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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 자를 ‘계도’라고 지었네.
-이름의 문화 -
관례와 자, 이름의 문화(1), 이름의 문화(2), 좋은 이름이란?
1). 관례와 자
1981년 5월, 나는 집에서 ‘관례冠禮’를 했다. 혼인이 결정되었기 때문이었다. 오랜 기간, 수 십 차례의 맛 선을 본 끝에 어느 눈 먼 여인이 선택해 준 덕택이었다. 결혼이 어렵게 이루어진 까닭은 나의 너그럽지 못한 성품이 그 주요한 원인이고, 또 다른 하나를 굳이 거론한다면 환경이 남들과 조금 다르기 때문이었다. 총각시절 마음속으로 나의 결혼에는 최소한 두 가지,- ‘연애결혼’과 ‘눈이 작은 여자’-정도의 원칙을 견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하나도 이룰 수 없었다. 일이 잘되었으면 그만이었겠지만 일이 꼬일 때마다 나는 남들과 다른 환경을 원망하는 심리적 굴절과 회피를 거듭하곤 했다.
나와 주위의 기대는 상치되기 일쑤였다. 내가 추천한 여자는 거부되었고, 주위에서 추천한 여자는 내가 수용할 수 없었다. 호감을 느끼고 다가온 처녀들 역시 환경을 헤아리곤 곧 떠나 버렸다. 지금의 처가에서도 그런 과정이 있었다. 맛 선을 본 이 후, 장인어른의 찬성에도 불구하고 가족회의는 반대로 모아졌고 혼사는 결렬되었다. 장모, 처형 등 주로 여자들의 반대가 심했다고 한다. ‘불천위不遷位 종부宗婦의 인생’에 대한 선택에 무척 부정적이었던 것이다. 명백한 거부의 의사가 전해진지 3개월 여 뒤, 5월 어느 토요일 오후, 나는 느닷없이 기차를 타고 경주를 가서 처녀의 집을 방문했고, 일주일 만에 승낙을 받아냈다. 그리고 한 달여 뒤에 예식을 올렸다. 우리는 그 사이 보문단지에서 단 한번의 데이트를 했다. 결혼의사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결혼날짜가 결정 될 무렵, 장인어른은 “내가 빚이 좀 있고 시일도 촉박하니 가을에 예식을 올리도록 하자”고 하셨다. 2월 맞선과 결렬, 5월의 예고 없는 방문, 6월 결혼이니 여러 모로 준비에 부담을 느끼시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 때 이렇게 말씀드렸다. “아무 것도 해주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냥 따님만 보내 주시면 됩니다”라고. 장인어른은 내 말을 듣고 즉석에서 주머니를 뒤져 30만원을 꺼내 주셨다. 그리고 한 마디,“지금 내 형편으로는 자네에게 특별히 해줄 것이 없으니 이 돈으로 양복을 사 입든지 시계를 사든지 마음대로 하게”하셨다. 말은 이렇게 하셨지만 그 후 처가에서는 적지 않은 혼수를 보내왔다. 아마 많은 빚을 졌으리라 생각된다.
지금은 늙고 병든 노인이지만 당시 장인어른은 대규모 과수원을 경영하고, 반촌 양동마을에서 문중의 대소사를 주도하신 기백과 결단력을 갖춘 훌륭하신 분이셨다. 돈을 받은 나는 그 돈으로 5만 원짜리 시계를 사고, 나머지는 빚 갚는데 써 버렸다.
혼사는 우리 측 주장대로 진행되었다. 그러니까 기간으로는 7년, 맛 선의 횟수로는 공식, 비공식 합쳐 30여 차례, 드디어 종지부를 찍었다. 정말 ‘인륜지대사人倫之大事’였다.
혼사 문제를 겪으면서 나는 지쳐 있었다. 그러나 이런 체험 속에서 전통을 지켜 온 한 가문의 주손 되는 사람의 인생이 예사롭지 않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막연하게 느껴 온 임무, 책임과도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결혼문제는 이후 내 인생의 길에 대한 끊임없는 물음의 단초이기도 했다. 그 무렵 나의 심사는 아직 이러한 상황을 긍정하고 수용하기보다는 피동적이거나 매우 애매한 태도로 따라가는 정도였다.‘피동적이거나 매우 애매한 태도’는 그 후에도 상당한 세월 계속되었다. 내가 이러한 전통과 일상에 관심을 갖고 이해하기 시작한 것은 오랜 시간이 지난 이후의 일이었다.
