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암의 강호풍류(4) 

9. 月蘭躑躅之會에 이제 나는 제외시켜라

-월란사, 강호생활, 월란척촉회

 

 

 

 

 

■ 월란사月瀾寺- 경상북도 안동군 도산면 원천리 소재

 

월란사는 월란정사月瀾精舍로 되어 있으나, 옛 이름은 월란사月瀾寺였고, 그 옛 이름은 월안사月安寺였다. ‘달빛 고요(月安)’, ‘달빛 물결(月瀾)’ 감도는 낭만적 이름의 암자였다. 표암 강세황의 ‘도산서원도’의 우측 끝에 이 암자가 보인다. 폐허가 된 16세기, 농암, 퇴계에 의해 새삼 알려졌다. 함깨 월란척촉회를 개최했고, 퇴계는 이후 강학을 하기도 했다. 그후 버려진 정자를 의성의 안동김씨들이 중수하여 퇴계의 후손들과 함께 관리해왔다. 안동김씨들은 선조 만취당 김사원(晩翠堂 金士元)께서 퇴계에게 등문수학한 사실을 기념하고자 했다. 1993년 월란사의 이러한 전통을 잇고자 권오봉權五鳳, 이근필李根必, 김창회金昌會, 류창훈柳昌勳  등이 논의하여 결성한 ‘속월란척촉회’가 매년 철쭉 만발한 5월초에 열린다.

 

 

 

1. 강호생활-주렴이 날리고 봄빛이 흩어지는 듯

  

퇴계 이황은 농암의 강호생활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강호에 돌아온 후 더욱 산 계곡을 거닐며, 흥이 나면 문득 돌아오기를 잊었다. 나갈 때는 꼭 등산소구를 갖추는데, 때로는 대나무 지팡이에 짚신을 신고 숲을 들어가며, 가마에 두 종과 더불어 들과 개울을 배회하니, 농부나 목동들이 그가 재상임을 알지 못했다. 친구들과 일수일석一水一石의 청음처淸陰處를 만나면 언제나 덤불을 깔고 앉아서 득의 흔연하여 술이 불과 두 서너 잔에 담소가 무르익어 종일 지칠 줄 몰랐다. 신풍이 쇄려(風神瀟灑)하고 안운이 삼일(岸韻森逸)하여 한 점 부귀 티끌의 기상이 없었다. 간혹 글을 지음에 뜻이 청신淸新하여 젊은이의 호기로운 작품과는 비교할 수도 없었다. 영지사, 병암사, 월란사, 임강사 등의 절을 좋아하였고, 최후에는 임강사에 머물렀다. 그리고 때로, 조각배에 짧은 노로 분강을 오르내리며, 아이들로 하여금 어부사를 노래하게 했다. 그 흥겨움의 표연함은 마치 유세독립遺世獨立의 기상을 나타내어, 시대의 사람들이 우러러보지 않은 이가 없고, 지나는 이는 그 문에 나아가 뵙는 것을 영광으로 여겼다.“

『도산전서』 농암선생행장聾巖先生行狀

 

 

2. 월란척촉회

 

퇴계는 농암이 소요하는 곳은 ‘진경眞境’이며, 풍류는 ‘진락眞樂’이며, 노래는 '진성眞聲'이라하고, 농암은 이를 실천한 ‘진은眞隱’이라 했다. 진경, 진락, 진성, 진은은 강호생활의 궁극적 개념으로 강호문학과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다. 저 아늑한 신선의 어떤 경지에 다다른 것은 아닐까?

강호문학은 이런 경지에 이른 인물에서 그 성취가 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농암, 퇴계 같은 분은 이를 성취한 인물이 아닐까? 농암 89세의 임종 직전, 퇴계에게 보낸 편지와 시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보인다.

 

 

“월란척촉지회는 나를 위해 연기한 듯하나 이제 나는 늙고 병든 몸이라 제외시킴이 어떻겠는가. 또한 일찍이 강산江山 전체를 그대에게 붙여준 편지가 있었는데, 다만 이번만은 언약도 있고 하니 부득불 병든 몸을 이끌고라도 그대의 뜻에 부응하고자 하니 요량하기 바라네.-1555년 4월 10일, 농암 늙은이 손이 떨려 대강대강 쓰노라."(月瀾躑躅之會 爲我延退之示 吾則老除 曾有江山全付于君之簡 但此則舊約 扶病欲副 竝須量照 -嘉靖乙卯 四月十日 聾老 手顫草草-)      

                                              

