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오(碧梧) 이문량(李文樑)의 삶과 생각
권진호(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위원)
가학연원과 가풍적 특징
1) 영천에서 예안 분천으로
고려 초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고울군高鬱君 이문한李文漢을 시조로 하는 영천이씨는 후대에 이르러 이약李約을 파조로 하는 서승공파署丞公派와 이대영李大榮을 파조로 하는 영양군파永陽君派, 그리고 이중영李仲榮을 파조로 하는 울산군파鬱山君派로 나누어진다. 안동의 영천이씨는 영양군파 이대영의 6세손 이헌李軒의 후손들이다.
이대영은 영천이씨의 본격적인 흐름을 연 중시조로, 국자감 진사進士에 급제하고 신호위 대장군神虎衛大將軍으로서 영양군永陽君에 봉해졌다. 그는 전공 판서典工判書인 이득분李得芬과 이유분李有芬 두 아들을 두었고, 이득분은 보승호군保勝護軍인 이문경李文卿을 두었다. 이문경은 세 아들을 두었는데, 이송계李松桂는 문하 시랑門下侍郞이고, 이송현李松賢은 판서이며, 이송려李松侶는 이부 시랑吏部侍郞이다. 이송려는 사재감 주부司宰監主簿인 이일충李日忠과 감사監司인 이일근李日勤, 그리고 현감縣監인 이일장李日章 등 세 아들을 두었으며, 이일충은 군기시 소윤軍器寺少尹인 이헌李軒을 두었다.
고려 말에 군기시 소윤을 지내던 이헌(호는 낙은洛隱)은 혁명이 싹틀 때에 명리名利를 거들떠보지 않고 재주와 덕을 숨기며, 스스로 안정할 계획으로 산수가 아름다운 곳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마침내 영천에서 안동 예안현의 사천沙川[모란]으로 이거했다가, 얼마 안 되어 다시 분천汾川으로 옮겨서 정착하게 된다. 이때 그는 “하늘이 감추어 둔 좋은 곳으로서 주인을 기다리는구나. 저 분천 골짜기는 바로 내가 살 곳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예안은 영천이씨 소윤공파의 입향지가 되었고 이헌은 안동 입향조가 되었다.
이후 예안에 자리 잡은 영천이씨는 대대로 벼슬과 문한이 끊이지 않고 문인학자들을 배출하였다. 이헌은 이종실李宗實과 이파李坡, 이오李塢 등 세 아들을 두었는데, 이종실은 아들 대 이후 대가 끊어졌고, 이파는 의흥 현감을 지내고 병조 참의에 추증되었으며, 이오는 예문각 직제학에 올랐으니 문임文任으로는 최고로 뽑혔다.
이파의 아들 이효손李孝孫은 관리로 진출하여 벼슬이 통례문 봉례通禮門奉禮에 이르렀지만 만년에는 벼슬을 그만두고 귀향하여 노년을 보냈으며, 사후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그는 이흠李欽(1440~1537)과 이균李鈞(1442~1540) 두 아들을 두었다. 이흠은 장년이 되어 이과吏科를 보아 의정부 지인議政府知印에 배속된 뒤, 1483년(44세) 통례원 인의通禮院引義에 제수되었다. 곧이어 진보 현감에 임명되었지만 모친상을 당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1505년(66세)에는 인제 현감이 되었지만 연산군의 학정으로 탄핵을 받은 이후, 다시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그는 마음가짐이 어질고 신중하여, 관직에 있을 때나 향리에 있을 때나 그를 비난하는 자가 없었다. 1537년에 세상을 떠나니 향년 98세였다. 사후 의정부 좌참찬에 추증되었다. 이균은 자가 중지重之이고, 벼슬은 군자감 직장에 이르렀으며, 향년 99세였다.
이렇듯 영천이씨 선대에서는 충후청백忠厚淸白을 전가傳家의 보물로 여겼다. 특히 군기시 소윤인 이헌의 후손들은 벼슬과 지위가 그 덕에 미치지 못하여 복지福祉를 후손들에게 물려주어, 이흠과 이균 형제는 백세의 수를 누릴 수 있었다.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1467~1555)가 옥당에 있을 때 고향으로 내려와 구로연九老筵을 베풀었는데, 그때 부친인 이흠은 94세이고 숙부인 이균은 92세였다. 이 두 형제가 번갈아 노래하고 자손들이 헌수獻壽하니, 천륜天倫의 즐거움과 풍류의 성대함이 이보다 더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흠은 네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 이현보와 차남 이현우李賢佑((1470~1560), 그리고 셋째 이현좌李賢佐(1473~?)와 넷째 이현준李賢俊(1477~1552)이다. 장남 이현보는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지중추부사에 이르렀고, 차남 이현우는 훈련원 습독訓鍊院習讀으로 예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셋째인 이현좌는 부장部將·헌릉 참봉이었고, 넷째인 이현준은 찰방을 지냈다.
2) 안동 영천이씨의 문호를 열다
농암 이현보는 20세 때 당대의 대표적인 문장가였던 허백정虛白亭 홍귀달洪貴達( 1438~1504)의 문하에 나아가 경전을 배웠다. 그와 교유했던 인물은 송재松齋 이우李堣(1469~1517), 안분당安分堂 이희보李希輔(1473~1548), 십청헌十淸軒 김세필金世弼(1473~1533), 충재冲齋 권벌權橃(1478~1548) 등이다. 1498년(연산군 4), 32세의 나이에 문과에 급제한 뒤 1542년 76세까지 약 44년간 연산군·중종·인종·명종 등 4대를 섬기면서 벼슬에 종사하였다. 내직으로는 예문관 검열, 춘추관 기사, 예문관 봉교, 사간원 정언, 홍문관 전적, 호조 좌랑, 사헌부 지평, 형조 정랑, 군자감 첨정, 사간원 사간, 예빈시 부정, 사복시 정, 사헌부 집의, 군자감 부정, 시강원 보덕, 병조 참지, 동부승지, 형조 참의, 홍문관 부제학, 우부승지, 예조 참의, 형조 참판, 호조 참판, 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하였고, 외직으로는 영천 군수永川郡守, 밀양 부사, 충주 목사, 안동 부사, 성주 목사, 대구 부사, 평해 군수, 영천 군수榮川郡守(지금의 영주), 경주 부윤, 경상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특히 1504년(38세)에 사간원 정언이 되었을 때, 서연관의 비행을 논하다가 안동의 안기역에 유배되었는데, 중종반정으로 방면되어 복직되었다. 외직으로 근무할 때는 가는 곳마다 선정을 베풀어 청백리의 표상이 되었다.
