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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의 문화인물에 농암 이현보 선정

기사입력 2001-07-03 18:44|최종수정 2001-07-03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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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 월간중앙 7월호 (글: 문재호 사진: 권태균)

조선 士林문화의 개척자

聾巖(농암) 李賢輔(이현보)

江湖歌道를 희롱함이 표표하여 마치 儒仙 같았다

聾巖은 영남의 명문 사대부가 출신으로, 훗날 퇴계에 의한 영남 사림학파의 태동을 가능하게 한 조선조 士林문화의 개척자다. 그의 나지막한 삶은 만년에 이르러 당대 지식층에 적지않은 충격과 자극을 주었으며, 많은 이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자극적인 것을 선호하고 자신을 내세우기 위해 타인을 짓밟는 것조차 서슴지 않는 오늘의 현실을 생각할 때, 그는 우리 역사의 단아한 표상이라고 할 수 있다.

󰡐사관(史官)은 마땅히 군주(君主)의 언행을 빠짐없이 기록해야 하는 막중한 책임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사관의 자리는 탑전(榻前:임금의 앞)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부복(俯伏)하고 있어 탑전의 동정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여 곤란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사관의 자리를 탑전에서 가까운 곳으로 옮겨 주십시오. 그래야 군주의 모든 언행을 빠짐없이 기록하게 될 것입니다.󰡑

예문관(藝文館)에서 올라온 계청(啓請)을 들은 연산군(燕山君)은 분노했다. 무오사화(戊午士禍) 이후 감히 자신에게 정면으로 대항하는 인물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연산군은 내심 위험한 줄타기를 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수그러들었던 사림(士林)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었고, 온갖 사치와 향락으로 궁중의 재정은 파탄나 있었다. 자신을 비호해 주던 훈구세력조차 이즈음에 와서는 제 밥그릇 추스르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는 서탁을 내리쳤다.

󰡒도대체 누가 감히 이따위 계청을 올린다는 말이냐? 이 계청을 올린 자가 대체 어떤 놈이냐?󰡓

연산군의 서슬에 내관들은 부르르 몸서리를 쳤다.

󰡒예, 예문관 검열(檢閱)로 있는 이현보라는 자이옵니다.󰡓

󰡒이현보? 대체 그놈은 간이 몸 밖으로 삐져나왔다더냐? 이놈이 제정신으로 이따위 계청을 올린다는 말이냐? 내 이놈을 그냥 둘 수 없구나. 이놈을 당장에….󰡓

부아가 치민 연산군은 당장에라도 이현보를 잡아 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이내 그는 현실을 생각했다. 사관의 자리를 옮겨달라는 계청만으로 신료(臣僚)에게 벌을 가한다면 체면이 말이 아니다. 그렇다고 그냥 넘어가자니 부아가 치밀었다. 사관의 자리를 가까이 해달라는 것은 자신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현보의 계청이 당돌하기는 하나 사리나 이치에 어긋나는 점은 없었다.

󰡒하오나 전하, 그 자의 계청 자체는 그다지 불순하다고 보기 어렵사옵니다. 아직 젊고 말단인지라 의욕이 앞섰을 뿐이옵니다. 널리 살피셔서 이번만은 그냥 넘어가심이 옳은 일일 것이옵니다.󰡓

연산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잡아들여 요절을 내고 싶었지만 훗날을 기약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농암(籠巖) 이현보(李賢輔)는 연산군의 머리 속에 언젠가는 제거해야 할 요주의 인물로 확실하게 각인되고 말았다.

"어부가"의 목판으로 글씨는 퇴계가 쓴 유일한 한글서체다. 농암이 쓴 농암가 원본으로 "애일당구경별록"에 수록되어있다.

연산군의 실수가 목숨을 살리다.

농암은 세조 13년(1467) 안동 예안의 분천리에서 태어났다. 부친 이 흠(李欽)은 자헌대부 의정부 좌참찬에 중직되었고 인제현감을 지냈다. 농암은 재주가 남다르고 지혜가 뛰어났으나 어린 시절에는 학문보다 사냥하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19세가 되어서야 뒤늦게 향교에 들어가 학문에 힘썼으며, 32세의 나이에 관시(官試)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남들보다 뒤늦은 나이에 출발했지만 농암은 누구보다도 의욕적으로 관직에 임했다. 그러나 그의 의욕이 문제를 낳은 것이었다. 예문관 검열로서 올린 계청이 그를 사지(死地)로 몰아넣는 단초가 된 것이다.

