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학술발표 원고>
날짜: 10월 22일
장소: 중국 복건성 무이시 무이대학교
송명이학연구센터
주자탄신880주년기념학술대회
<한국국학진흥원과 무이대학교 송명이학연구센터 학술교류체결>
'도산9곡과 무이9곡, 퇴계와 주자, 청량산과 무이산
도산9곡과 유교문화
李 性 源
차례
1. 도산과 도산9곡
2. 도산9곡과 인물
3. 도산9곡과 풍광
4. 도산9곡의 과제
1. 도산과 도산9곡
안동安東 도산陶山의 옛 지명은 ‘예안禮安’이었고, 예안은 ‘살기 좋은 땅, 즉 ‘가거지지可居之地’로 전국제일이었다. 그래서 16세기 『선성지』를 쓴 늑로櫟老 권시중權是中은 “조물주가 특별히 만들어 놓은 땅이며, 하늘과 땅 사이의 있는 별천지”라 했다.
“예안은 조물주가 특별히 만들어 놓은 것 같다. 왜 그런가? 문 앞에 낙동강이 청량산 뚫고 내려와 구비마다 소沼를 만들었다. 그래서 잔잔히 흐르다가도 갑자기 물결 소리가 난다. 넓은 여울에는 햇살과 노을이 머금고, 기기묘묘한 강돌들이 곳곳에 있어, 고금의 선현들이 이곳 경치를 보고 시를 읊조리며 진경眞景이라 감탄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이곳 에 박석, 월명, 백운, 단사, 토계, 분천, 월천, 비암, 오천의 ‘아홉 구비’가 있으니, 어찌 하늘과 땅 사이의 별천지가 아니겠는가!”
뿐만 아니다. “고금의 선현들이 시를 읊조리며 진경이라고 찬탄하지 않은 사람이 없는 곳”이 도산이다. 그래서 도산진경은 진경산수를 그린 겸재 정선를 불러들였고, 강세황, 김창석 같은 화가가 도산을 그렸다. 왜 이곳을 그렸는가? 『택리지』를 쓴 이중환이 우리나라 최적의 주거지로 안동의 두 지역을 거론했다. 바로 도산과 하회이다. 왜 그랬을까? 이중환의 설명은 이렇다.
“그러므로 강촌으로는 영남 예안의 도산과 안동 하회가 제일이다. 도산은 주변 산들이 강과 조화되어 있다. 산들이 너무 높지 않다. (그래서) 황지에서 발원한 낙동강은 이곳 도산에 이르러 골짜기를 벗어나 비로소 강이 된다. 강변 산들은 석벽을 이루고, 또한 그 산의 발치가 물에 잠기어 경치가 뛰어나다. 물은 나룻배가 건너기에 넉넉하고 마을 안에는 오래된 나무가 많아 정취가 있다. 산 아래 강변은 모두 경작지이다.”
강의 일생은 사람과 유사하다. 유년, 청년, 장년, 황혼이 있다. 낙동강도 그러하다. 멀리 황지에서 발원한 낙동강은 거친 강원도의 산과 투쟁하며 드디어 이곳 도산에 이르고 있다. 청량산은 유년기를 마감하는 마지막 관문의 산이다. 청량산을 지나면서 낙동강은 빛나고 빛나는 청년의 강이 되었다. 산은 더 이상 강을 방해하지 못한다. 강은 이제 산으로부터 벗어나 마음껏 인생을 구가한다.
청년의 강은 구비를 만들고 들을 만들고 못(沼)을 만들고 내(川)를 만들고 협峽을 만들었다. 그래서 도산 일대의 강은 낙천, 단천, 분천, 월천, 오천이 생겨났고, 도영담倒影潭, 월명담月明潭, 한속담寒粟潭, 미천장담彌川長潭, 백운지白雲池, 탁영담濯纓潭, 통소鯒沼, 오담鰲潭이 만들었다. 가송협, 단사협을 빚어냈고, 수많은 강돌과 대와 수석들을 만들었고, 드디어 ‘도산 9곡’을 빚어냈다.
강이 빚은 이런 풍광은 주변 산들과도 그대로 어우러졌다. 이 산들을 이중환은 ‘너무 높지 않다’고 했다. ‘높지 않음’은 현상이며 느낌이다. ‘그 느낌’이란 가슴에 와 닿는 ‘살기 좋은 곳’에 대한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이다. ‘가거지지可居之地’의 핵심 조건이다. 도산은 정녕 이런 환경을 갖추었고, 이런 환경이 발군의 인재배출과 연관되고 있다. 아니 결정적 역할을 했다.
문화관광부가 매년 선정하는 ‘올해의 문화인물’을 보니 안동출신이 여섯 분인데, 그 가운데 도산 출신이 네 분이다. 불곡 이천, 농암 이현보, 퇴계 이황, 육사 이원록이 그들이다. 최근 영양군의 조지훈 선생이 선정되었고, 다른 인근 시군에는 거의 없다. 도산은 안동의 14개면 가운데 하나의 면단위 행정구역에 불과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놀랍다고 할 수 밖에 없다.
‘높지 않음의 산’은 사색의 환경을 제공한다. 사색이 사람을 만든다. 그런 까닭에 같은 ‘강촌’이라 하더라도 ‘살만한 땅(可居之地)’과 ‘볼만한 땅(可觀之地)’, ‘놀만한 땅(可遊之地)’은 구별된다. 청량산을 퇴계는 ‘오가산吾家山’이라 할 만큼 사랑했지만 ‘가서 살기로는 적합하지 않다’라고 한 것도 그런 연유이다. ‘퇴계종택’과 ‘도산서원’은 ‘살만한 땅’의 전형이다. 적어도 퇴계의 안목으로는 그렇다.
‘산의 발치가 물에 잠겨 조용하고 정취가 있는 곳’이 이중환이 본 도산이었다. 또한 산들이 푸른 병풍처럼 둘러있어서 ‘동취병산東翠屛山’, ‘서취병산西翠屛山’이라 했다. 그래서 고인들은 도산의 풍광을 “하늘과 땅 사이의 있는 별천지”라고 하고, 그 산색과 물색을 ‘금수 산 빛’과 ‘유리 물색(錦繡山光琉璃水色)이라 했다.’
도산의 강산은 진정 아름답다. 아니 절묘하다. 낙동강 506.17km 가운데 유일하게 이곳 안동의 도산을 지나는 20Km정도 내외의 지형만이 그런 모습을 연출했다. 이중환은 도산에 이르러 낙동강은 ‘비로소 강이 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강은 도산에서 시작되었고 도산에서 끝나버렸다. 강은 도산에서만 여울과 구비와 소沼와 들과 협곡을 한꺼번에 빚어냈고 그것으로 그만이었다. 도산을 벗어난 상, 하류 어디에도 이런 지형이 없다. 상류는 협과 구비는 있으나 소와 들이 없고, 하류는 들은 있으나 소, 내, 곡, 협의 아무것도 없다. 상류는 거친 물이 산을 비집고 조급하게 흐르며, 하류는 이미 사행천이 되어 넓은 백사장을 개으른 뱀처럼 밋밋하게 흐를 뿐이다. 초로의 피로가 역력하다.
‘곡曲’은 구비이다. 강이 틀어지는 곳이 구비이다. 구비에 여울이 있고, 여울 가에 마을이 있다. ‘도산9곡’은 구비이며 여울이며 마을이다.
‘도산9곡’과 관련된 문헌자료를 살펴보면 최초 『선성지』에 청량산 아래 박석으로부터 월명, 백운, 단사, 토계, 분천, 월천, 비암, 오천까지 ‘9곡’이 ‘예로부터 있었다’ 하고, 이를 다시 ‘14곡’으로 세분해서 분류하기도 했다. 그 후 19세기 광뢰廣瀨 이야순李野淳(1755-1831)의『광뢰집』에는 1곡 운암곡, 2곡 월천곡, 3곡 오담곡, 4곡 분천곡, 5곡 탁영곡, 6곡 천사곡,7곡 단사곡, 8곡 고산곡, 9곡 청량곡 으로 분류했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 쓴 후계後溪 이이순李頤淳(1754-1832)의『후계집』에는 운암곡과 월천곡 사이에 비암곡을 제2곡으로 하고 오담곡을 제외시켰다. 14곡이 9곡으로 다시 정리된 연유는 중국 주자朱子의 ‘무이9곡’ 영향이었다.『후계집』에 “주자의 ‘무이12시武夷十二詩’와 퇴계의 ‘도산18절陶山十八絶’은 구구절절 부합하는 까닭에 시험 삼아 빼어난 구비를 ‘무이 9곡’의 예에 의해 분류했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퇴계는 1547년 ‘희롱삼아 7대 3곡을 짓는다(戱作七臺三曲)’고 하고, 단사곡, 천사곡, 석담곡石潭曲의 3곡을 언급한바 있다. 퇴계의 ‘도산12곡’은 이런 실체적 구비와 직접적인 관련성은 없다.