‘관례’는 이렇게 이루어졌다 친지, 어른들이 오셨고 술, 음식이 방, 마루로 분주히 오고갔다. 관혼상제冠婚喪祭의 예에서 ‘관冠의 예’와 ‘혼婚의 예’가 조금의 시차를 두고 동시에 이루어지는 셈이었다. 그런데 관례의식에는 두 가지 의미 있는 절차가 있었다. 하나는 ‘갓(冠)을 쓰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자字를 받는 일’이었다. 나머지 시간은 그 성격이 혼례경사를 앞 둔 예비경사인 만큼 그 분위기는 온종일 웃음과 음식과 환담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사진1, 관례사진,
안동에서 전통적인 ‘관례’를 치른 사람은 필자가 마지막이려니 했는데, 비슷한 시기에 내앞(川前) 의성김씨 큰종가의 종손이며 친구인 김창균金昌鈞이 관례를 했다는 사실을 후에 알게되었다. 안동에서 전통관례는 사라졌고, 지금은 ‘안동청년유도회’에서 매년 그 관례를 재현하고 있다. 그런데 이때 사용하는 행사진행문서인 ‘관례홀기冠禮笏記’가 공교롭게도 우리 집에 있는 것인데, 향산 이만도(響山 李晩燾)선생께서 쓰신 것이다.
도포를 입고 사랑방으로 나가니 방안에는 20여명의 단아한 노인들이 둘러앉아 계셨다. 이 날 안동대학교의 임세권 교수가 와서 시종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멋있게 사진을 찍어 훗날 나에게 남겨 주었다. 노인들 사이에서 몇 마디 대화가 오고 간 뒤, 이윽고 그 가운데 한 분이 일어나서 나에게 갓을 쓰여 주시고 갓끈을 묶어 주셨다. 그리고 조금 후, 조그만 쪽지를 나에게 보여 주셨다. 거기에는 한자 두자가 정갈하게 쓰여 있었다.
繼 道
그리고 천천히 한 말씀 하셨다.
“자네 자를 계도라고 지었네....이을 계, 법도 도,... 도를 이으라고....지금은 사문斯文의 도道가 쇠퇴하니 자네는 공부도 그러하고 해서 우리들이 그렇게 지었네....”
노인은 그 때 다짐하듯 다시 한번 말씀하셨다.
“계도라고.....”
나는 신음하듯 되뇌었다.
“계도라....?”
사진2, 향산선생 관례홀기
향산선생이 쓴 관례홀기가 우리 집에 보존되어 있는 연유는 선생께서 그 아들 기암 이중업(起巖 李中業)의 관례 때에 나의 고조부(諱: 李羲肇)를 빈賓으로 모셨기 때문이다. 빈에게 전일 홀기를 적어 보내는 것도 하나의 범절인 모양이었다. 빈이 삼가례三加禮를 마친 후 관자冠者에게 자를 지어주고 축문祝文을 읽는데 위 말씀이 바로 축문이었던 것이다. 위 홀기 끝자락에는 마침 선생께서 나의 조부에게 쓴 기별寄別이 있어 소개한다.
원문: 眞城 李晩燾 再拜 奉啓
李生員執事晩燾有子中業年及成人將以今月初九日加冠於其首求所以敎之者僉曰以德以齒咸莫吾子宜至日不棄寵臨以惠敎之則晩燾之父子感荷無極矣未及躬詣門下尙祈照亮 不宣
庚辰 二月初七日 眞城 李晩燾 再拜
(번역: 진성 이만도 드림, “만도의 자식 중업이 이제 성인이 되어 장차 이 달 9일 그 머리에 관을 올리고자 합니다. 그래서 그 일을 지도하실 분을 구하니, 모두 말하기를 ‘덕으로나 나이로나 모두 귀하밖에 없다'고 합니다. 그러니 다가오는 날 외면하지 마시고 오셔서 가르쳐주시면 만도의 부자에게는 그런 고마움이 없겠습니다. 그리해주시기 바라며 이만 줄입니다. ”
1880년 2월 7일 진성 이만도 재배)
2). 이름 문화(一)
그 후, 나는 ‘자字’에 대해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의례적으로 지어주는 것이려니 여겼다. 어쩌면 의식적으로 잊어버리려 했는지도 모른다. 사실 까마득히 잊어버렸다. 그런데 몇 해 전인가? 집안에 족보를 했다고 하여 들쳐보니 거기 내 이름 밑에 이 字가 쓰여 있어 여간 놀란 것이 아니었다. 나뿐만이 아니었다. 형제, 사촌들이 모두 자가 쓰여 있었다. 나 자신, 혹은 우리 세대에서 어떻게 여기든 상관없이 쓰여 지는 곳이 있었던 것이다. 또 얼마 전 아버지 대신 어느 모임에 참석했는데, 거기 참석자 명단 아래에 예의 나의 자가 인쇄되어 있어서 마치 옛 문헌 속의 인물을 보는 것 같은 야릇한 심정이었다.
