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靑江文集> 跋文
이 책은 靑江 柳昌勳 선생의 文集이다. 선생은 安東 全州柳氏 朴谷(瓢溪 혹은 瓢谷)출신이다. 박곡은 우리말로 ‘박실’이라 한다. 언젠가 선생께서 ‘이거 한번 보게’ 하시면서 <省軒府君略事>라는 제목의 작은 책 한권을 주셨다. 펴 보니 박실 壽靜齋 柳鼎文(1782, 정조6-1839, 헌종5) 後孫들의 家系를 적은 家牒이었는데 놀라움 그 자체였다. 친손, 외손의 이름아래 국내외 명문대학들이 끝없이 적혀 있었다.
전에 박실에서는 아이들이 서울대학교에 입학하면 ‘대학에 들어갔다’고 하고, 나머지 대학들은 말하지도 않는다는 말이 사실인 것 같았다. 趙芝薰을 낳은 영양군 주실 마을과 더불어 항상 名村으로만 膾炙되었지 그 실상이 알려진 바는 없었다. 그래서 항상 소문만 풍성했다.
돌이켜보니 안동에서 전주류씨는 450여년의 역사를 가진 씨족이고, 박실은 300여년이 체 안 되는 궁벽한 시골마을로 가구 수도 4, 50호 불과했다. 그런데 이 마을에는 分派祖 檟亭 柳奉時 이후부터 줄곧 인재들이 배출되었다. 不遷位로 모셔진 慵窩 柳升鉉을 비롯하여 蘆厓 柳道源, 壺谷 柳範休, 壽靜齋 柳鼎文의 4대는 당대 士林의 丈席으로 조선후기의 안동사림을 선도했다. 더욱이 노애, 호곡, 수정재는 3代 道薦으로 名望이 藉藉했다. 이후로도 큰 선비들이 계속해서 배출되어 박실의 영향력은 이어졌다. 이런 가문은 영남에선 유일하고 전국에도 희귀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안동 전주류씨를 虎儒(鶴峯系)의 先鋒이라했고, 龜鑑이라 했고, 심지어는 ‘虎儒의 宗家’라고도 하기도 했다.
전주류씨의 명성은 ‘글 문화(문학)’의 저력 때문이며, 그 글에 의한 높은 식견은 屛虎是非와 抗日運動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屛虎是非는 표면적으로는 병산서원과 호계서원을 거점으로 하는 ‘안동의 시비’였지만 차츰 이웃 가문들이 합세하고, 마침내 경북일원의 가문들이 가세하여 대규모의 집단 시비가 된 그런 사건이었다. 그 중심에 전주류씨가 있었고, 西厓 後孫들인 豊山柳氏가 있었다. 그래서 병호시비는 柳柳是非라고 보는 것이 더욱 사실에 부합하다 할 것이다. 후일 병호시비의 문헌 자료들이 정리되어 공개되면 이런 사실들이 확연히 밝혀질 것이고, 그런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그런데 안동의 이런 ‘是非’들은 그 특징이 어디까지나 ‘글의 의한 시비’로 특징지어져서 하나의 ‘是非文化’를 이룩하고 있다. 이런 측면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디에도 잘 나타나지 않은 가장 한국적인 문화유산의 한 단면이라 할 수 있으며, 조선후기의 안동문화를 이끌어 온 중요한 콘텐츠임은 말 할 것도 없다. '옳고 그름에 대한 치열성'이 항일운동으로 그대로 이어졌다.
전주류씨는 조선후기 이런 안동의 글 문화를 대표했다. 그런 연유로 한때 ‘박실은 글 구덩이’라고까지 했다. 글이 쌓여 있는 웅덩이라는 뜻이었다. 그래서 淵民 李家源 박사는 <全州柳氏文獻叢刊>의 序文에 ‘水柳之獻 全嶺之最’이라 했다. 즉 “전주류씨의 문헌은 전 영남의 최고”라고 뜻이다. 이런 평가는 그냥 수사가 아니었다.
