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개울가에 비로소 거처를 정했으니,
- 상계-
1) 양평과 두향
도계정사를 나와 아래로 내려오면 ‘양평’이라는 지역이 나온다. 길가에 ‘춘당 묘소’ 표석이 있다. 춘당春塘은 송재의 외손자며 퇴계 제자인 오수영吳守盈을 말한다. 금보琴輔, 이숙량李叔樑과 더불어 ‘선성 3필’로 일컬어진 인물이었다. 아버지 진사 오언의가 송재 사위가 되어 이곳에 살게 되었다. 당시에는 그 집의 존재가 뚜렷했지만 지금 이곳에는 후손이 살지 않아 잊혀진 지 오래다. 지난해 조각을 하는 후손 한 분이 참배하러 왔는데, 미처 묘소를 찾지 못해 그냥 떠난 일도 있었다.
그런데 양평을 떠나려니 자꾸만 한 여인의 환영이 차창 뒤에 나타난다. 여인은 사랑하는 연인의 마지막을 보고 싶어 했지만 사람들은 보지 못하도록 했다. 그것은 숙명이었다. 여인은 양평의 길모퉁이에서 한없이 흐느끼며 사랑하는 사람을 먼발치서 영결했다.
그 여인의 이름은 ‘두향杜香’이다. 퇴계에게 여인이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긴 하지만 분명 있었다. 퇴계는 단양군수 시절 관기 두향과 인연을 맺었다. 두향은 퇴계가 떠난 이후에도 잊지 못했고, 운명 소식에 한달음에 달려왔다. 두향이 ‘한달음에 달려온 사실’은 퇴계 후손들의 오랜 구전이었다. 지금 열화재 부근까지 왔고 모두 보았다고 했다. 그러나 양평에서 더는 나아갈 수 없었다. 갈 수 있었음은 생전의 비밀스러운 일이었다. 어쩌면 생전에도 가까이 갈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퇴계 장례식은 제문과 만장으로 뒤덮였다. 오열이 강물처럼 흘렀다. 그렇지만 여인은 존재하지 않아야 했다. 여인은 울며 돌아가서 빈소를 차리고 추모했다. 그리고 3년 상이 끝나는 날 단양의 못에 가서 몸을 던졌다. 시신은 지나는 스님이 발견해 묻었다. 이후 오랜 세월 스님들이 묘를 살폈다.
세월은 흘러 왕조마저 바뀌었다. 후손들은 이 안타까운 할아버지의 로맨스를 이제는 숨기지 말자고 했다. 그래서 두 분 만남을 숨김없이 밝히고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두향의 묘는 최근 단양댐 건설로 이장했다. 그때 비석을 세웠다. ‘두향지묘杜香之墓’라 했는데, 이동은 퇴계 종손이 썼다. 두향의 존재가 인정되기까지는 430여 년이란 세월이 필요했다.
지금은 퇴계 묘소 유사가 가을에 두향 묘소에 가서 제사를 지내는데, 이는 최근의 일이다. 단양에서는 최근 해마다 ‘두향제’라 하는 큰 축제를 연다. 그녀로서는 분에 넘치는 대우를 한꺼번에 받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사진: 두향이의 무덤(단양 제비봉 기슭 소재)
해설: 퇴계가 돌아가셨을 때 ‘두향이 양평까지 왔다’는 후손들의 오랜 구전이다. 지금 ‘열화재’라는 집이 있는 곳까지 왔다고 한다. 기록도 없고 말하기도 어려웠지만 퇴계 후손들은 대대로 두향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이런 구전을 운산雲山 이휘재李彙載의『운산집』에 “퇴계 10대 종손 이휘영이 무덤을 찾았다”고 했는데, 아마 유일한 기록이 아닐까 한다.
2) 토계의 개울가
두향의 환영이 끝날 즈음 한 모퉁이를 돌아서니 무인지경에 뜻밖에 일군의 고가古家가 나타난다. 암자나 사찰로 어울리는 형국이라 할까? 도저히 일반 주거라고 생각하기 어렵다. 그런데 이 집이 바로 퇴계의 집이다. 퇴계가 살았고, 후손들이 긴 세월 살아왔다. 사람들은 이 집을 ‘퇴계 종택’이라 하고, 이 지역을 ‘상계上溪’ 혹은 ‘웃토깨[上兎溪]’라고 한다. 전체 지역 명칭은 ‘토계土溪(혹은 兎溪)’이나 이곳은 상류에 위치하여 그렇게 불렀다.
그렇지만 이런 명칭은 후대에 붙인 것이고, 퇴계 당시는 ‘계상溪上’이라 했다. 말하자면 ‘개울가’라는 뜻이다. 개울가가 그대로 지명이 된 것이었다. 이는 퇴계의 시 “개울가에 비로소 거처를 정했으니[溪上始定居]”에서 유래했다. 이런 시로 인해 친지들도 곧 “계상의 혼사가 어떠합니까溪上婚事何如”식으로 썼다.
그러니까 노송정 북쪽의 용두산에서 내려오는 온계의 개울은 지금 온혜 정류소 앞에서 만리산에서 내려오는 청계와 합류하여 도계를 지나 여기에 오면 토계가 된다. 토계는 다시 상계와 하계로 나누어지고, 하계는 다시 계남溪南이라는 지역과 구분된다. 토계는 지명을 고쳐 호로 삼은 퇴계에 의해 ‘퇴계’라고도 했다. 도산서원에서 동북쪽 산길을 넘으면 바로 상계이고 퇴계다. 특징 없는 평범한 개울에 이처럼 많은 지명과 의미와 역사가 존재한다는 것은 여간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퇴계가 토계에 터를 잡은 해는 1546년, 46세 때였다. 처음에는 하계의 ‘동암東巖’이라 명명한 바위 옆에 집을 짓고 ‘양진암養眞菴’이라 했다. 이때 비로소 교육을 생각했다. 그렇지만 당시 퇴계 모습은 주민들에게 무위도식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래서 이런 시가 남아 있다.
늙은이 웃으며 나의 일 묻기에 山翁笑問溪翁事
밭갈이 대신에 혀로써 갈려 하오. 只要躬耕代舌耕
‘혀의 밭갈이’는 교육이다. 가르치고자 하는 의욕이 넘쳐 있다. 퇴계는 이곳에 오기 전 온혜 노송정 맞은편 산기슭에 살았다. 그 산 이름이 영지산이어서 집은 ‘영지와실靈芝蝸室’이라 하고 자신은 ‘영지산인靈芝山人’이라 했다. 그러나 이 미호美號를 오래 사용할 수 없었다. 영지산 남록南麓에는 향리의 대선배 농암이 ‘영지정사’를 지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양보했다.