자는 지어지는 것만 아니라 글로서도 의미를 부여했다. 그 글을 ‘자사字辭’라 했다. 이미 앞에 소개한 향산선생의 관례홀기에는 선생 아들의 자를 ‘광초廣初’라 했고, 그렇게 지은 연유의 글, 자사를 남겼다. 나의 조부의 자는 ‘학초學初’인데 역시 자사가 남아있다. 친구인 류광호柳廣鎬 선생이 지으셨는데 ‘初’ 자에 많은 의미를 부여했다. 관심 있는 분이 있을 것 같아 아래 소개한다.
사진3: 조부자사
字辭:
李友在明 聾爺玄冑 冠而表德 字曰學初 請我爲辭 思與共勉 我視前轍 敢陳蕘言 昔賢有云 蕘言必擇 苟求其義 顧名在玆 凡此厥初 無有不善 氣拘於始 欲蔽於終 擴而充之 匪學曷獲 盖聞曾訓 明德爲綱 格致正誠 極處可到 如玉旣琢 如鏡重磨 初未嘗無 終鮮克有 展爾驥步 萬里初程 充爾河量 一勺初飮 習之又習 乃復其初 本始末終 爲學要訣 入道積德 曰有門基 匪余能言 質之古昔 在蒙初六 養正有功 勉哉學初 其由此始
契弟 柳廣鎬 撰
이렇듯 자의 작명문화는 바로 한 세대 전까지만 하더라도 일상의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문화는 사문화死文化되고 있다. 마치 내가 어릴 때 즐기던 굴렁쇠놀이, 자치기, 공기, 사이방, 꿘 등의 천년을 이어온 민속놀이가 지금 급속히 소멸되는 것과 같이.
그러면 지난 시대, 왜 이 자를 작명했는가? 어떻게 사용되었으며 어떤 의미를 지녔을까? 옛 글을 보면 사람을 소개할 때에는 하나의 양식이 있었다. 성명, 본관, 자, 호로 이어지는 순서를 지켰다.
예를 들면 서경덕은 어디 사람인데 자는 무엇이고 호는 무엇이다. 이런 식이다.
* “徐敬德 唐城人, 字可久, 號花潭.....” 『大東奇聞』
* “崔北 字七七, 字亦奇矣, 自號毫生館....” 『壺山外記』
* “千壽慶 字君善 家貧好讀書 自號松石道人...” 『熙朝逸事』
자, 호는 필수적이다. 순서는 자가 앞선다. 호는 없어도 자는 있다. 자는 호가 지어지기까지의 이름이다. 그러니까, 태어나 이름(名)이 있기까지 아명兒名이 있고, 그 이름은 자가 지어지면 종식된다. 그 다음, 호가 지어지면 자는 그 기능이 감소하게 된다. 호가 있기까지 자를 호칭했다고 보면 된다. 자, 호의 계속되는 작명은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름을 존귀하게 생각하는 것, 즉 ‘경명敬名’의 전통적 가치관으로 인해 이제 성인이 되어 이름을 함부로 부를 수 없게 되니 대신 자를 지었다. 사진: 자가 쓰여 있는 족보
해설: “남자 20에 관례를 행하고 자를 짓는 것”은 『禮記』에 “男子二十 冠而字”라 하였으니, 동양에서는 오랜 전통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 이 글 해석에 “자를 짓는 것은 그 이름을 공경해서이다”라 하여, 자의 작명은 곧 이름을 휘諱하기 위함임을 알 수 있게 한다.
자는 본명을 대신했기에 대부분 본명과 관련해서 지어졌다. 예를 들면, 보완적 의미로는 권근權近의 가원可遠, 강은姜隱의 지현之顯, 한유韓愈의 퇴지退之가 그렇고, 의미확대로는 정사룡鄭士龍은 운경雲卿, 주세붕周世鵬의 경유景游, 장옥張玉의 자강子剛 등이 그러하며, 자에 흔히 보이는 甫, 夫, 父, 子, 彦 등의 글자는 단순한 남자의 경칭을 의미하고, 之자는 뜻이 없는 접미어에 불과하다. 김영金瑛의 영지瑛之, 심의沈義의 의지義之 등은 그런 예라 할 수 있다. 어느 자나 본인의 이름과 연관성의 사회적 책무의 차원에서 지어졌다. 그러나 자 역시 호號가 지어지기까지의 한시적 이름에 불과했고, 호가 지어지면 자는 이름처럼 금기 영역으로 들어갔다.
어릴 때 우연히 ‘경희대학교’라 했더니, 선친은 그때 “그 말은 할 수 없다”고 하셨는데, 알고 보니 증조부의 자가 ‘경희敬熙’였기 때문이었다. 호는 이와 다르게 풍류, 해학 등의 개인적인 기호의 차원에서 지어졌고, 개인이 최후로 선호한 이름이기에 일반적 호칭으로는 적격이었다. 이런 연유로 선현의 이름에 대한 표기는 지금도 정돈되지 않고 있다.