그로부터 2년후, 연산군의 생모 윤씨의 사사(賜死) 사건을 매개로 수십명이 죽거나 화를 당한 갑자사화(甲子士禍)가 발발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에 오른 농암은 세자가 독서에 마음을 쓰지 않는다며 이를 경계하라는 내용의 계청을 올린다. 여기에서 농암은 서연관(書筵官)이었던 대사헌(大司憲) 홍자아(洪自阿)가 세자 진강을 잘못하고 있으니 이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직언하는데, 이로 인하여 의금부에 끌려가 추국(推鞫)당하고 안동의 안기역으로 유배가게 된다.

이때의 경험은 농암의 평생을 좌우하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로서는 옳다고 생각한 것을 실천했을 뿐인데 그것이 도리어 화를 부른 것이다. 비로소 현실정치의 두터운 벽을 실감했고, 이상과 현실의 좁힐 수 없는 거리를 피부로 느꼈던 것이다. 이후 농암은 정치의 핵심이랄 수 있는 중앙관직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정치권의 외곽을 배회하는 이방인으로서의 삶을 추구하기 시작한다. 농암이 조선조 󰡐강호가도󰡑(江湖歌道)의 출발점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이와 같은 현실정치권에서의 실망과 허탈함이 내면 깊숙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안기역의 유배소에서 읊은 다음의 한시는 당시 농암이 느꼈을 내면의 풍경을 짐작하게 한다.

其雨其雨日 비여 비여 해는 높은데

天心豈識民心勞 하늘이 어찌 백성의 수고함을 알리

萬口待哺方 만백성의 입이 먹을 것을 고대하며 입을 벌리고

我欲上天天路高 내 하늘에 오르고자 해도 하늘길이 높구나

嗟之旱誠有由 아, 이 가뭄 참으로 연유가 있으리니

安得淑問如陶 어떻게 고요와 같은 판결을 얻으리오

雲師欲作風伯怒 구름이 비를 내리려 하면 바람이 화를 내니

助勢黨惡音豪 악한 무리의 힘을 도와 흉폭한 놈들이 날뛰는 듯하네

농암의 유배는 연산군에게는 새삼스럽게 그를 기억하게 하는 단서가 되었다. 갑자사화의 후속 조치를 취하는 과정에서 연산군은 안기역에 유배되어 있던 그를 다시 서울로 압송시킨 것이다. 물론 농암을 제거하기 위한 수순이었다. 그러나 농암에게는 행운이라고나 할까? 갑자사화후 더욱 향락에 빠져들었던 연산군은 정신적 공허감 때문이었는지 밤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괴로워했다.

그로 인한 실수였는지, 어필(御筆)로 석방자를 지목하는 과정에서 농암의 위에 적혀 있는 자를 지목한다는 것이 그만 농암을 지목하고 말았던 것이다. 연산군은 만사가 귀찮았을 것이고 그에게는 있으나마나한 존재였던 농암의 생사를 굳이 확인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농암은 죽을 뻔했던 목숨을 연산군의 실수 덕분에 건질 수 있었다.

농암은 명실공히 사대부가 출신으로 영남 󰡐사림󰡑(士林)의 한 사람이었다. 원래 사림이라는 용어는 재야의 선비 집단을 통칭하는 개념으로, 고려 말이나 조선 초기에 간혹 쓰였으나 정치적 의미를 지닌 것은 아니었다. 그러던 것이 무오사화(戊午士禍)를 겪으면서 당시 기득권 세력이었던 훈구파에 대항하는 신진 정치세력을 의미하는 개념으로 변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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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호

․ 1967년 출생

․ 숭실대 국문학과 졸업 및 동 대학원

․ 박사과정 수료

․ 1995년 "진주신문" , "가을문예" 중편단편소설 당선

․ "교단문학"에 "그 방의 사내" 발표

․ 1999년 장편소설 "게임 1,2" 발간

경북 안동시 도산면 운곡리에 있는 "분강서원" . 농암을 배향하고 있다.

몸을 낮춰 자신의 삶을 선택하다

당시 사림파의 사종(師宗)으로는 김종직(金宗直)․조광조(趙光祖)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들은 중앙집권주의로 인한 폐해를 개혁하고 향촌 지주를 중심으로 한 광범위한 성리학적 이상 실현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그들에게 군주란 절대권력을 지닌 신적 존재가 아니었다. 군주는 󰡐수기치인󰡑(修己治人)하는 통치권자에 지나지 않았다. 즉, 군주도 한 사람의 사대부로서 자신을 끊임없이 수양하고 나라를 다스려야 하는 것이었다. 사림파는 이런 견지에서 정치권력과 경제력을 독점한 훈구세력을 부패한 집단으로 지목해 공격했다. 󰡐사화󰡑(士禍․사림이 입은 화)는 이들 사림파의 공격에 대한 훈구파의 반격이었던 것이다.