아울러 농암 이현보의 삶에 있어서 가장 특기할 점은 효성의 실천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어버이 봉양을 위해 7~8차례나 외직을 자청했고, 1512년 어버이의 마음을 즐겁게 해드리기 위해 ‘애일당愛日堂’을 지었다. 이뿐만 아니라 1519년 안동 부사 시절에는 남녀귀천을 막론하고 부내府內의 80세 이상 노인들을 초청하여 ‘화산양로연花山養老燕’을 베풀었고, 예안 고을의 70세 이상 노인들을 초청해 ‘애일당구로회愛日堂九老會’를 만들어 홀로된 아버지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실들을 통해 농암 이현보의 경로敬老와 박애 정신의 일단을 확인할 수 있겠다. 또한 이 같은 효성의 실천은 농암 가문의 아름다운 전통이 되어 후손들에게까지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이는 그의 아들 중 호암虎巖 이희량李希樑(1501~1565)과 하연賀淵 이중량李仲樑(1504~1582), 그리고 관암串巖 이계량李季樑(1508~?) 3형제가 농암 이현보가 그랬듯이 부친인 농암 이현보를 받들어 모시기 위해 일시에 외직을 청한 사실에서 미루어 알 수 있다.
한마디로 농암 이현보에게 있어서 ‘효孝’는 ‘적선積善’과 더불어 일관된 삶의 지향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그는 출사해서는 강직한 성품으로 매사에 최선을 다하였다. 세상을 떠난 뒤 평생 사업을 평가하여 내려준 ‘효절孝節’이라는 시호가 그의 일생을 잘 요약해 준다. 자혜애친慈惠愛親을 효孝라 하고, 호렴자극好廉自克을 절節이라 했다. 아마도 조선시대를 통틀어 ‘효절’이란 시호를 받은 이는 농암 이현보가 유일할 것이다.
농암 이현보는 아들 8형제를 두었는데, 장자 이석량李碩樑은 일찍 죽고, 차자 벽오碧梧 이문량李文樑(1498~1581)은 문장과 기절氣節이 있었으며, 평릉 찰방을 지냈다. 셋째 아들 호암虎巖 이희량李希樑(1501~1565)은 봉화 현감을 지냈고, 넷째 아들 하연賀淵 이중량李仲樑(1504~1582)은 문과에 급제한 뒤 안동 부사·관찰사·우승지 등을 역임하였는데, 관직에 있을 때는 청렴·충실하였고 부모를 대할 때는 효성을 지극히 하였다. 다섯째 아들 관암串巖 이계량李季樑(1508~?)은 의흥 현감을 지냈으며, 여섯째 아들 매암梅巖 이숙량李叔樑(1519~1592)은 퇴계 이황의 문인으로, 사마시를 거쳐 왕자 사부가 되고,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추대되었다. 이숙량은 글씨에 뛰어나 매헌梅軒 금보琴輔(1521~1584)·춘당春塘 오수영吳守盈(1521~1606)과 함께 ‘선성삼필宣城三筆’로 일컬어졌다.
이렇듯 예안에 정착한 영천이씨는 농암 이현보 이후 안동 지역의 명망 있는 가문으로 발전하였다.
3) 예안 분천에서 내살미로
농암 이현보의 아우 이현우는 자가 국경國卿이고 호가 광헌廣軒이다. 효도와 우애가 지극하였으며, 벼슬은 훈련원 습독을 지냈다. 1537년에 부친상을 당하자 형인 농암 이현보와 함께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했고, 분천에서 열린 속구로회續九老會에 참여하였다. 만년에 분천의 상류인 내살미[川沙村]로 옮겨와 살았는데, 퇴계 이황이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그윽하고 먼 내살미 이씨 어른 계신 곳 幽敻川沙李丈居
넓은 밭에 벼 익으니 숲 언덕이 아름답네 平田禾熟好林墟
나도 역시 이웃삼아 서쪽 골짝 맡아두고 卜隣我亦專西壑
띠집 짓고 그 가운데 만권 책을 지녔다오 茅屋中藏萬卷書
｢천사촌川沙村｣이라는 시다. 내살미는 퇴계 이황이 살던 토계촌과는 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 곳이다. 아울러 그의 삶의 일단을 손자인 간재艮齋 이덕홍李德弘(1541~1596)이 지은 계산기선록溪山記善錄의 기록을 통해 알아보기로 한다.
“천사[내살미]에 있는 조부 집 사랑채 한 칸이 손님을 접대하기에 부족하므로 띠를 엮어 비를 가리고 널빤지로 난간을 넓혔다. 선생(퇴계)께서 볼 때마다 그 검소함에 감탄하여 한서암寒棲庵과 암서헌巖棲軒을 지을 때 모두 이 제도를 모방하였다. 옛집 또한 쓸쓸하였으니, 그 순박하고 검소함을 숭상함이 이와 같았다. 암서헌은 근래에 기와로 바꾸었는데, 전혀 본의本意가 아니라고 한다.”
광헌 이현우의 삶은 한마디로 순박하고 검소함 그 자체였다. 그렇기에 퇴계 이황은 그의 순박하고 검소한 태도를 높이 평가했을 뿐만 아니라, 도산서당과 종택을 지을 때 이 같은 정신을 본받고자 했던 것이다.
또한 퇴계 이황은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만시를 짓기도 하였다.