그런데 토계로 온 퇴계는 초기 집터 찾기에 고심했다. 양진암을 지은 다음해 인근 자하고紫霞皐로 이사를 했고, 그해 다시 대골[竹洞]로 옮겼다. 2년 뒤, 마지막으로 결심한 곳이 상계였다. 이 무렵 마음은 이미 서울을 떠나 외직을 자청하여 단양군수, 풍기군수를 역임했다. 48, 49세의 일이었다. 외직은 제성帝城과 강호의 거멀못이었다.
퇴계의 49세는 정말 뜻 깊은 해였다. 풍기군수를 역임하던 이 해, 직속상관인 경상감사에게 간곡하게 세 번이나 사직서를 제출했다. 그때마다 수리가 되지 않자 그해 가을 짐을 싸서 토계로 와 버렸다. 그 결과 무단이탈 죄에 걸러 직책이 강등되기도 했다. 다음해 50세, 퇴계는 드디어 토계의 개울가에 집을 짓고 ‘한서암’이라 했다. 시도 한 수 지었다. 제2의 인생 선언이며 다짐이었다. 악과 무도가 난무하는 정치 세계에서 물러나[退] 선과 진리가 온존한 강호 자연[溪]으로 돌아오는 일대 전환이었다. <퇴거계상退居溪上>이란 시에는 이때의 심정이 잘 나타나 있다.
분수를 알고 벼슬에서 물러나 身退安愚兮
진리를 알고자 하나 이미 늙는구나. 學退憂暮境
개울가에 비로소 거처를 정했으니 溪上始定居
흐르는 물을 보며 날마다 성찰하리. 臨流日有省
토계의 개울가는 바로 ‘자기 성찰의 적지’였다. 그래서 호도 ‘개울가로 물러남’이라는 뜻의 퇴계로 지었다. 퇴계, 졸 졸 졸. 퇴계는 바로 고요와 적막의 공간이었다. 퇴계는 그런 공간을 사랑했다. 율곡이 인생을 마감한 49세에 퇴계의 인생은 시작되었다. 늦었다고 한탄했지만 사실은 적기였다. 퇴계는 이때 어느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 “기뻐서 끼니조차 잊었다”고 했다. 《퇴계연보》 광뢰본 기록이다.
세상 길 잘못 들어 세속에 골몰하기를 수십 년, 세월만 홀연히 보낸 듯합니다. 돌아보며 망연히 탄식할 뿐입니다. 다행히 이제 본래 자리로 돌아와 몸을 수습하고 옛 책을 찾아 읽으니 마음과 뜻이 합쳐진 듯합니다. 이른바 옛사람들이 ‘기뻐서 끼니조차 잊었다’고 한 말은 빈말이 아니었습니다. 개울가에 몇 칸 집을 짓고 이대로 죽을 때까지 지낼 것을 다짐하며, 고요히 사색하고 하늘의 신령한 힘을 입어 진리의 큰 빛을 틈새로나마 볼 수 있다면 못난 선비에게는 더없는 행복이 아닐 수 없겠습니다. 다시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50이라는 나이, 50은 인생의 황금기다. 나는 적어도 나이 50은 되어야 인생을 안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그 정도의 나이는 되어야 길이 보인다고 믿는다. 부정적으로만 보이던 과거가 비로소 따뜻한 연민의 눈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젊은 날의 온갖 정열과 이상과 분노와 좌절이 저만치로 밀려나서 마치 남의 일처럼 대수롭지 않게 보인다. 삶의 자락 한 끝이 봄의 새싹처럼 그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퇴계에게도 그러했다. 퇴계는 50세에 이르러 참다운 인생의 길을 깨닫고 그 길로 걸어갔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았다. “신령한 힘과 진리의 큰 빛을 보기를 희망한다”고 했지만 사실 이때 이미 보았다. ‘진리의 큰 빛’은 바로 퇴계의 자득自得이었다. 그 길을 쉬운 말로 ‘예던길’이라 했다. 50세를 전후한 나이가 되면 ‘지천명知天命’은 몰라도 ‘지심명知心命’은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퇴계는 그 길을 가르쳐 준 한 명의 모델로 전연 손색이 없다.
3) 가거지지可居之地
그럼에도 불구하고 퇴계 종택이 이런 깊은 산 무인지경에 외롭게 자리하고 있음은 항상 의문으로 남아 있었다. 아니 수수께끼였다. 대개 종택은 집성마을, 그것도 중심에 자리한다. 종택의 입지조건을 분석한 서라벌대학 최영기 교수에 의하면 퇴계 종택은 종택의 일반적 입지 조건과는 전연 부합하지 않는다. 하회마을의 ‘충효당’, 양동마을의 ‘무첨당’,‘서백당’과 비교해 보면 더욱 그러하다. 안동 지방 어느 종택도 이런 곳에 위치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퇴계는 왜 이런 곳에 자리를 잡았을까? 나의 오랜 이런 의문은 《도산전서》를 통해 어렴풋이 풀렸다. 그 글은 다음과 같다.
군자의 학문은 ‘위기爲己’일 뿐이다. 위기란 무엇인가? 하는 바 없이도 저절로 이루어지는 경지다. 마치 심산무림 속의 한 포기 난초처럼 종일 향기를 뿜으면서도 자신은 그 향기를 알지 못하는 이치와 같다. 이런 것이 바로 군자의 위기지의爲己之義에 부합하니 깊이 체득할 일이다.
君子之學, 爲己而已, 所謂爲己者, 無所爲而然也. 如深山茂林之中, 有一蘭草, 終日薰香, 而不自知其爲香, 正合於君子爲己之義, 宜深體之.