도산陶山이란 지명은 옛날 ‘도기 가마가 있었다’는 도산서원 지역에 국한했고, 나머지 지역은 모두 예안이라 했다. 1913년 행정구역개편 때 예안은 안동에 편입되었다.
20세기 초까지, 정확히 1914년까지 도산은 ‘예안’이라 했다. 이중환의 기록처럼 어디까지나 ‘안동의 하회’이며 ‘예안의 도산’이었다. 안동과는 전연 다른 행정구역이었다. 역사도 안동은 『영가지』에, 예안은 『선성지』에 기록했다. 예안사림과 안동사림은 구분되었고, 예안향교는 안동향교를 선도했다. 예안향교는 도산서원과 더불어 영남사림과 영남여론의 진원지였다. 안동에서 예안은 항상 ‘예안’으로 존재했다. 그래서 “안동문화는 ‘안례문화安禮文化’라고 해야 옳다”라고 하는 말이 생겨나기도 했다.
2. 도산9곡과 인물
도산9곡에는 구비마다 수많은 인물들이 배출되었지만, 그 대표적인 한 분 정도만 소개한다.
도산1곡 운암곡에는 ‘일곱 군자’가 있다하여 ‘군자리君子里’라 했다. 중심인물은 후조당後彫堂 김부필金富弼(1516-1577)이다. 일생을 처사로 보냈지만 이조판서에 증직되고 시호가 내려졌으며, 문과 급제에 강원감사를 지낸 아버지 김연과 역시 문과 급제에 경상좌도 의병대장을 지낸 아들 김해를 넘어서서 당당히 이 집의 당호를 획득한 인물이다. 지금 오천 광산김씨 대종택의 공식 명칭은 ‘후조당 종택’이다. 김부필에 대한 설명은 퇴계가 쓴 한 편의 시로 충분하다.
후조당 주인 본래 절개 굳어 後彫主人堅素節
벼슬 내려와도 즐거워하지 않네 除書到門心不悅
눈 속에 매화 향기 맡는 모습 坐待梅花氷雪香
마치 온백설자 같은 도인일세 目擊道存吟不輟
절개가 굳고, 벼슬이 내려와도 즐거워하지 않으며, 눈속의 매화 향기를 맡으며 좌정하고 앉아 자기 정진을 하는 인물, 그래서 저 중국의 전설적 도인인 ‘온백설자溫伯雪子’와 같은 분이 김부필이다. ‘빙설향氷雪香’과 ‘목격도존目擊道存’이라는 말은 김부필의 인품에 대한 최고의 찬사이며 그대로 평가다.
목격도존은 《장자》에 나오는 말로, 공자가 목격한, 어떤 수사적 설명도 필요 없는, 그냥 바라보기만 해도 도가 가득 찬 인물인 온백설자를 지칭한다. 퇴계가 제자를 이런 말로 평가한 것은 극히 이례적이다. 퇴계에게 이런 평가를 받은 인물은 많지 않다. 이는 김부필이 벼슬이 내려와도 나아가지 않은 고고함에 대한 전폭적인 찬사다. 벼슬 지상주의 시대에 벼슬을 포기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학문중시’와 ‘인격중시’ 사상은 안동 문화의 가장 큰 특징이다. 그런 연유로 안동에서는 지금도 벼슬과 직위만으로 사람됨을 운운함은 그리 환영받지 못한다. ‘작인作人’은 ‘사람 됨됨이’를 말하는데, ‘작인이 됐다, 안 됐다’는 안동 사람 특유의 인격 중시 표현이다. 이런 분위기가 처사 김부필을 가문의 대표적 인물로 존재하게 했고, 후손들의 계속된 자부심의 원천이 되었다. 후손들의 ‘시호’와 증직 요청은 이런 가치관의 연장선에서 이루어진 결과였다.
그런데 7군자는 이런 조건만으로 된 것은 아니다. 서애 류성룡이 금응협을 지목한 말이지만 그들이 ‘《소학》 그대로의 인물’이기에 가능했다. 《소학》 그대로의 인물이란 그 시대 최고의 찬사였다. 《소학》은 당시 불온서적이었다. 그렇지만 ‘동방 5현’으로 지목된 인물 가운데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도 “일생 동안 《소학》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고 했으니 필독의 행동 지침서이기도 했다. 도학자라 일컬어지는 당시 신진 학자들의 등장은 이 《소학》 공부와 그 실천으로 결정되었다. 《소학》은 어린이를 위한 책이었지만 실천을 주장하는 개혁론자들에게는 정녕 《대학》을 넘어서는 책이었다.
그렇다면 《소학》 그대로의 인물이란 어떤 인물인가? 김부필의 일상을 보면 “날마다 새벽에 일어나 의관을 하고 사당에 나가 절하고 물러나 서실에 앉아 책을 보다가 밤이 늦은 후에야 취침하셨는데, 몸이 불편할 때도 그러하셨다”고 했다. 아들 김해의 기록이다. “의관과 띠를 하고 꼿꼿하게 앉는 자세”는 한자로 ‘관대이좌冠帶而坐’로 표현된다. 이런 자세는 이때까지 보편적으로 취해온 전통적 생활양식이 아니었다. 예를 들면 정암 조광조가 생원합격이 되어 성균관에 입학하니 그 때 대부분의 ‘학생[儒生]’들은 이러한 생활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학생들은 매우 자유로운 생활을 했다. 정암의 술회를 보면, 그들은 여름에 “옷을 벗고 마음 되로 나가고 눕고 했으며赤脫出臥”, “누가 복장을 갖추고 단정한 행동을 하면 모두들 몹시 비웃고 멸시했다”고 했다. 그리고 이런 행동은 “부형들로부터도 노골적으로 제지당했다”고 했다.
수많은 ‘적탈출와赤脫出臥’하는 학생들 속에 홀로 사관생도처럼 행동하고 ‘관대이좌’ 한 인물이 바로 정암이었다. 정암의 입학 초기 입장은 시쳇말로 ‘왕따’ 그것이었다. 피의 투쟁 발발을 예고하는 초기 양상이었다.
1519년, 기묘년 정암과 맞선 최대 정적 남곤南袞은 국왕에게 “근래 선비들이 독서에는 힘쓰지 않고 단지 벽을 향해 잠잠히 앉아 있는 것만 높게 생각합니다” 했다. 그 결과는 정암의 사사처형이었다. 그러나 정암은 곧 부활했다. 국립 서울대학교-성균관-의 학생들이 정암의 외침을 목마른 사슴이 물을 들이키듯 전폭적으로 수용했다. 여기에 참다운 인생의 길, 구국의 길, 즉 도道가 있다고 확신했다. 모두들 《주자전서》를 읽었다. 퇴계는 너무 몰두하여 ‘건강을 해치겠다’고 말리는 사람까지 있었지만 “이 책을 읽으면 마음부터 시원해지는데 건강이 무슨 걱정이랴” 했다. 뿐만 아니다. 퇴계는 방대한 《주자전서》를 요점 정리하여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라는 책을 펴내기까지 했다. 학생들을 위한 배려였다. 학생들은 이런 자세와 책을 신성시하며 이를 새삼스럽게 ‘도학道學’이라 명명했다. 그래서 16세기는 또한 ‘도학의 시대’가 되었다. 주자학의 한국적 토착화의 새로운 선언이었다.
도학은 당시 지식인의 행동과 이론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그들은 《소학小學》이라 불리는 전래의 아동도서를 새삼 다시 읽었으며, 행동 또한 어느 순간부터 사관생도처럼 했다. 행行뿐만 아니라 지知의 측면에 있어서도 변화를 가져왔다. 이들은 우주와 인간에 대해 전연 새로운 해석을 들고 나왔다. 이들은 ‘이理와 기氣’라는 전래의 두 개념을 새롭게 설명하면서, 이 개념을 통해 모든 현상을 포괄하고자 했다. 그런 연유로 이 이론의 해석과 정립을 두고 논쟁이 일어났고, 이 땅의 문인 지식인들이 순식간에 사색적, 철학적 구도자의 자세를 갖도록 했다. 그런 행동이 바로 ‘소학 그대로의 행동’이며, 7군자의 자세라 할 수 있다. 이런 자세는 저 남명 조식이나 회재 이언적에게도 보인다. 이것이 곧 경敬의 자세이고, 도학자의 자세였다. 오천 7군자라는 이름은 바로 이런 도학자의 자세에서 얻어진 상쾌한 면류관이었다. 이런 인물들이 안동의 선비 문화 혹은 안동 정신문화의 근간이 되고 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도산2곡은 월천곡, 3곡은 오담곡으로 월천 조목, 성재 금란수의 고향이며, 좀 더 일찍 이곳에 들어온 인물로 역동易東 우탁禹倬(1262~1342)이 있다.