몇 해 전, 어느 학술대회에서 선현의 이름을 직접 거명한 문제로 좀 곤혹스러운 입장이 되었다는 어느 교수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이런 문제에 대해서 2001년도 ‘남명탄신500주년기념학술대회’에 발표한 조동일 교수는,
“이 글은 추모기가 아니고 학술논문이므로 객관적인 사실을 엄정하게 다루어야 하기 때문에 曺植을 曺植이라고 하고, 南冥이나 南冥先生이라고 하지 않는다. 이제부터는 ‘조식’을 국문으로 적어 ‘조식’이라 한다. 남명선생을 멀리 두고 우러러보기만 하면 연구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숭앙과 연구는 공존할 수 없으므로 양자택일을 해야 한다”고 했다.
이날 관중석에서 이에 대한 이론이 조금 있었는데, 김충열 교수가 참석자들에게 선현의 호칭에 대해서 ‘이제는 이렇게 해야 합니다’라고 부연 설명했다.
아무튼 이렇게 보면, 지난날의 이름들은 성장에 따라 계속해서 부여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5세까지의 아명, 10세 전후의 본명, 20세의 자, 30세 이후의 호-개인적으로 얼마의 차이가 있지만은-로 연차적 호칭변경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이들 이름 다음에도 또 하나의 이름이 남아있다. ‘시호諡號’가 그것이다. 충무공, 정헌공, 문정공, 문민공, 위양공 등등. ‘시諡란 행동의 자취(‘諡行之迹也’, 『說文解字』)’이니 시호는 곧 나라에서 지어주는 최후의 총체적 이름이다. 문관에는 文, 무관에게는 武자가 들어감을 더욱 영광으로 여긴다. 이로써 한 사람의 생애에 부여되는 이름은 마무리된다.
참고로 극히 드문 경우지만 ‘사시私諡’를 받은 사람도 있다. 당대에 존경받는 훌륭한 분이었으나 벼슬이 없는 처사處士인 경우, 지역의 식자識者들이 모여 의논하여 시호를 지어 드리는 것이 있는데 이것이 사시이다. 매우 영광스럽게 여긴다.
그런데 이런 이름들이 지어질 때마다 간과할 수 없는 것은 그 작명주체가 각각 다르다는 점이다. 대체로 이름은 부모가, 자는 인근 어른들이, 호는 친구 혹은 자신이, 시호는 나라에서 지어주는 것으로 구분되어 있다. 그런 만큼 이들 이름들이 갖는 내재적 성격 또한 다를 수밖에 없다.
부차적인 것이기는 하나 이 사이 ‘택호宅號’라는 것이 생겨나, 처가妻家가 있는 지명이나 신분을 차용하여 ‘부포댁浮浦宅’, ‘계남댁溪南宅 ‘진사댁進士宅’, ‘도사댁都事宅’ 하는 또 하나의 이름을 갖기도 한다.
사진: 솟을대문
해설: ‘집’은 곧 신분을 규정하여, 전殿에는 전하殿下, 저邸에는 저하邸下, 각閣에는 각하閣下, 합閤에는 합하閤下만이 살 수 있다. 정2품 이상이 아니면 ‘신도비神道碑’를 세울 수 없듯이, ‘솟을대문’ 역시 신분에 맞아야만 세울 수 있다. ‘99칸 집’이란 100칸 이상을 지을 수 없는 신분이기 때문이다. 지난해 이우성李佑成 선생과 류영하柳寧夏 서애선생 종손을 차로 모시고 하회마을 나오는데, 벽사선생이 “이 마을에 왠 솟을대문이 이리 많은가”하니 종손 말씀이 “저마다 자기 돈으로 짖는데 누가 어떻게 하는가” 하시었다. 벽사선생은 이때 서미동에 건립한 ‘서애선생기념비’를 둘러보시기 위해 오신 길이었다.
이를 도표로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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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시호까지 남긴 사람은 발신한 몇 사람에 국한된다. 그러나 오늘날의 이름과는 사뭇 다른 양상에서 조상들의 작명에 대한 다양성과 사회성을 새삼스럽게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서 자字를 보면 자는 그의 인생에서 청춘의 한 때를 감당하는 이름으로 구실을 했던 것이다.
3).이름 문화(二)
최근 초등학생의 개명은 교장선생님 허가로 가능하게 되었다고 한다. 편법이지만 어린 학생들의 고통을 들어주자는 취지다. 법원판결을 있어야만 하는 개명의 어려움을 생각할 때 여간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다. 어린이의 개명수요가 갑자기 폭증했는데 그 주요한 이유가 전통적 작명을 벗어난 이름들을 다시 전통적인 이름으로 고치려고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순 한글이름과 항열行列을 무시한 작명이 주요 대상이라 한다. 특히 꽃잎, 샛별, 보름, 아름, 슬기 등의 우리말 이름들이 개명대상으로 신청된다는 것이다.
