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문절공은 영남 사림의 선구였다
1) 문절공의 시호
‘문절공文節公’은 시호諡號이다. 시호를 아호雅號처럼 부른다. 매우 드문 현상이다. ‘충무공忠武公’ 이순신 외에 많지 않다. 일반사람은 모른다. ‘퇴계’는 만인이 알지만, 시호 ‘문순文純’은 만인이 모른다. 시호를 통용 이름으로 쓰지 않음이 사회적 관습이다. 그런데 왜 문절공은 그 아호 ‘무송헌撫松軒’을 쓰지 않고 ‘문절공’이라 통칭했을까? 『무송헌문집』년보年譜에 문절공의 시호가 내려진 기록은 이러하다.
“1464년 여름 중추원사中樞院使에 제수 되고, 7월 9일에 졸하니 향년 49세였다. 부음訃音이 들리자 주상(세조)께서 매우 슬퍼하시고, 조시朝市를 2일 동안 정지할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예관禮官을 보내어 조제弔祭하고 부의賻儀를 더욱 후하게 하였으며, 아울러 ‘문절공’이라 시호를 내리셨다. 그 내용은 勤學好文曰 文, 好廉自克曰 節이라 했다. 9월에 영주군 북쪽 빈동산에 매장했다. ”
위 연보로 보면, 문절공의 시호는 장례 가운데 내려졌다. 이런 ‘당년當年 시호’는 매우 의례적 결정이다. 시호는 여러 절차를 거쳐 결정되므로 빨라도 2년여의 시간이 소요된다. 가장家狀-행장行狀-시장諡狀으로 이어지는 글을 거쳐 봉상시奉常寺의 조사와 검토를 하는 최소한의 시간이 그렇다. 당년 시호는 이런 절차가 생략된 것으로, 왕명으로 바로 내려졌다고 봐야 할 것 같다. 문절공 시호가 초상初喪 중에 내려왔으니 아주 의례적이다.
퇴계의 ‘문순文純’ 시호를 보더라도 그렇다. 퇴계 죽음이 1570년 12월 8일인데, 시호는 1576년 11월 10일에 내려졌다. 6년이 걸렸다. 율곡 이이 죽음이 1584년인데 시호는 1624년에 내려졌다. 30년이 걸렸다. 빨랐다고 하는 농암 이현보의 시호가 2년이 걸렸다. 농암은 1555년 몰했는데 시호는 1557년 내려왔다. 이 경우도 아주 의례적이었다.
참고로 조선전기 시호는 다음과 같은 절차에 의해 결정되었다. 우선 인물이 죽으면 후손들이 가장家狀을 짓는다. 가장은 가족차원에서 기록하는 고인의 일대기이다. 자료수집이다. 가장이 지어지면 이를 기초로 당대의 인물에게 요청하여 행장行狀을 받는다. 한 인물의 공적일대기이다. 이를 예조에 제출한다. 예조에서는 검토한 뒤 봉상시에 보낸다. 여기서 합당한 시호를 평론해서 세 가지를 정하고, 그 이유를 글로 지어 홍문관에 보낸다. 이때 글이 시장諡狀이다. 국가공적조서이다. 홍문관에서는 응교應敎 이하 3인이 삼망三望을 의논한 뒤, 여러 관원과 다시 의정한다. 의정부에서 이를 시장과 함께 이조에 넘긴다. 이조에서는 시호망단자諡號望單子를 작성해 국왕에게 올려 최종 낙점을 받는다. 확정된 시호는 교지가 내려지고, 이를 받는 집에는 교지를 받아들이는 행사 연시延諡를 거치면 모든 절차가 끝난다.
이처럼 시호 결정은 어려운 것이었고, 그에 따라 ‘악시惡諡’까지 내렸으므로 매우 엄격했다. 그렇지만 문절공의 시호 내림은 전례가 없었다. 1464년 영남북부 최초이며, 49세 젊은 나이의‘상중 시호’였으니, 문절공의 호칭은 그때의 영예가 그대로 굳어진 것은 아니었을까? 1558년 영주군수 안상安瑺이 학사를 건립하고 퇴계에게 향사할 인물을 의논하니, 퇴계 말씀이 “본 군에는 문절공이 있지 않은가”했다. 아마 문절공은 이때부터 문절공이었고, 다른 호칭은 존재하지 않은 것 같다. 호가 없다.
왕조실록에 없다. 5대손 형조정랑 김우익이 지은 가장, 협천군수 권용權鎔이 지은 행장, 여헌 장현광張顯光이 지은 신도비명 역시 그렇다. 1644년 최초 발간된 문집 역시 『문절공일고文節公逸稿』로 되어 있다. 1707년 중간발문을 쓴 외손 영춘현감 권두인權斗寅, 후손 강원도도사 김만주金萬柱의 글에도 없다. 1760년 발간된 선성김씨 족보族譜에도 없다. 1798년 저술된 『영남인물고』에도 없다. 모두 자字 거원巨源만 있다. 이를 보면 적어도 몰후 300여년까지 호가 없었음이 분명하다.
다만 1937년 발간한 『무송헌선생문집』연보 1840년(헌종6년) 조에 “무송헌 현판을 동루에 걸었는데, 이는 선생의 호이기 때문”이라 했다. 문집도『문절공일고』에서『무송헌선생문집』으로 되었다. 언제 어떤 연유로 지었는지 좀 더 상고할 필요가 있다 하겠다.
이번 행사도 모두 '무송헌 김담'으로 했다. 조심스럽지만 이번 기회에 문절공의 호에 대해서는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과거 선현들이 문절공으로 호칭 했듯이, ‘문절공이라는 호칭’은 독특하고 자연스러우며 한편으로는 거룩하다는 상념마저 일으키게 한다, 그 어느 선현도 흔한 사용이 아니었기에 문절공이란 호칭은 더욱 그러하다.
참고로 49세에 죽은 율곡 이이가 생전에 ‘율곡栗谷’이란 호가 지어지지 않았음과 같은 맥락이다. 율곡 행장은 김장생이 지었는데 역시 자字 숙헌叔獻만 있다. 율곡의 호는 사임당과 더불어 죽은 후 그 제자들이 지어 올린 이름이다. ‘율곡’, ‘사임당’ 이란 호는 노론 학맥의 인물들이 집단적으로 호칭함으로 인해 후대에 굳어진 이름이다.
2) 문절공의 환력
문절공의 환력은 찬란하다. 1435년 20세, 형 김증金潧 23세에 동방급제 했다. 예안김씨 최초 였다. 20세 급제는 조선 500년 거의 없다. 과거 평균 연령은 36세이고, 최소는 고종 때 신동 이건창李建昌이 15세 입격했다. 영남에는 1809년(순조9년) 응와 이원조가 18세에 합격했다. 20세 합격은 정말 어렵다.
나이도 그렇지만, 1435년은 영남 전체에서도 앞서는 것이었다. 영주에서는 외조부 황유정의 아들 황현이 1393년(태조2년) 최초 합격했고, 1420년 안숭선, 1432년 송인창이 있었다. 순흥에는 1405년 권희 한 명이 있을 정도였다. 영주에서 43년 동안 단 5명이 합격했다. 그 다섯 명 가운데 두 명이 문절공 형제이고, 다른 한명은 외3촌이었다. 한 고을 10년에 한 명 정도니 기적의 합격이라 할 수 있다.
1392년 조선개국 이후 1435년 까지 매3년마다 33명을 뽑는 정시와 부정기 별시를 통하여 이때까지 611명이 배출되었지만, 영남 북부 즉, 안동, 상주, 예안, 영주, 순흥, 문경, 예천, 봉화 등의 전체 문과급제는 21명에 불과했다. 문과급제 조사는 조사마다 조금 다르지만, 영남 지방의 급제자가 매우 적은 것은 분명하다.
그 가운데 영주의 황현은 대사성, 예천의 윤상이 예문관제학, 실세인 이조판서는 문절공이 처음이다. 형제급제 또한 안동의 배상지裵尙志의 아들뿐이었다. 집현전의 천문학 연구도 전후무후한 일이다. 영남북부 최초 시호이며, 절차를 거치지 않은 상중시호도 그러하다. 49세 나이에 문절공은 인생을 마감 했다. 모든 이력이 극적이고 선구적이었다. 이런 이력은 영주 일대의 세력과도 무관하지 않으며, 대감들이 연이어 태어난 집에서 생장했으니, 권력이 생소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들 세력권에 들어온 예안김씨가 빠르게 뿌리를 내렸고, 문절공은 주춧돌을 놓았다. 그 주춧돌을 보다 크고 넓고 견고한 것이었다.
