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 歸去來辭



1994년 9월 21일,

이날은 내게 무척 의미 있는 날이다. 이 날 나는 그 동안 갈망하던 귀거래의 터전을 드디어 발견했던 것이다. 가까운 주변에 그런 깜짝 놀랄 만한 터전이 때묻지 않고 고스란히 남아 있음이 정말 꿈만 같았다. 돌아오는 길 내내 가슴이 두근거렸는데, 그런 흥분은 일찍이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댐의 수몰로 오랜 기간 방황하던 나의 영혼에 마치 고향 같은 안식이 한 몸에 안겨왔다.
잠을 설친 뒤, 나는 다시 찾아가 주변 일대를 눈에 익히고 사진에 담았다. 그리고 이틀 후, 처자를 데리고 갔고, 그 날 어느 아늑하고 포근하게 느껴지는 농가에 무작정 들렸는데, 그 집이 바로 내가 살아갈 집이 되어 버렸다.

나는 그 때 몇 번이나 ‘아, 아 멋진 마을!’이라고 되뇌었는지 모른다.

그 곳은 산세 수려한 청량산(淸凉山) 남록에 위치하는데, 행정구역으로는 안동시 도산면 가송리에 속한다. 가송리는 안동시와 봉화군의 접경에 위치하는 마을로, 주로 청량산 남쪽 자락에 형성된 산간마을이라 할 수 있다. 그런 만큼 마을은 몇 개의 부락들이 여기저기 산기슭에 산재되어 있어서 흔히 보이는 전통적인 촌락과는 사뭇 다른 풍광을 자아낸다. 스레트를 덮은 조그만 집들이 산비탈 비탈에 숨은 듯이 엎드려 있고, 그나마 보수. 신축하는 곳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바로 지난해, 이곳을 지나가는 국도가 포장되어 이 지역 일대의 경관을 일변해버렸지만, 가송리만은 아직까지도 대부분이 국도 변에서 바로 보이지 않는 곳에 위치하여 오지마을의 분위기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 처음 찾는 외지인에게는 그야말로 산촌의 한없는 고요와 평화로움과 목가적인 정경을 한눈에 느끼게 하는 그런 마을이다. 청량산의 청량함은 이 마을로 인해 얻어진 명칭이라면 편견일까.

가송리는 산촌이지만 한편으로는 강촌이라 할 수도 있다. 마을은 설명처럼 청량산 자락에 위치하나 청량산은 또한 강을 따라 그 자신의 확장을 제한하고 있기 때문에 크고 작은 배산임수의 터전을 곳곳에 형성시켜 놓았다. 낙동강은 여기 가송리에 오면 상류지역 특유의 청정함과 더불어 우아하고 뚜렷한 물굽이-‘하회(河回)’-를 이루며 산과 매우 잘 어우러져 있다. 가송리는 그래서 산비탈의 여러 부락들이 또한 강을 좌우로 개간된 올망졸망한 토지를 중심으로 각각 독립된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 연유인지 몰라도 가송리의 여러 부락들은 저마다 독특한 이름들을 가지고 있다.고리재, 불티골, 쏘두들, 가사리, 올미재, 매내, 장구목, 높은데 등등....

안동지방의 촌락들이 대부분 한자의 연원을 가지고 단일하게 작명된 것을 생각할 때, 이 곳에 산재한 지명들은 특이한 순박성과 토속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가송(佳松)’이라는 낭만적인 한자의 동명이 없었더라면, 이 곳의 지명들은 처음 듣는 사람에게는 그 이름이 물고기의 이름인지 새의 이름인지 나무의 이름인지 모를 일이다. 선입감만 없다면 말이다. 무슨 연유로 그런 이름들이 지어졌는지 아직 모른다.
처음에는 ‘가송’- 아름다운 소나무-이라는 동명이 마음에 들었는데, 차츰 이들 지명들을 알게되고 부르게 되어서는 이들 지명들이 더욱 정겹고 부르기 편하게 느껴졌다.

고리재, 불티골, 쏘두들, 가사리, 올미재, 매내, 장구목, 높은데...이 얼마나 향토적 아름다움과 친숙함을 지닌 이름들인가!

그리고 얼마 뒤에 알게된 일이지만 지명만큼 주민들의 성씨 또한 여간 다양하지 않다.금씨.박씨.엄씨.황씨.남씨.이씨.권씨등등....이장의 말로는 7. 8개의 성씨들이 고루 모여 산다고 했다. 그런 까닦인지 씨족부락의 집성촌에서 느끼는 왠지 모르는 배타성 같은 것은 전연 느껴지지 않는다. 안동에서 이런 마을이 존재함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으며, 또한 그런 탈안동적인 분위기가 더욱 나를 끌어들이는 요인으로 작용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잘은 모르나, 그 옛날 토지를 찾아 이곳까지 들어온 사람들이 산전을 개간하며 하천을 일구며 정착하여 서로를 의지하고 인정을 나누며 오손도손 이제까지 살아온 것이다.