95,10,17일자 《동아일보》기사에 의하면, “이름이 항렬과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33%로 가장 많고, 한글이름을 한자로 바꾸는 경우도 12%나 됐다...(그 이유로) 한글이름은 어감이 귀엽고 뜻도 좋지만 집안 어른들이 한자로 고치기를 원한다거나, 성인이 되었을 때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을 들어 이외로 개명을 원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했다. 이는 전체 개명의 절반 정도가 전통적 개명과 관련이 있음을 시사한다. 한편에서 이러한 이름들을 보급하려는 움직임이 있음을 생각할 때 다소 아이러니하기도 하다.
2001년 10월 9일자《동아일보》에, 「한글학회큰잔치」의 ‘가장 아름다운 한글 이름’으로 ‘박찬누리’, ‘박찬벼리’ 형제의 이름이 선정되었는데, 그 기사 가운데는 “이들 형제는 수상 소식에 눈물이 핑 돌았다. 지금까지 유치원과 학교, 학원 등에 다니며 늘 ‘이름이 어떻게 넉자냐’는 등의 친구들 놀림에 시달려 왔기 때문. 두 형제는 한때 이름을 바꿔주지 않으면 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버텼고 벼리군은 원형탈모증까지 생기기도 했다.”는 내용도 있다. 이 기사를 보면, ‘아름다운 이름’은 그들의 아름다움일 뿐, 이들 형제의 고통과는 무관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 이들 이름들은 어떤가. 왜 아이들이 반발하는 것일까? 여자아이들의 경우, 이런 이름의 작명은 전통적인 여성들의 이름에 대한 반성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지난날 여성들의 이름은 ‘착한 여자’와 ‘남아 선호’에 대한 기대가 내재된 이름뿐이었다. 부모에게 딸자식의 존재가치는 이 정도의 의미를 넘어서지 못했다. 아니 넘어설 필요가 없었다.
순애順愛, 정숙貞淑, 미옥美玉, 숙희淑姬등은 전자에 속하고, 순남順男, 후자後子, 필여畢女, 말숙末淑 등은 후자에 해당한다. 나의 두 누님들 이름 역시 각각 귀만貴晩, 차응次應이다. 늦도록 아들이 없었기에 ‘귀만: 늦게는 귀한 아들을 낳아 달라’, ‘차응: 다음에는 응하고 아들을 낳아 달라’는 소망이 담겨있다. 그 누님 한 분은 지금도 가끔 ‘나도 학교만 시켜주었으면...’하고 푸념한다. 그러나 조상들의 아들에 대한 선호는 단순한 선호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여성들에게는 이런 작명마저 출가와 더불어 소멸해 버리니 이름에 대한 주체성을 가질 수는 없었다. 생산성이 절대로 부족한 중세시대의 사회상을 염두에 두고 보면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다. 그런 것이, 여성시대가 전개된 오늘에는 여성의 사회진출과 더불어 보다 아름답고 개성적인 이름들이 요구되었고, 아버지들은 이에 파격적으로 부응한 것이다.
그런데 왜, 선진적 감각(?)으로 지어진 이런 이름들이 그렇게 빨리 거부되고 쓰라린 개명의 절차를 밟게 되는 것일까? 한마디로 자녀의 성장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앞서 예시된 이름들의 경우, 그것이 대체로 어린아이 시절에만 어울리는 이름으로, 나이든 이후에는 매우 어울리지 못하는 이름이란 것을 예견하지 못한 결과이다. 곧 부작용이 일어난 것이다. 아이는 커서 과장도 되고 부장도 되고 교수도 될 것이다. 그 때 이들 이름들은 등록상표로서 어딘가 맞지 않다. ‘꽃잎부장님’,‘보름교수님’이라고 호칭한다면 아무래도 그 명함은 어색하다. 이들 이름들을 지어준 부모는 더욱 이런 기대치를 가진 부모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또 하나 이들 이름들이 수용되기 어려운 점은 고정 이미지를 안겨준다는 점이다. 개인에게 고유명사 혹은 보통명사의 차용작명은 이미지가 규정되는 함정에 빠진다. 특정한 사물과 겹치는 고정이미지 규정은 심리적으로 수용하기 매우 어렵다. 마치 ‘너는 누구와 닮았다’는 말만 들어도 기분이 유쾌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차별화, 개별화는 진정 필요한 것이지만, 이런 경우는 또 다른 보편성으로 말미암아 미처 생각하지 못한 순간에 자기모순에 빠져버리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저마다 소우주이기 때문이다.