문절공의 환력이 ‘찬란하고 극적’이라 했다. 그 상징적 사건이 안견安堅의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에 당대 인물들과 나란히 하고 찬시를 쓴 장면이다. 몽유도원도는 안평대군이 꿈속에서 박팽년등과 함께 노닐었던 도원桃源의 풍광을 안견에게 그리게 하였는데, 안견이 3일 만에 완성하였다는 그 유명한 그림이다. 안평대군의 직접 발문을 쓰고, 집현전 학사들을 중심으로 23명의 문사들이 각각 자필로 찬시讚詩했다.
이때 함께 자필한 인물은 신숙주申叔舟, 이개李塏, 하연河演, 송처관宋處寬, 고득종高得宗,·강석덕姜碩德, 정인지鄭麟趾, 박연朴堧,·김종서金宗瑞, 이적李迹,·최항崔恒, ·박팽년朴彭年, 윤자운尹子雲, 이예李芮, 이현로李賢老, 서거정徐居正, 성삼문成三問, 김수온金守溫·, 만우卍雨·, 최수崔脩 등이었다. 이 한 폭의 그림은 문절공의 위상을 상징하고 있고, 그때 지은 시는 학문과 인품의 깊이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시어詩語는 옥과 같고 시상詩想은 그림 같다. 시 전편은 이러하다.
푸른 옥 숲 사이 백옥 물 흐르고 碧玉叢間白玉流
꽃빛 길게 띄어 물빛에 떠 있네 花光長帶水光浮
맑은 하늘, 바람 이슬 인간세상이 아니며 淸冥風露非人世
뼛속 시원하고 정신 향기로와 꿈속에 노니는 듯 骨冷魂香夢裏遊
한 조각 도원을 한 폭 그림에 담았으니 一片桃源一幅圖
산 중 선경 비단 치수錙銖 같이 사뿐하네 山中綃上較錙銖
묻노니, 무릉에서 길 잃은 사람에게 試問武陵迷路者
눈 앞 풍경이 마치 꿈 속 같지 않는가 하고 眼中還似夢中無
빗장 걸고 속인 내왕 막았더니 關鏁曾慊俗子來
어부 한사람 들어오나 골짜기 사람들 의아하고 漁人一入洞人疑
선비 한 사람 찾아와 밤새도록 말을 하나 高人一夜搜來盡
골짜기 사람들 아는 둥 모르는 둥 爲報洞人知未知
비해당 속 매죽헌 匪懈堂中梅竹軒
매화 향기, 대나무 절개 이루 말로 할 수 없고 梅香竹節不堪言
대 보고 매화 보니 여기가 바로 선경인데 觀竹觀梅僊境是
골짜기 안에서 어느 세월 도원을 찾아 갈까 洞中何暇訪桃源
물외 선경에 신선처럼 황홀하고 物外尋幽怳若神
정령 꿈도 아니고 현실도 아닐진져 定知非夢亦非眞
어리석은 사람들에게 설명한 들 누가 알까 說與癡人誰得識
그림 바라보며 다시 의관 바로잡네 對圖時復整烏巾
문절공은 1416년(태종 16) 영주에서 아버지 김소량과 어머니 평해황씨 사이 3남1녀 가운데 둘째로 태어났다. 외조부 판서 황유정은 정도전이 처남이고, 안축安軸은 외조부였다. 안축은 관동별곡, 죽계별곡을 지어 더욱 유명하다. 소수서원에 배향된 안향과 삼종三從 사이였던 순흥안씨들은 영주 일대의 최고 명문이었다. 그 판서가 딸의 집에 와서 외손자를 찬양한 시가 기적같이 남아 있는데, 어린 문절공을 ‘장미꽃 한 떨기’라 했다. ‘일람첩기一覽輒記’라고 했으니, 그 만큼 총명했던 모양이다. 시는 이러하다.
지팡이 짚고 사립문을 나서니 偶携藜丈出柴扉
4월 청화한 날씨에 제비들 날고 四月淸和燕燕飛
흥에 겨워 사위집을 찾았더니 乘興往尋金氏子
장미 꽃 한 떨기 울타리에 피어있네 薔薇一朶秀疎籬
문절공은 승승장구 했다. 발군의 제주는 환로를 열었다. 29세 이조좌랑, 32세에 요직중의 요직 이조정랑에 발탁되었는데, 유래 없는 일이었다. 그해 1447년(세종 29)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을과 1등 3인중 제2인으로 합격했다. 첫째 수찬 성삼문, 둘째가 이조정랑 문절공, 셋째가 수찬 이개였다.
을과 2등 7인은 부교리 신숙주, 응교 최항, 교리 박팽년, 응교 이석형, 형조정랑 송처관, 박사 유성원, 박사 이극담이었고, 3등 9인은 학유 정종소, 부수찬 이승소, 봉상녹사 조변륭, 부수찬 이예, 교리 김증(문절공 형), 현감 이극효, 기주관 정창손, 교리 김예몽, 형조좌랑 김통이었다. 역사에 남은 쟁쟁한 인물들이었다.
시험발표 이튿날, 세종은 무슨 생각인지 합격자 19인 가운데서 8인을 뽑아 ‘어제팔준도御製八駿圖’로 다시 시험을 치르게 했는데, 여기서도 성삼문이 첫째, 문절공이 둘째, 이개가 셋째였다. 세종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고, 성삼문, 신숙주, 정인지, 장영실 등과 함께하는 업적과 명성을 얻었다.
문과중시는 10년마다 병년丙年에 당하관 문관들이 치르는 승진고과 시험이다. 문절공은 두 번의 시험에서 선두 주자 입지를 굳혔다. 이때 형 김증도 함께하였고, 집현전 교리로 『홍무정운』을 번역하고, 신숙주, 박팽년 등과 함께 『동국정운』, 『역대병요』의 편찬을 편찬하였지만 불과 44세에 죽었다. 김증은 더 이상 이력을 남길 수 없었다.
문절공은 30여년 봉직했다. 전반 20여년은 주로 집현전에서, 후반 10여년은 지방에서 근무했다. 전자는 세종시대이고, 후자는 세조시대였다. 처신의 극명함을 보여주고 있다. 집현전은 20세 급제와 더불어 들어가, 24세 박사, 26세 부수찬, 35세 직제학에 승진했다. 여기서 또 한 명의 천재 천문학자 이순지李純之와 짝이 되어 민족문화를 한 단계 올리는 놀라운 학문적 성과를 이루었다. ‘놀라운 학문적 성과’라 했지만, 사실 필자에게 천문天文, 역학易學 등은 생소한 분야이므로 전연 그 내용을 모른다. 그래서 쓰지 않는다.
다만 이번 기념 학술대회는 국책기관인 '고등과학원'에서 주관했는데, 13개국에서 18명의 천문학자가 참여하여 열띤 토론을 하고 있음을 밝혀둔다.
나는 한 달 전 영릉英陵에 다녀왔다. 혼자만이 아니다. 안동시장을 비롯한 안동 유림 100여명이 의관衣冠(도포와 갓)을 갖추고 제단에 도열했다. 그 연유는 안동 반출 국내 단 1권의 책,『훈민정음해례본訓民正音解例本』을 복각復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안동 식의 신고식, 고유告由를 했다.
나는 세종대왕을 모른다. 치적은 더욱 모른다. 그러나 단 하나, 세종이 성군聖君임은 안다. 제왕학帝王學을 통달했는데, 핵심은 ‘몰입沒入’의 통치력이었다. 본인이 몰입했고, 신하들이 몰입하도록 했다. 몰입은 경이적인 세계를 만든다. 몰입은 길이 없는 곳에 길을 만든다. ‘정신일도精神一到 하사불성何事不成’ 도 같은 말이다. 그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누구도 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간절한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훈민정음을 비롯한 많은 발명은 몰입의 결과이다. 몰입은 밀실密室이 필요하다. 아니 필수적이다. 세종시대 밀실은 ‘집현전’이다. 밀실을 만들고 거기서 몰입하도록 해야 한다. 세종의 치적은 이런 환경을 마련하고, 거기 자신의 간절한 마음을 쏟아 부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간절한 마음’은 조국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이었다. 눈부신 성과는 바로 세종의 몰입에서, 임금을 따라 몰입한 집현전학자들의 몰입에서 나온 경이적 세계의 기적적 결과물이다.
문절공의 탁월한 학술성과는 자신의 출중한 재능에 한 탁월한 오너를 만났기 때문에 가능했다. 우리 후손들이 세종대왕에게서 본받을 교훈이 있다면, 우리 모두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의 길에 감사하며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몰입 하라는 저 말없는 유훈이다.
문절공의 업적은 집현전 성과만이 아니다. 지방 고을 원의 봉직 때도 그러했다. 과학자답게 한 치 빈틈이 없었다. 사관은 ‘귀신같았다’ 했는데, 이 표현은 민초의 민생 고통을 아는 진정한 목민관에 대한 모습이고 평가이다. 『세조실록』1464년 7월 10일, 졸기卒記 한 구절은 이렇다.
