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청량산록


경오년(1570년, 선조 3년) 11월 초하루 을축일.
나는 묵은 산가지〔籤〕를 놓아 점을 쳐 본 다음, 《주역》, 《근사록》, 《황극내편보해》과 《두시보유》를 끈으로 묶고, 붓과 벼루를 챙겨서 작은 상자에 넣은 다음 짚신과 대지팡이를 사서 여장을 꾸렸다. 청량산에 갈 계획이었으나 할아버지뻘 되는 분의 시제사(時祭祀)가 있었기 때문에 이틀이 지나도록 출발하지 못했다.

3일 정묘일.
친척 위(韋)의 집에서 제사를 모시고 난 후 술자리가 마련되었다. 술이 거나해지고 내가 작별을 고하면서,
“내일 산에 가려고 한다.”
라고 하니 모두 말하기를,
“이렇게 얼어붙는 추위에 하필이면 집을 떠나 멀리 가려고 하는가?”
라고 만류했다. 내가 웃으며 답하기를,
“산에 오르기로 마음먹은 것은 내가 단지 독서를 해서 과거 공부를 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네. 속세에 묻혀 쉬는 것이 누추한 집에서 지내는 것에 지나지 않고, 산수를 그리워하면서도 산수를 더럽히지나 않을까 하는 근심을 늘 품고 있었으니, 어찌 조롱에 든 병든 학같이 날개를 접고 길게 울면서 헛되이 하늘 만리를 나는 뜻을 품고 있는 것과 다르겠는가? 하물며 근래에는 향리에 시비가 일어나 내가 소나무 문을 잠그고 있다가도 조금이라도 응해 만나면 자못 시끄러운 일이 생기니, 내가 속인들을 대하던 눈으로 저 우뚝 선 산 빛을 마주하고, 쓸데없는 의논을 듣던 귀로 저 잔잔한 물소리를 듣게 되면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
라고 하였다.

4일 무진일.
다음날 늦게까지 곤히 자고 있었더니 형님께서 술병을 들고 와서 떠나는 길을 배웅해주셨다. 몇 잔을 마시고 또 취했다. 서출 동생인 연문(衍文)을 시켜 구검상(具檢詳)에게 편지를 전하게 하여 유산(遊山)하자는 약속을 했다. 또 부인에게 단술 두 항아리와 채소, 과일 두 그릇을 준비해서 여장에 넣게 했는데, 하나는 동년배인 이노경(李魯卿)씨가 아버지 심상(心喪)을 마친 것을 위로하기 해서이고, 다른 하나는 퇴계 선생이 한가할 때 마실 것으로 드리고자 한 것이었다.

5일 기사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길을 떠나려는데 부인이 문에서 배웅하며,
“요즘 호랑이한테 물리는 일이 많아서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 웅크리고 있는데 경솔하게 깊은 산에 들어가셨다가 해로운 일이나 생기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라고 하길래, 내가 말하기를,
“옛사람이 말하기를 ‘공부는 겨울에 하는 것이 좋다’고 했으니 어찌 따뜻한 방에 드러누워 헛되이 보내겠소? 옛날에 짜던 베를 잘라 보이며 계속 공부하기를 권한 사람도 있었는데 그대는 그보다 못하오.”
라고 하니 아내가 부끄러워하는 빛이 있었다.
저녁에, 오천(烏川)의 후조당(後凋堂)에 이르니 주인이 문 밖까지 나와 맞이해 주었는데, 그 아우인 신중(愼仲), 돈서(惇叙)와 유응현(柳應見) 군이 모두 와서 모여 있었다. 잠잘 방으로 들어가 잔을 씻고 술을 마시다가, 밤에 북이 세 번 울리는 무렵에는 달빛을 밟고 설월당(雪月堂)으로 가서 다시 술자리를 벌였다. 종이와 붓을 함께 펼쳐놓고는 술 한 잔에 한 수씩 읊기로 했다. 후조 형이 운을 부르며 시를 재촉하기에 내가 먼저 절구 몇 수와 고풍 한 수를 지었는데, 여러 사람들 가운데 혹 화답을 하기도 하고 하지 못하기도 했다. 닭이 울어서야 각기 돌아가서 갔다.