옛날 내가 돌아와 밭 갈던 날 昔我歸耕日
비로소 공을 따라 이웃에 살았네 從公始卜鄰
매실은 주씨 노인과 함께 먹었고 梅同朱老喫
술동이는 장경을 맞이해 벌렸네 樽對蔣卿陳
태산처럼 길이 장수하길 축하하고 壽賀如山永
태고의 순박한 마음 친애하였네 心親反古淳
갑자기 유명을 서로 달리하니 幽明忽相隔
해로가 부르며 수건을 적시네 吟薤淚沾巾
전반부에서는 예전에 이웃하여 살며 함께 매실도 먹고 술잔도 기울였던 추억을 회상하고 있다. 그리고 후반부에서는 태고의 순박한 마음을 지닌 분이 장수하지 못하고 고인이 되어 유명을 달리하니 슬프기 그지없음을 묘사하였다. 광헌 이현우는 사후 예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이현좌 역시 효도와 우애가 남달라 부모의 뜻을 잘 받들었다. 특히 형인 농암 이현보가 서울에서 벼슬할 때 그는 고향에서 가정을 경영하였으며, 부모가 돌아가시자 삼년동안 시묘살이를 했다. 넷째인 이현준은 영주 보름골[望洞]에 거처를 옮긴 종숙인 진사 이인견李仁堅에게 출후出後하였고, 음사蔭仕로 장악원 직장·찰방 등을 역임하였다. 이상의 내용을 통해 농암 이현보를 비롯한 4형제가 하나같이 형제간의 우애와 부모에 대한 효성을 중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2. 벽오 이문량의 삶과 생각
1) 문장공부에 몰두하다
이문량李文樑(1498~1581)의 자는 大成, 호는 碧梧 또는 綠筠, 본관은 영천이다. 그는 1498년(연산 4) 12월 26일에 부친 좌참찬 농암 이현보(1467~1555)와 모친 안동권씨 忠順衛 權孝誠의 따님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581년(선조 14)에 세상을 떠나니 향년 84세였다.
그는 형인 李碩樑이 後嗣 없이 일찍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차남으로 장남을 대신하였다. 어려서부터 타고난 자태가 빼어나고 재주와 학식이 일찍 진보하였다. 14세(1511, 중종 6) 때 두 아우와 함께 농암 이현보의 임지인 영천군 관아에 있었다. 농암이 공무를 마치고 관아에 한가로이 앉아있을 때 세 아이들에게 시를 지어보도록 하였다. 농암은 그들이 지은 시가 稚拙했지만 저마다 개성을 살려 지은 것에 대해 만족하고,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총각인 세 아들 기러기처럼 나란히 와서 總角三兒鴈作行
연구를 읊는데 저마다 글이 이루어지네 試吟聯句各成章
우리 집에 좋은 일 쌓여 없어지지 않으리니 吾家積慶應無替
저 아이들 모두 입신양명을 지켜보리라 佇見渠曹共立揚
농암은 향후 세 아들이 문장으로 발신하여 가문의 전통을 빛낼 것으로 기대가 컸다. 이문량은 아버지의 격려와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이때부터 과거 공부에 매진하였다. 鄕試에는 여러 차례 합격했지만 省試에는 번번이 실패하였다. 그런 가운데 아우들이 차례로 벼슬길에 오르자 이문량은 그의 인생에서 큰 결심을 하게 되는데, 出보다는 處의 길을 택한다. 才德을 감추어 세상에 드러내지 않고 부모를 봉양하는 것을 자신의 직분으로 삼았다. 이때 그는 다음과 같은 명분을 내세웠다.
“나는 네가 나를 잘 봉양할 것만 알 뿐이지, 네가 나를 녹봉으로 봉양할 것은 모른다.”
위의 구절은 북송의 학자 程頤를 師事한 和靖處士 尹焞(1071~1142)의 어머니가 한 말이다. 윤돈이 과거시험을 포기하자 스승인 정이천이 “자네에게는 어머니가 계시지 않는가?”라고 하니, 그가 집에 돌아가 어머니에게 과거시험을 보지 않은 연유에 대해 사실을 고하자 윤돈의 어머니가 이렇게 말한 것이다. 이후 윤돈은 종신토록 과거를 보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이문량도 더 이상 벼슬길에 미련을 버리고 부모봉양과 가업을 이어받는 데 몰두한다. 그러나 23세(1520, 중종 15)부터 46세(1544)까지 장사랑將仕郞, 종사랑從仕郞, 통사랑通仕郞과 적순부위迪順副尉, 병절교위秉節校尉의 품계가 잇달아 내려오지만 그는 나아가지 않았다.
2) 孝養의 실천
출사의 길을 단념한 이문량은 대부분 향촌에 기거하면서 부모에게 孝養하고 여러 형제들과 우애를 나누면서 집안의 대소사를 도맡아 경영하였다. 특히 부모에 대한 효성은 남다른 면이 있었다. 그의 나이 57세(1554, 명종 9) 때 셋째 아우 호암 이희량과 넷째 아우 하연 이중량, 그리고 다섯째 아우 관암 이계량이 모두 고을 수령이 되어 외직에 있었는데, 부친 농암 이현보의 88세 壽宴을 위해 이들 형제들이 모이게 되었다. 특히 이들 세 형제는 늙으신 아버지의 봉양을 위해 이중량은 삼척 부사에서 청송 부사로, 이희량은 언양 현감에서 봉화 현감으로, 이계량은 연산 현감에서 의흥 현감으로 임지를 바꾸어 달라고 조정에 요구하여 수용되었으며, 이때 고향과 가까운 고을에서 수연에 참석했던 것이다. 농암은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아들들에게 당부하였다.
몸이 늙어 벼슬 그만두고 고향에 누웠으니 身老休官臥故鄕
세 아이가 임명장 받고 먼 지방으로 떠났네 三兒奉檄各遐方
외람되이 임지 바꿔 달라 거듭 소장 올렸으니 連章乞換曾爲濫
잊지 말고 먼저 맡은 고을 잘 다스려야 하네 治邑先思願勿忘
한마디로 외람되게 소장을 올려 임지를 고향 근처로 바꾸어 준 임금의 은혜를 잊지 말고, 수령으로서 선정을 베풀 것을 강조하였다.
이때 이문량은 살고 있던 옛집을 중수하여 그곳에서 잔치를 베풀어 부모 봉양을 극진히 하였다. 농암은 기뻐하며 중수한 집을 ‘肯構堂’이라 명명하였다. ‘긍구당’은 ‘肯構肯堂’의 줄인말로 아버지가 행한 사업을 자식들이 이를 잘 계승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농암은 다음 시에서 긍구당의 의미를 부여하였다.