농암이 김종직이나 조광조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는 문건은 발견되지 않지만 그의 출신 배경을 고려해 본다면 그 역시 영남 사림파의 한 사람이었다.

사림파는 고려 개혁에는 찬성하지만 조선 개창에는 반대해 시골에 은거했던 온건개혁파 신흥 사대부의 후예였다. 훈구파가 개국과 세조의 즉위에 협조한 공로로 막대한 토지를 독점한 반면 사림파는 지방에 근거를 둔 중소지주 출신들이었다. 성종 때부터 중앙정계에 등장한 이들은 주로 삼사(三司:사헌부․사간원․홍문관)의 언관직을 맡아 훈구파의 전횡을 공격했는데, 이들 역시 훈구파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지방의 지주인 것은 마찬가지여서 지방에도 근거지를 갖고 있었다. 농암의 가문도 이러한 세력 중 하나였다.

농암만 해도 모친과 처가 모두 안동 권씨의 일문으로, 당시 이미 명문 사대부가로 손꼽히던 집안이었다.이러한 지역적 인적관계는 농암의 성장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가 20세의 나이에 당시 영남 사림파의 대가인 홍귀달(洪貴達)에게 수학하고 만년에는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던 것도 그가 영남 사림의 한 부분을 차지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농암은 결코 정치세력이나 파벌을 형성하지는 않았다. 그는 영남 사림파의 사종이었던 김종직의 끔찍한 죽음, 그것도 부관참시(副棺斬屍)까지 당하는 두번에 걸친 죽음을 경험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이 파벌을 형성하는 대신 사림파가 활동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 후학인 퇴계에게 물려줌으로써 조선 성리학이 꽃피울 토양을 마련했다. 말하자면 그는 퇴계가 영남 성리학파를 형성할 수 있도록 기반을 제공한 셈이다.

중종반정 이후 유배지에서 풀려나 새롭게 관직에 나아가게 되었을 때 농암은 잠깐 동안의 내직(內職․중앙관직)을 지낸 후 자청해서 외직(外職․지방관)인 영천군수(永川郡守)로 나갔다. 늙으신 부모를 봉양해야 한다는 명분이었고, 그 자신이 이름난 효자였지만 이는 중앙정계보다 지방에서 성리학적 지배질서의 토대를 닦겠다는 의지의 소산이었다. 대부분의 벼슬아치들이 외직을 기피해 어쩌다 고을의 수령으로 발령나면 심지어 사직하던 시기에 그의 외직 자청은 드문 경우였다. 그의 대부분의 관직생활이 향촌사회를 다스리는 현감(縣監)이나 목사(牧使)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런 점에서 특기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지방 수령으로 있으면서 농암은 비로소 자신의 이상을 펼쳐나가기 시작했다. 지방에서 성리학적 이상사회를 실현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농암이 46세때인 1512년 부모에게 효도하기 위해 귀먹바위위에 지었다는 애일당. 현재는 안동시 도산면 분천리로 옮겨졌다.

성리학적 이상을 펼쳐 보이다

그는 우선 잘못된 경제질서를 바로잡으려고 노력했다. 당시 지방의 부호들은 고리대 형식을 빌려 춘궁기에 곡식을 나누어 주고 추수기에 비싼 이자를 받아 살을 찌우고 있었다. 농민들은 어쩔 수 없이 비싼 이자를 갚기 위해 또 다시 빚을 져야 했고, 결국 토지를 빼앗기는 사례가 빈번하였다. 상당수의 농민들은 지주의 땅을 부쳐먹는 전호(佃戶)로 전락하였다. 농암은 농민들을 보호하는 한편 기왕에 전호로 전락한 농민들이 지주의 횡포에 굶주리지 않도록 보호하는 정책을 폈다. 그가 충주 목사(忠州牧使)에서 안동 부사(安東府使)로 이임할 때, 충주에서 그를 다시 보내달라는 상소가 올려진 것은 그의 목민(牧民)이 성공적이었음을 말해 준다.

이와 함께 농암은 성리학적 질서를 향촌사회에 보급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농암은 부임하는 지역마다 향교 건설을 적극 추진했고 󰡐소학󰡑(小學) 교육의 장려 등을 통해 향교 교육을 진흥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이를 통해 농암은 향촌사회를 성리학적 지배질서로 재편하려 했던 것이다. 농암의 이러한 노력은 후일 영남학파를 이루는 데 절대적인 기여를 하게 된다. 농암은 출생지이기도 한 예안현감을 비롯 충주목사․안동부사․대구부사(大邱府使)․경주부윤(慶州府尹)․경상감사(慶尙監司) 등을 지냈는데, 이들 지역은 후일 영남학파를 이루는 숱한 인재들이 출현한 지역이었던 것이다.

