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암의 강호풍류(2)
7. 술잔에 술을 부어 조그만 나무 얼개에 올려 띄워 보내니 퇴계가 아래에서 웃으면서 받아 마시기를 왕복 서너 차례,
-분강의 유상곡수, 신선들의 높은 모임 전설이 되려니, 강각과 어부가, 퇴계의 농암과 금계행장 저술
■분강(사진자료-도산서원도, 보물 522호)
1751년 표암 강세황(豹庵 姜世晃)이 그린 도산서원도는 도산서원을 중심으로 한 도산 전체 모습을 담고 있다. 도산서원 앞을 흐르는 낙동강이 분강촌으로 구비 흘러와 큰 강을 이루는데 그 강이 바로 ‘분강汾江’이다. 농암이 그렇게 명명했다. 그림 좌측 일대가 분강촌으로 농암종택, 분강서원, 애일당 등의 유적이 보이며, 가운데는 도산서원, 우측 끝으로 월란사가 보인다. 이 강산이 바로 영남 강호가도를 잉태한 현장인 셈이다.
1. 분강의 유상곡수流觴曲水-강과 달과 배와 술과 그리고 시가 있는 풍경
분강에 분강풍류가 있었다. 그리고 유상곡수도 있었다. 1547년 7월, 농암 이현보, 퇴계 이황, 금계 황준량 등이 함께한 분강 뱃놀이 풍류는 그대로 한 폭의 그림이었다. 그 그림은 유상곡수였고, 그 요소는 강과 달과 배와 술과 시가 있는 풍경이었다. 명작 '농암 어부가'가 이 모임에서 잉태되고 있었다. 농암의 글과 시는 이러하다.
“‘분강 자리바위(簟石)’의 유상遊賞을 퇴계와 금계와 아들, 동생들이 함께 했다. 조그만 배를 타고 ‘귀먹바위(聾巖)’ 아래로부터 배 줄을 풀어 천천히 흘러가서, ‘사자바위’를 지나 ‘코키리바위’에 이르러 배를 바위에 의지해 묶어 놓고, 주변을 두루 구경하고 나서 다함께 올라가서 만져보고 놀기를 오래하였다.
...어느덧 날이 저물었다. 구름이 달빛을 가리어 물빛이 흐릿하여 촛불을 켜 밝히니 바위는 분강 한가운데 드리워 있고, 강물은 여기에서 좌우로 나누어져서 흘렀다. 한 줄기는 내가 앉은자리 곁으로 흐르고 그 아래는 퇴계가 앉아 있었다. 내가 취하여 희극을 하는데, 술잔에 술을 부어 조그만 나무 얼개에 올려 띄위 보내니 퇴계가 아래에서 웃으면서 받아 마시기를 왕복 서너 차래, 금계의 무리들이 이 정경을 보고 부러워했다.”
蘸水奇巖有舊名 물속 기이한 바위 옛 이름 있었는데,
遊人探勝自篷瀛 유인遊人이 사랑해 스스로 신선이 되었다네.
雨餘江漲波光碧 비 온 뒤 물빛 푸른데,
夜久烟沈燭影明 밤 물안개에 촛불 그림자 선연하다.
坐石四隅隨地勢 바위모양 따라 네 구석에 앉아,
流觴兩處剩歡情 술잔을 양쪽으로 띄우니 기쁨이 넘친다.
醉來還泛中流棹 취하여 배를 타고 강 가운데로 흘러가니,
飛沫西風洒面淸 휘날리는 서풍에 낯이 씻기어 상쾌하다.
(雨餘泛舟遊簟石次退溪 비온 뒤 배를 띄우고 자리바위에서 유상하며 퇴계의 시를 따라 짓는다.)
『농암집』
퇴계의 글과 시는 이러하다(원운)
聾巖相公邀城主及滉遊賞泉石, 其日雨城主來而滉不往, 後數日再招, 滉與仲擧諸人泛舟 爲簟石之遊, 仍留宿江閣, 相公令詩以寄其事 농암 상공께서 성주(예안현감)와 황을 맞이하여 천석에서 유상하고자 했다. 그날 비가 와서 성주는 왔으나 황은 가지 못했다. 며칠 뒤 다시 부르셨다. 황과 금계 및 여러 분이 배를 띄워 ‘자리바위’의 놀음을 만들었다. 이리하여 이날 강각에 유숙했는데, 상공께서 시로써 그 사실을 기록하셨다.
投老歸田豈爲名 벼슬을 던짐이 어찌 명성을 위함인가
陪遊泉石似登瀛 모시고 천석泉石에서 노니 신선이 된 듯.
賜書屢賁楊三逕 여러 번 책을 하사 받은 양억楊憶과
欶水寧論賀四明 삭수欶水의 하사명賀四明을 어찌 비유하리!
雨送雙鳧雖絶勝 비속에 신선을 보내니 경치 더욱 빛나고,
風吹一葉更多情 바람이 불어오니 더욱 다정하다.
林間小閣通宵夢 숲 속 소각에 밤새도록 꿈인데,
陡覺神魂分外淸 문득 깨어나니 정신이 분수밖에 깨끗해진다.
『퇴계집』
금계의 글과 시는 이러하다(차운)
簟巖次退溪任相韻 巖有流觴曲水 자리바위에서 퇴계와 예안현감 임내신의 시를 따라 지었는데, 바위에서 유상곡수가 있었다.
題品亭臺盡命名 정자, 누대 품평하고 이름 붙였으니,
一區形勝幻壺瀛 한 구역 명승지, 바로 신선세계일세.
蘭舟劈浪魚驚躍 목란배 물결 가르니 물고기 놀라 뛰고,
雪客翹沙眼轉明 백로 모래에 내려앉자 눈 더욱 밝아오네.
觴泛會稽飛醉興 술잔 띄우니 곡수曲水인양 감흥 일어나고,
雨催工部動詩情 비 재촉하니 두보杜甫처럼 시심 움직이네.
眞仙高會應傳說 신선들의 높은 모임 전설이 되리니!
留取金聲滿耳淸 머물러 듣는 금옥소리 귓전 가득 맑아오네.
『금계집』
▲농암(왼쪽)과 퇴계(오른쪽)가 유상곡수(流觴曲水ㆍ물에 띄운 잔이 자기 앞에 오기 전에 시를 짓는 것)를 하며 노나는 모습을 그린 가상도. 국립중앙박물관이 2007년 11월부터 지난 1월까지 연 '농암 특별전' 도록에 수록된 작품이다. / 푸른역사 제공
2. 신선들의 높은 모임 전설이 되리니
분강은 농암 고향이다. 그리고 신선세계이다. 산천은 아름다워, 모재 김안국은 “산수가 맑고 아름다워 황홀하기가 마치 도원에 들어가 신선을 만난 듯하다(山水淸麗 恍然 若入桃源而値仙老)”고 했다. 신재 주세붕은 "뜰의 모래는 눈과 같이 깨끗하여 마치 신선의 집에 들어온 것 같았다"고 했다. 농암도 어부가에서 “정승 벼슬도 이 강산과 바꿀 수 없다 (三公不換此江山)”고 했다. 농암의 얼굴 모습(영정, 보물 872호)을 보면 바로 신선이다. 사관의 평가도 그러하다.