6일 경오일.
다음날 아침 출발하려고 하자 주인이 추위가 심하다고 가지 못하게 말리면서 또 술을 권하였다. 예닐곱 잔을 주고받고는 상례(喪禮)에 대해 논했으나 끝내지 못했는데 갈 길이 바빠서였다. 곧바로 온계(溫溪)에 있는 선인의 옛 집을 향해서 가다가 피곤하고 졸려서 잠시 쉬었다.
이노경의 집으로 가니 아침에 이미 사당에 신주를 모시는 부묘(祔廟)가 끝나 있었다. 노경 형제 세 사람이 섬돌에서 내려와 맞이하여 앉아서 애통해 하였는데 슬픔이 얼굴에 가득하였다. 내가 사당에 술잔을 올리고 아뢰겠다고 하자 곧 사당문을 열고 들어가게 해주어 무릎을 꿇고 조문했다. 사당은 새로 지어서 날아갈 듯하여 공경하는 마음이 들었다. 제례를 올리고 나서 마주앉아 슬픔을 위로하는데, 잠시 뒤에 상상(上庠) 금응훈(琴應燻)과 수재(秀才) 박려(朴欐)가 봉성(鳳城)에서 왔다. 제사 올리고 남은 술로 잔을 세 차례 돌리고 나서 자리를 파하였다.
진사인 오겸중(吳謙仲)씨가 밤에 이야기나 하자며 나를 청하여 달밤에 문을 두드리니 등불을 환히 밝히고 기다린 지 오래였다. 무릎을 바짝 대고 가까이 앉아서 고금의 일들을 이리저리 이야기하다가, 겸중씨가,
“내일은 어디로 가는가?”
라고 하여,
“문화(文華)로 간다.”
고 하니,
“그 산은 봄에 꽂이 환하게 피었을 때와 가을에 나무가 단풍으로 타오를 때가 경치가 좋고 겨울날은 별로 좋지가 않다네.”
라고 하였다. 내가,
“옛날에 주 문공(朱文公) 이 남악(南嶽)에 올랐을 때도 겨울날이었으나, 그 때에 ‘숲을 지나 눈 밟으며 종소리 찾아가니, 경치는 사람을 만나 걸음마다 새롭네.’라 하지 않았던가?”
라고 하니, 겸중이 또,
“혼자 가면 누가 벗이 되나? 벗이 없으면 흥도 안 난다네.”
라고 하였다. 내가,
“사령운(謝靈運)이 화산(華山)을 유람했을 적에 벗이 돼 준 사람이 누구던가? 그 시에 ‘생각이 맑으니 몸이 절로 가볍고, 마음이 맞으니 이치도 어그러지지 않네’라 하였으니 산을 유람하는 데는 생각이 맑고 마음만 맞으면 되지 어찌 반드시 여럿이 가야 하는가?”
라고 하니 겸중이 감히 공박할 말을 찾지 못하였다.
밤이 깊어 개울길로 나오니 말은 흰 모래를 밟고 기러기는 한밤의 추위를 치며 날아가고 있었다. 마치 옛날 왕휘지(王徽之)가 눈 내리는 밤에 문득 대규(戴逵) 생각이 나서 그의 집 앞에까지 갔다가 흥이 다하자 만나지 않고 그냥 돌아갔던 것과 같았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집에 들어가 잤다.

7일 신미일.
다음날 아침 여장을 급히 꾸려 계당(溪堂)에 가서 퇴계 선생님께 인사를 드리고 있는데 민백향(閔伯嚮), 유응현 등이 잇달아 왔다. 선생님께서 먼저 내게 물으시기를,
“어디로 가는가?”
라고 하셔서 내가,
“청량으로 갑니다.”
라고 하니 선생님께서,
“그 산은 겨울 경치도 좋지. 다만 바람이 몰아칠 때는 숲이 흔들리면서 온갖 소리가 나고 다시는 잠잠해질 것 같지 않으니 모름지기 남향으로 난 작은 암자가 있는 조용한 곳을 택하는 것이 좋을 것이네.”
라고 하셨다.
이는 앞서 여러 벗들의 견해를 훨씬 뛰어넘는 것으로 그 말씀을 들으니 생각이 절로 트이는 듯했다. 바야흐로 경서 가운데서 이것저것 어려운 것을 여쭈려고 하는데 갑자기 금 첨지(琴僉知)가 문에 와 있다고 알렸다. 선생님께서 얼른 일어나서 달려가 맞아들였다. 우리는 마당 아래 몸을 굽히고 서서 바라보았는데, 창백한 얼굴에 백발의 모습은 진실로 지상신선이었다.
마침내 얼른 인사를 하고 나와서 시냇가에 앉아 시간을 보내다가 다른 친구들은 모두 말을 타고 가고, 나와 응현은 농운정사(壟雲精舍)로 돌아갔다. 김사원(金士元)이 먼저 숙소에 와 있었는데 초면에 말이 공손하지 않아서 조금 있다가 헤어졌다. 바로 불을 켜고 응현과 함께 각각 읽던 것을 펼쳤는데 응현은 《시전》을 펴고 나는 〈기주〉 [기자가 지었다는 상서의 홍범구주]를 폈다. 응현이 말하기를,
“자네는 과거공부를 하지 않는가? 보는 책이 어찌 그리 심오한가?”
라고 하였다. 내가 웃으며 말하기를,
“과거를 신경쓰지 않는 일이야 높은 선비가 숭상하는 바이지만 나 같은 사람이야 그럴 수가 있겠는가? 재주는 비록 민첩하지 못하나 작은 성취에 안주하는 것은 이전의 성인에게 부끄럽고, 게으르고 못난 사람이 스스로 움츠리는 것에 가까울 것 같네. 게다가 자네는 주 문공의 말을 듣지 못했는가? 한 달 중 열흘은 과거시험 준비를 하고 나머지 날은 학문을 하는 것이 좋다고 하였네. 그런데 과거공부가 학문을 방해할까 걱정되지는 않지만 오로지 뜻을 빼앗을까 걱정이니, 뜻을 빼앗기면 근본이 뿌리 뽑히기 때문이네. 그래서 학문에 방해가 될까하는 걱정은 작고, 뜻을 빼앗길까 하는 걱정이 큰 것이라네. 다만 뜻을 세운 것이 어떠한가에 달려 있으니 뜻이 기를 이기면 득실의 누를 면할 수 있고 또 그 명(命)을 믿어서 자신의 학문이 여기에까지 이른다면 어느 쪽을 저절로 가벼이 여기겠는가? 어찌 반드시 과거공부를 그만둘 마음이 있다고 해서 스스로 그만둘 수 있겠는가?”
라고 하니, 응현이 말하기를,
“공은 본디 벼슬길에 뜻이 없는데다가 진실로 마음을 비웠으니 이제부터는 뜬 이름을 버리고 하늘이 준 천성을 닦는다면 그것도 좋지 않겠는가?”
라고 하였다. 이날 밤 말을 주고받다가 지칠 대로 지쳐서야 잠이 들었다.