농암은 시호를 󰡐효절󰡑(孝節)이라고 할 정도로 특히 󰡐효󰡑(孝)의식이 강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부임지에 명농당(明農堂)․애일당(愛日堂) 등의 정자를 지었는데, 퇴계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이는 모두 부모에 대한 효성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애일당에 대해 농암은 스스로 󰡐놀기 좋은 때에는 늘 부모님을 모시고 여러 아우들을 데리고 술잔을 올리고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기를 반드시 이 당우에서 하였더니 부모님의 연세가 높아져 희구의 정이 마음에 없을 수 없어 당우의 편액을 애일당이라고 하였다󰡑고 밝혔다.

농암의 효 실천은 목민관으로서 양로연(養老宴)을 베푼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농암은 안동부사를 지내던 1519년 이후 수차례의 양로연을 베풀었는데, 이 연회에는 귀족 사대부가를 비롯하여 평민 중에서도 팔순 이상의 노인을 모두 초청하여 성대하게 잔치를 치렀다고 한다. 이러한 효의 실천과 확대는 그가 이상으로 품고 있던 성리학적 윤리의식을 현실화함으로써 백성들을 교화하려는 적극적인 의지의 소산이었다고 할 수 있다.

만년에 이르러 농암은 일반 백성들이 손쉽게 수용할 수 있는 󰡐주자가례󰡑(朱子家禮)를 보급하고자 노력했다고 한다. 농암은 백성들도 손쉽게 실천할 수 있는 간소화된 의례를 보급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를 위하여 성리학적 사리에 밝은 이들과 수차례 서신을 왕래하고 자문을 구하곤 했다. 또한 지방의 풍속을 바로잡고 백성들을 교화하기 위해 향약(鄕約)의 입조(入條)를 구상하기도 했다.

농암 종택의 별당중 하나인 긍구당. 여기서 농암이 태어았다.

격랑의 풍파 속에서 中庸之道를 지키다

농암의 이러한 생각은 그의 생전에 기틀이 다져졌고 그가 죽고 난 후 이 황 등에 의해 현실화되어 일반인들도 쉽게 유교적 윤리이념을 실천할 수 있게 되었다. 농암 사후 그의 자손들과 후학들이 앞장서서 예안을 중심으로 벌였던 안동 지방의 향약 보급운동은 농암이 고대했던 성리학적 향촌사회의 모습이 현실 속에 펼쳐진 것에 다름아니었다.

농암은 세조(世祖)부터 명종(明宗)까지 일곱 명의 임금을 만났고, 파란 많은 정치적 격랑 속에서 4대 사화를 모두 겪은 흔치 않은 이력을 지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삶은 비교적 평탄해서 89세까지 장수했으며 벼슬이 당대 최고위층이랄 수 있는 정헌대부(正憲大夫)․숭정대부(崇政大夫)에까지 올랐다. 이러한 이력은 그의 현실 대응 방식과 인간관계의 한 단면을 엿보게 한다.

앞서 언급한 대로 농암은 주로 외직을 도맡아 했다. 이는 그에게 중앙정치의 격랑을 피하게 해 주었다. 농암의 이러한 행보에 대해 한쪽에서는 자기의 목숨을 지키려는 󰡐명철보신󰡑(明哲保身)이며 󰡐당쟁 하의 현실도피󰡑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외직으로 돌면서 농암이 이룩했던 업적을 본다면 그를 단순한 처세가로 보기는 어렵다. 그야말로 명철보신했다면 불필요하게 자신의 정력을 소모하면서 성리학적 지배질서를 확립하고자 애를 썼겠는가 하는 것이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역할을 훗날의 역사를 위한 매개체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호인 󰡐농암󰡑(聾巖)에서도 그의 처신을 짐작할 수 있다. 󰡐귀머거리 바위󰡑라는 의미인데, 그는 왜 하필 귀머거리를 선택했을까? 그것은 그만큼 당대의 현실이 탐탁치 않았다는 의미다. 귀가 얇은 족속들은 쉽사리 움직이고 잇속에 밝은 법이다. 서로 서로 자신이, 혹은 자신이 속한 세력이 정도(正道)를 걷고 있음을 선전하지만 그것은 결국 혹세무민(惑世誣民)하거나 곡학아세(曲學阿世)하는 것에 다름아니었다.