“심산무림 속의 한 포기 난초”와 같은 존재의 구도! 이것이 퇴계와 퇴계 종택의 입지 비밀의 열쇠다. 심산무림이란 바로 상계를 말함이요, 한 포기 난초란 곧 퇴계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리라. 퇴계는 정녕 쉽게 찾아올 수 없고 발견하기 어려운 깊은 산중의 한 포기 난초와도 같은 삶을 살아가고 싶어 했다. 도산서당은 더욱 그러했다. 도산서당이 위치한 도산은 그야말로 무인지경의 깊은 산중에 자리하고 있다. 지금은 도산서원과 부속 건물들이 들어서서 마치 종합 캠퍼스처럼 변했고 퇴계는 훌륭한 시설을 갖춘 종합대학의 총장처럼 여겨지지만, 도산서당이 건립될 당시의 초기 도산은 그야말로 ‘심산무림의 한 가운데’였다. 그런 고요 속에서 수도승처럼 진리 탐구와 자기 수련에 매진한 사람이 퇴계였다.
한서암을 지은 다음 쓴 시는 이런 분위기를 그대로 보여 준다.
인일인데도 아무도 내 집 찾는 사람 없어 人日無人叩我廬
문을 닫고 옛 책 읽는다. 閉門且讀古人書
병든 모습 어찌 세상에 적합할까 形豈合嬰塵累
편협한 마음 고요를 사랑하네. 褊形從來愛靜居
노을 지는 숲속 참새 지저귀고 雀躁林間煙漠漠
해지는 울 밑 소가 졸고 있네. 牛眠籬下日舒舒
내 뜻 감히 말할 수도 없는 것 敢論志業非愚分
미혹을 물리치지 못할까 근심되네. 離索長憂或未紶
퇴계가 심산무림 한 가운데에 자리잡은 것은 바로 ‘위기지학爲己之學’을 실현하기 위함이었다. 위기지학이란 무엇인가? 말 그대로 ‘자신을 위하는 학문’이다. 바로 ‘경’ 실천의 학문이다. 경은 유가의 선禪이다. 경 실천을 ‘거경居敬’ 혹은 ‘지경持敬’이라 하는데 참선과 흡사하다. 거경과 참선의 궁극은 무엇인가? 모두 인생의 길을 찾는 수양 방법이다. 그 첩경은 ‘고요’였다.
고요가 온존한 지역! 그렇지만 그 고요는 산중 절집 같은 곳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인가가 모인 마을은 더욱 아니었다. 동리도 산중도 아닌 그 완충의 심산무림 속이 위기지학을 할 수 있는 적지였다. 강이 멀리 있지 않고, 곁에 개울이 흐르며, 주위 산이 조화롭게 감싸고 있는 곳. 요컨대 산수의 조화는 가거지지의 절대 조건이었다. 상계와 도산은 최적지였다. 퇴계 종택과 도산서원이 심산무림 가운데 고독하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사진: 상계종택 일대의 모습
해설: 종택 앞으로 ‘토계土溪’의 개울이 흐르고 있다.
4) 편지교육
상계나 도산에서 퇴계의 일상은 독서, 저술, 교육으로 요약된다. 이 가운데 저술이 압도적 비중을 차지한다. 저술은 다시 시 쓰기와 편지 쓰기로 구분된다. 시는 2,270여 수, 편지는 3,300여 편 남아 있다. 시는 고요 속에서 내면을 가꾸는 위기지학의 요체였고, 편지는 외부 세계와의 단절을 극복하는 수단이었다. 특히 편지를 주목할 만한데, 퇴계의 교육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퇴계의 편지 쓰기는 생애 후반기로 가면 더욱 왕성하다. 권오봉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가령 그의 나이 65세에는 392편, 66세에는 329편을 썼다. 그러니까 60세 이후에는 평균 3일에 두 편씩 쓴 셈이다. 거의 초인적이다. 아들, 손자, 조카 등 친척들에게도 1,300여 편의 편지를 썼다. 맏아들 이준에게는 613편, 맏손자 이안도에게는 122편의 편지를 썼다. 퇴계가 편지를 보낸 주요 인물과 편지 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이문량146 이중량48
기대승95 황준량88
이정138 조목171
김취려86 우성전40
구봉령61 이덕홍58
금란수53 권호문30
김부필47 김부륜58
김성일30 류성룡5
류운룡36 배삼익19
정유일176 정구6
정탁16 이이8
류중엄35
한 통의 편지는 사람의 영혼을 흔들 수 있다. 심산 무림 가운데에 은거한 당대의 학자 퇴계에게서 온 겸허하고 가식 없고 정성스런 편지는 무한한 존경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니까 퇴계의 편지는 충고해주기를 열망하는 친지, 제자들에 대한 충고 없는 충고이기도 했다. 사실 퇴계는 끊임없이 충고하고 있다. 퇴계처럼 많은 충고를 한 분도 없다. 다만 그 충고가 너무 따뜻하고 다정다감하며, 또한 편지라는 매체를 통해 이루어졌으므로 당사자에게는 거의 충고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월천 조목에게 보낸 편지는 아주 예외라 할 수 있다. 아래 ‘퇴계식의 충고’가 담긴 편지 한 편을 다시 소개한다.
1569년 퇴계 나이 69세, 19세의 이함형李咸亨은 멀리 순천에서 찾아온 마지막 제자였고, 부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모두들 말했지만 퇴계는 모른 척했다. 이함형이 떠나는 날 편지 한 통을 주었는데, 봉투에 이렇게 적혀 있었다. ‘路次密開看.’ ‘도중에 몰래 뜯어보고 버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몰래 뜯어보니 놀랍게도 자기 부부에 대한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스승과 제자 사이, 직접 말하고 충고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 같은데 퇴계는 그렇게 하지 않고 있다. 상처받지 않도록 세심하게 배려하고 있다. 정성과 감동을 담은 간접적 지도방법이다. 부인을 구박하던 이함형이 다시 금슬 좋은 부부가 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편지내용의 일부분은 이러하다.
들으니 그대 부부가 화합하지 못한다고 하는데 무슨 이유로 그런 불행이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하네..여러 경우가 있는데, 대체로 보면 (여자의) 성품이 좋지 못해 스스로 소박을 자초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은 남편이 항상 (자신을) 반성하고 잘 보살펴주면 부부의 도리를 잃고 가정이 파괴되어 더할 수 없는 각박한 인간으로 전락되는 지경에는 이르지 않은 법이네. 여자의 성품이 고약하여 고치기 어려운 경우에도 그 정도가 심하지 아니하면 상황에 따라 잘 처리하여 끝내 서로 헤어지는 지경에까지는 이르지 않게 하는 것이 옳을 것 같네.