하루를 머무르고 암서당(巖棲堂) 옆 두둑을 산보하는데 높이 있는 뜨락이 깨끗하고 아득하니 맑은 경계로 올라온 것 같아서 속세의 인간이 오를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국화는 시들고 연꽃도 져서 향기를 찾을 수 없었으나, 매화는 아홉 가지가 있었고 대나무에는 움이 하나 트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선생이 시에서 흙집을 큰집에 비유해서 읊은 것이었다. 물가에 홀로 앉아 바라보니 절뚝거리는 나귀를 탄 조그만 아이가 보였다. 바로 나의 아들인 행가(行可, 1553년 ~ 1623년)가 나를 뒤따라오는 것이었다.

다음날 응현과 함께 왼쪽에는 책을 끼고 오른손에는 술병을 든 채 도산 북쪽 고개를 넘어가노라니 때마침 이슬비가 온 숲을 적셨다. 치렁치렁한 옷을 대강 여민 채 말을 멈추고 멀리 바라보니 문화 전체가 문득 눈 아래 펼쳐졌다. 검은 구름이 반쯤 물러가자 내가 응현을 돌아보며,
“이것이 이백(李白)의 시에서 말한 ‘산은 사람 얼굴을 따라 일어나고, 구름은 말머리에서 피어난다’는 것이네.”
라고 하고, 계당(溪堂) 문에 나가 서서 내가 또 말하기를,
“양정문(楊程門)에 노닐며 눈을 맞을 때 같네.”
라고 하니, 응현이 말하기를,
“바로 그 때의 경치 같구먼.”
라고 하였다.
조금 있다 안으로 인도되어 들어가니 선생께서 내게 성산(城山) 절구 두 수를 주셨다. 손으로 펼치고 조그만 소리로 읊어보니 만금을 얻은 것보다 좋았다. 이는 이전에 청했던 것인데 이제 주신 것이다. 질문이 끝난 뒤 차고 있던 술병을 꺼내서 서너 잔을 돌린 뒤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날 저녁 다시 응현과 함께 농운정사로 돌아가 밤이 늦도록 술을 몇 사발 마시며 각기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응현이 말하기를,
“여기 와서 선생님의 얼굴을 뵙고 선생님의 말씀을 들을 때마다 묵은 때가 씻겨 나가는 것 같고 몽롱한 꿈이 깨는 것 같네.”
라고 하였다. 이에 내가,
“과연 그런 것 같네. 옛사람이 말하기를 ‘구름을 헤치니 푸른 하늘이 보이고, 가시나무를 자르니 바른 길이 나온다.’고 했으니 그렇지 않은가? 내가 소년 시절에 선생님을 뵈었을 적엔 귀신과 같이 신명함이 있으셔서 말씀하시는 바는 그 끝을 헤아리지 못하였고 큰 강처럼 넓고 트이셔서 하시는 바는 그 끝을 알지 못하였네. 요즘은 선생님의 묘한 말씀을 들으면 저절로 이해가 되고, 하시는 일을 보면 잘 알 수가 있으니 내 공부에 조금이나마 진전이 있었다고 스스로 믿게 되었네. 다만 천성이 둔하고 나이가 많아 그 단계에 오르지 못할까 걱정이고 또 다리가 그 현실을 딛고 있지 않을까 걱정이네. 어떻게 하면 이 둔한 자질로 훗날 완성을 보게 될까?”
라고 하니 응현이 많은 말로 북돋아주면서 함께 공부를 마칠 것을 기약하였다.