농암은 세상이 던지는 말들을 듣지 않으려 한 것이다. 치우치지 않고 자신이 가야 할 길을 묵묵히 가겠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농암은 당대 가장 유력한 사림파의 한 사람이었고, 김종직 이후 흩어졌던 사림을 한데 모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통로였다. 자의든 타의든 그는 영남 사림의 기대를 한몸에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사림에 앞장서는 대신 향촌에 성리학적 지배질서를 수립하는 토대를 닦았다. 사화가 거듭되는 혼란한 정치상황 속에서 농암은 가장 절실한 것이 백성들의 신뢰를 얻는 것, 백성들을 하나의 이념적 깃발 아래 결속시킴으로써 거기에서 힘을 얻어오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이를 실천했다. 그는 중앙권력의 향배와 상관없이 자신의 맡은 일을 묵묵히 해냈다. 어쩌다 내직을 맡게 되더라도 곧 외직으로 복귀했으며 정치적 소용돌이에는 휘말리지 않았다.

이러한 처신 때문에 당대인들은 그를 󰡐지족지인󰡑(知足之人) 즉,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평했다. 그러나 그는 결코 만족할 줄 아는 인물이 아니었다. 앞서 언급했듯 그는 끊임없이 백성들을 성리학적 지배질서로 편입시키기 위해 새로운 것들을 연구했고 실천한 사람이었다.

농암의 현실 대응 방식은 그의 인간관계를 살펴보면 좀더 명확해진다. 농암의 행장이나 연보를 보면 그는 자기 또래나 선배 격인 인사들과는 그리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무오사화와 관련하여 좌천되었다가 유배가는 도중 교살(絞殺)된 홍귀달에게 수학했지만 그의 문하들과의 교분관계는 그다지 기록되어 있는 것이 없다.

오히려 그가 가장 가깝게 사귄 인물들은 아들뻘인 퇴계 이황과 손자뻘인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 등이었다. 퇴계는 농암이 안동부사로 재임할 당시 향교에서 강학(講學)을 했는데 이것이 인연이 되어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족벌 차원에서 본다면 퇴계는 농암의 7촌 족질(族姪)이 되어 같은 가문 출신이라고 보아도 무방한 관계였다. 금계는 그의 손녀사위로 농암의 문학활동에 많은 공헌을 한 것으로 보인다. 기록을 보면 여가가 날 때마다 농암은 이들과 음주가무를 즐겼다고 하는데, 이것으로 보아 농암과 이들의 관계가 어떠했는가를 짐작해볼 수 있다.

그밖에도 당대 사림 학문의 좌장격이랄 수 있는 이언적(李彦迪)․김안국(金安國)을 비롯하여 주세붕(周世鵬)․안정(安珽)․이장곤(李長坤) 등과 친분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인사들 대부분은 농암의 후배격인 인물들로, 농암은 이들 사이에서 일정한 가교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이 농암 이후 영남학파를 형성하고 이끌어 갔다는 점을 상기해 본다면, 농암은 당장의 정치권력을 염두에 두지 않고 먼 미래의 성리학적 현실 창조에 보다 주안점을 두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외직으로 지내는 동안 농암은 거의 사람을 가리지 않고 사귀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림에 속해 있으면서도 이행(李荇)․김광준(金光準) 등 훈구파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 인물들과도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외척 윤원형(尹元衡)이 집권했을 때 김광준의 배려로 승진한 것은 그의 색깔이 어느 한쪽에 치우쳐 있지 않았음을 엿보게 한다. 농암은 한편으로는 향후 사림의 종사가 될 만한 인재들과 사귀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당대 권력층의 측근들과도 두루 교류함으로써 자신에게 닥칠지 모르는 위험한 상황을 피해갈 수 있었던 셈이다.

농암의 처신과 관련해 볼 때, 그는 󰡐중용󰡑(中庸)에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농암은 󰡐천하중용부󰡑(天下中庸賦)라는 글을 통해 중용의 위대함을 역설하였는데, 이는 그가 중용에서 말하는 󰡐경계하고 삼가고 두려워하는 것이 경(敬)이며, 경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중용을 실천하는 길󰡑임을 깊이 깨닫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농암은 또 󰡒원래 넘거나 못미치는 것도 없고, 또 치우치지도 아니하고, 기울지도 않는 것이 중용󰡓이라고 말하여 중용의 도를 자신의 실천논리로 삼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농암은 항상 자신을 돌이켜보고 스스로를 내세우지 않음으로써 적을 만들지 않았고, 그랬기 때문에 남달리 유복하고 여유로운 삶을 살다 갈 수 있었던 셈이다.