나의 경우를 예로 들어 말해주겠네. 나는 두 번 장가를 갔으나 한 결 같이 불행했네. 그러나 나는 한 번도 박대하려는 마음을 가져 본 적이 없으며, 그저 애써 잘 지내려고 노력하며 살아온 것이 십 수 년, 그 사이 더러 마음이 흔들리고 번민과 고뇌로 견디기 어려운 때도 없지는 않았네. 그러나 그렇다고 어찌 인정을 돌릴 수 있겠는가. 어찌 내 마음대로 인간의 도리를 소홀히 하여 홀로 계시는 어머니로 하여금 근심하도록 하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내 고치는 바가 없다면 학문을 해서 무엇 하며, 실천한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으랴!
퇴계는 정말 ‘성의를 다한 감동의 편지글’을 썼다. 위 편지가 그렇다. 그 누구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았을 자신의 부부생활에 대해 고백하고 있다. 퇴계는 상처喪妻하고 재혼했는데, 두 번째 부인은 말하자면 ‘좀 모자라는 여인’이어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주었다. 16년 세월, 자녀도 두지 못한 이 여인은 옷갓 실수를 하여 퇴계의 체통을 손상시켰다. ‘체통을 손상시킨 이야기’는 지금도 가끔 화제가 되곤 할 정도이다. 그러나 퇴계는 그 누구에게도 불평 한마디 않았다. 그런데 이제, 자신의 영원히 감추고 싶었을 비밀을, 그것도 50여세의 나이 차이가 나는 어린 제자에게 고백하고 있다. 당대 최고의 인품을 지낸 학자의 내밀한 고백이 담긴 이런 편지를 받고 감동받지 않을 제자가 어디 있겠는가! 퇴계의 편지는 감동교육 그 자체였다.
뿐만 아니다. 퇴계의 편지는 내용적인 면에도 그러하지만 형식적인 측면에도 두 가지 정도 눈여겨 볼 요소가 있다. 하나는 ‘글 쓰는 기법’이다. 가령 위에 소개한 편지행간에 “그렇지만 대체로 보면 (여자의) 성품이 좋지 못해 고치기 어려운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은 남편이 항상 반성하고 잘 보살펴주면 부부의 도리를 잃고 가정이 파괴되어 더할 수 없는 각박한 인간으로 전락되는 지경에는 이르지 않은 법이네”와, “여자의 성품이 고약하여 고치기 어려운 경우에도 그 정도가 심하지 아니하면 상황에 따라 잘 처리하여 끝내 서로 헤어지는 지경에까지는 이르지 않을 것이네” 등의 표현이 그렇다. 또한“나의 경우를 예로 들어 말해주겠네. 나는 두 번 장가를 갔으나”의 원문에는 놀랍게도 이름 황滉 자를 두 번이나 거듭해서 쓰고 있다. 그 원문은 이렇다. 滉所嘗經者告之 滉曾再聚.
이처럼 퇴계는 완곡하게 쓴다. 이는 충고의 충격을 흡수하는 효과가 있다. 충고의 예봉을 무디게 하여 읽는 자의 아픔을 덜어준다. 한없는 겸손의 말, 즉 ‘겸사謙辭’를 사용하는 기법이다. 물론 퇴계의 편지는 ‘한문漢文’으로 되어있어 일반사람들은 모른다. 보아도 사실 알 수 없다. 그렇지만 한문 편지의 행간에 이런 측면을 담고 있다. 여기 아래에 이 부문의 한문 원문의 일부를 소개한다.
似聞公有琴瑟不調之歎 不知因何而有此不幸 竊觀世上有此患者不少 有其婦性惡難化者 有嫫醜不慧者 有其夫狂縱無行者 有好惡乖常者 其變多端 不可勝擧 然以大義言之 其中除性惡難化者 實自取見疎之罪外 其餘皆在夫反躬自厚 黽勉善處以不失夫婦之道 則大倫不至於斁毁 而身不陷於無所不薄之地 其所謂性惡難化者 若非大段悖逆得罪名敎者 亦當隨宜處之 不使遽至於離絶 可也
…滉所嘗經者告之 滉曾再聚 而一値不幸之甚 然而於此處 心不敢自薄 黽勉善處者殆數十年 其間極有心煩慮亂 不堪擾悶者 然豈可循情 而慢大倫 以貽偏親之憂乎 …公宜反覆深思 而有所懲改焉 於此終無改圖 何以爲學問 何可爲踐履也
퇴계 편지의 또 다른 특징은 ‘휘날려 쓰지 않는다’는 점이다. 제자 김성일의 목격담에 보면, “선생님은 젊을 때부터 반드시 해서楷書를 썼고, 과문科文이나 잡서雜書 등을 베낄 때도 날려 쓰는 일이 없었다. 남에게 써 달라고 한 적도 없는데, 이는 대개 남들의 ‘날려 쓰는 글씨[亂書]’를 매우 싫어했기 때문이라”했다. 이는 사실인 것 같다. 지금 남아 있는 퇴계의 글씨들을 보면 한 결 같이 단아하다. 글씨는 인품을 나타낸다고 했던가. 인품 그대로다. 많은 글에는 ‘황滉’이라는 이름을 썼고 사인까지 또렷하게 했다. 그래서 퇴계의 편지는 한 결 같이 하나의 작품으로 존재한다. 퇴계의 편지가 지금 골동품 시장에서 최소한 수백만 원 이상을 호가함은 이런 작품적인 요소도 작용하지 않는다 할 수 없다.
여담이지만, 퇴계의 편지를 보고 있노라면 요즈음 서도書道를 한다고 하는 사람들의 글씨 쓰는 일이 조금 우습게 보이기도 한다. 무엇이 문제인가? 해서楷書는 쓰지 않고 전서篆書, 곧 초서草書부터 쓴다. 글씨는 해서를 충분히 써야 한다. 그렇게 익숙해진 이후에 전서, 초서를 배워야 한다. 사실 과거의 글씨교육에는 해서 이외는 별로 가르치지도 않았다. ‘바른 글씨의 길-書道’가 이렇게 해야 될 일이지만 지금 서도 환경은 전연 그렇지 않다고 한다. 더욱 놀라운 일은 이렇게 출품된 전서, 초서들이 버젓이 대상, 장원을 한다고 하니, 서도가 아니라 서예書藝가 판을 치고 있는 모양이다. “틀린 글씨를 쓴 사람의 글씨가 대상”이라는 신문기사는 이런 연유에 기인하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글씨 쓰는 일은 인품의 수양이지 기교가 아니다. 이런 관점에서 퇴계의 글씨는 또한 모범 중에 모범이 된다 하겠다.