10일 갑술일.
일찍 일어나서 세수하고 옷과 관을 바르게 한 뒤, 문을 열어보니 가랑비가 강과 하늘에 내리고 있어 맑은 경치를 마음껏 감상하였다. 마침 사원이 닭을 보내고 응현의 집에서 술을 보내와서 곧 술을 따르고 닭을 잡았다.
기분이 홀가분해져서 각자 몇 구를 지어 응현은 내게 주고 나는 응현에게 주었는데 그러고 나서도 서로 미련이 남아 헤어지기 어려웠다. 응현도 나와 함께 동행하고자 했으나 서원(西原)의 부모님을 뵐 약속 날짜가 가까이 다가왔기 때문에 인사를 나누고 헤어져 곧바로 고산(孤山)으로 갔다. 느지막이 동네 어귀로 들어가 외조부의 묘를 보고 말에서 내려 두 번 절하였다. 절에서 밥을 먹고 출발하면서 겨울에 쓰려고 종이를 샀다. 그리고 어릴 때 다니던 자취를 보고 느끼는 바 있어 율시 두 수를 지었다.
행가와 더불어 나란히 가는데 산은 깊고 길은 좁았다. 바람은 맵고 눈은 흩날리는데 종이 초행이라 여러 번 길을 잃었다. 지나가던 승려를 만나 앞에서 길을 인도하게 해서야 건지산(乾支山)을 지나 정오에 불현(佛峴)을 넘었는데 눈을 들어 열두 봉우리를 바라보니 자욱한 안개가 시야를 가려 또렷하게 볼 수 없었다.
나귀 등에서 즉시 시를 지어 ‘구름이 동네 어귀를 가려 나그네 길을 잃게 하고, 바람은 봉우리로 불어와 신선의 집을 생각하게 하네.’라고 하였다.
그때 마침 눈바람이 불어 채찍을 들고 길을 재촉했다. 가파른 계단이 얼어서 열 걸음에 아홉 번은 미끄러져 넘어졌다. 박석점(博石店)에서 묵고 가려 하니 따라온 승려가 말하기를,
“한낮이면 절에 도착할 수 있을 겁니다.”
라고 하여 이에 시내를 건너 골짜기로 들어갔다. 울퉁불퉁한 길과 숲으로 된 골짜기는 들어갈수록 더욱 깊어졌다. 말이 지쳐 채찍질을 할 수가 없어서 천천히 가니 두 소릉(杜少陵) 이 ‘평소 그윽한 정취를 즐겨 말을 타고 거님을 아끼지 않았네.’라고 한 것과 같았다.
행가가 뒤에 숲을 사이에 두고 걸어오는데 그 모습이 몹시 지쳐보였다. 내가 장난으로,
“《주역》에 이르기를 ‘예의에 맞는 태도로 자기의 발걸음을 꾸미고 수레를 버리고 걸어간다.’ 했으니, 걷는 것은 군자가 힘써 하는 것이지만 소인은 천하게 여기는 것이라고 했다. 너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느냐?”
라고 하니 행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계곡이 몇 리에 걸쳐 있었는데 구비마다 못이 있어서 걸음마다 감상할 만했다. 그런데 어둠이 온 산을 에워싸기 시작해서 잠시도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다. 산 아래 이르러 말을 두고 지팡이를 짚고 기운을 내서 올라가니 찬바람이 정신없이 불어 겨드랑이를 끼고 높은 데까지 훌쩍 올려다 줄 것 같았다.
별실에 먼저 도착하니 늙은 승려가 엎어질 듯 달려 나와서 맞이하였다. 도롱이를 벗고 판각에 앉아 연봉(蓮峯)을 바라보니 만 길이나 되는 봉우리가 깎아지른 듯 우뚝 서 있었다. 안연(顔淵)의 ‘높은 곳을 바라보고 뜻을 굳게 가졌다’는 어구를 읊으니 그 학문의 높은 경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조금 있으니 연대사(蓮臺寺)의 승려 몇 명이 와서 맞이하고 지장전으로 옮겨 머물 것을 권하므로 곧 옮겨갔다. 단청이 산뜻해서 머무를 만하였다. 술에 취해 곤해서 책상에 기대 누워 있으니 구면인 기 상인(奇上人)이 포도탕(葡萄湯)을 내왔고 처음 보는 희 상인(熙上人)은 시축을 내왔다. 상을 올린 자는 어린 상좌였고 등을 켜는 자는 늙은 수좌였다. 등불을 마주하고 포도탕을 마시며 상에 기대 시를 보니 몸과 마음이 상쾌해졌다.

11일 을해일.
다음날 아침 행가가 치원봉(致遠峯)을 정신없이 바라보면서 고개를 내려다보지도 않고 들고만 있었다. 내가 말하기를,
“너의 이런 마음을 학문하는 데 쏟는다면 실력이 끝없이 향상될 테니, 오늘 한걸음 나가고, 내일 한걸음 나가고, 백척간두에서 다시 한걸음 나가면 성현이 되는 것이 어찌 어렵겠느냐?”
라고 하였다. 그 뒤로는 나그네의 마음이 쓸쓸하여서 날마다 시를 읊조리는 것으로 일을 삼았다.