"이현보의 고향 생활은 담박淡泊했다. 한가할 때 이웃 사람을 찾아 갈 경우 걸어가서 만났고, 스스로 농부로 자임自任했다. 집 앞에 큰 강이 있어서 배를 띄울 만 했다. 그래서 때로 손님이 오면 함께 노를 저었다. 두건을 비스듬히 쓰고 소요하는 그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신선과 같다고 했다."
『중종실록』
이처럼 농암은 모두가 신선이라 했다. 80세 숭정대부 품계를 지닌 재야재상에게 다른 표현은 잘 떠오르지 않는다. 이런 배경 때문인지, 시적 이미지는 신선세계의 신선모임이다.
퇴계가 농암에게 '빗속에 신선을 보낸다' 고 하고, 농암도 고무되어, '스스로 신선이 되었다'고 했다. 퇴계 자신도 '신선이 된 듯하다’고 했다. 이를 본 금계는 '두 분 모두 신선'이라 했다. 이 날 모임은 "신선들의 세계이며, 신선들의 높은 모임은 전설이 될 것"이라 했다.
이후, 자리바위 유상을 두고 농암과 퇴계는 다시 시를 주고받았다. 농암의 시는 이러하다.
脚疾難將御李舟 각질로 이응李膺의 배를 몰기 어려운데
危欄獨倚送中流 가파른 뱃전에 기대어 중류로 흘러가네.
日斜江面波紋靜 날은 저물어 수면 잔잔한데,
霜後林梢落葉稠 서리 후 나무는 앙상한 낙엽만이.
堂上蹁跣嫌獨樂 마루 위 춤추는 독락이 싫어,
蘺邊採擷揷誰頭 울타리 국화 따서 누구머리에 꽂아줄까.
繁絃急管兼花酒 노래 소리에 꽃술을 더했으니,
輪興全般作勝遊 흥을 실어 모두가 경치를 즐기네.
(簟石遊次李應敎韻錄呈行軒, 자리바위에서 퇴계의 시를 따라 짖고 그의 가는 길에 보 낸다.)
퇴계의 시는 이러하다.
罇酒相携許入舟 배에서 술 마시고 노는 것 허락 받아,
仍於高座笑臨流 높은 자리에서 웃으며 흘러가네.
玲瓏玉界窓瓏靜 영롱한 옥계의 창문은 고요하고,
縹紗仙娥鼓笛稠 아리따운 신선 계집아이 피리소리 조밀하다.
世路向時眞失脚 세상 길 나아감이 진실로 잘못되었는데,
菊花今日滿簪頭 국화는 오늘따라 갓 위에 가득하다.
何因得脫浮名繫 어찌 뜬 명예에 얽매여 벗어나지 못하면서,
日日來從物外遊 날마다 모시고 쫓아다니는 물외物外의 유상.
(昨拜聾巖先生退而感作詩二首 어제 농암선생을 뵙고 물러나면서 느끼는 바가 있어 2수를 짖는다.)
『퇴계집』
'영롱한 옥계'와 '신선 계집아이', '물외의 유상'등의 시어는 속세의 언어가 아니다. 농암과 회동한 다른 시에 퇴계는 드디어 '나 또한 신선이다(我亦仙)라고 했다. 그 시는 이러하다.
茅齋不見已三年 띠 집에서 뵙지 못함이 벌써 3년
雨漏風吹半露椽 비바람에 헐어 서까래가 드러났다
忽枉藍輿臨澗藪 홀연히 가마가 숲 사이로 오고
兼蒙早蓋賁尊筵 성주께서도 자리를 빛내 주셨다내
他時慕德人如蟻 훗날 덕을 추모하여 사람들이 개미처럼 모이리라
此日陪歡我亦仙 이 날 모시고 즐기니 나 또한 신선 일세
假步山扃猶得此 산경에 나갔다가 이런 모임 얻었으며
況敎投緩拜狀前 하물며 시까지 주셨으니 삼가 인사드립니다.
(養眞庵李知事相公辱臨是日城主亦到: 양진암으로 이 지사 상공께서 오셨고, 이날 성주도 역시 왔다’
그렇지만 금계는 자신을 포함시키지는 않았다. 나이와 관록 등을 보아서도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모를 일이다. 퇴계가 “금계는 세속을 벗어난, 미목이 그림 같은 인물이라” 했으니, 이미 포함되어 있었을 수도 있다. 퇴계의 평가는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그 누구에게도 이런 평가가 없기 때문이다. 퇴계에게 금계는 제자를 넘어서는 존재였고, 그 외모에 대해서는 "아전의 처가 상사병으로 죽었고, 그 원한이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이다. 정말 '그림같은 외모'를 지녔던 모양이었다. 생애 단 5편 밖에 쓰지않은 타인의 일대기 저술, 즉 '금계황공행장'은 금계를 보는 퇴계의 시각이 그대로 담겨 있다. 퇴계 안목에 금계는 일대기를 쓸 만한 당대 인물 다섯 명 가운데 한 분이었다.
풍기의 ‘금계錦溪’ 계곡과 ‘금선대錦仙臺’ 명명도 예사롭지 않다. '그림 같은 얼굴’에 '비단 같은 개울', 그리고 '비단 신선이 노는 대'이다. 신선대는 있지만 금선대는 없다. 금계의 시, ‘유금선대遊錦仙臺’ 는 바로 신선유람神仙遊覽이다.
小白雲霞誰第一 소백산 경치 어디가 제일인가
仙臺風月自無雙 금선대 바람과 달, 짝할 데가 있으랴
爲披春服尋芳去 봄 옷 지어 걸치고 꽃 찾아 떠나
倦倚松陰倒玉釭 소나무 그늘에 기대어 술잔을 기울이네
단양에서 ‘구담신선(龜仙)’이라 불린 이지번李之蕃과 의기투합했고, 그 아들 이산해의 8살에 쓴 글을 보고 격찬하며(屛見李山海八歲所書), 이후 친구처럼 시문을 주고받았다. 이지번은 『토정비결』로 유명한 토정 이지함의 형으로 천문에 달통했고, 이산해는 호가 아계로 후일 영의정을 역임했으며, 도산서원 입구 바위에 '천연대天淵臺'라는 글씨를 쓰기도 했다.
금계는 풍류 문필의 달인, 신재 주세붕과도 친밀했다. 주세붕이 22세 많고, 이산해가 22세 연하이다. 퇴계가 16세, 농암이 50세 연상이니 그 교유폭이 70세를 넘나들고 있다. 퇴계도 농암은 34세 연상이고, 고봉 기대승이 27세, 율곡 이이는 35세 연하이니 역시 그러하다. 농암에서 보면 신재는 28세, 퇴계는 34세, 금계는 50세 연하이다. 학문과 대화가 통하면 나이를 넘어서는 교유가 선현들의 대인관이었다.