5) 이선기악理善氣惡
뿐만 아니다. 퇴계는 자신의 사상과 시국에 대한 대응도 이 편지를 적극 활용하고 있다. 편지를 주고받는 것은 그 자체가 교육과 학문 교류를 위한 핵심 수단이었다. 한국 성리학의 꽃으로 불리는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과의 7년여에 걸친 이기 논쟁은 대표적인 편지 교육의 예다.
논쟁의 초점은 항상 퇴계가 “이와 기는 나누어 소속시켜야 한다”는 이른바 ‘이기분속理氣分屬’의 주장에 대해, 기대승은 “이와 기를 이물二物로 보며 분속分屬해서 설명함은 저는 결코 이해할 수 없습니다”였다. 한문 원문은 ‘兼理氣有善惡 分屬未安’인데 해석하면 “이와 기 모두 선과 악이 있는 까닭에 분속은 (저가 정말 수용하기) 미안한 논리입니다”이다. “이와 기는 일물一物이기 때문에 나누어 분속시킴이 틀렸다”는 것이 기대승의 굽힐 수 없는 지론이다.
그렇다면 퇴계는 왜 그토록 오랜 세월 이를 수용하지 않았을까? 퇴계의 편지 속에 녹아 있는 ‘이선기악理善氣惡’, ‘이귀기천理貴氣賤’, ‘이존기비理尊氣卑’ 등의 유사한 표현은 바로 대립된 두 집단의 투쟁적 국면의 성격을 반영한다. 그래서 “이와 기는 공존하면서도 투쟁하는 관계인 것理氣之相須 或相害”이다. 이, 기의 개념을 선善, 귀貴, 존尊한 것과 악惡, 천賤, 비卑한 것으로 철저히 분속하여 대비한 것은 이, 기의 상해相害 속성을 나타내면서, 한편으로는 사림집단과 훈구집단의 처절한 대결구도와 연계된다. 당시의 상황에서 퇴계의 논리는 이러한 정국 동향과 연계하지 않고는 어떠한 설명도 합리적인 설득력을 지니기 어렵다. 고봉은 이런 연유로 끝내 퇴계를 이해하지 못했으며, 율곡 이이 역시 퇴계와 같을 수는 더욱 없었다.
요컨대 퇴계의 이기분속론理氣分屬論은 ‘사화士禍를 극복하는 논리’이며, 율곡의 이기묘합론理氣妙合論은 ‘당쟁黨爭을 극복하는 논리’였다. 전자는 대결의 논리이며, 후자는 처방의 이론이다. 퇴계는 존재의 원리에서 이기분속을 주장하며 가치의 원리에서 이선기악의 입장을 취했고, 율곡은 존재의 원리와 가치의 원리가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묘합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퇴계가 탄압받는 야당의 중핵 입장에서 논리를 펴 나갔다면, 율곡은 어느덧 집권여당의 중진입장에서 정국을 이끌어가야 했기 때문이다. 율곡과 퇴계의 이론이 같을 수 없음은 너무나 자명한 일이었다.
퇴계는 편지를 임금에게도 썼다. ‘사직소辭職疏’는 임금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무엇보다 임금을 우군으로 삼아야 했다. 79회의 사직소는 암울한 정치현장을 개선하라는 독촉장인 셈이며, 임금 역시 그 책임이 있음을 묻고 있는 글이다. 전일 임금의 한 마음에 모든 것을 걸고 혁신을 주도하다가 좌절한 조광조의 사례를 볼 때, 퇴계의 온건하면서도 조용한 진언은 매우 현실적인 대응방식이다.
사직소에는 ‘경敬’의 이론과 실천과 구현 방법이 있었다. 이론은 ‘이선기악’이고, 실천은 ‘이기분속’이고, 구현은 ‘이선理善의 구현’이었다. 그 궁극은 이理의 집단이며 선善의 집단인 사림의 집권이다. 훈구집단의 궤멸이 목표였다. 왜냐하면 사화의 파행정국을 반복하는 훈구집단은 ‘악의 집단’으로 우리 조국을 야만국으로 만드는 역사상 소멸되어야할 한시적 집단이기 때문이다. 퇴계가 어린 선조임금과 독대하여 한 최후의 말이 ‘사림士林을 보호하소서’였음은 이를 증언하는 것이기도 하다.
퇴계에게 ‘도학道學’은 문명국의 학문이다. 도학은 문명국의 건설에 결정적 학문이다. 성인은 문명을 이룰 주체자이며 도학은 그 정수이다. 중국이 문명국으로 존재함은 공자, 맹자, 주자 같은 성인과 그들의 저서 때문이다. 퇴계 역시 이들 성인처럼 되고자 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따라서 퇴계의 개울가 숲 속은 저술의 적지일 뿐만 아니라 악의 예봉을 피하면서 내일을 도모할 수 있는 그런 곳이었다. 단순한 숲 속의 은둔지가 아니었다.
‘심산무림 가운데’는 외부 세계와 단절의 환경을 조성한다. 퇴계는 그런 지형적 단절을 ‘편지’라는 수단으로 극복하고 있다. ‘조용한 편지교육’이었다. 카네기의 명언 ‘기적을 불러일으키는 편지의 효용성’을 퇴계의 편지가 증명했고 그 기적을 낳았다. 항상 조용하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치밀하게 실행했다. “내성적인 사람이 역사를 만든다”고 하는데, 퇴계에게도 그런 측면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선조 즉위와 더불어 등장한 사림집단의 집권과 이 무렵 퇴계 영향권 인물들의 대거 요직 포진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요컨대, 퇴계의 철학과 사상은 우리 나라를 야만국으로 전락시키는 악의 집단을 축출하고, 문명국으로 전환시키고자 하는 일련의 노력에서 결정結晶된 것으로, 온몸으로 성찰하고, 온몸으로 인식하며 온몸으로 실천하려고 했던 한 지성적 지식인의 고뇌에 찬 생애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생애는 기본적으로 조국을 사랑하고 미래에 희망을 품으면서, 우리나라를 진리의 나라로 끌어올리려는 크고 원대한 우리민족 모두의 이상과 함께 한다.