명농당은 내 몸을 위한 것이라면 明農爲其身
애일당은 부모님을 위한 것이라네 愛日爲其親
하지만 어찌 이 긍구당만 하겠는가 豈若此高堂
나도 위하고 부모님도 위하는 爲身兼爲親
농암은 영천 군수(42세, 1508)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와 44세(1510)에 명농당을 짓고 46세에 애일당을 건립하고 88세에 긍구당을 중수하였던 것이다. 명농당과 애일당에 비해 긍구당은 조상대대로 내려온 상징적 공간으로 농암은 특별히 ‘긍구당’의 의미를 시를 통해 드러내었던 것이다. 아울러 농암은 오늘이 있기까지 이문량의 역할에 대해 다음과 같이 피력하였다.
“우리 분천의 故家는 고조 증조로부터 부친까지 100여 년이 되고, 내 몸에 미친 것도 40년이다. 내가 서울에서 벼슬하느라 관청을 집으로 삼아, 분천을 이따금 출입하였으니, 마치 여관과 같았다. 고가가 기울어 무너져 거의 없어지게 되었다. 아비를 대신해서 집안일을 돌보는 아들 문량이 주관하여 비로소 공인을 데려다 중수하였다. 마침 금년 오늘 여기에서 잔치를 베풀어 새해맞이 경사를 함께하게 되었다. 내가 기뻐서 그 당에 이름붙이기를 ‘긍구’라 했다.”
‘긍구당’은 예안 입향조 이헌이 지은 집으로 누대에 걸쳐 후손들에 의해 전해진 유일한 건물이다. 농암은 이 건물이 지금까지 내려오게 된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여 ‘긍구당’이라 이름붙였던 것이다. 이문량은 아버지 농암의 「元夕獻筵詩(幷序)」에 다음과 같이 화답하였다.
우리 집안 복과 경사 정령 하늘이 내리셨고 吾門福慶定膺天
게다가 오래도록 형제 우애 돈독했다오 況是長吟棣萼篇
마루 가득 백발인데 학발 노인 둘러싸고 霜鬢滿堂圍鶴髮
다투어 술잔 올리며 만수무강 축원하네 椒觴競進萬斯年
정월대보름 저녁에 치러진 축수 연회의 현장 분위기가 잘 드러나 있다. 아버지의 장수와 형제간의 우애가 도타운 것은 평소 가풍으로 내려온 선을 쌓아온 결과로서, 이는 결국 하늘이 우리 집안에 福慶를 내려준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더욱더 아버지의 만수무강을 염원하고 있다.
그의 나이 58세(1555) 때 아버지 농암 이현보가 세상을 떠났다. 벽오 이문량은 아버지의 뜻을 잘 받들어 72세(1569) 때 분천에서 구로회를 다시 열었다.
“예로부터 우리 고을에서 장수하는 노인이 많기로는 우리 집안이 으뜸이다. 선고(농암)로부터 그 위로 5세가 모두 대질(80세)의 수를 누리셨다. 선고 나이 71세에 조부의 상을 만났는데 조부의 나이 98세였다. 계사년(1533)년에 선군이 휴가를 받아 歸養해서 壽席을 베풀었고, 인하여 고사를 본떠서 행중의 노인들을 모았으니, 나이 70 이상이 세 분, 80 이상이 네 분, 우리 조부 형제는 나이가 90이 넘어 그 자리에서 첫째를 차지했다. 후에 정미년(1547) 선군이 나이를 이유로 퇴휴하여 또 향중에서 나이 80 이상 네 분, 70 이상 다섯 분을 모았는데, 선군이 거기서 두 번째였다. 선군이 살아계실 때 두 번 구로회를 베풀었으니, 어찌 인간세상에서 드물게 있는 성대한 일이 아니겠는가? 선군이 세상을 떠나신 뒤 온 고을의 여러 노인들도 따라서 영락하였으니, 인사의 성쇠와 鄕運의 흥체가 이와 같음이 있었다. 이제(1569) 참람되게 선군의 일을 본떠서 80 노인 두 분, 70 노인 여섯 분과 함께 우리 고을의 옛 규례를 이었다. 참망함이 심하지만 자손들이 보고 느끼도록 하고자 함이다.”
위는 이문량의 「續九老會詩」의 서문이다. 아버지대로부터 행한 구로회의 역사를 정리하고 있다. 1533년에 향산 백거이의 고사를 모방하여 구로회를 베푼 이후, 1547년에 또 구로회를 베풀어 농암 생시에 두 번의 성대한 모임을 행하였다. 그리고 농암이 세상을 떠난 뒤 아들 이문량이 그 미풍양속의 전통을 이어받아 1569년, 그의 나이 72세 때 구로회를 열었는데, 농암이 1533년에 열었던 애일당구로회의 절차와 규모가 거의 같았다.
뿐만 아니라 이문량은 평상시 아버지 농암 이현보를 모시는데 지극 정성을 기울였다.
“아침저녁 맛난 음식을 올리는 일과 곁에서 모시고 봉양하는 일을 날마다 부지런히 하면서도, 부친을 기쁘게 모시는 데 실수가 있을까 근심하였다. 또 좋은 계절이면 효절공(농암)이 지팡이를 짚고 靈芝寺, 屛巖寺, 月瀾寺, 臨江寺 사이를 오갔는데, 이때는 진기한 음식과 색다른 반찬이 길에 잇달았다. 대로(농암)는 간혹 임금이 내려 주는 음식을 받으면 鄕黨宗族) 함께 잔치하기를 좋아하였는데, 받은 음식이 어떤 때 제대로 잔치를 차리는 데 부족하면 공이 매양 집에서 빚은 술로 이어 대며 ‘이것 역시 王土에서 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렇듯 대를 이어 내려온 孝養의 실천은 예안(분천) 영천 이씨의 가풍의 특징이 되었을 뿐 아니라 16세기 이 지역의 ‘孝’라는 인문적 가치와 미풍양속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3) 벼슬길에 나아가다
이문량은 출사의 꿈을 접고 벼슬하지 않은 처사형 삶을 영위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의 나이 63세(1560) 때 평릉도 찰방으로 나간다. 평릉도 찰방은 강릉을 중심으로 서쪽으로 대관령방면, 남쪽으로 삼척-울진-평해, 북쪽으로 양양에 이어지는 驛路를 관할하였다. 중심역은 交可驛(삼척)이다. 이즈음 가정사는 58세(1555) 때 아버지 농암 이현보가 세상을 떠난 뒤 삼년상을 마친 뒤였다. 옛날에 집안이 빈한하고 부모님이 연로하면 祿仕를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문량이 처한 상황이 녹사를 해야 할 필연적 사유가 있지 않은 듯하다. 그래서 부임 초기에 진퇴에 대해 망설인 듯하다. 퇴계 이황이 이 소식을 듣고 다음과 같이 편지를 보냈다.