여기서 잠시, 금계가 신재를 그리워하며 쓴 시가 있어 소개한다. 제목이 “꿈에 주 경유를 만나 감회가 일어(夢周景遊有感)”이다. 이 시에 신재를 신선이라 했다.
死別呑聲動五年 사별하여 목이 멘 지 5년이 흘렀건만
夢中風彩尙依然 꿈속에도 풍채는 오히려 의연하여라
山陽已愴隣吹笛 산양에서 이웃 피리소리에 이미 슬퍼졌는데
遼海還驚鶴幻仙 요해에서 학으로 환생한 신선에 다시 놀랐네
墓左靑蒭違漬酒 묘소 왼쪽 푸른 풀이 적시는 술을 저버려
琴中白雪斷哀絃 거문고 속, ‘백설가’는 애절한 현을 끊었네
分明表我長相憶 분명 내게 길이 생각하자는 뜻 표하셨음에
不信詩魂隔九泉 시혼이 구천을 격해 있다는 것 믿지 못하겠네
이를 보면 금계는 자신과 교유하는 모두를 신선이라 했다. 신선급의 인물만을 사귄 셈이다. 이런 정황을 유추하고 시를 보면 금계는 자부하고 있다. 자신도 충분히 자격이 된다고. 시는 그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다. 시적 품격에 밀리지 않으니 양보할 생각도 없다.
47세 짧은 생애, 984편의 시를 썼고, 5001자의 천하명문 '단양진폐소' 를 썼다. 종횡무진, 천의무봉의 문필력을 보여준 금계였기에 이런 자부심을 표현했다. 농암, 퇴계가 발문을 쓴 또 한 편의 천하명문, '유청량산록'을 신재가 썼음은 우연이 아니었다. 이 세분의 모임에 앞서 있었던 농암과 신재의 잦은 분강풍류의 회동도 역시 우연이 아니었다.
신선을 모르는 자, 신선을 말할 수 없는 법이다. 금계 역시 신선이었다. 결국 세 분 모두 자신들은 신선의 경지에 올랐고, ‘분강점석의 유상(汾江簟石之遊)’은 전설의 ‘유상곡수의 모임(流觴曲水之會)’을 구현했다고 규정하고 있다.
전래의 망각되어 가던 어부가가 농암, 퇴계, 금계에 의해 창작되었으니, 분강 점석의 유상은 정영 신선들의 향연이었다. 이 날 농암은 81세, 퇴계 47세, 금계 31세였다.
사진: 진성이씨대종회 종보(『悅話』 제20호)에 소개된 ‘퇴계의 초상화’
해설: ‘혜산蕙山 유숙劉淑’의 작품이라 쓰여 있는데, 종보 글에 “퇴계의 모습에 가장 근접아고 있다”고 했다. ‘퇴계언행록’에 “선생은 이마가 모가 나고 풍성하게 넓어서 송재께서 이를 기이하게 여기고 사랑하여 평소에 부르시기를 ‘광상廣顙’이라 하고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는 기록으로 ‘넓은 이마’는 퇴계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3. 강각과 어부가
강각은 신선들의 집이다. 신선들이 신선주를 마신 집이다. 유상곡수가 끝난 밤, 강각에 유숙한 신선들이 다시 신선주를 마시며 노래했다. 그 노래가 '농암 어부가'였다. 그래서 전설이 되었다.
1549년 농암 83세, 분강 유상곡수 2년 후 어부가를 창작했다. 세 분의 합작이다. 금계가 이때 어부가 원본을 결정적으로 구해 왔고, 퇴계와는 계속해서 의견 교환을 했다.
농암 편지에 "고친 곳이 많아 결과를 맺지 못하였으니 취사, 말개, 탐보하여 보내줌이 어떠한가"하기도 하고, 퇴계 답변에는 "어부사에 대하여 지난 봄에 임 성주(임내신)와 의논한 것은 참으로 온당하지 않아 참람하였더니, 그 후 용수사에서 보내신 편지를 받아 보고 망령되게 고친 것을 후회하게 되었으므로 감히 품의하지 못하였습니다"하였다. 어부단가 5장, 어부장가 9장은 이렇게 탄생했다. 농암이 서문을 쓰고, 퇴계가 발문을 썼다.
서문에 "노래말(詞語)이 한적하고 의미가 심원하여 읊조리니 사람의 공명심을 넘어서게 하고, 표표하고 아늑하여 탈속의 경지가 있었다. 이를 얻은 후에는 전에 감상하던 모든 가사는 버리고 오로지 여기에만 뜻을 두었다."고 했다. 발문에는 “사람들이 바라보면 그 아름다움이 마치 신선과 같았다. 아! 선생은 이에 있어서 진락眞樂을 얻었으며, 그 진성眞聲을 좋아하신다고 할 수 있다”고 했다.
어부가는 강각에서 회동한 두 분의 이런 한무사閑無事한 일상 속에서 지어지고 있었는지 모른다.
江閣孤眠簾半開 강각의 외로운 잠에 주렴은 반쯤 열렸는데
跫音忽報退溪來 홀연히 퇴계가 온다고 한다.
臘前구刻猶嫌短 겨울 철 낮은 짧아
返駕怱怱旁石隅 돌아가는 가마가 총총히 돌길로 간다
‘강호’는 아름다운 자연이며, ‘진락’은 지극한 자연사랑이다. 그 사랑의 함축이 류상곡수의 풍류이다. ‘류상곡수’는 지난날 최고품격의 풍류모형이었고 자연사랑이었다. 그리하여 농암은 관료적 문학이 성행할 때 ‘강호지미江湖之美’와 ‘강호지락江湖之樂’의 새로운 문학지평을 열었다. 퇴계가 쓴 농암행장에 농암의 야인 생활을 이렇게 묘사했다.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나면 물과 돌이 제법 맑고 그늘진 곳에서 반드시 자리를 나누어 같이 앉자 흡족하여 기뻐하되 술은 불과 두서 너 잔만 마시면서 종일토록 싫증을 내지 않고 담소로 즐거워하였다. 인품이 맑아서 한 점 부귀진애富貴塵埃의 기미가 없고 간혹 글을 지어서 청신淸新하게 뜻을 세우니 젊은이가 기세 있는 작품도 미칠 바가 아니었다."
‘강각江閣’은 1544년, 분강 가에 지은 집으로, ‘영남가단’의 모태가 된 건물이라 할 수 있다. 신축 당시 '매운탕을 끓여 먹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 기록은 "여러분들과 술잔을 띄우고 매운탕을 끓였다. 모인 사람이 무릇 7명인데 이때 작은 누각을 새로 지었다.(同諸生 流觴羹魚 會者凡七人 時小樓新成)"이다
이들 뿐만 아니었다. 당시 이곳에는 퇴계를 비롯한 김안국金安國, 이언적李彦迪, 주세붕周世鵬, 이해李瀣, 황준량黃俊良, 조사수趙士秀, 임내신任鼐臣 등의 명현들이 래방했다. 조사수가 도백으로 내방하여 지은 시는 이러하다.
