금의 거동을 구경하고 돌아오던 길에 어떤 건장한 계집종이 자주 빛 명주 보자기로 한 여자를 덮어씌워 업고 가는 것을 보았다. 그 뒤를 한 계집애가 붉은 비단신을 들고 따라가고 있었다. 심생은 겉으로 그 몸매를 상상해 보고 어린애가 아님을 짐작하였다.
그는 바짝 따라 붙었다. 그 뒤꽁무니를 더러 스치고 지나가 보기로 하면서 계속 눈을 보자기에서 떼 놓지 않았다. 광교 부근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바람이 일어 여자의 보자기가 반쯤 걷혀졌다. 보니 과연 처녀는 복숭아 빛 뺨에 버들잎 눈썹, 초록 저고리에 다홍치마, 연지와 분으로 예쁘게 화장을 한 모습이었다. 얼핏 보아서도 미인임을 알 수 있었다. 처녀 역시 보자기 안에서 어렴풋이 미소년이 쪽빛 옷에 초립을 쓰고 왼편이나 오른편에 붙어서 따라오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마침 눈을 올려 보자기사이로 주시하던 참이었다.
보자기가 걷히는 순간에 버들 눈, 별 같은 눈동자와 눈동자가 서로 부딪혔다. 놀랍고 부끄러웠다. 처녀는 보자기를 걷잡아 다시 덮어쓰고 가버렸다. 심생이 이를 어찌 놓칠 것인가. 바로 뒤쫓아서 소공동의 홍살문 부근에 이르자 처녀는 어는 한 집으로 들어가 버리는 것이었다. 그는 멍하니 무언가 잃어버린 것처럼 함참을 방황했다. 그러다가 어떤 이웃 할멈을 붙잡고 자세히 물어보았다. 호조의 하급관리로 있다가 은퇴한 자의 집이고, 다만 16.7세 된 딸 하나를 두었는데, 아직 혼사를 정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그 딸이 거처하는 곳을 물었더니 할멈은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이 조그만 네거리를 돌아서면 회칠한 담장이 나오고, 담장 안의 한 골방에 처녀가 거처하고 있지요”
그는 이 말을 듣고 도저히 잊을 수가 없어 저녁에 집안식구에게 거짓말을 꾸며대었다.
“동창 아무개가 저와 밤을 함께 지내자고 하는군요. 오늘 저녁에 가볼까 합니다.”
그는 행인이 끊어지기를 기다려 그 집 담을 넘어 들어갔다. 그 때 초승달이 으스름한데 창 밖으로 꽃나무가 썩 아담하게 가꾸어졌고, 등불이 창호지에 비치어 아주 환했다. 심생은 처 마 밑 바깥벽에 기대앉아서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방안에는 계집이 처녀와 함께 있었다. 그녀는 나지막한 소리로 책을 읽는데 꾀꼬리 소리같이 낭랑하게 들렸다.
시경에, 계집종이 잠이 들었다. 그녀는 그때서야 등불을 끄고 잠자리에 들어다. 그러나 오래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뒤척 무언가 고민하는 모양이었다. 심생 역시 잠이 올 리가 없거니와 바스락 소리도 내지 못하였다. 그대로 새벽종이 울릴 때까지 있다가 도로 담을 넘어 나왔다.
그 뒤로는 이것이 일과가 되었다. 저물어서 갔다가 새벽이면 돌아오는 것이었다. 이렇게 20일 동안 계속하였으나, 그래도 그는 게을리 아니하였다. 그녀는 초저녁에 책을 읽기도 하고 바느질을 하기도 하다가 한밤이 되어서야 불을 끄는데 이내 잠이 들기도 하고 더러는 번민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6,7일이 지난 어느 날, 그녀는 문득 ‘몸이 불편하다’하고 8시경부터 베개에 업드려 자주 손으로 벽을 두드리며 긴 한숨 짧은 탄식을 내쉬어 숨결이 창밖까지 들리었다. 하루 이틀, 갈수록 더해만 갔다.
20일째 되는 밤이었다. 그녀가 갑자기 마루로부터 내려와 바깥벽을 돌아서 심생이 않아 있는 처소에 나타났다. 심생은 컴컴한 어둠 속에서 놀라 일어나 손을 잡았다. 그녀는 조금도 놀라는 기색 없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도련님은 광교 부근에서 만난 분이 아니세요? 저는 이미 20일 전부터 도련님이 오시는 줄 알았답니다. 저를 붙들지 마세요. 한번 소리를 내면 다시는 여기서 못나갈 것입니다. 저를 놓아주시면 제가 뒷문을 열고 방으로 드시게 할께요. 얼른 놓으세요”
심생은 곧이 듣고 물러서서 기다렸다. 그녀는 획 돌아가 들어가 버렸다. 방에 들어가서는 계집에를 부르더니,“너 엄마한테 가서 큰 주걱 자물쇠를 주시라고 하여 갖고 오너라. 밤이 깜깜해서 사람이 겁이 나는구나” 하니 계집애가 웃방 마루로 건너가서 금방 자물쇠를 들고 왔다. 그녀는 열어 주기로 약속한 뒷문에 꼬챙이를 꽂고 다시 손으론 자물쇠를 채웠다. 일부러 쇠를 채우는 소리를 찰카닥 내었다. 그리고 곧 등불을 끄고 고요히 잠이 깊이 든 듯하였으나, 실은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심생은 속임을 당하여 분통이 났다. 한편 생각하면 그나마 만나본 것만도 다행이다 싶었다. 여전히 쇠를 채운 방문 밖에서 밤을 세우고 새벽에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는 다음날에 또 가고, 다음 날에도 갔다. 방에 쇠가 채워져 있어도 조금도 해이해짐이 없이, 비가 오면 우의를 둘러쓰고 가서 옷이 젖어도 관계하지 않았다. 이렇게 다시 열흘이 지났다. 밤중에 온 집안이 모두 쿨쿨 잠들었고, 그녀 역시 등불을 끄고 한참이나 있다가 문득 발딱 일어나서 계집애를 불러 얼른 등의 불을 붙이고 재촉하여, “애 너희들 오늘밤엔 웃방 에 가서 자라” 한다.