“중추원사 김담이 죽었다. 김담은 예안사람이다. 정사가 밝고 송사를 잘 다스렸다. 그때 경내 도적이 많아 백성들이 매우 괴로워하였는데, 김담이 원수같이 여겨 모조리 소탕했다. 간교한 모리배를 적발함이 귀신같았고, 장물은 작더라도 용서하지 않았고, 완전 소탕될 때까지 그만두지 않았다. 이로 말미암아 도적들이 경내에 들어오지 않아 백성들이 편안했다. 김담은 성질이 단아하고 행동이 청렴하고 근면하였다. 일찍이 어버이가 늙었다고 하여 몇 고을 수령 자리를 구하였다.”
세조가 집권하자 자청하며 충주, 안동, 상주, 경주 등을 돌며 10년을 보냈다. 경주에서는 임기가 끝나고도 3년 더 머물렀다. 세조의 정권에 참여 하기 싫었기 때문이다. 세종의 유훈에 대한 우회적 보답일 수도 있다.
세조는 회유하고 협박했다. 회유는 벼슬이고, 협박은 나포, 압송으로 나타났다. 『세조실록』 1463년(세조9년) 8월29일 조에, 세조가 이조판서를 임명하면서 배경을 설명하는 부문이 나오는데, 거의 협박이다. 그 글은 이러하다.
“세조가 김담에게 이르기를, ‘경은 병든 어미가 있어 서울에 유임시킬 수가 없었다. 또 경이 지난번에 경주부윤이 되어서 죄도 아닌데 붙잡혀 왔기 때문에 지금 이조판서를 제수하여 애오라지 서로를 위로할 뿐이다. 오랫동안 경을 보지 못하였으니 경에게 술을 올리는 것이 옳다’하고, 신숙주로 하여금 술을 올리게 하였다.”
문절공은 병 핑계로 사직소를 올렸다. 그리고 나아가지 않았다. 화려한 이조판서도 사임했다. 세조는 집현전 학자를 끌어들여 찬탈정권을 합리화하고, 무도한 권력을 희석시키려 했지만 세종의 사랑받은 집현전 학자들의 마음을 돌릴 수는 없었다. 조국을 사랑하고 혼을 쏟아 붇는 몰입의 국정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세조가 세종만큼 될 수 없었음은 자명한 이치이며, 사육신과 생육신의 출현은 필연의 결과였다.
문절공은 무도 한 정권에 일생을 악전고투하며 저항한 방외인方外人 김시습, 23년이나 문형을 지녔던 사가 서거정과도 친밀했다. 경주부윤 재직시 금오산에 있던 김시습과 만나 동병상련의 정을 나누며 신라 고적을 중수하는데 힘쓰기도 했다. 이 무렵 봉명사신으로 파견되었던 서거정이 오자 감사와 함께 그를 환대하며 고적 정비에 나서는 것으로 시름을 달래기도 했다.
문절공은 1464년 몰했다 마지막 벼슬은 중추원사中樞院使였다. 문하에 이수형이 있었는데, 제자이며 곧 사위였다. 7월 10일이니 나이 향년 48세였다.
1737년 영남 유림이 문절공을 모시는 구강서원龜江書院 상소문을 올렸다. 거기 글에 “아아! 세상의 기미幾微를 살펴 몸을 보전하는 지혜가 있었고, 지조를 지키고 변치 않아 과격한 과오를 면했으며, 그 어려움에 당하여 처변處變함이 가히 중용中庸에 맞게 했다”고 했다. ‘중용에 맞게 했다’는 평가는 최고의 수사修辭로, 이 이상 높은 평가가 있지 않다. 왜냐하면 ‘중용의 처신’은 공자도 하지 못한다고 했기 때문이다. 문절공에게 이런 평가는 혼돈시대를 살아간 한 지성인의 고뇌에 찬 결단과 깊은 명철明哲의 처신에 대한 최고의 찬사이다.
3) 문절공종택과 무섬마을
안동에 하회가 있다면 영주에는 무섬이 있다. 낙동강과 내성천이 빚은 최고 걸작들이다. 물이 휘감아 돌아 물돌이 한 모습이 똑같다. 전자가 시원스러운 멋이 있다면 후자는 아기자기한 맛이 있다. 전자에 나룻배가 있다면 후자에는 섶 다리가 있다. 하회는 배를 타는 풍류가 있고, 무섬은 섶 다리를 건너는 낭만이 있다. 다 같이 추억을 자극하고 향수를 제공한다. 전자가 상쾌함을 준다면 후자는 포근함이 있다.
부용대는 하회의 표상이고, 섶 다리는 무섬의 그림이다. 그래서 하회를 가는 자 부용대를 오르기를 권하고, 무섬을 가는 자 꼭 섶 다리를 건너보라고 권유하고 싶다. 부용대에서 보는 하회는 마을 전체가 한 폭의 그림이고, 섶 다리가 걸려 있는 무섬 또한 그 모습 그대로가 그림이다.
우리 마음에 고향이 있다면 바로 그런 마을이다. 하회와 무섬은 고향의 원형 같은 마을이다. 지금 비록 국가가 마을 전체를 국가문화재로 지정하고, 자치단체에서는 개방과 축제로 파천황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지만 우리들 마음속의 고향이야 어디 가겠는가.
명문이 없다면 명촌이라 할 수 없다. 하회가 풍산류씨 명촌 마을이라면, 무섬은 예안김씨와 반남박씨의 명촌 마을이다. 경주 양동에 경주손씨와 여강이씨가 함께 하듯이 무섬이 그렇다. 무섬에서 공식 소개한 ‘무섬의 역사’는 이러하다.
“무섬마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반남박씨 입향조인 박수(朴檖 1642~1729)가 이 마을에 들어와 만죽재晩竹齋를 건립하고 터전을 개척하면서부터였다. 무섬의 서편 건너 마을인 머럼(遠岩)에 거주하던 박수가 현종 7년(1666)에 이곳으로 이주해온 후, 그의 증손서曾孫壻인 예안김씨 김대(金臺,1732~1809)가 영조 33년(1757)에 처가 마을인 이곳으로 들어왔다. 이때부터 무섬마을은 반남박씨와 예안김씨가 함께 두 집안의 집성촌을 형성하고 있다.”
무섬은 예안김씨의 고향이다. 비록 반남박씨와 100여년의 시차를 두고 들어왔지만, 무섬을 어찌 예안김씨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지금 추모하고자 하는 선현, 문절공文節公 김담金淡(1416-1464) 선생의 종택宗宅이 무섬에 소재해 있고, 19대 김광호金光昊 종손宗孫 내외분이 살고 있다. 놀라운 일은 김광호 종손의 처가가 지금 논의하는 반남박씨 영주의 현조 소고嘯皐 박승임朴承任(1517-1586)의 종택이다.
소고는 동방급제 한 풍기의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1517-1563)과 더불어‘영유소고 풍유금계榮有嘯皐 豊有錦溪’라 불릴 만큼 영주 최고의 인물이다. 불천위에 옹립되었고, 15대 박찬우朴贊佑 종손은 바로 김광호 종손의 처남이다.
두 가문의 인연은 무섬을 공유하기 이전, 이미 소고의 아버지 진사 박형朴珩에서 부터였다. 진사는 원래 안동 사람이었지만, 예안김씨와 혼인함으로서 영주로 이사했다. 그러니까 소고의 어머니가 바로 문절공의 동생 김홍金洪의 손녀였다. 두 가문의 아름다운 동행은 600여년 대를 이어가며 이루어지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예안김씨의 영주 입향이 문절공 아버지 현령 김소량金小良이 금계 5대 조부 평해황씨 공조판서 황유정黃有定과 따님과 혼인함으로서 들어왔으니, 아름다운 동행은 세 가문이 함께하고 있다 하겠다. 처향을 따라 들어온 영주는 이들 가문들의 새로운 전거지가 되고, 무섬은 그 가운데 하나의 고향이 되었다.
예안김씨는 물론 무섬과 비교할 수 없는 오랜 전통의 명문, 명가가 소재한 문단, 우금, 번계, 도탄 등의 집성 마을들이 존재하며, 문중문화 역시 이들 마을들이 주도하고 있음도 부인할 수 없다. 그렇지만 지금 무섬은 그 풍광으로 인해 집단적 주목을 받고 있고, 더욱은 문절공종택이 터전을 잡음으로 말미암아 문절공 가문의 새로운 중심으로 역할이 기대된다 하겠다.