윤유월 보름, 퇴계, 조송강과 같이 배를 띄우고 달을 감상하고, 퇴계의 시를 차운한다.
閏六月望與退溪及趙松崗汎舟賞月次退溪
一缸官酒一苞魚 한 단지 술과 한 꾸러미 고기로
來訪山中宰相居 산중재상 사시는 곳 내방했네.
松柏本非蒲柳比 송백은 버들과 비교할 바 아니며
鷹鸇那得鳳凰如 새매가 어찌 봉황과 같으랴
雪鬢儀容商綺季 백발 풍채는 상산의 기리계이며
風流詩酒白尙書 풍류 시주는 당나라 백거이라네
叨陪杖屨吟還醉 외람되이 어른을 모시고 읊고 취하니
麥綠梅靑四月初 보리와 매실이 푸른 4월이라네
퇴계의 시는 이러하다.
別後惟憑雙鯉魚 이별 후 오직 편지만 주고 받다가
而今重拜地仙居 오늘 신선께서 사시는 곳에 다시와시 뵈었네
綺筵開處花相似 비단자리 펼친 곳은 꽃과 같고
瓊句留時錦不如 시가 머무는 곳 비단과 같네
三達久爲人所仰 삼달존께서는 사람들이 추앙한지 오래이고
一淸何止史堪書 일청과 같으신 분, 어찌 역사에만 쓰이랴
却慙下客疏慵甚 부끄럽구나, 하찮은 나그네 게으름 심함이여
病覺腰圍日減初 병들어 허리둘레만 날로 줄어드네
이런 분위기가 ‘농암 어부가'를 낳게 했다. '어부단가 5장' 가운데 2장은 이러하다.
구버는 千尋綠水 도라보니 萬疊靑山 굽어보면 천길 파란 물, 돌아보면 겹겹 푸른 산
十丈紅塵이 언매나 가롓는고 열 길 티끌 세상에 얼마나 가렸던가
江湖애 月白하거든 더옥 無心하얘라 강호에 달 밝아 오니 더욱 무심하여라
'어부장가 9장' 가운데 4장은 이러하다.
萬事無心一釣竿 三公不換此江山라 만사 무심히 낚싯대에 뜻을 두니, 정승도 이 강산과 바꿀 수 없네
돗 디여라 돗 디여라 山雨溪風捲釣絲라 돛 내려라 돛 내려! 산야레 비바람 치니 낚싯줄 거두리라
至匊怱 至匊怱 於思臥 一生蹤迹在滄浪라 찌그덩 찌그덩 엇-샤! 평생 자취가 푸른 물결에 있도다
‘어부가’는 이후 퇴계의 ‘도산12곡’에 영향을 주었고, 이한진李漢鎭의 ‘속어부사’, 이형상 李衡祥의 ‘창보사’ 등에 이어지고, 드디어 윤선도尹善道의 ‘어부사시사’로 이어졌다.
윤선도는 ‘어부사시사’의 서문에서 “어부사를 읊으면 갑자기 강에 바람이 일고 바다에는 비가 와서 사람으로 하여금 표표하여 유세독립의 정서가 일어나게 했다. 이런 까닭으로 농암 선생께서 좋아하셨으며 퇴계 선생께서도 탄상해 마지 않으셨다”고 했다.
안동지역에서는 17세기 김응조金應祖, 18세기 권두경權斗經, 19세기 이휘영李彙寧 등의 문집 기록에 “분강에서 농암의 ‘어부가’를 다 함께 불렀다”고 하여, 학술적 계승이 아닌 현장연출로서 수백 년의 집단적 전승이 있었음을 밝혀놓았다. 그래서 국문학사에 송순宋純-정철鄭澈로 이어지는 ‘호남가단湖南歌壇’과 더불어 쌍벽을 이루었다고 했다.
농암은 명예를 버려 명예를 얻었다. 농암은 조선500년 유일한 정계은퇴식을 가지고 은퇴한 인물이며, 조선전기 유일한 재야제상이 되었다. 80세의 재야제상의 ‘강호지락江湖之樂’은 곧 인생의 행복이었고 그런 생애가 문학을 낳았다. 문학은 ‘강호지미’로 나타났고, 거기 ‘인간지락人間之樂’이 있었다.
퇴계는 농암이 거니는 경관은 ‘진경眞境’이며, 농암의 강호유상은 ‘진락眞樂’이며, 농암의 노래는 진성眞聲이며,농암은 진정 강호를 이해한 ‘진은眞隱’이라 했다. 국문학사에서 농암을 ‘강호가도의 창도자’라는 도남 조윤재 박사의 언급은 우연이 아니며, 퇴계의 문학은 여기서 다시 이기철학이 스며들어 철학적 사유가 곧 시적 변용이 되는 피안의 ‘경敬’의 세계에 도달하고 있다. ‘강호지락’의 낭만적 미의식과 이기理氣철학의 학문적 사색이 깊이를 더해갔으니, 거기 우리고유의 진정한 문화의 도, ‘풍류’가 있었다. 신선이 그 언저리에 있었는지 모르겠다.
당대 이조판서와 청백리에 녹선 된 송와松窩 이기李墍(1522-1604)는 이런 평가를 남겼다.
“농암이 말하기를 ‘먼 후일을 생각하지 않고 서울에서 자녀 혼사를 하기 때문에 시골로 은퇴하려 해도 인정에 억매여 떠날 수 없게 된다’고 했다. 공은 서울에 있으면서 혼사를 모두 고향에서 했다. 나이 70이 되어 은퇴하고 고향에 조그마한 집을 지으니 ‘애일당愛日堂’이다. 자손이 많고 나이와 덕이 한 결 같이 높으니, 사람들이 곽분양郭汾陽, 배사도裵司徒라 했다. 人間之樂과 林泉之樂을 오래도록 누렸으며 89세에 세상을 떠났다.”
『송와잡설』
지금 강각 마루에는 ‘농암가’와 농암, 회재, 퇴계의 시가 게판 되어 있다. 1544년 회재(이언적)가 도백으로 예방하여 지은 시는 강호자연의 시적 흥취가 고양되어 있다. 원운의 어려운 린鱗, 빈頻 운자에도 불구하고 모두들 빼어난 차운 시를 쓰고 있다.
농암가는 이러하다.
聾巖애 올라보니 老眼이 猶明이로다 농암에 올라보니 노안이 더욱 밝아지는구나
人事이 變 한들 山川이야딴 가실가 인간사 변한들 산천이야 변할까
巖前에 某山 某丘이 어제 본듯 하예라 바위 앞 저 산, 저 언덕 어제 본 듯 하여라
농암 시는 이러하다.(차운)
聾巖地僻誰能到 농암 벽지에 누가 찾아왔나,
玉節驚臨訪老人 감사가 놀랍게도 노인을 찾아왔네.