退溪-鶴峯-敬堂-葛庵-大山-定齋 柳致明으로 이어지는 退溪學統에서 大山 李象靖의 학문을 처음으로 ‘湖學’이라 명명한 것도 전주류씨였다. 大山의 ‘湖學’이 退溪의 ‘溪學’을 계승했다고 보고 <溪湖學的>, <湖學輯成> 등의 책을 남긴 것도 전주류씨였다. 10권 이상의 문집을 남긴 분만 열 분인데, 이런 일도 이 마을이 유일하다. <弘道全書>등 17권의 저술을 남긴 明谷 柳正基 교수와 <80年代에의 志向> 의 저자인 柳赫仁 장관, 존경받는 柳穆基 (주)풍산 총괄부회장, 시인이며 서울대 명예교수인 柳岸津이 역시 이곳 박실 출신이다.
아무튼 이 조그만 시골마을에서 지금까지 문과 3명, 생원진사 5명, 문집을 남긴 23명과 그 들이 남긴 200여권의 저술, 독립운동가21명, 서울대학교 출신19명(재학생포함), 박사29명, 고시합격자5명이 배출되었다.
흔히 名門, 名家의 조건으로 ‘三不借’를 말한다. 세 가지 빌리지 않는 것을 말하는데, 子, 財, 文을 말한다. 즉 아들과 제물과 글이다. 그런데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글’이다. 안동문화에서 가장 중요시 하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역시 ‘글 문화’이다. 그래서 안동에서는 최근까지도 “그 집도 이제 글이 끊어졌다”고 하고, “글이 끊어지면 그 집도 끝난 집”이라 했다. 그 만큼 글 문화를 중시했다. 이런 글 문화의 중심에 전주류씨가 있었으며, 그 중심에 박실이 있었다. 가히 안동 글의 宗匠이라 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靑江 선생은 박실의 전통을 그대로 계승하신 분이다. 字는 景讚이시다. 그 이력을 대략 적어보면, 10대 소년일 때 晩愚亭에서 明谷 柳正基 교수에게 受學한 이후 경북대학교 문리대철학과 입학, 성희여고교장정년퇴임, 溪上道學淵源坊重建推進委員長, 안동향교전교, 경상북도향교발전협의회장, 陶山書院선비文化修練院理事, 전국한자교육추진총연합회 경북북부지회장, 성균관중앙상무위원, 近始齋紀念碑建立委員長, 하계마을독립운동기적비건립추진위원장, 溫溪宗宅復元都都監, 溪上書堂建立推進委員長, 그리고 博約會, 陶雲會, 月瀾躑躅會 모임의 주도적 창립 등등, 斯文의 온갖 일에 선생이 계셨다. 그 일들을 다 열거할 수도 없다.
더욱이 나의 先親인 庸軒處士의 학문을 잇고자 故 小極 徐周錫, 靑民 權五鳳 교수와 함께 주창하여 만드신 汾上學稧 모임 역시 그러하다. 그야말로 전일 박실 先賢들이 그랬던 것처럼 경북유림의 宗匠으로 활약하셨다.
그렇지만 이런 일과 직책들은 외형적인 것이다. 선생의 참 모습은 글에 있다. 선생은 공무 가운데에도 끊임없이 글을 쓰셨다. 1960년대 <東洋思想槪說>의 저술과 70년대 초의 <中國哲學史>의 번역 간행은 초기 중국철학의 인식에 관한 획기적인 것이었다. 그 밖에도 1965년의 ‘경안여자상업고등학교 교가’를 비롯한 ‘月瀾精舍와 月川書堂’, ‘漢字를 모르면 國語를 모른다’, ‘老人의 生活三則’, 壽靜齋先生文集跋文’, ‘세계화와 주체성’ ‘선비정신’, ‘퇴계선생의 실천유학’ 등 많은 글을 쓰시고, 온갖 책자의 卷頭言과 여러 모임에서 인사말과 講義를 하셨다. 이 역시 다 옮길 수 없다.
그 가운데 1999년에 쓰신 ‘日本廣島韓國人 原爆犧牲者慰靈碑移設에 따른 慰靈祭參祭記’라는 글은 時到-爬錄-告由 순으로 이어지는 告由爬錄이며 追慕儀禮를 집행한 기록이었다. 日記 형식으로 쓰신 참으로 감격스러운 글이었다. 일본 땅에 우리고유의 전통의례를 처음으로 보여주신 그런 행사였다. 이런 글 역시 <常變通攷>등의 문헌을 남긴 전주류씨 儀禮文化의 전통을 그대로 보여주신 것이었다.