또 이름을 길게 짓거나 그야말로 개성적(?)으로 짓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 부모가 자식의 인생의 긴 여정을 깊이 배려하지 않는 기분파 적인 작명일 수도 있다. 부모의 아름다운 작명의지가 있다 하더라도 그 이름은 자식을 고통스럽게 할 것이다. 훗날 자식은 성장하면서 자신을 소개하고 이름을 사용하는 순간마다 곤혹스런 자기 방어적 표정을 연출해야 할 것이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 긴긴 일생동안 ‘자신이라는 상품(인품 됨됨이)’이 그런 식으로 알려지고 전파되기를 희망하겠는가, 또 그런 이름이 그를 진정 바르게 소개시키는 구실을 할 것인가!
남자의 이름은 어떤가? 이미 항열을 무시하고 짓는 사람이 없지 않지만, 아직까지도 대부분은 ‘오행五行’에 의한 항열의 원칙을 지켜가고 있다. 오행은 서로 화합하는 요소 ‘상생相生’과, 서로 배척하는 ‘상극相剋’으로 구분된다. 상생의 순서는 木-火-土-金-水이고, 상극은 水-火-金-木-土이다. 상생은 “나무가 불을 낳고, 불이 흙을 낳고, 흙이 쇠붙이를 낳고, 쇠붙이가 물을 낳고, 물이 다시 나무를 낳는 순서”로 순환되는 구조로 되어 있다. 한자로 쓰면 상생은 ‘木生火-火生土-土生金-金生水-水生木’, 상극은 ‘물은 불을 배척’하는 水剋火에서, 火剋金-金剋木-木剋土-土剋水의 순서로 되어 있다. 상생은 자연의 윤회와 순환원리를 말하고, 상극은 그 역행을 의미하는 것이니, 상생의 순서를 따라 작명함은 매우 자연스러운 이치이다. 적어도 그렇게 해석하는 경우에 한해서는 그렇다.
참고로 최근에 우리 문중에서 다음 세대를 위해 결정한 항열의 글자를 소개한다.
25세: 在, 敎 26세: 鍾, 九 27세: 洙, 源 28세: 東, 秉 29세: 燁, 道
30세: 圭, 均 31세: 鎔, 鎬 32세: 泰, 永 33세: 秀, 根 34세: 熙, 燮
35세: 吉, 垠 36세: 鎭, 錫 37세: 淳, 澈 38세: 榮, 植 39세: 炳, 煥 40세: 培, 基
木-火-土-金-水의 순서를 그대로 나타냈다. 두 글자 가운데 한 자를 선택해서 쓰면 된다. 가운데가 불편하면 끝에 넣어도 된다. 지금은 25세 在, 敎자를 쓰는 세대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이런 전통이 저 멀리 40세까지 이어질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내 이름은 이성원李性源이다. 원래 옥‘沃’이라 했는데 개명했다. 이름의 고통에서 어느 정도 단련된 30세가 넘은 어느 날, 퇴근해보니 문득 개명이 이루어져있었다. 개명이 아니라 원 이름을 다시 찾았다. ‘性源’은 족보에 오른 최초의 이름이었는데 그것으로 환원되었다. 어린 시절, 나는 내 이름이 싫다고 한 적이 있었는데, 선친은 이를 기억해두었고, 친구 아들이 법원원장으로 부임 인사를 온 날 전격적으로 개명되어 버렸다. 고상했던 이름이 한순간 평범한 이름으로 변했고, 이 변화는 내 인생 여정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이제 더 이상, 꼭 고상해야 되는 인생일 필요는 없었다.
아이들 이름은 이병각李秉覺, 이병주李秉珠, 이병직李秉直이다. 나는 源, 아이들은 秉자가 항열 글자이다. 源자에 있는 水, 秉자 가운데 있는 木이 항열이다. 모든 항열자에 이 오행의 글자가 들어있다. 항열자가 가령 ‘在’자나 ‘時’자라면 이 글자에 보이는 土자가 바로 항열이다. 나는 아이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사내아이들은 覺, 直자를 생각해 두고 있었고, 딸아이는 항열자를 무시하고 예쁜 이름을 여러 가지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딸아이가 태어났을 때, 이렇게 말씀하셨다. “집안에 별다른 액운이 없다면 그냥 항열을 따르라고.” 그래서 ‘秉’자가 들어가는 여자아이의 이름을 새로이 짓게 되었는데 매우 어려웠다. 도무지 여자이름으로 ‘병秉’자는 어울리는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秉珠’는 출생신고 기한이 임박해서 가까스로 지은 이름이었다.
한자 ‘휘諱’는 원래 ‘삼가 하다’, ‘꺼리다’의 뜻이 있다. 이런 뜻이 죽은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삼가야 한다는 즉, ‘휘諱해야 한다’는 말로 사용되다가 다시 ‘죽은 사람의 이름’이란 일반적 총칭으로 굳어졌다.