두 계집종이 나가자, 그녀는 벽에 걸린 쇳대를 가지고 자물쇠를 따고 뒷문을 활짝 열었다. 그리고 심생을 불렀다.
“도련님, 들어오세요”
심생은 얼떨떨하여 자기도 모르게 벌써 방에 들어와 있었다. 그녀는 다시 그 문에 쇠를 채우고 심생에게 “도련님, 잠깐 않아 계셔요” 하고는 웃방으로 가서 자기 부모를 모시고 나왔다. 그 부모는 보고 어리둥절하였다. 그녀는 말을 꺼내었다.
“놀라지 마시고 제 말을 들어보셔요. 제 나이 열 일곱으로 일찍이 문밖을 나가지 못하였다가, 월 전에 우연히 임금님의 거동을 구경하고 돌아오는 길에 광교에서 덮어쓴 보자기가 바람에 날려 걷혔습니다. 마침 그 때 한 초립 도령과 얼굴이 마주쳤지요. 그날 밤부터 도련님이 안 오시는 날이 없이 이 방문 밑에 숨어 기다린 지 이제 이미 30일이 지났답니다. 비가 와도 오시고, 추워도 오시고, 문에 쇠를 채워 거절해도 역시 오시었어요. 저는 곰곰히 생각 해 보았습니다. 만일 소문이 밖으로 퍼져서 동네 사람들이 알게되면 밤에 들어왔다가는 새벽이면 나가는데 도련님이 홀로 창밖에 있는 줄을 누가 믿겠습니까. 사실과 다르게 누명을 뒤집어쓰지요. 저야 물론 개에게 물린 꿩이 되는 셈이 되지요. 그리고 저분은 양반 댁 도령으로 지금 바야흐로 혈기가 아직 정치 못하여 다만 나비와 벌이 꽃을 탐낼 줄만 알고 바람과 이슬에 돌보지 않으니, 며칠 못 가서 병이 나지 않겠습니까. 병이 들면 필경 일어나지 못할 것이니, 그렇게 되면 제가 죽이지 않았어도 제가 죽인 셈입니다. 비록 남이 모르더라도 반드시 음보가 있게 됩니다. 또 제 몸은 한낱 중인 집 딸에 불과합니다. 제가 무슨 절세의 경국지색으로 꽃이 부끄러워할 만한 용모를 지닌 것도 아닌데, 도련님께서 솔개를 보고 매로 여기시어 제게 지성을 바치되 이토록 부지런히 하오십니다. 제가 만일 도련님을 따르지 않으면 하늘이 반드시 싫어하시어 복을 제게 주시지 않을 거예요. 제 마음을 정하였습니다. 부모님께서는 근심하지 마옵소서.
아! 저는 부모님께서 연로하시고 동기간이 없으니 시집가서 데릴사위를 맞아 살아 계실 때에 봉양을 다하다가 돌아가신 두에 제사를 모시면 제 소망이 다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제 일이 뜻밖에 이렇게 되었으니 이 역시 하늘이 다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그녀의 부모는 더욱 어안이 벙벙했으나 달리 할 말이 없었고, 심생 더욱 아직 말도 못했다.
그래서 같이 동침을 하게 되었다. 애타게 사모하던 끝에 그 기쁨이야 오죽 하였으리요. 그 날밤 방에 들어간 이후로 저녁에 나갔다가 새벽에 돌아오지 않은 날이 없었다.
그녀의 집은 원래 부유했다. 그로부터 심생을 위하여 산뜻한 의복을 정성껏 마련해 주었으나, 그는 집에서 이상하게 여길까보아서 감히 입지 못하였다. 그러나 심생은 아무리 조심을 하여도 집에서는 그가 바깥에서 자고 오래 돌아오지 않는데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절에 가서 글을 읽으라는 명이 내리었다. 심생은 마음이 몹시 불만이었으나, 집의 압력을 받고 또 친구들에게 이끌리어 책을 싸들고 북한산성으로 올라갔다. 선방에 머문지 근 한달 가까이 되었다. 심생에게 그녀의 편지를 전해주는 사람이 있었다. 편지를 펴보니 유서로 영영 이별하는 내용이 아닌가. 그녀는 이미 죽은 것이다. 그 편지의 내용은 이러했다.
