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청량산록


임오년(1882년, 고종 19년)
선성(宣城) 북쪽, 봉화(奉化) 남쪽에 산이 있는데, 몸체 전체가 골산(骨山)이다. 허리 위로는 주왕산(周王山)과 비슷하지만 격조는 그보다 뛰어나다. 가장 높이 솟아서 대적할 수 없는 열두 봉우리가 있는데 돌의 기운이 맑고 상쾌하여 더위에도 감히 가까이할 수 없으므로 이름을 청량(淸凉)이라고 한다. 거사인 나는 임오년 삼월에 절룩거리는 노새에 병든 몸을 태우고 이 산을 유람했다. 족조(族祖)인 근백(根伯) 씨가 동행했다.

3월 18일 갑진일에 출발하여 하룻밤을 자고 동교(東橋)에 이르니 몹시 피곤했다. 마부가 무릎을 꿇고,
“어른께서는 편찮으십니다. 길이 험해서 올라가는 데 견뎌 내실 수 없습니다.”
라고 만류했다. 나는 비웃으며,
“옛사람은 그림만 보고도 병이 나았다 했다. 하물며 진짜 산은 어떻겠는가? 나는 밤이 새기 전에 나을 것이다.”
라고 했는데, 이튿날 과연 몸이 나았다.

말을 채찍질해 10여 리를 가 부라(浮蘿)에서 조금 쉬고는 다시 가서 시사단(試士壇)에 이르렀다. 정조께서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 상국(相國)에게 그 일을 맡겨 설치한 단(壇)이다. 돌이 닳지 않아서 읽을 수 있었다.
작은 배를 불러 타고 강을 건너서, 종종걸음으로 도산 서원(陶山書院)에 들어갔다. 두건과 옷을 갖춰 입고 사당에 배알했다. 암서헌(巖棲軒) 위에 있는 청려장, 옥분(玉盆), 기형(혼천의), 투호와 화살 등을 구경했는데 손때가 아직도 남아 있는 듯했다. 방에 들어가니 근심에 젖어 가르침을 듣는 것 같다.

나와서 도문(道門)에 가서, 운영대(雲影臺), 탁영담(濯纓潭), 천연대(天淵臺), 반타석(盤陀石)을 구경했다. 이 밖에 여러 가지 눈을 즐겁게 하고 정신을 온화하게 하는 것이 손가락으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아서, 청량을 기록할 때 다른 것들은 기록하지 못했다.
동쪽으로 열 걸음쯤 가니 강가에 집이 있다. 3년상을 치르고 있는 숙부 이정우(李正佑)가 사는 곳이다. 돌 모서리에 말을 묶어 놓고 들어가서 손을 잡고 곡을 했다.
다시 강을 따라 1리쯤 가니 기이한 바위가 나왔다. 물이 콸콸거리며 절벽을 따라 운다. 마부가 지팡이와 신을 가지고 와서,
“길이 험하니 말에서 내려 이내를 차며 걸어가야 합니다.”
라고 권했다. 골짜기에 들어가니 서쪽 해가 방금 넘어가면서 붉은 노을이 이미 골짜기를 가득 비추고 있다.

이광초(李廣初)의 집을 찾아갔으나, 광초는 유산(酉山)을 유람하러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한다. 전에 광초와 이 산을 유람하기로 약속했는데, 서로 멀리 떨어져 있으니 자못 마음이 섭섭했다.
저녁을 먹은 후에 정우 숙부와 여러 벗들이 한 명씩 모이니 등불을 켜고 차를 내왔다. 무릎을 마주 대고 고금을 이야기하느라 밤이 깊어 가는 줄을 몰랐다. 사람들이 돌아가고 잠이 들었는데, 꿈에서 신선의 산인 청량 열두 봉우리를 미리 보았다.