“그대가 이미 관동으로 출발한 줄 알았는데, 온계에 도착해서 비로소 들어보니, 가던 길을 멈추었다고 합니다. 모르겠습니다만 정말인지요? 나는 그대가 돌아와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돌아올 때가 격식에서 어긋남을 말하는 것입니다. 재임하면서 조정의 승낙을 받은 뒤에 돌아오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대가 조정의 명을 따르고 나서 또 중도에 용감하게 결단한다면 이는 득실과 영욕의 밖을 초월하고자 함이니, 이는 보통 사람이 꾀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퇴계 이황은 조정의 명을 받았으면 일단 부임을 하고, 그런 뒤에 적당한 때 사직을 청하여 승낙을 받고 돌아오라는 것이었다. 진퇴에 대한 퇴계 이황의 충고가 받아들었는지 이문량은 결과적으로 우선은 임지에 부임을 하고 1년 뒤에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다. 임지로 가서는 監牧官의 일을 부지런히 하였다.
“5월에 울진 糶穀使로 가라는 공문을 받고 말을 달려 도착해 보니, 때늦은 파종으로 백성들이 저축해 놓은 곡식창고를 열러 진휼해 주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또한 울진 군수는 모친상을 당한 상태였다. 고을이 쇠잔하고 백성들은 피폐되어 힘에 따라 살펴보고 구호하였다. 13일간 머물러 있다가 옥원역으로 되돌아왔다.”
관찰사의 첩지에 따라 이문량은 인근 고을 수령의 초상을 돕고, 그 고을의 糶政을 아울러 살피니, 실제의 혜택이 곤궁한 백성에까지 미쳤다. 때마침 妹壻 山南 金富仁(1512~1584)이 강릉부의 판관으로 있었는데, 날마다 시를 읊조리고 틈을 내어 함께 산과 바다를 찾아 金石에서 나오듯 맑은 소리로 번갈아 시를 노래하기도 하였다. 실제 그의 문집을 살펴보면 평릉도 찰방 시절 지은 시 33수가 수록되어 있는데, ｢平陵紀行｣이라고 한다. 이듬해(1561) 봄에 말미를 얻어 고향으로 돌아와 동산 안의 푸른 대나무를 손으로 쓰다듬으며 오랫동안 처연한 기색을 띠었다. 관직을 내놓고 옛날처럼 한가로운 사람으로 돌아오니, 퇴계 이황이 “벽오 노인이 하룻저녁에 갑자기 생각을 바꾸어 용퇴하기로 결정한 것은 매우 쉽지 않은 일이다.”라고 하였다. 그의 용퇴에 퇴계 이황은 박수를 보내주고 있다.
한편, 이문량의 출사는 길지 않았다. 1년간의 출사였으며, 그것도 아버지 농암 이현보 생전에 나간 것이 아니라 사후에 이루어졌다. 다른 아우들은 농암 생전에 음직으로 출사했지만 유독 이문량만은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앞서 언급했듯이 아버지와 아우들의 출사로 집안일을 건사하고 부모에 대한 孝養을 위한 것이라고 한다면 물음에 대한 해답이 되겠는가? 다음의 언급을 통해 그 실마리를 찾고자 한다.
“사람들은 어버이가 계실 때 한 자리의 벼슬도 얻지 못한 것을 가지고 공에 대해 몹시 안타깝게 여겼지만, 이는 그렇지 않다. 하늘이 善人의 집에 복을 내려 錫類의 경사를 이루어 줄 때, 혹 벼슬에 나아가 어버이를 顯揚하는 자가 있기도 하고, 혹 집 안에 있으면서 어버이를 잘 봉양하는 자가 있기도 하니, 먹여 주는 穀과 거두어 주는 難의 역할이 진작부터 같지 않은 것이다. 만일 공이 여러 아우와 같이 밖으로 나가 벼슬을 하였다면, 大老의 뜻과 몸을 받드는 데에 누가 있어서 이런 ‘강호의 즐거움[江湖之樂]’과 ‘백년의 장수[期頤之壽]’를 누렸겠는가. 그러니 공을 감추어 드러내지 않고 간직하여 쓰지 않은 것이, 어찌 하늘이 선으로 복 받은 집을 더욱 돕는 것이 아니라고 하겠는가.”
출처의 진퇴여부는 그 사람이 처한 여건과 환경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어버이가 계실 때 출사하여 입신양명하는 경우도 있고, 은거하여 어버이를 잘 봉양하는 경우도 있다. 두 가지의 기로에서 이문량은 후자를 택한 경우이다. 후자를 택했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누릴 수 없는 ‘강호의 즐거움[江湖之樂]’과 ‘백년의 장수[期頤之壽]’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한 가지 의문점은 왜 아버지 생전에 여러 음직이 내려왔을 때 나가지 않다가 돌아가신 이후, 그것도 짧은 출사의 길을 택했을까 하는 점이다. 이문량이 평릉도 찰방으로 나가게 되었을 때 퇴계 이황이 송별시를 써 주었는데, 이문량이 이 시에 차운한 것을 감상해본다.