話古論今修宿約 약속을 지켜 고금을 담론하니,
山肴野蔌示淸眞 청정한 가운데 나물 안주가 고작.
風和岸柳將開眼 온화한 바람에 버들은 눈트고,
氷泮潛魚欲動鱗 얼음 속 물고기 비늘이 움직이네.
日暮江頭增別恨 날이 저물어 이별이 서운한데,
諮詢知不此行頻 순행은 짐작컨대 자주 있지 않으리.
회재의 시는 이러하다(원운)
疊石構亭烟水曲 바위 쌓아 정자 지은 분강 구비에,
天成佳勝付幽人 천작의 아름다운 경치 유인을 붙였네.
聾巖境界超塵土 농암의 경계는 진실로 세속을 넘었으니,
愛日情懷見性眞 애일의 정회에서 진성을 본다.
景景郊頭靑羃羃 햇살 빛나는 교외 언덕은 푸름이 깔리고,
風生江面碧鱗鱗 바람 이는 수면에는 푸른 물결 넘실넘실.
陪歡半日聞淸詠 한나절 모시니 맑은 소리 즐거워,
款款心盃不厭頻 각별한 술잔 자주 와도 싫지 않네.
퇴계의 시는 이러하다.(차운)
奇巖已得專佳境 기이한 바위, 가경을 얻었으며,
至道應歡喩俗人 지극한 도는 이미 속인을 넘었다네.
歷屋靜深堪讀易 정자는 고요하여 주역을 읽을 만하고,
崖臺寥朗可延眞 대는 명랑하여 진성眞性을 이을 수 있네.
窓前綠水寒開鏡 창 앞 푸른 물, 거울 같이 맑고,
石上蒼松老蹙鱗 바위 위 노송, 굴피가 더덕더덕.
幸我淨庄容地近 다행히 나는 가까이 살아,
陪遊三徑往來頻 모시고 산야를 왕래함이 잦다네.
이 시는 채소권, 심통원, 황준량, 임호신 등 당대 명현들과 후대 추모 시가 있다.
졸옹 채소권(차운)
軒冕三朝享八旬 3조정에 벼슬하고 8순을 누리면서
急流勇退世無人 급류의 용퇴는 세상에 다시 없네
山林高趣陶弘景 산림의 고취는 도홍경같고
巖壑幽棲鄭子眞 암학의 정서는 정자진같네
君似冥鴻搏逸翮 그대는 큰 기러기 같이 날개 펼치지만
我如凅鮒曝枯鱗 나 같은 사람은 마른 붕어처럼 비늘만 헐떡거린다네
亭高翠壁聾爲號 푸른 절벽 높은 정자 농암이라 호하였으나
却怕塵囂入耳頻 문득 시끄러운 소리 귀에 들릴까 두려우리라
채소권(蔡紹權생몰미상): 자 효중孝仲. 호 졸옹拙翁. 경기도관찰사, 대사헌, 형조판서 역임
욱재 심통원(차운)
爭言歸去何曾去 다투어 돌아간다 하나 누가 돌아갔는가
早退如公有幾人 공과 같은 분은 일찍이 없었네
物外烟霞占地勝 세상 밖 아름다운 경치를 사랑하여
閒中風月任天眞 한가한 바람, 달 속에 천진天眞을 맡겼네
傾筐北嶂挑銀蕨 뒷산에서 소쿠리에 고사리 캐고
擧網南灘掛玉鱗 앞강에서 그물로 고기 잡네
憂樂後先思更切 근심과 즐거움 가운데 다시 간절한 마음은
楓宸千里入夢頻 임금계신 천리 길 꿈속에나 잦으리라
심통원(沈通源1499-?) 자 사용士容,호 욱재勗齋, 우의정, 좌의정, 기로소입소
금계 황준량(차운)
駐景高堂九十春 고당의 90춘추
晩年還着退休人 만년에 은퇴하여 고향으로 돌아왔으니
潯陽歸去陶元亮 심양으로 돌아간 도연명이고
鑑水風流賀季眞 감수의 풍류객 하지장일세
日煖芝山挑玉甲 따뜻한 날 영지산에서 버섯 캐시고
煙開汾曲網銀鱗 안개 갠 분강에서 물고기 잡으시네
江湖不管憂時責 강호에서 시국을 관여할 수 없지만
猶向彤闈入夢頻 나라 향하는 마음이야 꿈속엔들 잊을날 있을까
황준량(黃俊良 1517-1563) 자 중거, 호 금계, 문과급제, 호조좌랑, 사헌부지평, 단양군수, 성주목사 역임
■농암, 회재의 人, 鱗, 眞, 頻 자의 운을 따라 지은 시
武伯 任虎臣
他擬桃源淸不俗 山如巫陜少行人 門無車馬安推分 室滿圖書樂任眞
春雨足時肥紫蕨 蓼花深處戱纖鱗 未聞世路崎嶇態 慣把金龜換酒頻
후대 추모시
敬謨堂 李祥흡
一曲汾川天作址 堂高愛日仰先人 樽前舞彩推誠孝 月下歌謳養性眞
巖疊鳳翻丹穴羽 石紋龍□碧波鱗 仙區物色皆依舊 千載遊觀不厭頻
古溪 李彙寧
愛日堂成續老會 一堂千九百年人 淸洛古今同地勝 元豊生長盡仙眞
潭空客影呈鬢髮 臺靜天機見羽鱗 醉筆爲題仁壽頌 年年此會此堂頻
雲山 李彙載
千九百齡十九老 吾鄕共作太平人 蓬仙再降恩暉永 洛社重遊會事眞
村靜* 麻依古木 舟行楡柳玩新鱗 放歌漁父仍歸酌 兩到江亭不厭頻
洛厓 李裕憲
巖亭蕭洒出塵表 吾祖遺風起後人 丹雘門楣傳世範 斑衣勺水自天眞
山含落照峰峰畵 江映飛霞片片鱗 懦立廉頑惟有地 孱孫慕仰此中頻
檀汕 金鍾九
高臺一曲畵屛裏 天放名區養德人 廊廟優榮非不赫 江湖晩餉亦云眞
縱目低瞻雲際翼 憑欄直頫鏡中鱗 登臨朗誦黃花句 方識陶翁景慕頻
4. 퇴계의 농암과 금계 행장 저술
<2017년 금계탄신 500주년 기념비 제막>이 풍기 금선정 부근에서 있었다. 내가 기념 강연을 했고, 도산서원 김병일金炳日 원장은 빗 글을 지었다. 빗 돌에는 '곡진한 학문적 동지'라는 표현이 유난히 눈이 들어온다. 그 한 대문은 이러하다.