21일 정미일은 비가 약간 올 것 같다. 노복과 말은 돌려보내고 옷과 띠, 머리싸개와 신을 단단히 묶고 산으로 향했다.
만류하는 사람이,
“여러 벗들이 바빠서 함께 갈 사람이 없습니다. 동행이 없으면 흥이 나지 않을 겁니다. 더구나 이 산은 안개나 이내가 많이 끼어 맑은 날에도 조망하기가 쉽지 않은데 곧 비가 올 것 같으니 비가 오면 지척간도 구분하기 힘들 것입니다.”
라고 하면서 만류했다. 내가,
“사령운(謝靈運)이 화산(華山)을 유람할 때 동행한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그의 시에 ‘생각이 맑으니 사물이 절로 가볍고 마음이 유쾌하니 이치에 어긋남이 없네〔慮澹物自輕 意愜理無違〕’라 했지요. 산을 유람하는 이는 생각이 맑고 마음이 유쾌하면 그만이지요. 어찌 무리지어 갈 필요가 있겠소. (그러나 비가 올 것 같아) 심란하긴 하나, 나는 형산(衡山)의 구름은 한유(韓愈)를 위해서 개었다고 들었으니, 청량의 구름은 나를 위해서 개지 않겠소?”
라고 말했다. 그러나 만류하는 이가 억지로 붙들어 하루를 더 머물렀다. 등불 아래서 어린아이에게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가 지은 ‘어부사(漁父辭)’를 한번 읊어 보게 했다.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고와서 들을 만했다.

이튿날 일찍 성부(性夫) 이존구(李存求), 성가(聖可) 이중시(李中時)와 함께 출발했다. 양진암(養眞菴)의 주인 이돈가(李敦可)가 술을 따라 권했다. 당현(唐峴)에 이르러 동쪽을 바라보니, 안개와 아지랑이 속에서 산모퉁이가 조금 드러나면서 잠시잠깐 밝아졌다 어두워졌다 한다. 찬찬히 보아도 구름인지 아니면 이내인지 구분하기 힘들다.
10여 리를 가서 미천(彌川)을 지나니, 배가 떠 있는 물가의 푸른 절벽에는 초목이 물에 비치고, 대여섯 채 산가(山家)는 기울어진 사립문이 혹은 열려 있고 혹은 닫혀 있다.
동행을 돌아보며,
“살아서 밝은 시절을 만나지 못해 나는 학문을 펼칠 수 없었소. 이곳은 넓고 한가로운 곳이니 채소를 먹고 시냇물을 마시면서 내 일생을 마치기에 충분하겠소.”
라고 말했다.

물을 거슬러 올라가다 큰 바위를 만났는데 5, 60여 명을 수용할 수 있어 보인다. 가부좌를 틀고 둘러앉아 장소를 바꿔 가며 평가했다.
방향을 바꾸어 동쪽으로 경암(景巖)을 지나 뇌연(雷淵)에 이르렀다. 강에는 흰 바위가 반은 잠기고 반은 밖으로 나와 있는데 색이 전부 밝고 고와서 더러운 때에 물들지 않았다. 높은 여울은 거세고 급하게 흘러 바위를 삼키면서 돌아나간다.
강을 따라 서쪽으로 5리쯤 가니 보이는 것이 모두 보통 볼 수 있는 형상의 저 너머에 있는 기이한 경치다. 옛사람들은 유람할 때면 반드시 품평을 했는데, 동행한 이들은 잘 살피지도 자세히 보지도 않으니 안타깝다.

심진(尋眞)으로 가는 길을 택해 오노령(五老嶺)을 넘고 고산도(孤山島)를 끼고 돌아 월명담(月明潭)을 굽어보았다. 한 줄기 푸른 산줄기가 뚝 끊어져서 열 길의 절벽이 되고, 그 뒤의 산기슭은 매우 험난하다.
물은 너럭바위를 지나 물굽이를 만나서 못〔淵〕이 된다. 그 물은 맑고 투명하기가 푸른 옥쟁반에 기름을 담은 것 같다. 바위 위에는 소나무가 울창하게 서려 있고, 철쭉이 가지 사이로 꽃 몇 송이를 내밀고 있다. 마치 붉은색이 푸른색 사이에 떨어지고 그 모습이 물속에 잠겨 있다. 바위에는 수운대(水雲臺)라고 새겨졌고, 대 위에는 옛날부터 퇴계(退溪) 선생이 손수 쓴 동유록과 절구 한 수가 있다. 매우 뛰어난 유물이다. 그러나 이끼 틈에서 깎이고 삭아서인지 어릿하게 보여 분간할 수 없다.