역동은 단양에서 태어났지만 만년에 이곳에 들어와 생애를 마쳤다. 문과 급제하여 성균관 좨주 등을 역임했다. 감찰규정으로 있을 때 충선왕이 부왕의 후궁 숙창원비를 간음한 일이 있었다. 이에 역동이 백의白衣에 거적과 도끼를 메고 대궐 뜰에 나아가 소리 높여 간하니 동료들은 떨었으며 임금은 부끄러워했다. 이를 ‘역동의 지부상소持斧上疏’라 한다. 《고려사》의 기록은 이러하다.
“경들은 왕을 가까이 모시면서 신하로서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지 못하고 나쁜 행실이 이 지경에 이르도록 했으니 경들의 죄를 아는가! 이런 일은 만고에 변할 수 없는 강상綱常의 윤리인데 어찌 이와 같은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나라의 흥망은 왕의 인仁과 불인不仁에 달려 있는 법입니다. 원컨대 왕께서는 하루빨리 마음을 돌리옵소서!”
죽음을 무릅쓰고 ‘아니 되옵니다’고 한 충신열사는 많다. 그렇지만 도끼를 메고 자신의 말이 틀리다면 “이 도끼로 내 머리를 내리치라”고 한 인물은 역동이 처음이다. 그래서 지부상소는 전통이 되었다.
1591년, 풍신수길이 보낸 사신이 “명을 치기 위함이니 길을 빌려 달라”고 요구하자 조헌은 도끼를 들고 상경하여 그 사신의 목을 벨 것을 주장했고, 한말 강화도에서 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되자 최익현 역시 도끼를 들고 광화문에 나타나 지부상소를 올렸다.
우탁은 언제부턴가 이름보다 ‘역동 선생’으로 더 알려졌다. 중국의 역학[易]이 우리나라[東]로 전해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동국유사》의 기록은 이렇다.
“우탁이 사신으로 들어가니 원나라 천자가 ‘그대는 역리易理를 아느냐’ 했다. 답변하기를 ‘우리나라는 역이 없고, 또 아는 학자라도 어찌 통달한다 할 수야 있겠습니까. 역은 이학理學의 정수이니 바라옵건대 한 번만 보여 주시옵소서’ 했다. 천자가 역 책을 내려주니 여관으로 돌아와 하룻밤 만에 다 읽고 돌려주었다. 다음날 천자가 ‘모두 읽었는가’ 하니 답변하기를 ‘거의 보았습니다’ 했다. 천자가 즉석에서 암송하도록 하니 거의 막힘이 없자 칭찬하기를 ‘아름답구나! 작고 궁벽한 나라에 있기는 아까운 인물이다. 주자가 다시 동방에 태어났구나!’ 했다.”
이런 역동이었지만 격변의 고려 말 그는 미련 없이 관직을 버리고 이곳 부포로 들어와 유유자적하다가 81세의 나이로 세상을 마쳤다. 일찍이 안향 문하에 있었는데, 안향은 눈을 감으면서 제자들에게 “그대들은 내가 죽거든 역동을 나와 똑같이 스승으로 섬기라”고 유언했다. 그리하여 역동은 안향의 제자이며 당대의 인물들인 권부, 백이정, 이제현, 이곡, 이조년, 안축, 김득배 등의 스승이 되기도 했다. 사후 성균관대사성 이색이 주청하여 ‘문희공文僖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역동은 조선조에 더욱 평가받았다. 태조는 “우탁은 도학을 밝혀 동방 이학의 조가 되었다”고 했고, 명종은 “불교를 배척하고 도학이 없어지지 않은 것은 오로지 이 사람에게 힘입은 것”이라 했다. 1570년, 역동을 다시 평가한 분이 있었으니, 퇴계가 바로 그다. 퇴계의 한마디는 추모 건물 역동서원을 짓는 결정적 동력이 되었다. 그리하여 안동 최초의 서원이 이곳 부포에 창건되었다. 이후 안동은 마흔 한 개의 서원이 세워져서 유교 문화의 중심이 되었다. 퇴계의 <역동서원기문易東書院記文> 한 대목은 이러하다.
“선생의 충의대절은 천지를 움직이고 산악도 흔들 만하다. 경학의 밝음과 진퇴의 올바름은 후인의 사표가 되니, 백세의 제향을 받을 자 선생이 아니면 그 누구이겠는가!”
“경학의 밝음과 진퇴의 올바름”은 역동의 학문과 귀거래를 말해 준다. ‘물러남과 불러도 올라가지 않음’은 ‘진퇴의 문제’로 도학자들이 중요하게 여긴 필수 덕목이었다. 역동은 그 시대의 가치관으로 볼 때 도학자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리하여 서원을 지어 백 세 뒤에라도 추모해야 할 인물로 여겨졌다.
도산4곡은 분천곡으로 ‘강호문학의 창도자’로 일컬어지는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1467~1555)의 고향이다. 농암은 조선조에 유일하게 정계 은퇴식을 하고 은퇴한 인물이다. 임금은 금포와 금서대를 하사했고, 관료들은 일제히 전별시를 지어 선물했다. 한강까지 이어진 행차를 보고 도성 사람들은 담장처럼 둘러서서 “이런 모습은 고금에 없는 성사盛事”라고 했고, 퇴계는 “지금 사람들은 이러한 은퇴가 있는지도 모릅니다”라고 했다. 김중청은 이 은퇴에 대해 “회재, 충재께서 전송 대열에 서고, 모재, 퇴계께서 시를 지어 전별했으니, 중국의 소광, 소수의 은퇴에 어찌 비교되겠는가. 이는 우리나라 수천 년 역사 이래 없었던 일로, 우리 농암 선생이야말로 천백만 명 가운데 단 한 분 뿐이다”라고 했다. 《실록》은 이를 ‘명예나 이익에 뜻이 없어서 벼슬을 내어놓고 물러난다’는 뜻으로 ‘염퇴恬退’라 규정했다.
농암은 돌아오는 배 안에서 노래 한 곡을 지었다. <효빈가效嚬歌>라 했다. 기록은 이러하다.
“1542년 가을, 농암 늙은이 비로소 인끈을 벗고 국문國門을 나와, 한강 기슭에서 친구들과 이별하고 돌아가는 배를 탔다. 술에 취해 배 안에 누우니 달이 동산에 떠오르고 산들바람이 불어와 문득 도연명의 ‘배는 표표히 바람에 나부끼고’의 구절을 읊조리니, 돌아가는 흥겨움이 더욱 깊어져 스스로 빙그레 웃음 지었다. 이에 노래를 지으니, 이 노래는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본받은 까닭으로 <효빈가>라 했다.”
‘돌아가리라’ ‘돌아가리라’ 말 뿐이오 간사람 없어
전원이 황폐해지니 아니 가고 어찌할꼬.
초당에 청풍명월이 나며 들며 기다리나니
고향으로 돌아온 농암은 바위 ‘농암聾巖’에 올라 다시 노래 한 수를 읊었다. 그 노래가 <농암가>다.
농암에 올라보니 노안이 더욱 밝아지는구나
인간사 변한들 산천이야 변할까.
바위 앞 저 산 저 언덕 어제 본 듯 하여라.
은퇴 후 농암은 농부로 자임하고 일개 서생과 다름없는 담백하고 물욕 없는 생활을 하여 ‘유선儒仙’으로 추앙받았다. 그리고 천성적인 시인으로, 분강의 강가를 두건을 비스듬히 쓰고 거닐면서 강과 달과 배와 술과 시가 있는 낭만적 풍경을 연출했다. 이 감흥과 미 의식은 그대로 문학과 예술이 되었다. 이런 강호 생활은 분강, 애일당을 찾은 동료와 후배들에 의해 영남가단이 형성되는 모태가 되었다.
특히 퇴계는 동향의 후배로서 인간적, 문학적으로 남다른 교류를 했다. <어부가>의 발문에서 “바라보면 그 아름다움은 신선과 같았으니, 아! 선생은 이미 강호의 그 진락眞樂을 얻었다”라고 찬양했다. 농암은 관료적 문학이 성행할 때 강호지락江湖之樂과 강호지미江湖之美라는 새로운 문학 세계의 지평을 열며, <어부장가>, <어부단가>를 비롯한 <효빈가>, <농암가>와 <생일가> 등의 시가작품을 남겼다. 농암은 한국 문학사에 큰 영향을 미쳐 ‘강호 문학의 창도자’로 평가받았다. <어부가>는 이후 퇴계의 <도산 12곡>에 영향을 주었고, 다시 이한진의 <속어부사>, 이형상의 <창보사> 등으로 이어졌으며, 드디어 윤선도의 <어부사시사>로 이어졌다. 윤선도는 <어부사시사>의 서문에서 “어부사를 읊으면 갑자기 강에 바람이 일고 바다에는 비가 와서 사람으로 하여금 표표하여 유세독립의 정서를 일게 했다. 이런 까닭으로 농암 선생께서 좋아하셨으며, 퇴계 선생께서도 탄상歎賞해 마지않으셨다”고 했다.