“퇴계선생은 그의 銘旌에 先生이라고 쓸 정도로 예우했을 뿐 아니라, 먼저 세상을 떠난 제자의 죽음 앞에 망연자실하여 조금이나마 애통함을 덜고자 직접 行狀을 쓰고, 두 차례의 祭文을 지어 그의 일생이 예사롭지 않았음을 증언하고 亡友라 칭하며 위로했다. 그리고 그의 학문과 문학이 뛰어나고 소중하여 세상에 널리 알리고자 손수 詩文을 교열하고 문집의 편차를 정하여 간행을 서둘렀다. 또한 제자가 만년에 못다 이룬 錦陽精舍를 관리할 승려의 부역을 면제해주고, 精舍를 안전하게 수호케 하였다. 참으로 아름다운 사제 간의 사랑이요 곡진한 학문적 동지가 아닌가.”
퇴계는 일생 동안 7편의 행장行狀을 지었는데, 명종임금과 아버지를 제외하면 다섯 편에 불과하다. 농암 이현보(1467-1555)와 충재 권벌(冲齋 權橃, 1478-1548),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 1482-1519),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 1491-1553)과 금계 황준량(錦溪 黃俊良, 1517-1563)이다.
당대 인물 가운데 단 다섯 분이다. 더는 없었을까? 네 분은 수긍이 간다. 농암, 충재, 정암, 회재는 대감大監의 품계에 올랐고, 시호諡號가 내린 분들이다. 국가적 인물이라 할 수 있다. 행장을 못 쓸 분들이 아니다. 그런데 금계는 그렇지 않다. 대감에 오른 것도, 시호가 내린 것도 아니다. 재야 산림山林도 아니다. 고을원 정도를 지낸 그저 그런 관료이고 학자이다. 제자의 행장을 쓴 경우 또한 전후후무하다. 외관상 그렇다. 금계행장 저술은 예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한마디로 사건이었다.
나머지 행장도 흥미롭다. 농암, 정암, 회재는 ‘先生’이라 하고, 충재와 금계는 ‘公’이라 했다.'선생'은 퇴계가 사용함으로서 부각된 개념이고, 당시 극존칭은 '공'이었다. 그때까지 '선생'의 사용은 매우 드물었다. 위의 시에도 퇴계는 농암을 '선생'이라 했지만, 금계는 그냥 '퇴계'라 썼다. 금계는 제자였지만 그 많은 수창시에 거의 '퇴계'라고 썼다.
보통 사이이면 '자'를 쓰고, 존경하면 '호'를 쓰며, 극존칭으로 '공'을 썼다. '임금을 상감'이라 했듯이, '상공' 역시 극존칭이었다. 율곡 이이가 퇴계 제문에 ‘공’이라 표현함도 그런 사회상의 반영이었다.
이런 시대에 퇴계가 금계의 관상명정棺上銘旌에 ‘선생’이라 썼고, 이 표현은 인구에 오래 회자되었다. 그렇다면 퇴계에게 '선생'과 '공'의 구분은 무엇 때문일까? 금계 행장은 왜 지었고, 왜 그런 표현을 했을까? 당연한 질문에 당연한 답변이 역사상 한 번도 없었다. 그 누구의 언급도 없었다. 오랜 세월 왜 이런 일이 있었을까? 과거에도 수수깨끼이고, 지금도 수수깨끼이다.
퇴계가 금계 행장을 쓴 이유는 4가지 정도로 요약된다. 첫째는 빼어난 문학적 재능이다. 47세 생을 마감할 때 이미 1000여수의 시를 지었다. 엄청난 분량이다. 이런 학자 없다. 둘째는『주자서절요』간행이다. 퇴계가 서문까지 쓰고 주저하는 사이 금계는 발문을 써서 간행했다. 셋째는 서당, 서원창건 운동이다. 퇴계가 48세 백운동서원 사액 청원을 하고, 1570년 70세에 역동서원의 창건운동을 전개했음에 비해 금계는 10년 전 1560년 영봉서원을 창건했다. 넷째는 청백리이며 탁월한 목민관이다. 천하 명문 ‘단양진폐소’는 적폐가 쌓인 단양의 전임 고을원으로 후임 제자의 과감한 상소는 퇴계를 감동하게 했으리라 생각된다. 청백리에 금계가 녹선되지 않았음은 정말 유감스럽다. 나이 때문이리라.
여기에 개인적 친밀감과 문학적 교감, 무엇보다도 요절은 퇴계에게 크나큰 상실감을 주었다. 그런 요인들은 ‘도학’과 관련되어 ‘금계황공행장’이 지어졌으며, 그 글의 저술은 퇴계가 금계에게 해 줄 수 있는 문학적, 인간적 동지에의 최고의 선물이었다.
퇴계는 농암행장 저술에 금계와 의논했고, 많은 초고를 제공받았다. 어느 부분 합작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농암이 몰하자, 금계는 ‘농암선생묘지명聾巖先生墓誌銘’을 지었는데, 그 글이 행장과 아주 비슷하기 때문이다. 별본 행장이라 할 만큼 역작이다.
금계는 농암과 많은 시문을 주고받았으며, ‘농암 상소문’ 세 편을 대신해서 썼다. ‘단양진폐소’ 처럼 명문이다. 생일에 지어 올린 장편 “龍山高效歐陽永叔廬山高壽聾巖李相公生辰”의 시는 최고의 존경의 마음을 담고 있다. 이 시는 금계가 농암이 은거하던 용수산龍壽山(현 용두산)을 구양수가 절찬한 중국의 명산 여산廬山을 찬양하여 지은 명시, '여산고廬山高'를 따라 지어 농암의 생일 선물로 올렸다. 존경의 마음이 절절하다. 1551년 7월 29일, 생일 축수에 썼다. 금계 나이 34세였다.
농암 글을 모아 필사해서 묶었는데, 그 책이『애일당구경별록愛日堂具慶別錄』(보물1202호)이다. 뿐만 아니다. 금계는 농암의 손서로 장인 이문량, 처삼촌 이중량 등 여러 분과 많은 시문들을 주고받았다. 지금『금계집』을 살펴보면, 금계는 그 누구와도 시문을 주고받은 명랑하며 다정다감한 분이었다. 농암종택에서 당시 창균 김기보와 더불어 ‘두 서방’이라 했다는 전언은 사실일 것 같다. 창균은 처가살이를 했고, 금계도 상당 기간 처가에 있었기 때문이다.
16세 차이의 금계와 퇴계의 뜨거운 관계처럼, 34세 차이의 퇴계와 농암도 그러했고, 50세 차이의 금계와 농암도 다르지 않았다. 더불어 지기知己가 되었고, 지음知音이 되었다. 서로를 사랑하고, 존경하고, 추모하고, 추억했다. 그것도 영원에 이르도록 했다. 금계에게는 이 모든 일들이 농암과는 38세, 퇴계와는 48세 이전의 일이었다. ’망년지우忘年之友‘를 넘어서는, 저 피안의 만남을 현실로 이루었다. 그래서 금계의 예언처럼 전설이 되었다. 지금 누구도 이런 만남을 이룰 수 없다. 퇴계의 금계행장 저술은 사건이 아니었으며, 금계가 농암을 모신 분강서원汾江書院에 배향되었음도 우연이 아니었다.