퇴계는 자신의 시간표를 지켜보면서 내일을 기약했고, 최선을 다하는 생애를 보냈다. 편지는 그것을 담아냈고, 그것은 그대로 도학과 정치와 교육을 위한 방편이 되었다. 상계는 그것을 이루어 낸 1차적 현장이며, 도산은 그 2차적 현장이었다.
사진: 고봉 기대승에게 보낸 편지
해설: 58세 성균관대사성 퇴계가 갓 문과 합격한 32세의 기대승에게 정성과 존경을 다해 편지를 쓰고있다. '황은 두번 절합니다...'라고 시작되는 편지는 상상하기 어려운 겸손이 담겨있다. 퇴계 인생에서 특징적인 한 단면으로 학문이 통하고 대화가 되면 기대승과의 관계처럼 파격적인 인간관계를 맺는 점이었다. 당대 인물로 큰 영향을 주고받은 농암 이현보는 34세 연상이고 율곡 이이는 35세 연하였으니 그 교유폭은 상하로 무려 70세나 된다.
6) 추월한수정
이런 생각을 하며 종택이 보이는 곳에 오니 개울 건너 새로 지은 조그만 집이 보인다. 최근 복원한 ‘계상서당溪上書堂’이다. 한서암을 지은 다음 해 지었다. 사람들은 도산서당은 알지만 계상서당은 잘 모른다. 그 의의는 더욱 모른다. 흔히 23세의 율곡이 성주의 처가에서 외가 오죽헌을 가는 도중 도산서당으로 퇴계를 예방했다고 하는데, 이때 찾은 곳이 바로 계상서당이었다. 퇴계는 이곳에서 ‘천명도’를 개작했으며, 《주자대전朱子大全》 중 중요한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를 편찬했고, 주희의 《역학계몽易學啓蒙》을 변석하여 《계몽전의啓蒙傳疑》를 완성했으며, 주변에 보낸 편지를 묶은 《자성록自省錄》의 서문을 썼다. 기대승과 나눈 사단칠정 논쟁의 첫 편지도 이곳에서 보냈다.
그뿐만 아니다. 제자인 김취려金就礪에게 보낸 편지에 “내가 도산서당에 있는 것은 초봄부터 여름 중반까지이고, 6, 7, 8월 석 달은 있지 않으며, 또 9, 10월 두 달을 다시 그곳에서 지내나 동지, 섣달은 추위로 또 거처하지 못합니다” 한 것으로 보면 퇴계는 봄, 가을에만 도산서당에 있었고, 나머지는 계상서당에 머물렀다. 그러니까 50세에서 60세까지 10년 동안의 교육 기관이 계상서당이고, 이후 10년은 도산서당과 계상서당이 그 구실을 함께했다. 퇴계가 최후를 맞이한 곳도 이곳이며, 지금 종택이 있게 된 원인을 제공한 곳도 이곳이다.
계상서당을 나와 종택으로 오니 우선 우측에 큰 건물이 보인다. 추월한수정秋月寒水亭. 매우 낭만적인 이름의 편액이 걸려있다. 1715년 창설재 권두경이 도산서원 원장이 된 후 종손 이수겸과 논의하여 자손과 사림의 모금으로 지은 것이다. 권두경의 <계상 옛터에 관련된 고증의 글[溪上遺址建屋表坊考證]>을 보면, 이때 종택에 와 보니 모든 집이 화재가 나서 밭이 되어 외손 김씨, 박씨가 소유했고 한서암만이 외롭게 있었는데 지나가는 사람들이 무슨 집인지도 몰랐다고 했다. 이때까지 종택은 부포에 있었고, 이곳은 매우 피폐했다. 따라서 어떤 경우든 퇴계의 집 한 채 정도는 지어야 할 절실한 필요가 있었다. 추월한수정은 이런 연유로 지어졌다. 도산서원이 도산서당 기념 건물이라 한다면 추월한수정은 계상서당 기념 건물이라 할 수 있다.
추월한수정에서 나오니 입춘을 쓴 솟을대문이 나타나고, 대문 위에 ‘열녀통덕랑행사온서직장이안도처공인안동권씨지려烈女通德郞行司툥署直長李安道妻恭人安東權氏之閭’란 긴 정려旌閭 글씨가 보인다. 퇴계의 존재만으로도 숙연해지는 이 집에 열녀는 또 웬 말인가? 누가 열녀였던가? 열녀는 퇴계의 손부孫婦 권씨, 즉 이안도의 부인이다.
권씨는 남편이 일찍 죽자 홑옷 거적자리에서 밤낮을 울기를 다섯 달, 그런 상태에서 3년 상을 나니 병이 깊어졌다. 이후 밥을 입에 대지 않고 좁쌀미음으로 연명하고 머리를 빗질하지 않은 채 23년을 띠를 풀지 않았다. 일찍이 말하기를 “내가 죽지 못하고 명을 이어가는 것은 다만 후사 때문이다. 만일 후사를 세우지 못하고 죽으면 저승에서 무슨 낯으로 그이를 대할 것인가!” 했다. 결국 후사는 조카 이억으로 결정되었고, 억이 혼인하여 며느리와 함께 들어오는 날 목욕재계한 후 소복을 입고 자결했다. 열녀 정려는 초상 중에 내려왔고, 부인의 시신은 열녀문을 나와 발인되었다. 종택의 열녀문은 이런 연유로 세워졌다.
제례 절차는 ‘가가예문家家禮文’이라 한다. ‘집집마다 다르다’는 뜻이다. 그것은 ‘예 종선조禮 從先祖’라 하여, ‘조상이 했던 방식 그대로 따라 하기 때문’이다. 안동의 각 가문들의 제사 절차와 진설陳設이 저마다 조금씩 다름은 그런 연유이다. 우리 집은 “부복 앞에 두 번 절”하는 순서가 있는데, 다른 집에는 거의 없다 한다. 우리는 이를 ‘부복전재배俯伏前再拜’라 한다. 어떤 경우든 시是와 비非의 대상이 아니며, 선악의 대상은 더욱 아니다.