내 조상들의 휘는 5대 조부로부터 아버지에 이르기까지 ‘..李進淵-李羲肇-李裕憲-李在明-李龍九’의 순서로 이어진다. 淵, 羲, 裕, 在, 九자가 항열 글자이다. 淵은 水, 羲는 禾에 있는 木, 裕는 谷의 위 부분이 火를 의미하고, 在는 土가 바로 보인다. 그런데 九는 그렇지 않다. 이때 오행은 어떻게 되는가. 글자, 획수 등의 규정을 따르는데, 숫자는 一. 六은 水, 二. 七은 火, 三. 八은 木, 四. 九는 金, 五. 十은 土로 한다. 항열의 글자는 비록 바로 보이지 않는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어떤 식이든 오행의 의미가 내재되어 지어졌다고 보면 틀림없다.
우리 집 뿐만이 아니다. 어느 문중이든 이 원칙을 지킨다. 실례되는 일인지는 모르지만, 이미 언급한 의성김씨의 내앞 청계(靑溪 金璡)종택의 경우, 종손들의 휘는....金鎭宗-金亨洛-金秉植-金衡七-金時雨에서 지금의 종손 金昌鈞으로 이어진다. 鎭, 洛, 秉, 衡, 時, 鈞의 글자가 항열의 글자이다. 木-火-土-金-水의 순서에 어긋남이 없다. 『오천군자리』라는 책을 보니, 광산김씨 후조당(後彫堂 金富弼)종택 역시 종손들의 휘는 ...金斗相-金魯憲-金基東-金鍾九-金昌漢에서 지금의 종손 金俊植으로 이어진다. 相, 魯, 基, 九, 漢, 植이 항열의 글자이다. 흥해배씨 백죽당(栢竹堂 裵尙志) 종택의 종손들의 휘는...裵淵載-裵漢根-裵誠煥에서 지금의 종손 裵在溱과 차종손 裵贊鎰로 이어진다. 淵, 根, 煥, 在, 鎰이 항열의 글자이다. 모두 오행의 순서가 확연하다. 안동권씨의 31세(三十一世)에서 60세까지의 경우는 一, 二, 三, 四, 五, 六, 七, 八, 九, 十의 순서를 항열의 순서로 한다. 그래서 항열 글자는 丙-重-泰-寧-五-赫-純-容-九-升...등으로 이어지고, 그것이 그대로 오행의 순환순서를 뜻한다. 이들 글자에 예비글자를 3개씩 두어 융통성을 발휘한다. 가령 一에는 大, 方, 友, 二에는 宗, 仁, 武 등의 글자를 마련해두었다. 이처럼 각 문중마다 오행에 의한 항열의 전통을 지키고 있다.
그러니까 가령 남자의 이름이 ‘李在俊’이라고 하면, 李는 뿌리이고 在는 갈래와 세대이며 俊이 곧 그의 고유의 코드넘버이다. 말하자면 뿌리와 갈래와 세대, 그리고 그의 코드넘버가 결합하여 하나의 이름이 형성되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조선시대의 이름문화를 살펴보면,- 여자의 경우는 시대적 제약으로 별다른 의미를 가지지 못하지만,- 남자의 경우에는 상당한 이유의 합리성과 과학적 측면에 대한 고려가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연령과 취향과 업적에 따라 그때그때 어울리는 작명의 순발력은 개명이 어려운 오늘날의 작명에 대해 적지 않는 지혜를 준다. 그 지혜란 다름 아닌 전 인생에 걸맞은 상표를 전통의 작명기법에서 참고하여 후회 없이 등록시켜 주는 일이다. 또한 항렬에 내재된 혈연의 연속성과 영원성이 개인의 사회적 심리적 안정에 기여함을 간과해선 안될 것이다. 항열은 곧 한 개인의 정체성의 문제와 깊은 연관을 지닌다. 따라서 지금 초등학교 남자어린이의 항열에 따른 새삼스러운 개명요구는 전통의 작명원리가 갖는 합리성이 아직도 유효함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4). 좋은 이름이란?
필자는 작명가가 아니다. 작명이론이란 것도 신뢰하지 않는다. 그러나 필자는 개명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 아름답고 우아한 이름에 대한 관심이 적지 않다. 가수 설운도가 아마 이영춘이라는 본명을 사용했다면, 또 배우 황신혜가 그 이상한 본명을 사용했다면 지금의 설운도, 황신혜가 존재했을까? 나는 한때 실력과 더불어 빼어난 외모를 지녔던 박삼용이란 배구선수의 인기가 폭발하지 않았음이 그 이름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할 때가 있다. 그렇지는 않았겠지만, 아무튼 작명은 진정 중요하다.
《일요신문》, 2000년 2월 3일자에는 ‘예뿐 이름이 스타 키우네’ 의 제목과, 소제목으로 ‘-이름 바꾼 뒤 더 뜨는 연예인들-’이라는 글을 보았는데, 다음 연예인들이 그런 경우라는 것이다.
