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암선생 유적지_분강촌 ::::::::: 농암종택

안동 농암종택을 다녀와서

중국학부 교수 신홍철

얼마 전 몇 분 선생님과 같이 앉아 이야기를 나누다 한 분이 안동 농암 이현보(聾巖李賢輔 1467〜1555) 선생의 종택을 가자고 제안했다. 그 종택을 일반인에게 개방하는데다, 농암선생의 현재 17대 종손이 바로 친한 벗이라고 한다. 인터넷에 찾아보니 거기가 청량산 자락이어서 마음이 솔깃했다. 전화로 문의하니 마침 종손도 시간이 있고 친구들도 환영한다는 느낌이란다. 가면 이리저리 폐가 될 것이니 예물을 준비해야 할 것 같아 영덕을 거쳐 ‘대게’ 한 박스를 준비하기로 했다.

출발하는 목요일이 공교롭게도 비오는 날이었다. 고속도로에 안개까지 끼어 운전하는 선생님은 다소 긴장되었겠지만, 한 달 남짓 가뭄 뒤라 반가운 데다 비오는 것을 좋아하는 나는 오히려 마음이 고요하면서도 상쾌한 느낌이었다. 영덕 강구 바닷가 횟집에서 참가자미 회와 해물 매운탕으로 점심을 하였다. 주인이 권하는 특산술을 기울이며 비와 안개와 파도가 어우러진 바다를 바라보면서, 그야말로 백로(白露 안개)가 횡강(橫江)하고 수광(水光 물빛)이 접천(接天)한 경치에 서울과 진주에서 열릴 학회는 잠시 잊었다.

횟집 아줌마의 걸죽한 농담을 뒤로 하고 미리 마련해 둔 대게 박스를 찾아 차에 실었다. 영덕에서 안동으로 오십천(五十川)이 흐르는 협곡대로 양쪽에는 가뭄에 말라 일찍 든 단풍이 이제 막 오는 비에 젖어 윤기를 띠고 있었다. 영덕이 고향이지만 이 길은 거의 지나다닌 적이 없는데다 좋은 계절에 단비로 축여놓은 이런 계곡 단풍은 다시 보기 어려울 것 같았다. 안동 시내를 통과하여 35번 국도로 도산서원 방향으로 나와 30분가량 가서 가송리 농암 종택 팻말이 있는 오른 쪽으로 들어갔다. 종손 이성원 선생이 반갑게 맞아주면서 우리에게 사랑채를 숙소로 내 주었다.

사랑마루에는 ‘積善(적선)’이라고 씌어있는, 높이가 1미터도 넘는 큰 글씨가 벽에 걸려 있었다. 선조대왕의 어필이라 씌어 있었다. 집에 들어서면서부터 나는 이미 여기가 예사로운 가문이 아님을 직감했다. 안동에는 서원도 많고 종택도 많고 양반은 헤아릴 수가 없을 것이니 나 같은 일반 외부인은 오히려 알려는 엄두도 내지 못해 그냥 무관심으로 대처하는 것이 팔자 편한 것이다. 종손과 저녁 식사를 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나의 외가인 안동 무실이과 진외가인 영양 무실이 종손의 외가와 진외가가 뒤바뀐 채 같은 것임을 알았다.

종손은 반가와 하면서 무실과 주실의 어느 집안이냐고 물었다. 나는 지금도 무실이 어딘지 주실이 어딘지 모른다. 대구 서울 부산으로 흘러 수십 년을 보내는 동안 이렇게 구체적으로 물어온 사람이 없었고, 내가 또 차남이라 그건 장남인 형님이 대답할 질문이라 나와 상관없는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질문으로 부끄럽게 느끼긴 처음이고 또 답답했다. 훌륭한 가문의 종손은 이렇게 다른 사람의 집안까지 상식적으로 알게 되는 것이 문향(文鄕) 안동 문화의 하나가 아닌가 생각된다.

사랑채는 열 명은 잘 수 있을 정도로 넓고 바닥은 온돌로 따뜻하고 화장실에 사워시설과 세탁기까지 갖추어져 있었다. 저녁을 마친 후 사랑마루에서 우리끼리 처마로 떨어지는 가을비 내리는 소리를 들으며 술에 젖어드는데 안채에서 과일을 내 오셨다. 다음날 일찍 일어나니 아침 식사에 안동식혜가 있었다. 과거에 어머니가 해주신 것과 같은 맛이다. 그러고 보니 얼마만인가. 어제 저녁 제대로 못 본 종택의 건물들을 둘러보았다.