퇴계 종택 제례는 ‘중포中鮑’로 유명하다. ‘포를 상 가운데 놓는 것’을 말한다. 그 유래가 바로 권씨부인 때문이다. 부인이 홀로 제사를 지내는데 자꾸만 낮은 상머리에 놓인 포가 치마 끝에 걸려 떨어져서 그만 가장자리로 옮겼는데 그것이 전통이 되었다는 것이다. 종택에서도 그렇게 말한다. 사실이라 생각된다. 여기서 잠시 퇴계 종택의 가계를 적어보면,
1) 李滉- 寯- 安道-상계파....퇴계종파
純道-의인파
詠道-하계파
2) 李安道-嶷-命哲-杲-守謙-世德-龜應-志淳-彙寧-晩憙-中慶-忠鎬-源慤-東恩(현 종손)-根必-致億
그런데 이들 역대 종손들의 이름을 가만히 보면 항렬 따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8대손 세덕世德으로부터 17대손 치억致億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름에 ‘心’자가 반드시 들어 있다는 점이다. 덕德, 응應, 지志, 영寧, 희憙, 경慶, 충忠, 각慤, 은恩, 필必, 억億 등.
1998년 9월, 종택을 방문할 기회가 있어 이근필 종손께 연유를 여쭈어 보니, 9대조 당시부터 지어진 것은 분명한데 그 연유는 종손께서도 모른다고 했다. 나는 막연히 퇴계가 심학心學에 주력했기에 그 정신을 이어가자는 뜻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런데 그 후 《후계집》에 <추월한수정 편액 관련의 글秋月寒水亭揭扁記事>이 있어 읽어보니, 추월한수정의 건축 의의는 역대 종손들의 작명에 대한 하나의 시사점을 주고 있었다.
추월한수정의 편액은 기대승의 “선생의 마음은 마치 물에 비친 가을 달과 같다先生之心 如秋月寒水”는 말에서 취했다. 이는 “천 년을 전해 내려온 마음이 마치 물에 비친 가을 달과 같다恭惟千載心 秋月照寒水”라는 주자의 시구를 인용한 것으로, 기대승은 “성현 전심의 묘를 터득할 수 있고得聖賢傳心之妙, 이 심법을 전수한 사람은 오직 퇴계 선생 한 분 뿐”이라 했다. 추월한수정의 편액과 건축 의의는 이로써 분명하게 나타났다.
추월한수정은 문학적 향취가 물씬 풍기는 특이한 편액으로, 도무지 도학자 퇴계에게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지만 사실은 선문답 같은 이 시의 한 구절 속에 도학의 핵심이 담겨 있다. 추월한수의 무대는 말할 것도 없이 상계이고 퇴계다. 당시 표현대로라면 ‘계상’이다. 퇴계의 개울은 단순한 개울이 아니라 퇴계철학을 만든 성찰과 사색이 깃든 낭만의 미적 공간이다.
모르긴 하나 전심지묘傳心之妙에 담긴 ‘심心’과 그 심법의 오묘함을 전수한 사람은 오직 퇴계 선생 한 분뿐이라는 설명에서 바로 역대 퇴계 종손들의 이름 속 ‘심心’자의 작명비밀도 알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퇴계가 터득한 전심의 묘를 후손들도 그렇게 터득하고 이어가기를 희망한 것은 아닐까? 희망은 전통을 만들었다. 그렇지만 진정 어느 경지에 가야 가을 달빛이 물에 비추는 것을 보고 진리를 깨닫게 될까? 또 어느 때 가을 달빛 비치는 퇴계의 개울을 보게 될까?
사진: 추월한수정
해설: 지금의 추월한수정은 1907년 방화로 소실된 것을 1927년 복원한 건물이다. 1995년 퇴계종택에서 발행한 <한수정중건시향도서초寒水亭重建時鄕道書抄>에 보면 당시 자손과 향중의 종택, 문중에서 보낸 부조내역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당시 농암종택에서는 애일당과 분강서원을 합하여 200량을 했는데, 지금 관행으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금액이다. 우리 조상들의 아름다운 ‘통재通財’의 미풍양속 때문이었다.
7) 매화 밭
종손께서는 이 날 여러 말씀을 하셨다. 특히 ‘제사’에 대한 말씀이 많으셨다. 말씀 도중 문득 종이에 글을 써서 보여주고, 그 아래 9 : 1이라고 썼다.
宜於今而 不遠於古
9 1
해석하면 “지금 실정에 맞도록 하나 옛 법도에 멀어져서도 안 된다”이다. 퇴계 유언에 나오는 한마디다. 9 : 1은 그 비중이라는 말씀이셨다. 나는 그때 종손께서 혁신적인 생각을 갖고 계시다고 느꼈다. 종손은 사실 신념을 갖고 계시고 실천에 옮기고 계셨다. 종손께서는 지금 가을 묘사墓祀를 추월한수정 마루에서 한꺼번에 지낸다. ‘망제望祭’와 유사한 방식일까. 퇴계의 제사도 이때 함께 지낸다. 자연 지손支孫들이 말이 많았다. 부당성을 지적하고 시정을 요청했다.
그러나 종손은 《도산전서》의 근거를 대고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켰다. 근거는 이 유언과 더불어, 퇴계가 제자에게 준 문목問目과 편지글이었다. 종손께서는 그때 복사한 글을 필자에게 주었는데, ‘김취려문목金就礪問目’이었다. 글을 보니 퇴계는 과연 그런 제례를 언급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가을 묘사를 집안에서 한꺼번에 지내는 방식은 일반 사람들이 실행에 옮기기는 진정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종손이 생각하는 전통은 형식이 아닌 인간이었다. 인간의 삶에 따라가는 예법이 ‘의어금宜於今’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퇴계의 교훈이라 했다. 종손은 또 ‘음택’과 ‘작명’을 말씀하셨다. 많은 조상의 묘소를 명당으로 모셨건만, 또 작명을 그렇게 정성스럽게 했건만 지금 종택이 처한 환경은 결코 그렇지 못하다고 했다. 종손은 한 예로 작명으로 인해 겪은 일을 설명하고, 그런 연유로 자신은 당신의 딸들을 다시는 작명가의 놀음에 넘어가지 않도록 한글 세 자로 지었다고 했다. 그래서 첫째 딸을 이경신재, 둘째 딸을 이경춘우로 작명했다고 했다.
종손은 또 근친혼의 문제를 지적했다. 근친혼은 대를 끊어지게 하고, 머리 나쁜 후손을 낳게 했다고 했다. 하계, 원촌의 지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인물, 관직 등에서 위축된 점으로 보면 이 말씀도 상당한 근거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친혼의 문제는 사실 관계를 떠나, 아니 내가 생각한 것 이상의 절실한 문제였는지도 모른다. 종손의 이런 인식은 제사뿐만 아니라 지금 퇴계 선양과 도산서원 운영을 획기적으로 발전시키는 모태가 되고 있다. 도산서원 사당의 이른바 500년 만의 여성참배허용, 장판각, 광명실에 보관되었던 판각과 고문서의 국학진흥원에의 전격적인 기탁은 종손의 대표적 결단이었다.