안동 지역에서는 17세기 김응조, 18세기 권두경, 19세기 이휘영 등의 문집에 “분강에서 농암의 <어부가>를 다 함께 불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는 학술적 계승이 아닌 현장 연출로서 수백 년의 집단적 전승이 있었음을 엿보게 한다. 그리하여 농암으로 대표되는 영남가단은 국문학사에서 송순-정철로 이어지는 호남가단과 더불어 쌍벽을 이루었다고 했다.
만년에는 정2품 이상의 문관들을 예우하기 위해 설치된 기로소耆老所에 입소되는 영예를 얻었으며, 명종으로부터 “경은 진실로 천하대로天下大老요 당세원구當世元龜라. 염퇴이양恬退헊養이 이미 명철보신明哲保身을 넘었으며 정관선기靜觀先幾했다”라는 최고의 찬사를 받았다. 은퇴 후 거듭되는 상경 명령에도 불구하고 올라가지 않으니, 나라에서는 1품인 숭정대부의 품계를 내려 예우했다. 그리하여 조선 전기에 보기 드문 재야 정승이 되었고,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이 직책을 가졌다.
농암은 명예를 포기하여 더 큰 명예를 얻은 인물로, 우리에게 행복한 인생이 어떤 것인지를 가르쳐 준다. 89세에 몰하니 나라에서는 그의 효와 절개의 정신을 기려 ‘효절孝節’이란 시호를 내렸다. 조선 500년, ‘대로大老’라고 불려진 인물은 흔하지 않으며, 효절이란 시호 역시 농암이 유일하다. 청백리에 녹선錄選되었고, 분강서원에 재향되었다.
그런데 농암가문의 한 가지 특기할 사항은 장수자가 유난히 많았다는 점이다. 농암을 중심으로 하여 보면, 농암 89세, 아버지[欽] 98세, 어머니(안동 권씨) 85세, 숙부[鈞] 99세, 조부[孝孫] 84세, 조모(청주 양씨) 77세, 증조부[坡] 76세, 고조부[軒] 84세이며, 외조부[權謙] 93세, 외숙부 두 분[權受益, 權受福]이 93세, 73세, 외사촌[權矩]이 85세였다. 동생들[賢佑, 賢俊]이 91세, 86세이며, 아들 문량 84세, 희량 65세, 중량 79세, 계량 83세, 윤량 74세, 숙량 74세이고, 조카인 충량과 수량이 각각 71세, 89세이니 참으로 보기 드문 일이었다. 1500년대 평균 연령이 80세, 그것도 7대 200여 년에 걸쳐 계속되었다.
노인을 공경하는 전통은 농암으로부터 더욱 확립되었다. 1519년 9월 9일 중구일, 농암은 이날 안동부사의 신분으로 남녀귀천을 막론하고 안동 부내 80세 이상 노인을 한자리에 초청하여 경로잔치를 했다. 이를 ‘화산양로연花山養老宴’이라 했다. 그런데 이 잔치에서 주목되는 것은 여자와 천민을 함께 초청했다는 점이다. 이런 측면은 집안에서도 “자제와 노비들을 편애하지 않았고, 혼사도 문벌 집안을 찾지 않았으며, 사람을 대접함에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았다”는 퇴계가 쓴 농암의 행장 기록과 일치한다. 당시가 엄격한 신분 사회였음을 생각할 때 실로 파격적인 일로, 경로와 박애정신에 대한 농암의 인식을 잘 보여준다.
농암은 화산양로연에 앞서 1512년, 분강의 기슭 농암바위 위에 부모를 위해 정자를 짓고 ‘애일당愛日堂’이라 했다. 많은 정자가 있지만 효를 실천하고자 지은 집은 드물다. 또 그 이름이 하루하루를 아까워한다는 뜻의 ‘애일’이니 얼마나 멋진가! 애일당은 곧 ‘부모님이 살아 계신 나날을 아낀다’는 뜻이다.
농암은 여기서 아버지를 포함한 아홉 노인들을 모시고 어린아이처럼 색동옷을 입고 춤을 추었다. 농암 자신이 이미 이때 70세가 넘은 노인으로, 중국의 전설적인 효자 노래자의 효도를 그대로 실행했다. 이를 ‘애일당구로회愛日堂九老會’라 했다.
농암의 이런 경로 효행은 조정으로 알려져 당대 명현 47명이 축하 시를 보냈으며, 이후 선조 임금이 농암종택에 ‘적선積善’이라는 대자 글씨를 하사하는 계기가 되었다.
애일당구로회는 1902년까지 400여 년 전승되었고, 《애일당구경첩》, 《애일당구경별록》, 《애일당구로회첩》, 《분양구로회첩》 등 관련 문헌들이 남아 있다.
이들 책을 살펴보면, 1569년 봄 퇴계는 나이(70세), 회원 정족수(9명), 형[李澄]의 참여 관계로 사양했으나 회원들의 권유로 가을부터 참여했다. 그때 퇴계는 “내 나이 70 미만이고 회원도 아홉뿐이니 어찌 참석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권하시니 끝자리로 하겠습니다.또 형님이 계시니 당연히 그리해야 합니다” 했다.
1602년 기록에는 “이때 오천의 한 상민이 왔는데 나이가 101세”라는 흥미로운 사실도 보이며, 1705년 이원필의 기록에는 ‘속로회’, ‘백발회’등으로 명칭을 변경한 것이 “회원이 점점 많아진 까닭에 ‘구로’라는 명칭을 쓸 수 없었기 때문”이라 했다. 1902년의 모임에는 회원 수가 37명, 나이 합계 2,651세라 했다. 이들 모임에서는 때마다 시문을 지었는데, 그 가운데 퇴계 10대 종손인 이휘영의 글 한 부분을 소개한다.
“아아! 농암 효절공께서 애일당을 지음은 진정 뜻이 있음이다. 전에 내가 문집을 보니 ‘구로회’, ‘속구로회’, ‘속로회’, ‘백발회’ 등의 여러 이름으로 모임이 이어졌는데, 대개 70세 이상 노인 열 두셋 명이 항상 모였다.
안동의 옛 풍속이 나이는 숭상하나 관직은 숭상하지 않은 까닭으로, 수십 인의 노인들과 애일당 산간을 나와 탁영담으로 올라와 작은 배를 타고 흘러 내려가다가 귀먹바위 아래에서 배를 묶어 두고 술을 한 잔씩 돌리고 <어부가> 3장을 노래했다. 높은 갓과 백발들의 그림자가 산수에 비치고 음식은 마른고기, 젓갈, 국수, 밥으로, 불과 다섯 그릇도 안 되니 그야말로 진솔하다 할 수 있다.
주인도 없고 나그네도 없다. 스스로 술을 마시고 안주를 먹었다. 날이 저물어 해가 떨어지고 달이 마루에 떠오르나 이미 취하고 또 취하여 모두 돌아감을 잊었더라.”
도산5곡은 탁영곡으로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이 계사에 지은 계상서당과 도산에 지은도산서당이 있다. 두 곳 모두 깊은 산 무인지경에 외롭게 자리하고 있는데, 퇴계는 왜 이런 곳에 자리를 잡았을까? 《도산전서》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군자의 학문은 ‘위기爲己’일 뿐이다. 위기란 무엇인가? 하는 바 없이도 저절로 이루어지는 경지다. 마치 심산무림 속의 한 포기 난초처럼 종일 향기를 뿜으면서도 자신은 그 향기를 알지 못하는 이치와 같다. 이런 것이 바로 군자의 위기지의爲己之義에 부합하니 깊이 체득할 일이다.”
君子之學, 爲己而已, 所爲爲己者, 無所爲而然也. 如深山茂林之中, 有一蘭草, 終日薰香, 而不自知其爲香, 正合於君子爲己之義, 宜深體之.
“심산무림 속의 한 포기 난초”와 같은 존재의 구도! 이것이 퇴계와 퇴계 종택의 입지 비밀의 열쇠다. 심산무림이란 바로 상계를 말함이요, 한 포기 난초란 곧 퇴계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리라. 퇴계는 정녕 쉽게 찾아올 수 없고 발견하기 어려운 깊은 산중의 한 포기 난초와도 같은 삶을 살아가고 싶어 했다. 도산서당은 더욱 그러했다. 도산서당이 위치한 도산은 그야말로 무인지경의 깊은 산중에 자리하고 있다. 지금은 도산서원과 부속 건물들이 들어서서 마치 종합 캠퍼스처럼 변했고 퇴계는 훌륭한 시설을 갖춘 종합대학의 총장처럼 여겨지지만, 도산서당이 건립될 당시의 초기 도산은 그야말로 ‘심산무림의 한 가운데’였다. 그런 고요 속에서 수도승처럼 진리 탐구와 자기 수련에 매진한 사람이 퇴계였다.