고산정(孤山亭)은 강 건너 기슭에 있는데 물이 깊어 건너갈 수 없다. 아쉬운 마음으로 오랫동안 앉아서 바라보는데, 갑자기 시를 읊는 소리가 낭랑하게 숲을 뚫고 들렸다. 깜짝 놀라 돌아보니 근백 씨가 정자 위에 있다. 성부가 큰 소리로 부르니 소리가 사방의 절벽에 울려 되돌아온다.
거사가 웃으면서,
“절벽 위에 그대가 있는가? 어찌 저 소리가 그대와 그렇게 닮았는가?”
라고 하니 성부도 웃었다.
연고(淵皐)의 조씨 집에 들어가 밥을 먹고 동북쪽으로 1리쯤 갔다. 구름 낀 산은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원숭이와 새는 놀라지 않는다. 조용히 읊조리며 천천히 걸어가니 마음이 맑아져 세속에서 벗어난 흥취가 일었다. 푸른 시내를 끝까지 가니 사람의 자취가 없어 두려워졌다. 다만 백로가 다리를 모으고 모래톱에 서 있다. 사람이 가까이 가도 날아가지 않는다.

작은 주막에 이르렀다. 그 지역을 예전에는 석천(石川)이라고 불렀는데 지금은 단석(慱石)이라고 부른다. 술을 한 순배 했다.
성가가 저 멀리를 가리키며,
“저 남쪽 절벽에 학소대(鶴巢臺)가 있는데, 학이 가 버리자 서려 있던 소나무가 말라 죽었지요.”
라고 말했다. 내가,
“학이 둥지를 떠나가니 시냇가 소나무 말라 버렸네〔鶴移巢去澗松枯〕.” 하고 조용히 읊조렸다.

우두커니 서 있는데 마침 수레바퀴처럼 큰 날개 그림자가 강을 건너 석벽으로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매우 신기해서 자세히 보니 구름이다. 여울에는 물살이 어찌나 빠른지 바짓가랑이를 걷어 올리고도 건널 수 없다. 어부가 배를 왼쪽으로 돌리더니 순식간에 강기슭에 배를 대었다. 그 능숙한 솜씨를 칭찬했다.

물을 건너가서 흰 바위를 쓸고 둘러앉아 옷을 풀어 헤치니 가슴이 시원하여 자연의 기운이 느껴졌다. 우러러 열두 봉우리를 바라보니 산색이 눈동자에 들어왔다. 비로소 이 몸이 청량의 골짜기에 들어왔음을 깨달았다. 윗옷을 벗고 고기를 꿴 것처럼 나란히 앞으로 나아갔다. 우뚝 솟은 바위와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돌이 차례로 사람의 발을 받아들인다. 미끄러운 곳과 움푹 들어간 곳을 조금씩 지나가는데 걸음걸음 흙을 밟지 못했다. 지팡이를 들고 두드려 보니 쟁쟁 하고 옥소리가 난다. 작은 시내가 협곡 사이를 흘러가는데, 요란하게 소리를 내면서 내달려 폭포를 이루고는 빙빙 돌아 못〔潭〕을 이룬다.

하늘에 닿을 듯한 숲에서는 때때로 노란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들린다. 금포정(錦浦亭)을 지나 물을 따라 수십 걸음을 가니 나무 그늘이 점점 짙어지고 시냇물 소리는 점점 가늘어졌다. 산이 더욱 깊어질수록 바위들이 더욱 기이하다.
머리를 들어 절을 보고 농부를 만나 길을 물으니, 농부가,
“좌좌정사(左左精舍)입니다.”
라고 한다. 우뚝 솟은 집 위로 고목과 푸른 등나무가 있고 바람이 서늘하게 불어왔다. 산은 돌아나가고 물은 멀리 가 숨어 널따랗게 별세계의 골짜기를 이루었다. 상쾌해 하면서,
“조화옹의 자취인가? 신선이 사는 곳인가? 누가 이렇게 만들었으며 누가 이것을 주재하였는가?”
라고 말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성부가 급하게 불렀다. 돌아보니 배꽃 한 그루가 사람을 쳐다보듯이 하고 있다. 밝고 맑은 향기가 서원에 가득하다. 돌 위의 샘에 대롱을 이어 매달아 꽃나무 아래까지 연결했다. 물맛이 매우 향기롭고 시원하다. 나는 표주박을 잡고 한 모금 마시면서,
“옛날에 인삼수가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지금 이화수(梨花水)를 마시는구려. 인삼수는 사람의 양쪽 겨드랑이에 깃털이 돋게 한다는데, 이화수는 내게 한 번 뛰면 자란봉(紫鸞峰) 꼭대기에 앉게 할 수 있겠지요.”
라고 했다. 모두 한 잔씩 마시고 상쾌하다고 칭송했다.