15일 기묘일.
동짓날 밤중에 드문드문 울리는 종소리에 꿈에서 깼는데 절의 승려가 팥죽을 가지고 왔으나 물리고 먹지 않았다. 그리고 손을 씻고 《주역》을 펴서 ‘박복괘(剝復卦)’를 읽으며 하늘과 사람의 움직이고 멈추는 이치를 살폈다.
아침 해가 중대로 막 붉게 떠오르자 희 상인이 맨 발로 닫힌 문을 두드리며 말하기를,
“이 산을 유람하는 것은 꽃 피고 나무가 우거질 때가 가장 좋습니다.”
라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자네는 은거하는 사람이 아니라 번화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로다. 산을 보는 것이 어찌 울긋불긋한 모습만 취하는 것이겠는가? 진실로 즐길 만한 도가 있다네.”
라고 하니 희 상인이 가만히 있었다.
며칠 동안 승려들을 물리치고 혼자 있으면서 글의 뜻을 이해하는데 왕왕 분명하게 깨닫게 되는 곳이 있으면 곧바로 기록해두었다. 기록해두지 않으면 곧 막혀버리는 것이 마치 산길을 걷지 않고 내버려두면 잡초가 나서 막히는 것과 같았다. 흥이 나서 절 앞의 바위 위를 이리저리 거닐며 눈을 들어 멀리 바라보면, 호탕해져서 바람을 부리고 천둥을 치게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끝없이 두루 돌아다니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이렇게 하는 사이에 마음의 쓸쓸하던 감정이 문득 사라지고, ‘마음을 지키기는 호랑이를 잡듯이 급히 하고 심성을 수양하기는 곰이 숨을 들이 마시는 듯한다.’는 구절을 얻었다.

17일 신사일.
산 밖으로 나가는 승려가 있어서 오천의 여러 형들의 시와 규봉(圭峯) 선생의 시에 화답한 것을 부쳤더니 며칠 지나 답장이 왔다. 오천은 글로 시구를 대신해서 보냈고, 규봉 선생은 4장을 차운해서 보냈다. 읊조려보니 쟁그랑거리며 악기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18일 임오일.
새벽부터 비가 오더니 아침이 되어서야 그쳤다. 산의 모습이 늠름하여 범하지 못할 것 같았다. 창에 기대 산과 마주하고 앉으니 공자의 엄숙한 기상을 보는 것 같았다. 이날 밤 승려가 와서 불빛 아래서,
“노스님께서 저녁때 돌아가셨습니다.”
라고 아뢰는데 몹시 슬퍼하는 빛이었다. 내가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천지 만물 가운데 오래 살며 죽지 않은 것이 어디 있겠는가? 낮과 밤으로 비유하자면 오늘밤이 가고 나면 내일이 다시 오는 것과 같고 또 이 등불이 밝으면 사는 것이고 꺼지면 죽는 것과 같다. 이치가 실로 이와 같으니 어찌 슬퍼하리오. 그러나 이는 너희 불가의 윤회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라고 하니 승려가,
“예, 예.”
라고 하였다.

19일 계미일.
저녁에 희 상인이 가지고 온 시축에 차운하였는데 선생의 시가 앞에 있었다. 오(悟), 옥(玉), 순(淳) 세 상인의 시축에 차운하였는데 이도 모두 선생의 시가 앞에 있었고, 또 극호(克浩), 혜원(惠圓), 천측(天則)의 시축에도 차운하였는데 여기에는 약산(若山), 규봉, 소고(嘯皐)의 시가 앞에 있었다. 시축에 있는 여러 선비들은 모두 세상에 이름난 선비들이었으나 많아서 일일이 다 들 수가 없기 때문에 앞에 있는 사람을 든 것이다. 그 뒤를 이어 지은 사람들은 셋도 있고 다섯도 있었는데 평범한 일이라 기록하지 않는다.

20일 갑신일.
걸어서 연사(蓮社)의 남대(南臺)로 갔다. 날은 이미 저물어 추위에 떨던 거위는 둥지로 돌아가고 짝 잃은 기러기만 점점이 날고 있었다. 홀로 서서 맑은 휘파람을 부니 호연지기가 절로 일어났으나 문득 기운이 산만하게 흩어져 제멋대로 되고, 밖으로 들리고 보이는 것에 이끌릴까 두려워졌다. 산을 오르는 것도 오로지 이러한 마음 때문이고, 물로 가는 것은 오로지 이러한 마음을 위해서이니 마땅히 이를 살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행가에게 이르기를,
“사람의 심성은 정해진 것이 있으니 나에게서 이를 굳게 지킨 뒤에야 능히 바깥의 것을 맞아 응할 수 있다. 산을 보며 즐기는 것은 어진 사람의 일이요, 물을 보며 즐기는 것은 지혜로운 사람의 일이니 이러한 심성을 닦아 끝까지 잃지 않는다면 고명한 데로 나아가는 것이 어렵지 않다. 이는 나와 네가 마땅히 힘써야 할 것이다. 정자(程子)께서 이르시기를 ‘산을 보고 물을 완상하는 것도 또한 마음을 풀어놓는 것’이라 하셨으니 어찌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라고 하니 행가가 말없이 있다가 이윽고,
“본받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22일 병술일.
저녁을 먹은 뒤 진불암(眞佛巖) 동쪽 바위 위로 나가 노닐었다. 바위가 푸른 자리를 편 것과 같이 평평해서 앉았다 일어났다 하고 있었는데, 승려가 바위에 이름을 써서 뒷사람이 볼 수 있도록 남기라고 권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그대 생각에는 이 돌이 굳고 단단해서 만겁을 지나도 닳아 없어지지 않을 것 같은가? 이것도 또한 형체도 없이 녹아 없어지는 때가 있을 것이다. 돌 뿐만이 아니라 산도 그러하며, 산 뿐만이 아니라 천지도 또한 그러하다. 다 녹아 없어지고 다시 새로 만들어진다면 이 산의 꼭대기가 어느 곳에서 솟아올라 또 그 누가 나처럼 그곳에 홀로 노닐며 깊이 성찰하게 될지 모를 일이다. 만약 단단한 바위가 오래도록 없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바람에 깎이고 비에 씻겨서 머지않아 없어질 것이니 어찌 쓸데없는 것으로 푸른 이끼를 더럽히겠는가?”
라고 하니 이에 승려가 껄껄 웃었다.