適我投簪公亦閑    내 은퇴했을 때 그대 또한 한가하여

從遊幾歲暑竝寒    더위와 추위를 잊고 쫓아 논 것이 몇 해인가

舟橫簟石波添酌    점석에서 배 띄우고 술잔 나누었으니

席掛茅亭雨滿盤    띠집 자리에는 비가 소반에 가득하네

 

花下樽開僧亦醉    꽃 아래 유상에는 중도 취했고

雪中眉聳容同歡    눈 속에 흥겨운 어깨 그대 또한 기뻐했네

如今登賞尤多所    지금에도 유상할 장소는 많아

西有臨江東月瀾    서쪽으로 임강사와 동쪽으로 월란사가 있다네

 

(閒餘憶得前日雪中枉駕謝詩絶句安字韻演成長律錄奉溪堂-한가한 나머지 전날 퇴계가 눈 속에 내방을 사례하여 시 가운데 안安자 운의 시를 장편으로 개작하여 계당으로 보낸다. 月安寺名後改月瀾-월안사는 뒤에 월란사로 고쳤다.)

 『농암집』, 연보年譜

 

 

월란月瀾은 월란사고, 척촉躑躅은 철쭉이다. 따라서 월란척촉회는 월란사철쭉꽃회이다. 월란사에서 당시 농암, 퇴계를 중심으로 한 오늘날의 문학동호인회와 같은 성격의 모임이 해마다 이루어졌다. 이 모임을 문학동호인회로 해석함은 문학을 거론치 않은 농암, 퇴계의 만남은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강이면 강, 계곡이면 계곡, 절이면 절 어디에서도 문학적 행위가 동반되었고, 두 분 회동에는 농암의 자제들과 퇴계의 제자들이 따라왔고, 그들은 그대로 회원으로 구성되었다. 강호문학은 이들 그룹이 이루어낸 성과를 함축시킨 말이기도 하다.

 

400년 전 안동에 이런 문학동호인회가 존재했음은 놀라운 일이다. 당시 어디에도 이런 모임이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89세 농암이 병든 노구를 이끌고 참여할 만큼 활발했다. 이런 분위기가 국문학사에 ‘어부가’, ‘도산6곡’같은 국문학의 2대 걸작을 창작하는 동기가 되었고,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작품(시, 수필, 서간 등)을 잉태시켰다. 농암, 퇴계에 의해 형성된 영남의 강호가도는 실체가 이미 잘 알려진 송순, 정철, 윤선도로 대표되는 호남가단의 빛나는 기록과 쌍벽으로 남아있다.

 

안동의 강호가도는 국문학자에 의해 교과서적인 소개가 있었다. 그러나 안동은 이러한 문향으로의 전통과 향기보다는 예와 범절의 다소 경화된 이미지를 주는 고장으로 각인 되어 있다. 퇴계 역시 ‘성리학자=퇴계’라는 등식이 고착화되어 따뜻한 퇴계 보다는 어딘가 근엄한 퇴계로 인식되어 버렸다. 또한 ‘퇴계학’이란 용어마저도 퇴계를 이해하는 장애로 작용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역설적인 생각도 든다. 왜냐하면 ‘주자학=성리학=퇴계학’이 동시에 연상작용을 일으킨다고 보기 때문이다.

 

안동은 예향禮鄕이며 문향文鄕이다. 퇴계를 답습한 제자들이 삼엄한 성리학의 중압에 휘말려 한 때 문학이 엄숙주의로 흐른 적이 없는 것이 아니지만, 문학본연에 대한 자세와 창작의 정열은 타고장을 앞도 한다. ‘글이 끊어지지 않아야 한다’,‘글이 끊어지면 그 집은 끝난 집이다’ 하는 소리는 안동에서 흔히 듣는 소리이고, 그 동안 안동에서 간행된 수많은 문집이 이를 증명한다. 기 조사에 의하면 영남 전체 문집 가운데 안동인의 문집이 절반에 이른다고 보고되어 있다. 또 문화재관리국 조사에 의하면 전국문집 9권 가운데 2권이 안동의 문집이라 한다. 한 권도 없는 도가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놀라운 분량이 아닐 수 없다. 그 가치를 넘어서서 안동은 정녕 문향으로 손색이 없고, 이 같은 정서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고 보여진다.