옷을 입고 허리띠를 묶고 연대사(蓮臺寺)로 향했다. 바윗길을 아홉 번이나 돌아가니 속세의 사람들은 쉽게 이르기 어려운 곳이다. 바위틈에 장미가 활짝 피었는데, 그 꽃떨기가 매우 많아서 다 셀 수가 없다.
유리전(琉璃殿)에 들어가 여래불(如來佛)을 보았다. 금빛 몸에 가사를 입었는데 길이가 열 자 정도 되어 보인다. 살아 있는 것 같이 움직이는 것 같아서 두려워 오래 쳐다볼 수가 없다. 자리에 앉아 조용히 불가의 이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주방에서 밥이 다 되었다고 고하는 말을 듣고 돌아왔다. 문득 피리 소리가 자소봉(紫霄峰) 밖에서 들려온다. 은은한 소리가 정적을 깨고 천천히 회오리바람과 함께 합쳐져 올라왔다.
옷깃을 바르게 하고,
“신선이 내려오는가? 어찌 저럴 수 있을꼬.”
라고 감탄했다. 이윽고 한 동자가 이내에 젖은 옷을 입고 짚신을 끌며 숲에서 나온다. 그가,
“선대는 주천(酒泉) 사람인데, 나는 세상이 싫어 산에 들어온 지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라고 했다. 산 속 일을 자세히 이야기하고, 자꾸 울어대는 두견새 소리에 눈물을 흘리면서 떠났다.

밤 깊은 삼경에 모두 곤히 자는데, 나 홀로 앉아 달을 마주 했다. 한 줄기 은빛 무지개가 금탑봉(金塔峰)에서 연화봉(蓮華峰)으로 걸려 있다. 아주 어두워졌다 조금씩 밝아지곤 하더니 반달이 두 눈 사이로 뛰어올라 곧바로 축융봉(祝融峰) 꼭대기로 날아올랐다. 잠시 뒤에 닭이 울었다. 새벽녘 서늘함이 뼈에 사무쳐서야 침상에 들어가 잠을 청했다.

아침에 옆에 있는 사람이 안개 낀 경치를 보라고 나를 급히 깨웠다. 옷을 입고 나가 보니 어제 지나온 깊은 골짜기가 바다가 되어 하늘에 닿아 있고, 열두 개의 높은 봉우리도 다만 뾰쪽한 머리 부분만 나왔으니, 아득하여 어떤 세계인지 알지 못하겠다.
감탄해서,
“우리들은 하루살이 같은 존재로 아주 잠깐 동안 자주 변하는 달팽이껍데기 같은 세상에 앉아 있으니, 만약 내가 신선의 분수를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지 않으면 도리어 신선에게서 조롱을 받겠지요.”
라고 말했다. 서로 보기만 할 뿐 말은 하지 않았다. 조금 뒤에 해가 떠오르자 넓은 파도(안개)는 점차로 사라지고 깊은 골짜기와 높은 봉우리가 옛 모습을 드러냈다. 남아 있는 안개구름이 골짜기를 조금 덮고 있을 따름이다.

늦은 아침에 지팡이를 잡고 산에 올랐다. 연대(蓮臺) 서쪽에서 방향을 바꿔 남쪽으로 가니 어지러이 흩어져 있는 돌 사이로 작은 길이 있다. 또 방향을 바꿔 서쪽으로 가니, 길이 끊어지고 절벽이 나왔다. 앞사람은 발이 미끄러져 넘어지고 뒷사람은 두려워서 넘어졌다. 두려운 기운에 숨을 참고 지팡이를 사람인 듯이 믿었다. 지팡이를 짚을 수 있는 곳은 지팡이를 짚고 가고 지팡이를 짚을 수 없는 곳에서도 지팡이를 놓지 않았다. 자주 땅에 넘어지며 한 걸음에 한 번 쉬고 감히 조금도 돌아보지 못했다. 다만 서로 부르면서, ‘조심해라, 조심해라’하고 경계했다.