바꾼 이름 원래 이름
전지연 왕지현
김보성 허 석
송채환 권소연
채 림 박채림
옥소리 옥보경
이 본 이본숙
황신혜 황정만
강 타 안칠현
이 글의 기사 일부는 이러하다. “스타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연예인들의 이름은 참으로 예쁘다...그러나 이들의 본명을 아는 순간 팬들은 번지는 미소를 참기 어렵다...특히 이들은 이름을 바꾸고 나서 더 유명해졌다거나 인기몰이를 하고 있어 이름이 사람의 인생을 좌우한다는 성명학을 한번쯤 생각하게 한다.”
제목을 바꾸니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는 책의 일화는 가끔 있다. 그런데 이름을 바꾸니 시쳇말로 ‘떴다'는 글은 처음이다. 시대는 변하고 상황도 바뀌고 있다. 아름다운 이름이 인생을 바꿀 수도 있는 시대가 온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지금 기업의 경우, 좋은 사명社名에 대한 고민은 각성의 차원을 넘어서고 있다. SK그룹, LG그룹의 사명은 오랜 전통마저 폐기해버렸다. I T 기업의 경우 사명은 생존의 문제로까지 연관되기도 한다. 아름다운 이름이 개체의 이미지 제고에 결정적으로 기여한다는 인식은 기업이나 사람이다 다를 바 없다.
그런데 위 글에서 재미있는 표현은 ‘본명을 알았을 때 그에게서 느끼는 참기 어려운 번지는 미소’라는 구절이다. 지난해 ‘옷 청문회’ 사건은 성경에 손을 올려놓고 거짓말을 하여 온 국민에게 참기 어려운 미소를 번지게 했는데, 필자에게 가장 미소 짓게 한 것은 아마 앙드레 김의 본명이 김봉남이라고 밝혀졌을 때다. 예술적 화사함과 서구적 우아함의 절정에 있는 앙드레란 분이 우리의 봉남이었다니!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옷 청문회에 밝혀진 것은 앙드레 김의 본명밖에 없다’라고 했다. 나는 이분의 이날 그 곤혹스러운 표정을 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좋은 이름을 지을까?
이는 부모 되는 사람의 피할 수 없는 과제이다. 이럴 때 필자에게는 떠오르는 한마디 답안이 있다. 바로 퇴계 선생이 말씀하신 ‘宜於今而不遠於古’이다. “현대에 적합(宜於今)하나 전통을 멀리하지 않음(不遠於古)”의 원칙이다. 문화는 필요에 의해 발생했고 필요에 의해 유지되며 필요에 의해 재창출되는 것이니, ‘宜於今’과 ‘不遠於古’ 사이에서 답을 찾을 일이다. 항열의 규제가 싫다면 오행정도 만이라도 지켜보는 것은 어떨까? 또 문중에서 항열 글자를 결정할 때 예비글자를 좀더 많이 제시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이미 식상된 이름들을 계속해서 지을 수는 없다. 전통적인 작명의 원칙을 견지하면서 한편으로는 참신함을 느끼게 하는 그런 작명이 되어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예명藝名이라 불리는 연예인들의 작명은 시사하는바 적지 않다. 그러나 고유명사, 보통명사에 의한 작명은 신중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아니 짓지 않았으면 한다. 중년을 염두에 둔 깊은 사색이 깃 든 이름을 지었으면 한다. 그러나 이럴 때도 명심할 일은 성姓과 명名의 자음字音들이 충돌하지 않도록 하며, 고저高低의 조화를 지니도록 배려하는 일이다. 이런 조건들을 생각하면 작명이 쉽지 않다. 그렇지만 난해한 방정식은 더욱 아니다.
전통을 지키는 일은 고귀하다. 그러나 시대변화에 따라 전통의 불합리한 면이 발생한다면 당연히 수정되어야 한다. 지금 이름을 조상들처럼 짖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자字를 비롯한 다양한 조상들의 작명방법은 우리에게 ‘이름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새삼스럽게 일깨워준다. 또 자신의 이름을 소중하게 여기고 남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는 ‘경명사상敬名思想’은 결국 나와 타인의 인생을 보다 존중해주는 겸손을 가르쳐 준다. 지금 작명환경은 분명 전환기의 과도기적 상황에 있다. 그러나 이런 시대일수록 귀한 자녀의 작명은 신중해야 한다. 기분대로 지어서 자녀에게 이름으로 인한 고통과 부담을 안겨서는 안 된다. 작명가에게 작명 일체를 맡겨버림도 바람직하다고 할 수는 없다. 전통과 시대흐름에 맞는 좋은 이름을 짓기 위해서는 자녀가 태어나기 오래 전부터, 아니 결혼과 더불어 지어보고 지어보는 일이며, 지어놓을 일이다.
< 안동문화 >기고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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