띠집에서 십년 동안 본성을 보전하던 사람이 荊茅十載葆眞人
하루아침 벼슬길 아득한 티끌 속으로 떨어졌네 一落東華百尺塵
물새들아 좋은 벼슬에 매어있다고 혐의하지 마라 鷗鷺莫嫌縻好爵
관동지방 산수의 경치도 청신하단다 關東物色亦淸新
60대에 이문량이 평릉도 찰방을 역임한 이유는 좀 더 자유로운 처지에서 산수가 빼어난 동해의 장관을 유람하고 싶었기 때문이리라.
4) 퇴계 이황과의 교유
벽오 이문량은 1년간의 평릉도 찰방의 벼슬살이를 제외하고는 평생을 예안 분천에서 살았다. 84년의 삶을 살아오면서 많은 사람들과 만났지만, 그 가운데서 그의 삶에 있어서 직간접적인 영향을 끼친 이로는 퇴계 이황을 들 수 있다. 퇴계집과 벽오집에는 서로 주고받은 편지와 시편들이 수록되어 있다. 일례로 다음 시를 통해 두 사람간의 인간적 관계를 살펴보기로 한다.
반 넘어 봄날 가도록 산 꽃 피지 않는데 山花未發春强半
시내에 새 한가로이 나니 손님 또한 오누나 溪鳥閒飛客又來
가벼운 음주에 고담준론으로 내 병 잊었거늘 淺酌高談忘我病
곤궁하나 굳센 절개로 그대 재주 힘쓰라 窮居苦節勉君才
이문량이 계상서당을 방문했을 때 퇴계가 지은 시다. 늦은 봄날 꽃은 피지 않고 시냇가에 새는 한가로이 날고 있다. 이때 이문량은 퇴계 이황을 만나 가벼운 음주에 고담준론을 나누기도 하고, 학문에 힘쓸 것을 권면하기도 하였다. 또한 “좋은 밤 함께 즐거운 좋은 손님 찾아오니, 산봉우리 넘어 불러 탁주잔 기울여 마시네. 관란헌에 솥밭처럼 둘러앉아 속마음 열고, 다시 쪽배 타고 달 놀이 하다 돌아오네.”라고 하여, 시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달밤에 이문량이 도산으로 찾아와 德溪 吳健(1521~1574)과 관란헌에서 술을 조금 마시고 흥이 나서 배를 타고 달 놀이한 사실을 묘사하였다. 이처럼 두 사람의 관계는 언제나 주인과 손님으로 격의없이 속내까지 얘기하고 놀이까지 함께하는 사이였다. 심지어 그는 57세(1564) 때 퇴계와 청량산 연대사를 유람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이문량은 퇴계와 지역적으로 아주 가까운 거리에 살면서 평생 동안 매우 친하게 지냈는데, 때로는 글을 의논하고 때로는 出處에 대해 강론하였으며, 편지를 주고받은 것이 거의 다발을 이룰 지경이었다고 한다. 어느날 이문량이 편지를 보내 퇴계에게 士習을 바로잡고 異端을 배척할 책임이 있으니 노력해 달라고 주문했다. 그러자 퇴계 이황은
“저는 듣건대, ‘성실하지 못하면 하늘을 감동시킬 수 없다.’고 합니다. 대체로 자신에게 실제로 얻음이 있어야 비로소 성실이라 말할 수 있거늘, 성실하지도 못하면서 득실을 지적하고 열거한다면 하늘을 감동시킬 수 있습니까?”
퇴계는 당시 정치현실을 직시하고 있었다. 을사사화 이후 문정왕후의 수렴청정과 척신정치가 여러 가지 폐단을 노정시키고 있었다. 이때 ‘사습을 바로잡는 일’을 제기한 것은 1552년 퇴계가 성균관 대사성의 직임에 있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대사성으로서 선비의 풍기를 바로잡아야하는 책임이 있겠지만, 다만 자신에게 실제로 체득함이 없기 때문에 남을 감동시킬 수 없다고 하였다. 때문에 얼마 안되어 유생들의 스승으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한 자신의 무능력을 인정하고 대사성의 직임을 떠나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불교를 배척하는 일’은 당시 정국의 현안으로 급부상하고 있었다. 문정왕후의 선종과 교종의 부활, 보우의 임명, 도첩재 부활 등으로 뜨거운 감자로 대두되는 가운데 도첩제 폐지, 요승 보우의 처벌을 요구하는 유생들의 상소가 빗발치듯 하였다. 이러한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 말을 해야 할 때와 말을 하지 말아야 할 때가 있다는 것이 퇴계의 생각이다. 퇴계는 지금의 시국은 섣부른 불교 자체를 배척하는 것은 매우 위태로운 국면을 맞이할 수 있기 때문에 때를 기다리면서 유연하게 대처할 것을 강조하였다. 평소 퇴계의 인간적 면모를 엿볼 수 있게 한다. 다음은 이문량과 퇴계의 인간적 관계를 알 수 있는 단적인 사례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1558년 퇴계는 도산서당을 짓고자 하였으나 조정의 관직에 매여 있었으므로, 지을 집의 도면을 이문량에게 보내어 부탁하고 蓮僧(승려 法蓮)에게 일을 시켜, 눈앞에 우뚝 솟은 집을 보고 그대와 더물어 온 산의 경치를 함께 즐기기를 기약하였다. 실제 퇴계는 이문량에게 편지를 보내 다음과 같이 부탁한다.
“이미 도본을 그려 寯에게 보내면서 법련을 불러 보이고 설명을 하라고 했더니, 뜻밖에 준이 저의 외가 장례일로 宜春에 내려갔으니, 그 도본을 보지 못햇을 것입니다. 준이 돌아올 시기는 섣달그믐 경이나 초봄 무렵이 될 터인데, 비록 와서 도본을 본다 하더라도 겨울철은 이미 지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그 도보이란 것이 너무 엉성하여 쓸 수 없기에 이제 새로 고쳐 하나를 그려 보냅니다. 다만 곧바로 법련에게 전해 주면 필연코 잘 납득을 못할 것입니다. 생각건대, 벽오와 월천이 도산에서 얼마 되지 않는 곳에 살고 있으니, 뒷날 집이 완성되면 온계와 오천에 있는 이들보다는 필시 먼저 빈번하게 내왕할 것입니다. 법련을 잘 지도해서 계획대로 집을 짓도록 하고 밤연히 보는 생각이 없게 하십시오. 때문에 감히 구구한 말씀을 드리오니, 빨리 법련을 불러 소상히 설명해서 그가 마음으로 분명히 알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만약 그대 마음에 온당하지 못한 데가 있으면, 또한 士敬(조목의 자)을 불러 함께 자세히 살펴보고 알려주는 것이 좋겠습니다.”