몹시 고생하여 장인봉(丈人峰) 아래에 이르렀다. 봉우리 모양은 수십 길〔仞〕을 깎아 세운 듯 하고, 작은 돌이 큰 돌을 지고 작은 바위가 큰 바위를 이었다. 바위에 기대 돌을 잡고 길을 가다 돌이 구르면 함께 구르고 바위가 흔들리면 함께 흔들리며 반나절 만에 봉우리에 올랐다. 이 봉우리가 자리 잡은 곳이 가장 높아서 여러 봉우리들이 눈 아래에 늘어서 있다.

서쪽을 바라보니 뼈대가 돌로 된 바위들이 강 위에 깎은 듯 솟은 모습이, 위엄을 갖춘 신선이 요대(瑤臺) 위에 손을 단정히 하고 서 있는 것 같아 바라볼 수는 있으나 친압할 수는 없고, 지조 높은 선비가 도끼 사이에서도 몸을 꼿꼿하게 세운 것 같아서 공경할 수는 있어도 범할 수는 없어 보인다. 이것이 바로 외장인봉이다.
서북쪽을 보면, 몸뚱이는 흙이요 얼굴은 돌인 산이 여윈 듯 가늘게 높이 솟았다. 천왕(天王)과 대불(大佛)이 호상(胡床)에 앉아 말이 없는 듯하고, 석가의 진영이 단청하지 않은 전(殿)에 걸려서 움직이지 않는 듯한 것은 의상봉(義湘峰)이다.

동쪽을 보면 맑은 연못에 연꽃처럼 곧게 솟아 만 길〔丈〕의 꽃을 피웠는데, 깨끗하여 더러움에 물들지 않은 것은 연화봉이다.
동북쪽을 보면, 머리를 반듯하게 세운 한 마리의 흰 학이 허공을 바라보고 서서 날아오르려고 하나 아직 날지 않는 것은 선학봉(仙鶴峰)이다.
그 다음은 운무가 하늘을 덮었다가 거센 바람이 불어 해에게 그 자리를 양보하여 해가 겨우 하늘 가운데 이르면 만상(萬象)이 도망갈 수 없는 것은 경일봉(擎日峰)이다.
또 그 다음은 비단 같은 구름 병풍과 수정으로 지은 궁에서 깃옷과 무지개치마를 입고 서로 춤을 추며 앞으로 나가는 것은 자란봉과 자소봉이다.

또 그 다음은 올빼미처럼 사나운 장수가 병사를 지휘하며 망루를 마주 했는데, 다른 깃발과 북은 없고 다만 날카롭게 빛나는 창 두 자루 같은 것은 탁필봉(卓筆峰)이다.
또 그 다음은 손바닥만 한 작은 돌이 쌓이고 쌓여 조그만 틈도 없고, 곧바로 허공에 꽂혀 있는 것은 금탑봉이다.
남동쪽으로, 백 척의 마른 소나무가 껍질을 벗지 않고 몸뚱이를 태워 불꽃이 하늘에 닿은 것은 축융봉이다.

연적봉(硯滴峰)은 연적과 같고 향로봉(香爐峰)은 산 하나가 통째로 한 덩어리 바위다.
(이러한 봉우리들은) 도끼로 깎지 않고 다듬지도 않아 뾰쪽뾰쪽하고 우뚝 솟았고, 나무가 서 있는 것 같고, 또한 정돈되어 줄 지어 서 있고, 푸르기도 하고 희기도 하고, 갑자기 솟아오르기도 했으니, 천 가지 형태와 만 가지 형상이 거듭 나타난다.
이 밖에 이름 없는 봉우리들, 즉 높은 것, 낮은 것, 긴 것, 짧은 것, 꼭대기를 다 드러낸 것, 꼭대기가 반쯤만 보이는 것, 사람이 서 있는 모양, 짐승이 엎드린 모양 들이 높고 험하고 또한 매우 기괴하다. 상 위에 상을 더하고 집 뒤에 집이 있는 듯해서 보면 볼수록 다 볼 수가 없다.
나는,
“기이하구나, 조물주여. 재주를 드러냄이 한결같이 이런 경지에 이르렀는가?”
라고 감탄했다. 다시 두려워하며,
“위태롭구나! 붓이 없으면 무엇으로써 이런 경지에 이르렀겠는가?”
라고 말했다.