5. 예안김씨는 영남 선비문화 형성의 한 중추가 되었다
1) 예안김씨 혼맥
예안김씨는 당대 성씨들의 중심이고 선구였다. 영주 재지사족들과의 혼맥이 이어진 한편으로 고향 도산의 성씨들과 통혼관계를 맺었다. 문절공을 중심으로 한 혼인관계를 대략 표시해보면,
가). 문절공 당시의 혼인관계
金小良-金潧(문과, 교리)
-金淡(문과, 이조판서, 문절공)-金萬石(무과)
-金萬鈞(현감)-金綏(시양자, 광산김씨)
-金萬秤(생원)-金佑-金士文(문과, 형조정랑)-金玏(문과, 이조참판, 민절공)
-女 李秀亨(단종절신)
-女 琴致湛(생원)- 琴榟-琴應夾(진사, 현감)
-琴應壎(생원, 현감)
-女 李寯(李滉 맏아들)
-女 李寘(李瀣 넷째아들)
-金洪-金萬鎰-女 朴珩(진사)-朴承任(문과, 대사간)
-女 朴承阜-女 李彦迪(문과 ,좌찬성, 문원공)
-女 權受益(문과, 호조참판)
-女 權謙-權受益(문과, 호조참판)-權雲(문과, 정언)
-女 趙大椿-趙穆(생원, 공조참판) -趙錫朋(문과, 주부)
-女 琴蘭秀(생원, 현감)-琴업(忄+業,문과, 승지)
-琴愷(문과, 목사)
-琴恪
-權受福(무과, 북병사)-權洙(문과, 학유)
-女 李欽(현감)-李賢輔(문과, 지중추부사, 효절공)-李文樑-女 黃俊良(문과, 현감)
-女 金箕報(현감)
-李仲樑(문과, 감사)
-女 金富仁(무과, 병마절도사)
-李賢佑-李忠樑-李德弘(유일, 현감) -李蒔 - 李榮久(문과, 학유)
- 李笠(문과, 설서)
- 李茳(문과, 교리)
- 李蒧(문과, 한림)
- 李慕(문과, 수찬)
-女 李誠孫(이현보 종조부)
나). 도산향내 성씨들과 문절공 가문과의 혼인관련
A) 광산김씨
*金崇之-金淮-金孝盧(광산김씨입향조)-金緣(문과, 감사))-金富弼(진사, 문순공)-金垓(문과, 의병대장)
-金綏(생원)-金富仁(무과, 병마절도사)
-金富倫-金坽(문과, 정랑, 문정공)
-女-琴榟-琴應夾
-金澗-女 金萬鈞
B) 영천이씨, 진성이씨
*李軒(영천이씨입향조)-李坡(현감)-李孝孫-李欽(현감)-李賢輔(문과, 효절공)-李文樑
-李仲樑(문과, 감사)
-李賢佑-李忠樑-李德弘(유일, 현감) -蒔 -榮久(문과, 학유)
-女 權模-權錫忠-權春蘭(문과, 사간)-權泰一(문과, 형조참판)
-李誠孫
-女 金有庸(현감)-女 李繼陽(진성이씨입향조)-李埴-李瀣(문과, 감사, 정민공)
-李滉(문과, 판중추부사, 문순공)
-李堣(문과, 감사)
-女 -金洪-金萬鎰
-女 朴承阜
-女 權受益
C) 영양김씨
*金遂生(영양김씨입향조)-金智老(문과, 신주지사)-金有庸(현감)
-女 琴滌(현감)-琴嵇(생원)-琴衍(생원)- 琴致湛 -琴榟
D) 봉화금씨
*琴以和 -琴滌(현감)-琴嵇(생원)-琴衍(생원)- 琴致湛(생원) -琴椅(문과, 부사)-女 權東美(權橃 子)
-琴榟(봉화금씨오천입향조) -女 李寯
-女 李寘
-琴淑(봉화금씨부포입향조, 문과, 관찰사)-琴崑(문과, 감찰)
-琴嵩(문과, 대사간)
-琴嶒(무과)-琴致韶-琴憲-琴蘭秀(생원, 현감)-琴憬(생원)
-琴업(忄+業,문과, 승지)
-琴愷(문과, 목사)
-琴恪
-琴峻(무과, 만호)
***짙은 글씨는 가문 대표로 불천위에 모셔지고 종택을 남긴 분***
문절공의 외손자가 봉화금씨 훈도 금재琴榟인데, 금재는 광산김씨 도산입향조 생원 김효로金孝盧의 사위이며, 진성이씨 감사 이해李瀣, 판중추부사 이황李滉(1501-1570) 형제와 사돈이다. 여동생은 영천이씨 지중추부사 이현보李賢輔(1467-1555)의 외조모가 되고, 생질 안동권씨 호조참판 권수익權受益(1452-1544)은 횡성조씨 공조참판 조목趙穆은 외손자, 현감 금란수琴蘭秀는 외손서가 된다. 금재, 권수익은 그들 아버지가 문절공 부자의 사위가 되어 각각 봉화, 안동에서 들어왔다. 김효로의 아들 생원 김유金綏는 문절공의 아들 현감 김만균金萬鈞으로부터 전 재산을 물려받았다. 김만균은 김유의 종고모부가 된다. 사위 우계이씨 이수형李秀亨은 단종절신으로, 순흥 도계서원에 금성대군, 이보흠李甫欽과 함께 제향되었다.
문절공의 동생 김홍金洪의 외손서가 여강이씨 좌찬성 이언적李彦迪(1491-1553)이고, 아들 김만일金萬鎰의 외손자가 반남박씨 대사간 박승임朴承任(1517-1586)이다. 이황의 조부 이계양李繼陽과 동서인데, 영양김씨 김유용金有庸이 장인이다. 김유용은 이현보의 증조부 현감 이파李坡의 사위이다.
이현보의 손서 평해황씨 현감 황준량黃俊良은 문절공의 외조부 공조판서 황유정의 5대손이며, 이현보의 종증조부 예문관직제학 이오李塢는 황유정의 손서가 되기도 한다.
흥미로운 것은 김홍이 생질 권수익을 사위로 삼은 일이다. 문절공의 아버지 김소량의 입장에서는 외손자가 친손녀와 결혼을 한 셈이다. 또한 문절공의 생질녀들이 이현보의 종조모와 어머니가 되었으니, 이는 친정 자매가 시댁 숙질이 된 경우이다. 이는 도산 향내의 예안김씨, 안동권씨, 영천이씨의 중첩적인 혼인의 한 단면이다. 아니 전 도산의 성씨들이 중첩적인 혼인관계에 있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토성인 예안김씨를 선두로 이 무렵 입향한 안동권씨, 봉화금씨, 영천이씨, 영양김씨, 광산김씨, 진성이씨, 횡성조씨 등이 집단적 통혼관계에 있었던 셈이었다.
놀랄 일은 아니다. 이 무렵은 아직 성리학적 가치관이 확립되기 이전이라 중첩적인 혼인은 물론이고 동성동본혼인, 자녀균등상속, 윤회제사, 외손봉사 같은 것이 보편화된 시대였다. 양자제도도 없었다. 이런 시대상은 조금 뒤 『주자전서』가 읽혀지고, ‘서원’이라는 건물이 지어지면서 급격히 변모했다. 종법제도가 확립되기 전의 일이었다.
『선성김씨족보』를 보니 문절공의 둘째 아들 김만균이 죽자 “부인의 종질 김유(광산김씨)를 시양자로 하고 제사를 지내게 했다(夫人從姪金綏以侍養子奉祀)”는 기록이 보인다. 양자를 하지 않아 대가 끊어졌음은 물론이다. 그래서 문절공의 가계는 세째 아들 김만칭金萬秤으로 이어졌다. 양자 제도는 이 기간이 매우 과도기적인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혹시 이런 점에 대해 궁금한 사람은 1476년 발간된 한국 최초 족보인『안동권씨성화보』를 읽어보기 바란다. 이 책을 보면 ‘안동권씨와 안동권씨의 혼인’이 얼마나 많았는지를 우선해서 볼 수 있다. 선악을 떠나 동성동본혼인은 우리 조상들에게 생소한 방식은 아니었다. 적어도 이때까지는 그러했다.
1565년 발간된 『문화유씨가정보』에는 친손, 외손, 사위, 외예손이 모두 등재되어 있고, 그 후 등장하는 대부분의 족보가 그렇게 썼다. 외가와 처가는 당연한 가족이었다. 처향으로 이주 역시 상속이 그 원인이었다.