퇴계 이황은 도산서당을 건립하는 데 믿고 맡길 사람이 필요하였다. 그래서 이문량에게 공사감독권을 위임하였다. 도산서당이 완공되면 가장 먼저 빈번하게 찾을 사람은 이문량과 월천 조목이라고 생각하였다. 아마도 퇴계의 부탁을 받은 두 사람은 퇴계의 뜻을 받들어 서당을 건립하는데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한편 이런 경우도 있었다. 이문량은 처음에 퇴계와 벗으로 지냈지만, 나중에 퇴계의 지위가 높아지자 揖하던 것을 바꾸어 절[拜]을 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퇴계는 “그대와 나는 친구로 사귀어 온지 매우 오래 되었는데, 벼슬이 높고 낮음을 가지고 조석으로 만나 종유하던 사이를 변경할 수 있겠습니까? 더욱이 이른바 직급의 서열이란 것은 조각구름이 허공에 떴다가 바람을 지나가는 것과 같습니다. 나는 처음부터 그러한 생각이 없는데도, 그대는 나에게 있었다고 생각합니까? 그대를 위해서도 취할 바가 이니라고 생각합니다.”라고 하여, 이문량의 행위에 대해 제동을 걸었다. 이문량은 아무리 친근한 친구사이라도 국가차원에서 존경받을 만한 지위에 인물은 그냥 평교의 차원에만 대우한다는 것이 다소 불편했던 것 같았다. 이렇듯 이문량이 공적인 위상을 중시하는 경우라면, 퇴계는 사적인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경우라 하겠다. 이를 통해 우리는 두 사람의 시비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예의, 즉 상대를 배려하는 인간적 자세를 소중히 여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벽오 이문량의 나이 74세(1571) 때 평생 지기이자 벗인 퇴계 이황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만사와 제문을 지어 애도하였다.
남들은 모두 만나기를 청하지만 人皆求識面
나는 다행히 지기가 되었네 我幸爲知己
남들은 모두 이웃이 되고 싶어 하지만 人皆願卜隣
나는 다행히 어진 마을에 살고 있네 我幸居仁里
젊은 나이부터 서로 어울렸으니 相隨自妙齡
속마음까지 훤히 비추어 본다네 肝膽兩相視
좋은 날에 아름다운 경치 찾아서 良辰與美景
숲 동산에서 진락을 다 누렸지 林園窮樂事
내 인생이 헛되이 않았음은 此生不虛過
그대의 넉넉한 은택 덕분이네 餘波之所被
근래엔 각기 노년에 들어서서 近來各衰暮
그리워하면서 만남은 더디었지 相思懶相値
인생은 본래 덧없는 것 人生本草草
어찌 갑자기 여기에 이르렀나 豈意遽至此
문성이 홀연히 정기를 감추니 奎璧忽淪精
남천에 맑은 기운 걷히었네 南天收淑氣
문도들은 모두 나라의 선비들 門徒擧國士
물결처럼 끝없이 달려오네 奔波來不己
스스로 하찮은 몸이 부끄러워서 自慚九牛毛
문인들 사이에 끼지 못하네 未堪齒諸子
하룻밤 사이에 유명을 달리하니 幽明隔一夜
외로이 평생의 뜻을 저버렸네 孤負平生志
羊曇의 저 끝없는 눈물을 羊曇無限淚
애오라지 다시 한두 줄 적어보네 聊復寫一二
이별의 시간 길다고 하지 마소 莫謂別多時
내 나이가 벌써 일흔넷이라오 吾年七十四
퇴계 이황의 죽음을 애도하는 수많은 제자들의 만사 중에 벽오 이문량의 만사가 가장 대표적인 만사라고 일컬어진다. 흔히 만사와 제문은 죽은 자에 대한 추모의 글이기 때문에 한결같이 퇴계의 명성에 걸맞게 최고의 미사여구가 동원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성원 농암 종손께서 올해 퇴계선생 서세 450주년을 맞아 학술강연 자리에서 벽오 이문량의 만사에 대한 두 가지 특징을 들었다. 하나는 담백함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을 ‘隣侍’라고 표현한 점을 들었다. 특히 만사 가운데 “내 인생이 헛되이 않았음은, 그대의 넉넉한 은택 덕분이네.” 또한 “이별의 시간 길다고 하지 마소, 내 나이가 벌써 일흔넷이라오.”라고 표현한 대목에 이르러서는 친구에 대한 별리의 언어로는 특별한 감동을 준다고 하였다.
벽오 이문량은 퇴계 이황을 만난 것을 생애 최대의 행운으로 여겼다. 두 사람은 가까운 이웃에 살면서 자주 만나 서로의 생각을 주고받기도 하고, 아름다운 산수를 노닐며 ‘참다운 즐거움’을 찾기도 하였다. 심지어 내 인생이 여기까지 오면서 헛되지 않음은 퇴계의 은택 덕분이라고 고백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두 사람이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퇴계는 외롭지 않다. 자신이 길러놓은 기라성 같은 제자들은 모두 나라를 대표할 수 있는 선비들이고, 이들이 가시는 선생 곁을 묵묵히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 자신은 그에 비하면 매우 보잘 것 없어 제자반열에 끼지도 못한다고 했다. 하룻밤 사이 유명을 달리했기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죽은 자에 대해 몇 자 적어 눈물로 이별을 고하는 것밖에 없다. 지인이여, 나보다 먼저 간다고 서운해 하지 마시라. 나도 곧 당신의 뒤를 따라가리라. 이문량의 만사는 이렇게 대미를 장식하였다. 이 얼마나 평범하면서도 유장한 여운을 남긴 말이 아닌가?