더 읽어보기
금계 황준량의 시
높고 높은 용수산이여
(구양수의 '여산고‘ 를 따라 '용산고'를 지어 농암 이상공의 생일을 축수합니다)
龍山高
(效歐陽永叔廬山高壽聾巖李相公生辰)
금계 황준량
嵬乎高哉龍壽山 높고 높은 용수산이여
根盤二白 뿌리는 태백산, 소백산에 닿아있고
氣接海上之三山兮 기운은 바닷가 삼신산에 연접했다
怒虯攫拏 성난 용 발톱 움켜잡고 끌어당겨
渴飮乎汾江 목말라 분강의 물을 마시네
江連銀漢東注海 강은 은하수와 이어져 동쪽 바다로 흘러
滔滔浩浩源遠而流長兮 도도하고 넓고 넓은 근원, 멀고 먼 유장함이여
平鋪銅鏡磨 평평히 거울을 펼친 듯
怒捲玉斗撞 물결치면 옥 술잔을 치는 듯
韞璞藏珠不自擅 박옥, 주옥을 감추어 둔 듯
扶輿淸淑孕精而毓秀兮 청숙한 기운이 정기를 잉태하여 아름답게 빼어났음이여
鍾爲間世之英物碩士之奇厖 마침내 간세의 영물로, 석사의 두터움으로 태어났다.
高人雅量素契山水淸幽地 고인의 아량은 원래 산수 맑은 그윽한 땅과 벗하며
卜築耕釣臨空谾 집을 짓고 밭 갈고 낚시하며 빈 골자기를 찾아 간다
桃花泛春仙源杳 복사꽃 피는 봄 신선의 땅은 아득한데
枸根漱玉靈泉淙 구귀자 뿌리와 옥을 씻는 영천수의 샘물 소리
蒼松老栢伴吟乎崖澨 푸른 소나무, 늙은 잣나무는 푸른 단애와 짝하고
瑤草猗蘭弄影乎寒矼 아름다운 풀, 묘한 난초는 찬 징검다리에 비췬다.
東山不免起蒼生 동산에서 창생들을 위해 조정으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어
暫辭煙霞魚鳥之舊盟兮 연하에서 고기, 새와 맹세함을 잠시 접어 두었음이여
畎畝蹤跡少試世路之喧哤 밭이랑 종적을 속세의 시끄러움에 조금 시험해보았네
烟霄穩步五十載 안온한 50여년의 봉직 세월
(言+黨)論訏謨 바른 이론과 위대한 계책으로
著績乎四朝兮 네 조정에 쌓은 빛나는 업적이여
一向忠孝前頭竪願幢 한 결 같은 충효 마음, 선두에 깃발 세웠도다
秋風布帆趂蓴鱸 물러나 추풍에 배를 띄워 순채와 노어회를 즐기며
臥對明農歸去之舊圖兮 명농당 귀거래도의 옛 그림을 누워 감상하니
高風壯節落落無等雙 거룩한 고풍, 장절 다시 짝할 사람 있을까
伊我平生景高山 이 몸 평생 산같이 존경하여
飮分砂井菊潭之餘波兮 단사를 먹고 국담의 물 마시며
每從床下拜老龐 항상 자리 아래를 허락했네
聾巖臺下小閣明 농암대 아래 밝은 소각
童顔老仙棲眞于是間兮 동안의 학발 신선이 계신 곳
文華爽氣 청량산 상쾌한 기운과
淸洛秀色 낙동강 수려한 빛은
日夜拱揖乎雲窓 주야로 구름 창문으로 읍하고 있고
賀淵湖邊風半帆 하연호 주변에는 바람이 배를 띄우고
靈芝社裏酒一缸 영지정사에 술 한 항아리
歌赤壁舞琵琶 적벽을 노래하며 비파에 춤을 추고
唱罷欸乃山水綠 애내곡을 부르니 산수가 푸르른데
時見寶唾眞訣錯落鳴琳玒 때로 보타, 진결 같은 옥구슬같은 시의 울림 보았도다
誰得知 누가 알랴
朝爲堯舜臣 아침에 요순의 신하가 되고
暮作羲黃灾 저녁에 복희시대의 노인이 되어
不學懷寶終迷邦 보배를 품고 나라를 미궁으로 전락되지 않도록 하였음을!
嶠南山水文獻地 영남은 산수의 고장이며 문헌의 땅이라
玉筍瑤岑競秀而齋抽兮 옥순, 요잠같은 인물들이 다투어 빼어나고 일제히 솟아남이여
一頭盡向龍山降 다같이 용수산을 향하여 머리를 굽혔네
願公壽兮 원하노니 공의 춘추는
山不崩 산처럼 무너지지 않아
使我長年拜木公 우리들로 하여금 영원히 공을 배알함은
有如衆星夜夜環天杠 마치 뭇 별들이 밤마다 북극성을 둘러쌓고 있음과 같이 하소서
가정 신해년 1551년 가을 7월 그믐에 준량이 절하고 쓰다
황준량(1517-1563): 본관 평해平海. 자 중거仲擧, 호 금계錦溪.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 신동으로 불렸고, 문명(文名)이 자자하였다. 1540년 문과급제, 공조좌랑, 호조좌랑,병조좌랑, 경상도 감찰어사, 사헌부지평, 신녕현감, 단양군수, 성주목사 등을 역임했다.
해설: 위 추모시는 금계 황준량이 농암이 은거하던 용수산(현 안동시 도산면 운곡리 소재 용두산)을 구양수가 절찬한 중국의 명산 여산을 찬양하여 지은 천하 명시 '여산고'를 따라 지어 농암의 생일 선물로 올렸다. 금계의 농암에 대한 존경의 마음이 전편 시어속에 절절이 담겨있다. 1551년 7월 농암 생일에 축수 잔치에 참석하여 썼다.
용수산은 도산면(옛 예안현)의 진산으로 금계 당시 농암이 강학하던 '용산정사'와 '영은암'이 있었기 때문에 여산에 비교했다. '용수산'이라 함은 이 산 기슭에 고려 의왕이 지은 왕찰-용수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농암의 부모, 조부모를 비롯한 농암가문의 역대 조상들의 묘소가 산재해 있다.
아래 구양수의 '여산고' 시를 소개한다.