 

안동문화는 안동인의 예와 문이 내재한다. 예의 행行과 문의 지知) 안동사람들의 내면에 부지불식간에 자리잡고 있는 지행일치의 규범이다. 안동사람들의 언어로는 조행操行(행동 됨됨이)과 글이다. ‘양반안동’이란 말은 우연히 얻어진 것이 아니다. 400년 전의 문학동호회-월란척촉회-는 안동문화를 형성시킨 요소이자 모태였다. 그런데 위 인용문에는 정말 간과할 수 없는 부문이 있다. 그것은 농암이 퇴계에게 ‘일찍이 강산전체를 주었다’는 대문이다. 도대체 강산을 어떻게 주었다는 말인가? 공교롭게도 퇴계 역시 이에 호응하는 글을 남겨 더욱 흥미롭다. 다음 글은 퇴계가 제자 정존재 이담(靜存齋 李湛)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이다.

 

 

“자네의 말은 완연히 이 예안禮安 일대의 아름다운 경치를 즐기고 있는 나의 모습을 충고하고 있는 것이지만, 이것이야말로 진실로 농암선생께서 황滉에게 ‘강호의 즐거움(林泉之樂)’을 붙여준 까닭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비록 그대가 정성으로 황의 이러한 취향을 삼가라는 뜻이 있음을 알겠으나, 자네의 그 말을 음미할수록 나에겐 호연한 즐거움의 정취가 더해질 뿐이다.” 『퇴계집』 답이중구答李仲久

 

 

‘강산과 강호지낙江湖之樂을 주고 받았다.’ 이런 말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이는 실제 강산의 소유권에 대한 증여가 아님은 분명한 것으로, 이 예안. 도산 일대의 경치와 강호의 처소 및 일체의 문학적 주도권을 이제 퇴계에게 물려준다는 뜻으로 보인다. 퇴계는 임천지낙林泉之樂이라 했지만, 포괄 용어로는 강호지낙江湖之樂이다. 퇴계는 그 낙樂을 농암이 전수해주었다고 했다. 지난날 농암께서 ‘정승벼슬도 이 강산과 바꿀 수 없다(三公不換此江山)’하던 사랑하던 강산을 이제 죽음이 임박하여 그 진락眞樂을 터득한 퇴계에게 기꺼이 전수하고, 문학적 일체의 주체를 자신에서 퇴계에게로 선양한다는 의미이다.

퇴계가 농암의 죽음과 더불어 영지산의 한 지점을 매입하여 도산서당을 구축할 수 있었음과, 도산서당 구축의 결산서인 '도산잡영'의 글 끝에 '산주서'라고 한 의미도 이런 두 분의 교감에서 이해된다 하겠다. 

 

나는 '사림파문학’에서 이 표현과 과정이 갖는 의미를 강호문학의 높은 경지의 실체로 보고 있다. 영남의 강호문학은 농암이 문학적 측면에서 새로운 지평을 열고, 퇴계가 이를 철학적 측면에서 깊이를 갖추어 완벽한 하나의 인생의 길-道를 구축해 놓았다. ‘어부가’와 ‘도산6곡’은 그런 세계관의 단면을 보여준다. 퇴계가 조력한 ‘어부가’는 농암이 서문을 쓰고 퇴계가 발문을 써서 그 창작경위를 소상하게 알도록 했고, 공교롭게도 퇴계는 ‘도산6곡’과 함께 자필의 목판을 남기고 있다.

 

어부가 발문에 퇴계는 “아! 농암선생이야 말로 강호의 진락을 얻었다”하며 극찬했다. 퇴계는 농암의 정계은퇴와 귀거래를 높이 평가했다. 그리고 지극히 존경했다. 퇴계는 농암 사후 ‘농암의 행지는 햇빛과 다투었다(古人行止日爭輝)’고 회고했다. 퇴계의 극찬은 예우차원의 수식이 아니라, 자신이 추구한 인생이기도 했다. 국문학사에서 농암을 ‘강호가도의 창도자’라는 도남 조윤재 박사의 언급은 우연이 아니다. 퇴계의 문학은 여기서 다시 이기철학이 스며들어 철학적 사유가 곧 시적 변용이 되는 피안의 경敬의 세계에 도달하고 있다.

 

강호지낙의 낭만적 미의식과 이기철학의 학문적 사색이 깊이를 더해갔으니 월란척촉회의 문학적 성취는 예사롭지 않다. 우리고유의 진정한 문화의 도,-풍류風流가 거기에 있었다. 농암, 퇴계에 의해 성취된 강호문학의 높은 경지는 세계 어디의 문학적 성과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주렴이 날리고 봄빛이 흩어지는 듯"

 

 

 

 

 

■분강의 암각서- 물에 잠긴 쌍암雙巖과 그 암각서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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