참고로 농암 이현보 가문의 『영천이씨소윤공파보永川李氏少尹公波譜』를 보면, 이 또한 예외가 아니다. 이미 거론한 농암 증조부 이파李坡의 사위 김유용金有庸 관련 계보에 사위 이계양李繼陽과 김홍金洪이 있고, 친손, 외손, 사위, 외예손이 적혀 있다. 여기에도 회재 이언적, 소고 박승임 등이 적혀있다. 8촌 이내 친척親戚, 인척姻戚 모두 당내堂內로 집안이다. '집 안에 있으니' 가족이고, 밥을 같이 먹으니 식구食口이다. 패밀리라는 개념이다. 계보에 왕후가 있다면 거기까지 쓴다. 이는 친인척 개념보다는 긍지 개념이 아닌지 모르겠다. 아무튼 먼 외예손인 인현왕후도 기록되어 있다. 족보 기록 그대로를 번역해 옮기면 이렇다.
“李坡 -女 金有庸 : 사위 진성이씨 이계양은 진사이며 증직 판서이다. 계양의 아들 식은 증직 찬성이고, 아들 우는 참판인데 호는 송재이다. 식의 아들 해는 시호가 정민공이며 호는 온계이고, 황은 시호가 문순공인데 호는 퇴계이다. 우의 증손은 사위가 정경세인데 이조판서로 시호는 문장공이다. 경세의 사위는 송준길로 호는 동춘인데, 사위가 여양부원군 민유중으로 인현왕후를 낳았다. 사위는 김홍이다. 아들 만일의 사위는 박숭고, 권수익이다. 만일의 외손은 박승임으로 호는 소고이다. 숭고의 사위는 이언적인데 시호는 문원공으로 호는 회재이다. 수익의 외손은 조목으로 호는 월천이다.”
이런 기록이 아니더라도 농암, 회재, 퇴계는 이미 남이 아니었다. 언급한 바와 같이 농암 증조부 이파李坡의 외손녀가 곧 퇴계의 조모였다. 그래서 농암과 퇴계는 7촌의 인척이 되고, 농암 조모와 회재 증조모가 청주양씨 자매姉妹여서 또한 7촌 사이가 된다. 지금 통념은 가족 범주를 벗어나고 있지만 당시는 그렇지 않았다. 문절공 가문의 재산이 광산김씨 김유에게 상속되고 제사를 지내게 한 사실이 당시 가족 개념을 보는 하나의 단서가 된다.
김유는 문득 안동 최고의 가세를 이룬 한 가문이 되었다. 지금 화제가 되고 있는 한국최고 오래 된 요리책 『수운잡방需雲雜方』과 한국최고의 정자인 ‘탁청정濯淸亭’이 김유에 의해 쓰여 지고 건축되었음도 우연이 아니다. 퇴계가 “탁청정의 부엌에는 산해진미가 끊어지지 않았다”한 기록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탁청정 가문의 부富는 문절공 가문과 분리해서 생각하기 어렵다. 김유는 농암과도 사돈이 된다. 맏아들 김부인이 농암 사위이다.
그런데 정말 흥미로운 것은 문절공 가계 계보에서 직계후손 김륵과 더불어 박승임, 이언적, 조목, 금란수, 권수익, 김효로, 김해, 김령, 이현보, 황준량, 이덕홍, 이계양, 이우, 이해, 이황 등이 당내堂內의 촌수였다고 했는데, 기적의 문과급제가 이 무렵 속출했고, 몇 분은 국가적 인물로 발신했다는 점이다. 봉화금씨 금곤, 금숭 형제가 1450년 최초 동방급제했고, 다음이 1486년 권수익이고, 그 다음이 1498년 이현보, 이우가 동방급제했다. 이후 생원, 진사, 문과, 무과, 음직의 관료, 학자들이 우후준순처럼 솟아났다. 능문能文, 능리能吏의 인물들이 춘산의 진달래처럼 한꺼번에 피어난 셈이었다. 도산 역사에서 처음이고 마지막이었다. 영남 남인의 역사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농암 어머니의 입장에서 보면 외삼촌 두 분이 문과급제했고, 오빠와 조카 네 분이 문과, 무과급제했고, 아들, 손자가 문과급제 했으니, 당시에 이런 영광을 모두 본 여인은 천지에 없었다고 할 수 있다. 농암이 특별한 효자가 되었음은 98세를 사신 아버지 때문이기도 하지만, 85세를 사신 이 인자하고 총명한 어머니의 존재가 더욱 그렇게 했을 수도 있다. 농암 종손자 간재 이덕홍은 맏아들 이시를 제외한 이입, 이강, 이점, 이모 등 4형제, 손자 이영구와 더불어 이른바 ‘5숙질 문과 급제’했고, 3형제가 같은 날 급제하여 오래 인구에 회자되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이들 대부분이 ‘불천위不遷位’로 옹립되었다는 점이다. 당대의 인물들이 하나의 계보에 동시에 묶여있었던 셈이고, 동시에 각 성씨의 백세불천百世不遷하는 대표적 인물로 높이 추앙되었다. 그래서 이들 모두의 집이 이후 경북 유수의 ‘불천위종택’이 되어 500여년의 역사를 고스란히 함께 이어오고 있다. 지연, 학연, 혈연이 대를 이어 중첩해서 엮어지고 있다. 필자도 그러하지만 오늘 참석자 가운데도 조상들의 이런 저런 인연으로 모이신 분들이 적지 않으리라 여겨진다. 이런 지역은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세계 어디에도 있지 않을 것 같다. 안동문화권의 특징적 요소이며, 문화사적으로도 시사함이 적지 않다. 이 모든 것의 선두에 문절공이 있었다.
참고로, 문절공과 버금가는 천재 두 분이 생각난다. 권수익의 아들 권운과 성재 금란수의 아들 금각이다. 권운은 22세에 문과 급제하여 수찬, 정언, 교리 등 요직을 거침없이 밟아 나갔고, 이 무렵 이미 ‘문장의 영수’라고 칭찬받았다. 원로들이 경연에서 임금과 문답하는 것을 ‘전적으로 권운에게 맡겼다’고 했다. 그래서 장차 “문형文衡을 맡길 만하고 정승도 맡을 만하고 한 시대를 교화시킬 수 있으며 태평성대를 만들 수 있는 인물”이라 했지만, 불과 25세에 죽었다.
금각은 하늘이 내린 사람이었다. 『선성지』에 “萬理皆備 朝廷得失 世上人事 皆已理會”라 쓰여 있다. ‘萬理’는 학문이며 ‘朝廷’은 정치고 ‘人事’는 사회문제인데, 금각이 7, 8세에 이미 이를 터득했다는 것이다. 허균의 형, 허봉이 금각에게 준 시에서 “금각의 시는 이태백을 능가한다”고 했다. 저 유명한 ‘등왕각서’를 쓴 ‘왕발과도 비견된다’고 했고,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듯하다”고도 했다. 금각은 18세에 요절했는데, 외삼촌인 월천 조목은 “천재가 쓰이지 못하고 사라졌다”고 했다. 문절공 가문의 뛰어난 DNA의 영향이 없었다고 할 수 없다.
2) 예안김씨 과환
문절공 후손들의 이력은 더욱 찬란하다. 문과급제 20명을 배출했다. 이 가운데 영주에서 14명, 예천 문경이 6명이다. 이 숫자는 영주는 말할 것도 없고, 이웃 안동의 유수한 성씨들과 비교해도 손색없다. 안동은 366명(예안 73명 포함)의 전국 최고의 문과급제자를 배출했다. 서주석 선생이 조사한 안동 출신 문과급제자는 다음과 같다.
안동권씨 63명, 진성이씨 48, 의성김씨 43, 진주강씨 24, 풍산류씨 18, 전주류씨 16, 안동김씨 13, 풍산김씨 12, 흥해배씨 10, 고성이씨 10, 영양남씨 8, 상락김씨 8, 광산김씨 8, 영천이씨 7, 순흥안씨 7, 한양조씨 6, 봉화금씨 6, 순천김씨 6, 한산이씨 5, 전주이씨 4, 대구서씨 3, 선성이씨 3, 평산신씨 3, 청주정씨3, 순천장씨, 영월신씨, 연안이씨, 동래정씨가 각 2명, 전의이씨, 선성김씨, 강릉김씨, 의령남씨, 경주이씨, 합천이씨, 고령박씨, 원주변씨, 함안 조씨, 횡성조씨, 의령옥씨, 영춘이씨, 광주안씨, 제주고씨, 풍기진씨, 능성구씨, 상주김씨, 의령여씨, 남양홍씨, 풍천임씨, 경주김씨, 원주이씨, 반남박씨, 여주이씨 각 1명.
예안김씨에 앞서는 성씨는 안동권씨, 진성이씨, 의성김씨, 진주강씨, 정도이다. 인조반정 이후 몰락한 남인에 20명 이상의 문과급제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는 물론 문절공 3형제의 발신에 기인한다. 이미 혼맥으로 그 위상을 보았듯이 영남사림의 초기 발신자들의 대부분이 연결되어 있었고, 그런 위상은 예안김씨가 영주로 이주한 이후에도 한 말까지 흔들림 없이 유지되고 있었다.