사랑채 앞에는 긍구당(肯構堂)이 있고 마당을 나가면 분강서원(汾江書院) 애일당(愛日堂) 명농당(明農堂) 강각(江閣) 등의 건물들이 차례대로 들어서 있다. 명칭의 뜻과 지은 연대가 자세히 씌어있었다. 들어보니 이 건물들은 안동댐으로 종택과 서원 등이 있던 옛터가 수몰되면서 이리로 옮겨 왔는데 원형 그대로인 것, 보수한 것, 새로 지은 것 등이 잘 어우러져 있었다. 옛터가 더 좋았겠지만 그러나 새로 선택한 여기도 전체가 배산임수의 훌륭한 터에 자리 잡고 있었다. 나는 지금껏 주위 경치가 이렇게 아름다운 한옥에서 지내 본 적이 없었다.

그 중 강각(江閣)에 앉아 바라보니 강 건너 물에 잠긴 산은 석벽을 이루어 위로는 안개가 덮혀 있고, 거기에다 가을비에 젖어 홍록으로 물든 단풍이 바위 위에 우거져 강을 따라 병풍처럼 펼쳐져 있고, 그 아래 물결 없이 조용히 흐르는 강은 수면에다 주위의 고운 경치를 그대로 담아 거꾸로 비춰주고 있다. 그야말로 내 몸과 마음이 그림 속에 들어온 느낌이고 금수산광(錦繡山光)과 유리수색(琉璃水色)을 실감나게 감상할 수 있었다.

다음에 다시 한 번 와서 계절이 이렇게 좋을 때 그 때는 사흘 쯤 여유를 내어서 청량산(淸涼山)도 올라보고 예던길(예전길의 옛말)도 걸어보고, 도산서당(陶山書堂)의 천운대(天光雲影臺의 준말)와 천연대(天淵臺)도 거닐며 낙사무궁(樂事無窮)의 경지에 닦아가 보자고 했더니, 함께 온 선생님들이 두말하면 잔소리라는 듯 맞장구를 쳤다. 저녁에 술을 마시면서 한 선생님이 시를 지어 보라기에 간신히 한 수를 완성했다가 아무래도 미흡해서 돌아오는 차 안에서 한 수를 더 보태어 나누어 읽어보면서 이번 여행을 기념하였다. 평측은 서투르고 압운은 간신히 맞추었다.

〈遊聾巖宗宅錄〉〈농암종택 유록(遊錄 기행시)〉

霧煙兩岸楓林壁, 양 언덕 단풍 우거진 석벽에 안개 자욱하다.

賢士常來江畔閣. 옛 선비들이 강 가 누각에 자주 놀러 왔으리.

不曉夜深已醉心, 밤 깊은 줄 모르고 마음 이미 취하면서,

南來四友住一宿. 남에서 온 네 벗이 하룻밤을 묵었다.

雨後陽光照紅綠, 비온 뒤 햇살이 홍록을 비추고,

遠山近水路廻谷. 산은 멀리 강은 가까이 길은 계곡을 돈다.

歸巖承志人何知, 농암에 돌아와 선조 뜻 이음을 남이 어찌 알리오?

遊非人間旣自樂. 비인간의 별천지를 거닐며 스스로 즐거워한다.

지금와 생각해 보니 나는 문득 전국의 유명한 산마다 자리 잡고 있는 수많은 사찰들과 주로 안동지역에 집결되어 있는 서원들은 우리가 물려받은 불교문화와 유가문화의 보고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불교신자도 아니고 유학전공도 아니지만, 이탈리아 도시마다 세워져 있는 그 화려한 성당과 궁전을 떠올려 보고, 그리고 중국 고대 북위(北魏) 시대(5세기경)부터 형성되어온 산서성(山西省) 진(晉) 땅의 불교유적들과 견주어보면서, 우리도 동서고금의 세계문화전당에서 결코 손색이 없는 문화인의 후손임을 자긍하여 본다.

2008년 11월 2일 저녁 승학산 아래에서

***보내주신 글과 시가 너무 진솔하고 좋아서 외람되이 교수님의 승락도 없이 이렇게 올렸습니다. 용서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