연화봉에 오르고 다시 금탑봉에 올랐다. 조금 평평하여 앉을 수 있었다. 비로소 입을 열고 한 번 웃었다.
갈증이 심하여 산에서 내려오는 도중에 약초 캐는 사람을 만났는데 수염과 눈썹이 매우 희고 나이는 여든 정도로 보였다. 이름을 물으니 대답하지 않고 공손히 읍을 하고 지나갔다.
대영(大英) 이중실(李中實), 이진(而進) 이중진(李中瑨), 성진(聖振) 이중성(李中聲), 중온(仲溫) 이기호(李基鎬), 이정(而正) 이중경(李中敬), 욱여(郁汝) 이중형(李中馨) 등이 뒤따라왔다. 술을 마시면서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길을 안내하는 승려를 따라 북쪽으로 돌고 동쪽으로 올랐다. 가는 길이 위태롭고 미끄러워 나무를 부여잡고 올라가 치원대(致遠臺)에서 총명수(聰明水)를 마셨다. 대는 절벽 위에 얽어맸는데, 여러 층의 허공에 맞닿아 있다. 물은 거꾸로 매달린 바위 아래서 솟아 흘러 움푹 파인 돌에 모였다. 유선(儒仙)인 최치원(崔致遠)이 이곳에서 노닐었기 때문에 그 대를 ‘치원대’이라고 부르고, 이 물을 마시고 총명해졌다 해서 그 물을 일러 ‘총명수’라 한다.

바위 위에는 먼저 다녀간 이들의 이름이 많은데, 혹은 새겨져 있기도 하고 혹은 새겨져 있지 않기도 하다. 나의 아버지도 또한 일찍이 이곳을 지나면서 이름을 쓰셨는데 먹빛이 새로 쓴 것 같이 빛났다.
어풍대(御風臺)를 지나 치원암(致遠庵)의 옛터에 올랐다. 돌로 된 잔교에 의지해 열 걸음 정도 올라가니 풍혈대(風穴臺)가 있다. 바위는 넓고 구멍이 깊어 비가 거세게 와도 한 점의 빗방울도 들어가지 않는다고 한다. 돌 가운데 뚫린 구멍으로 하늘을 엿볼 수 있고, 바람이 구멍에서 나온다고 한다. 여기도 최치원이 글을 읽던 곳이다. 옛날에는 바둑을 두던 목판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돌에 먹을 갈아서 글씨 잘 쓰는 사람에게 유람하는 사람들의 이름을 적게 했다.

돌로 된 잔교를 내려와 동쪽으로 반야대(般若臺)와 안중사(安中寺)를 지나서 하청량의 고암광사(高巖廣寺)에 들어갔다. 절은 (절벽에 붙어 있어서) 매우 위태로워 보인다. 바위 꼭대기에는 한 주먹 되는 돌이 있는데 금세 떨어질 것 같은데도 떨어지지 않는다. 맑은 샘물이 바위틈에서 낙숫물 떨어지듯 방울방울 떨어져, 매달린 통으로 해서 곧바로 부엌으로 흘러간다. 똑똑 물 떨어지는 소리를 내는데, 손으로 움켜쥐고 여러 번 마시니 가슴속에 가득 찬 더러운 먼지를 깨끗이 씻어 낸 듯하다.
주위를 오락가락하며 두루 구경했다. 승려가 남쪽으로 옛 성을 가리키면서,
“공민왕(恭愍王)이 적을 피하던 곳입니다.”
라고 했다. 서쪽으로 황폐한 무덤을 가리키며,
“삼각산의 시신을 묻는 곳입니다.”
라고 했다. 그 말이 거짓되고 망령되어 기록할 만하지 않다.

승려가 돌아가자고 했다. 돌비탈을 밟고 칡넝쿨을 헤치며 몸을 옆으로 돌리면서 김생굴(金生窟)에 들어갔다. 굴은 층층으로 쌓인 봉우리의 큰 바위 밑에 있는데, 봉은 우뚝하고 바위는 널따랗다. 높이는 수십 척이고 넓이는 5, 6칸 집을 놓을 수 있다. 공교롭게 깎고 에둘렀으니 귀신의 조화요 하늘이 만든 것이다.
바위 위에서 가는 물줄기가 폭포처럼 흩날리며 떨어지는데, 방울방울 구슬이요 한 점 한 점 빗방울 같다. 신선이 없으면 언급할 것이 없지만 있다면 이곳에서 살지 않고 어느 곳에 살겠는가? 일찍이 김생의 필획이 기암괴석처럼 강건하다는 말을 의심했는데, 지금 이 굴을 보니 그의 정신과 기력이 도움을 받았음을 알겠다.