이런 사정은 문절공 이후 또 한 분의 시호諡號를 받은 임진왜란 당시의 명신 백암栢巖 김늑金玏의 존재와 무관하지 않다. 백암은 민절공敏節公의 시호를 받았고, 그 후손들이 백암을 불천위로 모시면서 영주 예안김씨의 중추적 역할을 감당하게 했다.
참고로 '안동 선성김씨 1명'은 순조10년(1810년), '본관 예안김씨'로 되어 있는 김낙주金樂周이다. 김낙주는 영주 우금에 살던 김방金埅의 증손자인데,『교남지嶠南誌』,『안동읍지安東邑誌』에 그 이름이 있다. 아마 급제당시 안동 풍산에 거주한 것으로 보인다.
문절공 후손들의 문과급제는 다음과 같다.
姓 名 父 號 官職 世居地 備 考
金 潧(1413-1456) 金小良 晦松軒 집현전 교리 제천시 봉양
金 淡(1416-1464) 金小良 撫松軒 이조판서 영주시 문수면 무섬
金士文(1502-1549) 金 佑 형조좌랑 봉화군 문단 귀학정
金 玏(1540-1616) 金士文 栢巖 이조참판 봉화군 문단 귀학정
金友益(1571-1639) 金允誼 斗巖 한성부 서윤 영주시 이산면 우금 함집당
金 鍌(1596-1660) 金首善 梅鶴堂 흥해군수 영주시 부석면 도탄 매학당
金 錕 金得善 劒巖 통정대부 예천군 개포면 검암
金兌一 金 鍴 蘆洲 사간 문경군 내화리
金海一 金 鍴 檀溪 경주부윤 문경군 내화리
金遇一 문경군 내화리
金萬柱(1653-1709) 金宗灝 승문원 교리 영주시 이산면 우금 함집당
金履萬 金海一 鶴皐 양산군수 문경군 내화리
金 埅(1706-1778) 金弘烈 雙巖 사간원 정언 영주시 이산면 우금
金위(土+韋,1709-1789) 金元烈 渴睡軒 이조정랑 영주시 이산면 번계 천운정
金若鍊(1730-1802) 金 墀 斗庵 좌부승지 영주시 이산면 번계 천운정
金理吉 충청도사 문경군 내화리
金永範(1772-1838) 逸澗 사간원 정언 영주시 이산면 우금
金樂柱(1778-1835) 菊隱 낭천현감 영주시 이산면 우금
金樂淵(1792-1872) 金永翼 琴湖 돈녕부 도정 영주시 이산면 번계 천운정
金輝柄(1854-1905) 승문원 정자 영주시 문수면 무섬
예안김씨 전체 문과급제자는 32명이다. 문절공 계열의 영남파가 20명이고, 문절공의 숙부, 즉 김소량의 동생으로 현감을 역임한 김숙량金叔良이 이주한 공주의 공주파가 8명이고, 송도로 이주한 김중량金仲良의 송도파가 4명이다. 판결사 김흠조, 김윤석 부자는 분명하지 않아 제외한다.
전체 무과급제자는 14명인데 영주는 3명이다. 사마(생원, 진사) 111명인데 영남파 82명, 공주파 19명, 송도파 10명이다. 문집, 유고는 전체 161명인데, 영남파 128명, 공주파 21명, 송도파 12명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영남파 사마 82명인데, 이 숫자는 경북지역 그 어느 가문에도 뒤지지 않은 대단한 숫자이다. 이로 보면 예안김씨는 영주의 문절공파는 말할 것도 없고, 김소량의 동생들이 분가한 공주, 송도 지역에서도 이미 확고한 기반을 굳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3). 예안김씨 인물과 집성마을
‘문절공 후손들의 인물과 집성마을’이라 하고 한 단락 소개하지만, 이 글은 필자의 연구물이 아니다. ‘문절공 탄신 600주년 기념’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빠뜨릴 수 없는 부문이라 생각되어, 기성의 조사, 연구 성과를 나름대로 조금 정리했다.
문절공은 아들 넷을 두었다. 맏이 김만석金萬石은 무과급제 했으나 아들이 없었고, 둘째 만균萬鈞도 진사로 단성현감을 역임했지만 무후가 되었다. 셋째 만칭萬秤은 생원으로 좌佐와 우佑 두 아들을 두었는데, 두 아들의 자손들이 번성하여 선성김씨의 문호를 크게 열었다. 넷째 만인萬引은 천문학교수인데 충청도 연기로 이주했다.
따라서 영주 일대의 예안김씨는 대부분 만칭의 후손들이다. 이들은 봉화읍 문단리, 물야면 수식리(무지미), 판교리(너다리), 영주시 문수면 수도리(무섬), 이산면 석포리(번계), 신암리(우금), 부석면 상석리(도탄)와, 예천, 문경 등지로 이주, 집성하면서 그 외연을 넓혀 나갔다, 문과급제 20명, 무과급제 3명, 사마 82명, 문집, 유고遺稿 128명, 일제단식순국1명, 독립유공 30여명을 배출했다.
가. 무섬, 집경루
영주시 문수면 수도리, ‘무섬’은 1757년 문절공 10대손 김대金臺가 처향으로 입향함으로 시작되었다. 김대는 『학계유고鶴溪遺稿』를 남길 정도의 선비였고, 아들 다섯, 손자 열 넷을 두었는데, 무섬의 부는‘천석꾼이 십여 호에 이르렀다’고 했을 정도였다 한다.
휘병輝柄은 문과급제하여 승문원정자를 했고, 낙풍樂豊은 대원군과 막역했으며 의금부도사를 지냈다. 기夔 , 낙운樂澐, 휘택輝澤, 동규東奎는 사마이고, 승학承學은 학자였다. 일제 때 성규性奎, 화진華鎭, 종진鐘鎭, 명진命鎭, 계진啓鎭 등은 아도서숙亞道書宿을 세워 신교육을 하였으며, 독립유공자가 되었다. 성규는 청록파 시인 조지훈의 장인이다.
근년 문절공종택인 집경루와 사당이 자리잡고, 종손, 종부가 거주함으로 말미암아 점차 예안김씨의 실질적, 상징적 중심이 되고 있다.
무섬 출신은 아니지만, 집경루의 후손으로는 만석萬石, 수백壽伯이 무과급제 했고, 만균萬鈞, 만칭萬秤, 윤함允諴, 정선廷善, 낙인樂仁, 휘숙輝璹, 홍규洪奎는 사마이며, 초鍬와 휘준輝濬은 학행으로 알려졌다.
나. 우금, 함집당
영주시 이산면 신암리 ‘우금友琴’은 문절공의 현손 김윤의金允誼의 둘째 우익友益이 터전 을 잡아 집경루에서 분가했다. 후손에 문과 5명, 사마 11명, 문집을 남긴 자 15명을 배출하여 명촌이 되었다.
우익, 방埅, 만주萬柱, 낙주樂周, 영범永範이 문과급제했고, 종호宗灝, 가주可柱, 세열世烈, 정열鼎烈, 시열始烈, 훈壎, 호琥, 준련駿鍊, 위규緯奎는 사마이다.
우익은 호가 두암斗巖으로, 송소 권우權宇, 유연당 김대현金大賢에게 배우고, 1612년 문과급제 했다. 1620년 이괄의 난에 의병대장으로 추대되고 한성부서윤에 올랐다. 당호는 ‘함집당咸集堂’인데, 아들 종호宗灝의 호이다.
한주漢柱는 호가 운학재雲鶴齋로, 운학 같은 생애를 보냈다. 숭정처사 김시온金是榲의 외손자로, 천문, 역상, 음양의 학문이 높은 경지를 이루었으나 처사處士로 일관하였다. 권만權萬은 영남 제일의 인물로 꼽았다. 영의정 정호鄭澔가 출사하기를 권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박문수가 암행어사로 신분을 감추고 영남의 민심을 살피던 중 찾아와 의중을 살피자 시 한 수를 지어 즉시 임금께 고하라는 계책을 알려 주었다. 이때 박문수와 운학재의 대화 내용을 ‘설창문답雪窓問答’이라고 한다.
1826년, 1842년 태어난 석규碩奎와 휘철輝轍은 당대의 학자로 명성을 드러냈다. 특히 함집당 주손 석규는 1881년 위정척사 1차 영남만인소에 소수疏首 이만손李晩孫 다음 부소수였고, 3차 만인소에는 소수가 되어 상소했다. 이로 인해 함경도 덕천으로 유배되어 배소에서 죽었다. 이로써 우금의 존재는 전 영남에 알려졌다.