한서암을 지은 다음 쓴 시는 이런 분위기를 그대로 보여 준다.
아무도 내 집 찾는 사람 없어 人日無人叩我廬
문을 닫고 옛 책 읽는다. 閉門且讀古人書
병든 모습 어찌 세상에 적합할까 텉形豈合텊塵累
편협한 마음 고요를 사랑하네. �形從來愛靜居
노을 지는 숲속 참새 지저귀고 雀躁林間煙漠漠
해지는 울 밑 소가 졸고 있네. 牛眠籬下日舒舒
내 뜻 감히 말할 수도 없는 것 敢論志業非愚分
미혹을 물리치지 못할까 근심되네. 離索長憂或未퀉
퇴계가 심산무림 한 가운데에 자리잡은 것은 바로 ‘위기지학爲己之學’을 실현하기 위함이었다. 위기지학이란 무엇인가? 말 그대로 ‘자신을 위하는 학문’이다. 바로 ‘경’ 실천의 학문이다. 경은 유가의 선禪이다. 경 실천을 ‘거경居敬’ 혹은 ‘지경持敬’이라 하는데 참선과 흡사하다. 거경과 참선의 궁극은 무엇인가? 모두 인생의 길을 찾는 수양 방법이다. 그 첩경은 ‘고요’였다.
고요가 온존한 지역! 그렇지만 그 고요는 산중 절집 같은 곳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인가가 모인 마을은 더욱 아니었다. 동리도 산중도 아닌 그 완충의 심산무림 속이 위기지학을 할 수 있는 적지였다. 강이 멀리 있지 않고, 곁에 개울이 흐르며, 주위 산이 조화롭게 감싸고 있는 곳. 요컨대 산수의 조화는 가거지지의 절대 조건이었다. 상계와 도산은 최적지였다. 퇴계 종택과 도산서원이 심산무림 가운데 고독하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상계나 도산에서 퇴계의 일상은 독서, 저술, 교육으로 요약된다. 이 가운데 저술이 압도적 비중을 차지한다. 저술은 다시 시 쓰기와 편지 쓰기로 구분된다. 시는 2,270여 수, 편지는 3,300여 편 남아 있다. 시는 고요 속에서 내면을 가꾸는 위기지학의 요체였고, 편지는 외부 세계와의 단절을 극복하는 수단이었다. 특히 편지를 주목할 만한데, 퇴계의 교육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한 통의 편지는 사람의 영혼을 흔들 수 있다. 심산무림 가운데에 은거한 당대의 학자 퇴계에게서 온 겸허하고 가식 없고 정성스런 편지는 무한한 존경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니까 퇴계의 편지는 충고해주기를 열망하는 친지, 제자들에 대한 충고 없는 충고이기도 했다. 사실 퇴계는 끊임없이 충고하고 있다. 퇴계처럼 많은 충고를 한 분도 없다. 다만 그 충고가 너무 따뜻하고 다정다감하며, 또한 편지라는 매체를 통해 이루어졌으므로 당사자에게는 거의 충고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아래 ‘퇴계식의 충고’가 담긴 편지 한 편을 다시 소개한다.
1569년, 19세의 이함형李咸亨은 멀리 순천에서 찾아온 제자였고, 부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모두들 말했지만 퇴계는 모른 척했다. 이함형이 떠나는 날 편지 한 통을 주었는데, 봉투에 이렇게 적혀 있었다. ‘路次密開看.’ ‘도중에 몰래 뜯어보고 버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집에 돌아와 몰래 뜯어보니 놀랍게도 자기 부부에 대한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스승과 제자 사이, 직접 말하고 충고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 같은데 퇴계는 그렇게 하지 않고 있다. 상처받지 않도록 세심하게 배려하고 있다. 정성과 감동을 담은 간접적 지도방법이다. 부인을 구박하던 이함형이 다시 금슬 좋은 부부가 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편지내용의 일부분은 이러하다.
“들으니 그대 부부가 화합하지 못한다고 하는데 무슨 이유로 이러한 불행이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하네. 그렇지만 대체로 보면 (여자의) 성품이 좋지 못해 스스로 소박을 자초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은 남편이 항상 (자신을) 반성하고 잘 보살펴주면 부부의 도리를 잃고 가정이 파괴되어 더할 수 없는 각박한 인간으로 전락되는 지경에는 이르지 않은 법이네. 여자의 성품이 고약하여 고치기 어려운 경우에도 그 정도가 심하지 아니하면 상황에 따라 잘 처리하여 끝내 서로 헤어지는 지경에까지는 이르지 않게 하는 것이 옳을 것 같네.
나의 경우를 예로 들어 말해주겠네. 나는 두 번 장가를 갔으나 한 결 같이 불행했네. 그러나 나는 한 번도 박대하려는 마음을 가져 본 적이 없으며, 그저 애써 잘 지내려고 노력하며 살아온 것이 십 수 년, 그 사이 더러 마음이 흔들리고 번민과 고뇌로 견디기 어려운 때도 없지는 않았네. 그러나 그렇다고 어찌 인정을 돌릴 수 있겠는가. 어찌 내 마음대로 인간의 도리를 소홀히 하여 홀로 계시는 어머니로 하여금 근심하도록 하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내 고치는 바가 없다면 학문을 해서 무엇 하며, 실천한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으랴!”
퇴계는 정말 ‘성의를 다한 감동의 편지글’을 썼다. 위 편지가 그렇다. 그 누구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았을 자신의 부부생활에 대해 고백하고 있다. 퇴계는 상처喪妻하고 재혼했는데, 두 번째 부인은 말하자면 ‘좀 모자라는 여인’이어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주었다. 16년 세월, 자녀도 두지 못한 이 여인은 옷갓 실수를 하여 퇴계의 체통을 손상시켰다. ‘체통을 손상시킨 이야기’는 지금도 가끔 화제가 되곤 할 정도이다. 그러나 퇴계는 그 누구에게도 불평 한마디 않았다. 그런데 이제, 자신의 영원히 감추고 싶었을 비밀을 제자에게 고백하고 있다. 당대 최고의 인품을 지낸 학자의 내밀한 고백이 담긴 이런 편지를 받고 감동받지 않을 제자가 어디 있겠는가! 퇴계의 편지는 감동교육 그 자체였다.
퇴계의 편지는 형식적인 측면에도 표현을 완곡하게 써서 충고의 예봉을 무디게 하여 읽는 자의 아픔을 덜어준다. 한없는 겸손의 말, 즉 ‘겸사謙辭’를 사용하는 기법이다.
아래에 이 부문의 한문 원문의 일부를 소개한다.
似聞公有琴瑟不調之歎 不知因何而有此不幸 竊觀世上有此患者不少 有其婦性惡難化者 有 嫫醜不慧者 有其夫狂縱無行者 有好惡乖常者 其變多端 不可勝擧 然以大義言之 其中除性惡難化者 實自取見疎之罪外其餘皆在夫反躬自厚 �勉善處以不失夫婦之道 則大倫不至於�毁 而身不陷於無所不薄之地 其所謂性惡難化者 若非大段悖逆得罪名敎者 亦當隨宜處之 不使遽至於離絶 可也
……滉所嘗經者告之 滉曾再聚 而一値不幸之甚 然而於此處 心不敢自薄 �勉善處者殆數十年 其間極有心煩慮亂 不堪擾悶者 然豈可循情 而慢大倫 以貽偏親之憂乎 ……公宜反覆深思 而有所懲改焉 於此終無改圖 何以爲學問 何可爲踐履也
뿐만 아니다. 퇴계는 자신의 사상과 시국에 대한 대응도 이 편지를 적극 활용하고 있다. 편지를 주고받는 것은 그 자체가 교육과 학문 교류를 위한 핵심 수단이었다. 한국 성리학의 꽃으로 불리는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과의 7년여에 걸친 이기 논쟁은 대표적인 편지 교육의 예다.
논쟁의 초점은 항상 퇴계가 “이와 기는 나누어 소속시켜야 한다”는 이른바 ‘이기분속理氣分屬’의 주장에 대해, 기대승은 “이와 기를 이물二物로 보며 분속分屬해서 설명함은 저는 결코 이해할 수 없다”였다. 한문 원문은 ‘兼理氣有善惡, 分屬未安’인데 해석하면 “이. 기 모두 선과 악이 있는 까닭에, 분속은 (정말 수용하기) 미안한 논리입니다”이다. “이와 기는 일물이기 때문에 나누어 분속시킴이 틀렸다”는 것이 기대승의 굽힐 수 없는 지론이다.