󰡐漁父歌󰡑를 개작해 사림문화의 단초를 마련

농암의 문학적 성찰은 관직에서 퇴임(退任)하고 난 후부터 급격하게 발전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물론 관직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한시(漢詩)들을 창작했지만 본격적으로 시가를 창작한 것은 퇴임 이후였다고 할 수 있다.당대 사림은 학문적으로는 훌륭한 인재들이 수없이 등장하면서 학풍이 크게 진작되어 있었다. 그러나 문화적으로는 아직 이렇다할 성과가 축적되지 않아 도학적(道學的) 차원에서의 문화 창조가 시급한 상태였다. 학문을 한다는 축들은 대개 한시를 지어 자신의 심정과 포부를 드러냈는데, 그 대부분이 중국의 한시를 모방하거나 중국의 고사를 인용하는 것들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농암이 시가를 지은 것은 우리 전통문화의 창달이란 점에서 커다란 의의가 있는 것이었다.

농암이 강호로 돌아가고자 결심한 것은 이미 오래 전의 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복직되자마자 영천군수를 자청한 농암은 영천에 재직하는 동안 명농당을 짓고 귀거래도(歸去來圖)를 붙여 자신의 뜻을 확고히 했다. 현실 속에서 그는 향촌사회에 성리학적 질서를 수립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면서도 귀거래라는 그의 최후의 꿈을 버리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그렇게도 벼르고 벼르던 농암의 치사(致仕․나이가 들어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남)는 1541년, 그의 나이 76세가 되던 해에 이루어진다. 물론 예의상 임금은 그에게 벼슬을 내렸지만 그는 더 이상 업무를 관장하지 않았다. 농암이 완전히 강호로 치사를 이룬 것은 1543년인데, 그가 치사한다는 말을 들은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근래에 보기 드문 성대한 송별회가 치러졌던 것으로 전한다.

강호로 돌아온 농암은 영지산에 정자를 짓고 유유자적한 생활을 누리면서 새로운 사림문화 창조를 위해 남은 정열을 쏟아부었다. 89세에 돌아갔으니 그가 강호생활을 누린 것은 10여년 남짓한 세월이었다.

그러나 그 10여년 동안 농암은 우리 문학의 한 줄기를 확고히 다졌으며, 후세 사림들에게 독특한 문화공간을 제공했다.농암의 업적 중에서 가장 먼저 꼽는 것은 󰡐어부가󰡑(漁父歌)를 정리한 일이다. 당시의 유학자들에게 어부란 단순히 물고기를 잡는 직업적 개념이 아니었다. 일찍이 굴원(屈原)은 󰡐어부사󰡑(漁夫辭)를 통하여 고답적이고 신선같은 생활을 하는 존재로 어부를 묘사했으며, 도연명은 속세와 이상세계 사이에서 중간적인 역할을 하는 존재로 보았다. 즉 당시 유학자들에게 어부란 현실세계를 비판하며 새로운 이상의 길을 찾고자 한 이데아적 존재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농암은 이러한 세태를 고려하여 󰡒악장가사󰡓(樂章歌詞)에 작자 미상의 작품으로 전하던 12장의 󰡐어부가󰡑를 9장으로 정리한 󰡐어부장가󰡑(漁父長歌)와 원전을 알 수 없는 󰡐어부단가󰡑(漁父短歌) 5편을 내놓았다.

이 과정에서 주목되는 것은 농암이 어부가를 손질하는 과정에서 퇴계와 긴밀하게 의논했다는 점이다. 실상 어부가의 원전 역시 농암의 뜻을 간파한 손녀사위 황준량이 백방으로 수소문해 찾아온 것이라는 점에서 예사롭지 않다.아마도 농암은 그의 치사 무렵 커다랗게 확장된 사림을 하나의 문화권으로 형성할 필요성을 느꼈던 것은 아닐까? 특정한 집단이 형성되면 그 집단만의 고유한 문화가 마련되게 마련이다. 농암은 그런 것을 염두에 두었던 것이다. 퇴계와 여러 차례 의논하면서 어부가의 구절이 도학적 차원에서 합당한지 고심한 흔적이 엿보인다는 점은 농암의 의도를 짐작케 한다. 게다가 농암의 어부가는 훗날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에게 전승되어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와 󰡐어부단가󰡑로 거듭난다. 고산의 시들은 조선조 문학의 백미로 일컬어지는 바, 사림문학의 출발점이 농암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어부장가󰡑의 1장과 2장을 보자.

