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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목 : 1901년 이만여의 오가산지
 글 쓴 이 : 이만여  이메일 등 록 일 : 2008-07-25 오후 9:27:48 조 회 수 : 1468

오가산지

선조인 퇴계 선생이 주자(朱子)의 ‘무이지(武夷誌)’ 뒤에, ‘서른여섯 개의 골짜기가 없으면 어쩔 수 없거니와 있다면 무이산이 제일일 것이다.’라고 쓰셨는데, 나는 이에 ‘서른여섯 개의 골짜기가 없으면 어쩔 수 없거니와 있다면 선생의 청량산이 서른여섯 골짜기 가운데 으뜸일 것이다.’라고 할 것이다.

대개 산의 맑은 기운이 모아져 뭉치면 조화가 기량을 드러내는 것이니, 아름다움을 다투어 우뚝 솟으면 기괴한 형상이 드러난다.

이 산 가운데 가장 잘 드러난 것이 열두 봉우리다. 그것들은 장인(丈人), 선학(仙鶴), 자란(紫鸞), 자소(紫霄), 연화(蓮華), 탁필(卓筆), 연적(硯滴), 금탑(金塔), 경일(擎日), 축융(祝融), 향로(香爐), 외장인(外丈人)이다.
대(臺)는 모두 여덟이니, 만월(滿月), 요초(瑤草), 풍혈(風穴), 채하(彩霞), 반야(般若), 참란(驂鸞), 연대(蓮臺), 치원(致遠)이다.

굴은 모두 셋이니, 김생(金生), 고운(孤雲), 의상(義相)이다.
층층이 쌓인 바위와 깎아지른 절벽은 허공에 위험하게 걸려 있고, 안개와 구름과 이내가 푸르스름하게 교대로 비치는 것을 바라보니, 바다에서 파도가 하늘에 솟구치는 것 같고, 죽순이 어지러이 돋아나는 것 같고, 큰 사람이 교만하게 누워 있는 것 같아, 눈이 어릿하여 표현할 수 없다.

축융봉의 서쪽 산기슭에서 구불구불 8, 9리를 가면 양쪽 기슭이 뚝 끊어지는 곳이 나오는데, 바로 고산(孤山)이다. 낙동강이 이곳에 이르러 동이처럼 넓게 퍼져 마치 거울을 열고 화장하는 것 같다.

동쪽 골짜기를 일동(日洞)이라고 하는데, 그 아래에 못이 두 개 있으니, 명월(明月)과 한속(寒粟)이다. 못 아래에는 경암(景巖)이 있다. 위는 평평하고 아래는 서려 있어 사람 대여섯 명이 앉을 수 있다.

남쪽으로 방향을 바꾸면 미천(彌川)과 장담(長潭)이 나오고, 언덕을 끼고 몇 리를 가면 백운동(白雲洞)이 나온다.

구불구불 가면 단사벽(丹砂壁)에 이른다. 푸른 산봉우리와 붉은 절벽이 천 길이나 깎은 듯 서 있다. 푸른 강이 마을을 안고 돌며, 푸른 절벽에는 구름이 일어나려 하고 그 밑의 푸른 물은 마치 그림 같다.

절벽 남쪽은 왕모성(王母城)이다. 산에는 대(臺)가 두 개 있는데 갈선(葛仙)과 고세(高世)가 그것이다. 갈선에서 한 골짜기를 넘으면 월란암(月瀾庵)이다. 암자는 산에 의지하여 물을 앞에 두고 있다. 대의 형상과 같이 뚝 끊어진 절벽이 일곱 개 있는데 초은(招隱), 월란, 응사(凝思), 낭영(朗詠), 어풍(御風), 능운(凌雲), 고반(考槃)이다.

물이 산을 돌아 굽이를 이루는 것이 셋이다. 석담(石潭)과 천사(川砂), 그리고 한 굽이는 바로 단사벽(丹砂壁)이다.