그렇다면 퇴계는 왜 그토록 오랜 세월 이를 수용하지 않았을까? 퇴계의 편지 속에 녹아 있는 ‘이선기악理善氣惡’, ‘이귀기천理貴氣賤’, ‘이존기비理尊氣卑’ 등의 유사한 표현은 바로 대립된 두 집단의 투쟁적 국면의 성격을 반영한다. 그래서 “이와 기는 공존하면서도 투쟁하는 관계인 것理氣之相須 或相害”이다. 이, 기의 개념을 선善, 귀貴, 존尊한 것과 악惡, 천賤, 비卑한 것으로 철저히 분속하여 대비한 것은 이, 기의 상해相害 속성을 나타내면서, 한편으로는 사림집단과 훈구집단의 처절한 대결구도와 연계된다. 당시의 상황에서 퇴계의 논리는 이러한 정국 동향과 연계하지 않고는 어떠한 설명도 합리적인 설득력을 지니기 어렵다. 고봉은 이런 연유로 끝내 퇴계를 이해하지 못했으며, 율곡 이이 역시 퇴계와 같을 수는 더욱 없었다.
요컨대 퇴계의 이기분속론理氣分屬論은 ‘사화를 극복하는 논리’이며, 율곡의 이기묘합론理氣妙合論은 ‘당쟁을 극복하는 논리’였다. 전자는 대결의 논리이며, 후자는 처방의 이론이다. 퇴계는 존재의 원리에서 이기분속을 주장하며 가치의 원리에서 이선기악의 입장을 취했고, 율곡은 존재의 원리와 가치의 원리가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묘합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퇴계가 탄압받는 야당의 중핵 입장에서 논리를 펴 나갔다면, 율곡은 어느덧 집권여당의 중진입장에서 정국을 이끌어가야 했기 때문이다. 율곡과 퇴계의 이론이 같을 수 없음은 너무나 자명한 일이었다.
퇴계의 편지 속에는 ‘경敬’의 이론과 실천과 구현 방법이 있었다. 이론은 ‘이선기악’이고, 실천은 ‘이기분속’이고, 구현은 ‘이선理善의 구현’이었다. 그 궁극은 이理의 집단이며 선善의 집단인 사림의 집권이다. 훈구집단의 궤멸이 목표였다. 왜냐하면 사화의 파행정국을 반복하는 훈구집단은 ‘악의 집단’으로 우리 조국을 야만국으로 만드는 역사상 소멸되어야할 한시적 집단이기 때문이다. 퇴계에게 ‘도학道學’은 문명국의 학문이다. 도학은 문명국의 건설에 결정적 학문이다. 성인은 문명을 이룰 주체자이며 도학은 그 정수이다. 중국이 문명국으로 존재함은 공자, 맹자, 주자 같은 성인과 그들의 저서 때문이다. 퇴계 역시 이들 성인처럼 되고자 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따라서 퇴계의 개울가 숲 속은 저술의 적지일 뿐만 아니라 악의 예봉을 피하면서 내일을 도모할 수 있는 그런 곳이었다. 단순한 숲 속의 은둔지가 아니었다.
‘심산무림 가운데’는 외부 세계와 단절의 환경을 조성한다. 퇴계는 그런 지형적 단절을 ‘편지’라는 수단으로 극복하고 있다. ‘조용한 편지교육’이었다. 카네기의 명언 ‘기적을 불러일으키는 편지의 효용성’을 퇴계의 편지가 증명했고 그 기적을 낳았다. 항상 조용하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치밀하게 실행했다. “내성적인 사람이 역사를 만든다”고 하는데, 퇴계에게도 그런 측면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선조 즉위와 더불어 등장한 사림집단의 집권과 이 무렵 퇴계 영향권 인물들의 대거 요직 포진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퇴계는 자신의 시간표를 지켜보면서 내일을 기약했고, 최선을 다하는 생애를 보냈다. 편지는 그것을 담아 냈고, 그것은 그대로 도학과 정치와 교육을 위한 방편이 되었다. 상계는 그것을 이루어 낸 1차적 현장이며, 도산은 그 2차적 현장이었다.
도산6곡은 천사곡으로 일제에 저항하다 만주의 감옥에서 순국한 육사陸史 이원록李源祿(1904-1944)의 고향으로 ‘원촌遠村’마을이 있다. 원촌 산수의 아름다움이 <청포도>와 <광야> 같은 명시名詩를 낳았다. 그런데 기념시비 옆에 ‘육우당유허지비六友堂遺墟址碑’라고 쓰여 있는 또 다른 비석이 있다. ‘여섯 형제들이 살던 터를 기리는 비’라는 뜻이다. 육사의 장조카인 이동영 교수의 글에 이 비가 세워진 연유가 설명되어 있었다.
“고조는 아들 3형제를 두었는데, 만휘, 만철, 만정이라 했다. 장자 만휘가 아들 없이 일찍 죽자 만철은 외아들 중직을 형에게 양자 보내고 자기는 동생 만정의 아들을 양자로 들였다. 육사의 여섯 형제들은 콩 하나도 여섯 조각으로 나누어 먹었고, 성장해서도 내 것 네 것이 없이 지냈으며, 의복도 맞으면 서로 바꾸어 입고 나가 남들이 여유가 있는 줄 알았다고 했다. ‘육우당비’는 이런 연유로 세워졌다.”
지금 이 글을 보면, 이 집 후손들은 아마 육사의 애국보다 집안의 우애전통을 더 소중하게 여기는 것으로 보인다. ‘형제우애’를 기리기 위해 비석을 세운 예는 보기 어렵다. 이곳 말고 다른 어느 곳에 있는지 모르겠다. 육사집안의 이런 우애는 원촌마을 입향조인 원대처사遠臺處士 이구(1681-1761)의 유훈 때문인지도 모른다. 원대처사가 후손들에게 남긴 유훈 한 가지는 “형제간에 혹 언짢은 일이 있더라도 참고 또 참아라”였다. ‘행략行略’에 보이는 기록이다. 원대처사의 이런 유훈은 퇴계의 유훈을 이은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퇴계언행록》에 이런 구절이 보인다. “형제간에 잘못이 있으면 서로 말해 주어야하지 않습니까?” 하고 어느 제자가 물으니, 퇴계 답변이 이렇다.
우선 나의 성의를 다하여 상대방을 감동하도록 한 다음에라야 비로소 서로간의 의리를 해치지 않을 것이다. 성의 없이 대뜸 나무란다면 서로 사이가 벌어지지 않은 경우가 드물 것이다. 그래서 말하기를 ‘형제간에는 항상 기쁘고 즐거운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했는데 진실로 이 때문이다.
問兄弟有過則 可相言之否 曰但當致吾誠意 使之感悟然後 始得無害於義 若誠意不孚而 徒以言語正責之則 不至於相疎者幾希矣 故曰兄弟怡怡 良以此也
‘우애’는 어렵다. 형제는 선의의 경쟁자이기 때문이다. 우애가 하나의 덕목으로 존재함은 우애가 그만큼 어렵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 어려움을 퇴계는 ‘대뜸 나무라기만 하기 때문’이라 진단했다. ‘성의를 다한 감동’을 전제했다. 성의 없고 감동 없는 충고는 상처만 준다는 논리이다. 우리는 뜻밖에 가족들 사이의 상처로 가슴 아파한다. 까닭 없이, 이유 없이, 대책 없이 상처를 많이 준다. 상처 받음에는 예민하고 상처 줌에는 관대하다. 상처 줌을 ‘사랑’이라 여기기까지 한다. 이것이 가족상처의 주범이다.
그런데 육사의 저항정신은 고향 정서가 그런 토양을 제공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가령 이만현이 경술년 국치 이후 비분강개하여 화병으로 세상을 하직했다는 일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또한 당대의 학자 이중수 같은 분의 유사遺事를 보면, “4천 년 예의의 나라가 어찌 이런 수치와 욕됨을 당하게 되었는가. 선비 된 자 죽을 곳도 없고 살아도 죽은 거와 같으니 내 장차 어디로 돌아갈까” 하며 날마다 ‘체읍황황涕泣徨徨했다’고 한다. 그리고 해방이 되자 “내 이제 조국에 뼈를 묻게 되니 눈을 감을 수 있게 되었다” 한다.