23일 정해일.
책을 읽다 지쳐서 일어나 이리저리 거니는데 우연히 벽에 걸린 판에서 김언순(金彦純)과 계순(季純)의 이름을 보았다. 먹이 아직도 마르지 않은 것 같은데 한 사람은 조정의 관리가 되고 한 사람은 저승 사람이 되었으니 몇 년 사이에 인사의 길흉이 어찌 이리 다른가? 언순이 작년에 나와 함께 성균관에 뽑혔고 금년 봄에 또 서울에서 얼굴을 본 기억이 있는데 잠깐 사이에 인간의 죽고 사는 일이 이와 같다. 손으로 그 이름을 어루만지며 한참을 슬퍼하였다.

26일 경인일.
밖에서 온 승려로부터 퇴계 선생의 병환이 더 심해지셨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가서 알아보려 하였으나 날이 이미 어두웠다. 암자 앞에 나와 앉아 하늘에 가만히 기도하기를 ‘하늘이 선생께 도덕을 준 것은 우연이 아닌데 어찌 질병이 몸에 덮치게 하였나이까?’ 하였다. 밤이 깊어 서실로 들어가 걱정으로 밤을 지새우고 다음날 새벽에 승려를 시켜 병세를 물어보게 하였더니, 옆에 있던 사람들이 답하기를 증세에 차도가 있다고 하였다. 그럼에도 대인의 명(命)이 걸려 있는지라 마음이 조금도 놓이지 않았다.
이날 밤 기름과 양식이 떨어졌다고 하니 조금 있다가 승려가 기름으로 등잔을 채워 주었다. 다음날 아침 집의 종이 식량을 가져왔으니, 어찌 《주역》의 이른바 ‘여행하다 들어간 숙소가 불타버리고 또 그 종까지 잃어버린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29일 계사일.
승려들이 무차대회(無遮大會) 를 열고 여러 암자도 따라 해서 불경 소리가 우레 같았다. 내가 이에 암자 앞에 나와 앉으니 늙은 승려가 옛 일을 이야기하면서,
“이 산에는 옛날에 세 분의 큰 현인이 계셨으니 의상(義湘), 원효(元曉), 최치원(崔致遠)입니다. 최치원은 역사책에 실려 있지만 나머지 분들에 대해서는 자세한 것을 듣지 못했습니다. 또 김생(金生)이라는 분은 재산(才山) 땅에서 태어나 이 산비폭굴(山飛瀑窟)에 들어가서 글씨를 연습했는데 지금도 그 필적이 우리나라에 두루 남아 있습니다.”
라고 하였다.
그 승려는 또 연암(蓮庵)을 지을 때의 일을 말하면서 그 일을 맡아하던 승려가 일을 마치지 못하고 죽은 뒤 뿔이 셋 달린 소가 되어 사방의 물건들을 실어 와서 이 절을 지었으니 신령스럽고 기이한 공을 전할 만해서 벽에 그 화상을 그리고 동문에 묘를 만들었다 하고 이는 숙원이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룰 수 있었던 것이라고 하였다. 아아, 이 또한 거짓을 펴서 사람을 속이는 이야기이다. 사람이 만약 이승에서 이루고 싶었으나 이루지 못한 것을 후생에서 이룰 수 있다면, 무릇 선비로 성인군자가 되고자 했으나 이루지 못한 것을 후생에서 이루지 못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12월 2일 을미일.
술을 조금 마시니 흥이 일었다. 승려 두 사람을 불러 한 사람은 술병을 들게 하고 한 사람은 벼루와 종이를 들게 해서 별실을 지나 치원대(致遠臺)로 올라갔다. 눈 때문에 충계가 미끄러워 손으로 그러잡고 올라가 털방석을 깔고 잠시 쉬고 있는데 안중사(安中寺)의 승려 대여섯 명이 나와 맞이하였다. 바위 아래에 땔나무를 쌓아두었기에 물어보니,
“총명수(聰明水)인데 바람이 닿으면 얼어서 물을 길 수가 없기 때문에 바람을 막으려고 쌓아놓은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손으로 떠보려고 했으나 잘 되지 않았다. 치원암(致遠庵)에 앉아 벽 위에 있는 약산의 시에 차운하여 읊고 행가에게 받아쓰게 하고, 극일암(克一庵)에 들어가 또 몇 구를 읊고 승려가 가지고 간 종이에 쓰게 했다. 호사(浩師)가 내게 바람굴〔風穴〕과 최선(崔仙)의 바둑판이 있는 곳에 올라가 볼 것을 권하기에 내가 농담으로,