3. 맺음말
벽오집에는 이문량의 학문지향을 논할 수 있는 자료가 거의 실려있지 않고, 그의 삶의 실천적 면모와 교유관계에 대한 작품들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래서 이 논고에서는 벽오 이문량의 가학연원과 가풍적 특징을 먼저 살펴본 뒤, 실제 벽오 이문량의 삶의 전반적인 면모를 개괄적으로 살펴보았다. 그런 과정에서 예안 영천이씨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가풍적 특징으로 한 가지 지적할 것은 孝養의 실천이었다.
영천이씨 집안에 있어서 ‘孝’는 집안 개개인의 일관된 삶의 지향이었고, 가문에 대대로 지켜져야 하는 규범[世守之規範]이며, ‘애일당’, ‘긍구당’ 등은 바로 그 ‘효’를 실천하는 공간이었다. 아울러 ‘화산양로연’과 ‘애일당구로회’, 그리고 뒤를 이은 ‘속구로회’ 등은 경로사상의 실천적 면모를 확인시켜 주었던 것이다.
『주역』 「坤卦․文言」에 “선을 쌓은 집안에는 반드시 남은 경사가 있다.[積善之家 必有餘慶]”라고 했는데, 이는 집안에서 쌓은 업적이 착하면 복록과 경사가 자손에게 미친다는 의미이다. 또 『서경』 「洪範九疇」 가운데 아홉 번째 五福은 “첫째가 장수함[壽]이고, 둘째가 부유함[富]이고, 셋째가 강녕함[康寧]이고, 넷째가 덕을 좋아함[攸好德]이고, 다섯째가 정명으로 마침[考終命]이다”라고 했는데, 사람이 장수와 ‘고종명’을 하려면 평상시 善業을 쌓아야만 가능한 것이다. 퇴계 이황이 농암 이현보의 행장을 지으면서 그의 마지막 순간을 이렇게 적고 있다.
“나의 나이가 90에 이르렀고, 나라의 두터운 은택을 받았으며, 너희들이 다 있으니, 유감스러운 일은 하나도 없다. 죽음도 영화로우니, 너희들은 이같이 하지 말라.”
농암은 임종 무렵 여러 아들이 둘러 앉아 모시고 애통하는 모습을 본 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마지막 유언을 남겼던 것이다. 한 인간의 만족스러운 삶과 아름다운 마침을 여기서 보게 된다.
요컨대, ‘효’와 ‘積善’은 분리할 수 없는 관계이고, 이를 담보할 때만이 ‘고종명’과 장수를 이룰 수 있다. 이는 영천이씨 가풍적 특징이며, 나아가 16세기 우리 지역의 풍속사의 한 특출한 면모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간재집(이덕홍)
농암집(이현보)
벽오집(이문량)
퇴계집(이 황)
향산집(이만도)
권진호, 안동의 유교현판(한국국학진흥원, 민속원, 2020)
권진호, 학문과 과학에 뛰어난 계문의 고제, 안동 간재 이덕홍 종가(경북대 영남문화연구원, 경북대출판부, 2018)
김서령, 지금도 ｢어부가｣가 귓전에 들려오는 듯, 안동 농암 이현보 종가(경북대 영남문화연구원, 예문서원, 2011)
이종호, ｢벽오 이문량의 생애와 교유｣, 퇴계학파의 사람들-16세기 인물들을 중심으로(안동대 퇴계학연구소, 예문서원, 2017)
｢벽오 이문량의 삶과 생각｣에 대한 토론문
황만기(안동대학교 연구교수)
권진호선생님 발표 잘 들었습니다. 선생님은 16세기 예안 지역의 영천이씨 문중에 왜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는지와 정착한 이후 재지사족으로서의 위치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많은 공부가 되었습니다. 선생님께서도 언급되었듯이 영천이씨 부내파의 대표적 인물로는 단연 농암 이현보입니다. 농암의 탄생은 영천이씨 부내파가 향촌 지역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높여주었습니다. 또 그의 어부가에서도 뚜렷이 비치듯이 농암의 강호풍류적 삶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습니다. 무엇보다 46세 때 애일당을 지어 효를 실천하고자 한 의지를 드러내었고, 벼슬살이도 고향과 가까운 곳을 택하여 근무하였습니다. 그리고 효를 실천하고자 노래자처럼 70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부친에게 기쁨을 선사하기 위해 색동옷을 입고 어린아이처럼 춤춘 사례는 너무나도 유명합니다. 발표문에서도 언급했듯이 이런 효행 사상이 아들 벽오에게 그대로 전수되어 나타나고 있습니다. 벽오는 농암이 세상을 등지기 전까지 출사에 전혀 관심이 없고 오로지 부친봉양에만 전심을 다하였습니다. 그래서 논문에서도 효가 가지는 의미에 대해서 특기하였습니다.
논문을 전체적으로 요약하자면 영천이씨의 연원, 퇴계와의 관계, 효양에 대한 실천으로 정리될 수 있을 듯합니다. 영천이씨 부내파에 대해서 풍문으로만 들은 저로서 선생님의 옥고에 논평할 주제가 못됩니다. 다만 토론자로서의 책임을 면하기 위해 논문을 읽으면서 의문이 가는 두 가지만 질문드리겠습니다.
1. 벽오가 평릉찰방으로 부임한 것은 관동지역을 유람하고 싶은 평소의 생각을 실천한 것으로 기술하고 있으나, 기실 벽오의 마음 한쪽에는 벼슬에 대한 갈망이 있었던 것은 아닌지요? 벼슬에 대한 생각이 있었으나 효를 실천하는 부친을 지켜보면서 생전에는 속내를 드러내지 못하다가 부친 사후에 이를 실천한 것은 아닐는지요? 이 부분에 대한 선생님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2. 현존하는 벽오집은 분량면에서 지극히 적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이 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특히 평릉찰방으로 재직하면서 지은 33수의 시가 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시에 대한 특징이 부각 되어야 하는데, 시간적 여유가 없어서 시에 대한 언급을 하지 못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비록 논고로는 표현되지 못했으나 벽오의 시적 특징이 무엇인지 간단하게 언급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짬질나게 옥고를 구성해서 발표해주신 선생님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