종손은 내게 사적으로는 은사가 된다. 종손께서는 대학을 나와 20대에 도산초등학교에 부임하여 40여 년을 이 학교에서 보냈다. 중간에 잠시 휴직한 것과, 안동댐으로 폐교가 되어 잠시 인근 온혜초등학교로 옮긴 것을 빼면 거의 전 생애를 함께했다. 나라의 배려였다. 조선시대 퇴계 종손에 내려진 고을 원 정도의 배려가 이제는 이런 정도가 되었다. 이제 연세가 일흔이 넘으신 것 같다. 그런데도 종손은 아직 종손이 아니다. 아버지가 계시기 때문이다. 노종손은 100세 가까운 고령이나 아직 정정하시다. 때문에 종손이지만 퇴계 종손은 아니다. 종손은 종손이 죽고 3년 상을 마친 후 ‘길제吉祭’라는 의식을 거처야 한다. 길제의 ‘개제주改題主 의식’에서 불천위 위패에 ‘봉사손**봉사奉祀孫**奉祀’라고 쓰여야만 비로소 종손이 된다.
종손께서는 십여 년 전 상처하셨다. 근년에는 자당께서도 타계하셨다. 자연 종손께서 집안의 온갖 일을 꾸려 가신다.
얼마 전 동생 되시는 분이 방송에 나와 말씀을 하는데 ‘형님은 일생을 희생하셨다’고 했다. ‘희생’이란 생각하기 나름의 개념이지만, 적어도 종손의 인생이 ‘희생적인 인생’인 것만은 틀림없다. 동생, 매형, 매제 등이 모두 서울에서 굴지의 기업을 이끌며 풍족한 인생을 살고 있음에 비교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그런 연유인지는 몰라도 도산서원의 퇴계 영광에 비해 상계는 어딘가 고적한 그림자가 보인다. 나만의 느낌일까?
몇 해 전 이근필 종손을 중심으로 한 ‘퇴계 종택의 일상’이 TV에 방영된바 있다. 최근에는 아들 이치억을 중심으로 다시 한 번 방영되었다. 잔잔한 파장이 있었다. 사람들은 이 두 번의 방송에서 퇴계 종택의 실상과 종손의 고뇌와 종가의 장래에 대해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했다. 보고 느끼고 생각하게 하는 것은 사실 우리들 자신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대한 모습과 성찰이다. 과연 종택들은 어디로 갈 것인가?
여담이지만 종손은 첫 번째 방송을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계셨다. 당신이 생각하는 의도와는 전연 다르게 방영되었다고 했다. 나도 그런 경험이 없지 않아 충분히 이해가 갔다.
지금 종택 주위에는 퇴계공원, 종택보수, 도로확포장의 공사가 한꺼번에 이루어지고 있다. 공사가 끝이 나면 종택은 그 면모를 일신할 것이다. 그런데 퇴계공원은 아직 완공되지 않아 단정하기 어려우나 1차공사가 끝난 지금, 개울 건너서 바라본 모습은 ‘그렇게 아름답지 않다’이다. 현장을 둘러본 소감은 ‘다소 산만하다’이다. 동선도 그러하지만 곳곳에 흩어져 있는 석물들은 전연 조화로움을 갖추고 있지 않다. 2차 공사에도 적지 않은 석물들이 들어선다고 하니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도산서원성역화사업이 과다한 석물의 투입으로 원형을 손상시켰듯이, 이 사업 역시 아늑한 상계의 모습에는 역행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퇴계의 개울을 짓이기고 쌓은 돌방축은 정녕 그런 방법밖에 없었던 것인지.
퇴계는 ‘한서암’을 짓고 마당에 ‘광영당光影塘’이라는 못을 파고 주변에 대나무, 소나무, 국화, 매화, 연을 심어 ‘육우원六友園’이라 했다. 여섯 친구들이 있는 정원이었다. 그런데 왜 다섯 가지를 심고 ‘육우’라 했을까. 나머지 하나는 퇴계 자신이었다. 도산서당 앞에 못을 파 정우당이라 하고, 옆에 정원을 조성하여 절우사라 한 일과 흡사하다. 깨끗하고 변함없는 자연 속에 흔적 없이 하나가 되고자 한 사람이 퇴계였다. 거기 조그만 소망 하나가 있다면 그런 정원 속에 “향기 나는 한 포기의 난초”처럼 살고 싶었던 사람이 퇴계였다. 따라서 종택 주변은 단정하고 정갈한 ‘육우원’, ‘절우사’를 염두에 둔 그림으로부터 나와야 한다. ‘볼거리’ 보다는 ‘사색하기’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기뻐서 끼니조차 잊을 듯한” 퇴계의 정서를 복원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자치단체들이 다투어 ‘관광시대’를 외치니 이곳마저 ‘관광’의 색깔로 성형하려고 하는가. 이곳의 의미를 좀 더 깊은 안목으로 차분히 가꾸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는 것인가. 정말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아직 퇴계 종택은 가볼만하다. 주변 환경이 퇴계 당시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따뜻하고 아기자기한 도산의 산야 그대로다. 그런 가운데 종택 앞밭에는 지금 대량의 매화나무가 자라고 있다. 꽃이 만개할 시기에 가보기 바란다. 잔잔한 퇴계의 물소리와 더불어 여간 아름답지 않다. 종손께서 심고 가꾸셨고, 원하는 사람에게 그냥 드리는 모양이다. 매화를 ‘매형梅兄’이라고 한 퇴계의 향기를 오래도록 전하고자 하는 염원이리라.
종손, 종부, 종택, 종택 문화는 역사의 막바지에 이르고 있다. 멀지 않은 날, 종택들은 휑한 건물의 형체만 남기고 수다한 사연들은 역사라는 이름으로 갈무리될 것이다. 그때 누가 있어 매화 향기 가득한 종택 문화를 지키고 가꾸어 갈까. 누가 있어 물에 비친 가을 달빛을 보고 학문과 인생과 진리를 생각하고 깨닫게 될까.
사진 : 종택 앞 매화 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