참고
구양수의 여산고 시
높고 높은 여산이여
廬山高
구양수歐陽修
廬山高哉幾千仞 여산은 높아라, 몇 천 길이나 될까
根盤幾百里 뿌리는 몇 백리나 서리어 있을까
截然屹立乎長江 장강에 우뚝 솟았구나
是爲揚瀾左里兮 이렇게하여 물결이는 좌리호가 되었구나
洪濤巨浪 넓은 파도와 큰 물결이
日夕相舂撞 밤낮으로 서로 방아찧듯 부딪히는구나
雲宵風止水鏡淨 구름 걷히고 바람 그치자 물은 거울처럼 맑고
泊舟登岸而遠望兮 배를 대고 언덕에 올라 멀리 바라봄이여
上摩靑蒼以晻靄 위로는 푸른 하늘을 어둑한 아지랑이가 만지고
下壓后土之鴻龐 아래로 땅의 큰 것을 내리 누르고 있구나
試往造乎其間兮 그 골짜기로 시험삼아 찾아감이여
攀緣石磴窺空谷 돌 비탈길을 부여잡고 빈 골짝을 살펴본다
千巖萬壑響松檜 바위와 골짝마다 소나무와 전나무에 바람 우는 소리
懸崖巨石飛流淙 매달린 언덕과 큰 바윙에는 날아흘러내리는 물 소리
水聲聒聒亂人耳 물소리는 요란하게 사람의 귀를 어리럽히고
六月飛雪灑石矼 유월에 날아 내리는 눈을 돌다리를 씻어내리는구나
仙翁釋子亦往往而逢兮 늙은 도사와 중들도 가끔 만나지만
吾嘗惡其學幻而言哤 나는 일찍이 그들이 환상적인 것을 배우고 난잡한 것을 말하는 것을 싫어하였다
但見丹霞翠壁遠近映樓閣 멀리 가까이 붉은 노을과 푸른 절벽이 누각에 비취는 것만 보이고
晨鐘暮鼓杳靄羅旙幢 새벽 종소리, 저녁 북소리 들리고 아득한 안개 속에 깃발이 늘어서있구나
幽花野草不知其名兮 깊숙한 곳의 꽃과 들풀은 그 이름도 알지 못하지만
風吹霧濕香澗谷 바람은 안개 자욱한 곳에 불어와 물 흐르는 골짜기를 향기롭게 한다
時有白鶴飛來雙 때때로 흰 학이 나타나 짝지어 날아오는구나
幽尋遠去不可極 그윽한 곳 찾아 멀리 떠나도 다함이 없으니
便欲絶世遺紛厖 이제 곧 세상 일 끊고 어지러운 잃어버리고 싶구나
羨君買田築室老其下 그대를 부러워하노니, 밭을 사 집을 지어 그 아래에서 늙어가고
揷秧盈疇兮釀酒盈缸 묘를 심어 논을 채우고 술을 담아 술독을 채우는구나
欲令浮嵐曖翠千萬狀 떠 다니는 푸른 산기운과 푸르름한 온갖 모양들을
坐臥常對乎軒窓 앉거나 눕거나 문과 창에서 항상 바라볼 수 있게 하려 한 것이리라
君懷磊砢有至寶 그대가 특출한 생각을 가지시어 지극한 보배를 갖게 되었으나
世俗不辨珉與玒 세상 사람들은 옥과 돌을 구별하지 못하는구나
策名爲吏二十載 관리가 된 지 이십년
靑衫白首困一邦 푸른 옷에 백발이 되어 나라 한 곳에서 곤궁하게 살고 있지만
寵榮聲利不可以苟屈兮 총애와 영광, 명성과 이익도 구차하게 하거나 굽히게 하지 못하는구나
自非靑雲白石有深趣 스스로 푸른 구름 흰 돌에 깊은 멋을 느끼지 않는다면
其意矹硉何由降 그 뜻의 비범함이 어디서 내려왔겠는가
丈夫壯節似君少 대장부의 장한 절개로 그대와 같은 사람은 적을 것이니
嗟我欲說安得巨筆如長杠 아! 내가 말하려해도 어찌 긴 깃발 같은 커다란 붓을 얻을 수 있으리오
구양수(歐陽脩, 1007년 ~ 1072년): 중국 송나라 인종 ~ 신종 때의 정치가ㆍ시인ㆍ문학자ㆍ역사학자이다. 자는 영숙永叔ㆍ취옹醉翁ㆍ육일거사六一居士 . 시호諡號는 문충文忠이다.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이다.
해설: '여산고'에 대해 구양수는 "아무도 이렇게 지을 수 없으나 오직 한 사람 이백은 가능하다"할 만큼 자부심을 가졌던 시이다. 이 시에 대해 고려시대의 대학자 익재 이재현의 평가가 있어 소개한다
"구양수가 자신을 자부하며 한 말이라 하여 전하는 것이 있으니, '나의 여산고廬山高는 지금 아무나 지을 수는 없고 오직 이백이라면 가능하다. 그러나 나의 명비후편明妣後篇은 이백도 못 지을 것이고 두보라면 지을 수 있을 것이다.그러나 전편은 두보도 못 지을 것인데 나는 지었다. 하지만 이는 뒤에 일을 꾸미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여산고의 음절이 이백의 것과 비슷하고 명비후편明妣後篇 이 두보의 것과 비슷한 까닭에 지어낸 말이다. 소순이 구양수에게 보낸 글에 '맹자나 한유의 글과 달리 구양수의 독특한 글' 이라고 한 것과 같이, 글은 모두 특징이 있어 서로 다르다. 시도 또한 그런 것이니, 이백과 두보에게 구양수의 시를 지으라면 반드시 다를 것이며, 또 구양수에게 이백과 두보의 시를 지으라면 마치 우맹이 손뼉 치고 담소하며 손숙오의 흉내를 내는 것과 같을 것이니, 이를 진짜 손숙오라고 하겠는가?"
-'낙옹패설櫟翁稗設' 후편, <익재집益齎集>
■농암문학의 현장-분강과 농암(사진 왼편 잘린 부분의 커다란 바위가 귀먹바위-농암, 가운데 코끼리바위, 우측 사자바위, 강 건너 자리바위)
“‘자리바위(簟石)’의 유상遊賞을 퇴계와 금계(錦溪 黃俊良)와 아들, 동생들이 함께 했다. 조그만 배를 타고 ‘귀먹바위(聾巖)’ 아래로부터 배 줄을 풀어 천천히 흘러가서, ‘사자바위(獅子石)’를 지나 ‘코키리바위(象巖)’에 이르러 배를 바위에 의지해 묶어 놓고, 주변을 두루 구경하고 나서 다함께 올라가서 만져보고 놀기를 오래하였다. 그러다가 이윽고 아래로 내려와 바로 자리바위에 이르렀다."
*
강각江閣(1544-현재)
-강과 달과 배와 술과 詩가 있는 풍경-
■사진: 안동호의 물이 빠진 뒤의 분천리 풍광과 도산전경
70만평에 이른다는 분천 들과 강 건너 저 멀리 도산서원, 청량산이 일직선으로 펼쳐저 있다. 분천리는 안동댐 당시 큰 와가瓦家 7가구, 60여 호에 이르는 큰 마을이었지만 지금 그 한집도 온전하게 보존되지 못했다. 한옥고가에 대한 개념이 없는 당시 집들은 그렇게 물속으로 사라졌다. 분천 들 끝자락 산 아래 농암종택, 분강서원, 애일당, 강각 등의 건물들이 우측으로 차례대로 있었다. 우측으로 분강이 굽이쳐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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