다. 문단 귀학정
봉화읍 문단리는 문절공, 만칭, 우 3대 묘소와 빈둥재사, 후동재사가 있다. 문절공을 모신 단계서원丹溪書院과 교리 김증을 모신 강모사가 있던 곳이며, 백암종택인 귀학정龜鶴亭이 있다.
문절공의 손자 우佑는 사문士文, 사명士明, 사희士熙, 사호士嘷, 사흡士洽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사문은 급제하여 형조정랑을, 사명, 사호는 사마이다. 경북 대부분의 집성마을이 다섯 형제의 후손들이다. 백암 김늑은 사명의 아들인데 사문의 아들로 입후立後했다.
종집은 무과급제 했고, 사문, 사명, 사호, 륵, 견鋻, 박鎛, 수연粹然, 옥만沃萬, 식만式萬, 봉장鳳章, 휘약輝鑰, 휘진輝晉, 석襫, 대규大奎, 휘현輝鉉, 덕현德鉉 등이 사마이다.
봉화군 수식리와 너다리에는 생원 한천寒泉 이선履善이 제자를 가르치던 한천정사와 청간당정원鼎元이 세운 청간당, 강鋼과 홍제弘濟를 배향한 행계서원杏溪書院이 있다. 거(豦+力), 택선擇善, 이선履善, 강鋼, 익釴, 세표世標는 사마에 올랐다. 김택진金澤鎭은 항일운동로 유명하며, 김사진金思鎭은 당대 인물들과 교유한 선각자였다.
백암 김륵金玏(1540 중종35-1616 광해8)은 문절공 이후 발신한 최고의 현조였다. 금계 황준량, 소고 박승임에게 배우고, 18세에 퇴계 제자가 되었다.
1576년(선조9) 문과급제 하여 지평, 전적을 거쳐 영월군수로 나가 처음으로 단종(당시 노산군)의 사당을 세우고 부인 송씨와 함께 위패를 봉안하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영남안집사’에 제수되어 경상좌도를 수습하고, 의병을 일으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기록들은 이러하다.
서애 류성룡은 『징비록』에 “ 김륵이 임지에 이르자 좌도의 백성들이 비로소 조정의 영令이 있음을 알고 차츰 모여 들었다”고 했다. 김해金垓는 『향병일기』와 『임진창의록』에 “안집사 김륵이 왕명을 받들고 와서 선비들을 모이게 하였다”하였다. 신지제申之悌의 연보에 “이때 안동에 수령이 없었는데 백암 김공이 본도 안집사로 와서 선생에게 안동부사를 겸직케 하였다.”했다. 김용金涌 연보에 “안집사 김공이 선생을 안동 수성의 가장으로 삼았다”고 했다. 조경남趙慶南의 『난중잡록』에 “안집사 김륵이 안동에 당도하니 선비와 품관자 50여명이 찾아왔다. 그래서 전 도사 안제安霽, 전 검열 김용金涌을 수성장으로, 권전權專을 연병장으로 삼고 각 읍에 영을 전달하여 도피한 수령들은 돌아와 일을 보게 하였다.”고 했다.
1594년 이조참판, 홍문관부제학을 지내고, 영의정 류성룡을 모해한 정응태丁應泰 사건에서, 류성룡을 변호 상소하다가 파직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1604년 안동대도호부사로 부임하여 숙원사업인 송항松項과 포구 제방을 구축하는 대역사를 완성하였다. 안동에는 송덕비를 없는데 유일한 비가 ‘송제사적비松堤史蹟碑’로, 바로 백암을 추모한 일종의 송덕비라 할 수 있다. 왜란 이후 황폐해진 여강서원廬江書院을 중수하고, 녹봉을 희사하여 서원 재정을 확충하도록 하였다.
1608년에 대사헌으로‘기축옥사(鄭汝立事件)’에 희생된 선비들을 신원되게 하고, 1610년 논란이 거듭되던 동방오현東方五賢의 문묘 배향을 마무리 하였다. 1616년 고향에서 77세로 몰했다.
1653년(효종4년)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홍문관대제학에 증직되고, 1788년(정조12년)에 민절공의 시호가 내렸다. 승정원일기 1693년(숙종19년) 11월1일과 20일에 갈암 이현일이 두 번이나 시호를 내릴 것을 상소하였고, 이어서 11월21일 숙종으로부터 증시하라는 윤허가 내렸다는 기록이 있다. 이때 '문숙文肅'의 시호가 내렸다고 전해지나, 곧이어 1694년 갑술옥사가 일어나고 남인들이 물락하면서 시행되지 못한 걸로 추정된다. 갈암이 행장, 조현명趙顯命이 신도비명, 권두인權斗寅, 이광정李光庭이 묘지명을 지었다. 시호가 내린 다음 번암 채제공이 신도비명을 다시 지었다. 『백암집』5책을 남겼다.
라. 번계 천운정
‘번계樊溪’는 영주시 이산면 석포리의 다른 지명이다. 번계는 우금과 더불어 영주 예안김씨의 주축이다. 백암이 천운정天雲亭, 동포서당東浦書堂, 양진재養眞齋를 짓고 만년을 보냈으며, 이 유산을 둘째 아들 의금부도사 번계樊溪 김지선金止善에게 물려주면서 그 후손들이 세거했다. 백암의 존재와 유적, 그리고 넉넉한 재산으로 인해 대대로 가세가 번성했다. 지선은 퇴계 손자 이순도의 사위로 『번계유고』를 남겼고, 자손의 번창으로 번계가 그대로 지명이 되었다.
번계는 문과급제 3명, 사마 14명, 문집, 유고 18명을 남겼다. 위(土+韋), 약련若鍊, 낙연樂淵이 문과 급제 했는데, 위는 이조정랑, 약련은 승지, 낙연은 돈녕부도정을 지냈다. 지선, 동주東柱, 봉석鳳錫, 지, 기璣, 상련象鍊, 구련龜鍊, 성련星鍊, 영목永穆, 영민永敏, 하진河鎭 등은 사마이다. 지墀, 정규鼎奎, 세영世榮, 회진晦鎭 등은 학자로 알려졌다.
약련은 호가 두암斗庵으로, 백암 이후 예안김씨 최고 인물이다. 급제 이후 승지 등 요직을 거쳤다. 기국과 도량이 넓으며, 학자적 지조로 인해 시류時流에 따라 벼슬과 출세 꽤함을 좋아하지 않았다. ‘선성김씨전의비’비문을 썼으며, 많은 일화와 『두암집』10권 5책을 남겼다.
한일합방에 비분강개하여 굶어 순국한 김성진金聲振이 있고, 벼슬을 버리고 길림성 등에서 의용단으로 활약한 김찬규金燦奎가 있다.
천운정, 야일당野逸堂, 만간암 등 유적이 있고, 백암 당시 동포東浦라 하여‘동포16경’을 읊었고, 서애 류성룡, 약포 정탁, 지봉 이수광 등 명현들이 시를 남겼다.
내성천 감싸 안은 수려한 풍광에 이산서원伊山書院이 있다. 1558년 퇴계 생전 건립되어 퇴계가 원규를 지었다. 1572년 최초로 퇴계를 배향했고, 1574년 도산서원보다도 먼저 사액되었다. 퇴계학의 정수 성학십도를 판각 배포한 곳도 이곳이다. 그 목판은 지금 소수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마. 도탄 매학당
영주시 부석면 상석리는 ‘도탄’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도탄은 김사명의 증손자 매학당 김선金鍌의 7대손 휘종輝鐘이 문단에서 이주해 세거한 마을이다. 선은 문과급제하고 병조좌랑을 지냈으며, 매학당梅鶴堂이라는 정자를 남겼다. 휘종輝鐘, 영엽英燁은 사마이며, 15명이 문집, 유고를 남겼다. 운강 이강년과 연합하여 항일저항으로 순국한 김휘정金輝珽이 있다.
도탄은 영남의 거유巨儒 김동진金東鎭이 태어나 더욱 명성이 알려졌다. 김동진은 호가 정산貞山으로,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의 문인이다. 도강서당을 열고 강학하였는데 퇴계학맥의 적통을 계승한 영남 마지막 선비였다. 1919년 파리장서 한국유림 대표 137인 중 10번째로 이름이 올렸다. 정산이 죽자 천여 명이 조문했고, 문인록에 600여명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제자들이‘송대유계松臺儒契’를 조직하여 지금도 추모를 이어가고 있으며,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다.
도탄은 소백, 태백산 사이 동계구곡東溪九曲과 낙하암천落霞巖川이 흐르고, 백로도래지가 있는 마을이다. 정산이 제자를 가르치던 관선재觀善齋, 도강서당道岡書堂 등이 남아 있다.
바. 예천 개원정, 문경 산수정과 화산사.