이규호의 《우송문고》를 보면 육사의 조부 중직, 동생 원조, 외삼촌 허규 등에 보낸 여러의 글이 있고, 정인보, 홍명희 등과 주고받은 편지도 실려 있어 흥미롭다. 이분들은 독립운동가 이원영, 이영호와 더불어 육사에게는 모두 8촌 이내다. 8촌까지가 ‘한 가족’으로 이른바 ‘집안堂內’이다. 집안 어른들의 이런 모습을 보며 성장한 문인 육사에게 색다른 인생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집안이나 가문의 역사를 정리하여 책을 만들기도 한다. 문중차원에서 간행하는 경우도 있고, 개인차원에서 펴낸 것도 있다. 그런 책은 ‘세적世跡’ ‘세고世稿’, ‘세헌世獻’, ‘가승家乘’ 등의 제목으로 출판된다. 안동지방에 매우 흔하다. 거의 집집마다 내었다. 하계 ‘계남댁’도 몇 해 전 『계남연하각가승溪南煙霞閣家乘』이라는 우아하고 예쁜 책을 내었고, 내압 마을에서도 『방적세헌邦適世獻』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농암종택에도 몇 년 전 『긍구당세헌肯構堂世獻』이라는 책을 출판한 바 있다.
원촌에도 있다. 이원회李源會 어른이 1980년 출판한 『오가세록吾家世錄』이 그런 책이다. 제목처럼 ‘우리 집 세대별 기록’이다. 조상의 이력을 대대로 정리했다. 분량 차이는 있지마는 기록방식은 비슷하다. 가장家狀, 행장行狀, 유사遺事, 고유문告由文, 묘갈명墓碣銘 등의 글을 실었다. 모두 ‘한 사람의 생애’를 기록한 것이지만 용도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지어진다. 글은 퇴계의 전범典範 관계로 엄격하다. ‘퇴계의 전범’이란 절대로 과장, 미화하지 않는 사실 그대로의 인물기록을 말한다. 세대별로 서술되니 한 인물의 일대기가 고스란히 노출된다. 이런 글과 책이 간행되는 한 후손들은 저마다의 조행과 시대적 책무를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나는 아직까지 안동 명문의 후손에 파렴치범이 있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는데, 이는 이런 가풍의 영향 때문인지 모르겠다.
『왕조실록』은 우리가 세계에 자랑하는 문화유산이다. 남겼기에 훌륭한 것이 아니고, 그 책으로 말미암아 문명국으로의 위상과 전통, 국왕의 책임정치와 역사의식을 갖도록 했다. 그 의의는 진정 위대하다. ‘뿌리 깊은 나무’의 비밀은 여기에 있었다. 조선이 무기력하게 일제에 의해 식민지화한 사실에 모든 것을 부정적인 우울함으로 조망하는 일은 매우 좁은 소견이다. 500년을 이어온 왕조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흔하지 않으며, 그 내용 또한 매우 건강하다.
『오가세록』은 가계실록이다. 왕조실록은 그 기술이 멈추었지만 가계실록은 이어지고 있다. 이는 안동문화의 뿌리이며 힘의 원천이다. 글은 지난날의 영광을 회고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결의가 있어 더욱 그러하다. 이원회 어른 역시 가문에 대한 긍지를 후손들에 당부하고 있다. 아들들의 결의문도 있다. 이는 『계남연하각가승』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런 자세는 후손 모두의 바르고 정당한 삶에 대한 결의이기도 하다. 여기서는 이원회 어른 아들들의 글 일부를 소개한다.
“앞으로 우리는 이 책 속에 어린 얼과 교훈을 귀감으로 삼고, 가일층 절차탁마하여 일거수일투족에 있어서도 명실상부한 명가후예로서 부끄러움이 없어야 하겠다. 그리고 언제나 화목 단란한 가정을 도모하면서 오가의 명예는 물론, 나아가 국가민족의 발전에 기여할 것을 다짐해 본다. 이것이 바로 조상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다.”
3. 도산9곡과 풍광
도산7곡은 단사곡, 도산8곡은 고산곡, 도산9곡은 청량곡 으로 단사협, 가송협과 최근 한국의 ‘명승名勝’으로 지정된 청량산이 있다.
도산9곡의 길은 결국 ‘청량산’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선인들이 ‘청량산’을 갈 때 ‘단사곡’은 그 깃 점이었다. 단사곡에서부터 청량산산행이 시작되었다. 지금은 온혜에서 청량산까지 국도가 바로 뚫려 있지만, 옛길은 천사-단사-가송-너분들로 이어지는 강변길이었다. ‘도산 9곡’ 가운데 7, 8, 9곡이 몰려있는 곳으로, 청량산의 비경이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고, 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이 길을 걸어가며 글을 쓰고 시를 지었다.
퇴계는 생애 6, 7번 정도 갔다. 그때마다 단촐 한 산행이었다. 그런데 1564년은 달랐다. 16명을 초청했는데 13명이 참가했다. 혼자 사색하기를 좋아하며, 집단적 모임을 주도한 일이 거의 없는 퇴계에게 이 해 산행은 ‘퇴계식의 일상’으로 볼 때 매우 의례적이다. ‘유산遊山’의 의미를 알게 하고자 한 계획적인 산행으로, 퇴계 전 생애의 기념비적인 행사였다. 또한 마지막 청량산산행이기도 했다. 그때 퇴계는 이 길을 ‘그림 속’이라 했고, 자신은 ‘그림 속으로 들어간다’고 했다. 이날 천사에서 퇴계는 참석자 가운데 유일한 친구인 이문량에게 이런 시를 썼다.
烟巒簇簇水溶溶 산봉우리 봉긋봉긋, 물소리 졸졸,
曙色初分日欲紅 새벽여명 걷히고 해가 솟아오르네.
溪上待君君不至 강가에서 기다리나 임은 오지 않아,
擧鞭先入畵圖中 내 먼저 고삐잡고 그림 속으로 들어가네.
이 무렵 이문량에게 보낸 또 다른 편지는 퇴계의 수많은 글 가운데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는데, 그 편지의 현장이 곧 도산7곡에 있는 ‘능운대’와 ‘갈선대’였다. 편지 전문은 이러하다.
“일전에 틈을 내어 홀로 길을 나서 산수를 두루 구경했더니 무르익은 가을풍경과 들국화의 산뜻한 향기가 사람으로 하여금 뜻을 흐뭇하게 하여 당나귀가 지쳐 절룩거리는 것도 모를 정도였습니다.
능운대의 선명한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고 사랑스러워 한나절을 걸었습니다. 부근의 여러 벗들을 불렀다면 반드시 마음대로 벗어날 수가 없어 돌아갈 길이 낭패가 되었을 것입니다. 늙고 병든 사람이 이를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 이런 연고로 ‘대나무만 구경하고 주인을 묻지 않은 격’이 되었으니, 만약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거든 이렇게 되었다고 알려주면 참으로 고맙겠습니다.
갈선대의 산보는 늘 염두에 두고 있는데, 스무날이 넘으면 늦은 감이 있다 해도 말씀하신 대로 따를 것입니다. 다만 들리기는 근일 안동의 두 관원이 온다고 하니 언제가 될지는 알 수 없으나 계속 끌려 다니는 처지가 될까 두렵기만 합니다. 만약 흥이 이는 것을 못 견디면 혹시 혼자서 가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퇴계가 “너무나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능운대”와 “흥이 일어난다면 혼자도 갈 수 있는 갈선대”라 했다. 이 능선의 가을 단풍을 바라보며 홀로 걸어가는 퇴계의 모습을 그려보고, 그 길을 걸으면서 퇴계의 고독을 반추했다. 또한 편지의 말처럼 ‘틈을 내어 홀로 물을 완상하고 산을 찾으며抽身孤往 玩水尋山’ “만약 흥이 이는 것을 못 견디면 혹시 혼자서 가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若不禁興發則 或作孤往 亦未可知耳”라는 ‘홀로 걷는 즐거움’도 음미해 보았다. 선비들은 이를 ‘유상遊賞’이라 했고, 산행은 ‘유산遊山’이라 했다. 그 속에는 보步, 사思, 주酒, 가歌, 시詩, 창唱 등의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좀 더 고상하게는 ‘풍류風流’라는 단어가 마련되어 있다. 풍류는 ‘바람처럼 흐르고 예술처럼 논다’는 뜻인데, 이런 인생을 구가함이 어디 쉬운 일인가. 풍류의 개념은 높은 인격적 수양을 전제한 까닭에 쉽사리 쓰지 않았고, ‘유상’이 포괄적으로 사용되었다. 그 기록들을 상기하면서, 우리들 역시 당시 선인들이 청량산으로 들어가는 ‘유상’에 참여하는 즐거움을 함께 하기로 한다.