“그곳에 가면 바둑 두느라 도끼자루 썩는 줄도 몰라서 돌아오지 못할까 걱정이네. 하필이면 진나라의 왕질(王質)이 소실산(小室山)에서 그랬던 것처럼 오래 머물겠는가?”
라고 하니 따라온 사람들이 모두 껄껄 웃어댔다.
잠시 뒤 청량탕(淸涼湯)에 올라가서 차고 있던 술을 같이 간 승려들에게 따라 주었는데 잔을 두 번 돌리고 나니 술이 떨어졌다고 했다. 앉아서 판 위에 씌어진 송재(松齋) 이 선생의 십 절을 읊어보니 마치 옥이 잘게 부서지는 것 같았다. 진실로 소단(騷壇)의 노련한 솜씨였다. 나도 몇 구절을 지어 읊조렸는데 돌아갈 일을 잊어버려 따라온 승려가 재촉하고서야 출발했다. 몇몇 승려들과 함께 절벽에 벌떼처럼 달라붙어서 간신히 김생굴(金生窟)로 올라가니 비폭(飛瀑)이 얼어붙어 공중에 솟아 있는 것이 마치 은 기둥이 하늘을 받치고 있는 것 같고 옥무지개가 절벽에 거꾸로 달려 있는 것 같은데 그 기묘한 경치를 그려낼 수가 없다.
날이 저물어서 북쪽으로 나오다 길이 끊어진 곳에 이르러 나무를 걸쳐 다리를 놓았으나 겁이 나서 앞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속으로 탄식하기를 ‘도를 행하는 것도 이와 같으리라. 평지를 맞닥뜨리면 가는 게 어렵지 않지만 깎아지른 곳에 이르게 되면 큰 용기로 힘을 내지 않으면 한 걸음도 나갈 수 없는 것이다.’ 하고 상대승(上大乘) 앞 대에서 잠시 쉬었다.
저물녘에 보현암(普賢庵)에 올라가니 벽 동쪽에 옛날에 내가 지은 시가 있어서 스스로 다시 그 시에 화답하려고 했으나 술에 취해 짓지 못했다. 서쪽으로 백 걸음쯤 가서 몽상암(夢想庵)을 찾았는데 가는 길이 가파르고 높아서, 올라가려고 해도 몸이 뒤로 쳐지니 두 승려가 나를 끼고 올라갔다. 내가 기뻐하며 말하기를,
“도를 배우는 것도 이와 같다. 경(敬)과 의(義), 이 두 가지로 붙들게 한다면 갑자기 아래로 놓는다 해도 떨어지지 않고 오로지 위로 올라가 천덕(天德)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라고 하고 암자에 이르러 아들을 시켜 창 위 문지방에 이름을 쓰게 하고, 호사가 휘파람으로 부르기에 돌아왔다.
올라가기는 그렇게 어려운데 내려오는 것은 어쩌면 이리 쉬운가? 이것이 이른바 선을 따르기는 산을 오르는 것 같고 악을 따르는 것은 산이 무너지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늙은 승려가 중도에서 나를 맞이하여 서실로 데리고 들어갔다. 자리에 기대 자다가 밤 이경이 되어서 등잔불을 켜고 앉으니 옆에 있던 한 승려가 말하기를,
“이 산이 요즘 나무 캐는 사람들이 날마다 침범해 오는데다가 화전(火田)이 해마다 넓어지고 있어서 장차 민둥산이 되어버려 볼 만한 게 없게 될 겁니다.”
라고 하는 것이었다. 내가 깜짝 놀라 말하기를,
“그런가? 그런데 이는 산 뿐만이 아니라 인심도 또 그러하니 어찌 밤기운이 싹을 만들고 비와 이슬이 이를 축여서 자라게 함이 없어서이겠는가? 아침과 낮에 사람이 하는 일로 어지럽게 되어 사라지는 것이다. 이제야 이 산이 민둥산이 되는 것과 무성해지는 것이 모두 사람이 기르고 기르지 않는 데 달려 있다는 것을 알겠노라. 자신의 마음을 키우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면 어찌 이를 살핀 뒤에 시작하지 않겠는가?”
라고 하였다.