김사희金士熙의 자손들이 예천군 개포면 검바우에 세거하고 있다. 곤錕은 문과급제하고 옥동사玉洞祠에 배향되었다. 곤의 동생 단鍴은 처향 문경 내화리 산수정으로 이거하였는데, 해일海一, 태일兌一 ,이만履萬은 문과 급제했다. 남일南一은 음직 괴산군수이고, 해일은 경주부윤을 역임했는데, 남인의 일원으로 서인과의 대립에 앞장섰다. 태일은 사헌부사간을 지냈고, 백부 곤錕에게 입후되었다.
해일의 아들 이만은 양산군수를 지냈고, 4촌 우일遇一도 문과급제 하였다. 동시대 삼대 5종반이 급제하였으니 당시 예천 지역 예안김씨들의 형세가 어떠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검암, 지남, 단계, 노주, 학고 다섯 분을 배향한 화산사華山社가 내화리에 있다. 이길理吉도 문과급제하여 충청 도사를 지냈다.
예천군 검암에서 영鈴의 아들 덕일德一이 의성김씨 김휴金烋의 사위가 되어서 선산군 해평면 낙산리에 세거하게 된다. 김휴金烋는 내앞 운천 김용의 손자이며 백암 김륵의 외손자인데 노경임蘆景任의 사위가 된다. 노경임은 겸암 류운룡의 사위이다. 김휴와 김덕일은 모두 처향으로 이거한 것이다. 또 노경임의 딸은 천운정 김지선의 자부가 되었다. 덕일은 갈암 이현일의 제자로 생원 합격했다. 월파정泧頗亭을 지었으며, 노경임이 편찬한 선산읍지 『숭선지嵩善志』의 초고 발문을 썼다.
6. 맺음말
2016년 10월 17일 문절공 후손이며 천운정 차주손인 김태곤金兌坤 형이 “우리 선조 문절공 탄신 600주년 기념 강의를 해달라”한다. 나는 본래 견문이 없는 사람이고, 더구나 촉박한 발표날짜로 인해 ‘불가능하다’ 하니, 다시 말씀이 “문중회의에서 이미 결정 되었으니 사양하지 말라”한다. 나는 ‘그럴 수는 없다’ 하니, 다시 말씀이, “원고 쓸 시간이 없으니, 지금 아시는 대로 말하듯 해주어도 좋다 ”한다. ‘아는 대로 말하듯’의 말씀은 내가 전에 ‘백운지선성김씨전의비’의 글 때문이 아닐까 여겨진다.
대를 이은 인연인가? 내가 살고 있는 청량산 강 자락에 백운지가 있다. 백운지는 이미 언급한 바 ‘선성김씨전의비’가 있는 곳이다. 나는 일찍이 이 유적에 관심을 가지고 글을 쓴 바 있고, 그 글은 세간에 널리 알려졌다. 아마 최초로 소개한 글이 아닐까 한다. 이후 많은 사람이 흥미를 가지고 탐방하고 글을 쓴다. 그 글이 지금 이런 발표에까지 이르고 있으니, 이것 또한 조상들의 아득한 세월의 인연이 다시 음덕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돌이켜보면‘문절공 600주년 기념 글’이면 당연히 예안김씨 전 문헌을 일람하고 주제를 잡아 정선하여 시간을 두고 꼼꼼히 써야 하나 지금은 솔직히 그렇지 못하다. 그러나 태곤 형과의 긴 인연을 생각하면 외면하기도 어렵게 되어 이렇게 입막음만 했다. 그러니 이 글은 기념에 누가 될 일이 뻔하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니 태곤 형의 부탁이 아니더라도 천운정의 현 주손 김종환金宗煥 어른과 문중 여러분의 필자에 대한 각별한 사랑에 작게나마 보답할 의무가 없지 않고, 현 문절공 김광호 종손과의 계속되는 수많은 정겨운 만남 역시 거절할 수 없게 한다.
예안김씨는 안동 도산에서 일어나 200여년, ‘한국문화1번지’ 도산 문화를 열었으며, 영주로 이주하여 어언 600여년, 영주지역 문화를 선도하며 대표적 가문으로 성장했다. 아니 영남 굴지의 명문이 되었다. 수년전에는 경북 최고의 고택인 유서 깊은 ‘삼판서고택’을 복원했으며, 이어‘문절공 김담 선생 탄신 600주년 행사’가 국가차원에서 성대하게 마련되어 진행되고 있다. 이 가문 영광의 절정의 한 순간이 지나가고 있다.
예안김씨의 역사는 기념행사로 마감되는 것이 아니다. 다시 600년을 이어가는 초석을 지금 놓고 있다. 먼 후일, ‘문절공 탄신 1000주년 기념행사‘의 그날은 의심할 것 없이 예정되어 있는 일이다. 그 날은 오늘의 예안김씨 보다 더 거룩한 위상을 지닌 한국의 대표적인 명문으로 성장해있을 일이 분명하다. 나는 그날이 오기를, 그날이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 드린다.
2016年 11月 18日
江湖文學硏究所 後學 文學博士 永川 李性源 謹識
요약
본 글은 ‘문절공 김담 선생 탄신 600주년 기념’을 염두에 두면서 문절공文節公 김담金淡(1416 태종16-1464 세조10년)선생과 예안김씨들의 영남 사림파 내에서의 위상과 입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안동에 세거한 200여년의 세월, 즉 선계의 세거지 고향 안동 도산(옛 예안)의 위상과 산천과 유적과 혼인 관계를 추적하고, 다시 영주로 이거한 이후, 문절공과 그 후손들의 영남에서의 활약상과 위상에 대해 개괄적으로 요약하고자 한다.
이를 수행하기 위해 “영주 예안김씨와 문절공은 영남 선비문화의 선구였다”로 제목하고, 여섯 단락으로 구분하여 쓴다.
첫째 단락은 머리말로 논문 전개의 기본 방향을 제시한다.
둘째 단락은 예안김씨의 내력과 선계의 세거지인 도산(옛 예안)을 살펴보고, 현재 도산에 남아 있는 예안김씨의 유일한 유적인 전의비를 살펴 보고자 한다. 도산은 이른바 ‘도산9곡陶山九曲’이 있는 곳으로, 역동 우탁, 농암 이현보, 퇴계 이황, 월천 조목, 육사 이원록 등의 걸출한 인물들이 배출된 고장이다. 안동부 안에서도 섬처럼 행정구역이 독립적으로 존재하여 유교직할시 같은 성격을 유지했다.
셋째 단락은 예안김씨가 도산을 떠나 영주로 이거하여 도산시대를 마감하게 되는 경위를 살펴보고자 한다. 8세 로輅의 아들 4형제 중 소량小良이 영주의 호족인 판서 황유정黃有定의 사위가 되어 영주로 이거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처가 혼맥과 도산 혼맥을 살펴본다.
넷째 단락은 문절공의 생애와 환력을 살펴보는 장이다. 문절공이 세종의 명을 받아 이순지李純之와 함께 이룩한 천문학의 업적은 오늘날 세계 천문학계가 우리나라를 주목하게 만드는 기반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문절공의 위상은 성삼문, 신숙주, 장영실, 정인지 등에 버금가는 인물임을 증명한다. 그리고 현재 종손, 종부가 살고 있는 문절공종택, 집경루가 소재한 무섬마을을 살펴보고, 무섬과 하회를 개괄적으로 비교 서술한다. 아울러 예안(선성)김씨와 반남박씨, 평해황씨의 인연도 거론한다.
다섯째 단락에서는 문절공 당시의 혼맥이 어떻게 형성되어 있는지 살펴보며, 후손들이 영주지방의 문화형성에 어떤 기여를 하였는지를 과환과 집성촌의 인물을 중심으로 개괄적으로 살펴본다. 영주로 이거한 예안김씨는 문절공 후손에서만 문과급제 20명, 무과 3명, 사마 82명, 문집과 유고를 남긴 자 128명, 독립유공자 30여명이 배출했다. 이런 숫자는 영주는 말할 것도 없고, 안동 유수의 성씨들과 비교해도 손색없다. 이들 후손들의 활약상을 살펴본다. 예안김씨는 당시 도산에 전입해 온 영양김씨-안동권씨-영천이씨-광산김씨-횡성조씨-봉화금씨-진성이씨로 이어지는 성씨들의 가족 같은 계보의 선두에 있었다. 모두가 10촌 이내의 통혼관계에 있었다. 도산의 전체 성씨들이 중첩적인 혼인관계에 있었다. 이를 중점해서 발표한다.
여섯째 단락은 맺음말로, 이번 행사가 문절공 탄신 6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인 만큼 문절공을 추모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후 다시 600년을 이어가는 동력으로 삼고자 함이니 이를 다짐하고 전망하는 것으로 마무리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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