봄추위가 아직도 쌀쌀 하온데 절간의 글공부에 옥체 평안하시옵니까, 항상 사모하옵는 바 어느 날이나 잊으리까. 소녀는 도련님께옵서 떠나신 이후로 우연히 한 병을 얻어 점점 골수에 사무쳐 백약이 무효하온지라 이제 죽을 밖에 없는 줄 알았사옵니다. 소녀처럼 박명한 몸이 살아본들 무엇하오리까만은, 우선 세 가지 큰 한을 가슴에 안고 죽음에 이르러도 눈을 감지 못하옵니다.
소녀 본래 무남독녀로 부모님의 사랑을 받아 장차 부모님께서는 적당한 사위를 구하여 만년의 의지를 삼고 후일의 계책을 마련코자 하였더니 호사다마라 뜻밖에 악연에 얽히었군요.‘넝굴진 풀’이 외람되이 ‘높은 소나무’에 붙었으나 ‘혼인의 아름다움’은 이제 바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는 소녀가 아무 즐거움이 없이 시름하다가 마침내 병으로 죽음에 이른 까닭이옵고, 이제 늙으신 부모님은 영원히 의지할 곳이 없게 되었사오니 이것이 첫째 한이옵니다. 여자가 출가하면 비록 종년이라도, 문에 기대어 손님을 맞는데 기생의 몸이 아닌 다음에야 남편이 있고 시부모가 있겠지요. 세상에 시부모를 모르는 며느리가 있사오리까. 소녀는 몇 달이 지나도록 도련님 댁의 늙은 하인 하나 보지 못하였으니, 살아서 부정한 자취를 남겼고, 죽어서 돌아갈 곳 없는 귀신이 될 것이라 이것이 두 번째 한이옵니다.
아내가 남편을 섬기매 음식을 장만하고 의복을 지어드리는 일보다 큼이 있을까요. 도련님을 뵈 온 이후 세월이 오래지 않다고 할 수도 없지요. 그리고 지어드린 의복이 적다고 할 수도 없는데, 한 번도 도련님께서 한 그릇 밥도 집에서 드신 적이 없고, 한 벌의 옷도 입혀드리지 못했으며, 모신 것은 오직 잠자리에서 뿐이옵니다. 이것이 세 번째 한이옵니다.
그리고 상봉하온지 얼마 아니 되어 길이 이별하게 되었으며, 소녀는 병으로 누워 죽음에 이르렀으나 대면하고 영결을 못하옵니다. 이러한 여자의 슬픔을 어찌 군자에게 구차하게 말씀드리오리까. 생각이 여기에 이르니 창자가 끊어지고 뼈가 녹으며 하옵니다. 비록 연약한 풀이 바람에 쓰러지고 시들은 꽃잎이 진흙이 된다 하온들 끝없는 이 한을 어느 날에 다하오리까!
아아! 창문 사이의 밀회는 이제 그만입니다. 바라옵건데, 도련님은 소녀를 잊으시고 더욱 글공부 힘쓰시어 청운의 뜻을 이루소서.
옥체를 내내 보중하옵기 천만 비옵니다.
심생은 이 편지를 받고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 뒤에 심생은 붓을 던지고 무인이 되어 벼슬이 금오랑에 이르렀으나 역시 일찍 죽고 말았다.》
‘사랑’으로 승화되지 못한 ‘연애’의 속성이란, 어차피 남자에게는 ‘계집질’이며, 여자에게는 한 때의 ‘불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심생과 처녀의 연애는 그 과정이 너무나 진지하고 진실하여 ‘사랑했다’고 하여도 부족하지 않을 듯하다. ‘어두움과 더불어 그리워하는 사람의 집 부근을 서성거림’은 이념과 사랑에서 젊은 장현광의 모습을 통해 살펴 본 바 있다. 그는 그때 ‘그리워하는 자신의 마음’이 ‘본심이 아니다’...하고는 떠나 버렸던 것이다. 심생이 30 여 일을 그리워하는 마음만을 담보로 악전고투한 구애는 단순한 계집질이 아니라, 장현광이 의심하였던 ‘본심’인 것이다.
“나비와 별이 꽃을 탐낼 줄만 알고, 바람과 이슬 맞음을 돌보지 않은”,-심생의 저돌성은 분명 사랑의 그 어떤 힘이리라. 그 힘이 어두운 밤의 차갑고 두꺼운 벽을 헐고 ‘창(窓)사이의 밀회’를 이루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이루어낸 이러한 사랑도,-“바람에 쓰러지는 풀잎 같고 진흙에 시들은 꽃잎 같다"는 처녀의 고백에 이르면 사랑이 거세되어버린 조선시대 여인들의 슬픈 체념의 울음소리를 듣는 것 같아 처연해진다.
30여 일의 고투에서 겨우 동석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했지만, 이들의 사랑 역시 풀잎같이
꽃잎같이 역사의 바람으로 날아가 버린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