암자 서쪽으로 물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 보고 있는 것은 수석정(潄石亭)이요, 정자 뒤는 자하봉(紫霞峰)이다. 봉우리 아래 시내를 따라 서쪽으로 올라가면 동암(東巖)이 나온다. 또 물줄기를 거슬러 올라 2, 3리를 가면 토계(土溪)가 나온다. 이곳에 퇴계 선생이 살던 집이 있다. 광영당(光影塘)과 쟁명뢰는 한서암(寒棲庵) 앞에 있다.

시냇가 집을 따라 작은 산을 넘으면 도산(陶山)에 이른다. 여기서부터 청량까지는 거리가 30리다. 외장인봉 아래를 지나 골짜기를 나와 서쪽으로 강을 건너면 박석촌(博石村)이 나오고 절벽을 따라 고개를 넘으면 화현(火峴)이 나온다.

그곳에서 서쪽으로 3, 4리를 가면 하현(霞峴)이 나온다. 하현에서 남쪽으로 한 봉우리가 거세게 내달리다 우뚝 솟은 것은 건지산(搴芝山)이다. 축융, 장인봉과 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 하고 있다.

서쪽으로 몇 리를 가면 고산암(孤山庵)이 나온다. [선생의 어머니 김씨의 묘소이다.] 또 서쪽으로 몇 리를 가면 한 멧부리가 서 있는데, 낙모봉(落帽峰)이다. 봉우리 아래는 청계(淸溪)이다.

시내를 따라 서북쪽으로 7, 8리를 가면 기세가 웅장하고 높다란 산이 나오는데, 건지산보다 더 빼어나고 아름다운 용두산(龍頭山)이다. 산에 있는 절은 용수사(龍壽寺) [선생이 젊었을 때 독서하던 곳이다.]이다.

그 한 갈래가 남쪽으로 내려와 시내에 닿아 멈추는 것이 수곡(樹谷)이고, 골짜기 남쪽은 온계동(溫溪洞)이다. 산세는 부드러우며 확 트여 아름답다. 선생의 할아버지인 판서공이 이곳에 와서 살았고 뒤에 골짜기에 장사를 지냈다. 골짜기 서쪽은 연곡(燕谷)이고 남쪽은 영지산(靈芝山)이다. 청음석(淸吟石)은 하류에 있는 너럭바위다.

성현(聲峴)을 넘으면 도산에 이른다. 이곳에서 청량까지 30리다. 도산은 허재원(許載原)의 기문(記文)에 도산서당, 암서헌(巖棲軒), 완락재(翫樂齋), 유정문(幽貞門), 정우당(淨友塘), 절우사(節友社), 농운정사(隴雲精舍), 관란헌(觀瀾軒), 시습재(時習齋), 지숙료(止宿寮), 곡구암(谷口巖), 천연대(天淵臺), 운영대(雲影臺), 탁영담(濯纓潭), 반타석(盤陀石), 동취병(東翠屛), 서취병(西翠屛), 부용봉(芙蓉峰) 등을 18절경이라 했다.

몽천(蒙泉), 열정(洌井), 뜰에 핀 꽃, 물가에 늘어진 버들, 채소밭, 꽃에 파묻힌 섬돌, 서쪽 산기슭, 남쪽 물가, 녹음, 시원함, 낚싯대, 달 뜰 무렵의 배, 삐걱거리는 잔교, 정원, 어량(魚梁), 어촌, 이내 낀 숲, 눈 내린 좁은 길, 기러기 내려앉은 물가, 학이 서 있는 모래섬, 강가의 절, 관정(官亭), 넓은 들, 멀리 있는 산굴, 토성, 학교 등을 26절경이라 했다.

농암(聾巖), 분천(汾川), 하연(賀淵), 병암(屛巖)은 4절경이다.

낙재(樂齋)는 농운 서쪽으로 몇 걸음 거리에 있고, 석간대(石磵臺)는 운영대(雲影臺) 오른쪽 산허리에 있다.