일기 일부는 이러하다.
1999년 7월 18일 曇雨
저녁에 호텔에 와서 전교와 둘이서 분정(分定) 이야기를 했다. 김영사(金領事)의 눈치를 보니 헌관은 우리 요구대로 초헌관은 권 이설위원장이, 아헌관은 우리 전교가, 종헌관은 김수한 한일친선협회중앙회장이 하기로 내정한 모양인데, 그렇게 할 경우 김수한 국회의원에게 미안한 생각을 하고 있는 듯 하다고 내가 말하니, 전교 왈 “ 내가 꼭 헌관을 하지 않아도 그들이 그렇게 하기로 했다니 굳이 아헌을 고집하지 말고 저들이 일하기 쉽도록 자리를 하나 더 만들어 주는 셈치고, 또 일인이 하지 않기로 했다니 우리의 목적은 달성한 셈이니 내가 도집례를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소생 답 왈 “그 안이 매우 좋습니다. 전교는 본디 초헌 외는 하지 않는 법이니 아헌이 그리 좋은 것도 아니고, 또 도집례라면 피차의 체면을 살리는 자리니 그렇게 하십시다” 했다.
1999년 7월 21일 火 晴
이어서 고유행사가 진행되었다. 먼저 진설부터 하고 제상 뒤에 흰 막을 치고 거기에 파록한 것을 부쳤다. 글씨는 원백(元伯:李炳卓씨의 자)이가 드는 솜씨에도 공들여 썼다. 종이도 붓도 안동에서 가져온 것이다. 글자가 선명하였다. 거기에는 [己卯七月二十一日 韓國人原爆被禍慰靈碑移設告由時爬錄] 이라 하고 써서 붙였다.
나는 일찍이 선생의 사랑을 받아 公私의 일로 모시고 다닌바 있다. 바르고 단정하셨으며 한 말씀도 허튼 말씀이 없으셨다. 안동 선비의 기상과 품위를 한 결 같이 그대로 지키셨다. ‘靑江’이란 아호처럼 그야말로 세파에 오염되지 않은 푸른 강물이셨다. 항상 격려해주시고 깨우쳐 주셨다.
언젠가 청와대에 근무했던 柳赫仁 비서관과의 일화를 말씀하셨는데, 그때 박실 사람들이 약속하기를 “우리 혁인이가 청와대에 근무하는 동안에는 그 누구도 청탁하지 말자”고 했고, 그대로 지켰다고 하셨다. 선생 역시 문교부에 근무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고 하셨다. 어디 그런 일이 그 뿐이셨을까!
나는 어린 시절 딱 한번 박실을 다녀온바 있고, 그 추억들이 아련하고 아릿하다. 지금 박실은 임하댐으로 흔적조차 없다. 무실, 한들 등의 전주류씨 집성마을들도 마찬가지다. 안동댐으로 인한 안동 동북쪽 도산 일대도 그러하지만, 임하댐으로 인한 동남쪽 안동문화의 손실 역시 가늠하기 어렵다. 후일 이들 문화유산들이 복원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왜냐하면 안동문화는 안동의 문화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국문화의 원형을 그대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나는 박실 외손이고, 지금 문명을 떨치는 여류작가 김서령도 그렇다. 언젠가 臨河 碧溪의 金時馹 戚叔에게 “서령이가 어떻게 그렇게 글을 잘 씁니까”하니, 말씀이 “너의 집이나 우리 집이나 모두 박실 영향이지” 하셨다. 어디 두 집뿐이랴! 안동의 많은 집들이 어찌 전주류씨와 박실의 영양이 없으랴!
박실 수정재 가문의 재주와 학문적 영향을 그대로 물려받았고, 당대 최고의 譜學家인 柳佾坤 형이 선생의 글을 모아 엮으면서 나에게 글을 지어 달라 명하신다. 아마 이 책도 형이 앞장서서 모든 것을 감당하고 만드는 것 같다. 그 정성과 노력에 고개가 숙여진다. 거듭 명령하시니 거절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쓰기도 외람 된다. 그래서 이렇게 대략 선생의 이력과 모신 추억 몇 가지를 적은 것으로 跋文에 갈음한다.
선생께서 오래도록 無病하고 長壽하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2011年 12月
文學博士 永川 李 性 源 謹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