그러나 이농현상은 여기에도 예외는 아니어서 고리재. 쏘두들. 가사리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그 이름만 전설처럼 남기고 급속히 폐허화되고 있다. 산전을 일군 개간지들은 기계화 영농에 밀려나고 젊은 사람들은 도회지로 떠난 것이다. 인적의 그림자만 남긴 산기슭 강가 곳곳에 남아 있는 패가와 토지들은 이 지역 긴 세월의 인고를 느끼게 한다. 길고 모진 세월, 삶을 찾아 이곳까지 흘러온 어느 촌부의 꿈을 일구어주던 비탈의 척박한 토지들은 지금 칡넝쿨, 잡목들이 우거지고, 그네들의 어린 자녀들이 자란 두어 칸 초가들은 잡초들로 무성하다.

아내는 처음 쏘두들을 거론했지만 나는 올미재를 주장했다. 아내는 올미재의 적막감을 지적했지만 나는 그 고요함을 사랑한다고 했고 곧 수긍해왔다.

가송이 안동의 오지라면 올미재는 가송의 오지라고 할만큼 이들 지역 가운데서도 단연 외진 곳에 위치한다. 올미재는 비록 강기슭에 위치하나 지형의 특성상 상, 하류 어느 곳으로도 차량진입이 어렵게 되어 있다. 하류는 무인지경의 긴 협곡이 이어져 있고, 상류는 가사리 부근에서 길이 끊어져서 도보로 답사하듯 내려오지 않으면 발견할 수 없다. 강은 이곳에서 그 물굽이의 절정에 이르며 안쪽으로 얼마간의 퇴적지를 형성시키고 있다. 그래서 쏘두들에서 넘어오는 좁고 가파른 뒷 산길을 작정한 걸음이 아니라면 지척에서도 천리로 남는 그런 곳이다. 그런 까닭에 올미재는 아직까지 그 자신을 천연의 요새로 하면서 사람들의 접근을 스스로 차단하고 있다.
해외여행의 전문가인 처남은 이곳이 마치 뉴질랜드의 풍광과 흡사하다며 매우 감탄해했다.

깨끗하고 예쁘게 흐르는 강물의 구비, 수마로 잘 다듬어진 수많은 강돌맹이, 야생화와 잡초, 아카시아와 가시, 포풀라가 멋대로 자란 강변언덕, 그 사이를 비집고 알맞은 크기로 절묘하게 조성된 은빛 모래사장. 그리고 이러한 수평적 아름다움을 수직적 아름다움으로 감싸안은 남, 서쪽 산의 병풍 같은 단애. 또 북쪽으로는 이런 수평. 수직구도를 완충시키는 완만한 경사지와 산허리....올미재는 이런 요소들이 매우 조화롭게 어울려 있어서 전체적으로 하나의 커다란 항아리를 연상하게 한다. 그래서 모래사장 가운데 서서 하늘을 보면 어머니 품안과 같은 안온함과 더불어 문득 우주로 통하는 감각의 신선함을 체험하기도 한다.
나는 몇 번인가 서편 산 위에 올라 이윽토록 올미재를 조망하곤 했는데, 그때마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청량산은 아마 여기에 이르러 그 자신의 정기를 모아 최후의 걸작을 빚어놓은 것인지도 모른다고.

나는 터를 모른다. 명당은 더욱 모른다. 그러나 지금 내게 터의 논리 명당의 논리가 무슨 소용이 있으랴. 이 올미재의 아름다움과 아늑함과 포근함과 고요가 바로 내가 가슴속으로부터 갈구하던 그런 명당인 것을!

소동파가 이르기를 “강산풍월은 그 강산을 사랑하는 사람이 곧 주인”이라 했으니, 나는 이 말의 참뜻을 되새기고자 하는 것이다. 청량산은 일찍부터 소금강이라 하여 신재(愼齋 周世鵬)를 비롯한 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찾아왔으며, 더구나 귀거래를 진정으로 구현한 농암(聾巖 李賢輔), 퇴계(退溪 李滉)같은 분들이 잠들어 계시고 공부하신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인접한 가사리는 또한 성재(惺齋 琴蘭秀)깨서 정자를 짖고 만년의 ‘장구지소(杖屨之所)’로 삼으셨으니, 혼돈시대를 살아가는 후생이 이곳에서 이분들의 인생여정을 상고하고 ‘강호지락(江湖之樂)’과 ‘강호지미(江湖之美)’을 반추함은 그리 놀라운 일일 수도 없는 것이다.
마침 요 근년부터 청량산을 감아 흐르는 이 일대의 낙동강에 대량의 은어 떼 서식이 발견되어 태공들이 출몰하니, 이것 역시 이곳 올미계곡의 정취를 더해줄 것이 분명하다.

나는 이제 아무 고민 없이 이 아름답고 순결한 땅-가송 올미재-의 자연 속을 약삭빠른 도회인의 입장에서 찾아와 터 밭을 가꾸고 옛 책을 뒤적이며 조심스럽게 안기고자 한다. 봄이 오면 산야의 꽃을 찾아가고, 여름이면 꾼들 속에 끼어 강변을 거니는 ‘가어옹(假漁翁)’도 되어볼 것이며, 가을이면 이웃 농부들처럼 추수도 해볼 참이다. 그리고 때로, 벗이 찾아오면 강과 달과 배와 술과 시가 있는 고인들의 풍류도 흉내내어 볼 것이다. 그런 세월 속에서 저 고요하고 잔잔하게 흐르는 강물의 구비-‘낭만浪漫’-을 배우면서 남은 인생을 살아가고자 한다.




1996년 7월, 올미재, ‘어ㅅ와於思臥’에서

李 性 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