오담(鰲潭)은 분천 하류에 있다. 산줄기가 청량에서 오다 이곳에 이르면 못에 이르러 깊은 곳에 넓게 펼쳐지며 확 트인다. 역동서원(易東書院)이 있는 곳이다. 남쪽으로 1리쯤 가면 풍월담(風月潭)이 나오고, 서쪽으로 방향을 바꿨다가 남쪽으로 15리쯤 내려가면 산세가 어금니가 서로 맞물린 것처럼 빙 돌아 나가는 운암곡(雲巖曲)이 나온다.

이상의 여러 경치는 비록 본기(本記)에는 실려 있지 않지만, 선생이 노닐며 가르침을 남기지 않은 곳이 없으니, 뒷사람들이 도산구곡에 넣은 까닭은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운암에서 청량으로 고개를 돌리면 강을 따라 4, 50리 거리에 아름다운 경관이 펼쳐지는데, 모두 이내와 연기가 끼는 아름다운 자연이다.

그렇다, 이 산은 동쪽 나라의 궁벽진 곳에 있는데, 태초의 아득한 기운이 갈라져서 높은 것 깊은 것이 나누어지고 굳어져, 헤아릴 수 없는 몇 천만 겁(劫)이 흐른 뒤에 하늘이 그 뛰어남을 감추고 땅이 그 기이함을 숨겼다가 선생을 기다려 곧바로 크게 드러냈구나. 중국의 용문(龍門), 무이(武夷)와 이름을 나란히 하고 아름다움을 대적할 만하니, 이 어찌 이 산이 큰 행운을 만난 것이 아니겠는가?

이 산에서 노니는 이는 운암과 풍월담에 배를 띄우고, 오담과 탁영 물굽이에서 노를 저으며, 도산서원의 상덕사를 배알하기도 한다. 또 강물을 거슬러 곧바로 올라가 모든 물굽이의 아름다운 경치를 구경하기도 하고, 열두 봉우리의 정상에 올라 탁 트인 경치를 바라보면 가슴이 상쾌해지기도 한다.

이 지역의 높은 것, 깊은 것, 흘러가는 것, 우뚝 서 있는 것, 동식물, 날아가는 것, 물에 잠겨 있는 것 들이 모두 밝게 드러난 이치가 아닌 것이 없으니, 어찌 아득한 구름과 이내가 낀 자연을 바라보고 다만 마음과 눈을 즐겁게 하는 데 그치겠는가?

본래 산의 이름이 수산(水山)이지만, 청량사가 이 산에서 가장 뛰어난 경치이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청량산이라고 부른다.

순조 임진년(1832년, 순조 32년)에 산 속에 집을 지어 많은 선비들이 학문을 강론하는 장소로 삼았다. 그 당을 ;오산(吾山);이라고 편액했으니, 선생이 쓴 발문에 나오는 ‘우리 집안의 산〔吾家山〕’에서 취한 것이다.

지금 임금의 병신년(1896년, 건양 1년) 변란 때 불에 탄 것을 경자년(1900년, 대한제곡
광무 4년)에 다시 짓고 옛 이름으로 편액을 걸었다.

나 만여(晩輿)는 자신의 참람함과 망령됨을 헤아리지 않고 한 권의 지(誌)를 엮었다.

삼가 선생께서 쓰신, 이 산과 연관된 시 50여 편을 골라 앞부분에 실었다. 이 산의 서남에서 도산구곡에 이르기까지 굽이를 따라 지은 작품을 모아서 뒷부분에 실었다. 또한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 선생이 이름 지은 것을 싣고, 총칭하여《오가산지(吾家山誌)》라고 했다. 삼가 한 권을 베껴 오산당에 비치하고 이 산의 고사(古史)로 삼는다.

신축년(1901년, 대한제국 광무 5년) 초여름 하순에 도산의 후손 이만여(李晩輿)가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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