도산8곡과 9곡의 풍광에 대한 언급은 생략한다. 지금 조성된 ‘예던 길’도 바로 도산7곡에서 부터인데 여기서부터는 차량 진입이 불가능한 옛길 그대로의 길이다. 4킬로미터, 1시간 정도 거리이다. 칸트가 걸어 전 세계인이 걷는다는 유명한 ‘철인의 길’ 열 배 이상의 유서 깊고 멋진 길이 아닐 수 없다. 퇴계는 이 지점에서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구비구비 넓은 여울 曲折屢渡淸凉灘
높고 높은 푸른 산 突兀始見高高山
청량산은 숨은 듯 다시 보이고 淸凉高高隱復見
무궁한 모습 시심을 북돋우네. 無窮變態供吟鞍
도산9곡 전체의 풍광은 사실 지금 도산7곡, 8곡, 9곡의 풍광을 말한다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이 모든 풍광과 의미는 대체로 퇴계와 함께한다. 이는 결국 퇴계 자신이 ‘산행=공부’의 등식인 ‘독서여유산讀書如遊山’의 신념을 견지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3. 도산9곡의 과제
도산9곡의 인물과 풍광은 퇴계와 직간접적인 관련성을 가지고 있으며, 유교적 가치관을 공유하고 있다. 퇴계가 주자를 흠모한 까닭에 더욱 주자적이기도 했다. 도산9곡의 명칭이 무이9곡과 관련되었음은 이미 언급한 바 있다. 이렇게 형성된 도산과 도산9곡의 문화는 1974년 건설된 안동댐 건설로 결정적 타격을 받았다. 예안읍은 완전 수몰되었고, 도산9곡도 6곡까지 폐허가 되었다. 그 결과 5, 6개의 하회마을 같은 명촌들이 간단히 수장되었고 도산서원 하나만을 달랑 남겨두었다.
도산서원 역시 상처받기는 마찬가지다. 댐 건설이 풍광에 치명적인 상처를 주었다면, 보상차원에서 추진된 ‘성역화사업’은 더욱 치유되기 어려운 내과수술이 되었다. 망가진 풍광을 돌이킬 수 없다. 사람들은 도산서원이 보존되었음을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렇지만 지금 도산서원은 ‘건물’만 그렇게 남겨졌다는 느낌이다. 왜냐하면 도산은 퇴계에게 ‘몽매에도 잊지 못할 터전’이었는데, 그 이유가 바로 ‘산수山水의 조화’ 때문이었다. 호수로 변하고 산천이 망가진 오늘의 도산은 적어도 퇴계가 염원한 도산은 아니다.
‘도산서원성역화사업’은 남아 있는 유적마저 변형시켰다. 지금 보면 댐 축조 당시의 우물, 못, 담, 계단, 길, 심지어 나무 한 포기까지 어느 하나 원형이 남아 있지 않다. 도둑을 막기 위해 그렇게 높은 견고한 담을 만든 것인가? ‘못(淨友塘)’이 미어질까 두려워 그런 육중한 장대석으로 쌓은 것인가? ‘우물(冽井)’이 없어질까 그렇게 변형시킨 것인가? 주변 풍광이 망가졌으니 아예 새로운 원형을 창출하고자 한 것일까? ‘위기지학爲己之學’과 ‘경敬 공부’의 적지 도산은 사라졌다. 어쩌면 퇴계는 벌써 이곳을 떠나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유적을 잘 보호함은 후손 된 도리이다. 정말 성역처럼 지켜야 한다. 그러나 유적을 성역처럼 만드는 일은 바람직하지 않다. 성역화는 인물의 신 우상화를 전재한다. 성역과 우상은 대상을 무겁고 무서운 존재로 만든다. 그래서 아무도 가까이 할 수 없는, 또는 가까이 가고 싶지 않은 박제된 인물을 만든다. 있는 그대로의 유적, 있는 그대로의 인물이어야 한다. 시是도 말하고 비非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저 선생의 제자 월천 조목의 말씀처럼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셨을까’ 하는 물음을 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도산서원의 모습은 그 옛날 모습대로 돌려놓아야 한다. 가령 담장만이라도, 아니 우물만이라도 옛 모습 그대로 복원되어야 한다. 그래서 최소한 관광객들이 퇴계가 종합캠퍼스 같은 좋은 환경에서 총장 같은 모습으로 인식되어지지 않아야 한다. 도산서원은 퇴계의 모습과 숨결과 체치를 느낄 수 있는 그런 분위기로 조성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무거운 퇴계학’과 ‘근엄한 퇴계’에서 벗어나 언제든지 대화가 이루어질 수 있는 따뜻하고 다정다감한 우리의 선조여야 한다. 퇴계는 사실 그런 분이셨기에 더욱 그러하다. 도산서원은 궁극적으로 퇴계의 숨결과 호흡이 매화와 난의 향기같이 은은히 퍼지는 그런 곳이어야 한다.
안동댐의 공식 명칭은 ‘안동다목적댐’이었다. 목적이 많은 댐이었지만 ‘도산 보존’은 목적이 되지 못했다. 외내, 부포, 부내, 의인, 하계, 원촌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도산서원은 결국 도산과 도산9곡의 마을들을 수장시킨 대가로 잡힌 최후의 인질이 아닌지 모를 일이다.
강을 따라 형성된 마을들, 그 마을을 중심으로 형성된 안동문화는 그렇게 수장되어 갔다. 그리고 사람들이 떠난 절해고도에 오늘 같은 모습의 서원 하나를 달랑 남겨놓았다. 물에 갇힌 도산서원이 물속에 잠긴 ‘시사단試士壇’의 모습과 무엇이 다르랴! 물에 잠긴 시사단은 애처롭고 물이 빠진 시사단은 흉물스럽다. 지금 시사단의 모습은 차라리 슬프다.
안동댐이 이루어진 30여 년 전 문화, 혹은 문화유산은 그 정도의 배려를 받았다. 가정이지만 지금 안동댐을 건설하려면 동강댐 100배 이상의 저항을 받았을 것이다. 가정이지만 안동댐의 수위를 불과 몇m만 낮추었다면 도산은 고스란히 보존되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도산은 지금의 하회마을 100배 이상의 문화경제적 가치를 창출하지 않았을까? 왜냐하면 ‘도산 9곡’을 따라 형성된 이들 마을과 유적들은 안동문화를 대표함은 물론이고, 가히 ‘한국문화1번지’라 해도 전연 손색없는 곳이었으니까. 30여 년 전 문화, 문화유산은 그 정도의 이해와 안목의 대상에 지나지 않았다.
지금 도산은 옛 도산이 아니다. 천년의 마을들이 수장 되었고, 사람들도 떠나갔다. 그렇지만 도산 길은 결코 망각의 길이 아니다. 7곡 단천곡, 8곡 가송곡, 9곡 청량곡이 고스란히 남아있고, 또 6곡까지의 유적들도 아직 적지 않게 남아있으니까 말이다.
1곡의 유적들은 ‘오천유적지’라 명명하여 35번 국도변에 이건 되었으며, 2곡, 3곡에는 ‘월천서당’과 ‘성재종택’과 ‘부라원루’가 남아있다. 4곡의 ‘농암유적’들은 가송곡에 옛 모습 그대로 이건 되었다. 5곡에는 ‘도산서원’이 있고, 6곡에는 ‘육사생가’가 있다.
뿐만 아니라 도산서원 앞 강 건너에는 99칸으로 유명한 ‘번남댁’이 아직도 그 화려한 모습을 간직한 채 남아있다.
이런 유적들 사이, 도산 길 초입에는 ‘선성아문’, ‘예안향교’ 등의 유적과 더불어 한국 최초의 국학전문기관인 ‘한국국학진흥원’과 유교박물과, 그리고 ‘산림과학박물관’, 육사문학관등의 볼거리들도 속속 건축되었다.
도산서원을 들어가는 구불구불한 산허리의 새 길을 따라 ‘도산산천’을 조망하면서 주차장에 내려 도산서원을 보고, 되돌아 나와 뒷산 길을 넘으면 곧 노송정-퇴계종택-수졸당-육사생가가 있는 온혜, 상계, 하계, 원천의 유적들을 보고 다시, 단사협-가송협-청량산으로 이어지는 ‘예던 길’의 아름다운 도산의 길을 계속해서 만나게 될 것이다.
이 길은 지난날 문인, 지식인들이 일생에 한 번 찾아가던 꿈의 순례코스로, 100편 이상의 기행문이 남아있고, 10000편 이상의 시가 남아 있으니 지금의 여행가들에게도 크나큰 여행의 기쁨을 줄 것을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칸트가 걸어 전 세계인이 걷는다는 독일의 유명한 ‘철인의 길’ 10배 이상의 유서 깊고 멋진 길이 아닐 수 없다.
도산9곡은 손상 되었지만 도산의 유교문화는 손상되지 않는다. 문화가 어찌 하루아침에 생성되고 소멸되는 것이겠는가! 잘 가꾸고 지켜간다면 우리민족 모두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이 될 것이 틀림없다. 도산과 도산의 유교문화는 한국문화의 근원과 함께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