3일 병신일.
다시 여러 봉우리를 둘러보기로 하고 아침을 막 먹으려는데 문득 승려가 이봉원(李逢原)의 편지를 전하니 선생님의 병환이 위독하시다는 것이었다. 곧바로 몇 명의 승려에게 보따리를 지워서 먼저 보내고, 점을 보는 사람을 불러서 길흉을 물어본 뒤에 출발하였다. 승려들 십여 명이 절문 밖에 둘러서서 시를 써주기를 바랐으나 모두 거절하였다.
동문을 걸어 나오는데 다리에 힘이 쑥 빠졌다. 강다리에 한동안 앉아 있다가 승려를 시켜 마을의 소를 빌려 오게 해서 타고 갔다. 어스름에 계당에 이르러 들어가서 선생님을 뵈오니 선생님은 가래와 열이 많아서 말씀하시는 것도 힘들어 하셨다. 나를 보시고는,
“청량산에서 오는가?”
라고 하여 감회를 말씀드렸더니 단지 고개만 끄덕이실 뿐이었다. 여러 자제들과 함께 곁에서 시중을 들었다. 구성(龜城)의 참봉 이석간(李碩幹), 기성(箕城)의 생원 민응기(閔應褀), 분천(汾川)의 판사 이연량(李衍樑) 등이 모두 모여 맥을 짚고 약을 조제하였으나 조금도 효과가 없었다. 이때 집 안팎에서 함께 시중 든 사람이 칠십여 명이었으나 여러 사람의 정성이 통하지 못하고 하늘이 불쌍히 여기지 않아서 8일 신축일에 선생님은 정침에서 돌아가셨다.
태산이 무너지고 대들보가 꺾이니 그 애통함이 어떠하였겠는가? 사서(司書), 사화(司貨) 및 상례(相禮) 등의 일은 여러 제자들이 각각 맡아서 조금도 차질이 없었다. 이날 밤 바람이 불고 눈이 크게 내려 사람들이 얼어 죽기도 했으나 일하는 사람들은 추위도 잊고, 있는 힘을 다해 일했다. 장례를 치른 뒤 조문객들은 통곡을 하다 흩어지고, 나는 도산 시습재(時習齋)에 머물렀는데 산을 뒤덮은 구름은 참담하게 수심을 머금고 있는 것 같고, 보이는 것마다 옛날 생각을 떠오르게 해서 나도 모르게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리곤 했다.

4일 정유일.
다음날 아들인 행가, 유응현 군, 남의중(南義仲) 군과 같이 돌아오는 길에 상사(上舍) 김돈서(金惇叙)와 수우(守愚)를 만나 고삐를 나란히 하고 가서 돈서의 집에서 함께 잤다.

5일 무술일.
그 다음날 함께 출발해서 주촌(周村)을 지나는데 용궁태수(龍宮太守) 신예중(申詣仲), 습독(習讀) 이대용(李大容) 숙부 및 수재 이정가(李靜可)가 이희옹(李希雍)의 별장에서 말을 먹이고 있기에, 김군, 유군을 데리고 찾아갔다. 술을 마신 뒤 헤어지고, 응현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 왔다.

기(記)에 이르기를, 선성(宣城)의 북쪽, 봉성(鳳城)의 남쪽에 산이 있으니 바로 청량산이다. 태백산(太白山)을 등지고 학가산(鶴駕山)을 마주하고 있으며, 왼편에는 일유산(日游山)이 있고 오른편에는 소백산(小白山)이 있다. 둘레는 백리이고 산꼭대기에서 하늘까지는 다섯 자 밖에 안 되며 황지(黃池)에서 흘러온 물이 그 아래를 두르며 흐르고 동쪽으로 단양의 경계와 닿아 있다.
여러 봉우리가 나란히 이어 있으며 층층 절벽이 우뚝 솟아 있는 것이, 단정한 사람이나 바른 선비가 옷깃을 바로하고 홀로 서 있는 것과 같아서 보통 사람들이 겨루지 못할 바이다. 12봉이 있으니, 연화(蓮花), 자소(紫霄), 탁필(卓筆), 연적(硯滴), 경일(擎日), 금탑(金塔), 장인(丈人), 선학(仙鶴), 자란(紫鸞), 축융(祝融), 문수(文殊), 향로(香爐) 등이고, 암자가 열아홉 개 있으니 백운암, 만월암, 원효암, 몽상암, 보현암, 문수암, 진불암, 연대암, 별실암, 중대암, 보문암, 상하대승암, 상하청량암, 김생암, 치원암, 극일암, 안중암 등이다. 봉우리 이름은 신재(慎齋) 주세붕(周世鵬)이 지었고, 암자의 이름은 불자들이 지었다.
신재 주세붕의 시에 ‘청량산 열아홉 절, 절마다 문 앞에는 바위가 있네.’라고 하였는데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그 뒤 승려가 암자 둘을 따로 지었는데 서초막(西草幕)과 지장전(地藏殿)이 그것으로 모두 스물하나가 된다. 또 의상굴과 김생굴 두 굴이 있는데 의상, 김생, 원효, 치원은 모두 신라 도류(道流)의 이름으로, 생각하건대 그들이 여기를 거쳐 갔기 때문에 그 이름을 쓴 것이 아닌가 한다. 내가 어려서부터 지팡이를 짚고 산을 오른 것이 몇 차례나 되는지 모르지만 이제 와서 다시 구경하니 신령스럽고 기이하며 황홀한 것이 눈과 귀로 형용하기 어렵고 바로 새로 만든 병풍을 신선 세계에 걸어놓은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이다.
눈 쌓인 봉우리, 얼음 덮인 골짜기, 병풍 같은 산, 비파소리를 내며 흐르는 시내를 시로 써서 가지고 돌아와 때때로 펼쳐 감상하니 그 모든 것이 또렷하게 눈앞에 있는 것 같고 하늘의 신비한 모습과 여러 절의 빼어난 경치가 책상 위에 모두 모여 있는 것 같다. 옛 승려 각심(覺心)으로 하여금 청량수묵도(淸涼水墨圖)를 그리게 한다면 나는 곧 연화봉에서 달빛을 받고 있는 사람으로 그려지리라.

12월에 관물당(觀物堂)에서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