위의 작품을 보면, 원래의 󰡒어부가󰡓에서 󰡐지곡총 지곡총 어와 어와󰡑라고 한 것을 󰡒至菊悤至菊悤於思臥󰡓로 고침으로써 훨씬 안정된 음악성을 추구하고 있다. 또, 1장의 끝 부분에 있던 󰡐一竿明月이 亦君恩이샷다󰡑를 빼버림으로써 현실세계를 추방하고 완전한 자연미를 살리려고 애쓴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악장가사󰡓 소재 어부가의 후렴구를 살펴보면 󰡐→닫드러라→이어라→→이퍼라→→돗디여라→ →아외여라→이퍼라→돗더러라→󰡑의 진행을 보인다. 이러한 진행은 어부가 배를 띄우고 고기를 잡다 돌아오는 과정을 순서적으로 바르게 정리하지 못한 진행이다. 이는 󰡐→닫드러라→이어라→→돗디여라→→→돗더러라→닫디여라→󰡑라는 진행과정으로 구성되어야 올바르다. 농암은 이러한 문제를 수정하여 자신의 󰡐어부가󰡑를 내놓은 것이다.

농암의 󰡐어부가󰡑는 당대 사림에서 크게 유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농암 이후 󰡐어부가󰡑라는 제하의 노래들이 속출했으며, 어부의 생활을 기조로 한 문학과 가요 형태들이 많이 생산되었던 것이다. 󰡐어부가󰡑의 궁극적 지향점은 복잡다단한 현실정치에서 벗어나 강호 자연으로 회귀하려는 󰡐귀거래󰡑 의지다. 귀거래 의지란 정치권력의 무상함에서 벗어나라는 권고면서, 개인의 영달과 욕망에 사로잡히지 말라는 경계의 의미가 함축된 개념이다. 현실정치가 자신의 이상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과감하게 물러나 강호에 은거하기를 바라는 것이며, 출사와 귀거래를 동등한 개념에 위치시킴으로써 관직에 나아가는 것 못지않게 남들의 손가락질을 받지 않고 명예롭게 은퇴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이후 퇴계가 출사와 퇴임을 반복한 것이나, 역량 있는 사림들이 정치에 연연해하지 않고 강호에서 은둔하며 처사로서 후학들에게 모범이 된 것은 농암이 주도한 사림문화의 영향이 그만큼 컸다는 사실을 입증해 준다.

자연으로 돌아가 江湖歌道를 완성하다

농암문학의 의의는 한마디로 󰡐자연의 발견󰡑이며 󰡐강호가도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인들에게 자연은 현실도피처로서 은둔의 공간이 되거나 비현실적인 이상의 공간으로 인식되어 있었다. 따라서 자연 자체를 관조하거나 감상하는 미적 개념이 결여된 단편적인 자연 인식에 머물러 있었다. 당시인들의 사고는 자연에서 벗어나 임금이 계신 궁궐을 향하고 있거나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 매개로 자연을 끌어들임으로써 체념적이고 소아적(小我的)인 세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농암은 이런 세태에 자연을 있는 그대로 인식해야 함을 실천적으로 보여준 인물이다.

질그릇 동이에 잡아온 물고기를 보면서 잡혀온 물고기의 입을 통해 벼슬아치의 모습을 풍자하는 한시 󰡐분어행󰡑(盆魚行)은 현실에 대한 농암의 인식을 대변해 주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전략>

吾觀世上人(내 세상사람들 보건대)/宦海沈名利(벼슬길 명리에 잠겨)/隨行而逐隊(따라다니며 떼를 지어)/添焉恩光被(은광 입기를 비는구나)/靑雲鳳池裏(청운은 봉황의 연못 속에 있어)/揚揚方得意(드높이 바야흐로 뜻을 얻었구나)/風波一夕起(풍파가 하루 저녁에 일어나니)/將身無處置(몸 둘 곳이 없도다)/姑息活軀命(구차하게 몸과 목숨 살리는 일)/人與物無異(사람 물건 다를 게 없구나)

<후략>

그에게 현실은 고기를 가둔 질그릇 동이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조금만 충격이 가해져도 목숨을 위협하는 곳이 질그릇 동이이며, 자유로운 듯 헤엄치지만 결코 자유롭지 못한 곳이기도 하다. 현실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상대적으로 농암의 의식을 자연으로 향하게 만듦으로써 당시인들과는 상반되게 현실을 부정하고 자연을 긍정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자연에서의 삶은 시름이 없기 때문에 자유자재로 돌아다닐 수 있고, 삶에 거칠 것이 없는 것이다. 세월이 가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자연인으로서의 삶은 유유자적한 삶이다. 즉, 농암은 자연에 흠뻑 취해 자연의 일부가 되는 삶을 동경했던 것이고, 그렇게 실천했던 것이다. 농암이 모든 것을 버리고 자연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현실에 대한 부정의식이 잠재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현실에서 그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다 얻을 수 있었기에 더 이상 미련을 가질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농암의 자연 회귀는 현실이 두려워 몸을 사리는 󰡐명철보신󰡑과는 거리가 멀다. 그는 자연 속에서 진정한 즐거움을 누렸던 것이다.