동쪽으로 가다 방향을 바꿔 북쪽으로 올라가서 만월암(滿月庵)에 들어갔다. 암자는 폐지되어 스님이 없는데 벽도(碧桃) 몇 가지가 대에 기대어 (대가) 붉게 보인다.
이 산은 열두 봉우리인데, 예전에는 이름이 없다가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이 처음으로 이름을 지었다. 열아홉 개이던 절은 지금은 네 곳만 남았는데, 만월암 또한 이와 같으니 몇 개의 절이 폐지되어 이러한 모습으로 있지 않겠는가? 일찍이 신재의 시를 보니 ‘청량 열아홉 절, 절마다 문 앞에 대가 있네〔淸凉十九寺 寺寺門前臺〕’라 했으니 대 또한 열아홉 개인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절터를 다 찾을 수 없으니 절 앞의 대를 어찌 명확하게 확정할 수 있겠는가?
굴은 모두 네 개인데 나는 두 개를 보았다. 보지 못한 굴은 본 사람에게 부탁하지 않을 수 없으나 깊은 산에 오래 머무르는 것은 (여러 가지로) 방해가 많으므로 내 맘대로 깊이 탐색할 수 없다. 다른 날 다시 오면 (이번에) 마치지 못한 책임을 다할 것이다.

24일 경술일에 《동유록(同遊錄)》을 완성했다. 각각 돌아갈 길을 찾아 내려갔다. 다섯 걸음에 한 번 돌아보고, 천천히 골짜기를 나오면서, 창석(蒼石) 이현영(李顯英)의 시구(詩句) ‘세속의 인연이 다 사라지지 못한 것을 웃으며, 또 흐르는 물을 따라 청산을 나왔네〔自笑塵緣消未盡 又隨流水出靑山〕’을 읊었다.
머리를 돌려 산모퉁이를 보니 구름과 노을이 만 겹으로 덮여 있다. 고산정(孤山亭)에 올라서 바라보니 시내와 산, 구름 같은 자연 경관이 어제와 다름없다. 섬돌 가득한 풍란은 새삼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해 준다.
이윽고 현판의 운을 빌려 이진(而進)에게 읊어 주었다. 배가 아파 설사가 나오려 하여 도중에 몹시 고생했다. 나는 우스갯소리로,
“선유(仙遊)한 지 며칠 되지 않았으니 그동안 쌓인 더러움을 쏟아내려는가 봅니다.”
라고 말했다.

미천(彌川) 하류에 이르러 돌아가는 성부와 중온을 전송하고 이진과 더불어 백운지(白雲池)를 경유하여 단사(丹砂)로 향했다.
지는 해가 산을 머금고 저녁 이내가 나무를 둘러싼다. 용연(龍淵)은 거울처럼 맑고 마고(磨姑)는 그림자가 거꾸로 드리웠다. 걸음걸음이 그림 안으로 들어가는 것 같다.
함께 이진의 집으로 갔다. 주인이 우리를 위해 물고기를 잡고 막걸리를 사 와서 즐겼다. 거문고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고 바둑을 두면서 밤늦도록 잠을 자지 않았다.

아침에 갈선대(葛仙臺)에서 강을 따라 내려갔다. 곳곳마다 선현의 자취가 있고 굽이굽이마다 신선의 집이니, 작은 청량이라고 불러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정오에 하계(下溪)에 이르렀다. 성부와 중온이 술자리를 마련해 놓고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광초도 돌아와 있었다. 서로 마주 보니 매우 기뻤다.
책상 위에 주세붕의 ‘청량기(淸凉記)’를 펼쳐 놓고 읽었다. 글에서 느끼는 힘이 크고 시원(豪爽)하다. 경치를 그린 글이 그림과 같으니 참으로 젊은 아낙을 그린 것처럼 생동감이 넘친다.
이날 밤 하계에서 자고 이튿날 교동(校洞)에 머물렀다.


27일 계축일에 집으로 돌아왔다.
‘입산제영록(入山題詠錄)’을 아래에 적어 두어 다른 날 와유(臥遊)의 자료가 될 것을 마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