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는 안동에서 도산서원 방향으로 가는 35번 국도를 따라
진행된다. 첫 행선지는 와룡의 유일재(惟一齋) 김언기의 종택이다. 김언기는 퇴계와 같은 시대에 강학을 열었다. "명문대학
옆에 조그만 학원이 문을 연 형국"이었다. 헤겔에 맞서기 위해 같은 시간대에 강의를 했던 쇼펜하우어의 실패한 도전이 생각난다.
유감스럽게도 문집이 임진왜란 때 불타는 바람에 김언기는 잊혀진 유자(儒者)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저자는 김언기를 생생하게
되살렸다.



유일재 종택에서 차로 5분 거리에 광산 김씨 600년 세거지(世居地)가 나온다. 실은 다른 곳이었는데 안동댐을 건설할 때
수몰당해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한다. 그러나 옮겨와서도 위풍당당하다. 조선 시대 때 나라에서 시호(諡號)받은 이만 43명,
문과급제자 265명을 배출한 광산 김씨다.



부포를 거쳐 다시 35번 국도를 타다 보면 분천리 표지판과 함께 도산서원 진입로에 당도한다. 이번 답사의 정수(精髓)다.
이현보를 배출한 영천 이씨 집성촌이 있었던 곳이다. 정철이 호남문단을 열었다면 이현보는 영남문단의 태두다. 그의 '어부가'는
퇴계의 '도산12곡'에 영향을 주었고 호남의 윤선도가 '어부사시사'로 완성시켰다. 유유자적(悠悠自適)의 흥취에 영·호남이
따로 있을 리 없었던 것이다.



이제 퇴계 이황을 만나러 갈 차례다. 저자는 도산서원 구석구석을 그와 얽힌 유사(有事)와 더불어 안내한다. 무엇보다 딱딱하고
근엄한 유학자 퇴계를 따뜻하고 살가운 인간 퇴계로 재조명한다. "퇴계는 일생 동안 2200여편의 시와 3000여편의 편지를
썼다." 시를 통해 자연을 만났고 편지를 통해 인간을 가까이(親) 했다. 부인과의 불화를 고민하는 제자에게 '집에 가서
열어 볼 것'을 단서로 써준 퇴계의 편지는 뜻밖이다.



'대체로 보면 (부인의) 성품이 좋지 못해 스스로 소박을 자초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은 남편이 항상 (자신을) 반성하고
잘 보살펴주면 부부의 도리를 잃고 가정이 파괴되어 더할 수 없는 각박한 인간으로 전락되는 지경에는 이르지 않는 법이네.'



이 조심스러운 충고에 힘을 더하는 것은 다음 문장이다. '나는 두 번 장가를 갔으나 한결같이 불행했네. 그러나 나는 한
번도 박대하려는 마음을 가져 본 적이 없으며, 그저 애써 잘 지내려고 노력하며 살아온 것이 십수년, 그 사이 더러 마음이
흔들이고 번민과 고뇌로 견디기 어려운 때도 없지는 않았네. 그러나 그렇다고 어찌 인정을 돌릴 수 있겠는가.' 실제로 퇴계의
두 번째 부인은 '좀 모자라는 여인'이어서 퇴계는 여간 속을 끓이지 않았다. 저자는 감동이 없는 충고는 하지 않느니만 못하다고
말한다.



저자의 답사는 봉화 청량산에서 맺는다. 퇴계도 그곳 청량산에서 공부한 적이 있다. 청량산은 유산(儒山)이라기보다는 불산(佛山)이다.
퇴계의 공부는 그냥 공부가 아니라 수행이었다는 점에서 어쩌면 어울리는 산인지 모른다. 물론 퇴계의 수행은 득도(得道)가
아니라 거경(居敬)을 목표로 했다는 점에서 유교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