퇴계는 농암의 󰡐어부가󰡑 서문에서 󰡐先生은 매양 가경(佳境)을 만나면 수람(水欖)에 기대어 강호연정(江湖煙艇)을 희롱하는데 반드시 여러 명의 아이들로 하여금 합창하도록 하고, 그것을 옆에서 볼 때 표표하여 마치 신선과 같았다. 선생은 여기서 진락(眞樂)을 얻었다󰡑고 하였다. 퇴계가 볼 때 농암은 󰡐유선󰡑(儒仙)의 생활을 누렸던 것이다.

농암의 자연 회귀는 이후 조선문학의 한 특질을 이루면서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다. 농암의 여섯째 아들 숙양(淑樑)은 권호문(權好文)․김부필(金富弼)과 더불어 󰡐안동의 3처사󰡑로 이름을 날렸으며 퇴계와 금계는 농암의 뒤를 이어 영남 가단(歌壇)의 맥을 이으면서 당대 사림문학을 주도했다. 조윤제(趙潤濟)는 농암에서 시작된 이러한 문학적 현상을 󰡐강호가도󰡑라고 부르면서 내용을 󰡐자연미의 발견󰡑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1566년 농암의 무덤 앞에 세워진 신도비. 농암의 공적 등이 새겨져 있다

靜中動의 삶을 산 우리 역사의 단아한 표상

농암은 영남의 명문 사대부가 출신으로 정치적 격랑의 시기를 비교적 순탄하게 살다 간 조선 초기의 문신이다. 남들보다 뒤늦게 관직에 나아갔지만 정치권력의 비정함을 느끼면서 외직에 머무르며 성리학적 지배질서를 구축하기 위해 전력을 기울였던 인물이다. 그는 영남 사림파의 종사가 되기에 충분한 조건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중용지도를 발휘해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지혜를 발휘했다. 그의 이러한 처신 덕분에 퇴계에 의한 영남 사림학파의 태동이 가능했으며, 영남 지방은 일찌감치 조선 사회를 이끌어 갈 수 있는 정치적, 학문적 토대가 구축될 수 있었다.

농암은 향교 교육을 적극 권장하는 한편, 사림의 문화적 공간을 마련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여러 채의 정자를 건립하고 수신과 효행을 몸소 실천하여 주변의 사림들에게 모범이 되었으며, 󰡐어부가󰡑를 개작하여 사림문화의 한 특질을 마련하였다. 그가 보급한 󰡐어부가󰡑는 윤선도에게 전수되어 조선문학의 백미를 장식하는 󰡐어부사시사󰡑로 거듭났거니와 농암이 기틀을 마련한 󰡐강호가도󰡑는 향후 사대부가의 주류문화를 형성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하겠다. 그에게 와서 비로소 자연이 자연으로 인식되었으며, 그럼으로써 입신양명(立身揚名)을 위한 문학이 아닌 예술적 가치로서의 문학이 성립되었던 것이다.

그는 󰡐농암집󰡑을 비롯해 6권의 문집과 2책, 속집 3권 등을 남겼다. 그의 글들은 대개 성리학적 이념을 설파한 것들로 후대 영남학파로 수렴되어 조선 사회의 이념적 길잡이 역할을 하였다.

또한 효빈가(效嚬歌)․농암가(聾巖歌)․생일가(生日歌) 등의 한글 시가를 창작하여 자칫 우리말의 명맥이 끊어질지도 모를 위기에 처했던 연산군 시대에 한글에 대한 관심을 유도했다는 의의도 찾아볼 수 있다.

농암은 우리 역사에서 커다란 업적을 쌓거나 세인의 비상한 관심을 끈 인물은 아니다. 그는 오히려 잔잔한 물결처럼 정중동(靜中動)의 삶을 살았다. 그러나 그의 나지막한 삶은 만년에 이르러 당대 지식층에게 작지 않은 충격과 자극을 주었으며 많은 이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지나치게 자극적인 것을 선호하고 자신을 내세우기 위해 타인을 짓밟는 것조차 서슴지 않는 현실을 생각해 볼 때, 그 역시 우리 역사의 단아한 표상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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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암의 문학에 나타난 자연관, 정영문, 숭실대 석사논문, 1996.

․강호가도의 개념정립과 영남강호가도 연구, 김종렬, 고려대 박사논문, 1989.

․농암 이현보의 문학과 사상, 1992. 안동대학교 안동영남 사림파의 연구, 문화연구소, 이수건, 영남대학교 출판부, 19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